성주의 유래

성주의 명소

  성주 선석사

 성주교통도

 성주군 초전면

 초전면 자양리

 성주관련 링크

성산가야의 숨결이 살아있는 星州

   1. 성주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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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산가야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의 고장 성주는 기원전 5~6세기에 가야부족 연맹에서 성업국가로 발전하면서 성산가야 혹은 벽진가야로 불리우며  그 후 삼국시대에는 성산가야의 옛 땅으로 신라의 영토 본피현이 되고 고려시대에는 경상부로 가까이는 고령 칠곡 화원 하빈과 대구광역시 서구 달서구와 멀리는 금산 황간 옥천 영동등 1군 14현의 소급을 거느렸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성주목 대구부 성주군으로 개칭되었다.
193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10면 111리로 성주군의 면모를 갖추고 1970년 성주면이 성주읍으로 승격되면서 1읍 9면으로 구성되어 있고 대체로 원형 형태의 지형을 이루고 있다 전체면적 616.28K
2  현재인구 약 52,000여명에 이르는 성주는 성산가야의 포근한 숨결속에서 활기차고 풍요로운 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古 代]
기원전 1100년 ~ 서기562년 : 변진부족국(성읍국) - 벽진(성산)가야국
가야연맹의 한 나라로 이곳에서 발전하였던 성산가야는 후에 신라에 복속되어  본피현이 되었다. 757년(경덕왕 16) 본피현은 신안현으로 개칭되어 성산군의 속현이  되었으며 뒤에 벽진군으로 개칭되었다.

   [高 麗]
940년(태조23) 성주는 경산부로 승격되고, 신안현, 적산 현, 수동현, 유산현을 통폐합하여 지배하였다. 그후 1295 년(충렬왕 21) 흥안도호부로 되었다가 1308년(충렬왕 34) 성주목으로 승격하였으며, 1310년(충선왕 2)에 다시 경산 부로 강등되었다.
[朝 鮮]- 건국 이후에도 경산부로 지속되었다가 1413년(태종왕 13) 성주목으로 승격되면서 가리현, 팔거현, 화원현을 속 현으로 거느리게 되었다. 1614년(광해군7년) 고령현에  합속 되었다가 1616(광해군9) 신안현으로 개칭되었으며, 인 조 반정 뒤 다시 목으로 승격되었다. 그 뒤 몇차례의 변동이 있었으나, 1745년(영조21) 다시 목으로 환원되었으며, 그동안 팔리현은 칠곡도호부에, 화원현은 대구부에 각각 이속됨으로써 가리현만  거느리게 되었다.

   [近 代]
1895년 성주군으로 되어 대구부에 속하였으며, 1965년에는 인곡, 덕곡, 노다, 다산 등 4개면이 고령군으로, 노곡 면이 현풍군으로, 증산면이 지례군에 각각 편입되었기 때문에 관할 구역이 자연히 축소되었다.

현재 1읍, 9면 111개리로 되어 있음. 

   [명칭유래]
성주는 가야시대에는 성산가야에 속한 고을로서 고려 충열왕때 성산가야의 "성"자와 고을의 "주"자를 따서 성주라 칭하게 되었다 함.

   [民 俗]
성주의 대표적인 민속놀이는 줄달리기, 답교놀이, 달불놀 이, 지신밝기, 고수, 장치기놀이 등이 행해진다. 줄다리기는 성주읍 예산리와 백전리 사이에 정월 보름에 전주민이 참여하여 진편이 이긴 편의 농사일을 해주던 것이 연원 이 되었으며, 처음에 소규모이던 것이 점차 읍전체의 행 사로 확산되었다. 줄다리기에 사용한 줄은 썰어서 논에 거름으로 쓰면 풍년이 든다고 전한다. 이밖에 지신밝기는 정월 보름날 마을이 청장년들이 모여 사대부, 팔대부 포수로 역을 나누어 맡아 농악을 하는 가운데  춤을 추고 놀면서 지신을 위로하는 놀이이다.

2. 성주의 명소

성주의 아름다운 명소

성주군은 가야산을 비롯하여 금수.가천.수륜면에 이어진 대가천 계곡 가천면 포천계곡 성주댐등 아름다운 명소가 많고 대구근교에 위치해 등산객 및 여름철 피서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성주 선석사

선석사

<1995년 선석사, 돌담이 아름다운 소박한 절이었다> 

  선석사는 서진산(棲鎭山, 일명 禪石山)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성주에서는 가장 큰 절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세종대왕자태실이 있는 태봉과 동북방향으로 200m의 거리를 두고 마주보고 있다. 선석사로 오르는 길가에는 작은 계곡을 따라 아름드리 소나무가 길게 늘어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당시 선석사는 돌담으로 둘러싸인 고향집 같이 정겨운 절이었다. 돌담이 속세와 부처의 세계를 가르고 있으니 중생들이 드나들기도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일주문(一柱門)인듯 하여 들어서니 사천왕(四天王)이 벽화로 그려져 있었다. 일주문인지 천왕문(天王門)인지, 작고 아담한 절이라 한꺼번에 두 문을 지나도록 해 놓은 것 같아 더욱 정감이 가는 절이었다.

 

 

<1995년 당시 선석사 해우소>   

 

<2008년, 지금의 선석사 해우소>

   또 하나, 나로 하여금 그 모습에 푹 빠져들게 만들었던 곳이 있었다. 해우소(解憂所)였다. '근심을 푸는 곳', 이른바 화장실이다. 해우소는 모진 풍파를 겪은 듯 힘들고 지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낡은 기와지붕위의 잡초들, 군데군데 허물어진 황토벽, 나무로 창살만 만들어 놓은 통풍문, 곧 쓰러질 것 같은 그 모습에서 나는 오래됨과 낡음의 미(美)를 느꼈다.  

   십 수년 전 선석사는 그렇게 나에게 돌담과 해우소, 그 정겨운 두가지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천년고찰 선석사

 

<2008년 가을의 선석사> 

 

   선석사는 해동(海東) 화엄종의 창시자인 신라시대 의상(義湘, 625-702)대사가 692년(신라 효소왕 1년) 전국에 열 개의 화엄사찰을 세울 때 그 중의 하나로 지은 절이다. 당시는 신광사(神光寺)라 이름하였고 지금의 위치가 아닌 서쪽 편에 있었다고 한다.

   고려 말에는 나옹(懶翁, 1320-1376)대사가 1361년(고려 공민왕 10년)에 신광사 주지가 되어 절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나옹대사가 새로 절터를 닦다가 큰 돌이 나왔는데 지금도 그 바위는 대웅전 앞에 머리부분만 내밀고 있다. 터를 닦다가 바위가 나왔다 하여 ‘터닦을 선’자를 넣어 절 이름을 선석사(禪石寺)로 고쳤다. 나옹대사의 선시를 떠올리며 선석사가 바로 물처럼 바람처럼 살아 갈 곳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怒而無惜兮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가 가라하네

   그 후 임진왜란때는 절이 전소되어 1684년(숙종10년) 은현, 혜묵, 나현대사들이 다시 세웠고 1725년(영조1년) 서쪽의 옛터로 옮겼다. 1804년(순조 4년) 동파(桐坡), 서윤대사(瑞允大師)가 지금의 자리로 다시 이전하였고 당시에는 대웅전, 명부전, 칠성각, 산왕각, 어필각, 정법료 등이 있었다고 한다.

태실수호도량

   2008년 가을, 여러 번의 답사를 왔었지만 사진을 촬영하기 위하여 나는 선석사를 다시 찾았다. 그동안 선석사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돌담이 축대로 변했고 옛 해우소도 사라지고 새로 지어진 깔끔한 해우소가 자리했다. 토속적이면서도 소박했던 옛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일주문을 들어서니 왼편에서는 태장전(胎藏殿)을 지을 터를 닦고 있었다. 요사채 앞에 개 한 마리가 쪼그리고 앉아 고개만 돌리고 바라본다. 손님이 왔는데도 별 반응이 없다. 이놈도 부처가 된 것인가? 툇마루에 앉아 한담을 나누시던 스님 두 분과 눈이 마주쳤다. 합장을 하자 스님은 차 한 잔 나누자고 권하셨다. 혜만 주지스님이었다.

   방에는 아주 큰 함이 있었다. 궁금해서 물으니, 혜만 스님은 1702년에 제작된 지방문화재인 영산회상괘불을 보수하여 지금 보관중이라고 했다. 태장전 완공식 때 공개를 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야기는 태장전 건립으로 옮겨 갔다.

 

<영산회상괘불을 보관하는 함>

   선석사(禪石寺)는 신라천년 고찰이지만 조선 세종 때 세종대왕자태실이 들어서면서 태실을 보호하는 절로 지정되기도 했다. 태실수호도량인 것이다. 태는 생명의 근원이다. 생명은 청정무구하여 무한한 가능성을 간직한 씨앗이므로 그 가능성이 무한하다. 그래서 그 소중한 자녀의 태를 이곳에 보관하고 기도하기 위하여 태장전을 짓는다고 했다.

 

<태장전을 짓기 위하여 터를 닦고 있다>

선석사를 거닐며

   아직도 선석사는 소박했다. 대웅전(大雄殿)과 명부전(冥府殿), 칠성각(七星閣)이 높이를 달리하면서 나란히 서 있고, 대웅전 뒤의 작고 아담한 산신각(山神閣), 마당 한쪽에 서있는 일주문과 그 옆에 새로 지은 산뜻한 범종각이 서 있다. 건물들이 아기자기 모여서 선석산 기슭의 아름다운 풍경들과 어우러져 있는 것이다.

<선석사 산문, 속세와 부처의 세상, 그 경계>

  일주문은 사찰로 들어가는 산문 중 첫 번째의 문으로서 대부분 일직선의 기둥위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그 기둥은 일심(一心)을 상징하는데, 청정한 도량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말끔히 씻고 일심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선석사의 일주문은 기둥이 아니라 벽으로 되어 있으며 사천왕을 벽화로 그려 놓았다. 아주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사천왕은 사찰로 들어가는 산문 중 두 번째 문, 사천왕문(四天王門)에 모신다. 사천왕은 본래 수미산 중턱에 있는 사왕천에 거주하면서 도리천의 우두머리인 제석(帝釋)을 섬기며 불법과 불법에 귀의하는 자들을 보호하는 주신(主神)이다.

   선석사의 사천왕은 무섭게 생긴 조각상이 아니라 벽화로 그려져 있고 화려하게 치장한 장군의 모습을 하고 있다. 사천왕은 동쪽을 수호하는 왕은 지국천왕(持國天王), 서쪽을 지키는 광목천왕(廣目天王)남쪽을 지키는 증장천왕(增長天王),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을 말한다.

   지국천왕은 중생을 두루 살피고 국토를 지킨다고 하며, 오른손에 칼을 들고 왼손에 주먹을 쥐거나 보석을 손바닥위에 올려놓은 형상을 하고 있다. 광목천왕은 자신의 덕망으로 만물을 소생시킨다고 하며, 오른손에는 용을 움켜쥐고 있고 왼손에는 여의주를 쥐고 있다. 증장천왕은 웅변으로써 온갖 나쁜 말들을 물리치기 때문에 다른 천왕들과 달리 입을 벌린 형상을 하고 있다. 오른손에는 삼지창(三枝槍)을 들고 있고 왼손엔 보탑(寶塔)을 받들고 있다. 다문천왕은 도량을 지키면서 항상 설법을 듣는다고 하여 다문(多聞)이라 하며. 비파를 타는 형상을 하고 있다.

   사천왕을 살펴보며 부처의 세상으로 들어서니 범종(梵鐘)을 걸어두는 곳, 범종각이 화려한 모습으로 있다. 새로 지은 건물이라 단청이 화려했다. 범종각에는 큰 절에서나 볼 수 있는 범종과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

雲板)을 함께 두고 있었다. 

   범종의 소리는 부처의 음성이라고 하여 범종은 인간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다. 부처의 말씀을 글로 표현하면 불경이 되고 부처의 모습을 형상화하면 불상이 되고 부처의 깨달음을 그림으로 나타내면 만다라가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처의 음성은 범종의 소리하고 한 것이다.

 

   법고는 법을 전하는 북으로 북소리가 널리 울려 퍼지듯 불법을 중생들에게 널리 전하여 번뇌를 끊고 해탈을 이루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법고는 땅위에 사는 모든 축생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다.

 

   목어는 나무를 긴 물고기 모양으로 빗고 배 부분을 파낸 법구로, 물고기가 밤이나 낮이나 눈을 감지 않기 때문에 잠을 자지 말고 수행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물속에 사는 물고기를 제도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운판은 청동이나 철로 만든 뭉게구름모양의 판위에 보살상이나 구름과 달을 새긴 법구로, 원래 사찰에서 부엌 근처에 매달아놓고 식사시간을 알리기 위해 쳤다고도 한다. 날짐승과 허공을 떠도는 영혼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인간 뿐 만아니라 축생과 물고기와 날짐승까지 구제해야 한다는 부처의 무한한 자비를 범종각에서 느낄 수 있다. 발걸음을 돌려 대웅전을 바라보았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봉안한 사찰의 중심건물이다. 대웅전 안에는 불단 위에 불상을 안치하는데, 그 불단을 수미단이라 한다. 이는 부처가 수미산 꼭대기에 앉아 자비와 지혜의 광명을 발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대웅전은 정면 3칸의 맛배지붕의 다포집으로 1985년, 문화재 자료 제113호로 지정되었다. 

   대웅전 옆에는 명부전(冥府殿)이 있었다. 명부전은 저승세계를 상징하는 전각이다. 지장보살을 주존으로 하여 시왕(十王)을 봉안하기 때문에 지장전(地藏殿),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한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불의 입멸 후 미륵보살이 성불할 때까지, 즉 부처가 없는 시대에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다. 그는 모든 중생이 구원을 받을 때까지 자신은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운 보살이다. 그리고 시왕은 저승에 있는 열 명의 심판관이다. 명부의 시왕중에서도 우두머리라고 하는 염라대왕의 심판을 받는 날이 죽은 지 49일 되는 날이라고 하여 사람들은 49재를 지내는 것은 중요하게 생각한다.

   명부전과 나란히 칠성각이 있다. 칠성각은 수명을 길게 한다는 칠성신을 봉안한 전각이다. 칠성은 중국의 도교와 관련 있는데, 우리나라에 전파되어 불교에 흡수되면서 불교적으로 변용되었다. 칠성신은 자손에게 복을 주고, 장애와 재난을 없애주며, 수명을 연장시켜준다고 한다.

<산신각>

   대웅전 뒤에는 산신각이 있다. 산신은 원래 불교와 관계없는 민족 고유의 토착신이었으나 불교에 흡수되어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되었다. 백발의 수염에 긴 눈썹을 날리며 손에 부채나 불로초를 들고 있는 산신상이나 이를 그린 탱화를 봉안한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전각이다.

   다른 절과 다르게 선석사는 대웅전 외에 명부전, 칠성각, 산신각, 태장전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보면 불교와 우리나라의 토속적인 전통이 잘 결합된 사찰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선석사는 부처가 항상 중생들의 삶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절이다..

사찰의 구성

  사찰의 구성을 흔히 칠당가람(七堂伽籃)이라고 하는데, 전각(殿閣) 강당(講堂) 승당(僧堂) 주고(廚庫) 욕실(浴室) 동사(東司) 산문(山門)을 말한다. 전각(殿閣)은 불보살 및 신중을 봉안하는 사찰의 중심 건물이다. 대웅전에, 석가모니불, 대적광전에는 비로자나불, 극락전에는 아미타불, 미륵전에는 미륵불, 약사전에는 약사여래를 봉안한다.

   관세음보살을 주존(主尊)으로 모실 때는 원통전(圓通殿)이라 하고, 부속건물에 모실 때는 관음전이라 한다. 응진전(應眞殿)과 나한전에는 나한을, 명부전에는 지장보살과 지옥의 심판관인 시왕, 칠성각에는 칠성신, 산신각에는 산신, 독성각에는 말세의 중생에게 복을 베푼다는 나반존자(那畔尊者)를 모신다.

   강당(講堂)은 설법이나 법요식을 행하는 곳이고, 승당(僧堂)은 승려들이 참선하는 곳이며, 주고(廚庫)는 공양을 마련하는 부엌과 창고로 사찰의 살림을 꾸리는 곳이다. 욕실(浴室)은 목욕을 하는 곳이며 동사(東司)는 화장실이다. 산문(山門)은 사찰의 입구에 있는 문으로서 보통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의 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이 밖에도 불경을 보관하는 장경각(藏經閣), 범종을 걸어두는 범종각, 역대 조사들을 모시는 조사당(祖師堂)이 있다.   

세종대왕왕자태실

   월항면 인촌리 선석산 아래의 태봉(胎峰) 정상에 있는 세종대왕자태실에는 세종대왕의 18왕자 중 큰 아들인 문종(文宗)을 제외한 17왕자의 태실과 원손(元孫)인 단종(端宗)의 태실 등 모두 19기가 있으며, 이곳은 세종 20년(1438)에서 24년(1442) 사이에 조성되었다.
   세종대왕자태실은 우리나라에서 왕자태실이 완전하게 군집을 이룬 유일한 형태로서 사적444호로 지정되어 있다.

 

선석사

   선석사는 세종대왕왕자태실에서 200m정도 떨어져 있는 사찰로 태실을 수호하는 사찰이었다고 한다. 

   신라 효소왕 원년 (692년)에 의상대사가 현 사찰 서편에 창건하여 신광사라 하던 것을 고려 공민왕 10년(1361년) 나옹대사가 옮겨지었다고 하는데, 절을 옴ㄹ길때 터를 닦다가 바위가 나와 선석사라고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출처] 경북 성주 세종대왕왕자태실과 선석사|작성자 수프로

 

        성주  한개 마을

  한개마을 토담

  극와고택앞 토담

  북비고택 대문채

  사랑채와 안채를 은밀히 오고 갈수 있도록 구획한 담장과 문

  장독대 담

 교리댁 입구

  한주종택 앞 돌담과 토담 고샅길

  한주종택 안채 ↔ 사랑채  ↔ 한주정사로 이어지는 사잇 토담과 문

  한주정 누마루 ↔ 사당채 사랑채 사이 토담

  돌담장길

 

성주 한개마을  담장   등록문화재261호)    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한개마을은 조선 세종대에 진주목사를 역임한 이우(李友)가 처음 입향(入鄕)하여 개척하였으며,
성산이씨 집성마을이다. 이 마을은 한때 120여 호에 이르렀으나, 현재는 66호가 남아있는데,
17세기부터 한 마을에서 대과 9인, 소과 24인 등 과거합격자를 많이 배출하였을 뿐 아니라,
응와 이원조, 한주 이진상 등 인물을 많이 배출하였다.

이 마을의 담장은 대부분 토석담장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극히 부분적으로 돌담장이 있다.
부분적으로 담장이 개보수된 것들도 있으나 담장의 형태, 규모 및 골목길 동선은

남부 지역의 색에 맞게 전통가옥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보존되어 있다.   

 

 

해동의 명산 가야산

백두 대간 남방한계선의 가지로서 산새가 웅장하고 수려하여 예로부터 해동의 명산으로 손꼽히며 기암괴석으로 형성된 서장대와 만물상 동성봉은  기이하게 형성된 수목과 어우러져 4계절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가야산은 산새를 대표하는 정상부의 거대한 바위 때문에 위압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실제는 부처의 미소처럼 부드럽고 넉넉한 분위기의 산새를 지니고 있다. 또한 가야산 전체면적에 61%가 성주군에 속해 있다.
가족과 함께 찾는 등산코스는 물론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는 더없이 좋은 자연의 산교육장이 되고 있다.

     가야산 칠불봉

가야산 정상이 경남 합천군에 위치한 우두봉(1430m)으로 알려졌으나  가야산 최고봉이 성주군에 위치한 칠불봉( 1,433M)으로 밝혀지면서 가야산 정상이 칠불봉이 됨.

 

 

    무 흘 구 곡

대가천의 맑은물과 주변계곡의 기암괴석 수목이 절경을 이루고 있는 무흘구곡 조선시대 성주가 낳은 대유학자인 한강 정구선생이 중국 남송시대 주희의 무희곡을 본받아 칠언절구의 시를 지어 노래한 곳이다
제1곡은봉비암  제2곡한강대  제3곡배바위  제4곡선바위  제5곡사인암  6~9곡은 김천시 증산면에 있음.
 

    봉 비 암

무흘구곡의 제1곡으로 수륜면 신정리의 회현서원 옆에 소위 양정소가 있는 바위언덕을 말하는데 깍아지른 듯한 높다란 바위의 절벽에 잡목과 이끼가 조화를 이루고 이름 그대로 아름다운 새들이 날아드는 곳이다.
하루쯤 찾아가 가족들과 즐기는 유원지로 좋으며 물놀이를 할 때에는 위험성이 있는 곳으로 다소 주의가 요망되는 곳이다.

    한 강 대

무흘구곡의 제2곡으로 수륜면 수성리 갓말 마을 서쪽에 있는 갓말소의 절벽을 말하는데 대가천의 맑은물이 항상 흘러 내려 여름철 주말 휴식처로서 안성마춤이다.

 

     배 바 위
무흘구곡의 제3곡으로 금수면 무학리에 위치하며 배바위는 일명 무학정이라고도 하며 대가천을 오르내리는 배들을 메어 두는 바위라 하여 붙여지고 건너편 마을 이름도 배바우로 부르고 있다.
 

     선 바 위
무흘구곡의 제4곡으로 금수면 영천리 대가천변에 위치한 선바위는 일명 소학봉이라고도 하여 100자가 넘는 바위가 90도로 바로 서 있는 그 밑에는 항상 깨끗하고 여름철에도 시원한 물이 흘러 대구근교 피서인파들이 많이 찾는곳이다.

    사 인 암

무흘구곡 제5곡으로 금수면 영천리 은적의 사인암은 대가천 맑은 물가에 솟은 절벽으로 여름철 내내 피서인파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곳이다.

 

 

    포 천 계 곡

포천계곡은 가천면 신계리용사리 법전리로 이어지는 계곡으로 기암절벽 사이로  사시사철 맑고 깨끗한 물이 항시 흘러내리며 특히 여름철에는 피서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포천계곡의 만귀폭포사진]

 

 

    가야산 생수정

수륜면 백운리 입구의 가야산 가는 길 중턱에 위치한 가야산 생수정은 물맛 좋기로 유명하고 도은암골에 둥근 모양을 하고 있어 일명"둥굴샘"이라고 불러 오던 것을 1989년 8월에 새로이 복원한 신천으로 물이 좋아 오래 보관하여도 이끼가 끼지 않는 특성이 있다.

 

 

가야산 집단시설지구

수륜면 백운리 가야산 집단시설지구에는 가야산국민호텔을 비롯한 숙박시설들과 음식점 가야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 주차장등이 있으며 바로 옆에 성주군민화합공원도 조성되어 있다.

 

 

    용 기 계 곡

가야산 매표소 바로 위의 계곡으로 맑고 깨끗한 물이 항상 흘러내리며 여름철에도 물이 차가워 발을 담그면 발이 시러울 정도이며 주위의 바위들이 깨끗하고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

 

 

    군민화합공원

전통과 문화의 성주 새천년의 주역이라는 테마로 조성된 군민화합공원 이곳은 성주군민의 새천년의 꿈이 담겨있는 곳이다
군민화합 조형물앞에 설치된 수장고에는 타임캡술이 매장되어 화합공원설치 취지문과 군내각종기록을 도자기판 가로 50센티미터 세로 30센티미터 여덟장에 성주군지 통계연보와 각종기록을 CD판에 담아 보관하고 있다. 또한 성주의 농경문화를 알 수 있는  각종 기록등 총 20종 56점의 기록을 묻어 500년후인 서기 2500년 1월 1일 개봉하기로 했는데 세월이 흘러 500년후에도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는 성산가야인의 역사의 향기는 영원할것이다.

 

 

금수 문화예술 마을

성주군 금수면 광산리에 위치한 금수문화예술마을은  폐교된 금수초등학교 교정에 2000년 봄에 세워진 예술 마을로 회화, 농악, 연극, 도자기 등 예술 활동을 하는 예술인들이 모여 창작 활동을 하고 전시회도 가지며 학생들에게 현장 체험의 장소로 제공해 주는 곳이다

 

3.성주교통도

성주교통도

* 성주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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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용차 이용시 교통정보

      경부고속도로 → 왜관인터체인지 → 성주 (약 30분 소요)

      국도 33호선

      김천 → 초전 → 성주 (약 30분 소요)

      지방도 905호선

      고령 → 수륜 → 성주 (약 40분 소요)

      국도 33호선

      대구 → 동곡 → 성주 (약 1시간 소요)

      국도 30호선

      대구 → 왜관 → 성주 (약 1시간 소요)

      국도 33호선

      광주 → 88올림픽고속도로 → 중부내륙고속도로 → 성주 (약3시간 소요)

      국도 33호선

      부산 → 남해고속도로 → 중부내륙고속도로 → 성주 (약2시간 소요)

      국도 33호선

      • 고속도로 이용시 교통정보

        서울 → 성주

        270km 약2시간 50분 소요

        김천 → 성주

        28km 약 18분 소요

        현풍 → 성주

        33km 약 20분 소요

      • 버스 이용시 교통정보

        북부정류소 (대구) → 왜관 → 성주

        약 30분 간격

        김천버스정류소 → 초전 → 성주

        약 1시간 30분 간격

        고령버스정류소 → 수륜 → 성주

        약 1시간 간격

      • 고속버스 이용시 교통정보

        서울 (남부고속버스터미널) → 김천 → 성주 → 고령 → 합천

        1일 5회

        광주 (광주터미널) → 대구 → 성주

         

        부산 (동부시외버스터미널) → 대구 → 성주

         

      • 기차 이용시 교통정보

        경부선 김천역, 왜관역, 대구역에서 하차 성주행 버스 이용

      • 비행기 이용시 교통정보

        대구공항 → 대구북부정류소 → 성주

        약 1시간 40분소요

      • 지하철 이용시 교통정보

        문양역(2호선 종착역) → 버스이용(250번)
        ※ 문양역 출발 250번 버스 1일 2회 운항(07:35, 08:05)

        성주(약20분소요)

     
    4.성주군 초전면

    요약
    경북 성주군 북부에 있는 면.

    위치 : 경북 성주군 북부
    인구 : 6,227(1999)
    면적 : 66.74㎢
    주요문화재 : 추원당, 송회근묘, 송규선묘, 송준필묘, 백세각

    면적 66.74km2. 인구 6,227(1999). 9개리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은 월항면(月恒面), 서쪽은 벽진면(碧珍面), 남쪽은 성주읍,

    북쪽은 김천시 농소면(農所面) ·남면(南面)과 접한다.

    면의 동부에는 금오산(金烏山) 줄기인 부상고개에서 흘러내린 낙동강의 지류인 백천(白川)이 남류하면서 유역에 비교적 넓

    은 평야를 펼친다. 주곡 이외에 참외 ·수박 ·사과 ·복숭아 ·포도 등이 많이 생산되고, 잎담배 ·참깨 등의 특용작물과 농가부업

    으로 양잠업이 활발하다. 성주읍과 김천을 잇는 길목에 해당하여 교통은 편리하다.

    【문화재】 추원당(追遠堂), 송회근묘(宋晦根墓), 송규선묘(宋圭善基), 송준필묘(宋浚弼墓), 백세각(百世閣) 등이 있다.

    초전면

       자 양 리

       星山(별미)에서 동남으로 뻗은 산맥이 초전과 벽진의 면계를 이루면서 그 중간에 紫山이

    솟아 있는데 북쪽의 높은 봉을 큰 자산, 남쪽의 조금 낮은 산을 작은 자산이라 한다. 두 봉

    우리를 중간으로 해서 동쪽으로 뻗은 산자락에 星州李氏 집성촌 4개 마을을 今丹이라 하며

    작은 자산 끝에서 동쪽을 향해 자리잡은 마을이 義城金氏 집성촌으로 黔丹(일명 內洞)이며

    큰 자산을 서편에 두고 터를 잡은 새박골밑으로 모퉁이를 돌아 新豊이 동남쪽을 향해 자리

    잡고 있다. 최신에 현대식 건물 5동이 신풍입구에 세워지면서 새마을을 이룬것까지 8개 자

    연부락을 합쳐 자양리라고 부른다.

    초전면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黔丹은 신라말기에 마을을 이루었으며 黔丹寺 아래에 위치해

    있다고하여 검단리로 불리어져 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초전면 자양동이 되었고

    1952년 행정동인 자양 1, 2동으로 분동되었다.

    1989년 5월 조례 1076호로 동이 리로 개정되면서 현재의 자양리가 되었다. 통칭 黔丹里는

    신라말기에 생긴 마을로써 성주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자산 자락을 깔고 자리잡고

    있으며 자산은 성주의 정기가 서린 靈山으로 星山, 月山, 鳳陽山, 梅績山과 함께 성주문화의

    뿌리로 빛나는 고대 碧珍伽倻의 城邑國 형성에 필수 요건이었다. 지리 풍수상으로 작은 자

    산 정상에는 천하 명당이 있어, 지금도 사람이 밟으면 웅장한 소리가 날뿐 아니라 이곳에

    묘를 쓰면 성주가 망한다고하여 아무도 무덤을 쓸 수가 없는 곳이다.

    최근까지도 가뭄이 극심할 때면 성주군 유지들이 生亥을 가지고 올라가 이곳에서 기우제를

    올렸는데 어찌나 영험했던지 제관들이 기우제를 지내고 산을 내려오는 도중에 비가 와서 옷

    을 흠뻑 적시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신라말기 작은 자산 중턱에는 검단사란 절이 있었고

    검단사가 있었던 곳을 부처돌 꼭대기라고 불렀는데 지금도 절터의 흔적으로 돌축대가 남아

    있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당시 검단사에는 빈대가 하도 많아 절을 헐어 버렸다

    고 한다. 자산은 옛부터 지리 풍수가들이 빼어난 산세에 감탄을 아끼지 않았던 명산으로 지

    금도 최치원선생이 약을 찣었다는 돌호박이 정상을 비켜 남아있고 큰 자산 동쪽 능선을 따

    라 내려오면 가마바위가 옛날처럼 그대로 서있다. 세시풍속으로 정월 대보름이면 청춘 남녀

    들이 큰 자산 작은 자산 두 정상에서 달집을 태우며 꽹과리와 춤으로 풍년을 기원하며 나누

    어 가지기도 했다.

    〈윗 금 단〉

    星州李氏 집성촌으로 금단 4개 마을 중 맨 윗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윗금단이라 부른다.

    지금은 번창했던 옛날의 빈집터가 더 많은 마을이다.

    〈중 촌(中村)〉

    상하 금단 중간에 있다하여 중촌이라 부른다.

    〈아랫금단〉

    윗금단 아래에 있다하여 아랫금단이라 하며 성주이씨 집성촌이다.

    〈선틀배기〉

    금단 끝에 있는 마을로써 성주이씨, 고성이씨, 현풍곽씨, 의성김씨 등이 새로운 마을을 이루

    고 있다.

    〈新   豊〉

    자산 동북 계곡가에 자리해서 동남으로 향해 터잡은 마을이다. 조선 광해군 8년(1616)에 宋

    時恕이란 선비가 입향하여 자산의 지세중 가장 온난하고 물이 풍족하여 풍년이 드는 마을이

    라 하여 신풍이라 칭하였다 한다.

    〈새벽골[曉洞]〉

    자산을 서편에 두고 신풍을 동쪽에 가까이 한 산촌이다. 1620년경 송응준이 새벽에 마을 이

    름을 지었다하여 효동 또는 새벽골이라고 부른다고 하고 새벽 하늘의 자연을 비유해서 조용

    한 마을이라는 뜻으로 효동이라 했다고 한다. 성주이씨 집성마을로 약 20호가 있다.

    〈黔 丹(內洞)〉

    신라말기에 생긴 마을로써 1560년경 義城金氏 金宇英(號 晦山)이란 선비가 현재의 대가면

    沙月에서 이거하여 의성김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