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독 충렬공(9세 휘 여송)

문경공 형재(휘 직)--대표적인시 (가마귀 검다 하고)

선조님이 남기신 글

歌手 白年雪의 노래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는 성주이씨 선조님 관련자료

일제 이항 선조님을 배향한 남고서원(정읍시청 출처)

문열공 고려사열전

성주 또한 영남의 인재향

도은선생 문집 (陶隱先生文集) 寶物제1465號)

이직(李稷:1362~1431)-동활자를 만든 조선최초 이조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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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 제독 충렬공(9세 휘 여송)

  • 이여송
    ▷청장관전서 제53권 이목구심서6
    왕이상집(王貽上集)에 병부시랑(兵部侍郞) 이휘조(李輝祖)의 신도비(神道碑)를 실었는데 그 내용에
    "철령이씨(鐵嶺李氏)는 영원백(寧遠伯) 성량(成樑) 때부터 벌열(閥閱)로 명나라에서 드날렸고 본조
    (청나라)에 와서는 그 집안이 더욱 번영하여 유악( 幄)에 참여하고 나가면 장수가 되었다. 그 선대가 조선에서 나왔으니, 양평(襄平)에 옮겨와 사는 것이 영(英)에서 비롯되었으며, 영은 군공으로 철령위도지휘사(鐵嶺衛都指揮使)가 되었는데, 아들은 문빈(文彬)이다. 문빈이 아들 다섯이 있었는데, 맏아들은 춘미(春美)니 춘미의 아들 경(涇)이 영원백을 낳았다. 둘째아들은 춘무(春茂)니, 춘무의 아들은 윤(潤)이고 윤의 아들은 성공(成功)이다. 성공이 세 아들이 있었는데 맏은 여연(如挻)으로 태원부(太原府)를 맡았다. 셋째는 여재(如梓)인데 여재의 아들 항충(恒忠)은 부도통(副都統)을 지내고 1등 아달합합번(阿達哈哈番)을 세습했다. 세 아들이 있었는데 맏이 휘조(輝祖)다." 했다. 그 종형 응조(응祖)도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냈다. 휘조의 세 아들 곤( )·굉(굉)·개( )도 모두 벼슬했다. 항충이 청나라에 항복할 때에 영원의 파계는 나라 일에 죽어서 홀로 쇠미했다. 여송(如松)의 후예로서 우리 나라에 유락(流落)한 자가 능히 이것을 알까? 여연의 아들 합합번 사충(思忠)의 묘지(墓誌)는 왕경봉(王竟峯)이 지었다.
     
  • 연려실기술 제16권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권율의 행주 승첩(幸州勝捷) 정담(鄭湛)의 웅령전사(熊嶺戰死)붙임. 권율(權慄)ㆍ황진(黃進)의 이티[梨峙]승첩 붙임.

     
  • 그때 이여송이 개성에 주둔하였고, 선봉(先鋒) 사대수(査大受)는 행주 승첩의 기별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싸움한 곳을 시찰하고 또 수일 후에는 권율을 청하여 서로 만나보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권장군의 진은 다른 군사들과는 유별나게 다르다. 외국에 이러한 참다운 장수가 있었구나.” 하고 군사를 임진(臨津)으로 이동시켜 이빈(李?)과 합력하여 파주산성(坡州山城)을 지키기로 하였다. 승첩의 보고가 행재소에 올라가자 권율에게는 자헌대부(資憲大夫), 조경에게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중 처영에게는 절충장군(折衝將軍)을 가자(加資)하고 모든 장사(將士)에게 상과 벼슬을 주었는데 등차(等差)가 있었다.

     
  •  연려실기술 제17권
  • 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
    양호가 탄핵당하여 가니, 우리가 사신을 보내어 억울함을 변명하여 주다
    무술년 1월에 양호가 바야흐로 재차 거사하기를 도모하는데 병부 주사 정응태(丁應泰)형개의 참모관 가 경리 양호ㆍ제독 마귀ㆍ총병 이여매(李如梅)의 도산 싸움을 탄핵하여 아뢰었다. 처음에 유격 진인(陳寅)ㆍ주승(周陞)이 3에게 죄를 얻어서 마음속으로 원망하고 있더니 응태에게 참소하기를, “도산 싸움에서 양식과 기계를 무수히 버렸고 명병의 죽은 자가 매우 많았는데도 숨기고 알리지 않았으며, 양식과 은을 횡령하고 나누어 주지 않아서 각 진의 군사와 말이 여러 달 동안 양식이 다 떨어졌으며 청정과 강화하였고, 공의 등급을 논하여 정하는 것도 공평하지 않았다.”고 하니, 응태가 드디어, 양호가 임금을 속이고 일을 그르친 20여 죄목과 마귀와 여매는 탐욕스럽고 교활하여 싸움에 패하였으며 난을 조성하고 임금을 속였다는 등의 죄목과 아울러 각로(閣老)장위(張位)가 아들을 두호하여 윗사람을 속였다는 등의 일을 아뢰었다. 《조야첨재》
    진 이후로 송응창은 탄핵되어 고향에 돌아갔으며, 이여송(李如松)은 공을 보고함이 너무 지나쳤으므로 탄핵되어 처분을 기다렸다. 유황상(劉黃裳)과 원황(袁黃)은 모두 직책이 갈렸으며, 정유년에는 양호가 탄핵되어 돌아갔고, 형개ㆍ마귀ㆍ유정이 모두 정응태의 탄핵을 받았고, 정응태도 이 일로 강직되었으며, 만세덕(萬世德)도 안신(按臣)의 탄핵으로 녹봉이 정지되었으니 매우 괴이한 일이다. 《지소록》

    연려실기술 제17권
    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

    석성과 심유경의 하옥
  • 황제는 남원에서의 패전한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정전을 피하고 음식의 가지 수를 줄이며, 풍악을 정지하고, 석성을 옥에 가두고 ‘왜와 통하여 우환을 자아내고 나라를 팔아 위엄을 손상시켰다’ 는 죄목으로 베어 죽이기로 논죄하니, 형부 상서 소태형(蕭太亨)이 힘껏 말렸으나 황제가 들어주지 않아 석성이 마침내 옥중에서 병이 나서 죽으니 사람들이 매우 원통하게 여겼다.우리나라에서는 서울에 사당을 세우고 석성과 이여송을 아울러 제사지냈다.
     
    연려실기술 제16권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진주성(晉州城)의 함락과 명병(明兵)의 철환(撤還)
     
  • 계사년 5월 초에 경략(經略)송응창(宋應昌)은 적이 경성(京城)을 버리고 갔다는 것을 듣고 비로소 여송(如松)에게 패문(牌文)을 보내어 적을 추격(追擊)하라고 독촉하였다. 적이 간 지가 이미 수십 일이나 되었는데, 응창은 사람들이 자기가 적을 놓아 주고 쫓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 두려워 짐짓 이러한 조처를 취하여 보인 것이었다. 여송은 실상은 적을 두려워하여 길에서 천천히 행진하며 어떤 때는 한 군데서 여러 날씩 머물러 있기도 하였다. 겨우 새재[鳥嶺]를 넘었을 때 유경(惟敬)이 왜병의 진영에 있으면서 〈여송에게〉 군사를 돌리어 강화(講和)를 완결시키자고 청하니, 여송은 도로 돌아와 경성에 주둔하고, 적도 천천히 물러가는데 우리 군사들은 도로 연변에 좌우로 비키면서 감히 나와 공격하는 이가 없었다.
     
  • 이여송이 낙상지(駱尙志)ㆍ송대빈(宋大斌) 등을 시켜 호남으로부터 나아가 진주를 구원하게 하는 한편 영남에 머물고 있는 장수 유정(劉綎)ㆍ오유충(吳惟忠)을 시켜 힘을 합하여, 가서 구원하게 하였으나 군사의 세력이 대적할 수 없으므로 모두 명령을 듣지 아니하였다
     
  • 그때 이덕형(李德馨)이 이여송의 접반(接伴使)로 있을 때에, 명 나라의 장수가 적이 거짓으로 화친을 청한다는 속이는 말을 듣고 머뭇머뭇 결정하지 못하고 날자를 미루어 기회를 놓쳤다. 하루는 여송이 적벽도(赤壁圖)를 내 보이므로 덕형이 시를 짓기를,
    이기고 지는 것은 한 판 바둑인데
    병가(兵家)에서 가장 꺼리는 것은 머뭇거리며 의심하는 것일세.
    적벽강에서 전에 없던 큰 승전(勝戰)은 오직 장군이 책상을 찍을 때에 있었던 줄 알아라주D-002
    하였다. 그 말에 풍자가 있었으니 명 나라 장수가 머리를 끄덕거렸다. 《지봉유설》
     
  • 8월에 송응창ㆍ이여송이 왜와 더불어 화친을 약속하고 인하여 명 나라 천자에게 아뢰기를, “왜놈들은 이미 모두 바다를 건너가고 다만 한두 진영만이 부산에 머물러 있으면서 명 나라에서 수길(秀吉)을 임금으로 봉해 주는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란을 겪은 나라에 〈명나라의〉 군사와 말이 오래 머무르기가 어려우니 청컨대 요양(遼陽)에 철환(撤還)하여서 위급에 대비하게 하옵소서.” 하였다. 군사를 이끌고 돌아오라는 조서가 내렸다. 유정(劉綎)의 군사 만여 명은 머물러 있어서 우리 나라를 지키게 하고 유정을 도독(都督)으로 임명하였다.
  • 뒤에 임금이, 평양에 사당을 짓고 석성(石星)ㆍ이여송(李如松)을 제사지내며 이여백(李如栢)ㆍ장세작(張世爵)ㆍ양원(陽元)을 배향(配享)하게 하고 무열(武烈)이라고 사액(賜額)하였다.

    연려실기술 제16권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두 능(陵)의 변고(變故)
    임진년 9월, 왜적이 선릉(宣陵 성종릉(成宗陵))과 정릉(靖陵 중종릉(中宗陵))을 파헤쳤으므로 계사년 4월 9일 체찰사 유성룡ㆍ도원수 김명원ㆍ순찰사 권율이 장계하기를, “경기 도사 심극명(沈克明)이 가지고 온 감사 성영(成泳)의 서신을 본즉 ‘선릉과 정릉에 적(賊)의 화변이 극심한 지경에 이르렀다.’ 하오니 신하로서 차마 들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마임이 아프고 뼈에 사무쳐 즉시 제독(提督 이여송)의 문 앞에 서서 통곡하였더니 제독이 놀라 탄식하며, 곧 성영의 서신을 갖다 보았습니다. 신등은 물러 나와 만월대(滿月臺) 앞에서 〈능이 있는〉 남쪽을 바라보며 통곡하였습니다. 이 도적들의 흉악함이 하늘에까지 닿아 망극한 화변이 위로 능에 미쳤는데도 이를 섬멸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왜적과 더불어 한 하늘 밑에서 같이 살고 있으니, 신등의 죄는 일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벼울 것입니다.” 하였다.
     
    연려실기술 제18권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선조조의 명신

     한호(韓濩)

  • 한호는, 자는 경홍(景洪)이며, 호는 석봉(石峰)이요,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군수 대기(大基)의 5대손으로서 계묘년(1543)에 나서 정묘년 나이 25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삼조(三曹)의 낭관과 가평ㆍ흡곡(?谷) 두 고을 의 수령을 역임하였으며, 호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을시년(1605)에 죽었다.
  • 가정(嘉靖) 계묘년에 송도(松都)에서 태어났는데 점치는 이가 말하기를, “옥토끼기 동방에 나니, 낙양(洛陽)에 종이 값이 높아지리라주D-007.” 하였다. 꿈에 왕 우군(王右軍 왕희지(王羲之))이 글씨 쓴 것을 두 번이나 주었는데, 이로보아 신(神)의 도움이 있은 듯하다.
  • 임신년에 정유길(鄭惟吉)ㆍ임오년에 이이(李珥), 신축년에 이정귀(李廷龜)의 세 차례 빈사(?使) 행차와 신사년과 계사년의 주청사(奏請使)가 갈 때에 모두 명필로서 참여하였다. 중국의 이여송(李如松)과 마귀(麻貴)와 북해(北海)의 등계달(鄧季達)과 유구(琉球)의 사신 양찬(梁燦)이 모두 글씨를 요구하여 갔다. 왕감주 새정(王?州世貞)이 글씨를 평하기를, “성난 사자가 돌을 헤치는 것 같고, 목마른 천리마가 물로 달려가는 것 같다.”하였고, 명 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은, “마땅히 왕 우군과 안로공(安魯公 안진경(安眞卿))과 우열을 다툴 만하다.” 하였다. 선조가 공의 대자(大字)를 보고 탄복하기를, “기이하고 장대하기가 측량할 수 없다.”하고 하사하는 어선(御膳)과 법주(法酒)가 길에 끊이지 않았으며, 또 내시를 보내어 그의 집으로 잔치를 내리는 한편 한가로은 고을을 재수하도록 명하였다. 또 어필로 “취한 속에 천지에서 붓으로 조화를 뺏았다.”라는 여덟 자를 써서 주었으며, 병이 나자 어의(御醫)와 약이 길에 연이어졌다. 나이 63세에 죽으니 부고를 듣고 부의를 매우 후하게 내렸으며, 관에서 상장(喪葬)을 돌보아 주었다
     
    정철(鄭澈)
  • 계사년(1593) 정월에 이 제독(李提督 이여송(李如松))이 평양(平壤)을 수복하였다. 임금이 사은사(謝恩使)를 보내는 데 대해 의논하도록 하니, 여러 사람의 의논이 모두 송강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임금이 그가 선위(禪位)를 도모하지나 않을까 의심해서 허락하지 않으려고 하니, 신잡(申?)이 나아가 아뢰기를, “정철이 어찌 감히 그렇게 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정철을 의심한다면 다른 사람 중에 믿을 만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며 한참 동안 눈물을 흘렸다. 신잡은 신립의 형이요 신성군의 처숙부(妻叔父)주D-019였다. 이 때문에 임금의 생각이 조금 풀려서 비로소 공을 보냈다. 《매환문답(買還問答)》

     이덕형(李德馨)
  • 계사년(1593)에 대사헌으로서 명 나라 대군을 영접하고 여러 장수를 응접하며 군량을 독려하여 수집하였으며 항상 막부(幕府)의 기획에 참여하였는데,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누차 자기 의견을 굽히고 공을 좇았다.
     
    이항복(李恒福)
  • 공이 이여송(李如松)의 행군이 기율이 있음을 보고 임금에게 아뢰기를, “이 군사가 반드시 공이 있을 것이나, 다만 막하에 정동지(鄭同知)와 조지현(趙知縣) 두 사람이 권세를 부리고 있으니 훗날 큰 계획을 막을 자는 반드시 이 두 사람일 것입니다.” 하였다. 벽제(碧蹄) 전투가 불리하게 되자 마침내 화의(和議)하기로 꺾인 것은 정동지와 조지현이 실로 그 꾀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행장〉

    연려실기술 별집 제5권
    사대전고(事大典故)
    조사(詔使)본국의 사신이 돌아올 때에 보내준 조칙(詔1勅)도 아울러 첨부하였다.
  • 《조야기문(朝野記聞)》에는 내관(內官)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 26년 계사 만력 21년, 이보다 앞서 영하(寧夏)의 적(賊) 유동양(劉東暘)이 색승은(索承恩)과 함께 성(城)을 발판삼아 배반했으므로, 황제는 이여송(李如松)을 보내 평정한 뒤에 다시 왜(倭)를 치러 보냈는데, 이때에 와서 요동 도사(遼東都事)가 통사(通事)계연방(桂聯芳)을 보내어, 영하를 평정한 조서를 받들어 가지고 우리나라에 와서 개독(開讀)하게 하였다.
  • 그때 관청이나 주택들이 모두 다 타서 재가 되었는데 이 집만은 왜적의 장수가 거처하였기 때문에 그대로 남을 수 있었다. 이여송(李如松)이 이곳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그로 인하여 조사(詔使)들이 머물러 쉬는 곳이 되었다. 뒤에 ‘남별궁(南別宮)’이라 일컬었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사전전고(祀典典故)

    여러 사당[諸祠]
  • 무열사(武烈祠)는 평양부 서문 안에 있으며, 명 나라 병부 상서석성(石星)ㆍ제독이여송(李如松)ㆍ좌협장(左協將)양원(楊元)ㆍ중협장(中協將)이여백(李如栢)ㆍ우협장(右協將)장세작(張世爵)을 향사하였다. 선조 계묘년에 창건하였고, 사당 안에 네 사람의 화상을 걸어 두었는데, 정묘병란 때에 모두 잃어버렸다. 석성과 이여백의 화상이 남아 있었으므로 드디어는 위패로써 대신하게 하였다. 숙종 기축년에 비로소 예관을 보내 치제하고 수호를 잘 하도록 명하였다. 그 뒤로부터는 나라에서 봄ㆍ가을로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를 지냈다.
     

    연려실기술 제17권
    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
    갑오년에 유정(劉綎)이 군대를 철수하다.

    처음 계사년 9월 에 송응창ㆍ이여송 등이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고, 유정ㆍ오유충(吳惟忠)ㆍ낙상지(駱尙志) 등만이 남아서 보군 만여 명을 거느리고 본국에 주둔하고 있었다. 유정은 팔거(八?)에, 유충은 울산에, 주둔하였다. 팔거는 바로 성주(星州)이다.

     
    연려실기술 제16권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명 나라의 구원으로 서울을 수복(收復)하다
  • 유경이 작은 모자 수만 개를 왜병에게 고루 나누어 주게 함으로써 슬며시 그 인원수를 알아내어 제독(提督)이여송에게 알려주며 배수의 군사를 더하여 쓰게 하였다. 그때 평양에 주둔하고 있는 왜병의 수는 만수천 명이었는데 우리 백성들까지를 아울러 군사로 삼아 군의 기세를 올렸다. 제독이 왜적의 3배의 수로써 계산하여 공격하였다고 한다.
  • 12월에 당 나라에서 크게 군사를 일으켜 병부 시랑(兵部侍郞) 송응창(宋應昌)으로 경략(經略)을 삼고 영하후(寧夏侯)이여송(李如松)으로 도독군무(都督軍務)를 삼아 남북의 관병(官兵) 4만 3천여 명을 거느리고 우리 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부총병(副摠兵) 양원(楊元)을 좌협대장(左協大將)으로 삼아 부총병 왕유익(王有翼)ㆍ왕유정(王維貞), 참장(?將) 이여매(李如每)ㆍ이여오(李如梧)ㆍ양소선(楊紹先)과 선봉(先鋒) 부총병 사대수(査大受)ㆍ손수렴(孫受廉), 참장 이 녕(李寧), 유격(遊擊)갈봉하(葛逢夏) 등을 모두 통솔하게 하고, 부총병 이여백(李如栢)을 중협대장(中協大將)으로 삼아 부총병 임자강(任自强), 참장 이방춘(李芳春), 유격 고 책(高策)ㆍ전세정(錢世禎)ㆍ척금(戚金)주홍모(周弘謨)ㆍ방시휘(方時輝)ㆍ고 승(高昇)ㆍ왕 문(王問) 등을 모두 통솔하게 하고, 부총병 장세작(張世爵)으로 우협대장(右協大將)을 삼아 조승훈(祖承訓) 평양 패전의 죄로 충군(充軍)되어 관직없는 신분으로 종군시켜 스스로 충성을 나타내게 하였었다ㆍ부총병 오유충(吳惟忠)ㆍ왕필적(王必迪), 참장 조지목(趙之牧)ㆍ장응충(張應?)ㆍ낙상지(駱尙志)ㆍ진방철(陳邦哲), 유격 곡수(谷燧)ㆍ양심(梁心) 등을 모두 통솔하게 하고, 참장 방시춘(方時春)으로 중군비어(中軍備禦)를 삼고, 한종공(韓宗功)ㆍ이봉양(李逢陽)으로 기고관(旗鼓官)을 삼고,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郞) 유황상(劉黃裳)ㆍ병부주사(兵部主事) 원황(袁黃)으로 찬획(贊?)을 삼고, 호부주사(戶部主事) 애유신(艾惟新)으로 독향(督餉)을 삼아 특명으로 빨리 달려가 구원해 주라고 하였다. 또 황제의 명령으로 유격 장기공(張奇功) 등을 파견하여 은(銀)을 풀어 말먹이와 군량을 사들여 의주로 운반하게 하고, 거기서 다시 연로(沿路)로 운송하여 군량을 접제(接濟)하게 하였는데, 용맹스러운 장수가 60여 명이었다.
  • 여송은 통원보(通遠堡)까지 와서 군사를 머물러 있게 하여 전진하지 아니하고 응창과 황상(黃裳)은 요동에 머물면서 모든 장수를 절제하고 있었다. 이에 임금이 집의(執義)이호민(李好閔)을 보내어, “적의 음모를 예측할 수 없으니 일이 급박하다.” 하고 속히 진군할 것을 간곡히 바랐더니, 이여송이 정월에 진군할 것을 허락하고서도 전진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므로 임금이 또 이조 판서 이산보(李山甫)를 시켜 달려가 구원병이 강을 건너도록 극력으로 청하게 하였는데, 하도 어조가 간절하여 말과 함께 눈물이 쏟아지니 여송이 감동하여 곧 강을 건너왔다.
  • 22일에 전세정이 남방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먼저 강을 건너오고, 24일에 이여송 등이 강을 건너오니 깃발이 천 리에 뻗치었고 징소리ㆍ북소리가 서로 들리니 우리 나라의 백성 중에 환영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여송은 붉은 비단 전포(戰袍)를 입고 홍명교(紅明轎)를 타고 있었다. 임금이 용만관(龍灣館)의순관(義順館)에서 〈이들을〉 맞아, “과인(寡人)이 나라를 잘못 지켜 황제께 염려를 끼쳐드리고, 여러 대인(大人)께서 멀리 정벌하러 오시게 하였으니 비록 심복(心腹)을 쪼갠들 어찌 이 하늘 같고 땅 같은 망극(罔極)한 은혜를 갚을 수 있겠소.” 하니 여송이 웃으며 말하기를, “황제의 하늘 같은 위엄과 이 나라 임금의 큰 복으로 마땅히 왜적은 저절로 섬멸될 것입니다. 감사할 것까지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임금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의 한 오라기 같은 명맥이 오직 대인에게 달려있소.” 하니, 여송이 손을 들어 사례하며 말하기를, “이미 황제의 명령을 받았으니 어찌 죽음을 사양하겠습니까. 또한 나의 선조(先祖)는 본래 귀국 사람이었고, 나올 때 나의 아버지가 또한 훈계하시었는데, 내 어찌 감히 귀국의 일에 힘쓰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여송은 키가 헌칠하고 예절에 익숙하고 세련되었으며, 풍채가 준수하고 말소리가 크고 분명하였다. 임금이 두루 세 총병을 찾아 보고 돌아와서, 나머지 장관(將官) 40여 명도 임금이 다 고루 찾아 보려고 하니 도승지(都承旨)유근(柳根)이, “허다한 장관을 어찌 다 찾아보겠습니까. 대장만 보셨으면 족합니다.” 하였고, 윤두수는 여러 번, “모두 골고루 찾아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였으나, 임금이 몹시 피로하다고 하며 듣지 않으니 중국의 여러 장수들은 임금이 자기들을 찾지 않는 데에 화를 내고 제독도 또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임금이 늦게야 그 말을 듣고 찾아보고자 하였으나 이튿날 새벽에 여송이 출발하였기 떄문에 마침내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기재잡기》
  • 강을 건너던 날,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고 해 오른편에 햇무리가 있었다. 이에 여송이 여러 군관을 불러서 보이며 매우 기뻐하였다.
    이여송은, 호는 앙성(仰誠)이다. 그의 아버지는 영원백(寧遠伯) 셩량(成樑) 광녕총병(廣寧摠兵)이니, 요동(遼東)철령위(鐵嶺衛)의 사람이다. 그의 조부는 우리 나라 이산(理山) 땅 독로강(禿魯江)에서 살았는데 어떤 일로 사람을 죽이고 부처(夫妻)가 철령위로 도망해 갔었다. 그의 아버지가 변방에서 공을 세워 유격장군(遊擊將軍)이 되었고 성량은 음직(蔭職)으로 지휘(指揮)가 되었다. 그는 젊을 때 오랑캐를 쳐서 포획(捕獲)한 공이 컸으므로 험산보 참장(險山堡?將)에 기용되었다. 허영양(許穎陽)이 올 떄 성량이 강가에서 전송하면서 군사를 감원하고 그 말[馬]을 차지하였더니 허(許)가 탄핵하려 하므로 성량이 역관(譯官) 곽지원(郭之元)에게 애걸하여 탄핵을 면하였다. 그 뒤 몇 해가 안 되어서 공을 세워 총병(摠兵)이 되었고, 땅을 천 리나 넓혀서 다섯 개의 작은 보(堡)를 세웠다. 공(功)으로 백작(伯爵)을 봉하였고, 아들과 사위 중에 고관(高官)이 된 자가 10여 명이나 되었다. 동쪽 변방을 막아 가린 지 거의 40년이 되었는데, 부귀와 영예와 근대에는 견줄 이가 없었다. 곽지원이 일찍이 북경을 왕래할 때 성량이 매우 후하게 대우하여 그 떄문에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기재잡기》
     
  • 여송의 아우 여백(如栢)ㆍ여장(如樟)ㆍ여매(如梅)ㆍ여오(如梧)ㆍ여정(如楨)은 모두 벼슬이 총병에 이르러 가문이 빛나니 세상에서는 곽분양(郭汾陽)주D-005에게 비하였으며, 여송의 어머니 숙씨(宿氏) 또한 여자 중의 배ㆍ곽(裵郭 당 나라의 이름 있는 장상(將相)배도(裵度)와 곽자의를 말한다)이라고 하였다. 여송이 이때 10만의 군사로 영하(寧夏)의 적(賊)인 유동양(劉東暘)ㆍ패승은(?承恩) 등을 토멸하고 군사를 돌릴 겨를도 없이 또 동을 정벌하라는 명을 받았다. 《재조번방지》

     
  • 낙상지(駱尙志)ㆍ오유충(吳惟忠)ㆍ왕필적(王必迪)은 남방의 장수였는데 낙상지는 더욱 용력이 있고 싸움을 잘하였다. 힘이 세기 때문에 사람들이 ‘낙천근(駱千斤)’이라고 불렀으며 자신이 당 나라 낙빈왕(駱賓王)의 후손이라고 말하였다. 성질이 질박하고 성실하여 우리 나라 사람을 대우하는 것이 특히 후(厚)하였다. 《서애집》○《기재잡기》에 “낙상지가 일찍이 우리 나라 사람 12명이 대장군전(大將軍前) 일좌(一座)를 운반하려 하는데, 움직이기조차 못하는 것을 보고 왼쪽 겨드랑이에 끼고 나무 한 단 들 듯 5리나 되는 곳에 운반하여 놓고도 힘들어 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고 하였다.
  • 이여송이 평양을 향해 출발할 때, 군사의 위풍이 전에 없이 당당하였으니 군사의 수는 4~5만 명이나 되고 군량 8만 석과 화약 2만 근이 줄을 이어 끊임없이 의주(義州)로 실려 들어왔다. 이에 섬 오랑캐 작은 도적들은 정말 혼비백산하였을 것이다. 《우계집》
  • 군사가 안주(安州)에 이르니 유성룡이 청천강(淸川江) 가에서 영접하였다. 군사가 세 곳에 진영을 치니 깃발이 정숙(整肅)하기가 신(神)과 같았다. 이여송이 동헌(東軒 지방 감사와 수령이 정무를 보는 집)에 나와 앉는데 성룡이 소매 속에서 평양 지도를 꺼내어 그 곳의 형세와 군사가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매우 자세하게 가리키니 여송이 주의하여 듣고 모두 주필(朱筆)로 그 곳에 표를 하였다. 또 말하기를, “왜병은 다만 조총(鳥銃)만 믿고 있지만 우리는 포탄이 5~6리나 나가는 대포(大砲)를 쓰고 있는데 적이 어찌 당해낼 수 있겠소.” 하였다. 성룡이 물러나왔더니 여송이 시를 지어 보내왔는데,
    별있는 밤에 군사를 이끌고 강가에 이르렀네.
    삼한 나라 평안하지 않단 말 듣고
    명군(明君)은 날마다 원정의 첩보 기다리고,
    미신(微臣)은 밤에 술잔의 즐거움으로 마음 푸네.
    봄은 오는데 살기 띤 마음이 오히려 강하구나,
    이 걸음에 요괴한 왜놈들 뼈가 이미 차리라.
    담소엔들 어이 승산 아님이 있으랴,
    꿈에도 항상 말안장 타는 일 생각한다오.
    하였다. 《서애집》
    계사년 봄 1월 1일에 이여송이 사대수(査大受)를 시켜 순안(順安)에 가서 왜를 속여 말하기를, “중국 조정에서 이미 화친하기를 허락하였고 심유격(沈遊擊)도 도착하였다.” 하였더니 왜병이 기뻐하였다. 현소(玄蘇)가 시를 지어 올렸는데,
    부상(扶桑)이 전쟁을 쉬고 중국에 복종하니,
    사해와 구주가 한집안 같도다.
    즐거운 기운은 도리어 우주의 눈을 녹이고,
    건곤(乾坤)에 봄은 이른데 태평의 꽃이 피었네
    하였다. 또 〈왜가〉 소장(小將) 평호관(平好官)으로 하여금 20여 명의 왜병을 거느리고 순안에 가서 심유경을 영접하게 하니 사대수가 그들을 머물러 두고 같이 술을 마시게 하고는 복병을 시켜 평호관을 사로잡고, 따라 온 왜병을 거의 다 베어 죽여버렸는데 그중 3명이 빠져 달아나니 왜적이 비로소 명나라 군사가 온 것을 알고 크게 동요하였다. 《서애집》
    처음에 행장(行長)이 우리 나라의 간민(奸民) 40여 명을 모집하여 길을 나누어 보내서 순안 세 고을의 모든 진영을 정탐하게 하였다. 안주(安州)ㆍ의주(義州) 등 먼 곳까지 안 간 곳이 없었다. 군사의 정상과 형세를 알아 가지고 가서 밀보하는 자에게는 명주와 베를 많이 주고 간혹 소나 말을 주기도 하므로 무지한 백성들이 물욕에 마음이 끌려뛰어 다니며 정탐 행위를 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다행히 한 사람이 안주에서 붙잡혀 그 머리를 베어 사람들에게 두루 보였더니, 비로소 그 무리들이 해산되고 감히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였으므로 명 나라의 군사가 숙천(肅川)에 왔는데도 평양에 있는 왜적이 알지 못하였다. 평호관을 사로잡고 이튿날 대군이 성 아래로 전진 포위하는 기세는 마치 우레소리에 귀를 막을 겨를이 없는 형상이었다. 《서애집
     
    그때, 대군이 이미 숙천에 도착하였다. 날이 저물어서 바야흐로 야영(野營)을 치고 밥을지으려는데, 순안에서 왜(평호관 등)를 죽였다는 보고가 왔다. 이에 여송이 활을 잡아 시위를 울리면서 즉시 두어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순안으로 달려가니 모든 병영에서 잇달아 전진하였다. 6일 이른 아침에 평양을 포위하니 우리 도원수(都元帥)도 각 진의 군사를 모아 가지고 그 뒤를 쫓았다. 《서애집》
     
    8일 이른 아침에 이여송이
    삼군(三軍)주D-006의 식사가 끝난 뒤에 세 병영의 장수들과 더불어 군사를 나누어 거느리고 성밖을 포위하고 칠성(七星)ㆍ보통(普通)ㆍ함구(含毬) 등 세 성문 밖에 진을 벌였다. 적은 성 위에서 흰 기와 붉은 기를 세우고 대항하여 싸웠다. 여송은 스스로 친병 백여 기를 거느리고 성 아래로 다가 가서 모든 장수를 지휘하였다. 잠시 후에 대포를 발사하자 각 진에서도 일제히 발사하니, 소리가 우레 같고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덮어 옆으로 수십 리에 퍼졌다. 불은 강하고 바람은 세어서, 바로 성 안을 무찌르니, 먼저 밀덕(密德) 토굴을 거의 다 태워버렸다. 여송이 모든 군사를 격려하여 성에 올라가게 하니 적이 납덩이와 큰 돌덩이로 항거하자, 명 나라 군사가 약간 물러섰다. 여송이 퇴각하는 자 하나를 베어 군중(軍中)에 돌려 보이고, 몸을 빼쳐 앞으로 나가 외치기를, “먼저 올라간 자에게는 은 50냥을 준다.”하니 낙상지(駱尙志)가 긴 창을 가지고 함구문으로 몸을 솟구쳐 성첩(城堞)을 부여잡고 올라가니 모든 군사들이 북을 치고 떠들며 뒤를 따랐다. 절강(浙江)의 군사가 적의 깃대를 뽑아버리고 명 나라 군사의 기를 세우니 적이 감히 저항하지 못하였다. 《서애집(西厓集)》에, “낙상지ㆍ오유충 등이 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개미처럼 기어 오르는데, 떨어지면 다시 오르고 하여 물러서는 자가 없었으며, 적의 칼과 창이 고슴도치의 털처럼 성에 드리워 있었으나 명 나라 군사가 더욱 힘써 싸우니 적이 견디어내지 못하였다.” 하였다. 여송이 장세작(張世爵) 등과 더불어 대포를 쏘아 공격하여 칠성문의 문루(門樓)를 깨뜨리고 군사를 정돈하여 들어갔다. 이여백(李如栢)은 함구문으로, 양원(楊元)은 보통문으로 승전한 기세로 몰아 앞을 다투어 들어갔다. 기병과 보병이 구름같이 모여 들어가니 적이 움츠려져 들어가 막사(幕舍)를 지키고 있었다. 이에 불을 질러 거의 다 태워 죽이고 베어 죽이니 그 수가 1천 2백 80여 명이나 되었다. 명 나라 군사가 성안에 들어가서 내성(內城)을 치니 적이 성안에 흙으로 보루를 만들고 많은 구멍을 뚫어놓아 벌집같이 생긴 구멍 사이로 총탄을 마구 쏘아대어 명 나라 군사가 많이 상하였다. 이에 여송은, 막다른 지경에 빠진 왜적들이 결사적으로 항거할까 염려하여 성밖으로 군사를 거두고, 왜병에게 항복한 절강 사람 장대선(張大膳)을 붙잡아다가 〈왜진에〉 보내어 타이르기를, “우리 병력으로 너희들을 모조리 없애버릴 수 있으나 사람의 목숨을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어서 너희들의 살 길을 열어주는 것이니 속히 모든 추장(酋長)들로 하여금 와서 약속을 듣게 하라.”하니 행장이 답하기를, “우리는 꼭 물러갈 터이니 청컨대 뒷길을 끊지 말아 주시오.” 하였다. 여송이 이를 허락하고 통역관을 시켜 우리 나라에 통보(通報)하였으므로 한 길의 복병을 철수하였다. 행장은 밤중에 나머지 군사를 거느리고 도망해 갔고, 중화(中和)와 황주(黃州)에 연이어 진영을 치고 있던 적들은 먼저 도망쳐서 가고 없었다. 《일월록》
     
    여송이 이녕(李寧)ㆍ조승훈 등에게 비밀히 명을 내려 요로(要路)에 복병시켜 두었다가 도망가는 적을 맞아 〈싸우게 하였더니〉 3백 50명의 목을 베고 2명을 사로잡았다.
     
    이에 앞서 유성룡이 황해방어사(黃海防禦使) 이시언(李時言)과 김경로(金敬老)에게 밀보를 보내어 적의 물러가는 길을 지키게 하고 말하기를, “두 군사를 길 연변에 복병으로 배치하되, 적을 앞에서 기다리지 말고 적이 지나가거든 그 뒤를 밟게 하라.”하니, 시언은 즉시로 중화(中和)에 이르고 경로는 딴 일을 핑계해서 회피하였다. 성룡이 또 군관을 보내어 독려하니 경로가 부득이 시언의 군사와 합하였는데, 황해 감사 유영경(柳永慶)이 경로를 불러다가 자신을 호위하게 하였다. 행장(行長)ㆍ의지(義智)ㆍ현소(玄蘇)ㆍ조신(調信) 등은 나머지 군사를 거느리고 밤을 타서 도망쳐 돌아가는데 기운은 다하고 발은 부르터서 절뚝거리며 밭 고랑 사이로 기어 가기도 하고, 혹은 입을 가리키며 먹을 것을 구걸하기도 하였으나 우리 나라 사람 중에는 한 사람도 나와 공격하는 이가 없었다. 시언(時言)만이 그 뒤를 따라갔으나 감히 덤벼들지는 못하고 다만 굶주리고 병들어 뒤떨어진 자 60여 명의 머리를 베었을 뿐이었다. 이에 성룡이 장계를 올려 경로를 참형에 처할 것을 청하니 조정에서 제독(提督)에게 고하여 형을 집행하도록 했으나 여송은 그의 사형을 면하여 주고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하였다. 《서애집》
    그때 목벤 왜적의 머리는 1천 2백 85개이고, 노획한 말은 2천 9백 2필이고, 군기(軍器)는 4만 5천 2건이었다. 또한 포로되었던 우리 나라 남녀 1천 15명을 구출하였다. 승첩의 보고를 듣고 임금이 이르기를, “이번에 명 나라의 군사가 나오게 된 것은 정곤수가 잘 진술하여 아뢰었기 때문이다.” 하였다. 《서평행장(西平行狀)》ㆍ《자해필담(紫海筆談)》
     
  • 한 준(韓準)을 〈북경에〉 보내어 평양 수복을 보고하게 하고 겸하여 영하(寧夏) 평정을 축하하였다. 이보다 먼저 영하(寧夏)의 도적 유동양(劉東暘)이 패승은(?承恩)과 더불어 성에 웅거하고 배반하였으므로 황제가 이여송을 보내어 평정하게 하고 곧 이어 왜병을 정벌하러 보냈더니, 이때 황제의 조서가 우리 나라에 도착하였다. 아울러 선후책(善後策)을 청하였더니 독부(督府)를 시켜서 강소성(江蘇省)ㆍ절강성(浙江省)의 포수 50명을 뽑아 장관(將官) 1~2명에게 요해지(要害地)에 나누어 주둔하게 하였다. 《고사촬요》
  • 그때 제독이 거느린 남군(南軍)과 북군(北軍)이 공을 다투는데 제독은 북군 편을 들어 우리 나라로 하여금, “황제에게 올리는 글에 잘못이 없게 하라.”고 하였다. 임금이 이호민(李好閔)에게 명하여 글을 짓게 하였더니 호민이 밤에 글의 초를 잡았는데 양편을 모두 추켜 올려서 부족한 말이 없었으므로 남군ㆍ북군의 장수가 모두 좋아하였다.
  • 그때 순변사 이 일(李鎰)과 별장(別將)김응서(金應瑞)가 함구문으로 쫓아 들어갔다가 군사를 거두고 물러나와 성밖에 진치고 있었는데 밤에 적이 도망한 것을 이튿날 아침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에 여송이 우리 군사가 경계해서 지키지 아니하여 적으로 하여금 도망가게 하고도 알지 못한다고 허물을 잡아, 이일은 장수의 자격이 없고 이빈(李?)이 적임이라고 하며 자문(咨文)으로 그 사실을 알려 왔다. 임금은 윤두수를 보내어 평양에 가서 이 일의 죄를 문책하게 하고 장차 군법에 의하여 처단하여 하다가 한참 뒤에 석방하고 이빈으로 하여금 대신 그 군사를 거느리게 하고 기병 3천 명을 뽑아 도독을 따라 남으로 내려가게 하였다.
  • 황주 판관(黃州判官) 정엽(鄭曄)이 행장의 뒤를 끊고 90여 명의 적의 머리를 베고 도중에서 또 30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 이여송은 평양에 주둔한 지 8일 만에 사대수(査大受)ㆍ장세작(張世爵) 등에게 명령하여 적을 추격하게 하고, 또 우리 나라의 체찰사(體察使)유성룡과 접반사(接伴使)이덕형에게 명령하여, “급히 먼저 가서 군량과 말먹이를 마련하고 부교(浮橋)를 만들라.” 하였다. 또 우리 나라를 힐책하는 유시(諭示)를 하였는데 그 대략에, “조선의 우두머리 신하인 유성룡ㆍ윤두수 등이 와신상담(臥薪嘗膽)하는 마음을 먹지 아니하며 중국을 가벼이 볼 뿐만 아니라 조선의 국왕으로 하여금 예의에 어그러지게 하고 중국의 위엄을 업신여기게 하였다. 관군(官軍 중국군)이 평양에서 승첩함으로써 너희가 나라를 잃었다가 찾게 되고, 집을 잃었다가 찾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일 중국군의 과실을 들추어 내어 황제께 소(疏)를 올린다면 너희들은 다시 나라를 잃게 될 것이요, 다시 집을 잃고 슬퍼하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본부(本部)에서는 타고난 천품이 충성되고 곧아서 참된 마음으로 임금을 위하기 떄문에 너희들의 조그마한 허물을 개의치 않는 것이다.” 하였다. 《일월록》
  • 날샐 무렵에 또 애유신(艾惟新)을 보내어 군량을 독려하게 하였는데, 유신은 군량의 반입(搬入)이 기한 내에 대지 못했다고 하여 검찰사(檢察使)김응남(金應南)과 호조 참판(戶曹?判) 민여경(閔汝慶)과 의주 목사(義州牧使) 황진(黃進)에게 장형(杖刑)을 가하였으므로, 애유신이 지나가는 곳마다 두려움으로 사람들이 다리를 부들부들 떨었다.
  • 선봉(先鋒)이 개성(開城) 청석골[靑石谷]에 이르니 적병이 멀리서 바라보고 달아나므로 뒤쫓아 가서 30여 명의 머리를 베고, 대군이 개성에 들어가서 드디어 임진강을 건넜다. 사대수(査大受)가 우리 나라의 고언백(高彦伯) 등과 함께 모화관(慕華館)에 가서 정탐하고 돌아오자 선봉이 바로 벽제(碧蹄)에 도착하였다. 《일월록》
  • 1월 24일에 연로에 진을 벌이고 있던 적병들이 모두 경성으로 모였다. 적이 우리 백성들의 내응을 의심하고 또 평양의 패전을 분하게 여겨, 성내에 있던 백성들을 모조리 죽이고 공사의 집들을 거의 다 불질렀으므로 오직 남산 밑 일대의 왜인들이 접거(接居)하고 있던 곳만이 겨우 보전될 수 있었다. 《서애집》
  • 청정(淸正) 등의 적이 북도에 있다가 평양의 패전 소문을 듣고 즉시 30여 진의 군사를 거두어 밤낮으로 퇴각해 나왔는데, 왜적이 지나간 것은 모두 적지(赤地)가 되었다. 명 나라 장수가 우리 나라에 자문(咨文)을 보내 와, “각 도의 관군과 의병을 모아서 왕성 수복에 힘을 합치라.” 하였다. 《일월록》
  • 이여송이 덕진(德津)을 거쳐 파주(坡州)에 와서 진을 쳤다. 적병 수백명이 미륵원(彌勒院) 앞에 나와 진치는 것을 사대수가 쳐서 130명의 머리를 베고 서애집에는 “대수가 군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먼저 가다가 벽제역(碧蹄驛) 남쪽 여석령(礪石嶺)에서 적을 만나 베어 죽였다.” 하였다. 급히 여송에게 품(?)하기를, “적이 이미 기운을 빼앗겼으니 속히 진군하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여송이 휘하(麾下)의 정용(精勇)한 군사 수십 명을 거느리고 말에 채찍질하며 나서니 삼협(三協 군대의 부대 편성의 한 가지로 좌협(左協)ㆍ우협(右協)ㆍ중협(中協)을 말한다)의 대장들도 가정(家丁) 수십 명과 잇달아 달려갔다. 여송이 혜음령(惠陰嶺)을 넘다가 별안간 말이 미끄러지면서 땅에 떨어져 낯에 상처를 입고 말을 바꿔 타고 갔다. 적이 여현(礪峴)에 기를 벌려 세워 놓았다. 여송이 바라보고 그의 군사를 지휘하여 양익(兩翼)으로 나누어서 전진하였다. 적이 파리한 군사로 거짓 패한 체하여 진흙 수렁 속으로 유인하였다. 명 나라 군사가 함부로 전진하다가 진흙 속에 빠졌다. 산 뒤에서 적병 만여 명이 갑자기 달려드니, 그때 여송이 거느린 것은 모두 북방 출신의 기병(騎兵)으로서 화기(火器)는 없고 다만 짧은 칼만 가지고 있었는데, 적은 보병(步兵)이었고, 칼날이 모두 3~4척 씩이나 되고 예리하기가 비할 데 없었다. 칼을 휘두르며 앞으로 달려들어 죽이니 사람과 말이 모두 쓰러지며, 감히 그 칼날을 당해내는 자가 없었다. 여송이 형세가 위급한 것을 보고 급히 후군(後軍)을 불렀으나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여송의 부하 이유승(李有升) 등 용사 80여 명이 모두 찍혀 죽었다. 적이 좌우편에서 기병(奇兵)을 내놓아 길을 끊으며 달려들었다. 여송이 겨우 죽음을 면하였고 사람과 말이 서로 짓밟았다. 조금 후에 대군(大軍)이 일제히 이르니 적은 군사를 거두어서 달아났다. 여송이 유승의 사위 왕 심(王審)을 불러 통곡하며 말하기를, “호남아(好男兒)가 나를 위해 죽었다”고 하였다. 날이 저물어 파주(坡州)로 돌아왔다. 《난중잡록》에, “적의 복병이 사방에서 일어나 덤벼드니 여송이 타고 있던 말이 잘못되어 진흙 속에 빠졌다. 적이 긴 칼을 휘두르며 앞을 다투어 달려들므로 이유승 등이 제 몸으로 덮어 막다가 찔려 죽었다. 부하의 용사가 거의 다 죽고 여송은 다른 장수들과 더불어 뒤에 서서 물러 나왔다.”고 하였다. 비록 그 패전한 것을 숨기고 있었으나 정신과 기운이 몹시 저상하여졌다. 이튿날 동파(東坡)로 군사를 후퇴시키고자 하므로 유성룡ㆍ유 홍ㆍ김명원ㆍ이빈 등이 형세를 보아 다시 전진하기를 청하였더니 여송이 황제에게 올리는 글의 초고(草稿)를 보여주었다. 그 속에, “적병 20여만 명이 왕성(王城)에 있어서 그 많은 수를 대적할 수 없습니다.” 하는 구절이 있고 또, “신의 병이 심하오니 청컨대 다른 사람으로 바꿔 주십시오.” 하기도 하였다. 장세작이 더욱 퇴군하기를 권하여 이빈을 발길로 차서 쫓아내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일월록》ㆍ《서애집》

  • 어떤 이가 전하는 말에, 이여송이 여현(礪峴)에 이르러 연서(延曙) 언덕과 골짜기가 뒤얽혔으니 병가(兵家)에서 꺼려하는 바라고 하여 물러가고자 하는데, 전날 밤에 적은 이미 창의문(彰義門)으로부터 나와 송림 사이에 복병(伏兵)을 숨겨 놓았다가 한꺼번에 뛰어나오게 하여, 이 패전이 있게 되었다. 선봉 사대수가 기병 2~3백 명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뒷길이 이미 끊어졌으므로 연서의 왼쪽 평야에 멈춰 있으니 적이 기세를 올리며 합세하여 포위하였다. 대수가 삼지창(三枝槍)을 잡고 군사의 앞장을 서서 북을 쳐서 군사를 퇴각시키고 창으로 왜병을 찔러 공중에 던지면 뒤에 있는 군사가 서로 차례차례 이어 받아서 던지니 바라보기에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과 같았다. 적병이 죽음을 무릅쓰고 다투어 달려들므로 마침내 감히 막지 못하고 드디어 군사를 완전히 보호하여 돌아왔다고 한다. 《일월록》
  • 그때 김명원(金命元) 등이 그의 경솔하게 전진하는 것을 의심하면서 뒤에서 또한 전진하고 있었는데, 앞에서 접전하는 소리만 들리더니 갑자기 패했다는 기별이 왔다. 이에 우리 군사는 달아나 고양(高陽)으로 후퇴하여 있었는데, 명 나라 군사가 어떤 이는 팔다리가 잘리고, 어떤 이는 낯과 눈에 부상을 입고 대오(隊伍)의 질서도 없이 어지럽게 퇴각해 왔다고 한다. 《일월록》

  • 28일, 도로 임진강(臨津江)을 건너서 동파(東坡)에 진을 쳤다. 그때 큰 비가 날마다 내리는데 말[馬]들은 전염병이 생겨 수일 동안에 거의 만 필이나 죽었다. 29일이 되자 모든 진영(陣營)이 개성부(開城府)로 물러가고 홀로 사대수(査大受)ㆍ관승선(?承宣)등의 군사 수백 명만이 머물러 임진(臨津)을 지키고 있었다. 성룡(成龍) 등이 다시 진군(進軍)하기를 청하니 여송(如松)이 말하기를, “날이 개고 길이 마르면 진군하겠다.”고 하였는데 그때 마침 서쪽에서 기별이 있어서 전하는 말이, “가등청정(加藤淸正)이 북도로부터 와서 평양을 습격하려고 한다.” 하니 여송이 말하기를, “평양은 근본되는 곳이니 구(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고 드디어 회군하기로 하고, 왕필적(王必迪)으로 하여금 머물러 개성을 지키게 하였다. 또 우리 나라의 모든 장수에게 임진으로 물러나라고 명령하고 평양으로 돌아갔다. 《일월록》ㆍ《서애집》

  • 명 나라 황제가 내고(內庫)의 은(銀) 3천 량을 내어 우리 나라에 주어서 공이 있는 사람과 전사한 사람에게 상으로 주게 하였다. 《일월록》
  • 3월에 경략(經略)송응창(宋應昌)이 압록강을 건너와 안주(安州)에 주재하여 또 군비를 정하므로 경금(?金) 20만 냥을 더 지출하여 군사들의 사기를 돋우었다.
  • 여송이 권율(權慄)의 행주(幸州) 승첩을 2월에 있었다. 아래에 자세하다. 듣자 회군(回軍)이 너무 급하였음을 자못 후회하고, 장세작(張世爵)으로 하여금 이덕형(李德馨)과 같이 개성에 돌아와 군량을 준비하고서 기다리게 하였다.
  • 전에 김천일(金千鎰)의 군중에 있는 이신충(李藎忠)이라는 자가 자청하여 서울에 들어가 적의 정상을 정탐하였는데, 두 왕자와 황정욱(黃廷彧) 등을 만나보고 돌아와 말하기를, “적이 강화할 뜻이 있다.”고 하더니 얼마 안 되어 적이 용산에 있는 우리 수군(水軍)에게 글을 보내서 화친하기를 청하여왔다. 천일이 그 글을 유성룡에게 보내니 성룡이 사대수(査大受)에게 보이고 사대수는 평양으로 사람을 급히 보내어 보고하였다. 이에 이여송이 심유경(沈惟敬)을 보내니 김명원(金命元)이 유경을 보고 말하기를, “적이 평양에서 〈당신에게〉 속은 것을 분하게 여겨 반드시 좋지 못한 생각을 가졌을 것이니 어찌 거기에 다시 들어간단 말이요.” 하자 유경이 말하기를, “적이 제 자신들이 속히 물러가지 않아서 패하게 되었는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겠소.” 하였다.
  • 4월에 경략(經略 송응창)이 심유경과 호택(胡澤)심사현(沈思賢) 등을 보내어 청정과 행장을 용산(龍山) 배 위에서 회견케 하고 각각 강화하기를 청하였는데 이때 유경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기한 안에 군사를 물리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에서 위엄을 보인 것이다. 너희가 만약 전날의 약속을 지켜 성심으로 귀순한다면 어찌 끝까지 군사를 동원하겠는가. 지금 두 찬획(贊?)이 군사 40만 명을 거느리고, 한 패는 새재[鳥嶺]에서 막아 너희가 돌아갈 길을 끊고, 한 패는 한강(漢江)에서 너희의 군량 운반을 막을 것이요, 경략과 제독은 친히 3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지금 곧 올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왕자(王子)와 배신(陪臣)을 돌려 보내고 군사를 거두어 남쪽으로 간다면 봉공(封貢)하는 일도 이룰 수 있을 것이요, 두 나라에는 전화가 없을 것이니 어찌 피차간에 좋은 일이 아니겠는냐?” 하였는데도 행장 등은 오히려 유경을 감금하여 놓고 서울을 고수(固守)하면서 봉공(封貢)을 요구하고자 하니 수가(秀家)삼성(三成) 등이 모두 “그것은 옳지 않다.”하여 즉시 모든 진영의 장수 37명과 더불어 와서 사례하고, “19일에 군사를 거두어 돌아갈 것이며 서울에 양미(糧米) 2만 석을 남겨두고, 부산에 도착하여 두 왕자를 돌려 보내겠다.” 하였다.
  • 여송이 듣고 다시 군사를 끌고 개성부에 도착하였다.
  • 4월에 적이 항복한 백성을 모조리 죽이고, 군사를 걷어서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때 서울 백성 중의 어리석은 자와 미처 도피하지 못하고 숨어 있던 자들이, “적이 백성은 죽이지 않는다.” 하면서 차츰 모여들어 시장과 가게를 벌이기까지 하였다. 적들은 물러가게 되자 이들을 모두 찔러 죽일 것을 비밀히 의논하고, 백성들을 결박하여 남문(南門)밖에 열(列)을 지어 세워놓고 윗쪽에서 부터 찍어 내려오는데, 우리 백성 중에는 칼을 맞고 모두 죽을 때까지 한 사람도 탈주(脫走)를 꾀하는 자가 없었다. 19일에 적병이 한강을 건너 남쪽 충청도 지방으로 내려갔고 이여송이 송도(松都)로부터 서울에 들어와 진을 폈다. 경기ㆍ충청ㆍ강원도에 있던 모든 적병들도 일시에 군사를 거두어 가지고 물러갔다. 《난중잡록》ㆍ《일월록》
  • 정철ㆍ유근 등을 북경에 보내어 표문(表文)을 올려서 삼경(三京 서울ㆍ송도ㆍ평양)을 수복하여 준 것을 사례하였다.
  • 20일에 명 나라 군사가 서울에 입성(入城)하고, 제독은 소공주택(小公主宅)에 숙소를 정하였다. 유성룡이 군사를 전진시켜 쫓아가기를 청하니 여송이 한강의 도선(渡船)을 속히 준비하게 하고 이여백으로 하여금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한강으로 나가게 하였는데, 군사가 반쯤 건넜을 때 날이 저무니 여백이 병이 났다고 핑계하고 돌아왔으므로 이미 건너갔던 군사들도 잇달아 도로 건너 와 버렸다. 《서애집》
  • 여송이 유경을 보내어 그대로 왜군의 진영에 머물면서 영남으로 따라 내려가게 하였다.
  • 권율이 파주로부터 서울에 들어와 장차 한강을 건너 적병을 추격하려하니 여송이 중지시키고, 유격(遊擊)척금(戚金)을 시켜 나룻배를 거두게 하여 건너지 못하게 하였다.
  • 수가(秀家)ㆍ행장 등이 새재[鳥嶺]를 넘어가서는 심유경과 두 왕자와 김귀영(金貴榮) 등에게 말을 태워 앞에서 인도하게 하고, 서울과 시골의 미녀(美女)와 광대와 노래 부르는 아이와 악공(樂工)을 모아 가지고 밤낮으로 풍악을 잡혀서 이기고 돌아간다는 것을 보였다
    [주 D-005] 곽분양(郭汾陽) :
    당 나라 곽자의(郭子義)를 말하는데 국가에 큰 공을 세웠으며 아들 일곱과 사위 여덟이 모두 조정(朝廷)의 대관을 지냈다.
    [주 D-006] 삼군(三軍) : 중국 고대의 군사 제도가 상군(上軍)ㆍ중군(中軍)ㆍ하군(下軍) 혹은 전군(前軍)ㆍ중군ㆍ후군으로 나뉘었으므로 전군(全軍)을 삼군(三軍)이라 한다. 여기서는 조선에 나온 명 나라 군사가 중협(中協)ㆍ좌협ㆍ우협의 삼협(三協)으로 나뉘었음을 말한다.
    [주 D-007] “부들풀 새싹 나고 버들눈 텄는데 태액지(太液池 한나라 무제(武帝)가 궁성(宮城) 안에 판 못을 말함)의 누각은 석양을 띠었어라. 도리어 부럽구나, 옛날의 두자미(杜子美)는 강가에서 오히려 일천 문(門)이 닫혔음을 보았는데.” : 당나라 안록산(安祿山)의 난리에 장안(長安)이 함락되었는데 난이 그친 뒤에 두자미(杜子美)가 곡강(曲江)의 궁전을 보고 시를 짓기를, “강 머리에 천문(千門)이 잠겨 있는 것이 보이네. 가는 버들과 부들 싹은 누구를 위하여 푸르렀나.”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는 서울의 궁궐이 불타버리고 남은 것이라고는 없으니, 당 나라의 난리보다도 더욱 심하다는 뜻이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15권

    천문전고(天文典故)

    동요(童謠)

    마이산(馬耳山)은 통군정(統軍亭)과 마주 보고 있으니 중국 지경이다. 이때에 압록강(鴨綠江)이 점점 남쪽으로 옮겨와서 큰 들을 다 깎아 먹고 의순관(義順館) 문 앞이 도구(渡口)가 되었는데, 제독(提督)이여송(李如松)이 강을 건너와서 원조함에 미쳐서 그가 타고 온 말이 곧 흰 말이었으니, 그 동요의 말이 과연 징험되었다. 《재조번방지》

     연려실기술 제17권
    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

    임금의 행차가 서울로 돌아오다
  • 7월 혹은 8월이라고도 되었다. 에 이여송이 군사를 철수하여 돌아가는데, 임금이 강서(江西)에서 황주(黃州)로 가서 그를 맞아하고 전송하였다. 이어 황주에서 해주(海州)로 갔으며, 내전과 세자도 강서에서 와서 모였고, 임해(臨海)ㆍ순화(順和) 두 왕자도 왔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8권

    관직전고(官職典故)
    훈련도감(訓鍊都監)
  • 갑오년 2월에 훈련도감을 설치하였다. 처음에 평양을 회복하였을 때 임금이 도독(都督)이여송(李如松)을 찾아 사례하고, 중국 군사의 전후(前後)의 승패가 다름을 물었다. 여송이 말하기를, “앞서 왔던 북쪽의 장수들은 항상 북방 오랑캐를 막는 전법을 익혔으므로, 전쟁에 불리하였지만 지금 쓴 전법은 곧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에 있는 왜를 막는 법이었으므로 전승(全勝)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척씨의 책을 보고자 청하니 여송이 깊이 두고 내어놓지 않았다. 임금이 몰래 역관을 시켜 이여송의 휘하로부터 구해 얻었다. 임금이 해주(海州)에 있을 때 이것을 유성룡에게 보이며 이르기를, “내가 세상의 책을 본 것이 많으나 이 책은 실로 이해하기 어려우니, 경이 나를 위해 강의ㆍ해석하여 법을 본받을 수 있도록 하라.” 하였다. 성룡이 종사관 이시발(李時發) 등과 더불어 토론하고, 또한 유생(儒生)한교(韓嶠)를 낭관(郞官)으로 임명하여 중국 장수의 아문에 질문하는 것을 전담하게 하였다. 임금이 환도하게 되자 명하여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유성룡을 도제조로 삼고, 무신(武臣)조경(趙儆)을 대장으로, 병조 판서 이덕형(李德馨)을 유사당상(有司堂上)으로, 문신(文臣)신경진(辛慶晋)ㆍ이홍주(李弘?)를 낭속(郞屬)으로 삼아, 굶주린 백성을 모집하여 군사를 삼으니, 응모하는 자가 자못 많이 모였다. 유성룡이 당미(唐米) 1천 석을 청해 얻어, 하루 한 사람에게 두 되씩을 주어 모집하였고, 조경이 법을 정하여 한정하되 능히 큰 돌 하나를 들 수 있고, 능히 한 길 되는 담을 뛰어넘는 자라야 합격하게 하였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5권

    사대전고(事大典故)
    역관(譯官)
    《통문관지》에도 나온다.
  • 이여송(李如松)이 동(東 우리나라)으로 올 때, 도중에 한인(漢人)들의 무망(誣罔)하는 말을 듣고 자못 우리를 의심하는 마음이 있었다. 임춘발(林春發)과 표헌(表憲) 등이 변해(辨解)하여 깨우쳐 주려 하여도 말을 걸면 문득 성을 내는 까닭에 감히 말을 끝내지도 못하였으므로, 조정에서 이것을 근심하였다. 하루는 여송이 바둑 잘 두는 사람을 찾아, 종실(宗室)덕원령(德原令)이 그와 같이 바둑을 두었는데, 바둑을 마치자 여송이 이억례(李億禮)에게 말하기를, “통역관도 또한 바둑 둘 줄 아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바둑이란 것은 사람의 취미이나 소인은 그런 것은 능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니, 여송이 다시 묻기를, “통역관이 능하기를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였다. 억례가 말하기를, “세 치 되는 혀[舌]로써 노야(老爺)의 의혹을 풀어드리는 것이 소원입니다.” 하니, 여송이 크게 웃고 억례와 밤에 한참 동안 이야기하여 마침내 의혹이 풀리게 되었다. 《상서고사》

    동란섭필(銅蘭涉筆)

    동란섭필(銅蘭涉筆)

전증(錢曾)의 자는 준옥(遵玉)이니, 목재의 족손(族孫)이다. 서건학(徐乾學 청 나라 학자)과 함께 경전 해석을 편집하여 당시 오매촌(吳梅村 청(淸) 학자 오위업(吳僞業). 매촌은 자)ㆍ공지록(?芝麓 청(淸) 학자 공정자(?鼎?). 지록은 호)과 함께 삼대가(三大家)로 불렸다. 모두 명조의 현달한 관리로서 역시 지금의 청조에 벼슬한 자들이다. 그가 조선에 칙사로 나갈 유홍훈(劉鴻訓)에게 준 목재의 글을 주석한 것을 보면 말이 실상이 아닌 것이 많고, 또 이 제독(李提督 명(明) 장군 이여송(李如松))이 조선을 원조한 일에는 더욱 잘못된 기록이 많으니 가히 개탄할 일이다.
지금 황제가 전겸익을 배척한 조서에서 말하기를,
“오히려 문자(文字)를 빌려 구차하게 살아남은 허물을 덮어 가리려고 하였다.”
한 것은 그의 간사한 심정을 깊이 조감한 것이니, 고려판(高麗板) 유문(柳文 유종원(柳宗元)의 글)의 발(跋)을 쓴 것 같은 유가 그것이다. 그 발에는,
“고려 판각(板刻) 당(唐)의 《유선생집(柳先生集 유종원의 시문집(詩文集))》은 견지(繭紙)가 탄탄하게 정치하였으며 자획이 가늘고 빳빳해서 중국에서도 역시 좋은 책이라 할 것이다. 배신(陪臣) 남수문(南秀文 조선 때의 학자)의 발문 앞뒤에는 공손히 쓰기를, ‘정통(正統) 무오년(1438년) 여름과 정통 4년(1439년) 겨울 11월이라.’ 하였으니, 정삭(正朔)을 높여서 천하를 통일하고 있는 뜻이 내왕하는 편지에도 숙연히 나타나 있었다. 대개 기자의 풍교(風敎)가 그대로 남아 있고 명의 문화가 만맥(蠻貊)에게까지 베풀어진 것은 실로 당의 시절에 비교할 바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기울어지다시피 명이 망한 뒤에 고려는 동문(同文)의 꿈을 짓지 않은 지 오래였다. 나는 이 책을 어루만지면서 산연(?然)히 눈물을 흘렸다.”
하였다

우리나라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 홍류동(紅流洞)에 원융각(元戎閣)이 있어 명의 중군도독태자태보(中軍都督太子太保) 이여송(李如松)이 쓰던 갓과 전포와 당시에 지은 시 한 편을 보관해 두었다. 내가 일찍이 해인사를 유람할 때에 갓과 도포를 구경하니,
갓 모자 둘레가 세 아름이나 되니주D-035 그 머리통의 크기를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절에 있는 중 가운데 키가 가장 큰 자를 뽑아 전포를 입혀 보았더니 땅에 한 자나 남게 끌렸다. 만력 임진에 우리나라가 왜인의 침로를 당했을 때 공(公)은 요계보정산동군무제독(遼?保定山東軍務提督)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나라를 도와 평양(平壤)으로 달려 나와서 왜장(倭將) 평행장(平行長)을 모란봉(牧丹峰) 아래서 격파시켰다. 장사(壯士) 누국안(婁國安)을 행장의 영채에 보내서 빼앗아 간 왕자 순화군(順化君 조선 선조(宣祖)의 여섯째 아들)과 대신 김귀영(金貴榮)ㆍ황정욱(黃廷彧) 등을 빼앗아 왔다. 그는 본국으로 돌아간 지 6년 뒤에 요동에서 전사했는데, 의관을 갖추어 장사를 지내도록 조서를 내리고 소보(少保)의 벼슬을 추증(追贈)하고 시호를 충렬(忠烈)이라 불렀다. 공은 우리나라로 올 때에 군사를 몰아 조령(鳥嶺)을 넘어 문경(聞慶)으로부터 충주(忠州)로 돌아왔으므로 그의 갓과 전포가 합천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공은 본래 조선 사람으로 그의 원조(遠祖)는 영(榮)인데, 홍무(洪武) 연간에 처음으로 중국에 들어가 양평(襄平)에 살았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그의 근본을 아는 자가 드물지만 일찍이 왕이상(王貽上)의 《대경당집(帶經堂集)》에 실린 청의 병부시랑(兵部侍郞) 이휘조(李輝祖)의 신도비(神道碑)에는,
“철령(鐵嶺) 이씨는 영원백(寧遠伯) 성량(成樑)으로부터 시작하고 문벌이 명의 시절부터 드러나기 시작하여 본조에 들어와서는 가문이 더욱 커져서 안으로는 경악(經幄)에 참례하게 되고, 밖으로는 장수의 지위에 나아가게 되었다. 이씨의 선조는 조선 사람으로서 제일 먼저 양평에 옮겨 오기는 영이었는데, 영은 처음 군공(軍功)으로 철령위도지휘사(鐵嶺衛都指揮使)를 받았고, 그의 아들은 문빈(文彬)이요, 문빈의 아들 다섯중 맏이가 춘미(春美)요, 춘미의 아들이 경(涇)이요, 경의 아들이 영원(寧遠)이요, 영원의 장자(長子)가 공이다.”
했으니, 휘조는 춘미의 아우 춘무(春茂)의 후손이다. 이로써 공이 우리나라 출신인 것을 더욱 알 수가 있겠다. 숭정 말년에 공의 아들과 여백(如栢)ㆍ여매(如梅)의 아들들이 조선으로 탈신(脫身)해 온 것은 그 부형들이 조선에서 큰 공을 세웠은즉 비단 옛 은혜를 판 것만이 아니라 역시 여우가 죽을 때 머리를 제 고향으로 향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 혁명이 나면서 우리나라 역시 기휘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우리나라에 온 여러 이씨들도 감히 그 소자출(所自出)을 밝혀 말할 수 없었다. 내가 선무문(宣武門) 안 첨운패루(瞻雲牌樓) 앞에서 한 미소년(美少年)을 만났는데, 그는 말하기를, 영원백의 후손으로 이름은 홍문(鴻文)이라 하였다. 이튿날 나를 비단 점방으로 찾아와 품속에서 인쇄한 족보(族譜) 두 권을 내놓는데, 곧 《철령이씨세보(鐵嶺李氏世譜)》로서, 영으로부터 시작하여 계통을 이어서 곧 조선 사람이라 하였으니, 내가 전에 알던 것과 더욱 들어맞아 의심할 것이 없었다. 홍문의 할아버지 되는 편덕(偏德)은 금년에 나이 82세인데, 풍증으로 기동을 하지 못하고 그 손자로 하여금 두루 조선 사람의 여관을 찾아, 뜻 있는 사람을 만나 이것을 전해서 우리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마음을 살피도록 하기 위함이라 한다. 더구나 이훤(李萱 미상) 같은 자가 지금 우리나라에 벼슬을 하고 있는 줄 모르고, 나 역시 감히 영원백의 후손으로 누구 누구가 본국에 있다고 분명히 말을 못했다. 날이 저물어 여관으로 돌아와 급히 촛불을 켜고 내원(來源)의 무리와 더불어 보니, 대개 영원백의 장자가 여송(如松)이요, 여송의 한 아들이 성충(性忠)이요, 성충의 아래로는 무후(無後)라 하였는데, 이것은 성충이 달아나서 조선으로 도망해 온 까닭이다. 내 비록 이훤과 일면(一面)도 없으나, 마땅히 조선으로 나가면 전하려 한다.


일신수필(馹?隨筆)
일신수필(馹?隨筆)

7월 15일
신묘

구광녕성은 의무려산(醫巫閭山) 밑에 있는데, 앞으로 큰 강이 열리고 강물을 끌어서 해자를 만들었으며, 탑(塔) 둘이 하늘 높이 솟아 있다. 성에 못 미쳐 몇 마장 되는 곳에 큰 사당이 하나 있어 단청을 새로이 하여 찬란하게 눈에 든다.
광녕성 동문밖 다리 머리에 새긴 공하(蚣0)패하(覇夏)와 같음)가 매우 웅장하고 기묘하게 보였다. 겹문을 들어가서 거리를 지나노라니 점포들의 번화함이 요동만 못지 않다.
영원백(寧遠伯)이성량(李成梁)주D-022의 패루(牌樓)가 성 북쪽에 있다. 혹은 이르기를,

“광명은 본시 기자(箕子)의 나라여서 옛날에 기자의 우관(?冠 은(殷) 때의 갓 이름) 쓴 소상이 있더니, 명(明)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연간의 난리통에 타버렸다.”

한다. 성이 겹으로 되었는데 내성은 온전하나 외성은 많이 헐었다. 성 안의 남녀가 집집이 나와서 구경하며 거리의 노는 사람들이 수없이 떼를 지어 말머리를 둘러싸기 때문에 빠져 나가기가 힘들었다.
성 밖의 관제묘는 그 장려함이 요양의 것과 비슷하다. 문 밖에는 희대(?臺)가 있어 높고 깊고 화려ㆍ사치하며, 마침 뭇사람이 모여서 연극을 하고 있는 모양이나 길이 바빠서 구경하지 못하였다.

[주 D-022] 영원백(寧遠伯)이성량(李成梁) : 명 신종 때 요동좌도독(遼東左都督)이 되었으며, 그의 선조는 조선 사람이었다. 영원백은 그의 봉호. 이여송(李如松)의 아버지.

 

자해필담(紫海筆談)

자해필담(紫海筆談)

5월 초 3일에

이날 적이 서울에 들어왔는데, 서울의 백성들은 창고의 물품을 훔치고자 하여 먼저 궁궐을 불태워 버렸다.
거가(車駕)가 평양에 거둥하였다가, 적병이 뒤에 있다는 말을 듣고 더 가서 의주(義州)에 머물렀다.
6월 1일에 적이 우리 나라에 침입하고 대가가 서쪽으로 피난하였다는 사실을 곧 중국의 병부 상서 석성(石星)에게 호소하였다. 석성이 황제에게 말하여, 황제는 요동 총병(遼東摠兵) 조승훈(祖承訓)과 유격장군(遊擊將軍)사유(史儒) 등으로 하여금 군사 7천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고, 은 3만 냥을 지정하여 우리의 행조(行朝)에 내려주었다.
8일에 조승훈이 진군하여 평양을 포위하였다. 성은 이미 함락하였으나, 사유가 화살에 맞아 죽어 드디어 크게 패하고 돌아갔다. 황제가 다시 영하 도독(寧夏都督) 이여송(李如松)을 보내어 군사 4만을 거느리고 치게 하였다. 이여매(李如梅)ㆍ장세작(張世爵)ㆍ양원(楊元)의 군사도 다 여기에 예속시켜 섣달에 압록강을 건너왔다.
계사년 정월에 평양을 포위하여 이기고, 길게 군사를 몰아 벽제(碧蹄)에 이르렀을 때에, 적을 얕보고 방비를 하지 않았다가 적이 갑자기 이르니, 이여송이 크게 패하여 겨우 몸만 빠져 나왔다. 그러나 적은 대적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드디어 군대를 거두어 퇴각하였다.
4월에 이여송이 서울에 들어왔다. 군사를 파견하여 남쪽으로 적을 추격하니, 적은 동래(東萊)ㆍ울산(蔚山)ㆍ사천(泗川) 등지에 머물러 보루를 쌓고 스스로 굳게 지키면서 나오지 않았다.
8월에 거가(車駕)가 해주(海州)로 돌아와서 먼저 유성룡과 여러 관원들을 보내고 9월에 환도하여 잿더미가 되어버린 종묘 자리에서 오래도록 통곡하였다. 이해 겨울에 이여송이 군사를 인솔하고 돌아갔다

 

잠곡유고 제12권

묘갈명(墓碣銘)

절신군(節愼君)의 묘갈명

계사년(1593, 선조 26)에 중국의 대장 이여송(李如松)이 평양(平壤)의 왜적들을 소탕하자,
왜적들이 모두 남쪽으로 도주하였다.

 

 

재조번방지 4(再造藩邦志四)

재조번방지 4(再造藩邦志四)

요동 순안어사(遼東巡按御史)가 듣고 소응궁을 탄핵하여 관직을 삭탈하여 회적(回籍)하고, 심유경을 금의위(錦衣衛) 옥에 가두었다. 천자가 또 명하여 상서(尙書) 석성을 옥에 가두게 하였다. 석성은 자는 공신(拱宸), 호는 동천(東泉)이며, 위군(魏郡)동명(東明) 사람이다. 가정(嘉靖) 기미년(1559, 명종 14)에 진사가 되고 융경(隆慶) 무진년간에 급사중(給事中)으로서, ‘밤새도록 술마시는 것을 절제하지 않을 수 없으며, 많은 나랏일에 부지런히 하지 않을 수 없으며, 간언을 받아들이는 길을 넓히지 않을 수 없으며, 참소하는 말을 살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극간하니, 황제가 크게 노하여 조정에서 곤장을 치고 관직을 삭탈하게 하고서 오봉루(五鳳樓)에 올라 가만히 곤장치는 자를 살펴보고 중조(中朝)의 문지기에게 급사(給事)의 종인(從人)을 들이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의 친구 부랑(部郞) 목문희(穆文熙)가 석성이 곤장을 맞아 죽을까 두려워하여, 이에 먼저 백제수(白?帥)처럼 차리고 자기 겨드랑이로 석성을 끼고 나오니 문지기들이 모두 꾸짖으므로 목문희도 한편 꾸짖으며 한편 끼고 나와서 석성이 겨우 죽지 않게 되었다. 왕가빈(王嘉賓)이 상소하여 구원하려 하였으나 회답이 없었다. 봉주(鳳洲)왕세정(王世貞)이 〈속오자편(續五字篇)〉을 지었으니, 그 시는 이러하였다.
석생이 예전에 올린 소장이 / 石生昔抗章
하늘을 부여잡고 별을 움직였네 / 攀天動星辰
꽃다운 명성 온 세상에 퍼졌는데 / 芬芳一世間
뉘라서 가까이하지 않을 수 있으랴 / 誰能不見親
사귐은 모름지기 만절을 의논하고 / 論交須論晩
재주는 모름지기 참다움 논하는 것 / 辨才須論眞
가슴 속 한번 서로 헤쳐보니 / 肺腑一相披
세상엔 그런 사람 다시 없어라 / 灼然世無人
미앙궁 성대함은 / 未央鬱造?
그대의 훌륭함에 힘입었네 / 賴子表??
개연히 장수 흐르는 곳 생각하니 / 慨然念?流
세상에 드문 보배 없어지도다 / 淪沒連城珍
만력(萬曆) 초기에 와서 드디어 석성이 크게 쓰이니, 온 세상이 그 풍채를 우러러보았고, 문장과 절행이 있고 풍도가 우뚝하여 한번 보아도 대인임을 알 수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임진년(1592, 선조 25)에 여러 사람의 의논을 힘써 물리치고 군사를 보내와서 구원해 준 석성의 은혜에 감사하여 제독(提督)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에 생사당(生祠堂)을 세워 모두 제사지냈다.
처음에 심유경은 본래 하나의 무뢰한이었는데 석성이 잘못 그의 차관식병(借款息兵 공을 바치게 하고 전쟁을 중지함)하자는 유세에 빠져 본의는 비록 나라를 위한 것이나 자기 주장으로 굳혀 드디어 온 나라 사람의 말에 맞서면서 군비를 절감한다는 핑계로 싸움터의 군사를 다 거두어들였다. 소인에게 의지하여 성공하려 하였으니, 어려운 일이었다. 일본 국왕의 책봉하러 간 사신이 너무 오래 걸리므로 역시 조금은 의심이 나서 심복을 보내서 정탐하게 하였다가 다시 말을 꾸미는 데 마음이 헛갈려 스스로 무엇인지 분간을 못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황제에게 아첨하려고 진기로운 구슬과 거위털로써 동창관교 (東廠官校)의 사실 누설을 막으려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늙어서 하늘이 그의 넋을 빼앗아간 것이다. 심유경은 소인이므로 무슨 짓인들 못하랴? 일찍이 요진독무(遼鎭督撫)의 말처럼 이런 무리를 파면시켜 보내고 유정(劉綎)과 오유충(吳惟忠) 등의 방수(防戍)를 다 거두지 않았던들 또한 어찌 잘못된 사실을 속이기에 이르렀겠는가? 대신이 나랏 일을 도모함에 있어서는 오직 공정하고 사심이 없어야 될 뿐이니 어렵도다. 이때에 중국 조정에서 석성을 두둔하는 사람은, 심유경이 왜국과 접촉한 소식을 의심하여 석성의 죄를 늦추려 하고, 심유경을 두둔하는 사람은 심유경의 평양에서의 공을 거짓 칭찬하여 스스로 그 죄를 늦추려 하였다.

 

재조번방지 3(再造藩邦志 三)

재조번방지 3(再造藩邦志 三)

  • 이 제독(李提督)이 그때 평양(平壤)에 있으면서 뜻을 정하지 못하고 매우 주저하다가 사대수(査大受)가 전한 왜적의 서신을 얻고서 강화할 뜻을 결정하였다. 정조(鄭趙)는 안에 있고 심유경(沈惟敬)은 밖에 있었는데, 말하는 내용이 순순하여 들어줄 만하기에 이러한 것을 조건으로 삼아 기회(機會)를 타서 병사를 휴식케 하고 봉공(封貢)하는 의논을 결정하려고 했다. 병조 판서 이항복(李恒福)이 이를 듣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런 의논은 아마도 10년 내에는 끝내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제독이 이에 왜적의 서신을 경략(經略)에게 보내고 또 왜적이 퇴병할 뜻이 있고 왕자와 배신(陪臣)을 송환하고자 하니, 시기에 맞춰서 왕자를 도모하여 돌아오게 하면 군사를 온전하게 도강(渡江)시킬 수 있다고 진달하였다. 경략이 그 말을 믿고서 사용재(謝用梓)와 서일관(徐一貫) 등을 치장해서 보내어 중국사신으로 꾸며 왜적에게 군사를 거둬 돌아가라고 효유하고, 또 심유경(沈惟敬)ㆍ호택(胡澤)ㆍ심사현(沈思賢)의 무리를 보내어 재차 행장(行長)과 서로 만나서 그들이 퇴군해 돌아갈 것을 효유하려고 했다. 그래서 유경(惟敬)이 평양으로부터 달려왔거늘, 김명원(金命元)이 유경을 보고,

“왜적이 평양의 패전을 심중으로 분하게 여기고 있어 반드시 불선한 뜻을 갖고 있을 터인데, 어찌 다시 들어가려 하는가?”

하니, 유경이 말하기를,

“적이 제 스스로 속히 퇴군하지 않으므로 패했는데 어찌 나를 해치리오?”

하고, 그날로 경성(京城)을 향하여 나아가니, 사람들이 이를 위태롭게 여기는 이도 있었다.
제독이 또한 4월 7일에 개성부(開城府)로 돌아왔거늘 체찰사가 도원수와 함께 제독에게 글을 올려 ‘화친하는 것은 잘못이니 진격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극진히 말하자, 제독은 나의 마음과 똑같은 것이라고 말할 뿐 청허하여 실행할 뜻이 없었다. 우리 조정에서도 사자를 보내 누차 진군할 것을 요청하자, 제독이 이에 경략의 제지를 받기 때문에 내 임의대로 할 수 없다고 핑계삼아 거절하고 군사를 억제하여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였다.
하루는 제독이 적벽도(赤壁圖)를 꺼내어 접반사 이덕형(李德馨)에게 보이자, 보고나서 시 한 수를 지어 올렸다.

승부는 분명히 한판 바둑이어서/勝負分明一局?
병가에선 꾸물대며 의심함을 가장 꺼리네/兵家最忌是遲疑
모름지기 적벽 싸움에 전공이 없었음을 알진대/須知赤壁無前績
지금은 다만 장군이 단안을 내릴 땐가 하오/只在將軍斫案時

제독이 보고서 은근히 권하는 뜻이 있음을 알고 잠잠히 말없이 한참을 있었다.
제독이 또 유격장군 주홍모(周弘謨)를 사자로 부려 왜적의 병영에 보내는데, 파주(坡州)를 지나갈 때 체찰사와 도원수가 권율(權慄)의 진중에 있었다. 주홍모가 진중으로 달려들어 와서 체찰사 이하 사람들에게 기패(旗牌)에 들어와 배례하라 하거늘 두 사람이 상의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왜영(倭營)으로 들어가는 기패니 우리가 어찌 참배하며, 또 송 시랑(宋侍郞)의 ‘적병을 죽이는 것을 금한다.’는 패문이 있으니, 더욱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하고, 이 뜻을 홍모(弘謨)에게 말하였으나 홍모가 서너 차례나 강요하여도 두 사람이 대답도 않고 동파(東坡)로 돌아왔다. 홍모가 제독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 상황을 보고하였더니 제독이 대노하여 말하기를,

“기패는 곧 황상(皇上)의 명령이라 비록 수달같이 영악하고 미련한 놈이라도 보는 대로 절을 하는 법인데 저들이 어찌하여 절을 하지 않는가? 내 먼저 군법을 시행하여 치죄한 연후에 회군하겠다.”

하니, 접반사이덕형(李德馨)이 급보하기를,

“아침에 와서 사과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오.”

하였다. 다음날 체찰사와 도원수가 개성부로 급히 가서 문 앞에 나아가 성명을 통지하였으나 제독이 노하여 보려 하지 않으므로, 원수가 물러가자고 하는 것을 체찰사가 만류하여 두 사람이 공수(拱手)하고 문밖에 서 있는데 부슬비가 부슬부슬 내려 의복이 다 젖었다. 제독이 사람을 시켜 두어 번 드나들며 이런 모양을 엿보게 하고서 조금 후에 불러들였다. 두 사람은 뜰 가운데 서 있고 제독은 당상에 서 있었는데, 두 사람이 앞으로 나아가 예를 행하고서 인하여 사과하기를,

“저희들이 비록 우매하고 용렬하오나 어찌 기패를 존경해야 할 줄을 모르리까마는 다만 기패 곁에 우리 나라 사람이 왜적을 죽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패문(牌文)이 있어 혼자 마음 속으로 이를 통한스럽게 여겨 감히 외람하게도 참배하지 않았으니, 죄를 피할 곳이 없습니다.”

하니, 제독이 노기를 돌리고 웃으며,

“패문은 곧 송 시랑(宋侍郞)의 명령이요. 내가 관계한 일은 아니오.”

하고, 인하여 이르기를,

“요사이 유언비어가 대단히 많아 시랑이 만약 배신(陪臣)이 기패에 참배하지 않은 것도 내가 관용을 베풀어 문죄하지 않았다는 소문을 들으면 반드시 나까지 합쳐서 문책할 것이므로 마땅히 정문(呈文)을 만들어서 대강 이러한 사정을 변별하여 두는 것이 옳으니, 만일 시랑이 물어오면 내 이것으로 해명할 것이요, 묻지 않으면 그대로 그만둘 뿐이오”

라고 하였다. 두 사람이 예를 표하고 물러나와 제독이 말한 대로 글을 들였다. 이로부터 제독이 사람을 파견하여 왜진에 왕래하였고, 이 일은 이후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어느 날 체찰사와 도원수가 도독을 찾아가 문안하고 동파(東坡)로 돌아오는데 천수정(天壽亭) 앞에 이르러서 사대수(査大受)의 가정(家丁 집에서 부리는 남자 종)인 이경(李慶)을 만났다. 이경은 동파로부터 막 개성을 향하여 가는 길이라 마상에서 서로 읍하고 지나서 초현리(招賢里)에 이르렀는데, 한인(漢人) 세 사람이 말을 타고 달려와서,

“체찰사는 어디 있소.”

라고 노기 띤 소리로 묻기에, 유성룡(柳成龍)이 응답하기를,

“나요.”

라고 하자, 그 사람이 성룡을 꾸짖으며 말을 개성 쪽으로 돌리라고 하고, 한 사람은 철쇄(鐵鎖 죄인을 묶는 철끈)를 가졌는데 긴 매채로 말 궁둥이를 마구 치면서 빨리 달려가라고 하니, 성룡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말을 돌려 개성을 향해서 달리는데 좇던 이들은 다 뒤로 떨어지고 다만 군관 김제(金霽)와 종사관 신경진(辛慶晉)이 힘껏 뒤를 따를 뿐이었다. 청교역(靑郊驛)을 지나서 성 모퉁이에 닿으려는데 또 다른 1기(騎)가 성안으로부터 말을 달려나와서 3기와 말을 나누니, 3기가 그제서야 성룡에게 읍하며 가도 좋다고 하였다. 성룡은 멍하니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돌아왔다. 다음날에야 이덕형의 통문에 의해서 비로소 그 동안의 전말과 곡절을 알게 되었다. 제독이 가정(家丁)을 신임했는데, 가정이 바깥으로부터 들어와 제독에게,

“조선이 강화하려고 하지 않아 임진강의 선척을 다 치워서 왜영으로 사자가 왕래 할 수 없게 했습니다.”

고 하자, 제독이 듣고서 갑자기 화를 내며 체찰사를 잡아다가 곤장 40대를 치려고 하였다. 성룡이 채 오지 않은 동안에 제독이 눈을 부릅뜨고 팔을 걷어 휘두르며 앉았다 일어났다 하여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다 두려워 하였는데, 조금 있다가 사 총병(査總兵)의 가정 이경(李慶)이 이르자, 곧 제독이,

“임진강에 배가 있더냐?”

고 물으니, 경이 말하기를,

“선척이 왕래하여 아무런 방해도 없습니다.”

라고 하자, 제독이 즉시 사람을 보내어 성룡을 쫓던 일을 제지토록 한 것이었다.
후일에 제독이 유격장군 척금(戚金)과 전세정(錢世禎) 등을 사자로 부려 기패를 받들어 동파에 이르러 체찰사유성룡과 도원수김명원(金命元)과 관찰사이정형(李廷馨)을 불러 한 자리에 앉아서 조용히 말하기를,

“왜적의 두목이 왕자와 배신을 송환하고 경성에서 퇴군하여 빠져나가기를 청하니, 이제 마땅히 그 소청을 허락한다고 속여 적을 성에서 퇴군하게 한 후에 모계를 써서 적을 추격하여 섬멸한다면 계략대로 성공할 수 있다.”

고 하거늘, 체찰사 등 여러 사람이 다 적의 괴수가 지극히 교활하고 간사하여 그 말을 믿지 못할 것으로 여긴다고 하여 논쟁을 그치지 않으니, 세정(世禎)이 천성이 조급하여 노발하여 크게 꾸짖기를,

“그러면 너희 국왕은 왜 성을 버리고 도망해 달아났는가?”

라고 하자, 성룡이 말하기를,

“천국(遷國)하여 보존함을 도모하는 것도 또한 한 가지 방법이오.”

하자, 척금(戚金)은 다만 자주 성룡 등과 세정을 보고 미소를 지을 뿐 말하지 않았다.
조정에서 중국이 강화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대신과 대각을 모이게 하여 강화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의 가부를 물었더니, 좌우가 다 아뢰기를,

“계략으로 제어하여 전쟁할 시기를 늦춰 강화해 두는 것이 사리에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

고 하였으나, 오직 윤두수(尹斗壽)와 이항복(李恒福) 등은 절대로 강화해서는 안 된다고 하고, 동부승지이호민(李好閔)도 또한 아뢰기를,

“만대의 원수를 하루아침에 강화를 허락해 준다면 전하께서 무슨 면목으로 성종과 중종 양성(兩聖)을 종묘에서 배알하시리까?”

하자, 상이 노한 목소리로 이르기를,

“시종 적에게 굴복하지 않는 자는 나와 이호민 한 사람뿐이로다.”

하고, 이내 경략과 제독의 처소로 사신을 파견하여 자문(咨文)을 전하여, 강화 요청을 허락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논란 항의하였으나 양쪽 아문에서 다 올바로 들어 주지 않았다. 이를 증명한 시가 있다. 시는 빠졌음.
심유경(沈惟敬)이 병부의 명령을 얻은 뒤 초9일에 강화를 경유하여 배로 용산(龍山)에 당도해서 청정(淸正)ㆍ행장(行長)과 함께 선상에서 회동하였는데 적장들이 각각 강화해 줄 것을 청하자, 유경이 유시하기를,

“천조(天朝)에서는 너희들이 기한대로 퇴군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양(平壤)을 공격하여 함락시켜서 천조의 위엄을 보인 것이니, 만약 전일의 약속을 준수하여 성심으로 귀순한다면 어찌 굳이 곤궁한 군사를 섬멸하겠는가? 이제 두 찬획(贊?)이 군사 40만을 통솔하여 하나는 조령(鳥嶺)을 막아 너희들이 돌아갈 길을 끊어놓고 다른 하나는 한강을 막아 너희 식량길을 봉쇄하고, 경략과 제독이 또 친히 30만 대군을 통솔하여 곧 당도할 것이다. 너희들이 왕자와 배신을 송환하고 군병을 거두어 남쪽으로 돌아가면 봉사(封事)하는 일은 성취할 수 있을 것이며 양국도 전쟁의 피해가 없을 것이니, 어찌 다 함께 편안하지 않겠는가?”

하자, 행장(行長) 등은 오히려 유경(惟敬)을 가두어 두고 왕경(王京)을 고수하여 봉공(封貢)이 합당하게 되도록 한 후에 퇴군하고자 하였다. 대장 평수가(平秀家)와 부장 삼정장성(三成長盛)ㆍ길계융경(吉繼隆景)이 다같이 불가하다 하면서 곧 47인의 영장(營將)들과 더불어 와서 사례하면 19일에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겠다고 약속하고 즉시 부교(浮橋)를 만들어 경성과 용산에 남은 쌀 2만 석을 가져다 심사현(沈思賢)에게 주었다. 평수가와 모든 괴수 이하는 다 물러갔으나 청정(淸正)만은 왕자와 배신을 송환하지 않았다. 심유경 또한 서일관(徐一貫)ㆍ사용재(謝用梓) 등 두 사람과 함께 떠났다. 19일 제독이 대군을 영솔하여 동파(東坡)에 이르러 사 총병(謝摠兵) 영막 안에서 잤다.
20일 제독이 경성에 들어와 소공주댁(小公主宅)에서 거처하였다. 체부(體府) 이하들도 따라 들어가서 성 안에 살아남은 백성을 보니 백에 하나 정도도 생존하지 못했고, 그 생존했다고 하는 자도 다 주림에 지쳐 파리하고 피곤하여 얼굴빛이 귀신같았다. 날씨가 불과 같이 뜨겁고 역병(疫病)이 매우 극성하여 죽은 사람과 죽은 말이 여기저기 그대로 버려져 있어 더러운 냄새가 성 안에 꽉 차, 길가는 행인들이 코를 가리고 지나다녔다. 수년 전에 흉성(凶星)이라고 하는 형혹(熒惑)이 우리 나라를 침범하여 죽음을 알리는 시기(尸氣)를 쌓더니, 별안간 이런 화가 있게 되었다. 또 한성 판윤임열(任說)이라는 사람이 정부에 건의하기를,

“경성 바깥 사방 산기슭에 백성이 많이 침범하여 경작하면서 흙을 쌓아 조그마한 무더기를 만들어서 상호간의 경계를 삼으니, 이런 것이 동소문(東小門)으로부터 숭인문(崇仁門)수구문(水口門)을 지나 남벌원(南伐原) 벌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나열되어 있어 바라보면 다닥다닥 붙은 것이 무덤 같아서 보는 사람들이 길한 징조가 아니라고 합니다.”

하였는데, 이제와서 평안도 중 몇 명이 들것과 가래와 삽 등을 가지고 시체와 해골을 거둬서 큰 구덩이를 많이 만들어 장사를 지내니, 이것이 다 성의 동쪽에서 있었던 일이므로, 사람들이 따비를 하여 흙무더기를 만든 흉조에 응한 것이라고 하였다. 공공건물이나 개인의 집이 다 없어졌고 다만 숭인문 동쪽 남산 아래 일대의 적도들이 거처하던 데만 약간 남아 있고 종묘와 삼궐(三闕)과 종루(鍾樓)와 각 부사(部司)의 관학(館學) 건물로서 큰 거리 북쪽에 있던 것은 싹 쓸다시피 불타버린 잿더미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체찰사와 도원수가 모든 관원을 인솔하여 종묘 빈터에 나아가서 통곡하고 다음에 제독 문하에 이르러서 사후(伺候)하는 여러 신하들을 보고 부르짖으며 통곡하기를 오래도록 하였다. 다음날 아침에 다시 제독 옆에 기거하면서 말하기를,

“적병이 막 물러갔으니 반드시 멀리 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속히 군사를 몰아 추격해서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 바라나이다.”

라고 하였더니, 제독이 말하기를,

“나의 뜻도 본래 그러하나 급히 추격하지 못하는 것은 한강에 선박이 없기 때문이다.”

하니, 체찰사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만일 노야(老爺)께서 적을 추격하고자 하시면 곧 먼저 강에 나아가서 선척을 정비하겠습니다.”

하니, 제독이 말하기를,

“매우 좋도다.”

하기에, 체부 이하가 바로 강으로 달려 나가서 배를 거둬 모으는데, 때마침 경기 우감사 성영(成泳)과 수사(水使)이빈(李?)이 벌써 대소 선척을 거두고 있어 다 함께 한강에 모아 보니, 거의 80여 척이나 되었다. 체부가 돌아와 제독한테 보고하기를,

“배를 다 장만했으니 군사를 도강시킬 수 있습니다.”

하자, 제독이 중협장(中協將) 이여백(李如栢)에게 명령하여 1만여 명 병사를 인솔하여 강상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군사가 반쯤 건너자 해가 벌써 저물었고 여백이 홀연히 발병이 났다고 하며 말하기를,

“마땅히 성중으로 돌아가서 병을 치료한 후에 진격하겠다.”

하여, 드디어 교자를 타고 돌아오니, 한강 남쪽에 건너가 있던 군사도 다 다시 건너서 성안으로 들어왔다. 생각해보건대, 제독이 실상 적을 추격할 뜻이 없으면서도 다만 속이는 말로 응하는 척했을 따름이었다.
전라 순찰사권율(權慄)이 또한 군사를 이끌고 성안으로 달려 들어오다가 적이 벌써 강을 건너간 것을 알고서 급히 선봉에게 명령하여 정예병을 거느리고 빨리 달려 적의 뒤를 쫓게 하고, 그 자신도 또한 대군을 정돈 점검하였다. 군사가 출정하기 전에 제독이 이 소식을 듣고 모든 장수와 함께 의논하여 말하기를,

“조선 장관(將官) 중에는 오직 전라 순찰사만이 의기에 차있고 전쟁을 잘하여 사졸들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명령에 복종하는 터인데, 이제 만일 무리를 다 이끌고 적병을 추격하면 내가 강화하는 일을 그르칠 것이다.”

하고, 급히 유격장군 척금(戚金)을 보내어 노량진으로 달려가서 나룻배를 압수하여 사졸들을 도강하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다. 척금이 이에 심복을 보내어 권율이 계획한 일을 탐지하여 대비토록 하게하고 뒤미처 도착하여 힐난하기를,

“공(公)이 이노야(李老爺)의 분부를 기다리지 않고 곧장 적을 추격하는 것은 무슨 이유요?”

하자, 권율이 대답하기를,

“적병이 달아나면 진격하는 것은 우리들의 직책이오. 이노야가 진격하려 하지 않는 것은 미쳐 알지 못하였소.”

하니, 척금이 묵묵히 아무 말없이 한참 동안 있다가 심복에게 비밀리 명령하여 그 동정을 엿보아 가벼이 행동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때에 송 경략(宋經略)이 적도가 다 거둬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곧바로 청천강(淸川江)을 건너 평양에 진격해 이르러 제독에게 적병을 추격하라고 독촉하게 하는 한편 우리 나라에도 자문(咨文)을 전하여 서로 협동해서 진격하라고 하였다. 조선에서 윤근수(尹根壽)를 접반사로 삼고 이정구(李廷龜)와 황신(黃愼)과 유몽인(柳夢寅)을 근수(?隨 뒤따름)로 삼았다. 강학 배신(講學陪臣) 이정구가 칠언사율 두 수를 지어 경략을 칭찬하였다.

상서가 파견나와 평양을 진압하니/尙書行省壓箕都
한나라 대궐의 풍운이 조선에 접하였네/漢闕風雲接海隅
장막 아래 대장기는 무기창고를 나눈 듯 하고/帳下牙旌分武庫
진영 앞의 용맹스러운 군사는 금오군을 걷어왔네/陣前?虎撤金吾
신묘한 책략을 지휘하는 어양의 장군이며/指揮神算漁陽將
웅혼한 담론을 쏟아내는 노나라 유자라/顚倒雄譚魯國儒
후일에 공을 이루고 천자에게 돌아가면/他日功成歸袞?
동방 사람이 서쪽을 바라보며 공을 칭송하리라/東人西望我公呼

장군의 정절(旌節)이 황도를 출발하니/將軍旌節發皇都
빛나는 무기와 정예한 군사가 사방을 진동하네/勁弩精兵動四隅
기자의 가르침이 오랑캐에 무너질뻔 하였는데/八敎遺封幾卉服
한 번 바로잡은 기이한 공적은 관중(管仲)을 잇겠네/一匡奇績繼夷吾
병영 속에서도 글을 지어 뛰어난 문장가를 부끄럽게 하며/楯頭磨墨?雄藻
군영 속에서도 경전을 비껴 들고 썩은 선비를 비웃도다/帳下橫經笑腐儒
국난을 물리쳐 공을 이루고 돌아가 학예를 강론커든/排難功成還講藝
성군의 은혜 만년이나 칭송하기를 빌으리/聖恩唯祝萬年呼

경략이 또 부총병 유정(劉綎)에게 명령하여 군사의 최전방으로 달려가 붙좇게 하고, 찬획(贊?) 유황상(劉黃裳)으로 전군을 살펴 감독케 하여 전군이 다 왜적의 뒤를 바짝 따라가다가 기회를 잘 타서 저들이 해이해지거든 공격하라고 하였는데, 왜적이 보보(步步)마다 영(營)을 만들고 당번을 나누어 교대하며 쉬는 방법을 써서 천천히 퇴군하고 있었다. 유정이 5천 병사를 거느리고 충주조령으로 추격하였는데, 조령이 옆으로 70여 리나 뻗쳐 있고 절벽이 뾰쪽뾰쪽 깎아놓은 듯한데 그 속은 하나의 잔도(棧道)로만 통행하고 관목(灌木)이 빽빽이 얽혀서 기병이 대오를 차리지 못할 형편이었고, 왜적이 험악한 지세로 방패를 삼아 막고 있어서 군사들이 감히 가까이 바싹 접근하지 못하였다. 심유경(沈惟敬)이 왜영 중에 있으면서 대군이 뒤에 따르고 있음을 알고 강화하는 일을 저해할까 걱정하여 사람을 보내어 제독에게 보고하여 추격해 오지 못하게 하고서 슬금슬금 부산포(釜山浦)로 옮겨 가 왜적이 머무를 곳을 구축하고, 한편으로 농사 지어 씨앗도 뿌려 오래 머무를 계획을 하였다. 울산 서생포(西生浦)로부터 동래ㆍ김해ㆍ웅천(熊川)ㆍ거제에 이르도록 머리와 꼬리가 서로 연하여 16둔인데 다 산을 의지하고 바다를 이용하였고 성벽을 쌓고 참호를 파는 등 계교가 심히 흉악하고 교활하였다. 부총병 왕유익(王有翼)과 참장 장응충(張應?)과 조지목(趙之牧)ㆍ장기공(張奇功)이 경략의 격문에 의하여 회군해 갔다. 조정에서는 이에 한성판윤유근(柳根)을 파견하여 경성에 달려가서 유민(遺民)을 위무하고 교서를 내렸는데, 다음과 같다.

내가 서천(西遷)하면서 어느 덧 해가 지나갔도다. 불쌍한 우리 인민이여! 창이나 칼날에 맞아 고통을 겪는 자 얼마이며 포박을 당하여 굶어 죽은 자 얼마나 되는가? 내 일찍이 빈터가 된 국토와 피로 얼룩진 우리 백성을 꿈속에서도 슬퍼하여 매양 밤중에 일어나 나도 모르게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려 슬퍼하였는데, 더욱이 선왕의 원릉(園陵)과 종묘 사직의 욕됨을 또 어떻게 말로써 다할 수 있겠는가. 동쪽으로부터 온 사람이 말하되, ‘너희들 백성들이 성중으로 들어가 사는 자가 가득히 많다.’ 하니, 너희들이 어찌 나를 버리고 적도를 좇아 부귀를 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서이겠는가? 이는 붙잡히고 갇혀 있는 노약자가 가난하여 조금이라도 얻어 먹을 것만 생각하여 아직 구차하게 목숨을 던져 의탁한데 불과할 따름이다. 그 가운데에는 혹 적에게 생포되어 힘이 부족하여 빠져 나오지 못하는 자와 왕래하면서 적의 내용을 탐색하는 자와 이리저리 주선하여 어떻게 하면 기회를 타서 적의 원수를 갚을까 하고 생각하는 이도 있다 하니, 내 너희 실정을 살펴보건대, 듣고 보고 설명을 기다리지 않아도 자연히 환히 드러나는 것이다. 내 오랑캐의 침략을 막지 못하여 너희들을 이런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나에게 죄가 있는 것이요 너희에게야 실상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지금 성천자(聖天子)의 어진 덕과 위업으로 제독군무 도독동지 이여송(李如松)이 한 번 북을 쳐 진격하여 도강해 오매 적진이 흩어져 도망하였고 대쪽을 쪼개는 것 같은 형세가 벌써 경성에 다달았으니, 너희 서민의 애타는 갈망과 죽음에서 다시 소생하는 경사가 나와 차이 없이 똑 같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또한 염려되는 것은 천병(天兵)이 성루에 임박하매 적도들이 반드시 죽을 것을 알고 악독한 짓을 닿는대로 하여 한껏 극성을 부려 약간 남은 집채는 다 불살라 버릴 것이며 남아 있는 백성을 다 죽일 것이니, 내 염려가 이에 미치니 먼저 기쁘기도 하였지만 또한 슬프기도 하다.

이에 승정원도승지유근(柳根)을 명하여 한성부판윤을 삼아 성중의 백성을 위무하고 민가와 여염을 순회하여 보살피며 나의 심중에 있는 참뜻을 펴서 효유하게 하고, 또 형조 판서 이헌국(李憲國)과 원천군(原川君)휘(徽)와 순녕군(順寧君) 경검(景儉)을 명하여 조릉사(朝陵使)를 삼아 차견하여 선왕의 능을 순시하라고 하였다. 너희 백성들 중에서 이왕에 죽은 사람은 할 수 없거니와, 살아 남은 사람은 몇이나 되는가? 그 적도를 좇아다닌 것도 또한 진정에서 한 것이 아닌데 더군다나 왜적을 좇지 않은 백성이야 말할 것도 없다. 관리들에게 명령하여 다 너그러이 용서해 주라고 하였으니, 각기 다 나의 뜻을 충분히 헤아려 믿어서 옛모양 그대로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편안히 살아야 할 것이다.

슬프도다! 당시의 일을 차마 더 무슨 말로 보태리오. 종묘와 사직을 여기 모셨고 백성이 이에 있으니, 내 비록 현명하지 못하나 어찌 나라의 군주가 사직을 사수해야 하는 의리를 알지 못하겠는가? 흉악한 창과 칼이 극성을 부리고 각처의 모든 성벽이 다 허물어져 멸망하는데 내 몸이야 어떻게 되든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종묘 사직은 어디로 돌아가 어떻게 될 것인가? 흥망을 추측할 수 없는 것을 될대로 되라고 방임하고 그저 앉아서 멸망을 당해야 할 것일까? 이야말로 진실로 어려운 일이다. 빈풍(?? 주(周) 나라의 도읍지)과 같은 옛도읍을 내 차마 소홀히 버리지 못하며 관서지방인 이 황량한 한 모퉁이 변역에 내 어찌 좋아하여 멀리 왔으리오.

가만히 생각해보면, 왜적이 침공해 오도록 한 이유는 바로 길을 빌려달라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나에게 같이 거역하자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데에 있을 따름인데, 내가 거의 망하게 되었으니 차라리 가슴 속을 부모에게 호소하고 대의를 천지에 밝혀 천하의 충신과 의사로 하여금 나의 이 고충을 알게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외로운 필마로 티끌을 뒤집어쓰며 춥고 더운 것을 겪어 지나니 장막은 나부껴 떨어져 쓸쓸하고 오래 강가에 머물러 있으매 나의 심정과 나의 실정 또한 슬프도다. 가면 반드시 돌아오는 것은 천도의 떳떳한 이치요, 어지러움이 극도에 이르면 평화스럽고 잘 다스려지는 정치를 사모하는 것은 인정의 필연적인 귀추이니, 와신상담하고 초구(楚邱)에 궁성을 이뤄 너희 백성과 함께 참신한 정치를 시작할 것을 도모 추진하나니, 백성들이여! 또한 나의 개과함을 허여해 주겠는가?

이로부터 앞으로 여생 동안 추호라도 황제의 은혜를 저버려 정치를 잘못하여 백성을 병들게 하거나 내 혹시라도 고치지 못하여, 지금의 천도에 순종하는 것을 혹시 백성이 복종하지 않는다면 나의 죄 있고 없음을 전부 황제에게 아뢰어 그 결단을 받으리라. 무궁한 삶의 즐거움이 거의 이제부터 시작되리니, 산사람은 좋거니와 죽은 백골은 더욱 불쌍하도다. 아아! 하늘의 힘을 힘입어 중흥의 공을 이루는도다. 백성을 얻은 자는 창성하나니, 모두 다 하늘이 이 나라에 중흥을 명하심이라. 그래서 이에 교시함이니 생각하여 마땅히 십분 알지니라.

이에 유근(柳根) 등이 교서를 받들고 서울로 들어와 유민을 불러 교서를 읽어 선유하니, 백성들은 모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형조 판서이헌국(李憲國)ㆍ원천군(原川君) 휘(徽)ㆍ순녕군(順寧君)경검(景儉) 등이 여러 왕릉을 살펴보고 예를 행하였는데,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에 이르러 보니, 가시덩굴이 자라 솟아 있고 영역(塋域)은 무너져 옥체(玉體)의 모신 바를 자세히 알 수 없고, 능 위에는 짐승의 발자국이 여기저기 있었다. 헌국 등은 서로 목을 놓아 통곡하고 전례(奠禮)를 행하는데 원천군으로 전관(奠官)을 삼아 엄숙히 행하고 물러나 돌아와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 보다 앞서 융경(隆慶) 연간에 시제가 제천정(濟川亭) 기둥에 다음과 같이 붙어 있었다.

일찍이 임이 파서 심으신 오얏나무/曾見先朝種李辰
그 꽃이 피고지고 이제 이미 열두 해요/花開一十二回春
망주석 말이 없이 우두커니 서 있는데/詩題華表千年柱
한 줌 흙 청산 속에 외로히도 누었겄다/淚灑靑山一?塵
신륵사 새벽 종은 바람결에 울려오고/風岸曉鍾神勒寺
광나루 저녁피리 연기 속에 들려오네/烟沙晩笛廣陵津
맑은 가을 여강에 노를 저어 가는 배에/淸秋叩?驪江去
뉘라서 짐작하리 신선이 타고 있음을/樓上何人識洞賓

그때 어떤 선인(仙人)이 이 시를 지어 놓고 떠나갔다 하는데, 청산은 한 웅큼의 티끌이라[靑山一?塵]는 구절이 여기서 증험되었다.
5월 제독 이여송이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새재를 넘어 문경에 이르러 제장에게 분부하되, 총병 유정(劉綎)은 복건(福建)ㆍ천촉(川蜀)ㆍ남만(南蠻) 등지의 군사를 모아 성주(星州)팔거현(八?縣)에 주둔하게 하고, 총병 오유충(吳惟忠)은 남병을 거느리고 선산(善山)봉계현(鳳溪縣)에 주둔케 하고, 총병 이녕(李寧)ㆍ총병 조승훈(祖承訓)ㆍ총병 갈봉하(葛逢夏)는 요광(遼廣)의 군병을 거느리고 거창에 주둔케 하고, 유격 낙상지(駱尙志)ㆍ총병 왕필적(王必迪) 또한 남병을 거느리고 경주에 주둔케 하여 사면으로 빙 둘러 에운 태세를 취한 채 진격하지 않았다. 군량은 호서와 호남에서 수급하였는데 산천이 가로 막히고 도로가 험난하여 여러 군(軍)에 각기 공급하느라 백성들이 매우 힘들었고 농사철을 잃어 백성들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거주할 곳을 잃으니, 형세가 지탱할 수 없게 되었다. 호조 판서이성중(李誠中)이 대군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와 군량을 주선하여 맡자 상하가 모두 믿었는데, 함창(咸昌)에서 병사하였다. 애초에 조정에서는 참판을 파견하여 그 책무를 맡기려 하였는데, 성중이 말하기를,

“나 자신이 탁지(度支)의 책임자로 어찌 동료에게 미루겠는가? 어떠한 고난이 닥치더라도 내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하고, 군전(軍前)으로 달려 나갔다가 이때에 이르러 피곤하여 일어나지 못하였는데, 조정에서는 듣고 못내 슬퍼하고 즉시 호조 참판정광적(鄭光績)을 보내 이를 대신하게 하였다. 또 한편 이조 판서이산보(李山甫), 조도사 강첨(姜籤)을 충청도로, 검찰사 김찬(金瓚)ㆍ조도사 변이중(邊以中)ㆍ임발영(任發英) 등을 전라도로 파견하여 군량 수만 석을 긁어모아 군자로 수급하고, 뒤이어 홍문관 부교리박홍로(朴弘老) 등을 보내어 양도의 전수(轉輸)를 재촉 독려케 하고, 또 경략의 지시를 받아 공조 참판 이노(李輅)ㆍ좌랑 최흡(崔洽)을 보내어 요해처에 방비를 갖추도록 하고, 3도의 건장한 민정(民丁)을 모두 뽑아 권율로 하여금 유정(劉綎)의 군영 안에 두어 훈련시켜 쓰도록 하고, 또 좌의정윤두수(尹斗壽)를 보내어 제총(提摠)으로써 위만(違慢)을 감독케 하였다. 도원수김명원(金命元)ㆍ순찰사권율ㆍ순별사이빈(李?)ㆍ별장최원(崔遠)ㆍ절도사고원백(高彦伯)ㆍ의병장 곽재우(郭再祐)ㆍ창의사(彰義使)김천일(金千鎰)ㆍ경상 병사 최경회(崔慶會) 등은 의령(宜寧)에 모여 적을 진격 소멸하려고 서로 기회를 보고 있는데 경략이 또한 패문(牌文)을 발송하여 적을 추격하게 하고, 제독의 망설이는 태도를 몹시 허물하자, 제독이 경략을 돌아보고 큰 소리로 진중에 나가 적의 기세가 매우 높으므로 절대로 결전할 수 없다고 하니, 경략이 그만 이 말만 믿고 명나라 조정에 끝까지 좇지 않고 적과 우호를 맺기를 전적으로 주장하여, 사신을 보내 적으로 하여금 빨리 바다를 건너도록 권유하고, 이어 서일관(徐一貫)과 사용재(謝用梓)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 관백(關白)을 낭고야(郞古邪)에서 만나보고 돌아오게 하였다. 심유경 또한 수가(秀嘉)로 하여금 관백에게 아뢰어 조선의 왕자를 행장(行長)의 진영으로 옮기도록 하고, 곧 소서비탄수(小西飛彈守)ㆍ구대부(久大夫)와 더불어 왕경에 이르자, 제독이 왜장더러,

“너희들이 전에 우호를 요청하고도 아직도 조선 왕자를 돌려보내지 않고 있으니, 장차 어떻게 복명하겠는가?”

하니, 비탄수가 곧 차관(差官)을 부산으로 보내 왕자를 데려오도록 청하거늘, 제독이 가정(家丁)인 누국안(婁國安)을 보내 명하여 첩(帖)과 비탄수가 손수 쓴 서신을 가지고 가서 두 왕자를 모셔 오게 하였다. 부총병 손수렴(孫守廉)은 경략의 격문으로 인해 돌아갔다.
6월 적이 비로소 임해군(臨海君)ㆍ순화군(順和君)ㆍ재신(宰臣)김귀영(金貴榮)ㆍ황정욱(黃廷彧)ㆍ황혁(黃赫) 등을 돌려보내며 심유경으로 하여금 돌아가 보고케 하고는, 진격하여 진주성을 포위하고 함안(咸安)을 침범하며 전라도로 핍박하면서 장차 한강 이남을 회복하여 경계로 삼겠다고 떠벌리니, 이는 평수길이 저희 병사가 일찍이 김시민에게 참패한 적이 있으므로 이제 여러 적으로 하여금 연합하여 힘을 합쳐서 진주성을 기어코 섬멸하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창의사김천일이 이 소문을 듣고 그 병사 4백 명을 거느리고 제일 먼저 성안으로 들어가니 양산숙(梁山璹)이 따랐다. 천일이 성을 나가서 함께 죽지 말도록 권하니, 산숙은,

“이미 일을 같이 하였으니, 군중에서 같이 죽겠습니다.”

하였다. 또한 천일의 사인(士人)으로서 성을 나가 스스로 보전하고, 군대는 부장에게 맡길 것을 권하여도 천일은 끝내 듣지 않고 오로지 촉석루(矗石樓) 방면을 지키고 있었고, 경상 병사 최경회ㆍ충청 병사 황진ㆍ의병복수장 고종후ㆍ좌도의병장 장윤(張潤)ㆍ이계련(李繼璉)ㆍ민여운(閔汝雲)과 김해 부사이종인 등이 차례로 입성하였다. 최경회가 우도의 의병을 거느리니, 이른바 우의병이다. 호령이 엄숙하고 처사가 정밀하고 민첩하므로 백성들이 무척 의뢰하고 믿을 수 있다 하였으며, 선거이ㆍ홍계남 등은 적병은 많고 아군은 적으므로 내지(內地)로 물러가 지키는 것만 못하다 하여 군사를 이끌고 성을 나와 운봉(雲峯)으로 퇴진하니, 김천일이 말하기를,

“호남은 우리 나라의 근본이요, 진주(晉州)는 실로 호남의 방패이니, 진주를 지키지 못하면 이는 바로 호남을 없애는 것이다.”

하고, 드디어 제장과 더불어 사수하기를 다짐하였으나, 부상이 더욱 심하고 무기가 텅비어서 믿을 만한 것이 없었다. 며칠이 지나자 적의 기병이 성 동쪽에 이르는지라 정예로운 기병을 뽑아 이를 격퇴하였는데 적은 이내 비루(飛樓) 8좌(座)를 만들어 세워 성안을 굽어볼 수 있도록 하고 또 성밖의 대나무를 베어 엮어서 망루와 방패를 만들고 그 사이에 포혈(砲穴)을 늘어 놓고, 그 안에서 조총을 비오듯 쏘니 성안에 사람들은 머리를 내밀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종인(李宗仁)ㆍ김준민(金俊民) 등은 힘을 다해 싸워 항거하였다. 목사 서예원(徐禮元)과 판관 성수경(成守璟)은 천장지대 차사원(天將支待差使員)으로 상주(尙州)에 오래 머물러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낭패하고 돌아온 지 겨우 2일이었다. 적은 또 토산을 쌓아 올리고 그 위에다 집을 세워 압박하였는데 포환을 비오듯 쏘았다. 성안에서도 적이 쌓아 올린 토산을 향하여 대포를 쏘아 적의 산 위의 집을 뭉그러뜨렸다. 적장 수 명이 성 동쪽 산마루에 모였는데, 성안에서 엿보아 몰래 포를 쏘아 둘째 자리에 앉은 자를 맞추어 거꾸러뜨렸다.
25일 적이 성안에다 불을 던지는 바람에 연소된 가옥들이 매우 많고 화염이 충천하니, 성안의 사기가 꺾이고 예원은 겁에 질려 당황하여 호령이 전도되고, 더구나 김천일과 더불어 서로 용납되지 못하여 주객이 불화하였다. 어떤 늙은 기생이 조용히 막하사(幕下士)에게 말하기를,

“전날 김 목사(김시민(金時敏))께서 이 성을 지킬 때에는 상하가 서로 화합하여 동심 협력했기 때문에 시종 시켜왔지만 지금 사세를 살피건대, 전날과는 아주 딴판이니, 우리들의 생사는 알 수가 없다.”

하니, 김천일이 듣고 중인의 마음을 미혹시키는 요망한 말이라 하여 그 기생을 목베었다. 군중에서 급히 장윤(張潤)을 대신 가수(假守)로 삼아 예원의 직무를 맡게 하자, 온 군중이 약간 안정되었다.
28일 새벽녘에 황진(黃進)과 장윤이 차례로 탄환에 맞아 죽었다. 이전에 황진이 진주성으로 올 때에 의병장 곽재우가 만류하여 말하기를,

“진주는 고립된 성이기 때문에 지킬 수 없고 더구나 공은 충청의 절(節)을 받았으니 진주성을 지키다가 죽는 것은 직책이 아니오.”

하니, 황진이 이에 대답하기를,

“비록 그렇다 하나 이미 창의사에게 허락하였으니, 비록 죽는다 하더라도 식언할 수는 없소.”

하였다. 재우는 그 뜻을 돌리지 못할 것을 알고 술잔을 잡고 서로 이별하였는데,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서는 무척 슬퍼하였다. 김해부사이종인(李宗仁)이 그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하고 장윤이 죽은 곳에 직접 들어갔으나, 성안은 이미 기운이 빠지고 외부의 지원군이 이르지 않은 상태인데 적은 자주 군사를 더하여 급히 공격하여 아우성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때마침 하늘이 큰 비를 내려 성첩이 쉽사리 뭉개지니, 적병은 개미 떼처럼 기어오르고 성안에는 화살과 돌이 없어져 한갓 죽목(竹木)으로 찌르고 내리칠 뿐이었다. 장윤이 서예원을 대신하여 성안을 순시하다가 달아나버리니, 적이 드디어 온통 에워싸고 올라왔다. 김천일이 바로 누상(樓上)에 있는데 좌우가 모두 흩어졌으나, 오직 큰아들 상건(象乾)과 막하사 양산숙 등 편비(?裨)와 친병(親兵) 근 10여 명만이 달아나지 않고 곁에 남아 있으면서 외치기를,

“일이 이미 글렀다. 장차 어떻게 할까?”

하고, 좌우에서 도망가기를 권하였으나, 천일은 움직이지 않고 말하기를,

“일을 시작하던 날에 나는 이미 목숨을 바치기로 결단하였다. 너희들이 가련하구나.”

하고는, 똑바로 앉아 일어나지 않고 그 아들 상건(象乾)을 돌아보며,

“마땅히 여기에서 죽어야 한다.”

고 하였다. 조금 있다가 적도가 닥쳐 오는지라, 천일이 최경회와 더불어 손을 잡고 통곡하고 함께 북쪽을 향하여 재배하고 먼저 병기를 물 속에 버리고 그 아들 상건과 서로 안고 다락 아래 깊은 물 속에 몸을 던져 죽으니, 최경회ㆍ고종후(高從厚)ㆍ문홍헌(文弘獻)ㆍ양산숙(梁山璹)ㆍ최희립(崔希立)ㆍ강희민(姜希民) 등이 모두 죽고, 백성으로서 죽은 자가 거의 6만여 명이요, 우마(牛馬)와 계견(鷄犬)까지도 남음이 없었다. 또 성을 무너뜨리고 참호를 메워버리고 우물을 틀어막고 나무를 베어버려 전날의 분패를 앙갚음 하였다.
명(明) 나라 지휘사(指揮使)오종도(吳宗道)는 본래 김천일을 존경하던 사람으로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서 사자를 보내어 제문을 지어 곡하였는데, 그 제문은 다음과 같다.

만력(萬曆) 21년 계사 9월 임자삭 10일 임술에 감독남북제군 병독조선병무경략 병부참모사 무거지휘사(監督南北諸軍竝督朝鮮兵務經略兵部參謀事武擧指揮使) 오종도는 삼가 양과 돼지의 제물로써 조선국 창의사 김장군의 영구 앞에 제를 올리옵니다.

무릇 사람이 천지의 사이에 있으면서 죽어서 더욱 산 자가 있고 살아서 더욱 죽은 자가 있으니, 이는 온 천하가 다 마찬가지이거니와, 죽어서 더욱 산자 중에도 나는 창의사 김장군에게 더욱 느끼는 바가 있습니다. 장군은 왜적이 침략해 들어오던 처음을 당하여, 임금과 신하는 산과 들로 달아나고 온 나라 팔도에는 거의 굳건한 성이 없었는데, 오직 장군이 장대에 기를 달고 나무를 베어 창을 만들어 팔목을 휘두르며 한 번 외치자 호걸들이 향응하여 의기의 군사 천여 명을 얻게 되어, 그들과 더불어 한강의 연안에 진을 치고 맹세코 왜적과 함께 살지 않겠다는 것이었으므로, 장군의 이름이 중외에 드날렸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덕한 나도 마침내 병무의 여가에 인사를 드리고 식형(識荊)주D-001의 기회를 얻었는데, 바로 정이 들어서 마치 오래 안 처지와 같았습니다. 이때에 왜놈들이 바야흐로 공약(貢約)을 들어 청해왔는데 장군은 문득 주먹을 두들기면서 불평하며 매양 이 왜적을 섬멸하고서야 조식(趙食)주D-002을 하려고 하였으니, 그 뜻과 그 공은 비록 실현되지 못했으나 장군의 이름은 이로 말미암아 더욱 떨쳤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항상 혼자서 저 송(宋) 나라 일로써 오늘의 일을 견주어 볼 때 악비(岳飛)가 죽지 아니하면 우호가 성립되지 아니하고, 장군이 죽지 아니하면 공약이 결정되지 아니할 것이라, 왜놈들의 아침 저녁 계획이 반드시 장군을 죽여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급기야 흩어져 도망하고 남은 군사로써 진주를 지키게 되자, 마침 최경회(崔慶會)도 함께 있게 되었는데, 최군은 더욱 왜놈들이 진작부터 꺼리던 바라 이로 말마암아 왜놈들이 많은 군사로써 덥치어 몇몇 겹을 포위하여 날아가는 새도 지나가지 못하도록 만들고서 기필코 두 분을 잡고서야 말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에 나는 명령을 받고서 전라도를 지키려 오는데 길에서 장마를 만나 죽산(竹山)에서 머물러 묵고 있노라니, 별안간 큰 바람이 불고 뇌성이 일어나 모래를 날리고 나무가 꺾이어 마치 나의 걸음을 재촉하는 것 같으므로 나는 비를 무릅쓰고 전진하여 이틀 만에 남원에 당도하였습니다. 그런데 보고가 닿기를, 진주가 화살이 떨어지고 식량이 고갈되어 며칠 전에 성이 함락을 당하자 장군 부자와 최군이 모두 왜적을 꾸짖고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비로소 죽산의 장마가 바로 장군 부자의 눈물이었음을 짐작하였거니와, 크게 뇌성 벽력한 것은 그 장군의 불평한 기운이었습니까? 아! 장군은 왜 눈물을 흘리시나이까? 장군의 이름이 천추에 삭지 않을 것이니, 장군은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저 나라를 잘못 다스려서 임금으로 하여금 몽진(蒙塵)을 하게 하고 군사를 끼고 앉아서 구원하지 아니하여 성읍으로 하여금 잿더미가 되게 하고서도 마침내 면목을 버젓이 들고 의관을 하고 다니는 자를 보면 비록 살았다 할지라도 어찌 장군의 죽음과 같으오리까? 아! 하늘이 도우지 않았던가? 부자가 다 죽었구려, 절의를 쌍으로 이룸이여! 우리 강상을 붙잡았도다, 유명(幽明)이 서로 막힘이여! 갱장(羹墻)의 사모주D-003를 어찌하리? 어진 벗들 영원히 이별함이여! 내 술 한잔 흠향하소서.


조정에서는 진주가 함락 당하여 여러 신하가 다 죽었다는 말을 듣고서 애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김천일에게 우찬성을, 황진(黃進)ㆍ최경회에게 좌찬성을, 장윤(張潤)에게 병조 참판을 각각 증직하고, 그 나머지도 차등을 두어 증직하였다. 그리고 사우(祠宇)를 세워 제사하게 함과 동시에 충열(忠烈)의 액(額)을 내렸다. 또 권율(權慄)을 김명원(金命元)을 대신하여 도원수로 삼아 여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쳐 빼앗게 하였다.
총병 유정(劉綎)은 팔거(八?)로부터 달려가 합천(陜川)에 당도하고, 총병 오유충(吳惟忠)은 봉계(鳳溪)로부터 새벽으로 밤중으로 달려 가서 고령(高靈)과 초계(草溪)의 사이를 차단하여 우도(右道)를 보호하고, 경상병사 박진(朴晉)은 초계(草溪)에 머물러서 옆으로 빠져나가는 적의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 제독(李提督)은 진주가 함락당했다는 말을 듣고서 여러 장수를 불러 계획하기를,

“전라도는 곡식이 풍요하고 땅이 기름진데 남원이 바로 그 길목이다.”

하고, 이에 총병 이평호(李平胡)와 사대수(査大受)를 명하여 남원을 장악하게 함과 동시에 조승훈(祖承訓)과 이녕(李寧)은 밀양으로 옮기고 유정(劉綎)은 그대로 합천에 머물게 하였다. 적이 이미 진주를 깨뜨리고 마침내 부산으로 돌아와 소리쳐 말하기를,

“중국에서 화친을 허락하는 것을 보아야만 바야흐로 바다를 건너가겠다.”

하였다. 시가 있어 증거가 된다. 시는 빠졌음.
경략이 마침내 병부주사 원황(袁黃), 감찰어사 주유한(周維翰), 유격장군 고철(高徹)과 시조경(施朝卿) 등에게 격문을 보내어 돌아가게 하였다. 원황이 의주(義州)에 도착한 처음에 막하사(幕下士) 풍중영(馮仲纓)을 안변(安邊)의 전진에 보내어 두 왕자를 돌려올 계획을 하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아니하였다. 또 일찍이 영의정 최흥원(崔興源)과 더불어 학문을 논하다가 인하여 말하기를,

“중국이 옛적에는 모두 주원회(朱元晦 주희(朱熹))를 종주로 삼았는데 근래에는 점점 주자를 종주로 삼지 아니한다.”

하므로, 흥원은 말하기를,

“주자는 빈 틈이 없다.”

고 하니, 주사(主事)는 좋아하지 않는 기색을 보이더니, 이튿날 글을 보내 사서(四書)의 주소(注疏)를 들어 조목조목 따지며 비난하였다. 이 때에 우계(牛溪)성혼(成渾)이 성천(成川)에서 부름을 받고 행재(行在)로 들어오니 사람들이 기대한 바 컸으나 시세에 얽매어 건의한 바가 없었다. 귀봉(龜峰)송익필(宋翼弼)이 시 한 수를 지어 부쳤는데 그 시는 이러하다.

안정된 삶이 곧 태평인줄 뉘 알리오/安土誰知是太平
병 많은 늙은이 변방에 헤매다니/白頭多病滯邊城
가슴 속의 큰 꾀는 영영 틀렸단 말인가/胸中大計終歸謬
천하의 남아는 다시 나지 않을건가/天下男兒不復生
꽃은 피려고 할 적에 빛이 있고/花欲開時方有色
물은 못을 이루면 되려 소리 없네/水成潭處却無聲
온 산에 비내려 금서가 젖었는데/千山雨過琴書濕
맑은 하늘에 달만 여전히 밝구려/依舊淸空月獨明

이는 은근히 풍자하는 시였다. 이에 이르러, 성혼은 조정의 명령을 받들어 최흥원을 대신하여 글을 지어 원 주사(袁主事)에게 답하였는데,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소방(小邦)이 궁벽하여 먼 곳에 떨어져 있으므로 학문은 방법을 통하지 못하고 항상 중국의 서적에 의존하여 귀로 듣고 입으로 외울 따름이었는데, 황조(皇朝)에서 오경(五經)ㆍ사서(四書)의 대전과 선유(先儒)의 학설을 표장(表章)한 것을 내려 주심을 입어 학궁(學宮)에 벌여놓고 천하에 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소방 사람들은 복습하고 이행하지 않는 자가 없으며 이 학설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는 것으로 여겨왔던 것입니다. 지금 소방이 불운하여 요사한 도적이 짓밟고 있는데 노야 각하(老爺閣下)가 명령을 받고 와서 토벌하여 군사를 계획하는 여가에 곁으로 강학하는 일에까지 미치셨군요. 자세히 개유하고 인도하여 소방의 몽매한 소견을 깨우쳐 주시는 동시에 전고에 전하지 않은 비결을 제시해 주시니, 심히 거룩하신 일입니다. 다만 흥원(興源) 등이 천박한 말학으로 생각이 형편없는데, 어찌 능히 말을 알아들어 미(微)를 발명하고 극(極)에 나아가서 노야의 지극하신 은혜를 받들 수 있으오리까? 지금 더구나 나라가 망하게 되어 상하가 모두 경황이 없으며 모든 배신(陪臣)에 있어서도 오랫동안 행간(行間)에 피곤하여 평일에 알던 것조차도 거의 다 유실하였으므로 예전에 들은 것을 다시 실마리를 찾아서 도(道)있는 이에게 시정을 구하지 못하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노야는 이 정경을 굽어 살피시와 애련히 여겨 주시옵소서. 강학의 일에 대하여는 다른 날을 기다려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주사는 보고서 묵묵히 기쁘지 않게 여겼었다. 길을 돌려 강을 건너 요동에 에 당도하니, 언관이 그가 좌도(左道)로서 군중을 현혹하게 한 것을 탄핵하여 직을 파하고 회적(回籍)하였다. 이 때에 심유경(沈惟敬)이 적장 소서비(小西飛) 등을 끼고 요동에 와서 화친해 줄 것을 청하니, 이에 병부 상서석성(石星)이 화친하자는 논의를 주장하고 병력을 철회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래서 병과 좌급사중 후경성(侯慶成)은 마침내 말하기를,

“우리가 왜인과 더불어 무슨 원수가 있습니까? 속국을 위하여 여러 도의 군사를 동원해서 위력으로써 평양을 쟁취하고 권모로써 왕경을 수복하고 사로잡힌 두 왕자를 끌어내어 돌려 보냈으니, 망한 것을 보존하게 하고 멸한 것을 흥하게 하여 의로운 명성이 해외에 빛났습니다. 그러하니 군사를 완전하게 하여 돌아와야 하옵니다.”

하니, 천자는 이에 국왕에게 유지하여 도성으로 돌아가 군사를 정돈하여 자력으로 지키게 하고, 각 진의 장병들은 오랫 동안 해외에서 지쳤으니 모두 차례로 철수해 돌아오게 하고, 산동(山東)의 양미(糧米) 10만 석을 내려주어 군량에 충당하고 겸하여 주린 백성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다. 중국 군사가 오랫 동안 야영하던 나머지라 한 번 철수하라는 명령을 들으니, 형세가 더 이상 매어놓기 어려워서 이에 임금의 거가(車駕)는 영유(永柔)로부터 강서현(江西縣)으로 옮겨 주둔하였다.
7월 포정사 한취선(韓取善)ㆍ호부 주사 애유신(艾維新)ㆍ참장 곽몽징(郭夢徵)과 이방춘(李芳春)ㆍ유격장군 왕수신(王守臣)과 주홍모(周弘謨) 등은 경략의 격문에 의하여 철수하여 떠났다. 경략은 기왕에 싸움만 오래 끌고 공적은 없었는데 역시 적이 물러가는 기회를 타서 직을 해임하려다가 마침내 뜻대로 되지 아니하여 그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매양 왜놈들이 간사한 죄가 많아서 병력을 다 철수하기는 어렵다고 진술하고 음으로는 화친을 주장하면서도 화친을 말하기를 꺼려하여 주장이 전후가 일치하지 아니하므로 끝내 확고한 결정이 없었다. 그 전라ㆍ경상에 군사를 남겨두자는 의론은 대략 다음과 같다.

전라ㆍ경상 두 도는 그 나라 극남단에 있는데, 경상은 약간 동에 가깝고 전라는 약간 서에 가까우며 조선에서 이를 양남(兩南)이라 칭합니다. 이는 반드시 왜인의 경유하는 길로서 나라의 문호가 되고 왕경과 평양은 당(堂)이나 실(室)과 같은 형편이라 두 도가 지켜지면 조선이 편안하여 계요(?遼)가 보전될 것입니다. 부산은 비록 남쪽 바닷가에 있으나, 오히려 조선의 경계일 뿐더러, 또 대마도와 인접해 있어 왜인이 만약 우리가 군사를 철수하는 틈을 타서 돌연히 들어와 재차 침범한다면 조선이 견디지 못할 것이니, 전공(前功)을 모두 포기하는 셈입니다. 더구나 요동이 일본과 더불어 단절되어 바닷 길이 통하지 못하는 것은 조선이 있기 때문입니다. 관백(關白)의 의도는 실로 중국에 있으니, 우리가 조선을 구원하는 것은 다른 이웃 나라에 비할 것이 아닙니다. 그러하니 오늘의 처지로는 군사를 협동해서 지키는 것이 제일 상책이요, 군사를 철수하는 의논은 마땅히 조금 시일을 두고서 왜인이 다 돌아가는 것을 기다려, 방어하도록 해야 합니다.

병부의 복의(覆議)는 대략 다음과 같다.

잠시 관군을 주둔시켜 조선에 나누어 배치하되 정병 3천 명만을 뽑아서 남겨두고 그 나머지는 다 철수하여 전의(前議)와 같이 하소서.


성지를 받들었다. 이에 병과 도급사중(都給事中) 장보지(張輔之)가 상소하기를,

“왜적이 부산에 모인 것은 본래 중국을 꼬여 철수하게 하자는 목적으로, 흉악한 꾀를 차츰 내부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까닭없이 조공을 자청한 것은 이미 인정이 아닌 것이요, 지금 또 갑자기 진주를 침범하여 형세가 다 드러났으니, 마땅히 절제하여 쳐 없애야 합니다.”

하였고, 요진도어사(遼鎭都御史) 조요(趙耀) 역시 조공을 허락해서는 아니된다는 것을 말하였다. 경략은 마침내 소(疏)를 올려 군사를 머무를 것을 청하였는데, 그 소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왜놈은 교활하고 간사한데 속국은 고단하고 약하니 불가불 군사를 주둔시키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유정(劉綎)의 천병(川兵) 5천 명과 오유충(吳惟忠)ㆍ낙상지(駱尙志)의 남병(南兵) 2천 6백 명과 계ㆍ요병(?遼兵)을 합쳐 모두 1만 6천 명은 유정의 통제를 받게 하여 경상도의 대구ㆍ경주와 전라도의 남원ㆍ운봉 각지에 나누어 배치하고, 이어 국왕에게 상의하여 날래고 건장한 남정을 모집해서 유정에게 가서 훈련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또 전라도 각처에서 탄(炭)과 철(鐵)이 생산되니, 마땅히 화포를 교련시키고 아울러 시기에 맞추어 보루를 구축하며 참호를 파서 험고를 지키게 하며, 그 세자에게 하유하여 전라도 사이에 머물러 있으면서 군사를 독려케 하십시오. 유정에게는 특히 어왜(禦倭)의 직함을 더 제수하여, 오유충(吳惟忠) 등으로 하여금 모두 그의 지휘를 듣게 하여 각 군사의 먹을 것을 계산하여 한 달에 5만 금을 지급하도록 하십시오. 조선은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못했으니 역시 요량해서 의복과 신발의 비용을 지급해야 하옵니다. 소서비(小西飛)의 걸공(乞貢)을 편승하여 기한을 두어 달 늦추고, 봄철이 올 때까지 가면 유수(留戍)가 이미 정해질 것이니, 마땅히 진지(進止)를 정하여야겠습니다…….


병부의 복의(覆議)는 다음과 같다.

군사를 1만 6천 명이나 머물러 두자면 반드시 다시 군량을 보급해야 할 것이니 상책이 아닙니다. 유정은 이미 비왜총병(備倭摠兵)으로 승격 되었으니 당연히 도독부의 직함을 가해야 하며, 그의 직속인 천병(川兵)으로 그 나라의 훈련을 창설하게 하고 각 군영의 군량은 역시 조금씩 줄이고 공급해서 쓰도록 해야 합니다. 혹시 행장이 아직 돌아가지 않았으리라는 염려가 있으면 요량해서 오유충의 군사를 머물러 두었다가 행장이 바다를 건너는 것을 기다려서 철수하여 요진(遼鎭)으로 돌려보내고 군졸 3천 명을 뽑아서 유격 두 사람에게 붙여 봉황(鳳凰)ㆍ탕참(湯站) 등지로 가서 방비하여 유정의 응원이 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성지(聖旨)를 받든 바 ‘옳다’ 하였다.
8월 승문 정자(承文正字) 이시발(李時發)이 상소하여 환궁하기를 청한 바, 말이 매우 격앙하고 절실하여 주상의 뜻을 감동시켰다. 그래서 주상은 환궁할 계책을 결정하고 바로 해주(海州)로 향했다. 현을 떠나는 날에 명하여 현령 한여숙(韓汝淑)의 작위를 승진시키고 좌수 홍대양(洪大洋)ㆍ윤억세(尹億世) 및 사인 윤희빙(尹希聘)ㆍ김내관(金乃寬)도 역시 재간과 행실로써 받아들여져 전조(田租)의 절반을 면제시켜 주었다. 부총병 임자강(任自强) 등의 군사는 경략의 격문에 인하여 돌아갔다.
9월 경략은 병부의 격문에 의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면서 전격(箭檄)을 제독에게 전하여 회군하게 하였다. 절강도어사(浙江道御史) 양소정(楊紹程) 등이 주달하여 봉공(封貢)을 허락하는 것은 불가하다 하고서 군사를 철수하여 국경으로 돌아가 진지(進止)를 기다렸다. 그 상소는 다음과 같다.

지난 번 동으로 출정함에 있어 군사는 오래나고 공은 없게 되자, 경략 송응창(宋應昌)은 이에 강공(講貢)할 것을 밝혀서 시종이 공을 가로채서 책임을 메꾸려고 하므로 병부는 복의하여 그 통공(通貢)에 대한 것은 정지하고 봉호만 하는 것으로써 관백(關白)의 표(表)를 기다려서 표문이 이르면 전주(轉奏)하려 하였던 것입니다. 신등은 적이 보옵건대, 자고로 천하를 가진 이는 사방 오랑캐가 복종해 오면 봉(封)도 있고 공(貢)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 위엄을 두려워하고 덕화를 그리워하여 외번이 되자고 자원한다 해도 경솔히 허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놈이란 워낙 교활하고 간사하므로 태조(太祖)의 시대를 상고해 보면 여러 차례나 그 공을 물리쳤으니, 이는 염려가 지극히 깊었던 것입니다. 영락(永樂) 연간에는 비록 혹 하루아침에 입공(入貢)한 일은 있었으나 점점 약조와 같지 않았으며, 이로부터 내지(內地)를 소상히 염탐하고서 자주 들어와 침략을 하였고, 가정(嘉靖) 만년에 이르러는 동토(東土)가 화를 받은 것이 다시 참혹하였으니, 어찌 공(貢)이 화의 계제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난 해에 왜적이 조선을 함락시키자 황상께서는 드디어 동을 돌아보시와 장수를 명하여 군사를 내게 하고서 특히 응창(應昌)을 보내어 그 일을 경략하게 하였으니, 대개 그 죄상을 성토하자는 것이옵고 그 공봉(貢封)에만 그치라는 것이 아니었사온데, 지금 많은 날을 두고 지구전을 벌였으나 공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고 종당에는 통공(通貢)의 의론을 제창하여 목전의 체면만을 유지하는 것으로써 일을 마치려 하므로 황상은 그 청을 윤허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만리 밖을 환히 내다보고서 깊이 화를 미연에 방지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하온데 뜻밖에 당사자가 문득 변경하여 봉(封)해 줄 것을 청하는 말을 하다니요? 대저 왜놈이란 워낙 사나워서 한갓 실속 없는 빈 명칭만으로써 우리의 약속을 받지 아니할 것은 한 보통 사람도 능히 구별할 것이오며, 만약 이미 봉작을 가했다면 속국이라 칭할 것은 물론이니 다른 날에 외번의 여러 나라가 조선의 예를 들어서 청을 할 경우라면 무슨 말로써 거절하오리까? 곧 아침 저녘으로 짐짓 공손한 척하여 표를 받들어 봉을 청한 뒤에 사신을 보내어 감사를 드린다면 아마도 끝내 관문을 닫고 거절하지는 못할 것인 동시에 중국의 틈새는 더욱 벌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봉(封)을 거절함은 바로 그 공(貢)을 거절하는 것이니, 비록 그들의 마음이 만족하지 못할지라도 화는 없을 것입니다. 국가가 북쪽에 달(?)의 오랑캐가 있어 변방의 환란이 때때로 일어났지만 믿고서 근심이 없는 것은 전쟁의 대비를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관시(關市)가 있은 후로부터 어찌 일찍이 봉이나 공을 이르지 않았으리오만 말한들 어찌 들으오리까? 우리에게 있는 정신 기백을 날로 더욱 떨치지 못할 뿐이오니, 식자들 층에서는 급히 일어나서 맨먼저 이 일을 주장한 사람을 국가를 그릇되게 한 죄로써 죄주지 않은 것을 한스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지금 응창(應昌)이 오랑캐들의 간사한 지혜를 답습하여 한갓 봉하는 것으로써 공을 내세워 조정에 돌아와 상을 받으려고 하오나 신들의 생각으로는 공이 없는 상은 받아보았자 낯이 부끄러운 일일 뿐더러, 나라를 그르친 죄를 장차 어떻게 스스로 해명하겠습니까.

신들은 또 한 가지 설이 있사오니 조정의 봉배(封拜)를 말하면 반드시 명분을 바르게 한 연후에 전형(典刑)을 내리는 것이온데 오늘날 왜인에게 있어서는 봉함을 받는 자가 어느 사람인지 알지 못하옵니다. 장차 왜왕(倭王)의 후손을 찾아서 봉할 것입니까? 아니면 관백을 또 봉한단 말입니까? 관백이란 자는 그 임금을 죽이고 그 나라를 빼앗았으니, 정히 이른바 난신적자인지라 천벌이 반드시 과해질 대상이며, 그 나라 사람들도 일찍이 그 살을 씹고 그 살가죽을 벗겨서 방석으로 만들고자 하지 않는 자가 없었지만, 다만 위엄에 눌려서 감히 움직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예의와 전장이 사방각지의 오랑캐들을 통솔하고 제어하는 처지이온데, 만일 이 역적의 무리로 하여금 천조(天朝)의 칭호를 입게 한다면, 절대로 우리 중국을 높이고 바깥 오랑캐를 깨우치는 도리가 아닌 것입니다.

신은 이 일이 직접 국가의 안위에 관계되옵기로 감히 침묵하지 못하고 이토록 피력하여 간청하옵니다. 엎드려 비옵건대, 황상폐하는 깊이 생각하시고 멀리 계획하시어 널리 공론을 채택하사 봉(封)을 허락하는 일절에 대하여 물의에 따라 정지시켜 주시오며, 따라서 조선에 칙명을 내려 자력으로 굳이 지키게 하고 우리 군사는 국경으로 철수하여 처분을 기다리게 하소서. 송응창 등은 조정으로 돌아오는 날을 기다려서 따로 공과 죄를 의논하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하시오면 거의 변방의 병란을 막고 인심을 복종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신등은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오며 명령을 기다리옵니다.


‘해부가 알아서 하라’는 성지를 받들었다.
이때에 중국의 의론이 일치하지 아니하여 본 병부는 힘껏 화의(和議)를 견지하고 언관은 봉공을 거절할 것을 청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도 역시 배신 황진(黃璡)을 보내어 글을 싸 가지고 가서 적의 정세를 아뢰었는데, 경략이 중간에서 가로 막아 이르지 못했었다. 병부 상서석성(石星)이 언관에게 탄핵을 입자 상소를 올려 사직하고 인하여 싸움과 화친의 두 가지 일을 진술하니, 황상은 위로하고 타일렀다. 급사중(給事中)채사목(蔡思穆)이 상소를 올려 극히 그 그른 점을 들어 말하고 인하여 깊이 꾀하고 멀리 생각하여 화의 근원을 영절할 것을 간청하였다. 그 상소는 다음과 같다.

신은 근자에 저보(邸報)를 접수하여 경략 송응창의 게보(揭報)와 이서(貽書)를 보니, 일시에 서로 달랐습니다. 보(報)에 있어서 말이 번질번질하게 꾸며진 것이 많아서 마치 왜적이 점차 물러가고 공이 거의 이루어지는 것같이 일렀사온데, 서(書)에는 진정이 다 드러나서 관공(款貢)이 아니면 능히 공을 아뢰지 못할 것 같이 말하였으니, 신은 적이 개탄하고 놀랜 적이 오래였습니다. 이윽고 병부 상서석성(石星)의 한 소본(疏本)에, ‘노쇠와 병이 더욱 격심하여 중요한 임무를 이겨내기 어려우니, 천은(天恩)을 내리시어 빨리 파면시켜 주시옵기를 간청하오며 아울러 동정(東征)에 대한 시말(始末)을 진술하오니 삼가 헤아려 주시기를 기다려서 내정(內政)을 편안히 하고 외이(外夷)를 물리치는 데 도움이 되게 하고 노년의 절개를 보전하려 합니다.’는 일로 성지(聖旨)를 받든 바 분부가 내리시기를, ‘경의 주달을 보고서 잘 알았노라. 중국이 오랑캐를 제어하는 방법에 있어, 그들이 침략해 오면 막아내기만 하고 추격하지 아니하며 굴복하면 복종시키기만 하는 것은 바로 몇천 년을 두고서 바꾸지 않는 정한 이치다. 어제 말한 바 있거니와, 왜놈이 모조리 다 제 소굴로 돌아가고 따라서 신(臣)이라 칭하면서 죄에 자복하며 일체 침략행위는 없겠다는 표문을 받았으니, 봉(封)만을 허락하고 공(貢)을 허락하지는 않는다는 것은 짐이 스스로 정한 계획이거늘 어찌 말 많은 것을 두려워하는가? 송응창은 갖가지 노고를 겪으며, 계획을 짜내서 공이 이미 이루어지게 되었으므로 짐은 적이 그 논의를 견제할 것을 책임지워 편의에 맞게 위촉하려고 한다. 경이 병부 상서가 되었으니 바야흐로 중간에서 사리의 마땅함을 지시하고 위신을 선포할 것을 의뢰하고 있는데, 어찌 두려워하고 주저하여 병을 칭탁하고 사면을 구하는가? 조충국(趙充國)의 자천(自薦)은 사건에 있어 아마도 이와 같이 해서는 안될 것이다. 해부가 알아서 하라. 공경할지어다’ 하였습니다.

신은 자세히 살펴보니, 석성의 소본 내에 이르기를, ‘책봉을 허락하여 신의를 보여 주고 공단(貢端)을 거절하여 방비를 엄밀히 하며, 저쪽에서 능히 명령을 들어 굳이 지키면 우리는 마땅히 사신을 보내어 책봉하는 것입니다. 이는 다 신이 경략과 더불어 본래 약정한 바이오나 사람들을 대해 말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었습니다.’ 하여, 이 책봉을 허락하는 일에 있어 본병(本兵)이 스스로 경략과 더불어 비밀리에 계획한 것이 하루이틀이 아니라고 하였으니, 신은 더욱 놀라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일찍이 황명(皇明)의 조훈(祖訓)을 상고하니 이르기를, ‘일본은 비록 조회하였다 하지만 실지는 사칭이다. 몰래 간신 호유용(胡維庸)과 상통하여 무엄한 짓을 모의했기 때문에 끊어버린 것이다’ 하였습니다. 선대 선왕께서 남기신 법도가 저 해와 별같이 빛나거늘 어찌 응창ㆍ석성은 알지 못한다 말입니까? 어찌하여 조종(祖宗)의 완성된 법도를 위배하고 따르지 아니하며, 다만 구차스레 목전의 일만을 생각하여 종묘 사직의 무궁한 근심을 남기려고 드는 것입니까? 더구나 천하의 일이 요 한 집안의 일이 아니온데, 어찌하여 위로는 조정의 밝으신 명령을 받들지 아니하고 아래로는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와 상의하지 아니하고 가까이는 온 조정의 의론을 범하기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멀리는 천하 만세의 공론에 용납되지 못함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서 체면을 무릅쓰고 오직 하나의 심유경(沈惟敬)과 더불어 봉공(封貢)으로써 방략(方略)을 삼아 국가의 대사를 그르친단 말입니까? 응창과 석성의 뜻을 미루어 살피면, 어찌 책봉과 공(貢)을 허용하는 것으로서 복속시킬 수 있다고 여긴 것인지 모르겠아오나, 왜놈이란 바다가 둘러 있고 산이 막혀 있는 것을 험고(險固)로 삼고서 잠깐 책봉을 청하다 돌아가선 배반하고, 모호하게 일정한 마음이 없으므로 왜놈이 통공하면 중국의 큰 근심거리가 될 것은 옛날부터 이미 그러하였습니다. 이는 하나의 보통 사람일지라도 능히 분변할 수 있는 일입니다. 통공의 발단은 당연히 그 처음에 끊어야 한다는 것을 비유하자면 원수의 집안끼리라 본래 왕래가 없었지만 일단 뇌(雷)ㆍ진(陳)주D-004의 우호를 맺고 진(秦)ㆍ진(晉)주D-005의 맹약을 정한 이상에는 또 능히 그 내왕을 끊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관백(關白)은 짐승처럼 거세고 사나운 자로서 어리석은 무리들을 긁어모아 이웃 지경을 공격하고 침략하며 번속(藩屬)을 깨뜨렸으니, 당초에 덕을 사모하거나 위엄을 두려워하여 귀순하고 항복할 뜻이 있는 자가 아니옵고, 평행장(平行長)은 군사를 머물러 서생포(西生浦)에 주둔하고 있으며, 소서비(小西飛)는 군중을 둔치고 왕경(王京)에 이르렀으며, 또 수대로 다 소굴로 돌아가서 공손한 말로 공납을 간청한 것도 아니거늘 이들이 우리에게 반드시 책봉을 해달라고 요청한다 해서 우리가 즉석에 책봉을 허락한다면 훗날에 우리에게 반드시 공(貢)을 하게 해달라고 요청할 때, 우리가 어찌 공을 허락할 수 있사옵니까? 공을 허락하지 아니한다면 맹약이 깨어지니, 저들이 장차 봉호(封號)를 빙자하면서 협조를 요청한다면 우리는 무슨 말로 대답하오리까? 또, 장차 조선을 침략하여 그칠 때가 없을 것이며 허락한다면 화를 빚어내게 되는 동시에 저들이 장차 멋대로 탐욕과 거짓을 부리며 토색할 것이니, 무슨 술책으로써 그 배를 불릴 것입니까? 또 반드시 노략질하고 침범과 소란을 피울 것입니다.

송응창이 명령을 받들고 동으로 갔으나 공만 바라고 경륜은 적으며 녹록하여 특별한 것이 없어서 능히 날카롭게 왜놈을 축출하지 못하고 도리어 마침내 봉공(封貢)의 설을 창조하여, 첫 번째 강공(講貢)하자 왜놈이 평양을 물러나고 두 번째 강공하자 왜놈이 왕경을 물러나고 세 번째 강공하자 왜놈이 부산을 물러났으니, 대개 자기딴은 장기로 여기는 모양입니다. 목전의 일도 못추리면서 외람히도 선후책이라 이르고 있으며, 전쟁에 대한 공이 어디 있기에 망령되이 봉후(封侯)의 상을 생각한 것입니다. 겉으로는 강공(講貢)으로써 관백을 낚다가 도리어 경멸과 모욕을 더 불렀을 따름이며 안으로는 책봉(冊封)을 의론하는 것으로써 이목을 가리고 있으나 사람들은 그 속을 훤히 아는 바입니다. 중국의 중한 위엄을 손상시키고 심복의 급한 화를 끼쳤으니, 조선에 구원 나가지 않은 것만 못했는지라 신은 그가 무슨 낯이 있어 조정으로 돌아올런지 알 수 없습니다.

본병(本兵)석성(石星)에 이르러서는 본시 맑은 명망이 있었으나 마침내 깊은 생각과 긴 예산을 못하고서 역시 목전의 통쾌만을 취하여 왜놈이 한 번 가는 것을 요행으로 삼았으며, 또 봉(封)을 허락하고 공(貢)을 거절하는 것을 내세워 조삼모사의 설을 하고 있으니, 조충국(趙充國)이 경황 중에 어찌 이와 같았겠습니까. 더구나 겨우 봉해주는 따위를 들어서 왜놈이 잠깐 물러가는 것을 다행으로 삼을진대 그 조선을 침범하던 날을 당하여 심유경(沈維敬) 한 사람을 시켜 종이 한 장을 가지고 가서 효유했다면 왜놈 역시 장차 군대를 철회하고 혼연히 제 소굴로 돌아갔을 터인데, 또 어찌 경략(經略)이 예지를 짜내고 대장이 대오를 정돈하여 백만의 내탕금을 허비하며 수만의 병마(兵馬)를 몰아쳐서 죄 없는 적자(赤子)로 하여금 칼날 아래 거꾸러지게 하였겠습니까? 말이 이에 미치게 되오니 신은 진실로 가슴을 치며 뛰게 되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의 마음으로 홀로 판단하시고 길이 염려하시어 왜놈들의 간사하고 발칙함이 구구한 봉호(封號) 따위로서 족히 그 마음을 매두지 못한다는 점을 생각하시고, 사직과 종묘의 무한한 복은 복속이나 구차한 편안으로 길이 그 완전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을 내다보시사 엄밀히 본병(本兵)에 빨리 시행할 것을 명령하심과 동시에 경략에게 신칙하시어 곧장 봉공(封貢)을 거절하여 왜놈의 계획에 떨어지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방금 겨울의 추위를 당했으니, 정히 왜놈들이 두려워하고 겁낼 때이니, 한결같이 관군을 통솔하고 장수와 군사들을 격려하여 방략(方略)을 펴서 요소를 점거하고 기틀을 살펴서 행사하되 추격할 만하면 추격하고 지킬 만하면 지켜 되도록 하나의 왜놈도 조선의 경토에 머물지 못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뒤에 군사를 이끌고 돌아오면 후한 상과 승진을 가하고, 만약 혹시 서성대고 관망만하며 움추려든 채 나아가지 못하고 눌러 봉(封)을 의론하는 것으로써 농락하여 사기를 그르치게 한다면 용서할 수 없는 죄로써 가하시옵소서. 그렇게 하시오면 거의 소방(小邦)은 안정되고 황위(皇威)는 크게 떨칠 것이오며, 묘산(廟算)은 신무(神武)하여 사해를 진동하고 국가의 기세는 태산과 같아서 사방으로 안전할 것입니다.


‘병부가 알아서 하라’는 성지(聖旨)를 받들었다.
계사년 10월에 참장 고책(高策)ㆍ진방철(陳邦哲), 원임동지 정문빈(鄭文彬), 호관지현(壺關知縣) 조여해(趙如海), 유격장군 전세정(錢世禎)ㆍ고승(高昇), 병부 주사 유황상(劉黃裳)이 군대를 철수하여 돌아갔다. 유황상이 처음에 의주(義州)에 있었는데 평양이 수복되었다는 말을 듣고서 밤중에 달려서 군문 앞에 나왔었고, 그 후에 상소를 올려 평양을 수복하던 날에 신이 실로 함께 갔었다고 성대히 일컬었으며, 또 중국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 나라와 함께 시장을 열 것을 청하였다. 또 《여지승람》가운데, 삼포(三浦)에 왜인이 살고 있다는 옛말이 있음을 보고서 경략에게 고하니, 경략이 그 말을 믿고서 소본을 올려서, ‘부산에서 철회하지 아니한 왜적은 바로 원래 거주한 왜호(倭戶)라’ 하였으므로, 병부 역시 믿고서 허홍강(許弘綱)을 청하여 부산에 가서 조사해 보도록 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홍강은 요동에 당도하여 적병이 물러가지 아니한 것과, 왜호(倭戶)라는 것이 무고한 설임을 알고서 상소를 올려 해명하였다. 유황상은 마침내 스스로 부산에 대한 명문(銘文)을 지었는데 그 글이 매우 과장되었다. 이에 이르러 허홍강에게 탄핵을 입게 되었던 것이다.
10월 제독이 부총병 양원(楊元)ㆍ이여백(李如柏)ㆍ장세작(張世爵)ㆍ사대수(査大受)ㆍ양소선(楊紹先)ㆍ
이여매(李如梅)ㆍ이여오(李如梧)ㆍ왕문(王問)ㆍ양심(梁心)ㆍ이평호(李平胡)를 거느리고 회군하여 강을
건넜다. 백사(白沙)이항복(李恒福)이 시를 지어 송별하였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악한 자를 베라는 조서가 내려/詔許誅妖孼
상국에서 군사를 몰고 나왔네/竿旌出上台
나라가 광복의 운이 있길래/國須光復運
하늘이 훌륭한 인재를 냈오/天降異人才
꾀가 서자 싸움 전에 이미 이기고/謀定兵先勝
신이 도와 경사가 크게 오도다/神扶慶大來
눈 속의 기러기 흔적 찾으니/泥鴻尋有迹
패강 가에 진영이 남아 있구려/留像浿江?

간이(簡易)최립(崔?)이 또 시 두 수를 지어 송별하였다.

장수는 개세의 영웅이어야 하는데/推?端須蓋世雄
왜적이 바다에 나오니 황제는 동쪽 걱정하네/鯨?出海帝憂東
검술은 천하에 맞설 이 없고/將軍黑?天無敵
활 쏘는 재주도 제일이라네/長于?弓最有風
중국의 위엄 떨쳐 요동도 중해지고/威起夏州遼自重
평양에서 승전하니 서울의 적이 도망갔네/捷飛平壤漢乃空
태평한 한가한 날을 만나서/輕?緩帶飜閒暇
이 나라 사람들의 그림 속에 들었구려/已入邦人繪素中

태평한 나라라 영재가 놀고 있어/太平無甚賴英才
조선에 빌어주매 꺼진 불을 일으켰네/乞與朝鮮?死灰
원비(猿臂)주D-006의 묘한 활솜씨 오래 전에 들었더니/妙射久聞猿臂引
호도(虎韜)의 신묘한 전술 이제야 보았구려/神籌今見虎韜開
문장은
육해(陸海)와 반강(潘江)주D-007에서 나왔고/文從陸海潘江出
글씨는 안근(顔筋)과 유골(柳骨)을 띠었네/字帶顔筋柳骨來
크나 큰 공명을 비로소 얻었으니/要大功名今始得
윤길보(尹吉甫)주D-008가 다시 났다 사람들 노래하네/人歌吉甫際東萊

이 제독(李提督)이 돌아간 후에 우리 나라에서는 평양에다 사당을 세우고 송 경략(宋經略)과 이 제독을 제사하였다. 중국에서도 평양의 공로로써 이여송에게 태자태보(太子太保)를 가하고 도독부좌도독으로 승진시켜 주었다. 이때에 소서비(小西飛) 등이 오래 요동에 머물러 있었고, 봉공(封貢)의 이론도 역시 귀결되지 못했다. 남경(南京) 섬서도어사(陝西道御史) 소여송(蕭如松) 등이 아뢰어 봉공을 믿지 말고 무비를 엄밀히 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그 주문은 다음과 같다.

삼가 아뢰옵니다. 신이 근자에 저보(邸報)를 접하여 요동 군문(遼東軍門) 조요(趙耀)의 당보(塘報)를 보니, ‘왜적이 4월 17일부터 계속 출동하여 모두 한강으로 물러가고 왜장 행장(行長)은 따라서 심유경(沈惟敬) 및 왕자(王子)와 배신(陪臣)을 견제하여 반송(伴送)해서 이틀 만에 바야흐로 돌아왔으니, 왜의 경보는 타평(妥平)이 되었다’ 하였습니다. 왜적의 파병(罷兵)에 대하여 일찍이 공(貢)을 청하는 의론이 있어 변방의 장수와 더불어 와서 언약한 바 있었으나, 일시에 대성(臺省)의 여러 신하들이 되풀이 해가면서 그 허락할 수 없는 상황을 논거하여 이미 해부를 거쳐 분명한 성지를 받들었습니다. 참으로 조훈(祖訓)에 게재된 ‘엄중히 왜의 공(貢)을 거절하라’는 것과 전후가 서로 부합되었으니, 두 번 다시 의론할 여지도 없는 것입니다. 다만 왜놈들이 기일을 두고서 심히 다 붙이므로 경략은 편의대로 행사하여 혹시 공(貢)을 해하는 것으로써 그 퇴군할 것을 독촉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도 역시 있을 수 있는 일이오나 왜놈이 파병한 뒤에는 통공으로써 청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찌 보장하겠습니까.

신은 듣자하오니 일본이 멀리 바다 섬에 자리 잡고 있어 흉험하고 교활함이 보통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연전에 공을 가칭하고 미친듯이 날뛴 것은 이미 분명한 징험이 있으니, 유독 힘입는 것은 조정의 정책이 굉장하고 원대하여 공의 흔단(?端)을 엄중히 거절하여 천하에 안녕을 끼치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관백이 도망한 무리들을 거느리고 강토를 개척할 야심을 품어 여러 섬을 삼키고 조선을 차지하였으니, 그놈들이 중원까지 침범하려고 하는 것은 그 정상이 이미 다 드러났습니다. 하물며 우리 대병(大兵)이 서로 지구전을 벌인 지도 날이 오래였으나 굴복을 보지 못했으니, 우리가 역시 그들의 목숨을 견제하지 못함에 있어서이겠습니까. 평양의 싸움에는 그들을 비록 꺾었다 하지만 벽제(碧蹄)의 승리가 오히려 족히 비등할 만한데, 마침내 하루 아침에 조공을 바치기로 하고 싸움을 파하는 맹약을 들고 나오게 된 것을 어찌 참으로 조선에 화 끼친 것을 뉘우쳐서 그 자리를 차지하고서 도둑질해간 강토와 인민을 모두 돌려오겠으며, 어찌 진정 중국에 귀명(歸命)하여 위엄을 두려워하고 의리를 사모하여 후일을 두려워하겠습니까? 그들은 10만의 무리로 수천 리나 되는 먼거리를 넘어 갑자기 조선을 범하여 왕경(王京)을 근거하여 평양을 약탈하여 8도가 모두 해침을 받았으니, 오는 것이 어찌 그리 기탄이 없으며, 갑자기 한강을 지나서 유경(惟敬)ㆍ왕자(王子)ㆍ배신(陪臣)을 붙잡아 반송(伴送)함으로써 스스로 호위를 삼았으니, 가는 것도 어찌 그리 그침이 없단 말입니까. 그 조공하기를 청하며 맹약을 정하자는 말에 있어서도 한 번은 ‘회보가 더디면 바로 맞붙어 싸워서 승부를 결단하자’ 하였고, 한 번은 ‘조금만 지연된다면 관백이 군사를 이끌고 다시 온다’ 하였으니, 그 말이 어찌 그리도 기탄이 없습니까?

이상을 들어 왜적의 파병(罷兵)을 추측해 보면 어찌 태연히 듣고만 있을 수 있사오리까? 저놈들의 속셈은 진실로 조선에 있어서는 우리들 손으로 빼앗고 우리들 손으로 버렸으니, 다시 또 얻은 것은 마음대로 조종할 터이니 기회를 타서 발동하는 것은 마치 주머니를 뒤지고 상자를 여는 일과 같아서 어려울 것이 조금도 없다는 것이며, 그 놈들이 중국을 침범하고 싶지만 진격하는 길이 막혀서 군량과 마초(馬草)에 군색을 당할 것이므로 길을 따로 빌리고 겁없이 바로 통공의 길을 얻어서 우리의 방비를 늦추게 하고서 서서히 다시 출발할 흉계를 실현시키려는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만약에 왜놈이 표(表)를 받들고 왔을 적에 그 교활함을 살피지 못하고서 경솔히 허락해 준다면 약속을 다짐했더라도 놈들이 반드시 이행하지 않을 것이요, 기한을 정했다 하더라도 놈들이 반드시 지키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올 적에는 헌납한다는 것으로 명목을 붙이고 와서 후한 상과 후한 폐백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 분수에 어긋난 소망을 채워줄 수 없을 것이며, 갈 적에는 거침없이 달리는 것을 쾌하게 여기어 거주민을 약탈하고 전사(傳舍)를 소란하게 할 것이니, 그 겁탈하는 수단을 제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심지어는 중국을 내왕하는 것이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 우리의 동정을 살피고 우리의 허실을 점치고 우리 지형의 험하고 평탄함을 익히고 우리 군대의 강하고 약함을 탐지하고 우리 군량을 넉넉하고 부족함을 엿보고, 간사한 자들을 꾀어 몰래 향도(鄕導)를 삼아 안으로 사당(邪黨)의 험상한 무리와 결탁하여 훗날에 반드시 전철을 밟고서 반역을 꾀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무슨 까닭으로 조선의 근심을 삼으며 관공(款貢)의 이름을 좋아하여 강역의 흔단을 열어 놓는단 말입니까?

만약 그러한 점을 타서 다시 조선에 침범하는 일이 있다면 상처나고 피곤한 나머지 장차 백성들이 없게 될 것이니, 군사와 장수를 머물러 두어 우리의 울타리를 튼튼히 하는 것은 그 수효가 적어서는 안 되오며, 또 만약 불측한 기회를 타서 중국을 침범하게 된다면 등주(登州)ㆍ내주(萊州)ㆍ보정(保定)ㆍ계문(?門)은 관계됨이 가볍지 아니하니, 엄히 보장을 더하여 우리 기보(畿輔)를 튼튼히 하는 일을 소홀히 다루어서는 아니되옵니다. 그렇지 않고 혹시 군사를 나누어 배를 타고 들어와 사방으로 흩어져 약탈하는 꾀를 한다면 절(浙)ㆍ직(直)ㆍ민(閔)ㆍ광(廣)의 사이에 왜적의 함선이 곳곳마다 통할 수 있을 것이니, 방어와 수비를 마땅히 치밀히 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하니 도적을 쉽게 보는 것을 경계하여 소홀함이 없게 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늦추어서는 아니되옵니다.

왜적의 경보가 있은 이래로부터 모든 연해의 요긴한 지대는 모두 황상 폐하의 유념을 입어 관을 늘리고 장수를 선발하며 양식도 더 주고 군사도 더 보내어 그 계엄하는 것이 주밀하고 섬세하지 않은 것이 없사오니, 시험삼아 거듭 경계하고 신칙한다면 조정을 위하여 목숨을 걸지 아니할 자가 없을 것이오며, 구차스레 왜적이 공을 청하는 것을 빙자하여 방어하는 영을 엄밀히 하지 아니한다면 먼 근심과 가까운 걱정이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황상 폐하는 조공한다는 오랑캐의 일을 보시지 않으셨사옵니까? 우리는 후한 이익을 줌으로써 오랑캐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오랑캐의 화호(和好)로써 우리의 의지를 게으르게 하려 하니, 오랑캐가 맹약을 위반하게 되자 마침내 변방의 일이 크게 피폐해져서 수습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한갓 공(貢)하는 것만 믿고서 무비를 닦지 못한 까닭이옵니다. 구구한 신의 지극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옵니다.


성지(聖旨)를 받들기를,

“왜놈은 간사하고 거짓이 많은데 어찌 화친을 믿고서 방비를 해이하게 할 수 있느냐? 병부는 알아서 하라.”

하였다.
급사중(給事中)허홍강(許弘綱)은 경략 송응창이 망령되이 봉공(封貢)을 허락하여 나라를 그르치고 일을 무너뜨렸다고 탄핵하여 억눌러 치사(致仕)하게 하고, 직을 파하고 적(籍)을 돌렸다. 그리고 병부우시랑 고양겸(高養謙)으로 대신 군무(軍務)를 총괄하여 감독하게 하여 영원위(寧遠衛)에 주둔시켰다. 양겸의 별호는 충암(沖庵)인데, 남직례(南直隷) 양주부(楊州府) 통주(通州) 사람이다. 경략에 체임되자 또 힘써 봉공을 주장하니, 천병(天兵)이 태반이나 돌아갔다. 서울도 역시 상당히 수리되었으므로 윤두수(尹斗壽)ㆍ이항복(李恒福) 등이 힘써 환궁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임금의 수레가 해주로부터 서울로 환궁하였는데 문정공(文貞公)신흠(申欽)이 이부랑(吏部郞)으로서 호가(扈駕)하면서 돌아왔다. 시를 지어 송(頌)에 대체하였는데, 신흠의 시는 다음과 같다.

화악(華岳)의 붉은 구름 새벽하늘 스쳐가고/華岳?雲拂曉晴
함지(咸池)주D-009의 이른 햇볕 용정(龍旌)이 빛나도다/咸池初日絢龍旌
한실(漢室)의 옛 의관을 다투어 바라보며/爭看漢室衣冠舊
당가(唐家)의 해대(海岱)가 맑다고 다시 말을 하네/復道唐家海岱淸
만 대의 기쁜 소리 머나 먼 델 감싸있고/萬世?聲環遠邇
백 년이라 좋은 운수 정명(貞明)을 맞췄도다/百年休運協貞明
문신들은 조그마한 공효도 못 세우고/詞臣無神涓埃效
단지(丹?)에서 붓을 들어
세병(洗兵)주D-010을 노래하네/拈筆丹?賦洗兵

상께서 서울로 돌아와서 영중추부사정철(鄭澈)과 한성 판윤유근(柳根) 등을 보내어 표(表)를 받들고 중국 조정에 가서 삼경(三京 서울ㆍ개성ㆍ평양을 이름)의 수복을 사례하니, 천자는 은과 폐백을 하사하고 총독을 장려하고 훈유하여 총병 낙상지(駱尙志) 등으로 하여금 우리 나라 장정을 뽑아서 절병(浙兵)의 기예를 가르치게 하였다. 그래서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도체찰사유성룡(柳成龍)과 형조 판서이덕형(李德馨)으로 하여금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11월 급사중 장문화(張文華)는 동정(東征)에 대하여 공(貢)을 의론하고 봉(封)을 의론하는 것이 다같이 실책에 속한다는 것을 들어 상본(上本)하여 극력 논란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신 문화(文華)는 아뢰옵니다. 삼가 생각하오면, 대개 왜놈이 여러 섬을 위협하고 속국(屬國)을 침범하여 우리 중국의 근심이 된 지가 1년에 가깝습니다. 밤낮으로 근심하여 유지(諭旨)를 반포한 것이 그 몇 번인지 모르오며, 차송한 문무(文武)의 장리(將吏)가 그 얼마인지 알지 못하오며, 관병을 소집하고 내탕금(內帑金)을 풀어놓은 것이 그 얼마인지 알지 못합니다. 적이 생각하면 당사자로서는 반드시 이 왜놈을 없애버리고야 아침 식사를 하기로 꾀했을 것이오며, 그렇지 아니하면 곧 견지하여 스스로 지켜서 험한 곳을 점거하고 요긴한 목을 지키고 앉아서 그 돌아감을 곤란하게 하여도 불가할 것이 없으니, 절대로 목전에 구차하여 일후의 근심을 끼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사실이옵니다.

지난 번에 정왜(征倭)에 대한 저보와 요동의 안신(按臣) 주유한(周維翰)의 상소 한 편을 열람하고서 너무도 그렇지 않다고 생각되옵니다. 어쩌자고 처음에는 왜놈이 떠나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고분고분 공(貢)을 말하다가 이윽고 공이 시행되기 어렵다는 것을 헤아리자 봉(封)하자는 말을 빌린단 말입니까. 공(貢)의 설이 한 번 나옴으로부터 조정의 의론이 분분하게 일어나서 이른바 주먹을 불끈 쥐고 탄식하며 젓가락을 빌려 숫대질하여 그 불가한 상황을 반복한 것이 매우 극진하였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성유(聖諭)를 내리시기를, ‘놓아주고 끝까지 추격하지 말며 공관(貢款)일랑 물리치라’ 하여, 이 엄명한 성지가 한 번 내리자 늠름함이 추상과 같아서 거의 강공(講貢)의 설이 잠잠하여 화의 씨가 영원히 끊어지리라 생각했던 것이온데, 동정(東征)하는데 있어 꾀가 적어서 시종 공(貢)의 한 글자를 견지하여 마침내 왜놈을 위하여 계획하리라는 것을 뉘라서 생각인들 했겠습니까. 지금으로 말하면 왕경에서 진실로 물러가기는 했으나 형세가 궁하고 힘이 다해서가 아니라 관공(款貢) 때문이요, 두 왕자를 진실로 돌려 보냈으나 위엄을 두려워하고 죄를 뉘우쳐서가 아니라 관공 때문인 것입니다.

행장(行長)이 서생포(西生浦)에 둔치고 있고 소서비(小西飛)가 왕경으로 들어온 것은 믿는 구석이 있는 요구이고 반드시 이루겠다는 믿음을 보인 것이니, 국가의 안위가 진실로 이 일을 한번 허락하느냐 거절하느냐에 달렸는데 마침내 청탁하여 말하기를, ‘공(貢)을 빌려서 왜놈을 물러가게 하자는 것이요, 경솔히 허락하여 나라 일을 그릇되게 함이 아니라’한 것은 신들로서는 믿어지지 아니하옵니다. 무릇 반간(反間)을 써서 적을 꾀하는 것은 병가의 상투 수단이니, 신들이 당사자의 고심을 모르는 바 아니옵니다. 다만 옛날의 반간을 쓴 자는 칭탁하기는 딴 말로서 하고 견지하기는 정법(正法)으로써 하였기 때문에 반간이 한번 행하면 적이 내 술책 가운데 들어있어 다른 염려가 없었거니와, 지금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공(貢)을 빙자하여 왜적을 물러가게 하고 왜적으로 하여금 까닭을 잡아서 공을 요구하게 하니, 이것은 처음에는 왜놈을 속이려고 했던 것이 마침내는 우리를 속인격이며 처음에는 반간을 쓰려고 했던 것이 결국에는 믿음이 된 셈이니 진실로 모르겠습니다만 왜놈과 더불어 약속한 것이 과연 핑계한 말입니까? 아니면 참으로 허락한 것입니까?

급기야 공이 반드시 시행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명목을 바꾸어 봉(封)으로 한 것은 더구나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먼 지방에서 중역(重譯)을 통해 신하로 복종하는 뜻으로 보옥을 바치는 것을 공이라 이르므로 그 수납에 있어서는 오히려 그 쪽으로부터 오는 것이라 간사하고 교활한 왜놈이 꾀를 달리하여 우리의 금폐(金幣)를 노릴 것이니, 하루 아침에 맹약을 변경할 경우에는 어찌 믿음으로써 책망할 수 있으리까? 이러므로 공을 허락하는 것은 계책이 아니니, 당사자도 역시 스스로 그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또 어찌하여 공(貢)을 숨기고 봉(封)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름을 명(命)하고 관작을 정하는 것을 봉이라 이르므로 주는 것은 특히 우리로부터 나가는 것이온데 왜놈이 이리처럼 탐욕이 많아서 형세가 반드시 봉(封)을 인하여 공을 청할 것이니, 하루 아침에 배반하고 창을 돌린다 하더라도 어찌 봉을 핑계하여 공을 숨긴다 이르오리까?

우리가 이미 봉을 가한 이상에는 저쪽에서도 역시 와서 공하게 되는 것이라 두가지의 일이 서로 인습하지 않는 법이 없습니다. 이 사단이 한 번 열리는 날이면 가만히 앉아서 저 교활한 왜놈이 우리 강토에 들어오고 우리 속국(屬國)을 침략하여 생민에게 해독을 끼치게 될 것이니, 종묘 사직을 위하는 일후의 숨은 근심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일 따름입니다. 더구나 봉(封)을 내리는 것은 국가의 중전(重典)이옵고 사신을 보내서 봉을 하는 것은 국가의 대사이온데, 왜놈의 심정이 워낙 불측한지라 만약 천사(天使)를 억류하여 공시(貢市)를 요구한다면 이 때를 당하여 허락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싸움을 말하지 아니하고 관공(款貢)을 말한 것이니, 이는 호랑이를 끌어다가 문안에 들여놓은 격이요, 공을 의논한다 이르지 아니하고 봉을 의논하다 할 것이며, 이는 조삼모사(朝三暮四)와 같은 수단이라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오늘날에 혹시라도 엄하게 근절하지 아니하면 저 옛날에 북노(北奴)의 순의왕(順義王)으로 봉하였는데, 그 후에 발단이 되어 무상(撫賞)과 마시(馬市)주D-011가 해마다 날로 격증하여 마침내 결렬의 지경에 이르러 수습할 수 없이 될 수 있으니, 이것이 영원한 본보기가 될 수 있는데, 어찌하여 또 다시 그 전철을 밟는단 말입니까? 공(貢)이나 봉(封)은 쓸어 잡아서 하나도 가할 것이 없거늘, 이에 뜻을 굳혀 이행하려드니 이는 공을 허락하면 왜놈에게 믿음을 잃을까 해서 봉을 빌려 얽어매는 술책을 쓰고자 한 것이나 저들로 하여금 영영 가고 오지 않게 할 것입니까?
중국에서 이적을 대비하는 것은 침범해 오면 막을 따름이요, 일단 가면 추적하지 않을 따름이지, 그 가는 것을 기뻐하여 봉작을 준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으며, 중국의 이적을 방비하는 법은 그 오지 않을 것을 믿지 않고 내가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을 믿을 따름이지, 그 오는 것을 두려워하여 봉작을 준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물며 교활한 왜놈이란 툭하면 돌변하여 그 가려고 하다가 가지 않기도 하며 혹 와서 가지 않기도 하니 대체로 공(貢)을 허하거나 공을 허락하지 않거나 봉(封)을 하거나 봉을 하지 않는데 매인 것이 아닌데 갑자기 이를 핑계하여 무거운 짐을 벗으려고 조정에 돌아와 복명하고 일체의 이해를 겨우 유정(劉綎) 한 사람에게 위임한 것은 신들로서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아! 우리의 군대가 깊이 들어가 들판에서 거처한 날이 오래되었습니다. 그 죽은 자도 한이 없겠지만 그 지치고 병든자 또한 장차 계속 이어질 것이니, 곧 그 속에 많이 머물러 둔들 마침내 무슨 도움이 되오리까? 의론하는 자들이 이르기를, ‘마땅히 국경에서 철수하여 강토를 포기하고 우리 조선에 격문을 돌려 스스로 방어하게 해야 한다’ 하오니, 지금 왜놈들이 추위를 무서워하여 멀리 도망가서 우리 군사를 번거롭게 하는 일이 없을 진대, 대중을 인솔하여 말을 먹이고 기용(器用)을 수리하고 병기를 단련하고 군량을 저축하는 일이 바로 이때이오며, 그러다가 봄철이 다시 되면 우리 군사를 거듭 정돈하여 한 번 크게 응징하는 것도 꾀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황상폐하께서는 널리 공의를 채택하시고 성심(聖心)으로 결단하시어 칙서를 경략에게 내리시어 봉공(封貢)의 일절을 빨리 정지하도록 하여 화의 실마리를 막아버리시면 거의 바다의 요사한 기운이 깨끗이 가라앉아서 국가가 견고하고 사직이 편안할 것이옵니다. 신등은 직책이 과원(科院)에 있사옵기로 부득불 빨리 부르짖어 아뢰지 아니할 수 없사오니, 삼가 바라옵건대 황상 폐하께서 신등의 정상을 굽어 살피시어 쾌히 강단을 내리시옵소서. 간절히 명령을 기다리는 지극한 심정을 이기지 못하옵니다.
성지를 받들기를, ‘병부가 알아서 하라.’ 하여, 병부에서 복의하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해마다 동정(東征)으로 말미암아 군사가 극도로 피로했으니, 형세가 오랫동안 머물러 있기는 어렵사오며, 봉(封)을 허락하고 공(貢)을 허락하지 아니하는 것은 역시 양책입니다. 그러나 두고서 마땅히 다시 의논할 것이오니, 급히 사신을 보내어 선유하시는 것이 마땅하옵니다.

성지에,

“그렇게 하라.”

하였다.
이에 행인사 행인(行人司行人) 사헌(司憲)을 보내어 칙서를 내려 위유함과 동시에 은폐(銀幣)를 내리고 또 우리 나라 사정을 살피도록 하였다. 사헌의 호는 진대(晉臺)이니, 하남부(河南府)수주(?州) 사람으로 만력(萬曆) 병술년에 진사에 급제하였다. 그는 성질이 사나워서 말을 달려 산 언덕에 오르내리기를 좋아하며 길을 가는데에 있어서도 밤낮 없이 빨리 몰고 가기만 하였다. 그래서 원접사 이항복(李恒福)이 통역관 한 사람과 겨우 따라 갔으며 종사관 신흠(申欽)과 황신(黃愼) 이하는 모두 따라 가지 못하였다. 이보다 앞서 중국에서 우리 나라가 부진하여 왜적에게 먹힐까 염려하여 논의가 매우 많았다. 급사중 위학증(魏學曾)이 주본을 올려 우리 나라 일을 의론하는데 추할 정도로 헐뜯는 말이 많았고, 또 조선이 능히 왜놈을 막아내지 못하여 중국에 와서 근심을 끼치고 있으니, 마땅히 그 나라를 두세 개로 나누어 만들어, 그 중에서 능히 왜적을 막아내는 자에게 붙여 그로 하여금 조치하게 하여 중국의 번리를 삼아야 한다는 등의 말이 있어 이 일이 마침내 병부에 하달되었는데, 병부 상서석성(石星)이 힘껏 불가하다고 견지하였다. 송 경략(宋經略)이 요동에 있으면서 위급사의 제본(題本)을 접반사 윤근수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조정의 의론이 이와 같으니, 너희 나라는 장차 어떻게 자립하려는가? 이 일에 있어서는 내가 힘껏 보증하겠지만, 그러나 너는 돌아가서 네 나라 임금에게 고해서 자위지책을 잘 강구하도록 하라.”

하니, 근수는 이 사실을 보고하기 위하여 요동으로부터 돌아오면서 또 송경략이 본국 배신에게 유시한 차부(箚付)를 가지고 왔다. 근수가 돌아와서 조정에 나아가니, 이 때에 좌의정최흥원(崔興源)은 병으로 나오지 못하고, 우의정윤두수(尹斗壽)는 세자를 배행하여 남으로 내려가고 유독 영의정유성룡(柳成龍)과 판부사심수경(沈守慶)만 자리에 있었다. 윤근수가 차부를 유성룡에게 전하니, 성룡은 보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경략이 만약 국사에 대한 공언(公言)이라면 마땅히 주상에게 자문(咨文)을 올릴 것인데, 지금 자문은 없고 유독 차부(箚付)만 있으니, 그 속에 적혀 있는 말은 필시 마음 속에 생각하고 있는 바가 아닐 것이다. 보아도 처치할 수 없으니, 차라리 보지 않는 것이 편하다.”

하였다. 이윽고 주상 전하께서 인견(引見)하고 윤근수가 올린 위급사의 제본을 내어 보이면서 이르기를,

“나는 이미 반드시 일이 있을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대위(大位)에서 물러나려고 했던 것인데, 지금 과연 그렇다.”

하였다. 유성룡은 아뢰기를,

“이는 바로 무리한 망담이옵니다. 중국 조정에서 어찌 이 논의에 흔들리게 되오리까? 의심하지 마시옵소서. 오직 마땅히 우리가 당연히 할 바를 더욱 극진히 하여 중국의 근심을 해소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하니, 주상께서는 답이 없었다. 이 때에 사헌(司憲)이 온다고 하므로 영의정유성룡과 도승지심희수(沈喜壽)가 벽제(碧蹄)로 마중을 나갔다. 이 때 역관(驛館)은 모두 불에 타버리고 유독 마을집 두어 칸이 있을 따름이었다. 성룡은 명첩(名帖)을 사헌에게 바치니, 사헌이 바로 성룡을 맞아들여 자리를 같이하고 술을 내서 대접하는데 말이 자못 다정하였다. 그는 또 말하기를,

“내가 서울에 들어가면 장차 새로운 거조가 있을 것이다.”

하니, 성룡은 의심스러웠으나 감히 묻지 못하고 두어 잔 순배를 들고서 작별하고 물러왔다. 그리고 밤새도록 달려서 사경에 서쪽 성문 밖에 이르러 길가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성문이 열리기를 기다려서 대궐에 나아가 그 말을 고하였다. 이날 정오에 중국의 사신 사헌이 서교(西郊)에 당도하니, 주상전하는 모화관(慕華館) 앞에서 영접하고 선도하여 남별궁(南別宮)에 이르렀다. 사헌이 칙서를 내어 읽었는데 그 칙서는 다음과 같다.

어제 왕이 대군을 거느리고 적을 몰아내어 지경 밖으로 나가게 하고 옛 서울로 돌아가매 표(表)를 올리고 방물(方物)을 진상하여 사례하였으니, 짐의 마음이 대단히 기쁘도다. 이와 같이 나라를 회복한 중요한 일을 생각하매 상례에 비추어 보답해서는 안되기에 지금 특별히 사신을 보내어 유시를 내리며 따라서 왕에게 대홍망의(大紅?衣) 두 벌과 채단(綵緞) 네 표리(表裏)를 기증하여 짐이 정성스럽게 왕을 위하여 멀리 위로하는 뜻을 보이는 바다. 짐은 또 생각건대, 귀국이 비록 산과 바다 가운데 끼어 있으나 전해온 역사가 가장 오랜지라 저 옛날 선조(先朝) 때에는 왕화(王化)에 젖지 못하였는데도 오히려 능히 땅을 개척하고 험고(險固)를 지켜 모든 나라에게 영웅으로 보였으며, 지금은 우리 조정의 공헌(貢獻)의 나라가 되어 대대로 총애하는 황령(皇靈)에 힘입어 재력을 육성하고 있으니 마땅히 더욱 부강해야 할 터인데, 근자에 왜놈이 한 번 들어오자 왕성(王城)조차 지키지 못하고 들판에 백골이 널리고 종묘 사직은 빈터가 되었으니, 그 패망의 원인을 생각해 보면 어찌 다 우연히 그럴 리가 있겠는가. 혹자는 말하기를, 왕이 자잘한 오락만을 구경하고 뭇 소인들만 믿고 혹하며, 백성의 목숨을 구휼하지 아니하고 군대의 무기와 군량을 정비하지 아니하여 왜적에게 업신여김을 받은 적이 하루 아침이 아니었는데도 일찍이 말하는 신하가 없었다 하니, 앞수레의 엎어짐을 뒷수레가 어찌 경계하지 아니하랴. 조상의 음덕과 우리 군사의 승전한 위력을 힘입어 왕의 군신ㆍ부자로 하여금 서로 보전하게 하였으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랴. 그렇지만 왕은 파천하던 나머지에 돌아와서 서리(黍離)주D-012의 고궁(故宮)과 타다 남은 분묘와 소복(素服)으로 들에서 맞이하는 민중을 볼 때 때늦은 후회와 원망에 대해 어떻게 마음을 진정할 것이며 제도를 개혁하는 문제는 어떻게 계획을 할 것인가. 짐이 왕을 볼 때 비록 외번(外藩)이라 칭하지만 그러나 조빙(朝聘)하는 예문 외에는 원래 왕의 군사 하나 역인(役人) 하나도 번거롭게 한 바 없었으며, 오늘의 일은 단지 대의로써 발분하여 식미(式微)주D-013를 돌본 것 뿐이니, 진실로 왕이 짐에게 덕을 책임지울 것은 못된다. 더구나 대군이 철수하였으니 왕은 지금부터 나라로 가서 다스릴 것이요, 한 치의 토지도 나는 간여하지 않을진대, 어찌 다시 국경을 넘어서 구원하는 것을 상사로 삼겠는가? 너희 나라가 우리를 믿고서 방비를 두지 아니하면 목전의 태평을 즐기다가 재앙이 장차 다시 미치게 될 것이다. 창졸간에 다른 변란이 있으면 나로서도 능히 꾀해 줄 수 없겠기로 미리 거듭 고하여 경계하는 것이니, 옛 사람의 와신상담하던 의로써 힘써야 할 것이다. 더욱이 외모(外侮)를 일소하고 다시 국가의 위신을 펴는 때에 있어 상처난 백성들을 어루만져 주고 뿔뿔이 흩어진 자를 불러들이고 척후(斥?)를 넓히고 성황(城隍)을 수선하고 무기를 마련하고 창름을 실하게 하되 주색에 빠지지 말고 유흥에 빠지지 말고 편벽된 신임으로써 민정(民情)을 막히게 하지 말고 엄한 형벌 괴로운 부역으로 민원을 사지 말라. 근심이 많고 분심(憤心)이 축적된 뒤라야 선업(先業)을 일으킬 수 있고 큰 원수를 씻을 수 있을 것이니, 이제부터 존망과 치란의 기틀은 왕에게 달렸고 나에게 있지 않다. 아무쪼록 경계하고 삼가하라. 이 때문에 유시한다.

사헌이 선칙(宣勅)을 끝마치고 상과 더불어 서로 인사있다.
이날 밤에 주상전하는 대궐로 돌아와 유성룡을 불러 타이르기를,

“내가 경을 보는 것도 단지 오늘 뿐이다. 비록 밤이 깊었지만 경과 더불어 면대하고 작별하고자 해서 부른 것이다.”

하니, 성룡은 대답하기를,

“보잘 것 없는 신 등이 그릇되게 임사(任使)를 입었사옵기로 국사가 이에 이르렀으니, 신 등의 죄입니다.”

하였다. 주상전하는 마침내 장유(?諭)를 내리어 이르기를,

“경의 재주는 큰 일을 하기에 충분하지만 임금을 잘못 만난 까닭에 이런 액란(厄亂)의 세상을 만난 것이다. 옛날에 제갈량(諸葛亮)이 선주(先主)를 만나서 마침내 포부를 폈다. 만약 선주를 만나지 못했던들 단지 융중(隆中)에서 늙어 죽었을 것이니, 어찌 큰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하고, 인하여 소환(小宦)을 돌아보며 술을 가져오라 하니, 소환이 향온(香?)을 큰 그릇에 담아 가지고 오자 술을 내려 주며 이르기를,

“이것으로써 서로 작별이다. 나는 명일에 천사(天使) 앞에서 사위(辭位)하려고 한다.”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중국에서 우리가 떨쳐 일어나지 못함을 근심하므로 칙지에 말한 것이 권면하고 격려하는 뜻이 아님이 없으니, 어찌 딴 뜻이 있사오리까? 삼가 바라옵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이 일에 동요되지 마시옵소서. 명일의 일을 이와 같이 하신다면 천만 불가하오니 행여 짐작하여 주시옵소서. 신이 감히 목숨 걸고 청하겠사옵니다.”

하자, 주상께서는 묵묵히 아무런 답이 없었다. 그래서 성룡도 이에 나왔었다.
이튿날 주상전하는 남별궁(南別宮)에 거둥하여 문안의 작은 방에 잠깐 좌정하고 유성룡 등을 불러 들라 하여 외간의 일을 물으시니, 성룡은 인하여 아뢰기를,

“어제 밤에 주달한 것을 조금 유의해 주시기를 원하옵니다.”

하니, 주상은 답하지 아니하고 다른 말씀만 하였다. 이윽고 사 행인(司行人)이 출석하니 주상께서는 바로 들어가 잔치를 베풀었다. 술이 반쯤 오가자 주상은 소매 속에서 어첩(御帖)을 꺼내어 행인에게 보이는데 그 첩 가운데,

“병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가 없으니, 세자에게 전위(傳位)할 것을 청합니다. 원컨대, 천사(天使)는 주장하여 소원을 이루게 하여 주시오.”

하였다. 이는 주상의 친필이었다. 사헌은 즉시 붉은 첩지에다 손수 써서 답하였는데, 그 대의를 말하면,

“변변찮은 저는 사명을 받들고 이 나라에 와서 국왕과 서로 면접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옵니다. 지금 복국(復國)하게 된 것은 비록 중국 군사의 힘이라지만 역시 국왕의 복록이 아직 다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국왕이 사위(辭位)하려 하시는 것은 당 숙종(唐肅宗)의 고사와 같으니, 마땅히 주달하여 천조(天朝)의 처치를 기다릴 수 밖에 없사옵니다. 저는 하나의 행인이오라 어찌 능히 힘이 되오리까만, 모를 것은 우선 왕이 반드시 사위하려 하시는 것은 무슨 뜻이십니까? 들어보고 싶습니다.”

하니, 주상전하는 곧 수필(手筆)로써 답하기를,

“다른 뜻은 전혀 없으며 단지 질병으로써 감히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는 까닭으로 이와같이 하는 것입니다.”

하니, 사헌(司憲)이 보고서,

“예. 예.”

하였다. 주상전하는 대궐로 돌아와서 곧 어필첩(御筆帖) 및 사 행인의 홍첩(紅帖)을 유성룡에게 보내니, 성룡이 답하여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이 일을 간하였는데도 성상의 뜻이 이와 같으시고 또 신이 대신의 자리에 있으면서 미리 알지 못하였으니, 자못 대신의 도리를 잃었는지라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옵니다.”

하였다. 이 때에 중국 장수로서 도성에 있던 자는 거의 다 서쪽으로 돌아가고 오직 유격 척금(戚金)만이 홀로 있었는데, 척금은 성품이 몹시 기민하였다. 그는 사 행인(司行人)을 중로로 마중 나가서 함께 도성으로 들어왔고, 또 밤낮으로 행인의 처소에 있어 함께 모든 것을 논의하는 중이었다. 이날 밤에 척금은 사람을 시켜서 성룡을 청하니, 성룡이 그의 처소로 가서 만나자, 척금은 좌우 및 통역관을 다 밖으로 내보내고 방 한 가운데다 하나의 탁자를 놓고 그 위에다 촛불을 두 자루를 꽂아 놓고 또 종이ㆍ붓ㆍ벼루를 탁자의 북면(北面)에 두고 또 교의(交椅) 하나를 설치하고 성룡에게 그 위에 앉게 한 다음에 손수 종이와 붓을 가져다 친히 십여 조문을 써 내려가는데 그 제 3조문에 이르기를,

“국왕은 전위를 마땅히 일찍해야 한다.”

하였고, 그 나머지는 모두 군무에게 관한 것이었다. 이것을 성룡에게 보여주니, 성룡은 일어서서 정색하고 말하기를,

“제 3의 조문은 배신(陪臣)으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것이외다. 대인이 만 권의 서적을 읽으셨으니, 어찌 고금 천하의 사변을 못 들으셨겠습니까? 소방(小邦)이 나라 형세가 한창 위급한데 만약 군신ㆍ부자의 사이에 대한 처사가 정당성을 잃게 되오면 이는 그 화를 더욱 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고, 인하여 손을 모으고 서 있으니, 척금은 눈을 또렷이 뜨고 한참 동안 바로 쳐다보다가 곧 붓을 들고 그 아래 쪽을 써 내려가면서 ‘옳다 옳다’ 하였다. 그리고 그 종이를 가져다 촛불에 대고 태워버리며 인하여 좌우를 부르므로 성룡도 역시 하직하고 나왔다. 이 때는 밤이 이미 이경(二更)이라 대궐에 빨리 나아가서 그 일을 아뢰려고 하였으나, 당시에 주상께서 방금 전위(傳位)하는 일로 누차 대신에게 전교를 내리시므로 대신은 힘을 다하여 그 불가함을 아룄으되 오히려 정지 명령을 얻지 못하고 있는 터였다. 그러므로 다만 그 집에서 최흥원(崔興源)을 만나 보고 말했을 뿐이었다. 명일에 유성룡은 정철(鄭澈) 등과 더불어 백관을 거느리고 나가 글을 사 행인(司行人)에게 올려 본국의 변란을 만난 이후의 사정을 역력히 진술하였는데, 이는 모두 왜적의 범순(犯順)의 꾀를 들어주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낭패하게 된 것이나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과, 주상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지성껏 대국을 섬기고 정사에 부지런하고 힘쓰는 실상을 말하니, 수천 여 글자에 달하였다. 사헌은 이 정문(呈文)을 보고서 자못 그렇게 여겼었다. 이 날 척금이 또 성룡을 불러 말하기를,

“행인의 뜻이 크게 바뀌었으니, 염려할 것 없다. 오직 국사에 힘을 다하면 될 따름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오랫 동안 이 나라에 머물러 있어 국왕과 더불어 서로 친숙하고, 또 내가 국왕과 더불어 같이 임자년 생이라 일찍이 행인에게 극력 주선하였노라.”

하므로, 성룡은 손을 모아 치사하며 말하기를,

“원컨대, 노야(老爺)는 시종 이 뜻으로 나가서 소방(小邦)의 정의로 하여금 천조(天朝)에 상달되게 하여 주시면 소방 사람들이 노야의 은혜를 받은 것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척금은 마침내 기뻐하는 빛이 있었다. 대개 제 공으로 여기고 그러는 모양이었다. 수일 후에 사 행인이 유격 심유경ㆍ유격 척금과 남산의 꼭대기에 올라 국도의 형세를 바라보았다. 심유격은 병부의 격문을 가지고 장차 부산에 들어가 왜장을 선유하여 빨리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가게 함과 동시에 그들에게서 항복하는 표문(表文)을 받아와야 하기 때문에 바야흐로 왕경을 거쳐서 추풍령으로 향하는 때였다. 세 사람이 같이 앉아 동남쪽을 가리키며 얘기들이 자못 많았다. 통역관이 곁에서 들으니, 행인의 말이 전위하는 일에 미치자, 심유경은 말하기를,

“이러한 고독하고 위태로울 때일수록 장성한 임금이 있어야 일이 마침내 풀려가는 법이니, 전위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알맞은 처사가 아닌가 한다.”

하니, 행인은 말하기를,

“국왕이 장자를 버리고 차자를 세우는 것은 응당 어머니가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까닭이리라.”

하였다. 유경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임해(臨海)와 광해(光海)는 바로 어머니가 같은데 그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으며, 광해를 세운 것은 바로 이 나라 사람들의 한결같은 마음이다. 임진의 변란에 서울 사람들이 여러 왕자의 궁을 불질렀으되 유독 광해의 궁은 불지르지 아니하였으니, 이로써 역시 인심의 향배를 알 수 있지 않는가?”

하니, 사 행인이 수긍하며 말하기를,

“그렇단 말인가?”

하였다. 이로부터 사 행인은 주상과 서로 접견하면서 자못 예모를 차렸었다. 하루는 사 행인이 급히 대신과 병무를 주관하는 재상을 부르므로 영의정유성룡ㆍ경림군김명원ㆍ해평군윤근수ㆍ병조 판서이항복 등이 함께 들어가니, 사 행인은 유독 유성룡만을 불러들이고 좌우를 물리쳤는데, 유독 요동 두목 한 사람을 머물게 하면서 묻기를,

“글을 아느냐?”

하니, 대답이 ‘글을 알지 못한다’ 하므로, 마침내 남아 있도록 허락하였다. 그리고 종이에다 써서 성룡에게 보이는 데 힐문하는 말이 많이 있었다. 또 말하기를,

“그대 나라는 아무개가 정승이 되어 국사를 무너뜨렸다 하더군요.” 이산해(李山海)를 이름.

하니, 성룡은 말하기를,

“이 말은 다 근거없는 말들이니, 노야는 부디 곧이 듣지 마소서.”

하였다. 사 행인은 또 성룡더러 묻기를,

“중국인 장수 관원들이 흔히 지방에서 침해를 부린다 하는데 진실로 그러하오? 누가 가장 심하오? 숨김없이 다 말하시오.”

하므로, 성룡은 말하기를,

“소방이 중국의 구제하는 은혜를 입어 오늘날이 있게 되었고 여러 장령들도 각기 약속을 준수하여 군사를 독려하는데 어찌 침해하는 일이 있으리까?”

하였다. 사 행인은 또 말하기를,

“나는 듣자니, 조선 사람의 말이, 왜적은 머리빗[梳子]이라면 중국 군사는 참빗이라 한다는데 진실로 그러하오?”

하므로, 성룡은 말하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군사가 있는 곳에는 형극(荊棘)이 나기 마련이라 하였으니, 소소한 침해야 어찌 전혀 없다 하오리까? 이 역시 형세상 없을 수 없는 일이며, 참빗이라는 말에 있어서는 천만에 이런 이치가 없습니다. 필시 중간에서 말을 지어내는 자가 한 것이니, 원컨대 노야께서는 이 말을 믿지 마소서.”

하였다. 이윽고 말을 마치고 나오니, 김명원 이하가 무슨 말이 있었느냐고 물으므로, 성룡은 대략 들은 바를 들어 말해 주고 말을 달려 대궐에 나아가 복명하였다.
사헌(司憲)은 7일 동안 머무르고서 출발하여 요동에 돌아오니, 감군 한취선(韓取善)이 그 광망함을 탄핵하였다.
12월 2일 적의 군사 수만여 명이 세 길로 나누어 곧장 안강현(安康縣)을 들이치니, 안강은 바로 경주의 속현인데, 경주부 북쪽 30 리 지점에 있어 본도에서 군량을 운반하고 대군을 맞이하는 길목이라 이 길을 만약 잃는다면 군량을 수송하는 길이 단절되며 경주는 적의 포위 속에 들어 매우 위급하므로 병사(兵使)고언백(高彦伯)ㆍ박의장(朴毅長) 등이 각기 정병을 거느리고 연일 혈전을 벌여 대적하며 쉬지 아니하였다. 오유충(吳惟忠)ㆍ낙상지(駱尙志)ㆍ왕필적(王必適) 등이 서로 의론하기를,

“적의 군사가 지금 우리 군사의 뒤를 감고 나오니, 만약 군사를 내어 제지하지 아니하면 단병(單兵)으로써 앉아 죽게 될 것인즉 외롭게 지키는 것만이 계책이 아니다.”

하고, 드디어 여러 진영의 군사 수천 명을 뽑아서 맞아 싸워 살상한 자가 상당하였는데, 적의 세력이 워낙 대단하여 승리를 점치기 어려웠다. 그래서 관군은 자못 손실이 있었고 적도 역시 힘이 지쳐서 밤을 지나고 도망갔다. 급사중 오문재(吳文梓)는 왜놈의 거짓과 간교가 이미 드러났음을 역설하고 엄중히 책성(責成)을 가할 것을 간청하였는데, 그 상소는 다음과 같다.

삼가 아뢰옵니다. 지난 날에 유병(留兵)의 살상이 매우 많아서 어사 주유한(周維翰) 또한 주달하셨사온데 경략은 아무런 말이 없고 오히려 소문에서 나온 것이라 이르므로, 감히 성상께 번거롭게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급기야 경략의 군사 정보를 받아 보아도 일치하지 아니하며 오히려 이르기를, ‘지경을 넘어서 정탐하는 것은 지나친 요구에 불과하다.’ 하였습니다. 성상께서 분부를 내리어 실지대로 보고해 올리라 하였으니, 마땅히 아침에 명령을 내리면 그날 저녁으로 상소를 올려야 할 일이옵기로, 분부를 받은 이래로 머리를 쳐들고 발돋움하며 나날이 주장(奏章)이 오기만을 바랐사오나, 그에 대한 통보는 전혀 없고 다만 본병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왜놈은 별다른 소요를 부리지 않고 잠잠히 있다.’ 하였으니, 신은 해괴하고도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어서 참을 수 없습니다.

경주의 침범과 진주의 노략질은 모두 왜놈이 한 짓입니다. 설사 협박을 받은 난민이라 할지라도 왜놈에게 항복한 자는 왜놈이 아니겠습니까? 중국의 군사를 잃은 것은 진정한 사실이온데, 또 어찌 순순하게 왜놈을 위하여 변명을 합니까? 송응창(宋應昌)의 뜻을 더듬어 보오면 섬 오랑캐의 죄를 관용하여 봉(封)하는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 뿐이며, 자못 왕래하여 강화(講和)하자는 것이 바로 상대방의 사기를 나태하게 만들자는 교활한 꾀요, 잠깐 부산에 잠복한 것은 바로 장차 취하려면 짐짓 준다는 낡은 지략이라는 점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령 대다수의 군사가 이미 바다를 건넜다 할지라도 지금의 이른바 창궐하여 군사를 끼고 덤벼든 자는 누구입니까? 행장은 이미 세상이 청정하다 일렀는데 지금의 물자와 식량을 마구 약탈하고 유병(留兵)을 살상하는 자는 또 누구입니까? 소서비(小西飛) 등의 회답한 말이 이미 두어 달이 되었으니, 또 그 표문(表文)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사옵니까? 무릇 차가운 겨울철을 당하면 저들이 이로운 때가 아니지만 오히려 솔개처럼 벌리고 이리처럼 씹어대기를 제 마음대로 하는데, 얼마 아니가서 봄물이 넘실대면 정히 배를 띄우기 좋을 터이니, 그 창궐하는 것이 어찌 다시 닥치지 아니하오리까? 잘 꾀하는 자가 삼군(三軍)을 약속하여 한 마음으로 만들고 두 나라를 연속하여 한 몸으로 삼아 뜻과 기운이 서로 잇대고 팔과 손가락이 서로 부리게 한다면 거의 믿고서 걱정이 없을만도 할 것입니다. 지금 경략은 화친을 주장하고 장수들은 싸움을 주장하니, 두 마음은 임금을 섬길 수 없는 것이요 의심을 품으면 적을 대응할 수 없는 것이오며 겸하여 협박을 입은 난민들이 저들의 향도가 되고 저들의 성세를 도운다면, 이 때를 당하여 강한 적은 밖에 있고 배반한 백성은 안에 있는데 나는 고단하고 약한 군사를 가지고서 외롭게 그 가운데서 지탱하게 될 것입니다. 정히 손자(孫子)가 이른바, ‘왼쪽이 능히 바른 쪽을 구원하지 못하고 바른 쪽이 능히 왼쪽을 구원하지 못하며, 앞에서 능히 뒤를 구원하지 못하고 뒤에서 능히 앞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이어서, 형세가 급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그 형체를 보기 전에 먼저 그림자를 살피라’ 하였으니, 방어하는 자는 미연의 방지를 귀히 여긴다는 말입니다. 지금 왜놈의 교활하고도 간사한 정상이 너무도 또렷이 나타났사온데, 어찌하여 당사자는 지키고 싸우는 것을 익혀서 교활한 꾀를 허물어버리지 못하고 봉(封)을 의론하고 공(貢)을 의론하여 군정을 태만하게 하여, 드디어 일의 기회를 앉아서 잃고 적의 기세는 날로 늘어나 장차 눈앞의 위기가 닥쳐오기에 이르렀으니, 수족을 놀리지 못하게 될 것이라 신등은 적이 근심이 있사옵니다.

장수의 도란 당연히 먼저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데, 송응창 등이 왕명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제 멋대로 임지를 떠났으니, 이는 왜놈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조정을 두려워하는 마음보다 심하되, 당사자가 탕평하여 문제를 삼지 아니하니 근심스러운 한 가지요, 조선의 군신은 회복할 것을 잊은 날이 없는데 우리의 울타리를 버려둔다면 동남이 거의 편안한 날이 없을 것이 근심스러운 두 가지요, 등래(登萊)에서 천진(天津)까지 지방이 요원하고 광활하며, 또 태평의 세월이 오랜지라 전쟁의 깃발을 눈으로 보지 못하고 쇠북소리를 귀로 듣지 못하였으므로, 평상시에도 왜놈의 말만해도 낯빛이 변하고 적에게 다다르면 바람만 바라보고도 걸음이 뒤로 물러가니, 근심스러운 세 가지요, 회양(淮陽)은 조운(漕運)의 중요한 길목 구실을 하는 곳인데, 바로 지금 수재(水災)에 곤궁을 당하여 굶주린 백성들이 또 벌떼처럼 일어나서 천택(川澤)에 둔치고 있으니, 신은 화가 밖에 있지 않고 울타리 안에 있을까 걱정이니, 근심스러운 네 가지이옵니다. 비탄(飛彈)과 길병(吉兵) 등이 경성에 머물러 있고 소서비는 요좌(遼左)에 안치되어 있고 항복한 왜놈이 변방에 흩어져 살고 있으니, 그들이 우리의 종족이 아니라 그 마음도 반드시 다를 것이온데 지금에 우리 문호를 엿보고 우리 허실을 살피다가 하루 아침에 틈을 타서 일어난다면 어떻게 제지하겠습니까? 강통(江統)의 오랑캐를 옮기자는 의론이 바로 오늘의 밝은 거울이라 하겠사옵니다.

신은 듣자오니, ‘남의 벼슬을 짊어진 자는 남의 일에 충성해야 한고 남의 밥을 먹는 자는 남의 근심을 근심해야 한다’ 하옵니다. 송응창(宋應昌)은 몸소 특견(特遣)의 명을 받았사옵고, 이여송(李如松)은 대대로 국가의 은혜를 입었으니, 의당 마음을 굳게 하고 힘을 모아 이 왜적을 없애고 나서 조식(朝食)을 해야 할 것이며 이것만이 뒤로 나라를 저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내 둘 다 옳다는 생각을 가지고 교사한 오랑캐에게 만일의 요행을 기대하여 유비무환의 대책은 백에 한두 가지도 없었으며, 급기야 군사를 잃고 공적을 무너뜨려 사세가 궁박하게 되어서는, 또 임금의 명령을 지연시키며 그대로 아뢰지도 아니하니, 그 상태의 꼴이란 반드시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는 모양이오나 신하로서 속여서는 안 된다는 의리를 어떻게 알고서 감히 이와 같이 엄폐하는 것입니까?

삼가 바라옵건대, 황상폐하는 경략 및 독무ㆍ도독 등 여러 신하에게 칙령을 내리시어 명지(明旨)를 각별히 받들어 일력을 담당하게 하시고, 아울러 장수와 신하들에게 조목별로 공격과 수비의 기회 및 병기와 군량의 방책을 진술하여 일일이 거행하게 하시고, 봉공(封貢) 따위로써 방어를 소홀히 하고 교활한 왜놈을 믿고 묘당의 공론을 경솔히 하여 국가의 대사로 하여금 결렬되고 파괴되어 수습 못하는 지경에 이르지 말게 하시옵소서. 그리 되오면 그들이 비록 죄에 자복하여 죽여달라고 청한다 할지라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신등은 명지(明旨) 만을 그대로 받들어서 의론을 생략하고 성공을 희망할 것을 모르는 바 아니오나, 소관의 임무를 생각할 때 차라리 신의 말이 들어맞지 않을망정 나라일로 하여금 안일만 탐하고 세월만 보내어 스스로 안팎으로 엄폐하는 죄에 빠지게 하고 싶지는 아니하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폐하께서 채택하여 주시옵소서.

성지를 받든 바, ‘병부가 알아서 하라’ 하였다.
이 때에 송 경략은 누차 언관에게 공박을 당하여 이미 파직하고 돌아왔으나 오히려 자꾸 자꾸 군사를 철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였다. 고 총독(顧總督)은 마침내 청하여 약간의 군사를 머물러 두게 하고 또 화기(火器)를 우리 나라에 공급하였으며, 남북장군 오유충(吳惟忠)ㆍ장삼신(張三晨)등은 갑오년 정월에 먼저 돌아갔다. 전날에 귀순을 청한 왜장 소서비탄수(小西飛彈守)는 바야흐로 광녕(廣寧)에 머물러 머리를 조아리며 봉공을 원하였다. 총독은 요양에 당도하여 어렴풋이 관백의 표문이 또 왔다는 것을 듣고, 비로소 유병(留兵)을 모조리 철수하자는 의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또 포로되어 온 왜장 길병(吉兵)을 보내어 행장(行長)을 달래게 하고 아울러 유격장군 주홍모(周弘謨)를 보내어 왕래하게 하였으므로 스스로 왜의 정상을 매우 자세히 파악했다 일렀지만 속기도 많이 했다. 주홍모는 와서 서울 안에 머물렀는데, 얼마 안 가서 말에 떨어져 병들어 죽었다.
황상은 총독 고양겸(顧養謙)이 힘써 철병을 주장한 것을 아름답게 여기고 담대한 책략이 많다고 여기어 칙서를 내려 칭찬하였다.
병부 상서도 역시 조선에 군량을 공급하지 말고 아울러 유정(劉綎)의 군사마저 철수해야 하며, 고 총독도 봉공을 청하였으니, 아울러 그 의론을 허락해야 한다고 하였다. 대략은 다음과 같다.

심유경(沈惟敬)이 처음에 왜의 진영에 들어와 즉시 봉공을 말하니, 왜놈이 이로써 왕경을 물러나고 왕자를 돌려보내며 자취를 감추고 명령을 기다렸사온데, 뒤에 중조(中朝)에서 화친에 뜻이 없음으로 인하여 천취(遷就)하고 알리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굽은 것이 우리에게 있으므로 본병(本兵)은 중간에 변하여 왜놈에게 신의가 없음을 보여서는 아니 되오며, 또 전 경략 송응창이 시종 강공(講貢)의 설이 있었으니, 공도(貢道)도 마땅히 정해야 하오며 관백(關白)은 마땅히 일본 국왕을 봉해야 합니다. 청컨대, 재간과 용력이 있는 무신을 가려서 사신을 삼으시고, 심유경으로서 행장(行長)을 종유하게 하고 부산의 왜적은 모두 돌려보내고 바로 봉공을 허락하되 언약과 같이 하옵소서.

성지를 받든 바, ‘해부가 알아서 하라.’ 하였다.
조서를 내려 구경(九卿)ㆍ와도(科道) 등 관원으로 하여금 회의하게 하였는데, 예부 의제랑중 하교원(河喬遠) 등이 분연히 일어나 봉공을 허락하지 말 것을 청하고, 급사중 임재(任材)는 독신(督臣)이 속여 나라일을 그르친 등의 죄를 탄핵하고, 어사 당일붕(唐一鵬)은, 이여송이 봉(封)의 흔단을 터놓은 것을 탄핵했고, 요진도어사 한취선(韓取善)
포정사(布政使)로 승직(陞職)을 하여 어사가 되었음. 역시 왜적의 정세가 정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아울러 봉공을 거절할 것을 청하였으며, 호과 급사중 진세은(陳世恩)이 상본(上本)하여 봉공이 좋은 꾀가 아니라는 것을 극력 말하였다. 그 소본은 다음과 같다.

왜놈이 우리 국가의 근심거리가 된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속임수를 헤아릴 수 없고 번복하는 작태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거절하고 상통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였으니, 진실로 조심한 것이었습니다. 근자에 그놈들이 진출할 생각을 가지고 조선을 침범하여 우리 내지(內地)를 범하겠다고 큰 소리를 치므로 우리 황상께서 크게 노하시어 특별히 대신 경략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시랑 송응창(宋應昌)이 명령을 받고 같으니, 마땅히 이류(異類)를 없애고 번리(藩籬)를 굳건히 하고서 돌아와 황상께 아뢰야 될 것입니다. 그리하온데 어찌 된 일입니까? 평양의 첫 승첩은 비록 보통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 낫다 하겠지만 급기야 벽제의 싸움에서 마침내 우리 군사를 태반이나 손상시켜 예기(銳氣)가 다 소멸되고 졸렬한 꾀를 내어서 한편으로는 공(貢)을 의론하고 또 한편으로는 봉(封)을 의론하다가 조정의 의론이 옳지 않게 여기자 마침내 왜놈을 우롱하는 꾀를 빙자하여 실마리를 풀어보겠다지요. 공을 구하고 봉을 청하는 장문(狀文)이 왜놈에게서 나오지 아니하고 자리를 잡고 있고 노략질을 하고 있는 왜병이 조선에 가득하니, 이는 응창이 봉공으로써 왜적을 우롱한다는 것이 종당에는 도리어 자기가 우롱을 당한 셈입니다. 지금 또 총독 고양겸으로 교대하였으나 다만 이 일이 경략은 이미 돌아가고 개가는 듣지 못하는 때에 있게 되니, 혹시나 처리가 부당하게 된다면 어떻게 인심을 감복시켜 그 뒷 일을 격려하며, 총독이 예기가 한창 성하고 군령이 바야흐로 일신할 때에 있으니, 혹시나 신칙이 엄하지 못하다면 어떻게 뭇 사람의 마음을 귀일하여 함께 시작을 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전 일의 폐단을 진술하는 것도 오늘에 있어야 하고 뒷일의 시작을 새롭게 하는 것도 역시 오늘에 있어야 하오니, 이는 진실로 빨리 의론하지 아니해서는 안 되옵니다.

응창이 군사를 출동하던 처음으로부터 지금 교대한 날에 이르기까지는 1년이 훨씬 넘는 세월이 지났으니, 그 시기가 오래되지 않았다고도 못할 것이요, 군사를 징발하였으니 그 싸움에 병력이 없었다고도 못할 것이요, 군량을 다방면으로 수송하여 결핍되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양식이 없었다고도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어사를 파하여 그 가는 것을 막지 아니하였고, 그 다음에는 그 패배를 들어주어 법으로써 다스리지 아니하였고, 종당에는 천병(川兵)의 살상이 매우 많았는데 즉시 아뢰지 아니하였어도 그 숨긴 것을 책하지 아니하였으니, 그 신임한 것이 가위 전적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조정에 있어서는 중간에서 제재하거나 말릴 생각이 없었는데 응창에게 있어서는 두려워하고 기망한 죄가 있으며, 조정에서는 비방한 글이 상자에 가득 찼지만 덮어두고 묻지 아니하였으며 응창에게 있어서는 한갓 여러 가지 말을 늘어 놓아서 책임을 메우려고 하니, 이는 황상의 응창에 대한 신임은 어찌 그다지도 후하고 깊은데, 응창의 스스로 믿는 것은 어찌 그다지도 소홀하고 천박하단 말입니까? 만약 이 때에 배척하지 아니한다면 그가 장차 조정에 돌아와서 아무런 기탄 없이 상을 받을 생각을 할 것입니다. 하물며 왜놈이 멸망하지 아니하여 마지막의 일이 어찌 될지 예측하기 어려운데 다시 고식적인 태도를 취하며 빨리 처분을 내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맡은 일에 충실하지 못한 자의 경계가 될 수 있사오리까? 진실로 마땅히 억제하여 회적(回籍)하게 하고 따라서 병마를 상하게 한 두어 조목을 가지고 각 진영을 순회하여 확실히 조사해서 만약 왜적의 화로 인해 정세가 혼란스러운 날이 있을 경우에는 죄를 논해야 할 것이니, 이는 경략대신(經略大臣)이 마땅히 처분을 의논하여야 할 것입니다. 총독 고양겸은 재주와 명망이 뚜렷이 드러났을 뿐 아니라 월(鉞)을 받은 처음에 총독으로서 경략을 겸하였으므로, 군사를 징발하고 군량을 운반함에 있어 그 형세가 심히 편리할 것이오며, 예전에 일찍이 요동을 진무하여 일에 임한 적이 자못 오래였으므로 그 지리와 인정에 대하여 또 매우 익숙한지라 넘어진 수레를 징계하고 가던 길을 바꿀 것이니, 진실로 이 큰 소임을 감당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봉공의 고투를 따르는 것은 구차하게 책임을 모면하는데 불과하니, 만약 의연히 분발하지 아니하고 다시 그전의 그릇된 점을 그대로 답습하여 한갓 목전만을 지탱하기로 한다면 그 자신에게는 편리한 계책이 될지 모르겠사오나 국가의 일에 있어서는 그 무엇을 힘입으오리까?

신은 바라옵건대, 황상께서는 빨리 칙유(勅諭)를 행하시옵소서. 이 봄철의 밀물이 바야흐로 시작되는 때를 당하여 힘써 공격과 방어의 태세를 갖추고서 국가를 편안히 하고 이적을 물리치는 바른 계획을 견지하고 봉공의 사설(邪說)을 배척하며, 왜적이 혹시 침범해 온다면 경내에서 모조리 다 잡아 없애고 군사 한 명이라도 제 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해야할 것이니, 이는 총독대신이 마땅히 의론하여 신칙할 바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고서 경략이 봉을 말했는데 총독 역시 봉을 말하고, 경략이 공을 말했는데 총독 역시 공을 말한다면, 이는 경략이 이미 처음을 그르쳤고 총독이 장차 재차로 그르치는 것이니, 해[年]는 다시 그 해요 사람은 다시 그 사람이라, 신이 겁나는 것은 저 갑옷 입고 예리한 무기를 든 자가 모두 조정의 창생이요 적자들인데, 어찌 길이 바닷가에서 곤욕만 당하게 할 수 있으며, 조달하여 수송하는 군량과 마초는 모두 백성들의 고혈인데, 어찌 오래도록 미려(尾閭)주D-014에 배설만 하게 되오리까? 더구나 봉공의 설이 한 번 제창되자 장수와 아전들은 방어의 차비를 소홀히 하고 호걸들은 진취의 의욕을 떨어뜨려서 수습할 수 없게 되니, 해를 끼침이 너무도 무궁하여 진실로 거슬러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천하의 일을 장차 그 누가 책임지겠습니까? 어(語)에 이르기를, ‘당연히 끊을 자리에 끊지 아니하면 도리어 그 해를 받는다’ 하였는데, 정히 오늘의 동쪽 일을 두고 이른 것이라 하겠습니다. 미천한 신의 어리석은 소견은 이와 같사오며 격절(激切)하고 송구함을 이기지 못하옵니다.

성지를 받들기를 ‘해부가 알아서 하라’ 하였다.
이 때에 국사를 말하는 책임을 가진 자들이 분운하게 일어나서 본병에 대한 공격이 너무도 강력하고, 석성(石星) 역시 사설을 늘어놓아서 관백(關白)이 기미(羈?)에 걸려들지 아니할까 염려하였는데, 마침 심유경(沈惟敬)이 부산으로부터 관백의 항복하는 표문 두 본을 얻어왔다. 이것은 그 나라 장수와 관리들이 청하여 수길(秀吉)을 세워 왕으로 삼는다는 결장(結狀)이었다. 그 표문의 조어가 일본의 문자가 아니라는 의심도 있었으나 석성은 믿고서 수길이 실지로 중국의 약속을 받드는 것이라 여기고 봉공하기로 의론을 결정하였는데, 급사중 허홍강(許弘綱) 등은 오히려 그것을 불가하다고 강력히 논쟁하였고, 우리 나라에서도 역시 배신 허욱(許頊)을 보내서 왜적의 정상이 반복하여 믿을 수 없다는 점을 주달하였다. 그래서 허욱이 요동에 당도하자 총독 고양겸이 허욱을 억류하여 더 나가지 못하게 하고, 즉시 참장 호택(胡澤)을 우리 나라에 보내어 그 주장(奏狀)을 고쳐서 강화를 청하자고 하였는데, 그 서신이 수천 자에 달하였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왜놈이 까닭 없이 귀국에 침범하여 파죽의 형세로 나와 왕경ㆍ개성ㆍ평양삼도(三都)를 점거하여 귀국의 토지와 인민을 십에 팔구를 차지하고 왕자와 배신을 사로잡아 갔으므로 황상께서 크게 노하시어 군사를 일으켜 한 번 싸우매 평양을 깨뜨리고 곧장 나아가 개성을 탈환하니, 왜놈들이 마침내 왕경으로 도망하여 왕자와 배신과 2천여 리의 토지를 송환하였습니다. 그 동안 소비된 우리 탕금도 적지 아니하고 병마의 손실도 역시 적지 않았으니, 우리 조정에서 속국을 대우하는 은혜와 의리가 이에 이르렀음을 볼 때 황상의 은덕이 역시 과하다 할 것입니다. 지금 군량은 이미 다시 운송할 수 없고 군사도 다 쓸 수 없는데, 왜놈이 역시 두려워하여 항복을 청하며 또 봉공을 애걸하므로 천조(天朝)에서도 마땅히 봉공을 허락하여 외신(外臣)으로 만들고 왜놈들을 수대로 다 몰아내서 바다를 건너게 하여 다시는 귀국을 침범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분을 풀고 전쟁을 종식하자는 것이니, 귀국의 장래를 위하여 꾀한 것입니다. 지금 귀국이 군량이 떨어져서 인민이 서로 잡아 먹을 지경에 놓였는데, 또 무엇을 믿고서 군사를 청합니까? 우리가 군사와 양식을 귀국에 대주지 아니하고 또 왜놈에게 봉공을 거절한다면 왜놈이 귀국에 분풀이를 할 것이니, 귀국은 반드시 망할 것인데 어찌 일찌감치 자위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옛날에 월왕(越王)구천(句踐)이 회계산(會稽山)에서 곤욕을 당할 적에 어찌 부차(夫差)의 살을 씹어먹고 싶지 않았으리오만, 우선 수치를 참고 견딘 것은 장차 기대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몸소 신하가 되고 자기 아내를 그의 첩으로 주기도 했는데, 하물며 왜놈은 중국의 신첩(臣妾)이 되겠다고 자청하니, 이로써 자위하고서 서서히 계획을 세워 나간다면 이는 오히려 구천의 군신의 입장보다 낫지 아니합니까? 이것을 능히 참아내지 못한다면 바로 옹졸한 소장부의 소견이요, 원수도 갚고 부끄럼을 씻는 영웅의 생각이 아닙니다.

귀국이 왜놈을 위하여 봉공을 청해서 만약 과연 그 청을 얻게 된다면 왜놈이 반드시 더욱 중국에 감격할 것이요, 또 조선을 은덕으로 여기어 반드시 전쟁을 파하고 떠날 것이며 왜놈이 떠나면 귀국의 군신은 드디어 고심초사하고 와신상담하여 구천의 업적을 닦는다면 천도는 좋게 돌아오는 법이라 어찌 왜놈의 원수를 갚을 날이 없겠습니까?

조정에서 이 서신을 얻어보자 호택(胡澤)을 관관(官館)에 머무르게 하고 자못 여러 날을 지났으나 의론이 역시 귀결되지 못하여 또 두 가닥으로 갈라졌다. 유성룡ㆍ성혼(成渾)ㆍ이정암(李廷?) 등은 우리 나라 힘이 약하여 중국의 원조에 의존하는데 중국에서 역시 원조 하기를 허락하지 아니한다면 우리는 능히 자립할 수 없고, 더구나 당사자가 자강(自强)의 길이 없어 마침내 강화를 인하여 전쟁을 늦추기만 바라니, 어찌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헌의(獻議)하기를,

“봉(封)을 청하는 것은 비록 의로는 불가하지만 총독이 중간에 들어서 가로막고 있으니, 역시 그 뜻을 따라서 중국 조정의 처치를 기다리는 것이 좋을까 하옵니다.”

하니, 상은 허락하였다. 그러나 화친이라는 명칭이 아름답지 못하다 하여, 기미(羈?)라 칭하고, 주본(奏本)을 고쳐 지어 허욱(許頊)에게 부치니, 석성(石星)은 이 상본에 의해서 인준을 청하여 그 봉공을 허락 받았다. 천자는 이에 여러 신하들이 봉공의 일을 방해한 것과 본병이 능히 주견을 갖지 못하고 여러 의론에 현혹된 것을 절실히 책함과 동시에 망언한 것으로써 어사 곽운(郭?) 등의 직책을 교체하였다.
3월 호과 급사(戶科給事) 왕덕완(王德完)이 상본하여, 자기 눈으로 동왜(東倭)의 틈이 생긴 것을 보았다 하며, 그 방어를 오로지 닦을 것을 청하였는데, 그 상소는 다음과 같다.

신은 생각하옵건대, 왜놈의 봉공에 대한 그 한 가지 일은 사직의 안위에 관계되므로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 무려 수십 사람이 모두 그 불가함을 극력 말하였으니, 신은 이로써 그 꾀가 중지될 것이라 일렀던 것입니다. 지난 번에 총독 고양겸이 왜적의 정상에 대한 상소를 보고서, 표문이 장차 올 것과 일이 거의 이루어진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하오나 단지 공을 구한다는 것만 말하고 공시(貢市)에는 미치지 아니하였으며, 또 왜적의 무리를 다 쫓아내고서 비로소 봉을 의논해야 옳다고 말하였으므로, 신은 총독이 스스로 참작한 근거가 있는 것이라 일렀습니다. 급기야 조선왕 이모(李某)의 적의 정상에 대한 상소를 읽어보니, 또 이르기를, ‘왜적이 근래에 접어들어 한데 뭉쳐 노략질하며, 지붕을 덮고 성을 쌓으며 군량을 운반하여 절대로 돌아갈 기미가 없고 화친을 말하고 공을 말하여 군정을 현혹한다’ 하였으니, 향배가 어찌하여 아주 다른 것이 이와 같습니까?

어제 본병이 대성(臺省)의 여러 신하들을 사소(射所)에 모이게 하고 동쪽 일을 협의하는데 신은 본병의 복소(覆疏)를 받아 읽어보니, ‘한가지 봉에 대한 일 밖에는 다른 일이 없다’ 하였고, 또, ‘공시를 허락하지 아니하면 일후에 조용하지 못하게 된다’ 하였고, 또 ‘안찰사가 이 부산의 왜호(倭戶)를 상세히 조사해서 한 사람이라도 돌아가지 아니하였으면 봉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여, 대개는 총독의 말과 같았습니다. 신은 본병이 혹시 자기 주견이 있는가 여겼습니다. 그러나 급기야 그 까닭을 물어보니, 아득하여 그림자를 끌어당기고 바람을 잡는 것 같은 감이 들어 신이 묻기를, ‘밖에서는 총독이 보낸 서신에, 공시(貢市)를 거절하는 것은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등의 말이 있다고 하는데, 진실로 그러한가?’ 하였더니, 본병이 답하기를, ‘반드시 그렇다고 하기는 어렵다. 혹시 공시를 강력히 요구한다면 다만 그 봉호만을 고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등은 또 묻기를, ‘부산에 있는 왜호(倭戶)는 수대로 모두 제 소굴로 돌아가려고 하겠는가?’ 하였더니, 본병은 말하기를, ‘기필하기 어렵다.’ 하므로, 신등은 또 묻기를, ‘특별히 요동의 순안사를 차송하여 친히 부산에 가서 왜호가 있고 없는 것을 조사해서 돌아가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더니, 본병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말하오면, 왜적이 봉만 청하여도 공을 하지 않는다는 것과 왜가 가고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것은 털끝만큼도 족히 믿을 만한 것이 없사온데, 어찌 능히 경솔히 믿으오리까?

신은 또 본병의 복소(覆疏)를 보니, 6월 내에 진주를 침범하여 살상이 일어났다는 등의 정보와 경략의 주보(奏報)에 ‘12월 내에 경주에서 중국의 군사 2백 24명이 살상을 당하고 군량 8백여 석을 약탈당했다’는 등의 말이 들어 있고, 또 조선의 상소는 작년 12월 7일 전에 있었고, 총독의 상소는 금년 정월 20일 이후에 있었다고 일렀으므로, 왜의 정상을 논한 것이 사뭇 달랐습니다. 그러나 서로의 차이는 1개월 전후에 지나지 않지만 어찌 반복함에 있어서는 천양의 차이가 아니겠습니까? 신은 또 참군관 기정국(棄靖國)의 품첩(?帖)을 보니, ‘정월 4일에 부산을 당도하니 아직도 왜놈이 1천 명이나 있고, 김해ㆍ웅천 등지에 있는 행장이 처소에는 혹 2천 명이 된다’고 하여, 왜적이 정히 노려보고 있는 형편이온데, 어찌하여 떠났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조선에서 청한 바, ‘3월에 상국(上國)을 침략한다’는 것과 ‘풍신(風?)에 대명(大明)을 범한다’는 등의 말이 어찌 반드시 다 허망하다고만 보오리까?
신은 또 심유경이 왜적에게 답한 글을 보았는데, ‘이미 봉공을 허락하셨는데, 어찌하여 그대로 있고 떠나지 아니하느냐’ 하였으니, 이는 봉과 공을 이미 아울러 말한 것이었습니다. 신은 또 왜국에 초록하여 보내는 부표(副表) 한 통을 보았는데, ‘전례에 비추어 한다.’ 하였으니, 이는 국조(國朝)의 봉공하는 전례를 이름이요, 말미에 또 이르기를, ‘헌상하는 해방(海邦)의 공(貢)이라’ 하여, 명백히 바로 말했는데, 대신들이 거짓으로 모르는 척하니 자못 패악한 일입니다. 신은 또 행장이 심유경에게 답한 편지를 보니, 화친이란 글자가 들어 있어 화친을 꾀하다가 이윽고 변론을 꾸며대어 두 나라가 서로 좋아하는 것이 바로 곧 화친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교사한 왜놈이 어찌 옛적부터 내려오는 두 글자를 모르겠사옵니까? 신은 또 조선배신 김수(金?)가 총독 고양겸에게 보낸 품첩을 보았는데, ‘왜적은 대군이 오래 이곳에 처하지 못할 것을 엿보고서 반드시 들을 수 없는 말을 퍼뜨려서 사람의 귀에 박히게 하니, 입으로 말하기 어렵다’ 하였으니, 화(和)를 꾀하는 자들이 모두 이로써 조정에 아뢰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유경이 왜적에게 허락한 것이 공시(貢市)에만 그치지 아니하였을 것이온데, 어찌 한 가지 봉(封)만으로써 일을 다 마쳤다 하오리까? 말이 이에 미치오매 머리칼이 위로 솟구칩니다.
왜놈이 조선에 들어와 난리를 일으킨 것은 원래 중국을 침범해 들어오자는 것입니다. 허의후(許儀後)가 처음에 내지(內地)에 서신을 보내어 말하기를, ‘관백이 북경을 탈취하고 중국에서 황제가 되고자 한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간사한 화친과 거짓 항복을 잘하여 상대의 국가를 깨뜨린다’ 하였으니, 곧 원근의 시정배들까지도 이런 줄을 먼저 알고 있는데, 경략이 동쪽으로 왜적을 정벌함에 있어 어찌 이를 분별하지 못하오리까. 평양의 승첩은 역시 공을 아뢰고자 했으나, 필경 벽제에서 크게 패하여 혼이 나고 담이 깨어지자 이에 비로소 두려운 마음과 굳은 뜻으로 오직 공(貢)만을 꾀하고 다시 전투의 일에 관하여 말하지 않은 것이나 아닙니까? 그러나 오히려 사람들이 알까 두려워하여 즉시 상달하지 못하였더니, 급기야 요동 무안(遼東撫按) 조요(趙耀)ㆍ주유한(周維翰)의 주보(奏報)에 모두 이르기를, ‘봉공이 이미 성립되었다’ 하자, 엄폐하기 어렵다는 것을 비로소 알고서 그 연유를 바로 말하였으며, 개성과 왕경의 배신과 왕자가 모두 봉공 때문에 효과를 보았는데, 도리어 뭇 의론이 비등함을 보자 때로는 드러내고 때로는 숨겨서 혹은 전적으로 봉(封)만을 말하고 공(貢)을 말하지 아니하여 공분을 조금 가라 앉히기도 하였는데, 그 후에 사세가 이미 급박함을 알고서야 마침내 봉을 명언하여 공을 청하였습니다. 그래서 큰 배는 3년 만에 한 번씩 공을 하는데, 행장의 작은 배는 해마다 통공(通貢)하기로 했으며, 찬획주사(贊?主事) 유황상(劉黃裳)은 곧장 위관(委官)을 청하여 대마도에 이르러 공물을 수사(收査)하기로 하고 민ㆍ절(?浙)ㆍ요동(遼東)에 대상(大商)이 통상할 것을 허락한 것입니다. 본병도 역시 그 말에 동의하였으나, 엄명한 전지를 어기기 어려워서 이내 총독에게 간절하게 의논하였더니, 총독은 기국(機局)이 이미 성취되었기 때문에 화(和)를 말할 수 없으면서도 번거로운 말이 있을까 두려워서 봉을 청하는 데 그친다 하고, 공에 관한 일은 입밖에 내지 아니하였으며, 본병도 또한 ‘대마도와 공을 여는 것은 진실로 옳지 못한 일이라 하겠지만, 오직 이 봉에 대한 의논만은 부득불 따라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명기(名器)란 것은 빌려 주기 어렵고 번영(繁纓)은 당연히 아껴야 하는 법이거늘, 지금 관백 같이 임금을 죽이고 자리를 빼앗는 자에게 왕(王)이란 작(爵)을 내려 주어 66주 내에 정복하지 못한 호걸들을 호령하게 한다면 이는 범에게 날개를 더해주는 격이니, 어찌 옳다고 할 수 있사오리까? 그러나 왜놈으로 하여금 돌아가게 하고자 하여 과연 봉하기에 이르렀다면, 왜놈으로 하여금 봉을 요청한 뒤에는 바닷가로 쥐 기어가듯이 가서 다시는 중국을 삼킬 생각을 하지 않게 하며, 왜놈으로 하여금 머리를 조아리며 봉에 나아가선 다시는 공시(貢市)를 요청하지 않게 한다면 허명(虛名)을 빌려 주어 실리를 획득하는 것이요, 동맹국을 맺어서 지방(支邦)을 호령하는 것입니다. 재력이 퇴폐한 상황에서나 융마가 병들고 난 뒤에 군사를 파하고 싸움을 쉬고 사졸을 아끼고 백성을 무마하는 것도 양책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저 왜놈의 욕심이 한량이 없고 오랑캐의 신의란 시종이 한결같기 어려우니, 봉과 공은 형영(形影)과 같고 공(貢)과 시(市)는 순환(循環)과 같은 것입니다. 가령 본병과 총독이 음으로 허여하면서 양으로는 아니하는 척하며 먼저 봉호를 청하여 명지(明旨)를 빌어서 조정 신하의 입을 함봉하고 계속해서 공시(貢市)를 청하여 눈앞의 현실만을 쾌하게 함으로써 후일의 근심을 끼친다면 그 화는 나쁜 전례에 있을 것입니다. 이는 임금을 속인 두 신하라 할 것이니, 어찌 차마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또 가령 수길과 행장이 음으로 배반하면서 양으로 굴복하여 버젓이 봉을 받음으로써 우리의 불비한 점을 보여 주게 된다면 그 화가 후회해도 소용없는 데에 있을 것이므로, 이는 나라를 그르친 두 신하라 할 것이니, 어찌 차마 이 일을 실천하오리까?
우리 조정의 정 단간공(鄭端簡公)의 《일본고(日本考)》에 이르기를, ‘왜놈이 몹시 간사하여 스스로
감합(勘合)주D-015을 만들어 가지고 방물(方物)과 무기를 가득 싣고 들어오다가 관병을 만나게 되면 거짓말로 입공(入貢)한다 이르며 우리의 방비가 없음을 보면 변경을 엄습한다’ 하였습니다. 정통(正統) 연간에 대숭(大崇)과 도저(桃渚)가 일찍이 그 해를 입었으며, 세종조(世宗朝)에는 절직(浙直)과 강회(江淮)의 사이에 뻗쳐 해독을 끼침이 더욱 참혹하였는데, 지금 만약 곧 흔단을 다시 연다면 전철을 다시 밟게 될 것이니, 이는 심유경이 경략을 그르치고 경략이 총독을 그르치고 총독이 본병을 그르치고 본병이 황상을 그르치는 것입니다. 조석에 전쟁이 그쳐 무거운 짐을 끌러 버리고 어깨를 쉬게 될 것은 논할 것조차 없고, 곧 요령(要領)주D-016이 구원(邱園)에 안보되지 못하며 역사상에서 부월(?鉞)의 주벌을 면치 못할 것이니, 신은 그윽히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대저 견양(犬羊)이란 기뻐하고 성내는 것을 기필하기 어렵고 유비무환의 계책은 미리 서두르는 것을 귀히 여기는데, 지금 본병은 말하기를, ‘왜놈이 봉하는 것만을 얻게 되면 그 즉시로 돌아가고 우리 나라를 침범하지 않을 것이다’ 하므로 신은 말하기를, ‘왜놈이 당장에 침범해 온다면 어떻게 갑자기 대응할 것인가?’ 하니, 본병은 말하기를 ‘나와 총독ㆍ순무 세 사람이 당하겠다’ 하옵니다. 그래서 신은 말하기를, ‘어떻게 세 사람이 이 일을 당해낸다는 말인가? 세 사람은 곧 목숨을 끊는다 할지라도 그 이조(二祖) 팔종(八宗)의 신기(神器)는 어찌할 건가?’ 하였습니다. 신은 또 말하기를, ‘요좌(遼左)에 전투하는 군사가 몇 명이 있는가?’ 하니, 본병은 말하기를, ‘2천여 명에 지나지 않는다’ 하므로, 신은, ‘2천 가량의 군졸로써 어찌 족히 수만 명의 왜놈을 방어하겠는가?’ 하니, 본병의 말이, ‘호부(戶部)에서 군량을 조치할 길이 없어서 지난 해에 요좌의 순무(巡撫)가 가정(家丁) 3천여 명을 소집하기를 청하였는데, 8백여 명을 줄여서 재가했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은 말하기를, ‘국고는 부족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변방의 사정이 위급한데 어찌 재물 아낄 것을 논하겠는가?’ 하였더니,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오유충(吳惟忠)ㆍ낙상지(駱尙志)가 거느린 남병(南兵)은 마땅히 요좌에 머물러 두어야 하며, 속히 철거하는 것은 부당하다’ 하자, 본병은 말하기를, ‘벌써 달아났다’ 하므로, 신은 말하기를 ‘이는 이른바 귀형(鬼形)이라는 것이니, 두번 쓰기는 어렵다’ 하였습니다. 여러 신하들은 말하기를, ‘당장에 위급한 일이 있다면 조선은 나가서 구원하기 어려우니 여순(旅順)ㆍ압록강 등지의 긴요하고 험고한 곳에 병력을 증가하여 지키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본병은 말하기를, ‘군사가 많으면 먹일 것이 없으니, 5천 명만 증가하면 족히 쓸 수 있다’ 하므로, 여러 신하들은 말하기를, ‘유정의 군사 징발이 철회되면 역시 요동에 주둔시킬 것을 요청하자’ 하니, 본병은 말하기를 ‘천병(川兵)은 오래 머물러 두기 어려우니 토착민을 모집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그들도 왜놈을 징치할 수 있다’ 하므로, 여러 신하들이 서로 더불어 탄식하기를 마지 않았습니다.
무릇 연해나 변방에 대하여 어찌 세 번 네 번 신칙하지 아니하였겠습니까마는 모든 공문 상으로 조사해 보면 고을마다 다 있지만, 군진 사이에서 구한다면 일마다 헛것이 되고 맙니다. 요좌에서 적을 대하는 것도 오히려 병력이 없을 정도인데, 태평한 내지에서 어찌 능히 적을 막아내겠습니까? 여윈 졸병으로써 사나운 범을 치려는 것과 같으니, 비유컨대 힘없는 아이들을 시켜 맹분(孟賁)과 각축하는 격이니, 어찌 가는 곳마다 활개를 치지 아니오리까? 실로 힘이 부족한 소치입니다. 지금 오랑캐 놈들에게 뇌물을 주고 애교를 부리는 것을 수치로 생각할 겨를이 없이 급히 방비를 하면서 그 놈들이 중국의 위세를 두려워하고 죄를 뉘우친다는 것을 내세워 그것을 공으로 삼고 있으니, 이는 삼척동자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이로써 총명과 예지가 어느 임금보다 으뜸가시는 우리 황상을 속이려 한단 말입니까? 이러기에 신이 주먹으로 땅을 치며 가슴을 두들기는 까닭이옵니다.
옛날에 월왕 구천은 한 작은 나라의 임금으로서 오(吳) 나라의 강성을 근심하여 고심초사한 나머지 와신상담하더니만, 마침내 사졸을 무마하고 군사를 훈련시켜
습류(習流)주D-017 2천 명과 교사(敎士) 4만 명과 군자(君子) 6천 명과 제어(諸御) 1천 명을 징발하여 오 나라를 쳐서 드디어 적을 섬멸하였는데, 지금 당당한 중국의 조정을 어찌 저 조그마한 월나라에 비하오리까? 진실로 불끈 노여움을 떨쳐 장수와 군사를 훈련하고 허(虛)를 징계하고 실(實)을 책성(責成)하며, 일을 담당한 여러 신하들도 와신상담하여 정책을 수립하고 계획을 짜내되, 아무 진(鎭)에서 약간의 군사를 뽑아쓰면 반드시 사람마다 돌팔매를 던지고 관문을 뛰어넘는 기운이 있을 것이며, 아무 진에서 약간의 장수를 뽑아 쓰면 반드시 적의 장수를 베고 그 기(旗)를 빼앗는 기풍이 있을 것이며, 아무 진에서 약간의 양곡을 사용하면 반드시 있는 곳마다 군사는 배부르고 말[馬]은 날아가는 경사가 있을 것이며, 토끼를 보면 급히 개를 돌아보고 염소를 잃으면 곧 우리를 보수하듯이 한다면 습류가 어찌 2천 명에만 그치며 교사가 어찌 만 명을 뿐이오리까? 그렇게 되면 간흉을 제거하고 수치를 씻으며 조종을 마음대로 할 수 있거니와, 진실로 허송세월만 보내면서 당(堂)에 깃든 제비와 같이 다행히 불이 아직 붙지 아니했다 하여 그것을 편안하다 여긴다면 도적을 맞아 실내로 들어오게 하고 범을 길러 후환을 남기는 격이라, 외이(外夷)의 추장으로 하여금 곁에서 깔깔대고 웃게 할 것이니, 이것이 의리에 감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들은 민원(民垣)에서 회계를 맡고 있는 처지로서 문득 변방의 일을 말하는 것이 불가하지만, 기(杞) 나라 사람이 하늘 무너질까 근심하는 것은 장차 눌릴까 염려함이요, 홀어미가 배[舟]를 근심하는 것은 장차 엎어질까 염려함이니, 지금 봉공이 만약 시행된다면 엎어지고 눌리는 일이 당장에 올 것인데, 신이 어찌 소관의 직무가 아니라는 것만 생각하여 한 번도 아뢰지 않을 수 있사오리까? 삼가 바라옵건대, 황상께서는 신의 말을 살펴 채택하시어 빨리 왜놈과의 통관(通款)을 사절하시고 일찌감치 내부의 정치를 닦으시옵기를 바라마지 아니하옵니다.
성지를 받들기를, ‘해부가 알아 하라’ 하였다.
또 통정사 좌통정 여명가(呂鳴珂)는 그 동료를 거느리고 소(疏)를 올려 조정에 가득찬 공의를 신장시켜 왜놈을 물리치는데 도움이 되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 상소는 다음과 같다.

신 등은 통정사에서 대죄(待罪)하고 있습니다. 적이 생각하옵건대, 정치의 정(政)이란 바른 것으로서 사람의 바르지 못한 것을 바르게 만드는 것이며, 관(官)을 통정(通政)이라 이름한 것은 정사란 물과 같은 것이라 소통해서 조금도 막힘이 없이 오직 진실하게 함을 이름입니다. 그래서 우리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의 칙유에도 역시 위에 올리고 아래에 통하여 권간(權奸)들이 임금의 총명을 가리우고 막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경계를 삼았으니, 이는 그만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난 번 동왜(東倭)에 대한 한 가지 일에 있어 신등은 날마다 내외 제신(諸臣)의 제주(題奏)를 점검한 결과 분분하고 자자하여 도대체 말하기를 ‘본병은 봉공으로써 나라를 그르치고 경략과 제독은 기만으로써 본병을 그르치고, 유격 심유경은 왜놈에게 뇌물을 주어 봉공을 구하게 함으로써 경략과 제독을 그르쳤다’ 하니, 이는 정치의 바르지 못함이 봉공보다 큰 것이 없고 바깥 말의 막히고 가리움은 왜놈의 정상보다 심한 것이 없사옵기로, 신등의 직책이 후설(喉舌)을 맡고 있는지라 성상께 주달하고자 한 지 오래였습니다. 그러나 감히 선뜻 아뢰지 못한 것은 진실로 생각하오면 일을 말하는 것은 쉽지만 일을 맡기는 것은 어려우므로 해외의 뜬 소문에 있어서는 문법이나 의론으로써 당사자를 핍박하는 것은 부당하옵니다. 그러므로 2월 27일에 병부 상서석성(石星)이 구경(九卿)과 약속하여 연상소(演象所)에서 회의할 적에 여러 신하들이 한 사람도 면전에서 그 그른 점을 바로잡은 자는 없었으나 옳다고 대답하는 자도 보지 못했습니다. 봉에 대한 의론은 각기 맡은 바가 있어서 별아문(別衙門)에 비할 바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아는 까닭에, 마침내 역시 반(班)에 따라 묵묵히 물러나왔으니, 어찌 중서(中書)양준민(楊俊民)만이 이 날의 회의가 예졸(?卒)들의 한탄하는 대상이 되었다 일렀을 뿐이오리까? 신 역시 스스로 수치스럽게 여겼습니다. 이윽고 예부 낭중하교원(何喬遠)과 주사 홍계준(洪啓濬)의 두 소장과 조선 국왕 이(李) 아무의 봉(封)을 막고 군사를 주둔시킬 것을 청한 주장(奏狀)들을 초해 내고서야 바로 곧 정상을 거의 확실하게 알았으니, 권간의 가리움이 용납되오리까? 감히 평소의 채집한 바에 의거하여 황상을 위해 아뢰오리다.

언자(言者)는 말하기를, ‘작년에 왜적이 평양에서 항거하며 내지를 침범한다고 소리쳐 말하므로 심유경이 사명을 띠고 가서 염탐하면서 문득 봉공으로써 왜적에게 처음 맛을 보였으며, 유경이 두 번째 가자 화친에 대한 의론은 대개 이미 결정되었던 것입니다. 이 때에 경략을 보낸 것은 제어하는 뜻을 온 천하에 들추어 보인 것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제독 이여송은 장수인지라 싸움으로써 매진할 뿐이요 화친으로써 돌아오고자 아니하므로, 그 예기를 격동시켜 왜놈이 관(款)을 지지하고 방비를 늦추는 틈을 타서 분연히 공격하여 깨뜨려 크게 이겼으니, 그 공은 진실로 누구도 가리지 못할 것입니다. 이 때에 과연 능히 마음을 합하고 힘을 모아 승리를 타고 길게 몰아치면 곧 왜놈의 씨가 없어졌을 터인데, 어찌하여 왜놈들과 교역을 하며 전혀 친근자의 말만을 들으며 마침내는 재화를 탐내고, 또 남병(南兵) 싸움의 승리를 갈라 빼앗을까 염려하여 평양만 지키고 힘을 쓰지 아니하다가 벽제(碧蹄)에서 크게 패하고 말았으니, 요즘 와서도 감히 다시 싸움에 대한 말을 하겠습니까? 이른바 경략과 제독이 처음에는 서로 뜻이 맞지 않다가 마침내 화합하게 되었다는 것이 이런 까닭입니다. 이 때에 심유경은 화가 난 왜놈에게 거의 살해를 당할 것 같이 되자, 이에 다시 유세하여 왜놈에게 뇌물을 주고 봉(封)을 의론하며, 인하여 엄금하기를 조선은 왜놈 하나라도 죽여 틈을 내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나이다. 왜놈들은 미친 듯이 횡행하여 진주를 포위한 38일만에 6만여 명을 살상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지붕을 덮고 배를 만들고 무기를 수선하고 군량을 비축하여 봉공(封貢)을 하지 아니할 경우에는 조선을 삼켜버릴 내외의 꾀를 달성하자는 것입니다. 홍 주사(洪主事)의 통역에게 들으니, 조선에서 표문을 싸 가지고 온 사신이 사람을 대하면 동정(東征)의 공을 자랑하고 뒤로 돌아가면 눈물을 흘리면서 슬픈 하소연을 하며 자기 나라는 참화를 입어 한결같이 공허하다고 한다니, 이렇게 되면 우리 군사도 역시 왜놈인 것입니다.
아! 황상께서 2백여 만 금을 허비하여 조선을 구원하였는데, 왜놈을 없애버리지 못하고 도리어 앉아서 백성의 비참한 형상을 보고 있는 것이 이와 같은데, 봉공으로써 결말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봉을 주장하는 사람의 뜻을 미루어 본다면, ‘봉이란 헛된 호칭이요 조선은 실지로 화를 당하고 있으니, 헛된 호칭을 빌려주어서 실화를 면하는 것이 심히 편하지 않느냐’는 것이지만, 일단 봉이라면 이름이 바르고 이름이 바르면 말이 순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조선 조정에서 비록 왜놈을 봉한 고사는 있었으나 원래 믿는 세력은 있지 않았는데, 지금 왜놈이 우리 속국을 치고 또 천병(川兵)을 죽였으니 이는 역구(逆寇)라 하겠거늘, 역적임에도 불구하고 봉해 준다면 믿게 만드는 것이 되니, 오랑캐에게 웃음거리를 전할 뿐만 아니라 역사가들도 기롱할 것입니다. 또 관백(關白)이 해상에서 영웅이라 자칭하여 66주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그가 유정(劉綎)에게 보낸 편지 사연을 보더라도 지극히 패악하고 거만하온데, 어찌 왕이란 칭호를 빌린 것을 참으로 중하게 여길 까닭이 있사오리까? 봉(封)을 허락해 주면 단지 스스로 가벼워질 따름인 것입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왜놈의 세력은 강하고 우리 군사는 약하며 먹을 것조차 떨어져 가니 왜놈을 봉하지 아니하면 또 내지를 침범할 것이라’ 하지만, 평양에서 패한 것은 소위 강하다는 이 왜놈이 아니고 누구입니까? 가정(嘉靖)의 말기를 더듬어 보면, 도어사 호종헌(胡宗憲)ㆍ총병 척계광(戚繼光)이 왜적을 민절(?浙)에서 평정하였으니, 어찌 우리 군사더러 승리를 못한다 하오리까? 당당한 중국의 대통을 이어받은 군사로서 어찌 일개 왜놈들을 두려워하리이까. 유독 경략과 제독을 종헌과 계광 같은 적격자에게 맡기지 못한 탓인 것입니다. 진실로 두려워서 봉한다지만 왜놈의 욕심이란 만족을 모르니, 봉공하여 마지 않더라도 오히려 다시 필연코 들어주지 못할 요구가 있을 것인데, 그래도 장차 두려워서 움츠리며 땅덩이를 떼어 주면서 따라야 한단 말입니까? 혹자는 또 말하기를 ‘적을 방어함에 있어서는 술책이 필요하니, 거짓으로 봉(封)하여 속박해 두는 것은 특히 왜놈이 설치는 것을 늦추워서 우리의 방비를 마련하자는 것이라’ 하지만, 무릇 인정이란 위태로우면 방비하기를 힘쓰고 편안하면 문란해진다는 것을 모르는 말입니다. 오랑캐가 서로 교역이 열리자 중국의 재력이 해마다 고갈되고 변방의 경비는 날로 해이하여 화친했다가는 곧 침범하니, 이로 보면 피차간에 서로 교역한들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왜놈은 북쪽 오랑캐보다 더 교활하여 우리가 봉으로써 저희들을 늦추어 주면 저희들은 역시 공으로써 우리를 늦출 것이므로 연해의 장병들이 한 번 믿는 바가 있으면 변방의 방비를 늦출 것이요, 하루아침에 왜놈이 변심하여 싸움을 일으키면 완전히 이기는 군사가 없을 것이니, 그때가서 후회한들 어찌 미치오리까? 이를테면 봉을 허락하고 공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설은 더욱이 그렇지 아니하옵니다. 대개 왜놈이 봉을 받은 후에는 반드시 사신을 보내어 말을 수식해서 조공을 받을 것인 동시에 앙심을 품게 될 것입니다. 적이 병부 낭중황상(黃裳)의 상소를 보면 공도(貢道)는 대마도를 경유한다 하였는데, 어사 주유한(周維翰)은 이르기를, ‘교활한 왜놈이 요좌(遼左)계문(?門)을 엿본다’ 하였고, 행인 사헌(司憲)이 논박을 입은 뒤로는 역시 황상의 지휘를 들은 것을 후회하고 있사온데, 어찌 공에 대한 의론이 또 황상으로 굳혀진단 말입니까? 중국은 재력이 한도가 있사온데, 더구나 북으로는 오랑캐에게 아첨하고 동으로는 왜놈에게 아첨하여 목전의 유지만을 취하기로 한다면 재력을 더욱 고갈됨과 동시에 나라의 형세는 쇠약 일로로 달릴 것이니, 실책이 심합니다.
근자에 해부(該部)의 복의(覆議)에 칭하기를, ‘조선 국왕이 아뢴 왜적의 정상에 있어서는 다 믿을 수 없는 것이며, 단지 왜놈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군사와 군량을 머물러 둘 것을 청했다’ 하였사온데, 신등의 생각으로는 조선이 2년 동안 군사의 뒷바라지에 절실히 염증을 느꼈으니, 군사를 철수하는 것이 좋은 일인데 어찌 더 머물러 주기를 원하며, 왜놈이 과연 후환이 없을 양이면 무엇 때문에 봉하는 일을 막겠습니까? 저 교활한 왜놈이 망측한 꾀를 품고 있으니, 봉을 하는 것은 마치 범에다 날개를 붙여주는 격이라 반드시 좋은 일이 없을 것을 확실히 알기 때문입니다. 가령 이 말을 믿지 아니하고서 반드시 봉을 단행하고 만다면 장차 조선의 인심을 잃어버려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않을 것이며, 만부득이 할 경우에는 왜놈에게 항복을 할런지도 모를 것입니다.
조선이 왜놈을 원수로 여기고 중국에 신하로 자처하는 것은 중국이 능히 왜놈을 제압하여 자기의 주(主)가 되기 때문이온데, 지금 도리어 왜놈을 두려워하여 그 원수로 삼은 대상자를 봉해준다면 중국에 대하여 책할 말이 충분히 있을 것이며 중국은 무슨 말로써 그 쪽에 변명하오리까? 이렇다면 왜놈을 봉하는 것이 분명히 조선을 포기하여 왜놈에게 따르도록 몰아대는 것이 아닙니까? 조선을 구원하는 것은 원래 중국의 번리(藩籬)를 견고하게 하자는 것이요 왜놈을 봉하고자 하는 것은 원래 조선에게 은혜를 맺자는 것이니, 조선이 봉해주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온데, 봉해서 무엇 하자는 것입니까? 그 국왕의 말이 가장 진담인데도 확실하지 않다고 하니, 이를 족히 믿지 못한다 하면 다시 누구를 믿겠습니까. 심유경은 본시 무뢰배에 속하는 자로서 이익이 있으면 따라 붙고 급하면 달아나므로 봉을 말하는 것을 유일한 기화(奇貨)로 삼는데,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온 조정의 공론도 믿지 아니하고 또 조선이 아뢴 것도 믿지 아니하고, 단지 심유경만을 믿고서 단연 봉으로써 허락하며 한 번 봉한 이상에는 설사 생각 밖의 일이 일어날지라도 맹세코 몸으로써 보장한다 하니, 이는 반드시 진실로 독특한 견해로 애를 쓰고 남에게 고하기 어려운 것이 있는 모양입니다만, 사직은 중기(重器)요 봉공은 사직의 안위에 관계되는 것이오니, 마땅히 겸허한 마음으로 공정하게 들어서 장구한 치안의 방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옵니다. 만약 눈앞의 일만 구차하게 미봉하다가 다른 날에 일이 결렬되어 어찌할 수 없는 경우를 당한다면 곧 자기 몸을 백 개로 찢어 버린다 해도 유익함이 없을 것입니다.
이상의 여러 말들이 말하기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진실로 사직이 지극히 중하기 때문이요, 또한 석성의 평생 인품을 이루어 주자는 것입니다. 〈홍범(洪範)〉에 이르기를, ‘네가 크게 의심나는 일이 있을 적에는 먼저 네 마음을 물어보고 경사(卿士)에게 물어보고 서인(庶人)에게 물어보고 복서(卜筮)에 물어서 다 좋다고 하면 이것을 대동(大同)이라 이른다’ 하였으니, 삼가 바라옵건대, 황상께서는 병부에 칙유하시어 봉하는 일을 스스로에게만 꾀하려 하지 말고, 사졸과 복서(卜筮)에 물어서 모두 찬성하고 않는 것을 보아서 단안을 내리도록 하시옵소서. 저 송(宋) 나라가 화(和)로써 스스로 어리석게 된 그 전철을 거울삼아야 할 것이옵니다. 그리고 동쪽 왜놈을 정벌하는 정황의 허실에 대하여 마땅히 어사 감사개(甘士价)의 제(題)에 비추어 풍채있는 과도(科道)를 보내어 그 쪽에 가서 하나하나 조사하여 사실대로 갖추어 아뢰도록 하여 공과 죄를 밝히시기를 청하옵니다. 엄한 유시를 내려 왜적을 방어할 것을 책성함과 동시에 총독은 진실된 마음으로 일을 맡고, 겉치레를 도습하지 말며 장수를 뽑고 군사를 훈련하여 둔전(屯田)을 개간하며 척후(斥?)에 충실하고 요좌(遼左)에 머물러 조선의 성원이 되게 하며, 그 제독의 중임에 있어서는 따로 청렴하고 지모가 있고 왜의 정상을 익숙히 아는 장수를 찾아서 소임에 충당하소서. 혹 군사 만여 명을 거느리고 잠깐 조선에 머물러서 그 나라 사람의 전쟁에 관한 병법을 고찰하게 하여 철병할 때에는 특별히 승진시키고, 행감과도(行勘科道)로 하여금 칙서를 받들고 조선에 가서 국왕에게 효유하되 통렬히 경계하고 반성하여 저 월나라 구천의 와신상담을 본받아서 국력을 늘이고 조련함으로써 부끄러움을 씻고 살길을 도모하게 하시옵소서. 그리고 일면으로는 왜놈에게 타이르되, ‘싸움을 종식하고 모조리 바다섬으로 돌아가라. 감히 재차 조선을 침범한다면 단정코 천병(天兵)을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여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하고, 요해지인 해방(海防)에는 각처마다 특별히 단속하여 굳건히 지키게 하고 심유경은 참소와 간사로 정사를 어지럽게 하였으니, 즉시 혁파하고 돌아오게 하여 왜정(倭情)의 순역(順逆)은 고사하고 죄를 다스리도록 하시오면 거의 성상의 단안이 광명하여 국시(國是)가 정해지고 내치(內治)가 갖추어 왜환(倭患)이 해소될 것이오니, 이야말로 국가 대계에 있어 크게 유익이 될 것이옵니다.
성지를 받들은 바, ‘병부가 알아서 하라’ 하였다.
이에 병부 상서석성(石星)이 여러 신하의 논의가 더욱 격렬하기 때문에 그 이해를 아뢰어 논하고 천자께서 스스로 결단할 것을 청하였다. 그 주장(奏狀)은 다음과 같다.

신은 근자에 과신(科臣)왕덕완(王德完)ㆍ전대익(田大益) 등과 대신(臺臣)황현(黃賢)ㆍ허문조(許聞造) 등과 시신(寺臣) 만자약(萬自約) 및 예신(禮臣)홍계준(洪啓濬) 등의 각 상소에 의거하오면, 모두 봉공(封貢)만을 위하고 국가를 위해서 멀리 계획하여 폐하께 충성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공(貢)은 비록 허락하지 않을지라도 봉(封)하는 일에도 능히 석연치 아니한 의문이 있으므로 곧 신의 마음을 털어 능히 자백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은 삼가 생각하건대, 봉은 헛된 칭호요 봉을 허락하는 것도 헛된 일입니다. 그러나 진퇴의 굴레를 씌워 놓은 뒤에 봉을 하면 조선도 따라서 보전되고 병마도 따라서 휴식될 것이니, 이는 실상 이익이 되는 것인데, 제신들이 어찌 굳이 이를 성립시켜서 성상의 근심을 해소시키고자 아니하겠습니까? 본시 사체가 중대한데다 덮쳐서 전해진 말이 서로 어긋나기 때문에 의심이 있게 되고, 왜적이 바다 밖에서 불측한 심정을 내포하고 있고 부산에서는 반드시 물러갈 형세가 없는 것이 의심을 자아내게 되고, 표문의 참과 거짓을 분변하기 어려운 동시에 사인(使人)의 구설을 신빙하기 어려운 의심이 있게 되며, 재촉하는 것이 이상하고 화친의 논의가 해괴함과 동시에 봉한 뒤로는 방비가 해이해질 것도 염려스러운지라, 이로써 의론이 분분한 것이니, 진실로 무엇이 족히 괴이하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적을 요량하는 것은 마땅히 자세해야 하고 기회를 당해서는 결단성이 귀한 것이니, 공시(貢市)를 엄하게 끊어버리면 노리고 엿볼 방도가 없으며 금약(禁約)을 엄밀히 밝히면 꾀임을 막을 수 있나이다. 저들이 불측한 마음을 지녔을지라도 이쪽에 타고 들어 올 틈이 없으니, 사람을 제압하는 술책은 이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소서비(小西飛)를 오게 하여 억류해 두고 자세히 살펴서 독무(督撫)의 주보(奏報)를 기다리며 왜놈이 물러간 날에는 다시 과도(科道) 각 관원 한 명씩을 보내어 앞서 가서 실지 상황을 조사하게 하되, 만약 왜놈이 다 물러가면서도 한 가지도 특별히 구하는 바가 없다면 신등의 봉의(封議)를 채용하여 단연코 허락함으로써 신의를 내보이고, 물러가지 않고서 특별히 요구가 있다면 제신(諸臣)들의 파의(罷議)를 써서 단연히 파함으로써 위엄을 보이소서. 혹시 일면으로는 봉(封)을 기다리고 일면으로는 침범해 들어온다면 곧 소서비의 목을 베어 전해 보이어 반드시 쳐서 없애버릴 기세를 내보이셔야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허락하는 것도 근거가 있고 거절하는 것도 명목이 있으며 조종하는 것이 나에게 있어 견제를 당하지 않게 되며 포문의 진가와 사신의 구설도 곧 이로써 판단될 것이니, 역시 무엇이 천조(天朝)의 행동에 손상이 되겠사옵니까?
만약 왜놈이 물러가고 아니 물러감에 따라 결정되지 아니하고 반드시 거절하는 것만을 상책으로 삼아 시론에 부응함으로써 일의 기회를 상실하는 것은 신으로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왜놈을 너무 깊이 믿으면 진실로 도적을 길러서 근심을 끼치는 것이요, 왜놈을 너무도 급하게 다루면 더욱 도적을 불러들여 난리를 만들게 되기 때문에, 신은 이 일이 확실히 조선으로도 존망이 조석간에 달린 시기요, 우리 내지로 보아도 역시 안위가 조석간에 달린 기회라 생각되옵니다. 그러므로 여러 신하들이 허심탄회하여 심사숙고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를테면, 표문을 재촉한다는 것에 이르러는, 신이 여러 신하들의 제참(題參)을 보고서 역시 의문을 품었사온데, 경략 송응창(宋應昌)의 원보(原報)와 왜추(倭酋)행장(行長)에게 보낸 이서(移書)의 대략에 조사해 보니, 표문은 바로 심유경(沈惟敬)이 입영(入營)하는 것을 기다려서 그 말을 듣고 자신을 얻은 후에 내보이겠다 하기 때문에 응창이 유경으로 하여금 들어가서 재촉하게 한 것인데, 독신의 지금 보고한 것은 특히 그 실상을 말하지 아니한 것 뿐입니다. 그 화친의 설은 더욱 관계가 되는 것이니, 원래 없는 사실이라면 전설의 그릇됨에 불과하지만, 있다면 어찌 나라를 욕되게 한 죄만이겠습니까? 먼저 번에 경략 송응창이 소서비를 심문하니, 그의 말이, 이것은 친밀(親密)ㆍ화호(和好)의 뜻이라고 했다 하오나, 신은 역시 약간의 의심이 없지 아니했는데, 이은 통보에 심유경의 문책과 행장의 회답이 있어 그 뜻이 소서비와 더불어 합치될 뿐더러 표문을 재촉한 소이연도 역시 그 가운데 갖추어 있었을 것입니다.
신의 증거한 바로는 이와 같을 따름입니다. 신의 우견으로는 유정의 군사마저 아울러 요좌로 철회하여 일면으로는 강상(江上)의 방어를 전과 같이 하게 하고 일면으로는 조선의 소요를 생략하며, 조선에 유시하여 칙지를 정성껏 따르게 하고 중국의 군대가 머무르는 곳에도 영을 내려 요소에다 군사를 배치하고 부산의 왜적이 다 물러날 때를 기다려서 철거하게 하며, 빨리 스스로 견고하게 하는 길을 도모하여 그 관전(寬奠) 일대는 고쳐서 부총병 한 사람을 두게 하고 장정 약간 명을 증파하여 월봉을 후히 주되 호부에서 지급하고 함부로 탄압하거나 수색하지 못하게 하며, 왜적이 물러가거나 물러가지 않거나 봉하는 일이 이루어지거나 아니 이루어지거나를 막론하고 항상 방어하는 태세를 취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산동ㆍ절강ㆍ직례(直隷)ㆍ민광(?廣) 등지는 연해 지방에는 설비를 첨가하게 하며 또한 수륙을 막론하고 기구를 설비하여 요새지를 단단히 지켜서 항시 큰 적이 앞에 있는 것같이 하며 봉하는 일이 이루어지고 아니 이루어지는 것으로 완급을 삼지 말아야 하옵니다. 그리고 다만 수비를 마련하지 아니한 자가 있으면 법대로 처리하며, 이로 인하여 각도 순안어사에게 책임지워 무릇 연해의 지방을 순회할 때에는 그 도의 성적 여하를 종합하여 보게 하고 장령(將領)들은 다 이것을 중요한 직무로 삼아서 설비가 없을 경우에는 불시로 설비하고 설비가 있으면 그 해 연말에 주보하게 하여 고찰을 신빙성이 있게 해야 하니, 이는 주병(主兵)이요, 그 계보(?保)ㆍ선대(宣大)ㆍ산서(山西) 등의 진(鎭)에도 모두 각기 객병(客兵) 3만 명을 예비하여 창졸간의 응원에 대비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논하오면, 봉하는 것을 헛일로 삼아서 목전을 완전하게 하고, 방어하는 것을 실제로 삼아서 먼 계획을 도모해야만 거의 대비가 있어 근심이 없다는 말과 같이 만전을 확보할 것이오니, 신 석성(石星)이 스스로 맹세하고 담당하여 죽는 한이 있더라도 뜻을 옮기지 않는 것이 이에 있사옵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밭가는 일은 사내 종에게 물어보고 베짜는 일은 계집 종에게 물어야 한다’ 하였으니, 오직 황상폐하께옵서 의심마시고 결단하시옵소서. 신이 반드시 나라 일을 그르치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삼가 명령이 내리시기를 기다려서 이 일을 결말 짓겠으며 명령에 따라 시행하겠사옵니다.
성지를 받들었는데 다음과 같다.

국가의 대사에 있어 말하는 자는 스스로 말하고 결단하는 자는 스스로 결단해서는 안되며 요는 장점을 따라서 계획 처리해야만 서로 방해가 되지 않는 법이다. 경이 짐의 위탁을 받았지만 군국(軍國)의 중한 임무에 대하여는 있는 터인데, 이미 확실한 자신이 있다 해서 일일이 주장하니, 짐이 마땅히 허심탄회하게 그대로 듣겠도다. 그러나 일이 이루어지면 공이 돌아갈 것이나 이루어지지 못하면 책임을 전가하기는 어려울 것이니, 이 뒤로는 다만 논쟁하는 주소가 있을 경우 마땅히 둘 다 보존하여 일후의 효과가 어떠한가를 관찰할 것이요, 반드시 일일이 제복(題覆)할 것은 없으며, 해안을 방어하는 설비는 왜놈의 정세의 순역(順逆)을 막론하고 스스로 마땅히 착실하게 수행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고양겸(顧養謙)의 군사를 철회하자는 큰 계획은 조속히 단행하는 것이 마땅하며 따라서 조선으로 하여금 급히 자력으로 수비하도록 하라. 조정에서 속국을 대우하는 은혜와 위엄은 이에 그쳐야 하니, 옛부터 자기의 군사와 양식을 허비해 가면서 외국을 대신하여 지켜준 일은 없다. 소본 내에 사감과도(査勘科道)의 관을 청한 것은 이미 칙지를 내린 바 있다. 그 나머지 수비 방어 등의 항목은 모두 의의(擬議)대로 하여 시행하라.

이에 병부는 곧 총독에게 격문을 보내어 세밀히 왜적의 정상을 탐지해서 봉공의 청을 헛일로 돌려버리지 말게 하니, 총독은 소서비로 하여금 조정에 들어와 봉공을 애걸하게 하자 간관들이 총독이 화친을 주창한다고 탄핵하여 공격하기를 심히 하였다. 그래서 총독은 소장을 올려 왜의 정세를 극구 진술하고 자신의 군무를 해임시켜 줄 것을 간청하여 4월에 소관 사무를 벗어나고, 병부 우시랑 손광(孫鑛)을 대신 흠차 총독 계요보정등처군무 겸리양향 경리조선(欽差總督?遼保定等處軍務兼理粮餉經理朝鮮)으로 삼았다.
손광의 아호는 월봉(月峰)이요, 소흥부(紹興府)여요현(餘姚縣) 사람인데, 문장에 능하고 담력과 지략이 많았다. 그는 사무를 맡고 부임하자 역시 봉공을 힘껏 주장하였다. 소서비가 서울에 들어 온 후로 병부에서는 대우하기를 왕공과 같이 특별히 하므로 소서비는 자못 득의하여 궐문을 지날 때도 말에서 내리지도 아니하고 공손한 태도가 전혀 없으니, 사람들이 모두 분히 여겼다. 병부에서 화국(和局)을 종결짓고자 하여 사람들의 비난도 돌아보지 아니하니, 이 때에 원보(元輔)왕석작(王錫爵)이 병으로써 사면을 청하여 상소한 적이 모두 다섯 번이었으나 황상은 교사한 왜놈이 아직 가라앉지 아니하고 또 동쪽 오랑캐가 날뜀을 들어 관원을 보내어 간곡히 만류하였다. 석작은 다시 상소하여 감사를 표시하였는데, 그 소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황상께서 신을 만류하시는 까닭은 나랏일 위한 것이옵고, 신이 병중에 있어 숨 한 번 쉴 적에도 잊지 못하는 것도 역시 이 나라의 일이옵니다. 전부터 나랏일은 왜놈을 방비하는 일보다 급한 것은 없사오므로 신은 같은 관원들과 더불어 평소에 계획하고 의논한 바 역시 바른 결론이 있었습니다. 왜놈이 반신(叛臣)이 아니고 만약 진심으로 귀화해 온다면 결단코 거절할 이치가 없으며, 또 왜놈이 우리의 효자가 아니고 만약 분수 밖의 요구가 있다면 결탄코 맹종할 이치가 없는 것이오니, 복속시키는 것과 제어하는 것은 곧 이 두 가지로써 결정해야 할 문제이며, 그 밖의 조정에 가득찬 의론이 모두 일로 매진하여 해마다 백만의 재물로 없애려고 하면 겁에 질려 감히 한 낱의 일을 통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하여는 신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아니하옵니다.

성지를 받든 바 다음과 같다.

소장을 보니, 경의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께 충성하는 뜻이 갖추어 나타났으며, 그 왜놈에 대한 한 가지 방책은 더욱 계획이 깊고 생각이 원대하여 진실로 짐의 의사와 합당하니, 병으로써 사면하지 말고 조리하여 일을 보도록 하라.

5월복건 순안어사유방예(劉芳譽)가 상소하여 먼저 들은 바를 진술하고 인하여 봉하는 것을 거절하기를 청하였는데, 그 주장(奏狀)은 다음과 같다.

신은 명을 받들고 복건(福建)을 순안하다가 마침내 본년 3월 3일에 정탐하는 상인 허예(許豫)가 돌아왔는데, 그의 탐보에 의거하면 관백(關白)의 성은 평(平)이요 이름은 수길(秀吉)인데 태합왕(太閤王)이라 칭하며 나이는 57세요, 아들의 나이는 겨우 2세요 양자의 나이는 30세라는 것입니다. 수길은 평소에 간웅으로 꾀가 비상하여 66주(州)를 모두 화의(和議)로써 빼앗았으며, 지난 해에는 고려를 침입하여 그쪽 관병이 사망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병들어 죽고 병으로 돌아와서 죽은 자 역시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때마침 활이 부서지고 화살이 떨어지고 사람은 손상되고 양식은 끊어졌으며, 도망할 곳을 생각해도 갈 땅이 없으므로 강화(講和)라는 속임수를 써서 바야흐로 사지를 벗어나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하온데, 관백은 전선(戰船)을 다량으로 만들어 내며 여러 왜인들은 다 말하기를 ‘유격장군과 화친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면 대명(大明) 등지로 밀고 들어간다’ 하고, 또 일본 장기(長岐) 지방에서 들으니, 광동(廣東)ㆍ향산(香山)ㆍ오문(澳門)ㆍ불랑기(佛郞機)ㆍ번이(番夷)가 해마다 장기에 와서 금연(禁鉛)ㆍ백사(白絲)ㆍ홍목(紅木)ㆍ고면(?綿)ㆍ금ㆍ옥 등의 물건을 매매하며, 관백을 보게 되면 관백은 대명의 소식을 염탐하며 혹은 왜놈이 불랑기의 번인으로 가장하고서 몰래 광동성 성 안에 들어와 동정을 엿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관백은 간특한 꾀를 써서 66주를 빼앗고 반드시 그 자제들을 구류하여 볼모를 삼으며 추장으로 하여금 군사를 내어 고려를 침범하게 하니, 실상은 사지에 배치하는 것이라 각국이 잠깐 동안 굴복하였으나 원수와 원한은 잊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급기야 왜승(倭僧) 원룡(元龍)이 허예와 더불어 대답한 것을 살펴보니, 그의 말씨가 너무도 이루어지는 것을 미워하고 무너지는 것을 즐거워하는 뜻이 있으며, 허예 역시 조금 매개로 끌어들이는 기미가 있습니다. 절강ㆍ복건ㆍ광동 세 성의 인민이 일본에 사로잡혀가서 섞여 살며 생장하는데 66주의 안에 사는 사람이 10분에 3을 차지하며 주거한 세월이 꽤 오래되어 왜놈의 정상을 익숙히 알고 있으므로 고국에 돌아가 공을 세울 생각을 많이 가지고서 은혜를 입어 돌아갈 길이 오기를 기다린 지 오래입니다. 또 허예의 동업자 상인 장일학(張一學)ㆍ장일치(張一治)가 말하는 바에 의거하오면, 고려를 침범하는 데는 군사가 삼사(三師)가 있는데 이름은 석천야(石淺野)ㆍ대곡(大谷)으로서 대소간의 모의는 모두 이 두 사람이 한다는 것입니다. 수길이 군사를 발동하면서 각 주로 하여금 군량과 선박을 각자가 준비하라고 하여 건미(乾米)가 줄을 대게 되니, 집집마다 한탄을 하고 곳곳마다 원한을 품고 있으며, 풍후주(?後州) 추장 수야하답(首野何踏)이 군사를 거느리고 조선에 있다가 대명에서 군사 원조한다는 말을 듣고 낙심하여 도망쳐 돌아오니, 수길은 그 사실을 탐지하고 그 온 집안 사람들을 도살함과 동시에 총독을 바꾸어 조선으로 들여보내면서 항포(港浦)에서 70여 명을 뽑아 보냈는데, 근자에 돌아온 자는 20명 밖에 없으며 큰 배에다 왜병 3백 명을 가득 실어 보냈는데 근자에 돌아온 자는 50명 밖에 되지 아니하여 손실이 무척 많았다는 것입니다.

살마주(薩摩州)는 바로 각처의 선박이 집합되는 곳이라, 지금 여기에서 출발하는 배로는 여송(呂宋)으로 가는 배와 교지(交趾)로 가는 배가 세 척이 있고 동포(東浦)로 가는 배 한 척, 섬라(暹羅)로 가는 배 한 척, 불랑기(佛郞機)로 가는 배 두 척이 있어, 판매를 업으로 삼아 들락날락하는데 여기가 길목이며 무기는 광초(?硝)ㆍ조총(鳥銃)에 지나지 않는데 유황은 일본에서 산출되고 염초(焰硝)는 곳곳마다 악토(惡土)를 구어서 만들어 낸 것도 역시 많으며 오직 오연(烏鉛)만이 바로 중국의 소산물인데 광동ㆍ향산에서 출발하는 어선이 있어, 그 쪽에 가서는 판매하므로 연환(鉛丸)을 달구어 만드는 업이 각 주에서 모두 성행하며, 그 번창(??)ㆍ궁전(弓箭)ㆍ요도(腰刀)ㆍ조총(鳥銃)ㆍ철패(鐵牌)ㆍ회갑(?甲) 등도 진실로 끊어지지 않습니다. 또 사로잡혀 온 조선 인민들로는 양가의 자제가 많사온데 풍손노숙(風?露宿)하여 갖은 고초를 겪고 있으며 염사근(廉思謹) 등 20여 인이 침략을 입은 일이 있는데 수길이 의식을 후히 지급하고서 흔히 조선ㆍ대명의 허실에 대한 정세를 묻곤 한다는 것입니다.
적이 보옵건대, 수길이 시도(?徒 노동하는 자를 말한 것)에서 일어나 병술년(선조 19 1586)로부터 지금까지 7ㆍ8년이 못되었는데, 국권을 탈취하고 여러 섬을 항복 받아서 그 자제를 얽어매 놓고 그 부형을 신하로 삼았으니 간웅의 지략이 없다고 이를 수 없사오며, 조선에 군사를 일으켜 두어 도를 석권하였으니, 만약 황상께서 크게 노하시어 장수를 명하여 동정(東征)하게 하지 아니했던들 조선의 임금과 신하는 거의 다 포로가 되었을 것이니, 정벌의 꾀가 없다고 이를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전함을 만들어 낸 것이 수천의 수효를 헤아리고 여러 주로부터 군사를 징발한 것이 수십만으로 헤아리니 이것이 다 지난 날에는 없었던 것이라, 밤낮을 생각에 잠겨 한 번 마음껏 날뛰어 보려고 하니, 중국을 엿볼 마음이 없다고 이를 수도 없사옵니다. 그래서 그 추장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바람을 타고 돛을 올리어 우리 연해의 성(省)ㆍ군(郡)을 침략할 때 우리의 병력이 완전하지 못함이 혹시라도 있다면 일시의 승부와 득실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신등은 적이 생각하오면, 평수길(平秀吉)은 하나의 교활하고 잔학한 사내일 따름입니다. 본시 남의 노예로서 불법으로 빼앗음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나라 여러 추장들이 수길의 행위를 본떠서 마구 빼앗으려고 하는 자가 퍽 많을 것이며, 음모로 나라를 대신 차지하였으므로 원망을 맺음도 심할 것입니다. 살마주 장수 신간(申侃)이 주관(州官)을 핍박하여 그 아우를 죽이므로 부득이하여 항복은 하였으나 그 마음만은 하루도 수길을 잊지 못하며, 민간의 여자들을 자기 침실에 가득 채워 두고 갖은 음란한 행동을 하며 여러 주의 볼모로 잡힌 자제들을 마치 감옥 속에 가두듯이 하여 부자 형제가 서로 만나볼 수도 없게 하니, 그들이 비분한 심정을 이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일본은 본시 이익을 취함으로 인한 소요가 없었는데 지금은 각 주와 먼 도로 하여금 양곡을 수송하게 하며, 원래 큰 군사를 일으키고 많은 민중을 동원하는 일이 없었는데 지금은 징발이 소란하여 온 나라가 물 끓듯 하니, 왜의 인민이 어떻게 견디어내겠습니까? 매일 사람 죽이기를 즐기면서 그에게 되물릴까 걱정이요, 법에 벗어나는 일을 마구 행하면서 그 해독을 받을까 염려되므로 나가면 얼굴을 가리고 밤에 자려면 자리를 옮기니, 저 역시 스스로 그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으므로 사리로써 미루어보면 수길이 스스로 멸망에 이를 것은 날을 꼽아 기다릴 수 있습니다.
봉공의 설로 말하면 대성과 예부의 여러 신하가 너무도 자상히 말하였으니, 신등이 다시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러나 적이 생각하오면, 일본에는 산성군(山城君)이 있어서 비록 그가 나약하지만 명분이 오히려 존재하는데 하루 아침에 천조(天朝)의 봉호를 참역(僭逆)의 도적에게 가한다면 장차 산성군을 어느 땅에다 두오리까? 간악을 조장하고 난을 믿고 기강을 어기고 질서를 없애는 일이라, 이는 백성을 호령하고 사이(四夷)에게 표시할 바가 아닙니다.
수길이 아무런 까닭 없이 군사를 일으켜서 내지(內地)를 침범할 것을 소리쳐 말하고 우리 속국을 함락시키므로 동정(東征)의 군사가 서로 지구전을 벌인 지 날이 오래라 손실도 역시 많았으며, 벽제 싸움이 있은 후로 잠깐 부산으로 후퇴하였으나, 아직도 조선의 국토를 떠나지 아니하였는데, 첩자의 계모를 그릇되게 써서 그 강공(講貢)가 강봉(講封)을 들어주어서, 그들의 말이 ‘조정에서 우리에게 봉공을 허락하면 물러가고, 허락하지 아니하면 전진한다.’ 한다면, 될 일입니까?
근자에 조선 국왕의 주장(奏狀)에 칭하기를, ‘왜적이 바야흐로 연해 부산 등지에서 성을 쌓고 집을 짓고 군량을 운반하고 무기를 쌓으며 불지르고 공격하고 약탈하여 그칠 때가 없다’고 하였으며, 심지어 진주에서 6만여 명을 몰살했다고 하였는데, 그래도 군사를 후퇴하고 화친을 구걸한다 이르오리까?
삼가 비옵건대, 황상께서는 크게 위엄을 떨치시어 봉공에 대한 의론을 파하시고 천하에 조서를 내리시되, 왜적의 추장 수길이 천벌을 범했으니 반드시 놓아줄 수 없다는 뜻으로 하시고, 겸하여 문무(文武)장리(將吏)에게 칙명을 내리시고, 또 일본의 여러 추장에게 조칙을 내리시되, ‘수길을 사로잡아 베어 죽인다면 비상한 상(賞)과 예외의 봉(封)이 있을 것이다. 조정에서 흉역(兇逆)의 적을 봉하지 아니하고 능히 그 흉역의 적을 제거한 자를 봉한다’ 하여 이로써 분명히 천하에 영을 내리시옵소서. 그렇게 하신다면 간웅이 낙담하고 호걸들이 기운이 나서 수길 같은 한 추장쯤은 멀지 않은 시일 안에 무난히 없애버리게 될 것입니다. 신등의 오활한 생각으로는 오늘의 현상에서 꾀를 쓰자면 반간(半間)보다 기묘한 것이 없고 방어보다 긴급한 것이 없고 정벌하여 없애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고 여기옵니다. 지난 날에 왜적의 추장으로 난(亂)을 제창한 것은 오직 수길 한 사람 뿐이고, 그 밖의 여러 추장들은 모두 면전에서는 항복할망정 마음은 다르니, 그 중간에는 반드시 의로로써 감동시킬만한 자가 없지도 않을 것이며, 이득으로써 유혹시킬 만한 자가 없지도 않을 것입니다. 수길이 원래 친척, 형제나 심복이 없으니, 혹 뛰어난 사람을 얻어서 비밀리에 보내어 도모하게 하되, 입담(立談)하는 찰라에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계책을 쓴다면 총칼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도 원흉을 사로잡을 것이며, 원흉만 사로잡는 날이면 왜란은 깨끗이 종식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간을 이용하는 것보다 기묘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방어의 계책에 이르러는, 여러 해를 두고서 누차 명지(明旨)를 받들어 당사자인 여러 신하에게 거듭거듭 단속하기를 역시 엄하게 했다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신등이 적이 생각하오면, 요양(遼陽)ㆍ천진(天津) 두 지대는 서울과 몹시 가까워서 한쪽은 조선을 경유하여 압록강을 건너 올라올 수 있고 한쪽은 산동의 해면을 경유하여 바람을 타고 빨리 밀어닥칠 수 있습니다. 가령 허술한 점이 있다면 왜놈으로 하여금 거침없이 몰아쳐 들어오게 할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대궐 안이 흔들거리게 될 것이니, 이 점을 불가불 염려하지 아니할 수 없으므로 마땅히 동정(東征)한 군사 중에 건장하고도 날랜 자를 선택하여 합하여 혹시 2ㆍ3만 명을 얻게 되면 대장 두 사람을 보내어 이 두 곳을 나누어 주둔시켜서 불칙의 변을 막아야 하오며, 그 성직(省直)ㆍ수륙(水陸)의 군비에 있어서도 다시 오늘로부터 엄격히 정비하여 그놈들이 우리 국토를 침입할 경우에는 혹은 앞뒤에서 협공하는 형세로써 서로 더불어 힘을 다하여 섬멸해야 할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그 놈들이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믿고서 하루라도 대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므로 방어보다 긴급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간을 쓰는 것이 기묘하지만 반드시 그 곳에 가서 뜻과 같이 되리라고 기필할 수는 없는 것이니, 신 등의 생각으로는, 저들이 내지를 침범하지 않는다면 그만이거니와, 과연 내지를 침범한다면 크게 날뛰어 창궐할 것인즉, 우리 황상께서 두세 분의 대신과 더불어 정벌 토죄하는 의론을 결정하고서 내탕금 백만을 풀어서 여러 성(省)에 보조하여 전함 2천여 척을 제조하게 하고, 훈련을 마친 군사 20여만 명을 뽑아서 그 공허한 틈을 타서 그들이 미리 생각조차 못하는 데로 나가 상류에서 군사를 집합하여 왜국을 쳐들어가서 명령에 순종하는 자는 용서해 주고 그렇지 않고 명령을 거역하는 자는 베인다면 저 수길 같은 하나의 추장이 어찌 능히 도망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이른바 당당한 진(陣)이요 정정한 기(旗)요 그 도적이라는 것을 이름지어 말해야 적이 굴복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벌하여 없애는 것보다 중요함이 없다는 것이옵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군사를 일으켜 멀리 떠나게 되면 그에 대한 비용이 적지 않을 것이므로, 나라의 형편이 몹시 긴박한 이 때를 당하여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하오나, 신 등이 적이 계산하오면, 산동ㆍ절강ㆍ직례ㆍ민ㆍ광에 군량을 준비하여 해마다 2백만 냥을 밑돌지 아니하므로, 10년 동안 쌓아 놓으면 2천만 냥이 되고 또 30~50년을 쌓아 놓으면 그 비용이란 이루 다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것이니, 왜적을 정벌하는 비용쯤은 한 해의 수요량에 지나지 아니하여도 충분할 것입니다. 만약 왜놈이 탕평되는 날에는 해면의 방비도 역시 종식될 수 있사옵고 각처로 해마다 보내주는 미곡 대금도 그 절반은 가만히 앉아서 감소될 것이라, 한 번 수고하면 영원히 태평해질 것이니, 일은 반이요 공은 배가됨이 이와 같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광동ㆍ향산ㆍ오문ㆍ불랑기ㆍ번이에 대한 교통과 접대에 대한 한 절목은 실로 유요한 일이 되오니, 원컨대 양광(兩廣)의 총독 군문에 칙유를 내리시어 법을 마련해서 금단하게 하시고, 그 절강ㆍ복건ㆍ광동ㆍ세 성에 주거하는 왜국 사람에 있어서는 세월이 오래 되었건 가깝건, 죄가 있건 없건 다만 제 나라로 돌아갈 마음이 있는 자라면 조명(詔命)을 내리어 모두 차송하는 사신과 안동하여 선척에 실어 돌려 보내주면 순역(順逆)의 구분이 분명하고 화이(華夷)의 한계가 정해짐과 동시에 온 누리의 인심이 모두 다 쾌재를 부를 것이니, 종묘 사직의 다행이옵고 신민의 다행일 것입니다. 신은 매우 가누지 못하는 마음으로, 명을 기다리는 바이오며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옵니다.
성지를 받들은 바, ‘해부가 알아 하라’ 하였다.
예과 우급사중 장보지(張輔之)가 등래(登萊)ㆍ회양(淮陽)에다 수륙의 관군을 더 배치하여 불의의 변에 대비할 것을 청하니, 병부에서 다음과 같이 복의하였다.

등래ㆍ회양에다 군사를 더 배치하자는 것은 비록 대단한 기책(奇策)이기는 하지만, 각처에 원래 관병이 있어 족히 수비 방어할 만하니, 만약 뜻밖의 환란이 있을 적에는 역시 마땅히 군사를 발동하여 응원할 것이며 다시 객병(客兵)을 첨가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봅니다.

성지를 받들은 바 ‘의의(擬議)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7월 도망해 돌아온 사람이 와서 고하기를, “일본 관백이 낭고야(郞古邪)에 와 있으면서 배를 수집하여 양곡을 운반하고 강병(强兵)을 더 징발하여 장차 전라도 지방을 나누어 침범하려고 합니다.” 하므로, 조정에서는 사람을 요동도사에게 보내어 급보를 알렸다.
8월 총병 유정(劉綎)이 장차 철수하여 돌아갈 양으로 병기와 화구(火具)를 운반하므로 조정에서 역시 사신을 보내어 머물러 줄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9월 총병이 마침내 군사를 철수하여 돌아갔다. 이때는 큰 병란의 나머지라 기근이 겹쳐 들어서 백성들이 흔히 자식을 바꾸어서 잡아 먹고 사람을 죽여서 서로 씹어 먹을 정도였으며, 구렁에 굶어죽은 시체가 쌓이는 것이 하루에도 천여 구가 되었는데, 유 총병이 오랫동안 우리 나라에 머물러 있으면서 자봉(自奉)이 심히 간략하였고, 또 백성과 군사들이 굶어 죽는 것을 측은히 여겨 법령을 군중(軍中)에 내리고 남은 쌀이 있는 것은 모두 우리 백성에게 매매하게 하여 식량의 밑천을 마련해 주어 백성들이 힘입어 생활하였다.
이 때에 왜장 소서비 등이 명나라 서울에 있은 지 이미 오래라 화친을 청함이 더욱 굳건하였다. 병부 상서 석성(石星)이 이에 많은 관원을 대궐 아래 모이게 하여 회의를 하고, 인하여 소서비를 끌어들여 통역을 시켜 말을 전하여 세 가지 일을 요구했는데, 하나는 군사가 모조리 바다를 건너 제 나라로 돌아가고 한 명의 군사도 부산에 머무르지 아니할 것, 하나는 다만 봉(封)에 대한 것만 구하고 공(貢)을 요구하지 않을 것, 하나는 영구히 조선을 침범하지 않을 것이다. 이 약속과 같이 한다면 봉을 허락할 것이요 약속대로 하지 아니하면 허락할 수 없다 하니, 소서비는 하늘을 가리켜 맹세를 하며 영원히 약속을 준수하겠다고 청하므로, 병부는 황상께 아뢰니, 황상은 다시 병부에 유시하여 동궐(東闕)에게 자세히 정하게 하였다. 때는 12월 20일이었다.
태복소경(太僕小卿) 장문희(張文熙)는 봉공을 허락해서는 아니되니, 청컨대 절강ㆍ민ㆍ남직례(南直隷)ㆍ광동ㆍ네 성의 군사를 발동하여 곧장 일본을 들이쳐서 일면으로는 조선의 근심을 풀고 일면으로는 내지를 침범하려는 모의를 미리 방어해야 한다 하여 의(議)가 병부에 내려오자, 남경병과서과사 형과급사중 서백(徐栢)이 아뢰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신은 태복소경장문희(張文熙)가 네 성의 군사를 징발하여 일본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소굴을 무찌르자고 발의한 것을 삼가 보고서 그 계책이 심히 신기하지만 실행하기는 어려우므로 부득불 시정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이르옵니다. 신은 《주해도편(籌海圖編)》을 읽었사온데, 거기에 이르기를, ‘왜놈을 방비하는 술책은 지키고 방어하는 두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하였고, 큰 바다에 배를 띄워 멀리 섬 오랑캐를 정벌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대개 바다는 바람이 없는 때가 극히 적어서 태풍이 한 번 일어나면 하늘이 바로 깜깜해지고 배가 모래톱을 지나면 거의 엎어져서 침몰하고 마니, 비록 원나라 세조의 위력으로 온 나라가 한창 왕성한 힘을 끼고 백안발목아(伯顔?木兒)의 용맹을 더해가지고도 수군 십여만 명을 거느리고 멀리 일본을 정벌하다가 한 번 태풍을 만나서 모두 고기밥이 되고 말았으며, 사서(史書)에 살아 돌아온 자는 겨우 두 사람 뿐이었으니, 이것이 그 분명한 거울인 것입니다. 곧 우리 태조 기묘년(정종 1 1399)에 절직(浙直)에서 군비를 대구전(大衢殿) 앞에 모이게 하여 적의 돌아가는 길목을 받아 치다가 비바람이 크게 일어나 배가 침몰을 당하여 군비를 없앤 것이 수천 수만으로 헤아리게 되었으니, 대구(大衢)는 탕산(?山)ㆍ마적(馬蹟)과 서로 가까운 곳이요 일본과는 거리가 대단히 먼데도 그 지쳐서 돌아가는 때를 받아쳤으나 오히려 공을 거두지 못했는데, 하물며 멀리 곧 바다를 건너서 깊이 일본으로 들어가 능히 만전의 승리를 취할 수 있사오리까? 장문희(張文熙)의 소(疏)에 의거하면, 사성(四省)의 해군을 징집하여 용맹을 떨쳐 그 소굴을 들이쳐서 그 동쪽으로 나가는 것을 견제하고 그 내지 침범의 계략을 막아버린다 하였으니, 이는 정히 병법에 이른바 ‘강한 곳을 꺾으려면 허한 곳부터 들이친다’는 것이라, 진실로 좋은 계책이 되지만, 그 형세는 실지로 행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문희는 네 가지 이익이 있다고 하였지만, 신은 다섯 가지 어려운 점이 있다고 보옵니다. 병법에 이른바 ‘그 소굴을 두들긴다’는 것은 대개 그들이 반드시 구출해야 될 곳을 공격한다는 것이니, 이를테면, 손빈(孫?)이 곧장 위(魏)나라 서울로 달려드니, 방연(龐涓)이 포위를 해제하고 돌아가서 위를 구한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일본과 조선의 사이로 말하오면, 한 바다가 가로 막혀서 소식이 서로 통하지 못할 뿐더러 왜적은 견양과 같은 동물이라 친척 족속이 서로 보호하지 않고 있으니, 공격한다 해도 반드시 구하지 아니할 것이라 비록 그 소굴을 돌아본다 하더라도 어찌 능히 그 동쪽을 견제하오리까? 이 점이 그 어려움의 한 가지입니다. 허의후(許儀後)의 보고에 의하면, 일본은 66국으로서 나라마다 2만 명의 정병을 보유하고 있어 군비가 대략 백만이 넘는데, 지금 평양에 주둔하고 있는 군비는 40만 명이며, 그 정예 부대는 오히려 본국에 많이 남아 있다 하였으니, 저놈은 안일로 노고를 대비하고 우리는 노고로 안일을 공격하는 것이라, 마치 뭇 양을 몰고가서 사나운 범을 잡으려는 것과 같은 격이니, 비록 무사히 먼 바다를 건넜다 할지라도 반드시 이기지 못할 것이어늘 하물며 풍파가 하도 거세어서 전혀 건너가지 못하는 곳에 있어서 이겠습니까. 이것이 그 어려움의 두 가지입니다. 천 리 밖에서 군량을 실어오게 되면 군비는 노상 굶주린 빛이 나타날까 하였는데, 사성(四省) 중에서 오직 민절(?浙)만 일본과 거리가 약간 가까울 따름이옵고, 남직(南直)ㆍ광동은 수천 리에 그칠 거리가 아니며, 하물며 망망한 온 바다에 운송의 길이 통하지 않는데 군량을 어떻게 대 줄 수 있을 것이며, 또한 가는 곳마다 그 지방의 소산을 이용할 수도 없을 것이니, 군사가 어찌 배가 주리는 근심이 없을 리 있겠습니까? 이것이 그 어려운 점의 세 가지입니다. 지난 날에 통주(通州)의 군량이 중도에서 고갈되자 사람들이 여러 잔소리를 하여 원망과 비난이 생겼사온데, 하물며 성(省)의 군사를 징발하여 멀리 일본을 정벌한다면 군사들이 보기를 반드시 죽고마는 길이라 할 것이니, 누가 즐겨 목숨을 버리고 용기를 내어 가려고 할 자가 있으오리까? 형세가 반드시 되게 몰아치면 사단이 생길 것이니, 바깥 근심을 제거하기 전에 내부의 변란이 먼저 일어날 것입니다. 이것이 그 어려운 점의 네 가지입니다. 민광(?廣)의 군사의 수효에 대해서는 신이 능히 알지 못하오나, 절직(浙直)의 연해의 군사 같은 것은 많아보았자 만 명을 넘어가지 않는 데 지금 각 성마다 1만 5천 명씩을 징발한다면 반드시 그 본진을 비어놓고 나올 수 밖에 없으니, 방어하는 자는 어디서 의뢰하겠습니까? 하물며 왜놈이란 사람마다 싸움을 잘하는데 겨우 6만 명의 군사로써 두들긴다면 중과부적이어서 승부가 알기 쉽게 끝날 것이니, 이것이 그 어려운 점의 다섯가지입니다.

이상은 모두 형세나 이치로 따져서 보기 쉬운 것이니, 한 바다의 풍파를 모험하는 일이 없더라도 반드시 이익을 얻지 못할 것이어늘 하물며 풍파가 헤아릴 수 없는데 모험을 하여 공을 이루려고 하다가는 군사를 포기한 호원(胡元)을 잇지 않는다면 곧 대구(大衢)의 전철을 밟고 말 것이니, 문희가 이 주장(奏狀)을 올린 적에 깊이 생각을 못한 것이 유감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는 먼저 소리쳐 그 기운을 빼앗고, 반간을 써서 그 당을 떠나게 하고 맞아 쳐서 그 예봉을 꺾어버리고, 기병(奇兵)을 매복시켜 그 후방을 밟는 것 만한 계책이 없다고 봅니다. 무엇이 먼저 소리치는 것이 되느냐 하오면 지금 서적(西賊)이 섬멸되고 신무(神武)가 분발하는 시기이오니, 이 승첩을 사이(四夷)에 선포하고 유격 심유경(沈惟敬)을 차송하여 첩지를 싸가지고 조선에 가서 왜장에게 선유한다면 저놈들이 반드시 두려워서 복종하여 공을 원할 것이니, 그런 후에 더불어 약속하기를, ‘10년 만에 한 번 공(貢)하되 일정한 기약을 두고 그 기약과 같이 되면 공을 할 수 있으며, 도로는 영파(寧波)를 경유하되 일정한 지역을 두고 그 지역으로 오면 통할 수 있다’ 한다면, 왜놈이 천위(天威)를 두려워하여 공직(貢職)을 닦기를 정상대로 할 때 이 한 장의 종이가 10만의 군사보다 훨씬 나을 것입니다. 지난 날에 유경이 대언(大言)을 해서 왜놈에게 경외하는 마음을 일으킨 일도 있사온데 하물며 막중한 황령(皇靈)을 받들어 있지 아니하옵니까? 이는 싸우지 아니하고서 사람을 굴복시키는 한 가지 방책입니다. 어떤 것이 반간을 쓰는 것이냐 하오면 옛날에 왕직(王直)이 왜놈을 유인하여 침범해 들어오게 하는데, 왜왕은 그 속셈을 모르고 있으므로 생원 장주(蔣舟)를 뽑아 보내서 간사(間使)를 만들어 왕직을 사로잡아 오게 하였으니, 지금 관백이 음탕하고 포학함은 걸주(桀紂)보다 더하고 66주는 본시 심복이 아닌데, 다 그 처자까지 빼앗기고 있으므로 서해(西海)ㆍ산양(山陽) 여러 나라가 모두 의구심과 변란심이 생겼습니다. 민절(?浙) 안에서 장주(蔣舟)와 같은 자가 반드시 없지도 아니할 것이니, 중한 상으로써 구하여 한두 명의 책사를 얻어 보내어 여러 추장을 달래게 한다면, 반드시 능히 관백의 머리를 베어 기특한 공을 절역(絶域)에 세우게 될 것입니다. 이는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제어하는 한 가지 방책입니다. 어떤 것이 맞아 공격하는 것이냐 하오면, 신은 왜놈의 성질이 가장 급히 공격하는 것을 두려워함을 알고 있습니다. 대개 궁한 도적이 멀리 와서 굶주리고 또 피곤할 것이니, 만약 우리측에서 그 단점을 이용하여 공격을 한다면 힘이 되기 쉬운 까닭입니다. 옛날에 유강(劉江)이 요동을 지키면서 도적이 장차 올 것을 바라보고 즉시 분발하여 공격을 개시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금선도(金線島)에는 왜적의 근심이 종식된 지 2백 년이니, 지금 마땅히 경략에게 칙명하여 압록강에서 수군을 정돈하고 먼 곳을 잘 보는 자로 하여금 왜선(倭船)을 바라보고서 언덕에 닿기 전에 공격을 개시하여 혹은 반쯤 건넜을 때 끊어버리고 혹은 그 선두를 꺾어버리면 전승하지 못할 리 없으리니, 이것이 그 방비 없는 자를 공격하는 한 가지 방책입니다. 어떤 것이 기병(奇兵)을 매복시키는 것이냐 하오면, 신은 듣건대, 왜놈은 복병하는 꾀를 잘 쓰고 거짓 패하는 기틀은 알지 못한다 하옵니다. 저쪽에서 복병을 잘 이용하는데 나는 정병으로써 대적하기 때문에 패하지 않는 일이 적습니다. 옛날에 호종헌(胡宗憲)이 왜놈을 가흥(嘉興)에서 막으면서 팽신신(彭藎臣)으로 하여금 전위부대를 거느리고서 거짓 패하여 달아나게 하여, 그 지나가는 찰라에 복병이 다 일어나는 것을 기다려서 삼면으로 협공하여 곧 왕강경(王江涇)의 승첩이 있었으니, 지금 마땅히 경략에게 칙유하여 형세를 금복해(金復海)에서 살펴 보게 하시옵소서. 대개 차돈보(叉墩堡) 가운데 매복할 만한 곳이 있으니, 기병을 매복하여 꼬여내서 복병이 일어나 협공을 한다면 도적이 비록 많으나 반드시 어지러워질 것이며 이렇게 되면 기필코 이길 것이니, 이것이 그 뜻하지 아니한 데 나오는 한 가지 방책이옵니다.

만약에 칙지를 해부에 내리시어 다시 조사하고 의론하여 소혈을 무찌르는 것이 다섯 가지 난점이 있어 실행하기 어려운 것과 신이 진달한 네 가지 계책이 과연 실행할 수 있는가의 여부를 잘 살펴서 실행하기 어려운 것이라면 정지해도 무방하고 실행할 수 있는 것이라면 빨리 채용하시옵소서. 이와 같이 하신다면 요사한 기운은 날로 사라지고 바다 물결은 날로 맑아져서 무지한 저 왜놈을 장차 풀 베듯이 새 잡듯이 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니, 만전의 승산이 이보다 나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 신은 매우 가눌 수 없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명령을 기다리옵니다.

성지를 받들은 바, ‘병부가 알아서 하라.’ 하였다.
병부의 복의는 다음과 같다.

장문희(張文熙)가 진주(陳奏)한 네 가지 이익이라는 것은 실로 이행하기 어려운 일이오며, 서백(徐栢)의 네 가지 계책 중에 심유경을 보내라는 것은 이미 성지를 받들어 공(貢)은 허락할 수 없게 되어 있고, 그 밖의 삼책(三策)은 역시 어렵고 쉬운 것이 있사옵니다.

성지를 받들은 바, ‘모두 시행하라.’ 하였다.
봉의(封議)는 이미 결정된 일로써 예부에 내려오니, 예부의 복의는 다음과 같다.

일본에는 원래 왕이 있었는데 지금도 있는지 없는지를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관백에 대하여는 혹은 두 글자를 따로 의론하여 정할 수도 있고 혹은 바로 그가 살고 있는 섬의 이름으로써 봉할 수도 있으며 행장 이하는 요량해서 지휘의 직함을 내리고 상을 주되 차등을 주시옵소서. 삼가 명령이 내리시기를 기다려서 시행하겠사옵니다.

천자는 마침내 일본에 대하여 왕의 호칭을 인준함과 동시에 금인(金印)을 주고 행장에게는 도독첨사를 제수하여 병정(兵政)을 총독하게 하였다. 그리고 임회후(臨淮侯)이언공(李言恭)의 아들 도독 첨사이종성(李宗誠)을 책봉정사로 삼았다.
언공의 자는 유인(惟寅)이요, 호(號)는 수암(秀巖)이니, 개국공신 이문충(李文忠)의 후손으로 시명(詩名)이 있어 왕세정(王世貞)과 더불어 서로 수창한 바 있으며 종성 역시 시에 능하였으나 부귀한 집안에 성장하여 세상 물정을 알지 못하므로 사람들이 많이 걱정하였다.
또 오군영 우부장 좌군도독부 서도독첨사 양방형(楊邦亨)을 책봉부사로 삼았다. 방형의 호는 공우(恭宇)요, 산서(山西) 사람인데, 무과 진사 출신으로 자못 담력과 기개가 있었다.
종성 등이 이미 명령을 받고 떠났는데, 요진도어사 이화룡(李化龍)이 말하기를,

“적의 정상이 의심스러울 만한 점이 여섯 가지가 있고 염려스러운 점이 다섯 가지가 있는데, 왜놈이 글자를 알지 못하는지라 중간에서 양편이 서로 비방하고 속이는 일이 있을까 걱정되오니, 청컨대 예부의 의(議)에 따라 수길(秀吉)을 순화왕(順化王)으로 봉하고 심유경을 보낼 것을 중지하고 다시 수군을 모집하여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시옵소서. 듣건대 청정(淸正)이 본시 관백에게 불복하고 또 행장과도 서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니, 저 옛날에 노중련(魯仲連)이 연(燕)나라 장수를 타이르던 꾀를 써서 이간을 붙이는 것이 상책일까 하옵니다.”

하였는데, 때마침 봉사(封使)가 이미 출발한 뒤라 병부에서 마침내 그 꾀를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또 왜놈의 동향을 정찰하게 한 바, 유격장군 진운홍(陳雲鴻)이 보고하기를,

“웅천도(熊川島)에서 왜선 36척이 모두 이미 출항하여 자기 소굴로 돌아갔다.”

하니, 석성(石星)은 드디어 봉하는 일이 반드시 성립될 것으로 확신하였다. 을미년 정월. 예부에서, 평양ㆍ벽제ㆍ개성 등지에 단을 만들어 진중에서 싸우다 죽고 또 병들어 죽은 관군을 치제(致祭)할 것을 제청하여 성지를 받들어 단의 이름을 민충(愍忠)이라 지어주고, 해부에서 은자를 보내주어 제수를 사서 치제하게 하였다. 예부에서 마침내 관원을 우리 나라에 차송하여 홍제원(弘濟院)에다 단을 만들어 제사하였다. 이 달에 병부에서 수길에게 봉을 허락한 일로써 본국에 공문을 보냈는데, 다음과 같다.

본부에서는 귀국의 주청으로 인하여 하는 일입니다. 지난 날에 왜적이 조선을 침범함으로 인하여 형세가 위태롭게 되자 급함을 고해오므로 우리 황상폐하께서 장수를 명하여 군사를 일으켜 멀리 가서 구원하여 군사를 괴롭히고 군량을 소비함으로써 비로소 강토를 회복하고 생령을 다시 살게 하였던 것입니다. 근래에 관백으로부터 소서비를 보내어 표문을 갖추어 봉해 주기를 청해왔는데 그 뜻은 비록 성실하고 간곡하지만 아직 허락하지 않고 있었더니, 이어 조선에서도 표문을 갖추어 대청(代請)하여, 황상께서 우선 봉을 인준하셨으며, 추후에 다시 성유를 공경히 받들어 문무(文武)의 많은 관원을 모으고 더욱 더 연구하여 명확히 살핀 다음에 본부에서 일력을 담당하여 성지를 제봉(題奉)하니, ‘왜사가 이미 명확하게 역심(譯審)하였으므로, 봉한 명칭과 책사(冊使)를 정하여 갖추어 아뢰고 부에서 먼저 관원을 차송하여 왜장에게 선유하되 군중을 거느리고 모두 소혈로 돌아가게 하라. 조선왕의 주문이 이르는 날을 기다려서 사신을 보내어 가서 봉할 것이다’ 하셨고, 따라서 황제의 비준을 거쳤습니다. 그리고 관백을 봉하여 일본 국왕으로 삼고 동시에 책사 두 사람을 파견하여 소서비와 함께 정월 이내에 국경을 나가서 잠깐 요양(遼陽)에 주둔하고서 부산의 왜놈들이 수대로 다 제 소굴로 돌아가고 해국(該國)의 주장(奏狀)이 도착하는 것을 기다려서 가서 봉한다 하여, 해내 해외가 모두 다 들어 알고 있으니, 조선을 위하여 꾀한 것이 아님이 없습니다. 지금 특별히 관원을 보내어 격문을 전달하오니, 해국의 임금과 신하는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성명의 작은 나라를 사랑하는 어진 뜻을 본받아 적당한 배신을 차송하여 부산에 가서 친히 행장을 만나서 천조(天朝)의 은혜와 위엄을 들어 타이르고 양편이 서로 우호를 수립하여 구악(舊惡)을 생각하지 말며 저 부산의 왜적이 다 돌아가서 성채가 없어진 뒤를 기다려서 분부에 따라 실지대로 알려서 책사(冊使)가 바다를 건너가서 봉하는 일에 편의를 제공하며 절대 머뭇거리거나 의심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병부는 또 군문표하차관 누국안(屢國安)을 보내어 첩지를 싸가지고 부산으로 가서 왜적의 정세를 살펴보게 하고, 또 우리 나라에 격문을 보내어 영리한 배신을 선정해서 함께 가서 조사하여 살피게 하니, 조정에서 곧 사복시 첨정 박진종(朴振宗)으로 국안을 따라 가게 하였다. 그래서 2월 10일 사시에 웅천(熊川)에 있는 왜적의 진영에 당도하니, 평 행장의 중군(中軍) 왜인 무라얏지(無羅也叱知)란 자가 나와 영접하며 먼저,

“천자의 사신이 어느 때에 나오는가?”

고 물으므로, 진종은 대답하기를,

“내가 길을 출발할 때에 들으니, 천자의 사신이 금월 말경에 요동에 당도한다 하더라.”

하였다. 왜적이 다과를 막론하고 계속 와서 묻고 있으므로 진종은 모두 앞에 한 말과 같이 대답하니, 여러 왜가 혹은 가는 웃음을 지으며 믿지 아니하고 혹은 손벽을 치며 기뻐서 뛰기도 하였다.
11일 행장이 통사(通事) 왜인 요시라(要時羅) 등으로 하여금 차관 누국안 및 박진종을 요청하여 대청 안으로 영접해 들었는데, 현소(玄蘇)ㆍ평조신도 좌상에 있었다. 행장이 요시라를 시켜 묻기를,

“무슨 일로 인하여 이 곳에까지 오시게 되었습니까?”

하므로, 박진종이 대답하기를,

“우리는 병부 상서석성 노야의 분부를 받고 여기 와서 너희들의 가고 안 가는 것을 보자는 것이며 그 밖에 별다른 일은 없노라.”

하였다. 이윽고 행장이 술을 올리어 마시기를 권하며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파했다. 11일과 13일에 행장이 누국안과 더불어 여러 차례 이야기를 나누었기로, 진종은 국안에게 묻기를,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가?”

하니, 국안은 말하기를,

“우리가 나온 연유를 묻기에 대답하기를, ‘성상이 이미 봉을 인준하셨고, 심 유격(沈游擊)은 인마를 많이 대동하고 천자의 사신보다 앞서 왔으므로 석성 노야가 우리들을 차송하여 너희들을 효유해서 먼저 군사를 철수시키고 바다를 건너게 하자는 것이요, 또 조선에 공문을 내어 배신 한 사람을 보내서 우리와 동행하여 너희들의 동정을 살펴보아서 전주에 신빙성이 있게 함으로써 천자의 사신이 나아가는 길을 편의하게 하자는 것이니, 너희들이 성지를 공경히 준수하여 군사를 해산하고 바다를 건너가라 수 있다면 일이 당연히 쉽게 성취될 것이다.’ 하였더니, 행장이 대답하기를, ‘우리가 평양으로부터 부산에 당도하기까지에 한결같이 천조(天朝)의 약속을 준수하여 감히 위배하지 아니하였으니, 우리가 성지를 공경히 따른 것이 아닙니까? 지금 대인이 또 군사를 철수하여 돌아가라는 말씀을 하시니, 시기에 맞추어 바다를 건너가고 싶지만 천자의 사신이 오는 것인지 아니오는 것인지 아직도 확실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지체하는 것입니다.’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너희들이 천자의 사신이 오고 아니오는 것으로써 진퇴를 결정할 생각이라면 나는 석성 노야에게 회보(回報)하여 심 유격을 재촉해 보내도록 하겠다’고 했노라.”

하였다.
15일. 평조신이 박진종을 대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이 양식과 물자를 허비하여 해상에서 고생하고 있는 것이 다른 뜻은 전혀 없고 다만 천자의 사신을 기다리기 위한 것이니, 그 갈망하는 정이 어찌 어린 아이가 어머니를 바라는 것과 같을 뿐이겠습니까? 하물며 우리들은 타국에 나와 4년 간을 종군하였으니, 인정이 누구나 부모 처자에 대한 생각이 없겠습니까? 하늘이 만약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지 아니하여, 생전에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한다면 마음 속에 맺힌 원한이 어느 때에 풀리겠습니까? 바라건대, 대인은 우리들을 위하여 잘 처리해 주시옵소서.”

하니, 진종은 대답하기를,

“천조에서 본국의 여러 세대의 충성과 근로를 생각하여 중국과 동등시하고 있기 때문에 군사를 발동하고 양곡을 운반하여 극력 구제한 것이며, 봉을 인준하는 한 가지 일에 대해서는 바로 천조의 은전인 것이니, 본시 소방(小邦)으로는 감히 어떻다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이야기가 끝나자, 박진종은 적의 진영에 머물러서 상하의 왜인 군중을 살펴보니 모두가 다 오래 머물게 된 것을 원망하고 고통스럽게 여기는 것이어서 천자의 사신을 기다린다는 말이 진정인 것도 같았는데, 수길ㆍ청정 및 여러 두목 왜들은 으르렁대기를 마지 아니하며 화친을 인하여 간사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진종은 곧 전후의 문답을 들어 그 연유를 빨리 보내와 아뢰고 또 차관 누국안이 전해 주는 왜적의 추장 평 행장의 서계를 예조에 보내왔는데 그 서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 선봉 풍신 행장(?臣行長)은 삼가 조선국 예조대인 합하께 아뢰옵니다. 천조 병부 상서석성(石星)이 누국안 및 풍당(馮堂) 등을 차송하여 봉사의 진실성을 선유하는데 귀국에서 관원 한 사람을 명하여 호송해서 진영에 들어와 천조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 일본을 위하여 옛 호의를 닦아 주시니, 매우 다행으로 여기옵니다. 일본은 천조에 대하여 공순(恭順)을 독실하게 하기 위하여 책봉(冊封)을 구걸하여 천사(天使)를 기다린 지 지금 3년의 세월을 지났는데도 천조 사람들의 혐의가 풀리지 아니하여 때때로 사람을 보내서 군사를 철수하라는 일로써 보여주고 하였습니다. 행장은 지금으로부터 3년 전에 심유경이 평양에 들어와 언약을 맺은 뒤로는 한 번도 약속을 어긴 적이 없었으며, 한계를 나누어 그것을 뛰어넘지 아니하고 왕경을 물러나 부산에 당도하여 청정(淸正)의 손아귀를 벗어나게 하여 왕자와 배신을 돌려보냈으며, 지금 비록 포포(浦浦)에 있지만 귀국의 봉강을 범하지 않고 일본의 양곡을 운반하여 먹고 있으며, 다만 갈증을 낫게 해 주는 것은 오직 귀국의 시냇물이 있을 따름이니, 만약 천사를 기다리는 일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포포에 지체하겠습니까? 이런데도 천조 사람의 의심을 풀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귀국에서 병부에 상서하여 먼저 심 유격을 차송해서 진영에 들어와 상의하고 천사가 나오도록 하여 주시면 바로 귀국도 평안하고 왜병도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는 훌륭한 계책이오니, 게을리 마시옵소서. 나머지는 회답이 있으시기를 기대하며 오직 이것만을 바랍니다.

조정에서는 이 장계와 왜서(倭書)를 보고서 전후의 곡절을 자상히 갖추어 병부에 공문을 발송하니, 병부는 또 독무(督撫) 제신으로 하여금 우리 나라에 유시를 전달하기를,

“왜병이 다 물러나고 봉전(封典)이 이미 내린 뒤라도 일본이 사은차로 보내는 사람의 선박 기구는 사신을 제외하고는 딴 사람은 3백 명을 초과하지 못하며 배는 세 척을 넘지 못하며 먼저 대마도에 와서 명령을 기다려서 수효를 정하여 서울에 들어가야 되며 만약 항복해오는 왜놈이 있거든 편의를 제공하여 안착하게 하여 함께 연해변을 깨끗이 맑혀서 길이 후환을 없애 주기를 기대한다.”

하였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마침내 사신을 보내서 공도(貢道)는 이미 영파(寧波)로 결정된 것을 아뢰고 만약에 본국의 사변이 측량하기 어려울 경우가 있으면 성지를 받들겠다고 하였다.
4월 황조 책봉정사 이종성(李宗誠)이 명나라 서울로부터 와서 소서비를 데려다가 천조(天朝)의 복식으로 꾸며 입혀 표하(票下)에 두고서 출입할 적에는 반드시 동반하였다. 먼저 심유경을 보내어 부산에 있는 왜적의 진영에 이르러 왜적의 군중에서 바다를 건널 것을 설유하고, 또 본국으로 하여금 적당한 배신을 차송하여 심유경을 따라서 왜적의 진영에 들어가게 하므로 조정에서는 마침내 문학 황신(黃愼)을 심유경과 동행하는 배신으로 삼으니, 사람들이 위태롭게 여기는 자도 있었으나 황신은 명령을 받고서 곧장 떠났다.
황신의 자가 사숙(思叔) 호는 추포(秋浦)로 회원(檜原) 사람인데, 고려 평장사 석기(石奇)의 후손이요, 장무공(壯武公) 형(衡)의 증손이다. 황신은 성품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소시에 율곡(栗谷)이이(李珥)ㆍ우계(牛溪)성혼(成渾)을 좇아 학문을 닦고 도의에 젖어 뜻과 업(業)을 굳혔었다. 나이 27세 때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명성이 매우 성하였으나, 시기 질투하는 자에게 밀려나게 되어 낭서(郞署)에서 맴돈 지 오래 되었다. 계사년에 월사(月沙)이정구(李廷龜)와 더불어 함께 강학의 배신이 되어, 송 경략(宋經略)을 평양에서 보았는데, 경략은 그를 단정하고 민첩하여 성실한 선비라고 칭도하였다. 이에 이르러 원행의 명령을 받으니,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겼는데, 그는 왜적의 진영으로 나갔다. 처음 왜적의 진영에 당도했을 적에 적장 행장이 한바탕 잔치를 벌이고서 유격 심유경 및 황신을 청하였다. 황신은 두세 번을 불가하다고 하다가 강청하므로 가보니, 천장(天將)은 한가운데 앉고 행장은 서쪽에 앉고 황신은 동쪽에 앉게 하였는데, 적승(賊僧) 현소(玄蘇)가 황신의 위에 있으므로 황신은 물러서고 앉지 아니하였다. 유경은 그 까닭을 묻자 황신은 대답하기를,

“화상(和尙)이 상좌에 있으니, 자리를 맞대는 것이 혐의스럽다. 화상의 자리를 옮겨 놓은 연후라야 앉겠다.”

하니, 유경은 웃으며 이 말에 따라 현소의 자리를 서쪽으로 옮기게 하였다. 황신은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서야 마침내 앉으니, 적이 그제야 경계하며 꺼리기 시작하여 감히 업신여기지 못하였다. 오랫동안 왜적의 진영에 있는데 모든 사건이 처리하기 어려운 것은 조정에서 한결같이 황신에게 위임하니, 당시의 사단이 퍽이나 착잡하였으나 만 가지로 수응하여 임기응변하며 전후로 치계(馳啓)하여 위로 조정에 품달하고 아래로 오랑캐의 정에 응답하며 털오라기를 분석하여 요점을 찌르고 맺힌 데를 풀어놓으니, 적이 또한 귀화하여 오랠수록 더욱 공경하였다. 황신은 한가한 날에 고시 한 수를 지어 자기 뜻을 보였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대장부가 죽음을 두려워하랴/丈夫不?死
죽음이 두려워선 장부 아니지/?死非丈夫
칼날도 오히려 밟을 수 있고/白刃尙可蹈
끓는 물 속도 뛰어들 수 있느니라/鼎?尙可趨
소원은 내 절개를 보전하는 것/所願全吾節
내 몸마저 보전할 수 있을가 보냐/安得全吾軀
어질도다, 치술랑(?述郞)이여/賢哉?述郞
죽어도 마음을 변치 않았네/抵死心不?

심유경 등이 적의 진영에 있은 지 자못 오래였으나 행장이 바다를 건널 뜻을 오래도록 결정하지 못하니, 천자의 사신이 잇달아 사신을 보내어 왜놈에게 바다를 건너갈 것을 독촉하여 앞뒤로 그치지 않았다. 행장은 우선 웅천(熊川)의 두어 진과 거제ㆍ장문(場門)ㆍ소포(蘇浦) 등 여러 진을 철거하여 신용을 내보였을 뿐이며, 대진(大陣)은 여전히 철거하지 아니하였다. 유경은 마침내 서신을 올려 천사(天使)에게 품하였는데, 그 서신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유경은 행장 등과 서로 만나보고서 말이 은대(恩臺)에게 미치자 그는 매우 공경하고 중히 여기며 마음을 기울여 기쁨을 표시하였습니다. 전자에 은대의 유시를 입고서 공ㆍ장(孔章) 두 사람을 차송하니 천총 김가유(金嘉猷)와 동행하여 먼저 영내에 이르러 선유하고 아울러 뱃길을 보게 하였더니, 행장의 영중에 가서 상의하고 추종하는 왜인 2백 명을 거느리고 배 세 척을 타고서 곧장 바다를 건너 관백을 만나 보고서 유경이 이미 와 있으니 군사를 철수하게 해 달라고 청할 모양입니다. 대개 거년에 손 독부(孫督府)가 관문을 나갈 적에 사람들이 모두 하는 말이 군사를 발동하여 토벌하러 온다고 하니 왜인이 반신반의 하는데 행장은 다 못들은 척하고 버려두었던 것입니다. 그 후 며칠이 못되어 청정(淸正)의 진영에 들어간 자가 있었는데, 본시 간첩 노릇을 하려고 하다가 말이 서로 전도되어 그들의 꼬임수에 넘어가서 도리어 부림을 받아 자못 추태만 부리게 되었습니다. 종인(宗人)이 또 말을 퍼뜨리기를 ‘사건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하니 듣는 자가 멍하였는데 지금 유경이 영(營)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안정된 것을 느꼈습니다. 지금 대사가 행장의 손에 달렸지만, 그 역시 감히 혼자서 결단하지 못하고 반드시 관백을 면대하여 묵은 의심을 깨뜨려 버려야만 되기 때문에 먼저 떠나기를 청한 것이었는데, 곧 은대로부터 유시한 종인의 공문을 받았으니, 저희들이 비록 무슨 작위를 하고 싶을지라도 역시 손 쓸 곳이 없을 것입니다. 행장은 결정하기를 은대를 청하여 잠깐 동안 왕경에 머무르게 하고 만약 청정이 집요하여 떠나지 않더라도 단연코 은대를 청하여 영에 나오게 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유경은 본 병부의 비밀 유시로써 청정의 의사를 염탐하고자 하여 이야기를 나누어 볼 작정이며, 행장은 또 말하기를, ‘이번에 특별히 계책을 마련하여 결단코 청정을 굴복시켜야 하며 함부로 사단을 발생시키지 못하게 한 연후라야 이 일을 완결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적이 헤아리면, 행장이 이번 걸음이 갔다 돌아오기까지는 한 달 남짓이 걸릴 것이므로 이에 유경을 영내에 머무르게 하여 각 영의 왜인들을 단속하라는 것입니다. 목하의 정형과 사세는 이와 같습니다.

대개 이 때에 담종인(譚宗仁)이 청정의 진영 내에 있었던 것이다. 청정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천조가 우리와 더불어 화친을 맺는 데 있어서는 내가 으뜸가는 공로자다’ 하므로 행장이 의심한 것이다. 유경이 아뢰어 대강 들어 말하자 행장은 또 스스로 첩지로써 품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전부터 누차 천조(天朝)로부터 속임을 받아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백이 방금 내가 자기를 속인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지금 천사(天使)가 아울러 소서비까지 대동하고 왔으나 문서로 상의하는 것이 대하여 토론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또한 청정 및 뭇 왜인들을 미리 철수시키고 해상에는 왜인 한 사람도 없게 한 연후에 나만이 홀로 4백ㆍ5백 명을 거느리고 해상에 머물러서 바야흐로 천사를 청할 것이며, 만약에 한 명의 왜인이라도 해상에 남아 있다면 감히 천사를 청하여 오시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천사가 전일 서(徐)ㆍ사(謝)씨의 행차에 비할 바 아니니, 반드시 접대하는 의식을 먼저 강구하여 정하여야 하겠기로 나는 부득이 가서 약속할 것이며, 금월 24ㆍ25일 경에는 당연히 돌아올 것입니다.

종성은 이 첩지를 보고서 말하기를,

“행장이 돌아오면 나는 마땅히 부산으로 나가겠다.”

하였다.
급기야 7월 1일에 통보가 왔는데, 6월 26일에 행장이 돌아왔고, 관백은 풍신 정성(?臣正成)ㆍ장성(長成)을 시켜 방옥(房屋)을 소각할 것과 접대에 관한 일을 나누어 관장하게 하여 천사(天使)를 기다리는 중이라 하였으나 별로 운반하는 상태가 없었으며, 또 말하기를,

“평양에 속임을 당했던 것처럼 될까 걱정이오니, 천사는 빨리 진영 안으로 들어오라. 그러면 마땅히 모두 약속과 같이 하겠다.”

는 것이었다.
8월 병부에서 편지를 보내어 부사 양방형(楊邦亨)에게 재촉하여 먼저 부산으로 가도록 하니, 종성은 마침내 방형과 더불어 계획을 정하였다. 방형은 10일에 먼저 갔었으나 왜인이 머뭇거리기만 하고 곧 다 철회하지 아니하고서 다시 상사(上使)를 청하니, 사람들이 많이 의심하였다. 병부 상서 석성은 이미 심유경의 말을 신임하는지라 왜놈이 반드시 다른 생각은 없을 것으로 여기고, 또 왜놈을 물러나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급해서 자주 종성을 재촉해서 나가게 하니, 비록 조정의 의론은 의견을 달리하는 자가 많았으나 석성이 유독 분기하여 몸으로써 담당하였다. 종성은 마침내 9월 1일에 왕경을 출발하여 10월에 부산에 들어가니 청정(淸正) 등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철수한 자는 단지 노약자와 지치고 병든 자와 수병(戍兵)으로 오래 있으면서도 교대를 못한 자 뿐이었다. 두 천사가 당도하자 수대로 다 소굴로 돌아갈 것을 재촉하여 그렇게 되어야만 바야흐로 바다를 건너갈 수 있다 하였다. 행장도 역시 천사를 찾아와 보지 아니하고 단지 관백과 약속한 세 가지 일 밖에는 행장 등이 감히 다른 것을 요구하지 못한다고 말하여, 중간에 왕래하는 떠도는 말들은 절대 곧이 듣지 말기 바란다는 것과, 지금 이 제영(諸營)에는 군량과 기물이 매우 많아서 한꺼번에 운반해 가지 못하니, 아직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종성은 믿고 염려하지 아니하였다. 행장은 관백에게 다녀와서 가부를 결정하겠다 하고서 천사를 영접하여 바다를 건너 제 나라로 돌아가겠다고 칭탁하였다.
병신년 정월에 행장은 비로소 돌아왔으나 오히려 군사를 철회하는 일에 관하여는 분명히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심유경도 역시 두 천사를 남겨두고 또 홀로 행장과 더불어 바다를 건너가면서 속여 말하기를, ‘장차 천사를 영접하는 의식을 논의하여 정해야 한다’고 하니, 사람들이 그 뜻을 추측할 수 없었다. 유경은 이에 금의(錦衣)를 입고 배에 오르며 기(旗)에다 ‘조집양국(調?兩國)’이란 네 글자를 큰 글씨로 써서 뱃머리에 세우고서 떠났다. 유경이 떠난 후로 오랫 동안 회보가 없었다. 대개 유경이 먼저 일본에 들어가서 사사로 수길에게 망룡의ㆍ옥대ㆍ익선관 및 대명지도(大明地圖)ㆍ무경칠서(武經七書)를 바쳤고 그 밖의 진귀한 보배도 몰래 뇌물로 바친 것이 많았으며, 또 아리마(阿里麻)의 여자를 모아다가 왜놈과 결합시켰기 때문에 다 조종하는 바 되었던 것이다.
이 때에 복건성 사람 소학명(蕭鶴鳴)ㆍ왕삼외(王三畏) 등이 왜중(倭中)으로부터 나와서 이종성을 보고서

“관백이 포악하고 오만하여 실로 봉을 받을 뜻이 없으며, 장차 책사(冊使)에게 유지를 전하여 잡아두고서 곤욕을 보이며 해마다 천조(天朝)에 뇌물을 토색할 것이요, 이어 군사를 발동하여 다시 조선으로 향할 모양이니, 화친의 일은 끝내 성립되지 않을 것이며 한갓 임금의 명령을 욕되게 할 따름이라”

고 말하니, 종성은 듣고서 심히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4월 3일 이경을 기하여 미더운 집안 심부름꾼만 데려다 차관의 모양을 가장하고 등에는 누런 보자기를 지고 사(紗)로 얼굴을 가리고 나(?)를 두들기며 나와서 파수 보는 왜인에게 속여 말하기를,

“급한 전갈이 있으니, 빨리 문을 열어 달라.”

하니, 왜가 믿고 열어 주었다. 드디어 뛰어가는데 달빛이 밝지 못하여 가는 길을 분별하지 못하고 산길을 취하여 달아나다가 길이 잘못 들어 울산에 당도하였다. 날이 밝아서 바라보니 바로 적의 진루(陣壘)이므로 산골짝에 숨어서 3일 동안을 먹지 못하고 있던 차에 마침 왜적을 정탐하는 우리 나라 사람을 만나서 돌아갈 길을 지시 받아 겨우 경주에 도달하여 왕경으로 향해 갔다. 종성이 도망가던 날에 왜놈은 그가 도망 간줄 모르고 있다가 날이 밝아서야 비로소 깨닫고서 온 군대가 모두 발동하여 군사로 하여금 부사 양방형(楊邦亨)의 사관을 포위하고 또 한 지대를 발동하여 사고(沙古)ㆍ안문(?門)ㆍ비랑도(飛浪島) 등으로 바야흐로 뒤를 쫓고 있었는데 방형은 조용히 기다리매 해가 높이 떴는데도 오히려 일어나지 아니하였다. 의지(義智) 등이 방문 밖에 와서 통역을 시켜 꿇어 앉아 고하기를,

“정사가 도망갔습니다.”

하니, 방형은 말하기를,

“순진한 사람이 타국의 기색을 보지도 못했고 또 오랫동안 영내에 있자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어서 이 때문에 도망간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서 방형은 제장더러 말하기를,

“지금 정사가 이미 떠났으니, 그 표하(表下)의 장관(將官) 등은 모두 마땅히 나에게 소속되어야 한다. 나는 앉아서 낭패한 지경을 볼 수만도 없다.”

하고, 인하여 의지 등을 불러,

“여러 관원에게 침해하거나 포학하지 말고 또한 정사(正使)를 쫓아가지도 말아야 안팎이 모두 편안할 것이다.”

하였다. 해가 저물자 방형은 정사의 아문에 이르러 금인(金印)을 가져다 하처(下處)로 봉환(封還)하니 뭇 왜인이 모두 감격하며 말하기를,

“인신(印信)이 여기 있고 양 부사가 오히려 있으니, 우리들이 무슨 염려를 하겠는가?”

하였다. 이전에 방형이 왜적의 진영에 들어오니, 왜적의 추장이 뜰에 들어와 예식을 행하는데 방형은 행장더러 말하기를,

“하늘은 높고 땅은 나직하여 건곤이 판정되고 대명(大明)이 중천에 올라 온 천하가 통일되어 만국이 누구나 다 우러르고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네 관백이 비록 바다 밖에 있을망정 어찌 감히 홀로 순종하지 아니하느냐? 너희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에 웅거한 지 이미 4년이 넘었으므로 황상께서 두 나라가 서로 견지하다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는 것을 깊이 민망히 여기고 특별히 사신을 보내어 멀리 해외까지 조림(照臨)하시니, 실로 만고에 있지 아니한 큰 경사이거늘 너희들은 어떤 까닭으로 지금까지 바다를 건너가지 아니하느냐?”

하고, 인하여 성음을 가다듬어 말하니, 여러 왜인이 서로 쳐다보며 숙연하였다. 처음에는 왜인이 천사(天使)를 영접하는 것이 너무도 간소했었는데, 이에 이르러서는 말씨가 공순하였다. 그 후에 두 천사가 함께 한 영내에 있는데 방형을 예우하는 것이 정사(正使)보다 더 하였으며, 이와 같이 공손히 복종하였기 때문에 이에 와서 모두 그 절제를 따르니, 온 진영이 힘입었다. 조정에서는 정사가 도망갔다는 말을 듣고 일국이 놀라 요동하여 왜적이 반드시 재차 움직일 것이라 일렀다.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이 바야흐로 영남에서 부(府)를 열고 군사를 조발하여 적의 침입해 오는 것을 대비하고 있는데, 황신이 천사의 접반사로서 재차 왜적이 진영에 갈 적에 원익을 찾아보고 물으니, 원익은 말하기를,

“왕인(王人 사신을 말함)이 달아났으니, 왜적이 반드시 변동을 일으킬 것이므로 그에 대한 대책을 강구 하려는 것이다.”

하자, 황신은 말하기를,

“왕인(王人)은 본시 병적인 소치이거니와, 비록 도적이 되더라도 거사에 있어서는 반드시 그 이름을 바르게 하는 것이니, 때없이 몰래 발동하는 짓은 반드시 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내가 만약 다시 가게 되면 적이 반드시 의심을 풀 것이니, 내가 왜적의 진영에 들어가는 것을 기다려서, 뒤에 만약 군사를 움직일 기세가 있으면 서서히 대응하는 것이 옳을까 합니다.”

하니, 원익이 그렇겠다 하고서 중지하였다. 이 때에 도로변에서는 터무니없는 말들이 자자하여 인심이 두려워하고 위태롭게 여기므로, 황신은 곧 패문(牌文)을 발송하여 곧장 왜적의 진영으로 달려가니, 왜장 평조신(平調信)이 곧 달려와서 영접하며 말하기를,

“여러 왜인들이 다 왕사(王使)가 달아난 일에 대하여 허물을 귀국에 돌리므로 내가 유독 변명했는데, 내 말이 과연 징험이 되었습니다. 공이 오시지 않았던들 거의 진정되지 못할 뻔했습니다.”

하였다. 그 후에 왜는 재차 출동하는 일이 없어, 이로써 나라의 의심이 진정되었다. 이에 배신 심우승(沈友勝)을 보내어 말미를 갖추어 주달하고 인하여 군사와 군량을 청하였다. 그리고 요동 독무도 역시 종성이 도망갔다는 것을 주달하였다. 종성이 왕경에 온 뒤에도 또 관백이 심유경을 잡아놓고 일곱 가지 일을 요구하니, 원래 봉(封)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칭했다. 이에 황상은 크게 노하여 명해서 종성을 체포하여 금의위옥(錦衣衛獄)에 하옥시키고 과도(科道)를 고쳐 명하여 가서 북경(北京)을 살피게 하였다. 시를 지어 종성을 조롱하는 자가 있었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몸에는 가만히
소무의 절주D-018을 감추고/貼肉暗藏蘇武節
머리 안고 바쁘게
조적의 채찍주D-019을 들었네/抱頭忙着祖生鞭
조국에 돌아가면 낯가리개를 만들어 쓰게나/還國好縫皮眼?
낯 내놓고 사람 앞에 나서기 부끄러우리/羞將面孔向人前

이 때에 조정의 신하가 서로 소장을 올려 봉사(封使)를 파할 것을 청하였는데, 어사 대사형(戴士衡)ㆍ주공교(周孔敎) 등의 말이 심히 간절하고 솔직하였다. 주공교의 소장은 다음과 같다.

동봉(東封)의 일이 무너지고 용렬한 신하가 나라를 그르쳤으니, 빨리 그 죄를 다스리시고 봉공(封貢)의 일을 파하시는 것을 청하옵니다. 신은 노둔하고 겁이 많아서 능히 사(邪)에 저촉할 수도 없사온데 폐하께옵서 신의 능력을 헤아리지 아니하시고 특은(特恩)으로 기용하시어 서대(西臺)에 보직하게 하시니, 주상의 은혜에 보답하는 일이라면 곧 머리가 부서지고 심장이 짜개져서 죽어도 한이 없사옵니다. 신은 적이 생각하오면, 포의(布衣)의 선비로도 오히려 문경지교(刎頸之交)가 있거늘 지금 밝으신 황상께서 위에 계시되 일찍이 공사(公事)를 근심하고 국가를 생각하기를 주리고 갈증난 것 같이 하는 자가 없으며, 거의 구차히 편안할 것만을 생각하여 서로 아첨하고 편당하여 군주에게 용납되고 기쁘게 하기만 할 따름이니, 남의 신하로서 불충한 죄는 이 보다 큰 것이 없사옵기로 신은 진실로 부끄럽게 여기옵니다. 곧 동봉(東封)의 일로만 말하더라도 무너짐이 이 지경에 이르러, 한 사람도 알지 못함이 없고 또한 한 사람도 한하지 아니함이 없으면서도 끝내 한 사람도 눈을 부릅뜨고 쓸개를 부풀며 분연히 몸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폐하를 위하여 이 일을 계획하는 자가 없으니, 이러고서도 나라를 경륜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오리까?

신은 듣건대, 옛날의 훌륭한 장수는 까마귀를 보고서도 제(齊) 나라 군사가 이미 도망간 것을주D-020 알았고, 쌀을 모아 놓고 외효(??)를 무너뜨릴 꾀를 생각해 냈으며, 두 진루의 사이에서 기틀을 결정하여 만 리의 밖에서 일이 맞아 들어갔는데, 지금 정사(正使)는 이미 몰래 도망했고 수행은 이미 피살당했고 심유경은 이미 구속을 당했으니, 왜적의 변화무쌍한 속임수는 그 정상이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처럼 분명한지라 이는 진실로 저(箸)를 빌려 숫대를 하지 않고서도 마땅히 손가락을 꼽아서도 능히 계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석성(石星)은 마침내 미혹을 고집하여 깨닫지 못하고 양방형의 편지를 받자 그것을 마치 시귀(蓍龜)처럼 여기며 왜놈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며 봉사(封事)에 있어 만에 하나 요행을 기대하니, 아! 어리석음이 너무도 심하옵니다.

하물며 신은 양방형의 게사(揭詞)를 자세히 관찰해 보았는데, 오히려 기장(騎墻)주D-021과 같으며 역시 일정한 지론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안무하는 자의 장주(章奏)는 전혀 신빙성이 부족하고 반드시 왜적이 성(城)에 육박하는 것을 보아야만 변했다 하오리까? 시험삼아 오늘의 사세를 관찰한다면, 왜가 변했다 할 것입니까, 변하지 아니했다 할 것입니까? 봉(封)을 말해야 하겠습니까, 봉을 말하지 않아야 되겠습니까? 계획은 돌이키지 못하고 의(義)는 거듭 욕되게 하기는 어려운 것인데, 하물며 왜놈은 천 번 변하고 만 가지 작태를 하여 날로 끌고 달로 연장하니, 궁실이 이미 낙성된 지 오래요 예의도 어찌 익히기 어려우리까? 빛나고 빛나는 금인(金印)을 밑지고 파는 격이요 외롭고 외로운 간정(干旌)은 절(節)이 망가지고 모(?)가 떨어졌으니, 관백의 기관(機關)은 다 드러난지라 심유경이 봉하고자 해도 할 수 없는데, 어찌하여 아직도 봉하는 일을 꿈결에도 그리며 목전만 얼버무려 나가려 하옵니까? 아! 어리석음이 역시 너무도 심하옵니다.

이종성이 밤중에 도망하여 임금의 명령을 욕되게 함으로써 외국의 조소거리가 되었기로 어제 폐하께서 크게 노하시어 심문하게 하시니, 천위(天威)가 한 번 진동하매 중외(中外)가 기운이 났거니와, 사신으로 나가는 것은 중한 소임인 것입니다. 옛날에 반초(班超)가 서쪽으로 나가서 한(漢)의 중경(重輕)이 되었는데, 어찌하여 당시에 아이들의 희롱과 같이 보고서 한 낱 수자(?子)로 하여금 명을 욕되게 하여 이같이 외국에 경홀함을 취하였으니, 이로고도 오히려 중국에 사람이 있다 하오리까? 소서비(小西飛)가 왔을 적에 엄연한 상빈(上賓)으로 온 나라가 정중히 대우하여 공적으로는 잔치와 상을 내리고 사적으로는 증유(贈遺)가 있어, 낭자(狼子)의 야심으로 하여금 활개를 치고 거닐 때 얼굴을 쳐들고 노려보며 방약무인의 태도로 나와 마침내는 사례도 아니하고, 또 3일 동안 시(市)를 벌여 욕망을 채우고 가게 하였는데, 우리 당당한 천사는 어명을 받들고 가서 굴욕을 당하고 옥에 갇히기까지 하여 세월을 보내면서 초수남관(楚囚南冠)주D-022으로 무료하기 짝이 없으며, 산 자는 쥐처럼 숨고 이리처럼 달아나고 죽은 자는 칼날에 기름칠하고 풀밭에 비끼었는데, 조그마한 추한 놈들이 감히 무상하기가 이와 같으니, 신은 매양 생각이 이에 미치매 저도 모르게 성난 머리칼이 관(冠)을 찌르며 이 추악한 놈들을 없애고서 조식(朝食)을 먹지 못하는 것을 한하옵니다.

옛날 춘추시대에는 작은 나라의 임금도 오히려 능히 옷소매를 던지고 일어나서 죽은 자를 위하여 한 번 부끄럼을 씻었으며, 진탕(陳湯)은 질지(?支)주D-023가 한(漢) 나라 사자를 살해한 것을 분히 여겨 의리와 용맹으로 분발하여 마침내 질지의 머리를 베고 변방 관리의 묵은 수치를 씻어 위엄을 오랑캐에 떨쳤사온데, 지금 천조(天朝)의 융성한 힘을 가지고서 어찌 그리 왜놈을 두려워하기를 범과 같이 여기어 억지로 봉을 하여 국가가 반드시 회복하기 어려운 수치를 끼치는 것이옵니까?

신이 적이 생각하오면, 오늘날 왜놈의 정세는 봉하지 아니하면 확실히 변할 것이요, 즉시 봉한다 해도 또한 변할 것이니, 그러므로 황급히 봉을 논의하는 것은 졸렬한 짓이요, 급급히 싸움을 논의하는 것은 위태로운 짓이며, 오직 지키는 것은 논의하는 것만이 오늘날의 제일 긴요한 승산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은 듣건대, 봉을 논의하는 시초에 벌써 이미 통상을 허락했으니 대체로 봉은 유명 무실할 따름이요, 통상은 후한 실리라서 왜놈의 욕망이 유명 무실에 있지 아니한 것이 너무도 분명한데, 우리가 그들의 욕망을 채워주기를 아끼고 욕망하지 않는 것을 준다면 이는 어린 아이에게 돌대추[石棗]를 주면서 울음을 달래는 격이라 그 울음이 반드시 그치질 않을 것이니, 졸렬한 짓이라는 것입니다. 또 왜놈에게 분이 난 자는, ‘마땅히 급히 군사를 징발하고 군량을 조달하여 빠른 전함으로 동쪽을 향해 들어가서 왜놈과 더불어 하루 아침의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 이르는데, 이도 계책이 아닙니다. 병(兵)이란 흉한 일이요 전쟁이란 위태로운 것이어서 일을 미리 기필하기 어려우니, 만약에 조금만이라도 여의치 않다면 벌과 개미도 오히려 떼를 모으면 며칠을 가식(假息)하는 법인데, 둔병(屯兵)의 하루 동안 비용이 어찌 만금(萬金) 뿐이겠으며 천 리의 먼 길에 군량을 조달해 온다 해도 그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평양의 전쟁에서 요동 백성이 운반하다 죽은 자가 열 집이면 아홉 집이 되어 지금까지도 울음 소리가 끊어지지 아니하니, 곧 곡식이 산같이 쌓여 있다손치더라도 어느 귀신이 그것을 운반하여 주린 군사의 입에 넣어주게 되겠습니까? 한 지아비가 주린 기색이 혹시 나타나면 삼군(三軍)이 다시 싸울 뜻이 없게 되는 것이니, 만일 일이 잘못되는 날이면 후회한들 소용이 있사오리까? 이러기에 신은 위태로운 짓이라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 있어서는 오직 조선을 지키는 것만이 상책이 된다는 것이니, 조선은 우리의 울타리입니다. 조선을 잃어버리면 요양(遼陽)이 위태롭고 요양이 위태롭게 되면 황성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조선은 당연히 포기해야 한다’고 이르는데, 이것은 틀린 말입니다. 신은 적이 생각하기를, 봉의 일은 성립되지 않아도 되지만 조선은 기필코 포기해서는 안 되며, 하물며 조선은 비록 파괴되었지만 오히려 정병 5만 명이 남아 있으니, 오늘에 와서는 가까운 날짜에 빨리 싸움에 익숙하고 용맹스런 장수를 뽑고 날랜 군사를 정히 뽑아서 조선의 군사와 합세하고 조선의 식량을 인용하여 호월(胡越)이 배를 함께 탔다가 서로 구원하듯이 하여 힘을 합하여 사수를 해가는 것 만한 것이 없으니, 이것이 이른바 울타리를 잘 지켜야 문정(門庭)의 평안을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급박하여 호흡간에 달려 있으므로, 장수를 뽑고 군사를 뽑는 것을 마땅히 반달로 기약을 삼아야 하며 이에 벗어나면 늦을 것이니, 이는 조선을 왜놈에게 넘겨주는 것이라, 파착(破着)입니다. 오직 조선은 약해서 능히 부지하지 못하고 우리 군사는 급해도 구하지 못하니, 채찍의 길이는 말의 배에 미치지 못하고주D-024 바람의 말세(末勢)는 기러기 터럭을 들지 못한다는 격이라, 비유하자면 돌밭과 같아 버리자면 계륵(鷄肋)과 같으니, 압록강을 끼고서 산 언덕을 등지고 범이 앉듯이 하여 참호를 깊이 파고 성루를 높이 쌓고 군사를 더 투입하고 수자리를 증설하여 굳건히 지키고 움직이지 아니해서 왜놈으로 하여금 감히 왼발 한 자국도 옮기지 못해서주D-025 먼저 오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문정의 지킴이라 이르는 동시에 당오(堂奧)의 편안을 기대할 수 있으니, 중책(中策)으로서 반드시 부득이한 계획입니다.

가장 근심되는 바는 혹시 거센 바람이 불어오면 큰 물결을 막아내기 어렵듯이 문에는 결초(結草)주D-026만큼도 견고함이 없어, 저 파죽의 형세를 이루어 호랑이 실내로 들어오면 상하는 것이 반드시 많을 것인데, 하물며 병화가 연결되고 역사는 번거롭고 백성이 수심하면 간웅이 그 틈을 타서 높은 데에 올라 멀리 외칠 것이니, 그렇게 되면 사방이 호응하고 근본이 동요되어 관계됨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양을 지키는 것은 하책(下策)이 되며 꾀한 것이 없다 해도 가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형세는 눈썹이 타는 아주 급박한 처지에 있어 급하기가 손가락을 뒤집는 것과 같으니, 머리털을 풀어 헤치고 발로 뜀박질해도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걱정될 것입니다. 만약 석성(石星)이 종시 미혹하여 깨닫지 못하고 강퍅하여 반성하지 못하며 말 위에서 남의 콧김만 우러러 보고 머뭇거리는 사이에서 필설(筆舌)만 허비하여 종경에 나라를 그르치면 후회한들 미치오리까?

비록 그러하나 신은 오히려 할 말이 있으니, 비수(?水)에서 진(秦) 나라 군사를 물리친 것은 묘당(廟堂)의 처분이 이미 결정된 데에서 말미암았고, 하북(河北)에서 당나라 영(令)을 품한 것은 조정의 처치가 적의함을 얻은 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봉사(封事)의 무너짐에 있어서는 석성이 진실로 죄가 용서할 수 없사오나 죄의 괴수는 곧 보신(輔臣) 조지고(趙志皐)입니다. 옛날에 송(宋) 나라 신하 여몽정(呂蒙正)이 사방에 일이 없고 오랑캐가 모두 복종한 것으로써 스스로 정승의 업이 다 된 것을 점쳤고, 역경(?瓊)이 반란에 장준(張浚)은 고종(高宗)을 뵙고 허물을 자인하며 아뢰기를, ‘이는 비천한 재주의 신이 나라 일을 그르쳐 위로 성상께 근심을 끼쳤습니다.’ 하셨사온데, 신은 듣자오니, 동사(東事)의 시초에 지고가 종사의 대계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적인 교분만 생각하여 동향인 송응창(宋應昌)을 불러다 써서 거의 공사(公事)를 무너뜨렸습니다. 이에 앞서 대신(臺臣)곽실(郭實)이 상소하여 그 불가함을 역설함으로써 말이 지고에게 미치자, 지고는 분하여 이를 갈고 한을 품어 결국 쫓아내니, 형부 시랑송홍모(宋鴻謨)가 남도(南都)로부터 서한을 보내어 책하였는데, 그 사연이 엄하고 의리가 바른지라 지고는 몹시 불평을 말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 말을 들었습니다. 이제 와서 보면 곽실의 말이 맞았습니까, 맞지 아니했습니까? 지고가 또 장차 누구를 핑계하려는 것입니까? 무릇 송응창에 대해서는 온 나라가 모두 등용해서는 안된다고 하는데 지고는 유독 등용해도 좋다고 하였고, 동왜(東倭)를 봉하는 일은 온 나라가 모두 불가하다 하는데 지고는 유독 봉할 만하다 하여, 힘껏 공의(公議)를 배격하고 석성에게 아첨하여 이와 같은 화의 발판을 만들었으니, 실로 괴수가 되는 동시에 지고의 나라를 그르친 죄상은 석성보다 못하지 아니하옵니다. 하물며 힘을 다하여 반열에 나아가되 능하지 못하면 그치는 법이요, 종이 울리고 누(漏 물시계)가 다하면 밤의 출행이 모두 쉬는 것이니, 지고 같은 자는 자신을 돌아보고 분수를 헤아려서 마땅히 만족할 줄을 알았어야 할 것이온데, 겉으로는 궁궐을 향한 연정을 칭탁하고 내면으로는 자손의 걱정에 깊어서 노쇠한 힘을 끌고서 부끄러움 없이 열에 나아가고 염치라고는 조금도 없으니, 그 예(禮)는 어찌하자는 것입니까? 예경(禮經)에 이르기를, ‘70세가 되면 치사(致仕)한다’ 하여, 이것이 고금의 공통적인 유례이온데, 근래에 와서는 탐욕과 경쟁이 그치지 아니하니, 신은 직책이 바로잡는 것을 맡았사온데 이것을 방치하고 묻지 아니한다면 호리(狐狸)를 어찌 묻겠습니까? 탐욕을 밝히고 경쟁을 깨우치는 것을 마땅히 곽외(郭?)주D-027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사옵니다.

신은 듣자온 즉, ‘자애로운 부모는 무익한 자식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현명한 군주는 무용한 신하를 사랑하지 아니한다’ 하오니, 지고나 석성 같은 자는 이른바 무용한 신하이거늘, 폐하는 또 어찌 이들의 무용한 신하를 사랑하여 나라 일을 그르치시옵니까? 비유하자면, 용렬한 의사가 병을 다스리는데 그 약을 잘못 복용하게 하여 다행히 죽지 아니하였으나 어찌 거듭 잘못 복용케 하겠습니까? 황상께옵서 차마 죄를 가하지 못하실진대 이 두 신하에게 치사(致仕)하고 물러날 것을 명령하시고 특별히 도덕이 넓게 갖추어져 있고 변방 정세에 숙달한 자를 선발하여 교대하시옵소서. 신은 이 신하와 더불어 무슨 원혐이 있어 모함하는 꾀를 하는 것이 아니오라 오직 이 시국의 일이 다난하여 장수나 정승을 좋은 사람으로 내는 것이 가장 급선무이기 때문에 원혐을 회피하지 아니하고 죽음을 무릅쓰고 주달하여 우리 국가의 만분의 일이나마 도움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황상께서 정신을 쏟으시와 성찰하여 주시오면 사직의 다행이옵고 종묘의 다행이옵니다. 신은 매우 가누지 못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며 명을 기다리옵니다.

성지를 받들은 바, ‘알았다’ 하고, 곧 구경(九卿)ㆍ와도(科道)로 하여금 모여서 싸우느냐 지키느냐에 대한 알맞은 처사를 의론하여 후회를 까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니, 병부에서 복의하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정사(正使)이종성(李宗誠)이 도망해 돌아와서 명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이미 체포하여 하옥하였으니, 마땅히 다시 그 대리할 후임자를 내서 봉하는 일을 완결짓도록 해야 하오며, 싸우느냐 지키느냐에 대한 알맞은 처사는 봉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를 기다려서 다시 상의하는 것이 마땅하옵니다.

성지(聖旨)를 받들기를,

“옳다. 기개가 출중한 과신(科臣) 한 사람을 뽑아서 양방형과 더불어 책봉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우첨도어사 조학정(曹學程)이 상소하여 왜의 정세가 이미 변했으니, 봉하는 일을 마땅히 정지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 소장은 다음과 같다.

근자에 봉에 대한 일이 크게 무너져 발언이 조정에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종성이 달아나고 유경이 포박을 당하고 종신(從臣)이 살육을 당한 것으로 보아 요양(遼陽)의 정보는 헛되지 아니했고 책사의 게첩(揭帖)이 잇달아 왔습니다. 지난 번에 성지를 받들은 바, 대사형(戴士衡)ㆍ주공교(周孔敎)의 상소를 윤허하시와, ‘구경ㆍ과도로 하여금 싸우느냐 지키느냐에 대한 알맞은 처사를 모여서 의론하여 후회를 끼침이 없도록 하라’고 하셨으니, 이는 황상께서 봉사(封事)의 그른 점을 뚫어지게 보시고서 중론을 결정하신 것이옵니다. 또 성지를 받들은 바, ‘또 기개가 출중한 과신 한 사람을 뽑아서 양방형과 더불어 책봉하도록 하라’ 하셨으니, 이는 황상께서 또 양방형의 게첩에 의혹되시어 봉사가 성립될 수 있다고 이르시는 모양이오나, 석성과 방형은 한 통속으로 서로 서로 부화뇌동하여, 그 사연이 족히 신빙하지 못함을 어찌 아시오리까? 더구나 세 신하가 함께 이역에 봉사(奉使)하여, 종성은 도망해 나왔고 유경은 포박을 당했는데 왜놈이 어찌 방형에게만 덕을 보여 홀로 안연히 아무 일도 없단 말입니까? 방형이 또 죽을는지 모르는데 책사를 첨가해 줄 것과 뜬소문을 금지시킬 것을 청하였으니, 곧 삼척 동자라도 역시 그것이 간사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본병(本兵)이 잘못 꾸며대서 폐하를 속인 것이 아니라면 반드시 교활한 왜놈이 계교를 마련하여 중조(中朝)를 모함한 것이오니, 신은 바라옵건대, 폐하는 자상히 살피시고 익히 계획하시옵소서.

본병이 요동 안무의 통보를 보고 뜬 소문이라 이르지만, 지금 책사 이종성의 게첩도 장차 신빙하지 못한단 말입니까? 왜의 사정이 이미 변했는데도 오히려 변하지 않았다 이르며, 봉사가 이미 무너졌는데도 오히려 성립될 수 있다 하여, 적신(賊臣)이 나라를 그르침이 한결같이 이와 같으니 내가 누구를 속이겠습니까? 하늘을 속일 것입니까?

이제 이종성의 게첩에서 한 말에 의거하면, 관백이 심유경을 잡고 일곱 가지 일을 요구하였다 하였는데, 본디 봉을 위한 것이 아님을 비록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았으나 모두가 증거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놈이란 속임수가 비상하고 탐욕이 끝이 없으니, 봉을 얻되 마지 아니하고 반드시 들어와 공할 것을 요구하며, 입공(入貢)하되 마지 아니하고 반드시 호시(互市)를 요구할 것이요 호시하되 마지 아니하고 반드시 화혼(和婚)을 요구할 것이요, 화혼하되 마지 아니하고 반드시 조선의 납세를 요구할 것이요, 납세하되 마지 아니하고 반드시 땅덩이를 갈라 달라 할 것이요, 땅덩이를 갈라주면 마지 아니하고 반드시 조선을 석권하고 압록강을 건너서 요계가 위태로울 것입니다. 왜의 정상이 드러난 것은 오늘날을 기다려서가 아니라 송응창이 경략이 된 처음 이여송(李如松)이 구원차 들어갔을 때와 심유경이 왜국에 봉사(奉使)하던 날부터 이미 더불어 맹약의 피를 입에 발랐으니, 곧 일곱 가지 일을 전부 다 허락하지 아니했을지라도 벌써 그 두세 가지를 가볍게 응락한 것이며, 고양겸(顧養謙)의 봉공(封貢)에 관한 한 장의 소장과 이여송이 심유경에게 준 한 장의 서찰을 보면 정상이 무너진 것이 유경이 사로잡혀 간 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용광(朱龍光)이 죽지 못한 그 먼저 날에 발각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조선과 일본은 조그마한 배 하나로서 항해할 수 있사온데, 길고 긴 1년 여에 어찌 한 번 결단하기 어렵겠습니까? 이는 그 연고가 한가지 봉하는 일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일곱 가지 일이 어려워서였으니, 분별하지 아니해도 가히 알 것입니다.

무릇 당당한 천조로서 도리어 왜놈에게 견제되고 고귀한 천사로서 마침내 잡혀 갇히게 되었으며, 더욱 분명히 할 것을 더욱 미봉하고 더욱 소상하게 할 것을 더욱 말 못하게 되니, 이 때문에 충의의 선비가 밤낮으로 가슴을 치고 서로 돌아보며 봉사를 그만두고 공격과 수비를 결단하며 간신의 머리를 베어 천하에 갚자는 것이온데, 마침내 나라를 그르치는 적신이 안팎으로 깊이 결탁하여 종시 집요하며 달콤한 마음으로 왜놈에게 아양을 부린단 말입니까?

폐하께서는 유독 남송(南宋)의 지난 일을 열람하시지 아니하셨습니까. 진회(奏檜)와 사미원(史彌遠)이 화친을 주장하여 종경에 송 나라 운수를 옮기게 하였으니, 전거(前車)가 이미 전복되었으매 한심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봉사의 그른 점은 온 조정에서 불가하다 여기는데 종성이 이미 그르쳤으니, 거듭 그르칠 수야 있사옵니까? 과신이 공격하자 곧장 과신으로서 가서 봉하라 하니, 이것은 적신이 깊은 꾀로 농락하여 일이 이루어지면 공을 자기에게 돌리고 이루어지지 못하면 허물을 과신에게 돌리자는 것이라, 이 때문에 과신이 차라리 혹형을 받을지언정 감히 조명을 받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하가 군주에게 예물을 바치고 신하가 된 이상에는 동서 남북을 막론하고 오직 시키는 대로 할 따름이라 죽음 또한 피하지 아니하는 법이온데, 어찌 감히 어렵다고 회피하여 충성을 못하는 것이 되겠사옵니까? 다른 날에 일이 이루어질 것 같으면 오히려 종국을 맺을 수 있거니와, 만약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여 심지어 잡아서 볼모로 삼고 봉(封) 밖에 딴 것을 요구한다면 곧 과신(科臣)은 소무(蘇武)의 절개를 지키고, 안진경(顔眞卿)의 의리를 본받을 것이며, 반드시 종성 같이 머리를 싸매고 쥐가 숨듯이 하여 국가의 수치를 끼치고 크게 국가의 위신을 손상하며 교활한 왜놈에게 기운이 꺾여 만년에 더러운 냄새를 풍기는 짓은 하지 아니할 것이니, 신은 적이 슬퍼하는 바입니다.

오늘날의 사세를 위하여 꾀한다면 과신이 가서 감정한다는 것은 옳거니와 가서 봉한다는 것은 옳지 아니하오며, 만약 성사할 만하면 책(冊)을 싸가지고 바다를 건너가고 성사되지 못할 것같으면 깃대[節]를 가지고 조정으로 돌아와서 임금의 명령을 보기를 아이들의 희롱처럼 여기고 책사로서 유세객이 되어 나라를 욕되게 하고 임금을 속이면 죄가 더 큰 것이 없으리니, ‘일이 이루어지면 공이 돌아갈 것이요 이루어지지 못하면 책임도 역시 전가하기 어려울 것이라’ 하신, 황상의 말씀이 빛나고 빛나서 밝은 해와 같이 나타났는데, 오늘의 봉사는 이루어졌습니까, 무너졌습니까? 언관의 지론이 맞았습니까, 맞지 않았습니까? 폐하께서 군국(軍國)을 품평하여 처리하는 일을 원보(元輔)에게 기탁하시고 기무(機務)를 참작하여 돕는 일을 추신(樞臣)에게 맡기셨으니, 천하의 일은 한 집안의 사사로운 일이 아니온데, 어떤 까닭으로 편벽되게 고집한단 말입니까?

석성은 괄괄하여 제 의견만 세우고, 지고는 용렬하여 아첨을 잘하므로, 석성은 ‘관백을 봉해야 된다’ 하면, 지고도 ‘관백을 봉해야 한다’ 하며, 석성이 ‘재차 과신을 보내야 된다’ 하면, 지고 역시 ‘재차 과신을 보내야 된다’ 하여, 오늘날의 왜를 책봉하자는 사신은 바로 옛날의 자기를 배격하던 사람입니다. 옛날에 위학증(魏學曾)이 충심으로 일을 책임지고 특이한 공을 나타내지 못하매 폐하께서 학증에게 엄한 꾸지람을 내리시어 영하(寧夏)에서 마침내 탕평(蕩平)을 아뢰었으니, 지금 동왜(東倭)의 일이 결렬된데 대하여 원보와 추신이 그 책임만은 사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신의 유임 여부와 책사의 출행여부는 사직의 안위가 이 한 가지 거조에 달렸사오니, 삼가 바라옵건대 폐하께서 익숙히 살피시와 결단을 내리시오면 온 천하가 다행이옵니다.

천자가 이에 크게 노하여 조정의 신하가 명령을 회피하고 항거한 것을 책하여 조학정(曹學程)을 하옥시켰다. 그리고 양방형을 책봉정사로 보충함과 동시에 심유경을 신기영(神機營)의 직함까지 가해서 부사로 삼았다. 얼마 안가서 유경이 비로소 행장과 더불어 일본으로부터 돌아왔고, 또 서생포(西生浦)ㆍ죽도(竹島) 등지의 둔병을 철수하고 그 철수하지 못한 곳은 부산의 4개 둔병 뿐이었다.
심유경이 부사로 승진되자 인하여 지모를 마음대로 구사하여 교묘하게 봉사를 완결 짓고 석 사마(石司馬 석성)를 손바닥에 놓고 농락하니, 이때에 천조의 논의가 더욱 격렬하였다. 원임 태부태자태사 건극전태학사 겸이부상서 신시행(申時行)이 치사하고 고소(姑蘇)에 물러나 살고 있었는데, 혹자가 시행에게 묻기를,

“봉사가 무너질 것 같은데, 계책이 장차 어디서 나올 것인가?”

하자, 시행은 대답하기를,

“조선은 진실로 속국이다. 그러나 국가에서 그 강토를 차치하지 아니하고 그 조세를 징수하지 아니하니, 내지와는 형편이 다르다. ‘무신(戊申)에 허(許)에 수(戍)하다’ 한 것은 《춘추(春秋)》에서 기롱한 바인데, 천조로써 외국에 수(戍)하는 일이 어찌 있을손가? 조선이 능히 자력으로 지켜나간다면 우리는 군사와 군량을 도와서 소국을 구원하는 인덕을 보임으로써 족하며 혹은 일본에 고유(告諭)하여 군사를 파하게 하는 것도 가하다.”

하였다. 이윽고 들으니, 조정에서 사람을 보내어 왜국을 타이르니, 왜장은 각기 군사를 끌고 부산으로 돌아가고 왕경 및 사로잡았던 왕자를 조선으로 돌려보내며 궤변으로 농락하기를,
“천조에 조공을 바치고자 하는데 조선이 중간에서 막으므로 군사를 일으켜 싸움을 벌였다.”

하여, 이로 말미암아 봉공의 의론이 일어난 것이다. 묘당에서 만약 주지가 있다면 그 봉만을 허락하고 그 공일랑 물리쳐야 하며, 곧 그 쪽에서 사신을 보내올지라도 마땅히 요진(遼鎭)의 무신(撫臣)으로 하여금 사실을 살펴서 대주(代奏)케 한 뒤에 봉을 허락하며 그 표문이 온 뒤에 사신을 보냈어야 마침내 체모를 잃지 않는 것이 되는데, 지금 소서비는 왜장 행장의 한 서기(書記)에 불과하거늘 본병이 삼대영(三大營)ㆍ신기영(神機營)의 군사를 풀어서 길에 진열하고 영접하였고, 대가(大駕)를 청하여 오문루(午門樓)에 납시어 인견하게 하였으니, 역시 몹시 체통을 잃은 것이다. 경사의 백관과 군민(軍民)이 분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는데 본병은 의기 양양하여 스스로 좋은 꾀를 얻은 양하였다는 것이다. 또 양사의 신으로 하여금 관복을 싸가지고 가게 하였는데, 관백이 오히려 알지 못하고 있고, 사신은 반년 동안을 머물러 기다리며 본병은 스스로 자기 종을 보내어 가서 염탐하게 하려 했으나 마침내 명을 얻지 못하고 유언비어는 사방에서 일어나며 또 사신이 당황하여 도망해 돌아왔으니, 나라 일을 그르쳤을 뿐만 아니라 나라를 욕되게 한 것이다. 이를 생각하면 팔을 걷어 붙이고 분격하며 깊이 탄식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때에 심유경(沈惟敬)은 명령을 받은 이후로 또 우리 나라로 하여금 그 일행에 사신을 딸려 보내어 수길에게 통신토록 하고, 행장 역시 말하기를,

“천조에서 이미 책봉했는데도 조선에서 만약 사신을 보내지 아니한다면 이는 유독 천조에서만이 화친한 것이다. 그러니, 기필코 조선의 사신이 참여해야만 화친이 이루어질 수 있다.”

하였다. 유경은 우리 사신을 요청하기를 심히 부지런히 했고, 또 반드시 동행시키고자 하여 그 조카 심무시(沈懋時)를 보내어 재촉하니, 조정에서 우물쭈물 대답하고 결정적인 말을 하지 아니하였다. 두 천사(天使)는 6월 16일에 먼저 바다를 건너가서 잇달아 사람을 보내어 우리 나라 사신이 들어오기를 재촉하며 심수시와 평조신(平調信)을 머물러 두고 재촉하게 하였다. 그래서 접반사 황신(黃愼)은 조정에 장계하기를,

“만약 사신을 보내지 아니할 지경이면 마땅히 명백하게 끊어서 결단코 보낼 수 없다는 이유를 보여 주어야 하옵니다. 지금과 같이 머뭇거리고 있다가 만일에 사기(事機)가 급박하게 되는 날이면 반드시 후회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조정에서 자못 그렇게 여기기는 했으나 역시 오래도록 결단하지 못하였다. 심무시는 또 사람을 보내어,

“반드시 사신과 더불어 함께 가고 싶다.”

고 말하니, 조정에서는 마지못하여 장차 사신을 보내기로 하였으나 오래도록 차임하여 내보내지 못했는데, 급기야 왜적이 노한다는 말을 듣고서야 장차 무신 이봉춘(李逢春) 등으로서 배신을 수행한다 칭하여 응하기로 했다.
대개 유성룡이 임진년 초격(草檄) 중의 말로 인하여 입을 다물고 있은 지 이미 오래였으나, 이번 사행(使行)에 있어서는 황신을 보내고자 하는데 황신이 노고한 나머지라 지금 또 황신을 쓴다는 것은 여러 사람들이 불가하다 할 것 같아서 겉으로는 다른 사람을 찾는 듯이 하고 있으나 속셈으로는 실로 황신에게 있었다. 그래서 마침내 아뢰기를,

“지금 사세가 이미 급박하였사오니, 반드시 적의 정세를 자상히 아는 자를 얻어야만 탈이 없을 것이온데, 황신이 명민하고 담략이 있으며 또 평탄하건 험하건 한결같이 변하지 않는 절개를 지녔으니, 지금으로 보아서는 이보다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 청컨대, 황신을 돈녕도정으로 승격시켜 통신정사(通信正使)로 삼고, 대구 부사(大邱府使)박홍장(朴弘長)을 부사로 삼으시옵소서.”

하였다.
황신은 왜적의 진영에 머문지 이미 2년이었는데, 이에 이르러 또 이 명령이 내리니, 조야에서 기가 막혔는데, 황신은 조금도 싫어하는 빛을 나타내지 아니하고 행장을 챙겨 길을 떠날 계획을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서로 탄식하며 성룡을 곧게 여기지 아니하였다. 황신이 명령을 받은 그 이튿날에 평조신(平調信)이 와서 황신을 보고서 하는 말이,

“우리가 2년 동안 상종하여 정의가 심히 돈독한데, 하물며 지금 장차 바다를 건너 동행하게 되었으니 이런 다행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하고, 인하여 황신에게 묻기를,

“귀국에 박동량(朴東亮)이란 사람이 있습니까?”

하니, 황신은 있다고 대답하자, 조신은 말하기를,

“그 재주와 위엄과 덕망이 공과 더불어 어떠합니까?”

하므로, 황신은 말하기를,

“나와 비슷할 것이나 나보다 나은 점도 있을 것이다.”

하였다. 조신은 말하기를, “국왕께서 총애로 신임하십니까?” 하므로, 황신은 말하기를,

“국왕께서 여러 신하에게 무슨 경중을 두시겠는가?”

하자, 조신은 웃으며 하는 말이,

“공의 이번 걸음은 실로 동량을 대신해서 가는 것입니다.”

하니, 황신은 말하기를,

“어찌 그렇겠는가?”

하매, 조신은 말하기를,

“우리들도 귀국의 사정을 자상히 압니다. 통신사를 선임하려 할 적에 한 재신(宰臣)이 집정하는 이의 집에 가서 누가 마땅한가를 의론하는데 그 재신이 말하기를, ‘금번 통신의 사행에 있어서는 적합한 자가 매우 드문데, 박동량이 나이 젊고 총명하며 자세히 논박하기를 좋아하므로 조정에서 자못 시끄러워 불안하니, 이 사람이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집정은 웃으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국왕께서 총애하고 신임하시는 자라 비록 청해보았자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고, 황신이 현재 왜적의 진영에 있으니, 그 길이 심히 편의하며 또한 시끄러운 점에 있어서도 그 사람보다 더합니다’ 하였답니다. 이 때문에 공이 이 소임을 얻은 것이니, 우리들에게는 다행이지만 공에게는 불행이십니다.”

하였다. 그 후에 들으니, 이조 판서김응남(金應南)이 유성룡의 집에 가서 상의한 말이었다.
문정공(文貞公)신흠(申欽)이 시를 지어 황신에게 주었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박옥이란 본시 값이 없지만/天璞本無價
버리면 보통 옥돌과 섞이고/棄之混凡珷
향기로운 혜초는 숲 속에서 뛰어나지만/芳蕙擢叢林
때로는 잡초와 함께 더럽혀지네/穢或用榛?
뭇 여인은 곱게 뵈려 시새우는데/衆?咸逞媚
조용하고 어여쁜 여인은 언제나 홀로라네/靜姝長獨居
어여쁜 자태 아름답지 않으랴마는/??豈不佳
궁중에 들어가길 머뭇거리네/入宮且??
시대가 혼란하여 공 세우기 어렵고/時屯難樹功
세상이 흐릴수록 참 사람 보지/世濁方見人
굳은 절개 진실로 스스로 세웠고/貞固信自植
빼어난 재주 일찍이 제대로 폈다네/英?夙能伸
대호(大狐)는 천묘에 우글거리고/封狐竟千畝
독사 또한 사방에 쌓였으니/?蛇亦??
몸 붙일 곳이 이다지도 어려워서/誠知托身難
갈림길에 슬픔이 한층 더하누나/岐路增悲辛
즐거운 때가 너무도 짧았거니/爲歡諒苦短
작별이란 참으로 쉽지 않구려/作別嗟未易
고독한 지조 어찌 끝내 막히겠나/孤堅?終窒
화락한 그대 귀신이 응당 도와주리/愷悌神應以
느껴워 돌아가는 기러기를 바라보며/慨焉眷歸鴻
노래를 지어 애오라지 뜻을 부치노라/徵歌聊寄意
더운 햇볕 어느덧 서늘한 저녁인데/朱徽庵夕?
고이고이 정든 임을 기다립니다/娟娟佇我思

황신은 빨리 떠나려고 했으나 국서(國書)가 도착하지 아니하여 머물러 기다리기를 자못 오래했다. 천조 사람이나 우리 나라 유식자들은 모두 화친의 일이 성립되지 않을 것을 근심하였는데, 병부의 의사가 심히 굳건하여 마침내 명을 욕되게 하고 능히 결말을 짓지 못하였다.
만력 21년 계사년 4월로부터 24년 병신년 7월까지 이르렀으니, 통계 4년이다.

 

재조번방지 2(再造藩邦志 2)

재조번방지 2(再造藩邦志 2)

○ 또 전군도독부 도독 동지가태자소보(前軍都督府都督同知加太子少保)이여송(李如松)을 흠차제독 계요보정 산동등처 방해어왜군무 총병관(欽差提督?遼保定山東等處防海禦倭軍務摠兵官)으로 삼아 3개 영장을 거느리고 전진하여 정벌하게 하였다.
이여송(李如松)은 호는 앙성(仰成), 요동(遼東)철령위(鐵嶺衛) 사람이다. 아버지는 태자태보 중군도독부 좌도독 광녕총병관 영원백(太子太保中軍都督府左都督廣寧摠兵官寧遠伯)이성량(李成梁)이다. 이성량의 조부는 본래 우리 나라 이산군(理山郡) 사람으로 독로강(禿魯江)에서 살았는데, 어떤 일로 사람을 죽이고 부부가 철령위로 도망쳐 들어가서 그대로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변방에서 공을 세워 비로소 유격장군이 되었다. 이성량은 음직으로 지휘사가 되고, 오랑캐를 쳐부순 공으로 험산참장(險山參將)이 되어 땅 천리를 개척하여 오보(五堡)를 세워서 훈작(勳爵)을 받게 되었다. 이성량은 천성이 침착하고 엄숙하며, 지모가 많고 전투를 잘하며, 오랑캐들이 두려워하고 심복하여 생사당(生祠堂)을 세워 사모하였다. 이여송의 아우 여백(如栢)ㆍ여장(如樟)ㆍ여매(如梅)ㆍ여오(如梧)ㆍ여정(如楨)이 모두 벼슬이 총병에 이르러 금의옥대(錦衣玉帶)가 집안에 번쩍이고, 막사(幕士)나 가정(家丁)으로 도독 및 2품의 장군이 된 자 10여 명이 굽실거리며 성심으로 섬겨 노예와 같으니 세상에서는 분양왕(汾陽王)곽자의(郭子儀)에게 비유하였으며, 또 당시의 명장 남당(南塘)척계광(戚繼光)과 명성이 비슷하였다. 그래서 중국 조정에서도 의지하여 동북쪽의 쇄약(鎖?)으로 삼았다. 이여송의 어머니 숙씨(宿氏) 또한 여자 중의 배도(裵度)ㆍ곽자의(郭子儀)였다. 장수 집안에 태어나서 변방 일에 잘 알고 천성도 엄정하며, 장사(將士)를 더욱 잘 다스렸다. 요진(遼鎭)에 있을 적에 해마다 한 번씩 철령위에 돌아왔는데, 지나는 곳의 요새와 성곽의 완전하고 허술한 것, 군대의 정예하고 피폐한 것, 거마와 깃발의 정숙하고 어지러운 것 등을 살피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모든 진영의 비장들이 부인을 영원백과 다름이 없이 경외하였다. 여섯 아들 중에 다섯이 그의 소생인데 부귀가 모두 지극하였지만 자기 자신은 오히려 여자가 할 일을 지켰으며, 모든 며느리들은 담비갖옷이나 비단옷이 매우 많았지만 그녀의 생일에는 반드시 다 청포(靑布)같은 물품을 바치게 하여, 검소하기에 힘써야 함을 보여 주었으니, 이 또한 학문하는 사대부들도 어려운 것인데, 하물며 부인으로서 이와 같음에 있어서랴. 사람들이 따를 수 없는 일이다. 나이 겨우 40때에 영원백에게 소실을 두기를 권하여 예쁜 색시 왕씨(王氏)를 구해서 바치고는 자신은 여행을 하면서 왕씨로 하여금 사랑방을 차리게 하였다. 또 여러 자녀 및 며느리들로 하여금 왕씨를 자기처럼 대우하게 하고, 만약 조금이라도 마음에 맞지 않게 하면 그 자녀들에게 꾸중하기를 “왕씨는 내가 데려다놓은 사람이다. 왕씨를 업신여기면 이는 나를 업신여기는 것이다. 너희들 마음에 편안하겠느냐.” 하였다. 여러 아들들이 이미 고관 대작이 되었으되 조금이라도 교만하고 사치스러운 자가 있으면 곧 어린애처럼 땅에 엎드려서 매를 맞게 하였으나 감히 방자한 자가 없었다. 딸 하나가 소씨(蘇氏)에게 시집을 갔었는데, 그 남편과 사이가 나쁘자, 어린 아들이 가서 그 누이 편을 들어주었다. 부인이 듣고 크게 성내어, “네가 이미 출가하였으면 이는 집을 나간 사람인데, 너희들이 문벌(門閥)의 성대함을 믿고 도리어 네 남편에게 거만을 피움이 이와 같은가.” 하고, 곧 아들을 불러 뜰에 꿇어앉히고 종아리를 수십 대나 때리니, 그 딸이 울면서 호소하였다. 그러나 부인은 그 말을 듣지 않고, “네가 지금부터는 네 남편과 시부모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면 나를 볼 생각을 말라.” 하였으니, 그 교훈의 엄정함도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이여송 등이 잘 지켜 마침내 큰 공훈을 세웠으며, 부인이 복록을 누리는 것이 모두 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여송은 대대로 장수 집안이어서, 병법을 익히 알고 사람을 사랑하고 어진 선비를 사귀었으며, 용모가 괴걸(魁傑)하고 도량이 너그러우며, 행군하고 진치는 데에는 단속을 적절하게 하니 지나는 곳마다 편하게 여겼다. 신묘년(1591 선조 24) 여름에 토관총병유동양(劉東暘)이 발승은(?承恩) 등과 영하(寧夏)를 점거하고 오랑캐가 반란하여 형세가 매우 창궐하였다. 발승은은 바로 항복한 호인(胡人)발배(?拜)의 아들이다. 부자가 사납고 전투를 잘하여 흉노병을 여러번 패하게 하였으므로 벼슬이 총병에 올라 두 군영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정(家丁) 역시 수천여 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순무도어사(巡撫都御史)당형(黨馨)이 매양 억제하니, 발승은 부자가 달마다 주는 양식을 주지 않는다는 것으로 대중을 격동하여 난을 일으켰는데, 관군이 누차 패하여 버티지 못하였다. 이여송이 총병소여훈(蕭如薰)ㆍ상거경(常居敬)ㆍ심사효(沈思孝)ㆍ요계가(姚繼可)ㆍ마귀(麻貴)ㆍ유승사(劉承詞)ㆍ이여장(李如樟)ㆍ양문부(楊文孚)ㆍ이영(李寧) 등을 거느리고 10만 군사로 소탕해 내니, 곧 이여송의 관직을 도독동지(都督同知)로 승진시키고, 음직으로 자식에게는 금의위 지휘동지(錦衣衛指揮同知)의 관직을 세습시키고, 상으로 은 1백 냥과 대홍저사(大紅紵絲) 4표리(表裏)를 받았는데, 군사를 돌릴 겨를도 없이 또 동쪽을 정벌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래서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경(北京)으로 달려갔다가 그대로 요동을 향하여 모든 장수를 분담시켜 왜를 정벌하였다.
정왜 부총병관서 도독첨사(征倭副摠兵官署都督僉事)이여백(李如栢)을 중협대장(中協大將)으로 삼았다. 이여백은 호는 배성(背城), 제독의 아우인데, 친병(親兵) 1천 5백 명을 거느리게 하였다. 정왜부총병관서 도독첨사양원(楊元)을 좌협장군(左協將軍)으로 삼았다. 양원은 호는 국애(菊厓), 정요좌위(定遼左衛)의 사람이다. 처음에는 송경략(宋經略)중군(中軍)이었는데 끌어와 친병 2천을 거느리게 하였다. 정왜부총병관 도지휘사(征倭副摠兵官都指揮使)장세작(張世爵)을 우협대장(右協大將)으로 삼았다. 장세작은 호는 진산(鎭山), 광동 우위(廣東右衛) 사람이다. 친병 1천 5백 명을 거느리게 하였다. 3영을 나눈 뒤에 모든 장수를 3영에 분속하였다. 흠차협수선부 동로통령 전영병도지휘사(欽差協守宣府東路統領前營兵都指揮使)임자강(任自强)은 자는 체건(體乾), 호는 관산(冠山), 대동(大同)양화위(陽和衛) 사람인데, 선부병(宣府兵) 1천 명을 거느리게 하고, 흠차통령계요 준화참장(欽差統領?遼遵化參將) 이방춘(李芳春)은 자는 응시(應時), 호는 청강(晴岡), 북직례(北直隷)대명부(大名府)평로위(平虜衛) 사람인데, 마병(馬兵) 1천 명을 거느리게 하였다. 그는 말타며 활쏘기가 장기여서 행군하다가 새를 만나면 문득 몸을 뒤집어 달리면서 쏘아 잡았다. 군사를 아주 엄하게 대하고 상벌을 즉시 처결하여 부하들이 애모하였다. 흠차유격장군(欽差游擊將軍)고책(高策)은 호는 대정(對庭), 산서(山西)천성위(天城衛) 사람인데, 마병 1천 명을 거느리게 하고, 흠차통령산동 추반경략표하어왜방해 유격장군(欽差統領山東秋班經略標下禦倭防海游擊將軍)전세정(錢世禎)은 호는 삼지(三池), 남직례(南直隷)소주부(蘇州府)오강현(烏江縣) 사람인데, 마병 1천 명을 거느리게 하니, 호령이 엄정하고, 흠차통령가 호소송조병 유격장군(欽差統領嘉湖蘇松調兵游擊將軍)척금(戚金)은 호는 소당(蕭塘), 산동(山東) 등주위(登州衛) 사람인데, 자칭 남당(南塘)척계광(戚繼光)의 일가라 하고 어떤 이는 그의 손자라 한다. 그에게 보병 1천 명을 거느리게 하였다. 흠차통령선부 중영병유격장군(欽差統領宣府中營兵游擊將軍)주홍모(周弘謨)를 군사 1천 명을, 흠차통령계진 유격장군(欽差統領?鎭游擊將軍)방시휘(方時輝)는 산서울주위(蔚州衛) 사람인데, 마병 1천 명을, 흠차하양 유격장군(欽差河陽游擊將軍)고승(高昇)은 마병 1천 명을 거느리게 하고, 흠차건창 유격장군(欽差建昌游擊將軍)왕문(王問)은 호는 의유(義儒), 의리와 용맹이 남보다 뛰어나고 몸가짐을 매우 바르게 하여 지나는 곳마다 편안하다 하였다. 그는 마병 1천을 거느리게 하였다. 이 아홉 장수는 모두 이여백이 통솔하게 하였다.
흠차통령 요양 원임 부총병(欽差統領遼陽原任副摠兵)왕유익(王有翼)은 호는 심헌(心軒), 하남(河南)언능적(?陵籍) 사람이니, 마병 1천 2백 명을, 흠차통령계진조병 원임 부총병(欽差統領?鎭調兵原任副摠兵)왕유정(王維貞)은 삼만위(三萬衛) 사람인데, 마병 1천여 기를, 흠차의주위 진수참장(欽差義州衛鎭守參將)이여매(李如梅)는 호는 방성(方城), 제독의 아우인데 마병 1천여 기를, 흠차요진 조병참장(欽差遼鎭調兵參將) 이여오(李如梧)는 또한 제독의 아우인데 마병 5천 1백여 기를, 흠차요동 총병표하영 영이병 원임참장(欽差遼東摠兵標下營領夷兵原任參將)양소선(楊紹先)은 전둔위(前屯衛) 사람인데 마병 5천여 기를, 흠차진수요동동로부총병(欽差鎭守遼東東路副摠兵)손수염(孫守廉)은 호는 고촌(古村), 철령위 사람인데, 마병 5천여 기를, 흠차통령보진건준조병 유격장군(欽差統領保眞建遵調兵游擊將軍)갈봉하(葛逢夏)는 마병 2천여 기를 거느리게 하니, 이 일곱 장수를 모두 양원(楊元)이 통솔하게 하였다.
원임 부총병조승훈(祖承訓)은 평양에서 패하여 파직되어 충군이 되었는데 백의로 종군하여 공을 세우게 하고, 흠차통령 절강유격장군오유충(吳惟忠)은 호는 운봉(雲峯), 절강금화부(金華府)의오현(義烏縣) 사람인데 보병 1천 5백 명을, 부총병왕필적(王必迪)은 남병(南兵) 1천명을, 흠차통령 창평우영병참장(欽差統領昌平右營兵參將)조지목(趙之牧)은 마병 1천 기를, 흠차통령남북 조병탁주참장(欽差統領南北調兵?州參將)장응충(張應?)은 마병 1천 5백 기를, 흠차통령 산서영 원임참장(欽差統領山西營原任參將) 진방철(陳邦哲)은 보병 1천 명을, 흠차제독표하 통령대동영병 유격장군(欽差提督標下統領大同營兵游擊將軍)곡수(谷燧)는 대동위(大同衛) 사람인데 마병 1천 기를, 흠차보정 유격장군(欽差保定游擊將軍)양심(梁心)은 마병 1천 기를 각각 거느리게 되니, 이 여덟 장수를 모두 장세작이 통솔하게 되었다. 그 외에도 청용 장관(聽用將官)이 그 부류가 또한 많았다. 유격장군왕수신(王守臣)은 호는 덕헌(德軒), 요동삼만위(三萬衛) 사람인데, 조승훈과 평양을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패하여 돌아갔는데, 이때에 와서 다시 나왔고, 흠차통령 요동조병 기보양영 관전보부총병(欽差統領遼東調兵騎步兩營寬典堡副摠兵)동양정(?養正)은 자는 자충(子忠), 호는 몽천(蒙泉), 요동위 사람이니, 만력 경진년에 무과 진사하였고, 의주에 와서 머물었다. 통령대령영병 원임참장(統領大寧營兵原任參將)장기공(張奇功)은 요동 사람으로 심유경과 서로 사이가 좋았는데, 심유경이 행장(行長)과 서로 만나보고서 행장을 놓아 돌려보냈다는 것을 듣고 발을 구르며 탄식하기를, “만약 한 명만이라도 복병하였다가 잡았으면 군사 한 명 수고하지 않아도 될 것인데, 이런 기회를 놓쳤으니, 애석하다.” 하였으니, 대개 심유경의 본심을 몰랐던 것인데, 이때 와서 마병 1천 기를 거느리고 왔다. 흠차진정 유격장군(欽差眞定游擊將軍)조문명(趙文明)은 마병 1천 기를, 흠차섬서 유격장군(欽差陝西游擊將軍)고철(高徹)은 마병 1천 기를, 흠차통령요동좌영조병 원임 부총병 서도독동지(欽差統領遼東左營調兵原任副摠兵署都督同知)이평(李平)은 호달(胡?) 사람인데, 영원백이성량(李成梁)이 그의 모습을 기이하게 여겨 거두어 자기 아들로 삼았으며, 공을 쌓아 이 관직에 이르렀는데, 마병 8백 기를 거느리게 하였다. 흠차산서 유격장군시조향(施朝鄕)은 마병 1천 기를, 요동도지휘사 사첨사(遼東都指揮使司僉使)장삼외(張三畏)는 요동삼마위 사람인데, 의주에 와서 머물면서 군량과 마초를 오로지 관장하게 하였고 몸가짐을 간략하게 하여 사람들이 매우 편의하게 여겼다. 책사(策士)사용재(謝用梓)는 호는 용암(龍巖), 절강소흥부(紹興府)여요(餘姚) 사람인데, 태학사사천(謝遷)의 손자라 자칭하였는데, 참장낙상지(駱尙志)를 따라 나왔다. 수비(守備)웅정동(熊正東)ㆍ이대간(李大諫) 등도 청용(聽用)으로서 왔다. 대간은 호는 북천(北泉)절강가흥부(嘉興府)수수현(秀水縣) 사람인데, 압록강가에 와 있었다. 또 원임 하간부동지(原任河間府同知)정문빈(鄭文彬)ㆍ산서(山西)노안부(潞安府)호관현(壺關縣)지현(知縣)조여매(趙如梅) 등은 군량과 마초를 전적으로 관장하게 하였다. 조여매는 호는 초암(肖庵), 요동철령위 사람인데, 제독과 가장 친하여 군사(軍事)를 모두 함께 상의하였다. 제독이 부대 편성을 마치고, 세 영장을 전진하게 하고, 또 사대수(査大受)를 선봉으로 삼고, 갈봉하를 행궁 호위의 군사를 대신 거느리게 하고, 제독은 스스로 표하장관 원임 참장 도지휘사방시춘(方時春), 영원백의 가정(家丁)원임 참장이영(李寧), 원임비어(原任備禦)한종공(韓宗功)ㆍ이봉양(李逢陽) 등을 거느리고 잇달아 전진하였는데, 정병이 4만여 명이요 용장이 60여 명이며, 군호를 10만이라 하고 통원보(通遠堡)까지 와서는 유둔(留屯)하고 전진하지 않았다. 조선에서 집의이호민(李好閔) 등을 보내어 제독에게 다음과 같이 정문(呈文)하였다.

조선국 배신(陪臣)사헌부집의이호민(李好閔) 등은 적(賊)의 모계를 헤아릴 수 없고 사세가 더욱 급박하여 빨리 대병을 진출시켜 먼저 힘을 발휘해서 승리를 거두어 주시기를 바라는 일로 말씀드립니다. 이달 13일에 요동도사 군정첨서 관둔 도지휘사(遼東都司軍政僉書管屯都指揮使)장(張)의 패문(牌文)을 받았으며, 흠차경략 계요보정산동 등처 어왜군무 병부 우시랑(欽差經略?遼保定山東等處禦倭軍務兵部右侍郞)송(宋)으로부터 근간에 부총병관(副摠兵官)동양정(?養正)의 품칭(稟稱)에 의하면 왜노가 군사를 거느리고 중화(中和)ㆍ토성(土城) 등지를 침입 점령하였다고 하고, 또 심유경(沈惟敬)의 품칭(稟稱)에 의하면 왜노가 조공 왕래를 청원하고 애걸한다고 하는 등의 정황이 각각 병부에 도착하였습니다. 여기에 의거하면 왜노가 거짓으로 조공 왕래를 빙자하고 비밀리에 토성을 공격하는 것이 분명히 우리 군사를 늦추려는 것임을 알 수 있으니 마땅히 왕래를 금지하고 엄하게 조사 힐문하여야 하기에 이 패문을 올리는 것이니 본관은 조선 국왕에게도 알려서 병마(兵馬)를 긴요한 곳에 많이 설치하여 서로 서로 힐문하게 하며, 만일 심유경 본인이나 혹 그의 보내는 사람, 혹 가정(家丁)으로 저들 주둔지에 있는 자가 평양(平壤)으로 가서 소식을 전하는 것이나, 혹 가솔 가운데 중국으로 달아 돌아오는 자를 만나면 곧 조사 나포하여 병부로 보내어 사실을 캐어 처리하게 할 수 있게 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거듭 유시를 받고, 국왕의 전지도 함께 받들었는데, 그 긴급한 소관사는 이미 경략과 병부의 전령에 의하여 이렇게 시행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요동에 치보(馳報)하고, 본국의 급박한 사정을 들어 제독(提督)과 경략 두 노야(老爺) 앞에 드리고, 빨리 진병(進兵)하여 주시기를 청하게 되어 이 직책을 받들기로 위임을 받고 나왔습니다.

살펴보면 왜적의 흉모가 저희 나라에만 있지 않습니다. 지금 이미 저희 나라를 다 함락하고 평양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형세와 언사가 더욱 어긋나 그 계획이 그만두고 말 것이 아니니, 말 한 마디로 군사를 풀어 돌아간다고 하니 단정코 이럴 이치가 없습니다. 전일 심 유격(沈游擊)이 재차 적진에 가서 저들과 화친에 대한 의논을 하였는데, 그 사실을 비밀로 하여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은폐(銀幣)를 가지고 갔으며 또 10명의 왜노를 대동하고 경사(京師 명나라 서울)로 가는 것을 허락하고, 또 두 관원을 보내어 대마도로 갔으니, 저희 나라 군신들이 모두 해괴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유격은 해를 가리키면서 다른 일이 없다고 하니 그저 믿고 바라는 심정에 감히 의심을 하지는 못하고 이것은 반드시 일을 안전하게 성취하려는 것이라고 하니 천조의 조정 계책도 반드시 저들의 의논을 따라 춘추(春秋)의 수치로 삼는 일을 행하지 않을 것이 보장되므로 의심을 품은 채 믿음을 지키면서 성공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겨울철도 그럭저럭 지나 섣달이 다 가게 되었으니, 적을 토멸할 시기가 이미 십 중 아홉은 잃어버린 것으로 온 나라가 다 같이 민망히 여깁니다. 지금 송 경략의 유시를 받아 적으로 하여금 군사를 늦추고 겨울을 지나게 할 계획임을 알게 되니, 저희 나라에서는 비로소 전일에 조정 계획을 우러러 믿었던 것이 허사가 아니었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또 어르신의 은덕으로 겨우 해관(海關)을 지나자 벌써 깊은 곳을 찔렀으니 탄복하는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생각하오면, 저 도적은 유격이 기한이 지나도 이르지 않는 것을 보고 현저하게 그것을 구실삼아 서쪽으로 나올 염려가 있는데, 근일 또 도순찰사김명원(金命元)의 급보를 보면, 심 유격의 가정왕귀(王貴)라는 자가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유격을 따라 적진에 들어가서 보았는데 적의 추장 평행장(平行長)이 유격을 향하여 본국 통사(本國通事)김덕회(金德澮)가 유격을 이간하려고, 명(明) 나라 군사가 기회를 노려 장차 오니 반드시 살해당할 것이라고 하면서 나를 권하여 먼저 거병(擧兵)해서 서쪽으로 향하기를 권하며, 검을 들고 죽기를 청하기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지금 유격을 보니 그것이 간사하고 허황된 것임을 알 수 있으니 이와 함께 일반통사김덕회(金德澮)가 옥에 갇힌 원인도 알게 되었습니다. 또 본도 순찰사홍세공(洪世恭)의 급보에 의하면 그 중 안변(安邊) 등의 부(府)에 나갔던 초탐(哨探) 군인의 계속되는 급보인데, 왜적이 경성(京城)에 있던 무리들을 끌어내어 병력을 증가해서 살인과 약탈을 마음대로 행하는데 혹은 각처로 끼어 들고 혹은 진영을 들어 나가는 것이 목적은 본도의 양덕현(陽德縣) 지방을 향하려는 것으로서 봄철이 가까워지는데, 적의 모계가 더욱 깊어간다고 합니다. 생각하면 저 왜적이 원래 간첩이 많아서 우리 형편을 잘 알고 또 김덕회가 이미 기만당한 일로 잡혀서 갇히게 되었으니, 온갖 계교를 염탐해가면서 실익과 공을 얻으려고 반드시 못할 짓이 없을 것입니다. 안변의 왜적이 역시 말하기를, ‘양덕 지방으로 향하려 한다.’고 하니 모계(謀計)를 합하여 서쪽으로 향하는 것은 의심 없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왜적이 중화(中和)ㆍ토성(土城)을 침공하니, 이곳 진영은 전투를 제일 잘하기로 이름이 났으니 먼저 군사를 합하여 이곳을 취한 것으로써 어찌 뒤쪽의 근심을 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루 아침에 돌진해 나와서 우리 편이 머뭇거리고 있는 기회를 틈탄다면 어찌 군병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군병이 원래 약하고 또 늙어서 막아낼 수가 없는데 각지의 물자와 마초는 도리어 적의 소유가 되니 그 사세가 정말 급박합니다. 낮은 관직에 있는 제가 어르신께서 이미 군병을 출발시킨 것을 모르고 사람을 보내 급박한 형편을 고하고, 당일로 어르신의 큰 군대 깃발이 앞에 서서 나가고 군사의 성세가 빛남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저희 나라의 급한 형편을 어르신께서 먼저 살피신 것을 알게 되어 우러러 바라보며 감격합니다. 곧 물러가서 저희 임금께 보고하려고도 합니다만 적이 밀려들어 조석을 보전하기 어려운 이 지경에서 날도 저물었기에 감히 입을 들어 몇 말씀 드립니다. 다시 속히 전진하여 주소서. 엎드려 바라건대, 어르신께서는 이미 큰 명을 받들어 저희 나라를 구제하시게 되었으니, 다시 속히 출동하시고 머무는 일이 없게 하여 주십시오. 기회가 누설되기 전에 나가고, 먼저 발동하여 남을 제어하는 계책을 생각하여 크게 황제의 위엄을 떨쳐주시면 이만한 다행이 없겠나이다. 긴급한 사기(事機)에 관련하여 차질을 가져오는 일은 없을까 해서 다시 번거롭게 글을 올려 청원하오니 자세히 살펴 시행하시기를 엎드려 빕니다.

제독이 올린 글을 보고, 정월에 진병하기로 허락하고서도 오히려 전진하려 하지 않았다. 조정에서 또 이조 판서이산보(李山甫)를 보내어 제독의 군문으로 달려나가서 속히 군사의 출발을 청하였는데, 말과 태도가 간절하며 말할 때마다 눈물이 따라 떨어졌다. 제독이 술과 음식을 갖추어 대접하려 하니 이산보(李山甫)가 말하기를, “군부(君父)께서 풀속에 계신데 의리상 차마 성례(盛禮)의 대접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고, 뜰 아래로 내려와서 통곡하니 제독이 감동하여 12월 25일에 강을 건넜다. 깃발이 1천 리에 펄럭이고 징과 북소리가 서로 들렸다. 우리 나라 백성들이 이 광경을 보고 즐거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상이 여기서 제독과 더불어 접견하여 극진히 위로하고 이어 눈물 흘리며 이르기를, “황상의 망극한 은혜를 입어 대인을 만나보게 되었습니다. 저희 나라의 실낱같은 운명을 대인에게 부탁할 뿐입니다.” 하였다. 제독이 손을 들어 사례하며 말하기를, “이미 황명(皇命)을 받았으니 어찌 죽기를 사양하겠습니까. 또 저희 선대는 본래 귀국 사람인데 제가 나올 때 부친이 역시 엄히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귀국 일에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사례하여 마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의주에는 예전부터 전해오는 이런 노래가 있었다.

막좌리 벌이 강물에 무너질 때 / 莫佐里坪盡爲江水所破
백마 장군이 마이산에서 오리라 / 當有白馬將軍從馬耳山出來

이른바 막좌리 벌이라는 것은 의주의 서쪽 성밖 땅으로서 성중 사람들이 여기서 농사짓는데 바로 인산보(麟山堡)에 연접되었으며, 마이산은 의주통군정(統軍亭)과 마주 대한 곳으로 중국 지역이다. 이때 압록강 물이 점점 남쪽으로 옮겨 큰 들을 거의 다 파고 들어가서 의순관(義順館) 문앞에 이르러 나루터가 되었으며, 제독의 탄 말이 백마였으니, 그 말이 과연 맞았다. 또 증명하는 시가 있었다.

장군 한번 나오자 번개 빛 날으는데 / 將軍一出電光飛
흰 말금 안장에 붉은 비단 옷이네 / 白馬金鞍赤錦衣
천자의 명을 받은 장수는 구름밖에 우뚝히 임하였고 / 玉節高臨雲外逈
천자의 군대가 저 멀리 해뜨는 곳을 가리키네 / 天戈遙指日邊歸
흉중의 병법에는 온전한 적이 없는데 / 胸中韜略無全敵
막하의 웅장한 군사는 호랑이 위엄 갖추었네 / 帳下雄兵藉虎威
압록강 머리에 북소리 진동하니 / 鴨綠江頭雷鼓震
동쪽 사람들 이마에 손 얹고 깃발을 바라보구나 / 東人加額望旌旗

 

  • 체찰사유성룡이 제독에게 보기를 청하니 제독이 들어오라고 하였다. 유성룡이 동헌으로 나가니 제독이 의자를 마련하고 서로 접대하였는데, 유성룡이 머리를 조아려 사례하며 이어 소매 속에서 평양 지도를 내어놓고 형세와 병마가 들어갈 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니 제독이 다 보고서 붉은 먹을 묻혀 붓으로 그곳들을 점찍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적은 조총만을 믿는데 우리는 대포를 사용하여 모두 5~6리쯤 나아가니 적이 어찌 당해내리오.” 하였다. 유성룡이 물러나왔는데, 제독이 시 한 수를 부채 폭에 써서 유성룡에게 보내었다. 그 시는 이러하였다.

    군사를 거느리고 밤중에 강을 건너니 / 提兵星夜渡江干
    삼한이 편안치 못해서라네 / 爲說三韓國未安
    임금께서 날마다 군사 오는 소식 기다려 / 明主日懸旌節報
    신하들은 밤에도 술잔을 들지 못하였네 / 微臣夜釋酒杯歡
    봄 들어 살벌한 기운에 마음이 오히려 장대한데 / 春來殺氣心猶壯
    이 요사한 기운을 제거하니 등골 벌써 싸늘하리 / 此去妖?骨已寒
    담소간의 큰 소리가 승산이 아니지만 / 談笑敢言非勝算
    꿈에도 언제나 말타고 달린다네 / 夢中常憶跨征鞍

    유성룡이 백상루(百祥樓)에 있다가 이 시를 받아 보고, 읊으며 되새겨보기를 한참 동안하였다. 이날 밤 삼경에 문득 제독의 휘하 사람이 군중의 비밀 약속 세 조목을 가지고 와서 보이는데, 그 성명을 물으니 말하지 않고 갔다. 이튿날 제독이 활을 당겨 줄을 울리며 곧 두어 명 기병으로 달려 순안(順安)으로 나가고, 여러 군중에서도 연일 뒤따라 떠나갔다.
  • 6일. 명 나라 군사가 바로 평양성 밖에 이르러, 여러 장수들을 부대별로 나누어서 사면으로 둘러쌌다. 왜적 1만여 명이 벌려 섰는데, 앞에는 사슴뿔 모양의 나무 울타리를 둘러치고, 방패를 끼고 검을 휘두르며 형세가 매우 창궐하였다. 또 한 왜장은 왜적 4~5천 명을 거느리고, 대장기를 세우고 북을 달고 치고 소라를 불고 징을 두들기면서 성중을 순찰하고 여러 적들을 지휘하였다. 또 본성 안팎에 험한 시설을 하여 형세가 아래서 위로 공격하기 어려웠다. 평양성 북쪽 모란봉(牧丹峯) 위에는 적 2천 명이 있는데 청백색의 깃발을 세웠으며, 거마목(拒馬木)주D-033을 벌여 설치하고, 북치고 떠들어대며 함성을 올리면서 대기하고 있다. 그런데 그 봉우리가 높이 솟아서 형세가 제일 요긴하였다.
    제독이 이에 남방 군사 1지대(枝隊)를 보내어 모란봉 길을 따라 나가며 올려칠 것같이 하니, 우리 나라에서도 승병으로 그 형세를 돕게 하였다. 적이 높은 곳에 올라가서 포를 쏘자 우리 군사들이 거짓 물러가는 체하니 적이 비로소 고개를 넘어서 따라왔다. 명 나라 군사가 무쇠 방패를 버리고 가니 적이 다투어 가졌는데 명 나라 군사가 다시 공격하여 얼마를 베고 노획하였다. 적이 물러가 봉우리 위에 머물자 제독이 징을 쳐서 군사를 거두어 군영으로 돌아와서 유진(留陣)하였다. 이날 밤 인시(寅時)에 왜 3천여 명이
    함매(銜枚)주D-034하고 가만히 나와서 총병양원(楊元)ㆍ총병이여백(李如栢)ㆍ도지휘사(都指揮使)장세작(張世爵) 등의 세 진영을 공격하였는데, 세 진영 장수가 각기 그 병사를 통솔하여 힘써 싸워서 죽여서 격퇴하였다.
  • 7일. 밤에, 적병 약 8백여 명이 다시 이여백의 진영을 공격하였는데, 명 나라 군사들이 일시에 기와 등불을 없애고 거마목(拒馬木) 아래서 일제히 불화살을 쏘니 대낮같이 밝았으며 적이 감히 범하지 못하였다.
  • 8일. 이른 새벽에 제독이 분향하고 날을 점쳐 길한 괘를 얻었다. 부대별로 여러 장수를 억제하여 적의 수급(首級)을 베는 일이 없도록 효유하여, 3면을 공격 포위하되 동쪽 1면을 비워두게 하고, 오유충(吳惟忠)에게 맡겨 모란봉을 공격하여 가만히 서남쪽을 취하게 하되, 왜가 고려 군사를 쉽게 여기므로 조승훈(祖承訓)을 시켜 거짓으로 복장을 모방하고 잠복하여 기다리게 하였다.
    제독이 전령을 끝내고, 밥을 먹고 장비를 갖춘 다음 세 영(營)의 장수들과 함께 나누어 각기 소속 장병을 거느리고, 성밖 서북쪽을 둘러싸서 진을 칠성(七星)ㆍ보통(普通)ㆍ함구(含毬) 세 문밖에 벌였다. 적은 성위에 홍백색의 깃발을 세우고 항전하는데, 제독의 수하 병사 2백여 기(騎)가 성 아래까지 나가서 오가며 지휘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힘을 다할 것을 생각하였으며 진시(辰時)에는 여러 군병들을 나누어서 차례로 점차 나아갔다. 제독의 군영에서 먼저 대포를 쏘고, 각 진에서도 각종 화기를 일시에 함께 쏘니 메아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산악이 모두 움직이는 듯하였다. 큰 들판이 캄캄해지고 연기와 불길이 하늘에 닿으면 수십 리나 퍼져나가는데 불화살이 공중으로 퍼져나가는 모양이 베를 짜는 것같았다. 불길이 세고 바람이 급하여 바로 성안으로 향해 치달리니, 숲이 다 불탔으며, 먼저 밀덕(密德) 토굴을 불태워 거의 다 불붙었다.
    제독이 여기서 여러 군사를 북을 쳐 호령하여 성으로 올라갔는데, 적이 가까운 거리에 엎드려 많이 총환을 사용하고, 끓는 물과 돌덩이로써 죽기를 각오하고 막아 지켰다. 또 긴 창과 큰 칼을 사용하여 밖으로 날을 가지런히 하니 총총한 모양이 고슴도치 털과 같았다. 명 나라 군사들이 차츰 물러서자, 제독이 직접 겁내어 물러서는 사람 하나를 베어서 여러 군사들에게 돌아가며 보이고, 몸을 날려 바로 앞으로 나가서 크게 외치기를, “먼저 성위에 올라가는 자는 은 50냥을 상을 주겠다.”고 하니, 여러 군사들이 북치고 고함을 치며 일제히 나아갔다. 용맹을 뽐내며 성으로 다가가서 마패(麻牌)를 지고, 창을 들고 서로 섞여 올라가며 혹은 총을 쏘고 포를 놓으며 혹은 성가퀴를 지키는 적을 쳐 찌르니 적이 당하지 못하고 차츰 물러가게 되었다. 제독이 몸을 날려 먼저 올라서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일제히 올라갔다. 부총병낙상지(駱尙志)가 함구문(含毬門)에서 창을 들고 몸을 솟구쳐 성첩을 잡고 올라가는데 적이 성가퀴 위에서 큰 돌을 굴려 떨어뜨려 그 배를 맞추었지만 낙상지는 끄덕하지 않고 크게 외치며 뛰어올랐다. 또 절강(浙江) 군사가 적의 깃발들을 뽑아버리고 명 나라 군중의 깃발을 세우니 적병이 감히 버티지 못하였다. 우리 나라 관군도 따라 들어가며 베고 사로잡은 적이 적지 않았다. 적이 바야흐로 남쪽을 고려 군사라고 하여 가볍게 여겼는데, 조승훈이 위장했던 것을 벗어버리고 명 나라 군사의 투구와 갑옷을 드러내니, 적이 급히 군사를 나누어 막는데 조승훈이 용맹을 뽐내며 나아갔다. 장세작 등은 칠성문을 따라 대포로 문루를 쳐부수고 군사들을 정돈하여 들어가고, 이여백 등은 함구문을 경유하여 들어가며, 양원은 보통문을 경유하여 들어가서 승리한 기세로 앞을 다투어 나아갔다. 유격장오유충은 탄환에 맞아 가슴이 뚫려 피가 흐르고 다리가 부었지만, 분발하며 큰 소리로 싸움을 독려하였다. 제독은 탔던 말이 포환에 맞아 죽어 독약이 온 몸에 풍기는데, 말을 갈아타고 달려나가다 참호 속에 빠져 코끝에서 불이 나지만 군사를 휘동하여 오히려 나아가니 군사 한 명이 적 백 명을 당해내지 않는 자가 없었다. 사면으로 쳐서 죽이니 적의 무리가 무서워서 장막 속으로 달려 들어갔는데, 또 불화살을 사용하여 거의 다 불태웠다. 진중에서 머리 벤 수가 1천 2백 85급인데 그 중에는 평수충(平秀忠)ㆍ평진신(平鎭信)ㆍ종일(宗逸) 등 25명이 있었다. 생포한 것이 2명인데 통사장대선(張大膳)도 있었다. 말 2천 9백 85필을 노획하고, 왜의 기구 4백 52건을 얻었으며, 본국에서 포로되었던 남녀 1천 2백 25인을 구출하였다. 불에 타 죽은 적이 몇만 명은 되는데, 피비린 냄새가 10리는 퍼지며 그 밖의 성에서 떨어지고 물에 빠진 적이 셀 수 없이 많았다.
    행장 등이 남은 적을 거느리고 달아나서 풍월정(風月亭) 토굴로 들어갔는데, 제독이 시초(柴草)를 독려하여 운반하게 하여 사면에 쌓아놓고, 불화살을 사용하여 일시에 함께 불태워버리려 하였다. 그런데 칠성문ㆍ보통문과 모란봉의 왜적이 모두 여러 토굴을 차지하고 있어 갑자기 어찌할 수 없으며 왜적은 굴 속에서 벌집처럼 구멍을 많이 뚫고 총알을 비오듯 쏘아대니 명 나라 군사들이 쓰러지는 자가 잇따랐다.
    제독이 군사를 수습하여 본영으로 돌아와서 여러 군사들을 밥 먹이고, 통사장대선을 보내 행장에게 효유하여 말하기를, “우리 병력으로 단번에 섬멸할 수 있지만 차마 인명을 다 죽일 수는 없어 네가 살아갈 길을 열어주니 너는 속히 여러 추장들을 거느리고 원문(轅門 진영에 설치한 문)에 나와서 나의 약속을 들으라.” 하였다. 행장이 대답하기를, “저희들이 물러나 돌아가겠으니 뒷길을 차단하는 일이 없게 하여 주시오.” 하니, 제독이 허락하고 통역관으로 우리 나라에 알리어 한쪽의 복병을 철수하게 하였다. 그리고 비밀리 이영ㆍ조승훈ㆍ갈봉하(葛逢夏) 등에게 명하여 요로에 매복토록 하였다. 밤중에 행장이 남은 무리를 거느리고 도망해 갔는데 이영 등이 요격하여 3백 59급을 베고 2명을 생포하였다. 중화(中和)ㆍ황주(黃州) 등지에 군영을 설치했던 왜적은 평양의 포소리를 듣고 먼저 이미 도망쳤다.
    그때 순변사이일(李鎰)이 별장김응서(金應瑞)와 더불어 함구문으로 들어갔다가 얼마 후에 성밖으로 물러나와 유둔(留屯)하였는데, 이때에 와서야 적이 도망해 돌아간 것을 알았으나 또한 뒤따라 추격하지 않았다. 제독이 이것을 나무라고 또 이일이 장수 재목이 아니고 이빈(李?)에게 그 소임을 맡길 만하다고 하였다. 조정에서 좌의정윤두수(尹斗壽)를 보내어 이일의 죄를 문책하는데, 군법을 시행하려 하다가 얼마 후에 놓아주고 이빈으로 대신 그 군사들을 거느리게 하였다. 황해도방어사이시언(李時彦)과 김경로(金敬老) 등이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고 싸우지 않으며 이시언은 굶주리고 병들어 낙후한 자 60여 명만 베었으므로 체찰사유성룡이 베려고 하였는데, 제독이 중지시키며 말하기를, “그 죄가 죽어야 하겠지만 적을 아직 멸하지 못하였으므로 한 명의 무사도 아껴야 한다.” 하면서, 백의로 종군하게 하였다. 황주판관정엽(鄭曄)만은 행장의 뒷길을 끊어 90여 급을 베고, 중도에서 또 30여 급을 베었다.
    제독이 이미 평양에서 승전하니 여러 군사들이 다투어 가며 왜적의 물건을 빼앗았는데, 전세정(錢世禎)만이 군사들을 단속하여 물건을 취하지 않았다. 제독이 평양에 머물고 또 좌협(左協)대장장세작(張世爵)과 선봉장의 총병사대수(査大受) 등을 명령하여 진병하게 하고, 또 유성룡과 접반사이덕형(李德馨)으로 급히 앞으로 나가서 마초와 양곡을 마련하도록 독려하고 부교(浮橋)를 만들게 하였다.
  • 또 전군도독부 도독 동지가태자소보(前軍都督府都督同知加太子少保)이여송(李如松)을 흠차제독 계요보정 산동등처 방해어왜군무 총병관(欽差提督?遼保定山東等處防海禦倭軍務摠兵官)으로 삼아 3개 영장을 거느리고 전진하여 정벌하게 하였다.
    이여송(李如松)은 호는 앙성(仰成), 요동(遼東)철령위(鐵嶺衛) 사람이다. 아버지는 태자태보 중군도독부 좌도독 광녕총병관 영원백(太子太保中軍都督府左都督廣寧摠兵官寧遠伯)이성량(李成梁)이다. 이성량의 조부는 본래 우리 나라 이산군(理山郡) 사람으로 독로강(禿魯江)에서 살았는데, 어떤 일로 사람을 죽이고 부부가 철령위로 도망쳐 들어가서 그대로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변방에서 공을 세워 비로소 유격장군이 되었다. 이성량은 음직으로 지휘사가 되고, 오랑캐를 쳐부순 공으로 험산참장(險山參將)이 되어 땅 천리를 개척하여 오보(五堡)를 세워서 훈작(勳爵)을 받게 되었다. 이성량은 천성이 침착하고 엄숙하며, 지모가 많고 전투를 잘하며, 오랑캐들이 두려워하고 심복하여 생사당(生祠堂)을 세워 사모하였다. 이여송의 아우 여백(如栢)ㆍ여장(如樟)ㆍ여매(如梅)ㆍ여오(如梧)ㆍ여정(如楨)이 모두 벼슬이 총병에 이르러 금의옥대(錦衣玉帶)가 집안에 번쩍이고, 막사(幕士)나 가정(家丁)으로 도독 및 2품의 장군이 된 자 10여 명이 굽실거리며 성심으로 섬겨 노예와 같으니 세상에서는 분양왕(汾陽王)곽자의(郭子儀)에게 비유하였으며, 또 당시의 명장 남당(南塘)척계광(戚繼光)과 명성이 비슷하였다. 그래서 중국 조정에서도 의지하여 동북쪽의 쇄약(鎖?)으로 삼았다. 이여송의 어머니 숙씨(宿氏) 또한 여자 중의 배도(裵度)ㆍ곽자의(郭子儀)였다. 장수 집안에 태어나서 변방 일에 잘 알고 천성도 엄정하며, 장사(將士)를 더욱 잘 다스렸다. 요진(遼鎭)에 있을 적에 해마다 한 번씩 철령위에 돌아왔는데, 지나는 곳의 요새와 성곽의 완전하고 허술한 것, 군대의 정예하고 피폐한 것, 거마와 깃발의 정숙하고 어지러운 것 등을 살피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모든 진영의 비장들이 부인을 영원백과 다름이 없이 경외하였다. 여섯 아들 중에 다섯이 그의 소생인데 부귀가 모두 지극하였지만 자기 자신은 오히려 여자가 할 일을 지켰으며, 모든 며느리들은 담비갖옷이나 비단옷이 매우 많았지만 그녀의 생일에는 반드시 다 청포(靑布)같은 물품을 바치게 하여, 검소하기에 힘써야 함을 보여 주었으니, 이 또한 학문하는 사대부들도 어려운 것인데, 하물며 부인으로서 이와 같음에 있어서랴. 사람들이 따를 수 없는 일이다. 나이 겨우 40때에 영원백에게 소실을 두기를 권하여 예쁜 색시 왕씨(王氏)를 구해서 바치고는 자신은 여행을 하면서 왕씨로 하여금 사랑방을 차리게 하였다. 또 여러 자녀 및 며느리들로 하여금 왕씨를 자기처럼 대우하게 하고, 만약 조금이라도 마음에 맞지 않게 하면 그 자녀들에게 꾸중하기를 “왕씨는 내가 데려다놓은 사람이다. 왕씨를 업신여기면 이는 나를 업신여기는 것이다. 너희들 마음에 편안하겠느냐.” 하였다. 여러 아들들이 이미 고관 대작이 되었으되 조금이라도 교만하고 사치스러운 자가 있으면 곧 어린애처럼 땅에 엎드려서 매를 맞게 하였으나 감히 방자한 자가 없었다. 딸 하나가 소씨(蘇氏)에게 시집을 갔었는데, 그 남편과 사이가 나쁘자, 어린 아들이 가서 그 누이 편을 들어주었다. 부인이 듣고 크게 성내어, “네가 이미 출가하였으면 이는 집을 나간 사람인데, 너희들이 문벌(門閥)의 성대함을 믿고 도리어 네 남편에게 거만을 피움이 이와 같은가.” 하고, 곧 아들을 불러 뜰에 꿇어앉히고 종아리를 수십 대나 때리니, 그 딸이 울면서 호소하였다. 그러나 부인은 그 말을 듣지 않고, “네가 지금부터는 네 남편과 시부모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면 나를 볼 생각을 말라.” 하였으니, 그 교훈의 엄정함도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이여송 등이 잘 지켜 마침내 큰 공훈을 세웠으며, 부인이 복록을 누리는 것이 모두 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여송은 대대로 장수 집안이어서, 병법을 익히 알고 사람을 사랑하고 어진 선비를 사귀었으며, 용모가 괴걸(魁傑)하고 도량이 너그러우며, 행군하고 진치는 데에는 단속을 적절하게 하니 지나는 곳마다 편하게 여겼다. 신묘년(1591 선조 24) 여름에 토관총병유동양(劉東暘)이 발승은(?承恩) 등과 영하(寧夏)를 점거하고 오랑캐가 반란하여 형세가 매우 창궐하였다. 발승은은 바로 항복한 호인(胡人)발배(?拜)의 아들이다. 부자가 사납고 전투를 잘하여 흉노병을 여러번 패하게 하였으므로 벼슬이 총병에 올라 두 군영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정(家丁) 역시 수천여 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순무도어사(巡撫都御史)당형(黨馨)이 매양 억제하니, 발승은 부자가 달마다 주는 양식을 주지 않는다는 것으로 대중을 격동하여 난을 일으켰는데, 관군이 누차 패하여 버티지 못하였다. 이여송이 총병소여훈(蕭如薰)ㆍ상거경(常居敬)ㆍ심사효(沈思孝)ㆍ요계가(姚繼可)ㆍ마귀(麻貴)ㆍ유승사(劉承詞)ㆍ이여장(李如樟)ㆍ양문부(楊文孚)ㆍ이영(李寧) 등을 거느리고 10만 군사로 소탕해 내니, 곧 이여송의 관직을 도독동지(都督同知)로 승진시키고, 음직으로 자식에게는 금의위 지휘동지(錦衣衛指揮同知)의 관직을 세습시키고, 상으로 은 1백 냥과 대홍저사(大紅紵絲) 4표리(表裏)를 받았는데, 군사를 돌릴 겨를도 없이 또 동쪽을 정벌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래서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경(北京)으로 달려갔다가 그대로 요동을 향하여 모든 장수를 분담시켜 왜를 정벌하였다.
    정왜 부총병관서 도독첨사(征倭副摠兵官署都督僉事)이여백(李如栢)을 중협대장(中協大將)으로 삼았다. 이여백은 호는 배성(背城), 제독의 아우인데, 친병(親兵) 1천 5백 명을 거느리게 하였다. 정왜부총병관서 도독첨사양원(楊元)을 좌협장군(左協將軍)으로 삼았다. 양원은 호는 국애(菊厓), 정요좌위(定遼左衛)의 사람이다. 처음에는 송경략(宋經略)중군(中軍)이었는데 끌어와 친병 2천을 거느리게 하였다. 정왜부총병관 도지휘사(征倭副摠兵官都指揮使)장세작(張世爵)을 우협대장(右協大將)으로 삼았다. 장세작은 호는 진산(鎭山), 광동 우위(廣東右衛) 사람이다. 친병 1천 5백 명을 거느리게 하였다. 3영을 나눈 뒤에 모든 장수를 3영에 분속하였다. 흠차협수선부 동로통령 전영병도지휘사(欽差協守宣府東路統領前營兵都指揮使)임자강(任自强)은 자는 체건(體乾), 호는 관산(冠山), 대동(大同)양화위(陽和衛) 사람인데, 선부병(宣府兵) 1천 명을 거느리게 하고, 흠차통령계요 준화참장(欽差統領?遼遵化參將) 이방춘(李芳春)은 자는 응시(應時), 호는 청강(晴岡), 북직례(北直隷)대명부(大名府)평로위(平虜衛) 사람인데, 마병(馬兵) 1천 명을 거느리게 하였다. 그는 말타며 활쏘기가 장기여서 행군하다가 새를 만나면 문득 몸을 뒤집어 달리면서 쏘아 잡았다. 군사를 아주 엄하게 대하고 상벌을 즉시 처결하여 부하들이 애모하였다. 흠차유격장군(欽差游擊將軍)고책(高策)은 호는 대정(對庭), 산서(山西)천성위(天城衛) 사람인데, 마병 1천 명을 거느리게 하고, 흠차통령산동 추반경략표하어왜방해 유격장군(欽差統領山東秋班經略標下禦倭防海游擊將軍)전세정(錢世禎)은 호는 삼지(三池), 남직례(南直隷)소주부(蘇州府)오강현(烏江縣) 사람인데, 마병 1천 명을 거느리게 하니, 호령이 엄정하고, 흠차통령가 호소송조병 유격장군(欽差統領嘉湖蘇松調兵游擊將軍)척금(戚金)은 호는 소당(蕭塘), 산동(山東) 등주위(登州衛) 사람인데, 자칭 남당(南塘)척계광(戚繼光)의 일가라 하고 어떤 이는 그의 손자라 한다. 그에게 보병 1천 명을 거느리게 하였다. 흠차통령선부 중영병유격장군(欽差統領宣府中營兵游擊將軍)주홍모(周弘謨)를 군사 1천 명을, 흠차통령계진 유격장군(欽差統領?鎭游擊將軍)방시휘(方時輝)는 산서울주위(蔚州衛) 사람인데, 마병 1천 명을, 흠차하양 유격장군(欽差河陽游擊將軍)고승(高昇)은 마병 1천 명을 거느리게 하고, 흠차건창 유격장군(欽差建昌游擊將軍)왕문(王問)은 호는 의유(義儒), 의리와 용맹이 남보다 뛰어나고 몸가짐을 매우 바르게 하여 지나는 곳마다 편안하다 하였다. 그는 마병 1천을 거느리게 하였다. 이 아홉 장수는 모두 이여백이 통솔하게 하였다.
    흠차통령 요양 원임 부총병(欽差統領遼陽原任副摠兵)왕유익(王有翼)은 호는 심헌(心軒), 하남(河南)언능적(?陵籍) 사람이니, 마병 1천 2백 명을, 흠차통령계진조병 원임 부총병(欽差統領?鎭調兵原任副摠兵)왕유정(王維貞)은 삼만위(三萬衛) 사람인데, 마병 1천여 기를, 흠차의주위 진수참장(欽差義州衛鎭守參將)이여매(李如梅)는 호는 방성(方城), 제독의 아우인데 마병 1천여 기를, 흠차요진 조병참장(欽差遼鎭調兵參將) 이여오(李如梧)는 또한 제독의 아우인데 마병 5천 1백여 기를, 흠차요동 총병표하영 영이병 원임참장(欽差遼東摠兵標下營領夷兵原任參將)양소선(楊紹先)은 전둔위(前屯衛) 사람인데 마병 5천여 기를, 흠차진수요동동로부총병(欽差鎭守遼東東路副摠兵)손수염(孫守廉)은 호는 고촌(古村), 철령위 사람인데, 마병 5천여 기를, 흠차통령보진건준조병 유격장군(欽差統領保眞建遵調兵游擊將軍)갈봉하(葛逢夏)는 마병 2천여 기를 거느리게 하니, 이 일곱 장수를 모두 양원(楊元)이 통솔하게 하였다.
    원임 부총병조승훈(祖承訓)은 평양에서 패하여 파직되어 충군이 되었는데 백의로 종군하여 공을 세우게 하고, 흠차통령 절강유격장군오유충(吳惟忠)은 호는 운봉(雲峯), 절강금화부(金華府)의오현(義烏縣) 사람인데 보병 1천 5백 명을, 부총병왕필적(王必迪)은 남병(南兵) 1천명을, 흠차통령 창평우영병참장(欽差統領昌平右營兵參將)조지목(趙之牧)은 마병 1천 기를, 흠차통령남북 조병탁주참장(欽差統領南北調兵?州參將)장응충(張應?)은 마병 1천 5백 기를, 흠차통령 산서영 원임참장(欽差統領山西營原任參將) 진방철(陳邦哲)은 보병 1천 명을, 흠차제독표하 통령대동영병 유격장군(欽差提督標下統領大同營兵游擊將軍)곡수(谷燧)는 대동위(大同衛) 사람인데 마병 1천 기를, 흠차보정 유격장군(欽差保定游擊將軍)양심(梁心)은 마병 1천 기를 각각 거느리게 되니, 이 여덟 장수를 모두 장세작이 통솔하게 되었다. 그 외에도 청용 장관(聽用將官)이 그 부류가 또한 많았다. 유격장군왕수신(王守臣)은 호는 덕헌(德軒), 요동삼만위(三萬衛) 사람인데, 조승훈과 평양을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패하여 돌아갔는데, 이때에 와서 다시 나왔고, 흠차통령 요동조병 기보양영 관전보부총병(欽差統領遼東調兵騎步兩營寬典堡副摠兵)동양정(?養正)은 자는 자충(子忠), 호는 몽천(蒙泉), 요동위 사람이니, 만력 경진년에 무과 진사하였고, 의주에 와서 머물었다. 통령대령영병 원임참장(統領大寧營兵原任參將)장기공(張奇功)은 요동 사람으로 심유경과 서로 사이가 좋았는데, 심유경이 행장(行長)과 서로 만나보고서 행장을 놓아 돌려보냈다는 것을 듣고 발을 구르며 탄식하기를, “만약 한 명만이라도 복병하였다가 잡았으면 군사 한 명 수고하지 않아도 될 것인데, 이런 기회를 놓쳤으니, 애석하다.” 하였으니, 대개 심유경의 본심을 몰랐던 것인데, 이때 와서 마병 1천 기를 거느리고 왔다. 흠차진정 유격장군(欽差眞定游擊將軍)조문명(趙文明)은 마병 1천 기를, 흠차섬서 유격장군(欽差陝西游擊將軍)고철(高徹)은 마병 1천 기를, 흠차통령요동좌영조병 원임 부총병 서도독동지(欽差統領遼東左營調兵原任副摠兵署都督同知)이평(李平)은 호달(胡?) 사람인데, 영원백이성량(李成梁)이 그의 모습을 기이하게 여겨 거두어 자기 아들로 삼았으며, 공을 쌓아 이 관직에 이르렀는데, 마병 8백 기를 거느리게 하였다. 흠차산서 유격장군시조향(施朝鄕)은 마병 1천 기를, 요동도지휘사 사첨사(遼東都指揮使司僉使)장삼외(張三畏)는 요동삼마위 사람인데, 의주에 와서 머물면서 군량과 마초를 오로지 관장하게 하였고 몸가짐을 간략하게 하여 사람들이 매우 편의하게 여겼다. 책사(策士)사용재(謝用梓)는 호는 용암(龍巖), 절강소흥부(紹興府)여요(餘姚) 사람인데, 태학사사천(謝遷)의 손자라 자칭하였는데, 참장낙상지(駱尙志)를 따라 나왔다. 수비(守備)웅정동(熊正東)ㆍ이대간(李大諫) 등도 청용(聽用)으로서 왔다. 대간은 호는 북천(北泉)절강가흥부(嘉興府)수수현(秀水縣) 사람인데, 압록강가에 와 있었다. 또 원임 하간부동지(原任河間府同知)정문빈(鄭文彬)ㆍ산서(山西)노안부(潞安府)호관현(壺關縣)지현(知縣)조여매(趙如梅) 등은 군량과 마초를 전적으로 관장하게 하였다. 조여매는 호는 초암(肖庵), 요동철령위 사람인데, 제독과 가장 친하여 군사(軍事)를 모두 함께 상의하였다. 제독이 부대 편성을 마치고, 세 영장을 전진하게 하고, 또 사대수(査大受)를 선봉으로 삼고, 갈봉하를 행궁 호위의 군사를 대신 거느리게 하고, 제독은 스스로 표하장관 원임 참장 도지휘사방시춘(方時春), 영원백의 가정(家丁)원임 참장이영(李寧), 원임비어(原任備禦)한종공(韓宗功)ㆍ이봉양(李逢陽) 등을 거느리고 잇달아 전진하였는데, 정병이 4만여 명이요 용장이 60여 명이며, 군호를 10만이라 하고 통원보(通遠堡)까지 와서는 유둔(留屯)하고 전진하지 않았다. 조선에서 집의이호민(李好閔) 등을 보내어 제독에게 다음과 같이 정문(呈文)하였다.

조선국 배신(陪臣)사헌부집의이호민(李好閔) 등은 적(賊)의 모계를 헤아릴 수 없고 사세가 더욱 급박하여 빨리 대병을 진출시켜 먼저 힘을 발휘해서 승리를 거두어 주시기를 바라는 일로 말씀드립니다. 이달 13일에 요동도사 군정첨서 관둔 도지휘사(遼東都司軍政僉書管屯都指揮使)장(張)의 패문(牌文)을 받았으며, 흠차경략 계요보정산동 등처 어왜군무 병부 우시랑(欽差經略?遼保定山東等處禦倭軍務兵部右侍郞)송(宋)으로부터 근간에 부총병관(副摠兵官)동양정(?養正)의 품칭(稟稱)에 의하면 왜노가 군사를 거느리고 중화(中和)ㆍ토성(土城) 등지를 침입 점령하였다고 하고, 또 심유경(沈惟敬)의 품칭(稟稱)에 의하면 왜노가 조공 왕래를 청원하고 애걸한다고 하는 등의 정황이 각각 병부에 도착하였습니다. 여기에 의거하면 왜노가 거짓으로 조공 왕래를 빙자하고 비밀리에 토성을 공격하는 것이 분명히 우리 군사를 늦추려는 것임을 알 수 있으니 마땅히 왕래를 금지하고 엄하게 조사 힐문하여야 하기에 이 패문을 올리는 것이니 본관은 조선 국왕에게도 알려서 병마(兵馬)를 긴요한 곳에 많이 설치하여 서로 서로 힐문하게 하며, 만일 심유경 본인이나 혹 그의 보내는 사람, 혹 가정(家丁)으로 저들 주둔지에 있는 자가 평양(平壤)으로 가서 소식을 전하는 것이나, 혹 가솔 가운데 중국으로 달아 돌아오는 자를 만나면 곧 조사 나포하여 병부로 보내어 사실을 캐어 처리하게 할 수 있게 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거듭 유시를 받고, 국왕의 전지도 함께 받들었는데, 그 긴급한 소관사는 이미 경략과 병부의 전령에 의하여 이렇게 시행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요동에 치보(馳報)하고, 본국의 급박한 사정을 들어 제독(提督)과 경략 두 노야(老爺) 앞에 드리고, 빨리 진병(進兵)하여 주시기를 청하게 되어 이 직책을 받들기로 위임을 받고 나왔습니다.

살펴보면 왜적의 흉모가 저희 나라에만 있지 않습니다. 지금 이미 저희 나라를 다 함락하고 평양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형세와 언사가 더욱 어긋나 그 계획이 그만두고 말 것이 아니니, 말 한 마디로 군사를 풀어 돌아간다고 하니 단정코 이럴 이치가 없습니다. 전일 심 유격(沈游擊)이 재차 적진에 가서 저들과 화친에 대한 의논을 하였는데, 그 사실을 비밀로 하여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은폐(銀幣)를 가지고 갔으며 또 10명의 왜노를 대동하고 경사(京師 명나라 서울)로 가는 것을 허락하고, 또 두 관원을 보내어 대마도로 갔으니, 저희 나라 군신들이 모두 해괴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유격은 해를 가리키면서 다른 일이 없다고 하니 그저 믿고 바라는 심정에 감히 의심을 하지는 못하고 이것은 반드시 일을 안전하게 성취하려는 것이라고 하니 천조의 조정 계책도 반드시 저들의 의논을 따라 춘추(春秋)의 수치로 삼는 일을 행하지 않을 것이 보장되므로 의심을 품은 채 믿음을 지키면서 성공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겨울철도 그럭저럭 지나 섣달이 다 가게 되었으니, 적을 토멸할 시기가 이미 십 중 아홉은 잃어버린 것으로 온 나라가 다 같이 민망히 여깁니다. 지금 송 경략의 유시를 받아 적으로 하여금 군사를 늦추고 겨울을 지나게 할 계획임을 알게 되니, 저희 나라에서는 비로소 전일에 조정 계획을 우러러 믿었던 것이 허사가 아니었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또 어르신의 은덕으로 겨우 해관(海關)을 지나자 벌써 깊은 곳을 찔렀으니 탄복하는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생각하오면, 저 도적은 유격이 기한이 지나도 이르지 않는 것을 보고 현저하게 그것을 구실삼아 서쪽으로 나올 염려가 있는데, 근일 또 도순찰사김명원(金命元)의 급보를 보면, 심 유격의 가정왕귀(王貴)라는 자가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유격을 따라 적진에 들어가서 보았는데 적의 추장 평행장(平行長)이 유격을 향하여 본국 통사(本國通事)김덕회(金德澮)가 유격을 이간하려고, 명(明) 나라 군사가 기회를 노려 장차 오니 반드시 살해당할 것이라고 하면서 나를 권하여 먼저 거병(擧兵)해서 서쪽으로 향하기를 권하며, 검을 들고 죽기를 청하기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지금 유격을 보니 그것이 간사하고 허황된 것임을 알 수 있으니 이와 함께 일반통사김덕회(金德澮)가 옥에 갇힌 원인도 알게 되었습니다. 또 본도 순찰사홍세공(洪世恭)의 급보에 의하면 그 중 안변(安邊) 등의 부(府)에 나갔던 초탐(哨探) 군인의 계속되는 급보인데, 왜적이 경성(京城)에 있던 무리들을 끌어내어 병력을 증가해서 살인과 약탈을 마음대로 행하는데 혹은 각처로 끼어 들고 혹은 진영을 들어 나가는 것이 목적은 본도의 양덕현(陽德縣) 지방을 향하려는 것으로서 봄철이 가까워지는데, 적의 모계가 더욱 깊어간다고 합니다. 생각하면 저 왜적이 원래 간첩이 많아서 우리 형편을 잘 알고 또 김덕회가 이미 기만당한 일로 잡혀서 갇히게 되었으니, 온갖 계교를 염탐해가면서 실익과 공을 얻으려고 반드시 못할 짓이 없을 것입니다. 안변의 왜적이 역시 말하기를, ‘양덕 지방으로 향하려 한다.’고 하니 모계(謀計)를 합하여 서쪽으로 향하는 것은 의심 없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왜적이 중화(中和)ㆍ토성(土城)을 침공하니, 이곳 진영은 전투를 제일 잘하기로 이름이 났으니 먼저 군사를 합하여 이곳을 취한 것으로써 어찌 뒤쪽의 근심을 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루 아침에 돌진해 나와서 우리 편이 머뭇거리고 있는 기회를 틈탄다면 어찌 군병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군병이 원래 약하고 또 늙어서 막아낼 수가 없는데 각지의 물자와 마초는 도리어 적의 소유가 되니 그 사세가 정말 급박합니다. 낮은 관직에 있는 제가 어르신께서 이미 군병을 출발시킨 것을 모르고 사람을 보내 급박한 형편을 고하고, 당일로 어르신의 큰 군대 깃발이 앞에 서서 나가고 군사의 성세가 빛남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저희 나라의 급한 형편을 어르신께서 먼저 살피신 것을 알게 되어 우러러 바라보며 감격합니다. 곧 물러가서 저희 임금께 보고하려고도 합니다만 적이 밀려들어 조석을 보전하기 어려운 이 지경에서 날도 저물었기에 감히 입을 들어 몇 말씀 드립니다. 다시 속히 전진하여 주소서. 엎드려 바라건대, 어르신께서는 이미 큰 명을 받들어 저희 나라를 구제하시게 되었으니, 다시 속히 출동하시고 머무는 일이 없게 하여 주십시오. 기회가 누설되기 전에 나가고, 먼저 발동하여 남을 제어하는 계책을 생각하여 크게 황제의 위엄을 떨쳐주시면 이만한 다행이 없겠나이다. 긴급한 사기(事機)에 관련하여 차질을 가져오는 일은 없을까 해서 다시 번거롭게 글을 올려 청원하오니 자세히 살펴 시행하시기를 엎드려 빕니다.

  • 제독이 올린 글을 보고, 정월에 진병하기로 허락하고서도 오히려 전진하려 하지 않았다. 조정에서 또 이조 판서이산보(李山甫)를 보내어 제독의 군문으로 달려나가서 속히 군사의 출발을 청하였는데, 말과 태도가 간절하며 말할 때마다 눈물이 따라 떨어졌다. 제독이 술과 음식을 갖추어 대접하려 하니 이산보(李山甫)가 말하기를, “군부(君父)께서 풀속에 계신데 의리상 차마 성례(盛禮)의 대접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고, 뜰 아래로 내려와서 통곡하니 제독이 감동하여 12월 25일에 강을 건넜다. 깃발이 1천 리에 펄럭이고 징과 북소리가 서로 들렸다. 우리 나라 백성들이 이 광경을 보고 즐거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상이 여기서 제독과 더불어 접견하여 극진히 위로하고 이어 눈물 흘리며 이르기를, “황상의 망극한 은혜를 입어 대인을 만나보게 되었습니다. 저희 나라의 실낱같은 운명을 대인에게 부탁할 뿐입니다.” 하였다. 제독이 손을 들어 사례하며 말하기를, “이미 황명(皇命)을 받았으니 어찌 죽기를 사양하겠습니까. 또 저희 선대는 본래 귀국 사람인데 제가 나올 때 부친이 역시 엄히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귀국 일에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사례하여 마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의주에는 예전부터 전해오는 이런 노래가 있었다.

    막좌리 벌이 강물에 무너질 때 / 莫佐里坪盡爲江水所破
    백마 장군이 마이산에서 오리라 / 當有白馬將軍從馬耳山出來

    이른바 막좌리 벌이라는 것은 의주의 서쪽 성밖 땅으로서 성중 사람들이 여기서 농사짓는데 바로 인산보(麟山堡)에 연접되었으며, 마이산은 의주통군정(統軍亭)과 마주 대한 곳으로 중국 지역이다. 이때 압록강 물이 점점 남쪽으로 옮겨 큰 들을 거의 다 파고 들어가서 의순관(義順館) 문앞에 이르러 나루터가 되었으며, 제독의 탄 말이 백마였으니, 그 말이 과연 맞았다. 또 증명하는 시가 있었다.

    장군 한번 나오자 번개 빛 날으는데 / 將軍一出電光飛
    흰 말금 안장에 붉은 비단 옷이네 / 白馬金鞍赤錦衣
    천자의 명을 받은 장수는 구름밖에 우뚝히 임하였고 / 玉節高臨雲外逈
    천자의 군대가 저 멀리 해뜨는 곳을 가리키네 / 天戈遙指日邊歸
    흉중의 병법에는 온전한 적이 없는데 / 胸中韜略無全敵
    막하의 웅장한 군사는 호랑이 위엄 갖추었네 / 帳下雄兵藉虎威
    압록강 머리에 북소리 진동하니 / 鴨綠江頭雷鼓震
    동쪽 사람들 이마에 손 얹고 깃발을 바라보구나 / 東人加額望旌旗

  • 계사년 정월 1일. 흰 기운 세 줄기가 서북쪽에서 하늘로 뻗쳐 태양을 가로 건너질렀는데 곁에 쌍무지개가 있어 세 겹을 둘러싸니 사람들이 모두 웅장한 군사의 기운이 적을 이길 형상이라고 하였다.
  • 4일. 명 나라 대군이 숙천(肅川)에 당도하며, 선봉 부총병사대수(査大受)를 시켜 먼저 순안(順安)으로 가서 왜노를 속여 말하기를, “명 나라에서 이미 화친을 허락하였고, 심유격이 또 온다.” 하니, 여러 왜노들이 모두 기뻐하였으며, 현소(玄蘇)는 이런 시를 올렸다.

    부상에 전쟁 그치고 중화에 복속하니 / 扶桑息戰服中華
    사해 구주가 다 같은 한 집이라네 / 四海九州同一家
    기쁨이 넘치는 그 기운 세상의 눈 다 녹이니 / 喜氣忽消?外雪
    천지의 봄 아직 이른데 태평화 필 것이네 / 乾坤春早太平花

    왜노 추장 행장(行長)이 이에 소장(小將)평호관(平好官)ㆍ길병패삼랑(吉兵覇三郞) 등 왜노를 보내어, 20여 명의 왜노를 거느리고, 통사(通事)장대선(張大膳)과 함께 순안(順安)에 와서 심 유격(沈遊擊)을 맞이한다고 하는데, 실은 허실을 엿보려는 것이었다. 제독이 이에 부총병사대수(査大受)ㆍ유격장군이영(李寧) 등에게 격문을 보내어 유인하여 함께 술을 마시게 하고 군사를 장막 뒤에 숨겼다가 여러 왜노가 술이 취하자 이영 등이 잔을 들고 호령하니 복병이 갑자기 나타나 여러 왜노를 쳐서 거의 다 없애고, 또 길 추장과 호관을 잡았고 나머지 세 사람은 도망해 갔다. 적진 중에서는 이때에야 대군이 온 것을 알고 크게 소란하여 그치지 않았다. 제독이 이영(李寧) 등을 군령으로 처단하여 두루 보이니, 군중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찬획(贊?)유황상(劉黃裳)ㆍ원황(袁黃)이 급히 압록강을 건너와서 왕을 통군정(統軍亭)에서 만나 뵙고 물러나 글을 지어 우리 나라 백성들에게 이렇게 선유하였다.

너희 나라는 본래부터 문물이 발달하고 대대로 충정(忠貞)이 돈독하였다. 근래에 왜이(倭夷)가 무도하여 오랫동안 침략해 와서 너희 군신을 수풀 속에 있게 하니 계속 떠돌아다녀 그 곤궁함이 어떻겠느냐. 우리 대명(大明) 황제께서, 너희가 2백 년 동안 신하의 예절을 부지런히 지킨 것을 생각하여 만금의 비용을 아끼지 않고 장수를 명하여 정벌하게 하였다. 너희 나라에는 어찌 종실(宗室)로서 중임을 받고 충분(忠憤)이 분발할 이가 없을 것인가. 어찌 고을 관장으로서 지방을 지키며 강개히 목숨을 내놓을 이가 없을 것인가. 어찌 충신으로서 임금이 근심하면 신하가 욕된다는 생각을 품을 이가 없을 것인가. 어찌 의사(義士)로서 몸을 바쳐 나라에 보답할 생각을 일으킬 이가 없을 것인가. 마땅히 하늘같은 큰 위엄이 진동하는 기회를 타서 빨리 의병을 불러모아 각기 한 부대씩의 군사를 이끌고 함께 구벌(九伐)주D-029의 뜻을 펴야 할 것이다. 지금 왜이(倭夷)가 강한 양 날뛰지만 그 세력이 반드시 멸망될 것이요, 너희 나라가 비록 미약하지만 그 세력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니 서로 계획을 세우라.

먼저 천도(天道)로 논하자면 조선은 분야(分野)가 석목(析木)의 자리주D-030이다. 지난해 목성(木星)이 인방(寅方)으로 돌았는데 일본이 와서 범하니 이것은 우리가 세성(歲星)의 빛을 받았는데 저들이 침노하는 것으로 하늘을 거슬러 행하는 일이니 비록 강하나 반드시 약해질 것이다. 이것이 첫째 이유이다. 왜의 천성이 추운 것을 두려워하는데, 금년은 음(陰)이요, 풍목(風木)이 하늘을 맡고주D-031양명(陽明)이 금을 마르게 하여 처음 기운이 되며, 입춘 후에도 20~30일 간이나 찬기운이 소멸되지 않는 것이 즉, 천시를 이용할 만하다. 이것이 둘째 이유이다. 너희 나라 군신이 모두 이 성에 모였는데, 새벽에 일어나 기운을 바라본즉 아름답고 왕성하여 비단이나 일산같다. 왕성한 기운이 우리에게 있으니 세력이 반드시 회복될 것이다. 이것이 셋째 이유이다.

다음 인사로 논하자면, 대국의 웅병(雄兵)이 범과 곰같으며, 무적의 대포가 한번 쏘면 1천 보(步)를 나가는데 저들이 자기 힘을 생각하지 못하니 힘없는 가루가 되고야 말 것이다. 이것이 첫째 이유이다. 경략(經略)송(宋)은 깊은 계책과 함축 있는 모계를 귀신도 헤아리지 못하며, 제독이(李)는 일편단심 충성심으로 온갖 전투에 용맹을 떨친 이로 옛날 명장의 기풍이 있다. 두 관직이 원래부터 충성과 절개를 가졌는데, 이제 동심 협력하여 이 도적을 섬멸하여 천자께 보답하려 하니, 두 나라의 군사를 합하여 이 궁한 도둑을 몰아내는 것은 떨어지는 것을 흔드는 것과 같다. 이것이 둘째 이유이다. 관백(關白)이 강포하여 위로 그 임금을 위협 제어하고 아래로 그 민중을 학대하여 하늘이 망하게 하려고 하여 우리에게 손을 빌리는 것이다. 이것이 셋째 이유이다.

어제 국왕을 뵙니, 거동이 침착하고 용모가 준위(俊偉)하여 형세가 반드시 중흥할 것이며, 너희 나라에서 전후에 보낸 여러 사절이 천조(天朝)에 군사를 청하는데 성의가 간절하고 측은하며 눈물이 비오듯하여 신포서(申包胥)가 초(楚) 나라의 사정을 울며 호소하던 뜻주D-032과도 유사하다. 임금과 신하가 이러하니 어찌 끝내 침체하고 곤궁하기만 할 것이며, 순(順)으로 역(逆)을 치는데 무슨 공이나 이루지 못함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넷째 이유이다.

왜노의 믿는 것은 조총이다. 그러나 세 번 쏜 후에는 계속 쏘기 어려우며, 그 군사가 많지만 강한 자는 얼마 안 된다. 앞에 있는 1백~2백 명만 죽이면 나머지는 모두 바라만 보고도 도망해 갈 것이니, 지금이야말로 이길 수 있는 기회요, 바로 지사(志士)가 공을 세울 때이다. 천조의 명령이 우리 나라나 너희 나라를 물론하고 누구나 평수길(平秀吉)ㆍ평수차(平秀次) 및 중 현소(玄蘇)를 사로잡거나 베는 자가 있다면 사람마다 은 1만 냥을 상으로 주고 백작(伯爵)을 봉하여 대대로 계승하게 하고 평수가(平秀嘉)ㆍ평수충(平秀忠)ㆍ평행장(平行長)ㆍ평의지(平義智)ㆍ평진신(平鎭信) 등 이름 있는 여러 추장을 사로잡은 자는 은 5천 냥을 상으로 주고 대대로 지휘사를 계승하게 하며, 그 아래의 사로잡은 자에게는 각각 상여의 등급이 있게 하였다. 너희 나라 신민이 이때에 군중을 모아 함께 큰 공을 세운다면 본국의 사직을 회복할 수 있고, 또 천조의 후한 상을 탈 수도 있으며, 쇠한 나라의 유민(遺民)으로서 집안을 일으키는 시조가 될 것이니, 어찌 빛날 일이 아니겠는가. 여러 도의 신민과 의병으로 이미 일어난 자는 다시 전진하고, 아직 일어나지 못한 자는 속히 불러모아, 혹은 협력해서 왜노의 세력을 좌절시키고, 혹은 그 해이하게 돌아가는 것을 공격하며, 혹은 군량 운반을 계속하되 모든 조처를 수시로 모두 편리할 대로 하게 하라.

  • 조정에서 선전관을 나누어 보내어, 이 선유문을 가지고 주야로 여러 곳에 분포하며, 제독은 대군을 거느리고 계속 전진하였다. 안주(安州)에 이르러 성의 남쪽에 진영을 설치하니 군대의 깃발과 위용이 정제되고 엄숙하여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체찰사유성룡이 제독에게 보기를 청하니 제독이 들어오라고 하였다. 유성룡이 동헌으로 나가니 제독이 의자를 마련하고 서로 접대하였는데, 유성룡이 머리를 조아려 사례하며 이어 소매 속에서 평양 지도를 내어놓고 형세와 병마가 들어갈 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니 제독이 다 보고서 붉은 먹을 묻혀 붓으로 그곳들을 점찍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적은 조총만을 믿는데 우리는 대포를 사용하여 모두 5~6리쯤 나아가니 적이 어찌 당해내리오.” 하였다. 유성룡이 물러나왔는데, 제독이 시 한 수를 부채 폭에 써서 유성룡에게 보내었다. 그 시는 이러하였다.

    군사를 거느리고 밤중에 강을 건너니 / 提兵星夜渡江干
    삼한이 편안치 못해서라네 / 爲說三韓國未安
    임금께서 날마다 군사 오는 소식 기다려 / 明主日懸旌節報
    신하들은 밤에도 술잔을 들지 못하였네 / 微臣夜釋酒杯歡
    봄 들어 살벌한 기운에 마음이 오히려 장대한데 / 春來殺氣心猶壯
    이 요사한 기운을 제거하니 등골 벌써 싸늘하리 / 此去妖?骨已寒
    담소간의 큰 소리가 승산이 아니지만 / 談笑敢言非勝算
    꿈에도 언제나 말타고 달린다네 / 夢中常憶跨征鞍

    유성룡이 백상루(百祥樓)에 있다가 이 시를 받아 보고, 읊으며 되새겨보기를 한참 동안하였다. 이날 밤 삼경에 문득 제독의 휘하 사람이 군중의 비밀 약속 세 조목을 가지고 와서 보이는데, 그 성명을 물으니 말하지 않고 갔다. 이튿날 제독이 활을 당겨 줄을 울리며 곧 두어 명 기병으로 달려 순안(順安)으로 나가고, 여러 군중에서도 연일 뒤따라 떠나갔다.
  • 6일. 명 나라 군사가 바로 평양성 밖에 이르러, 여러 장수들을 부대별로 나누어서 사면으로 둘러쌌다. 왜적 1만여 명이 벌려 섰는데, 앞에는 사슴뿔 모양의 나무 울타리를 둘러치고, 방패를 끼고 검을 휘두르며 형세가 매우 창궐하였다. 또 한 왜장은 왜적 4~5천 명을 거느리고, 대장기를 세우고 북을 달고 치고 소라를 불고 징을 두들기면서 성중을 순찰하고 여러 적들을 지휘하였다. 또 본성 안팎에 험한 시설을 하여 형세가 아래서 위로 공격하기 어려웠다. 평양성 북쪽 모란봉(牧丹峯) 위에는 적 2천 명이 있는데 청백색의 깃발을 세웠으며, 거마목(拒馬木)주D-033을 벌여 설치하고, 북치고 떠들어대며 함성을 올리면서 대기하고 있다. 그런데 그 봉우리가 높이 솟아서 형세가 제일 요긴하였다.
    제독이 이에 남방 군사 1지대(枝隊)를 보내어 모란봉 길을 따라 나가며 올려칠 것같이 하니, 우리 나라에서도 승병으로 그 형세를 돕게 하였다. 적이 높은 곳에 올라가서 포를 쏘자 우리 군사들이 거짓 물러가는 체하니 적이 비로소 고개를 넘어서 따라왔다. 명 나라 군사가 무쇠 방패를 버리고 가니 적이 다투어 가졌는데 명 나라 군사가 다시 공격하여 얼마를 베고 노획하였다. 적이 물러가 봉우리 위에 머물자 제독이 징을 쳐서 군사를 거두어 군영으로 돌아와서 유진(留陣)하였다. 이날 밤 인시(寅時)에 왜 3천여 명이
    함매(銜枚)주D-034하고 가만히 나와서 총병양원(楊元)ㆍ총병이여백(李如栢)ㆍ도지휘사(都指揮使)장세작(張世爵) 등의 세 진영을 공격하였는데, 세 진영 장수가 각기 그 병사를 통솔하여 힘써 싸워서 죽여서 격퇴하였다.
  • 7일. 밤에, 적병 약 8백여 명이 다시 이여백의 진영을 공격하였는데, 명 나라 군사들이 일시에 기와 등불을 없애고 거마목(拒馬木) 아래서 일제히 불화살을 쏘니 대낮같이 밝았으며 적이 감히 범하지 못하였다.
  • 8일. 이른 새벽에 제독이 분향하고 날을 점쳐 길한 괘를 얻었다. 부대별로 여러 장수를 억제하여 적의 수급(首級)을 베는 일이 없도록 효유하여, 3면을 공격 포위하되 동쪽 1면을 비워두게 하고, 오유충(吳惟忠)에게 맡겨 모란봉을 공격하여 가만히 서남쪽을 취하게 하되, 왜가 고려 군사를 쉽게 여기므로 조승훈(祖承訓)을 시켜 거짓으로 복장을 모방하고 잠복하여 기다리게 하였다.
    제독이 전령을 끝내고, 밥을 먹고 장비를 갖춘 다음 세 영(營)의 장수들과 함께 나누어 각기 소속 장병을 거느리고, 성밖 서북쪽을 둘러싸서 진을 칠성(七星)ㆍ보통(普通)ㆍ함구(含毬) 세 문밖에 벌였다. 적은 성위에 홍백색의 깃발을 세우고 항전하는데, 제독의 수하 병사 2백여 기(騎)가 성 아래까지 나가서 오가며 지휘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힘을 다할 것을 생각하였으며 진시(辰時)에는 여러 군병들을 나누어서 차례로 점차 나아갔다. 제독의 군영에서 먼저 대포를 쏘고, 각 진에서도 각종 화기를 일시에 함께 쏘니 메아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산악이 모두 움직이는 듯하였다. 큰 들판이 캄캄해지고 연기와 불길이 하늘에 닿으면 수십 리나 퍼져나가는데 불화살이 공중으로 퍼져나가는 모양이 베를 짜는 것같았다. 불길이 세고 바람이 급하여 바로 성안으로 향해 치달리니, 숲이 다 불탔으며, 먼저 밀덕(密德) 토굴을 불태워 거의 다 불붙었다.
    제독이 여기서 여러 군사를 북을 쳐 호령하여 성으로 올라갔는데, 적이 가까운 거리에 엎드려 많이 총환을 사용하고, 끓는 물과 돌덩이로써 죽기를 각오하고 막아 지켰다. 또 긴 창과 큰 칼을 사용하여 밖으로 날을 가지런히 하니 총총한 모양이 고슴도치 털과 같았다. 명 나라 군사들이 차츰 물러서자, 제독이 직접 겁내어 물러서는 사람 하나를 베어서 여러 군사들에게 돌아가며 보이고, 몸을 날려 바로 앞으로 나가서 크게 외치기를, “먼저 성위에 올라가는 자는 은 50냥을 상을 주겠다.”고 하니, 여러 군사들이 북치고 고함을 치며 일제히 나아갔다. 용맹을 뽐내며 성으로 다가가서 마패(麻牌)를 지고, 창을 들고 서로 섞여 올라가며 혹은 총을 쏘고 포를 놓으며 혹은 성가퀴를 지키는 적을 쳐 찌르니 적이 당하지 못하고 차츰 물러가게 되었다. 제독이 몸을 날려 먼저 올라서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일제히 올라갔다. 부총병낙상지(駱尙志)가 함구문(含毬門)에서 창을 들고 몸을 솟구쳐 성첩을 잡고 올라가는데 적이 성가퀴 위에서 큰 돌을 굴려 떨어뜨려 그 배를 맞추었지만 낙상지는 끄덕하지 않고 크게 외치며 뛰어올랐다. 또 절강(浙江) 군사가 적의 깃발들을 뽑아버리고 명 나라 군중의 깃발을 세우니 적병이 감히 버티지 못하였다. 우리 나라 관군도 따라 들어가며 베고 사로잡은 적이 적지 않았다. 적이 바야흐로 남쪽을 고려 군사라고 하여 가볍게 여겼는데, 조승훈이 위장했던 것을 벗어버리고 명 나라 군사의 투구와 갑옷을 드러내니, 적이 급히 군사를 나누어 막는데 조승훈이 용맹을 뽐내며 나아갔다. 장세작 등은 칠성문을 따라 대포로 문루를 쳐부수고 군사들을 정돈하여 들어가고, 이여백 등은 함구문을 경유하여 들어가며, 양원은 보통문을 경유하여 들어가서 승리한 기세로 앞을 다투어 나아갔다. 유격장오유충은 탄환에 맞아 가슴이 뚫려 피가 흐르고 다리가 부었지만, 분발하며 큰 소리로 싸움을 독려하였다. 제독은 탔던 말이 포환에 맞아 죽어 독약이 온 몸에 풍기는데, 말을 갈아타고 달려나가다 참호 속에 빠져 코끝에서 불이 나지만 군사를 휘동하여 오히려 나아가니 군사 한 명이 적 백 명을 당해내지 않는 자가 없었다. 사면으로 쳐서 죽이니 적의 무리가 무서워서 장막 속으로 달려 들어갔는데, 또 불화살을 사용하여 거의 다 불태웠다. 진중에서 머리 벤 수가 1천 2백 85급인데 그 중에는 평수충(平秀忠)ㆍ평진신(平鎭信)ㆍ종일(宗逸) 등 25명이 있었다. 생포한 것이 2명인데 통사장대선(張大膳)도 있었다. 말 2천 9백 85필을 노획하고, 왜의 기구 4백 52건을 얻었으며, 본국에서 포로되었던 남녀 1천 2백 25인을 구출하였다. 불에 타 죽은 적이 몇만 명은 되는데, 피비린 냄새가 10리는 퍼지며 그 밖의 성에서 떨어지고 물에 빠진 적이 셀 수 없이 많았다.
    행장 등이 남은 적을 거느리고 달아나서 풍월정(風月亭) 토굴로 들어갔는데, 제독이 시초(柴草)를 독려하여 운반하게 하여 사면에 쌓아놓고, 불화살을 사용하여 일시에 함께 불태워버리려 하였다. 그런데 칠성문ㆍ보통문과 모란봉의 왜적이 모두 여러 토굴을 차지하고 있어 갑자기 어찌할 수 없으며 왜적은 굴 속에서 벌집처럼 구멍을 많이 뚫고 총알을 비오듯 쏘아대니 명 나라 군사들이 쓰러지는 자가 잇따랐다.
    제독이 군사를 수습하여 본영으로 돌아와서 여러 군사들을 밥 먹이고, 통사장대선을 보내 행장에게 효유하여 말하기를, “우리 병력으로 단번에 섬멸할 수 있지만 차마 인명을 다 죽일 수는 없어 네가 살아갈 길을 열어주니 너는 속히 여러 추장들을 거느리고 원문(轅門 진영에 설치한 문)에 나와서 나의 약속을 들으라.” 하였다. 행장이 대답하기를, “저희들이 물러나 돌아가겠으니 뒷길을 차단하는 일이 없게 하여 주시오.” 하니, 제독이 허락하고 통역관으로 우리 나라에 알리어 한쪽의 복병을 철수하게 하였다. 그리고 비밀리 이영ㆍ조승훈ㆍ갈봉하(葛逢夏) 등에게 명하여 요로에 매복토록 하였다. 밤중에 행장이 남은 무리를 거느리고 도망해 갔는데 이영 등이 요격하여 3백 59급을 베고 2명을 생포하였다. 중화(中和)ㆍ황주(黃州) 등지에 군영을 설치했던 왜적은 평양의 포소리를 듣고 먼저 이미 도망쳤다.
    그때 순변사이일(李鎰)이 별장김응서(金應瑞)와 더불어 함구문으로 들어갔다가 얼마 후에 성밖으로 물러나와 유둔(留屯)하였는데, 이때에 와서야 적이 도망해 돌아간 것을 알았으나 또한 뒤따라 추격하지 않았다. 제독이 이것을 나무라고 또 이일이 장수 재목이 아니고 이빈(李?)에게 그 소임을 맡길 만하다고 하였다. 조정에서 좌의정윤두수(尹斗壽)를 보내어 이일의 죄를 문책하는데, 군법을 시행하려 하다가 얼마 후에 놓아주고 이빈으로 대신 그 군사들을 거느리게 하였다. 황해도방어사이시언(李時彦)과 김경로(金敬老) 등이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고 싸우지 않으며 이시언은 굶주리고 병들어 낙후한 자 60여 명만 베었으므로 체찰사유성룡이 베려고 하였는데, 제독이 중지시키며 말하기를, “그 죄가 죽어야 하겠지만 적을 아직 멸하지 못하였으므로 한 명의 무사도 아껴야 한다.” 하면서, 백의로 종군하게 하였다. 황주판관정엽(鄭曄)만은 행장의 뒷길을 끊어 90여 급을 베고, 중도에서 또 30여 급을 베었다.
    제독이 이미 평양에서 승전하니 여러 군사들이 다투어 가며 왜적의 물건을 빼앗았는데, 전세정(錢世禎)만이 군사들을 단속하여 물건을 취하지 않았다. 제독이 평양에 머물고 또 좌협(左協)대장장세작(張世爵)과 선봉장의 총병사대수(査大受) 등을 명령하여 진병하게 하고, 또 유성룡과 접반사이덕형(李德馨)으로 급히 앞으로 나가서 마초와 양곡을 마련하도록 독려하고 부교(浮橋)를 만들게 하였다.
    조정에서는 또 호조 판서이성중(李誠中)을 전임으로 하여 좌랑김계현(金繼賢)과 이자해(李自海)를 거느리고 군중 일행을 따르며 군량과 마초를 주관하게 하고, 또 박충간(朴忠侃)을 독촉하여 수송 관계를 주관하여 보살피게 하고, 또
    분호조판서(分戶曹判書)주D-035권징(權徵)을 보내 종사(從事)황치경(黃致敬)과 권협(權?)ㆍ중추부 경력(中樞府經歷)신암(申?)을 데리고 강화(江華)교동(喬桐)으로 들어가서, 공사간의 저장 물자를 다 징발하여 군량을 보태고 이어 충청ㆍ전라도의 해상 수송을 독려하게 하였다. 또 사간원정언극중(黃克中)을 보내어 작업을 감찰하게 하고, 의정부우의정유홍(兪泓)으로 여러 가지 사무를 총독하게 하되 모두 주야로 독촉하여 시각을 지체하지 못하게 하였다. 명 나라 조정에서는 또 흠차 경리 정왜양향 호부산동 청리사 주사(欽差經理征倭糧餉戶部山東淸吏司主事)애유신(艾維新)으로 이달에 강을 건너 양곡 운반을 독촉하게 하였다. 애유신의 호는 시우(時宇), 하남(河南)개봉부(開封府)난양현(蘭陽縣) 사람으로서 만력 병술년에 진사가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양곡 운송이 제때에 되지 않는다고 하여 검찰사김응남(金應南)과 호조 참판민여경(閔汝慶)ㆍ의주 부윤황진(黃璡)을 곤장을 때리니 가는 곳마다 모두들 부들부들 떨었다.
  • 9일. 명 나라 군사 선봉이 이미 대동강을 건너 남쪽으로 나오는데, 나뭇가지가 길을 막아 통행할 수 없었다. 유성룡 등이 이리저리 돌아 빨리 나와 군사들 앞으로 나오는데 중화에 들려 황주에 이르니 밤이 벌써 3경은 되었다. 이때에 적병이 겨우 물러가고 경내가 황폐해지고 공허한데 민중들이 보이지 않으니 어찌할 수가 없었다. 급히 글을 황해 감사유영경(柳永慶)에게 보내어 수운을 독촉하게 하고, 또 글을 평안 감사이원익(李元翼)에게 보내어 김응서(金應瑞) 등이 거느린 군사 중에 싸움을 할 수 없는 자들을 뽑아서 평양으로부터 지고 이고 뒤를 따라 황주까지 보내도록 하였다. 또 평안도 세 현(縣)의 곡식을 배로 실어 운반하되 청룡포(靑龍浦)에서 황해도로 운송하게 하였는데, 일이 미리 준비가 있은 것이 아니라 임시로 갑작스럽게 하는 것인데 대군이 뒤를 따라왔지만 군량을 제대로 공급하여 겨우 무사하게 되었다. 선봉 마군(馬軍)이 뒤를 따라 계속 떠나서 개성부(開城府) 땅 청석동(靑石洞)에 이르렀는데, 그곳은 험하고 좁으며 좌우쪽에 절벽이 하늘에 닿게 높이 서고 가운데로 외길이 통한다. 적 수백 명이 모여 있다가, 명 나라 군사들은 바라보고 달아나 숨으며 감히 맞서 싸우지 못하므로 추격하여 30여 급을 베었다. 중협장(中協將)이여백이 드디어 개성을 빼앗으니 적의 무리 수만 기(騎)가 임진강을 건너 경성으로 도망해 돌아왔다.
  • 19일. 명 나라 군사가 동파탄(東坡灘)을 경유하여 얕은 곳을 걸어서 건너 추적 습격하니 적의 무리가 크게 무너졌으며 진중에서 1백 65급을 베어 얻었다. 우리 나라 방어사고언백(高彦伯)도 와서 협공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평안ㆍ황해ㆍ강원ㆍ경기 4도가 함께 회복되고 함경도만이 청정(淸正)이 막아 지키는 곳이 되었는데, 개성이 격파되니 그 역시 경성으로 빨리 돌아왔다. 왕이 평양으로 향하여 떠나려 하여, 누각에 올라 의주 백성들을 효유하고 모든 부역을 감면하고 또 전세(田稅) 곡식을 하사하여, 서쪽으로 명 나라 서울을 향하여 망궐례를 행하고 떠났다. 승장(僧將)휴정(休靜 서산대사)이 용사 1백 명을 선발하여 거느리고 와서 대가(大駕)를 맞이하니 제독이 문첩(文帖)을 보내어 칭찬하고 권장하였는데 그 중에는 ‘나라를 위하여 적을 치는데 충성이 태양을 꿰니 흠앙하는 마음 금할 수 없다.’ 라는 말이 있었다. 또 아래와 같은 시를 지어주기도 하였다.

    공리를 도모하는 뜻이 없었고 / 無意圖功利
    도선을 배우는 데 전심하였네 / 專心學道禪
    국사 급하다는 말 지금 듣고서 / 今聞王事急
    총섭이 산에서 내려오셨네 / 摠攝下山?

  • 경략(經略 송응창)이 평양의 승전 소식을 듣고서 지휘사황응양(黃應暘)을 보내어 면사첩(免死帖 죽이지 않는다면 증명서)을 가지고 가서 서울 안의 왜노에게 붙었던 백성들을 불러내려 하는데, 안주(安州)에 이르러 왕을 뵙고 국왕의 교서를 청구하였다. 상이 잠시 장막 뒤로 들어가서, 이호민(李好閔)을 불러 교서를 지어 드리라고 하니 이호민이 구상할 겨를이 없이 즉시 초안을 작성하여 드렸는데 황응양이 이를 가지고 떠나갔다. 그 교서에 이렇게 말하였다.
  • 아아, 너희들 경성의 민중들아! 성천자(聖天子)의 밝으신 명을 공경히 듣고 소동하는 일이 없을지어다. 성천자께서 우리 한 나라 지역이 죄없이 저 미친 도적의 핍박을 당하여 도탄에 빠져서 조석간에 다 없어지게 될 것을 불쌍히 여기사 빛난 위엄으로 천자의 군대를 명하시어 구제하게 되었다. 경략 계요 보정 산동 방어왜군무 병부시랑(經略?遼保定山東防禦倭軍務兵部侍郞)송응창(宋應昌)과 제독계요 보정 산동 방해 어왜군무 도독부도독동지(提督?遼保定山東防海禦倭軍務都督府都督同知)이여송(李如松)이 병마 5만을 거느리고 이미 금년 정월 8일 계해에 평양을 진공하여 하루아침이 다 지나기 전에 성을 함락시켜 불사르고 적을 남김없이 베었으며, 획득한 수급과 갑옷ㆍ마필ㆍ기계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병기가 가리키는 곳에 군사가 머물지 않고 풍운이 빛을 움직이고 귀신이 넋을 잃었다. 남은 추위는 숙살(肅殺)하는 위엄을 돕고, 새 봄은 양화(陽和)의 은택과 화합하니, 산을 들어다 새알을 누르는 것으로도 그 성공의 쉬움을 그대로 비유할 수 없도다. 황해도에 유둔하였던 적이 영채(營寨)를 불태우고 밤에 도망가니 어느 누구도 감히 왕사(王師)를 막을 자는 없을 것이다. 뇌성같은 호령과 대쪽을 가르는 것같은 형세로 며칠내로 저 경성에 이르게 될 것인데 너희들 경성에서 예전부터 생육(生育)하던 백성은 술과 광우리 밥을 가지고 길 양쪽에 서서 맞아 위로하는 것이 황해도의 백성들이나 다름 없을 것이니 내가 구태여 번거롭게 말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생각하면, 너희 어리석은 백성들이나 노약자로 적 속에 있는 자들은 혹시라도 겁내고 박절한 중에서 살기를 꾀하려 할지도 모르지만 이는 구멍의 개미가 살려고 달아나는 격이요, 노둔한 말이 구유의 콩을 잊지 못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진실로 애통한 일이다. 또 포로가 되어 자력으로 벗어나지 못하는 자도 출몰하면서 적정을 정찰하고 주선하면서 틈탈 기회를 생각할 것이니 너희들의 실정을 보고 듣는 것은 나만이 아니라 성천자께서도 아마 불쌍히 여기고 근심하실 것이다. 지금 지휘사황(黃)이 삼가 은덕의 뜻을 받들어 가서 경성의 백성들을 불러 위무하고 너희들의 죽은 목숨을 살려줄 것이니 내가 무슨 많은 말을 하리오. 오직 성천자의 은덕의 뜻을 받들어 선포할 따름이다. 우리 성황제의 천지의 부모같은 은덕이 우리의 다 끊어진 목숨을 연장하여 주시고, 다시 우리의 다 엎어진 세업을 회복하여 주시고 그 깊은 인덕(仁德)의 남은 은택이 적에게 얽매어 있는 백성들에게 함께 미치니, 천지의 함육(涵育)해 주시는 은혜를 무슨 말로 칭송할 수 있으랴. 저 산하를 돌아보니 오직 눈물이 소매를 적실 뿐이로다. 교서가 이르는 대로, 너희들 민중으로서 저들에게 유인되어 잘못을 범한 자는 서로를 거느리고 명령하는 곳으로 돌아와서 후회하는 일이 없게 할지어다.
  • 황응양이 떠난 다음 왕이 평양으로 돌아와서 제독을 접견하고 사례하며 위로하고 효유하였으며, 또 제독에게 나아가서 서울을 회복할 것을 청하니 제독이 허락하였다. 대개 서울은 우리 나라의 도회지로, 왼쪽에는 강원도, 오른쪽에는 황해도, 동쪽은 경상도, 남쪽은 전라도가 있으며 함경도와 충청도가 서로 호응하는 형세로 되어 있어 천연의 요지를 차지하였는데, 명 나라 군사가 잇달아 이겨서 또한 적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가지니 사람들이 매우 근심하였다. 제독이 먼저 사대수(査大受)를 보내어 앞길을 정찰하고 제독도 자신이 이어 떠나서 25일에 개성부에 들어왔다.
    이보다 앞서 적의 추장은 평양에서 패한 것을 분개하고 또 혹시라도 서울 안의 사람들로서 내응이 있는가 의심하여 있는 대로 찾아내어 종루(鍾樓)에서 한강에 이르는 사이에 수만 여명을 늘어앉힌 다음 긴 칼을 빼어들고 남녀를 논할 것 없이 차례로 나가며 베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목을 늘여 칼을 받고 감히 도망하여 흩어지는 자가 없었다. 한 사람이 함께 앉은 자에게 말하기를, “아무래도 죽을 것인데 도망해 달아나면 살아날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니, 곁에 앉은 자들이 모두 중지시키며 말하기를, “오활한 생각을 하지 말라. 반드시 큰일 날 것이다.” 하였다. 그 중 혹 듣지 않고 일어나서 달아나 살게 된 자도 있었다. 그러나 그 외에는 모두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낙지(樂地)에 나가기나 하는 듯하니, 인심이 정상이 아닌 것이 이러하였다. 적은 또 여염집을 거의 다 불태웠으며 여러 곳에 유둔하였던 적이 모두 서울로 모여들어 명 나라 군사에 항거할 것을 모의하였다.
    우리 나라의 체찰사 이하가 잇달아 진병할 것을 제독에게 청하였는데, 제독이 여러 날을 지체하다가 27일에야 새벽에 덕진(德津)을 경유하여 내려가서 파주에 진영을 설치하였다. 어두운 새벽에 적 수백이 나와서 미륵원(彌勒院) 앞 들판에 진을 치자 사대수가 고언백(高彦伯)과 더불어 수백 기병을 거느리고 진격하여 적 1백 30급을 베고 달려가서 제독에게 품의하여 말하기를, “적이 이미 기가 죽었으니 빨리 진군하기를 바랍니다.” 하니, 제독이 휘하 수십 인과 더불어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나왔다. 삼협 대장들이 역시 휘하 병사 수십 명을 데리고 서로 뒤를 이어 달려나왔다. 제독이 혜음령(惠陰嶺)을 넘다가 말에서 떨어져서 낯을 상하였는데 다른 말을 바꾸어 타고 앞으로 나오니 여러 장수들도 용맹을 뽐내며 앞을 다투어가며 적진을 바라보고 나왔다. 여기서 제독은 그 군사를 지휘하여 두 날개를 만들어 가지고 앞장섰다. 적이 깃발을 여현(礪峴)에 벌여 세우고 적은 군사를 유인하여 거짓 패하여 달아나면서 진흙 수렁 가운데로 끌어들이니 그만 진흙 속으로 빠져서 말이 나가지 못하였다. 왜적이 그때는 산의 후면에서 산으로 올라와서 진을 치는데 몇 만여 명이며, 칼날이 번쩍번쩍 번득이고 깃발이 해를 가렸다. 명 나라 군사들이 바라보고 모두들 겁을 집어먹었다. 좀 있더니 적의 무리가 검을 휘두르며 나와서 두어 겹으로 둘러싸는데, 제독의 거느린 군사는 모두가 북방의 기병이라 화기(火器)는 없고 단검만을 가졌다. 적병이 앞으로 다가들며 진영을 돌격하고 좌우로 휘둘러 치니 사람과 말이 모두 쓰러지고 감히 그 칼날을 당해낼 자가 없었다. 제독이 형세가 위급한 것을 보고, 장사들을 독려하여 죽기를 각오로 싸우기를 사시부터 오시까지 하였다. 금 갑옷을 입은 왜장이 바로 제독을 치니 거의 몸에 미치게 되었는데, 지휘사이유승(李有昇)이 자기 몸으로 막아 가리면서 두어 왜노를 베고 마침내는 탄환에 맞아 말에서 떨어져서 왜노들에게 사지를 찢기게 되었다. 이유승은 요동철령위(鐵嶺衛) 사람으로 용력이 비상하고 항상 제독을 따라 좌우에서 떠나지 않았는데 여기서 죽었다. 좀 있다가 이여백(李如栢)ㆍ이영(李寧) 등이 양면으로 막아 협격하고, 이여매(李如梅)가 옆에서 금 갑옷 입은 왜적을 쏘아 죽였는데 때마침 양원(楊元)이 대군을 거느리고 겹겹이 둘러싼 적을 공격하니 왜적이 그만 물러갔는데, 명 나라 군사 중에 정예 병력이 많이 죽었다. 하늘에서는 또 큰 비가 내렸는데 서울 가까운 평지에 논두둑이 많고 얼음이 녹아 진흙에 깊이 빠지니 말이 달릴 수가 없어 사람과 말이 서로 밟고, 기구 및 갑옷과 창들은 길위에 흩어져 깔렸다. 여기에 왜는 산악을 등지고 한수(漢水)를 앞에 놓고 구슬 꿰미처럼 포진하고 널리 비루(飛樓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적을 쏠 수 있는 시설)를 세우고 조총을 구멍속에서 쏘아 수시로 사람을 죽이니 명 나라 군사가 그만 퇴각하였다. 날이 저물어서 제독이 파주에 돌아왔는데, 노상에서 원수(元帥)의 깃발을 보고는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것을 보전하여 잃어버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고 하였으며, 이유승의 사위 왕심(王審)을 불러보고 크게 통곡하며 말하기를, “호남아(好男兒)가 나를 위하여 죽었다.”고 하였다. 우리 나라 사람들을 보고는 비록 패전한 것을 숨기지만 정신과 기운이 매우 상실되었다. 밤에, 이유승의 죽음을 생각하며 아침까지 통곡하고는 이튿날 동파(東坡)로 퇴군하려 하였다.
    체찰사유성룡ㆍ우의정유홍(兪泓)ㆍ도원수김명원(金命元)ㆍ부원수이빈(李濱) 등이 제독의 장막 아래 이르러 뵙기를 청하니 제독이 장막 밖에 나와 섰고 여러 장수들이 좌우 쪽에 벌여 섰다. 유성룡 등이 말하기를, “저희들이 들으니 노야(老爺)께서 장차 서쪽으로 돌아가시려 한다는데, 노야의 깊은 의사가 어디 있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만일 작은 실패로 경계를 삼는다면 아마도 옳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승패는 병가의 상사(常事)이니 형세를 보아서 다시 진격하여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경솔하게 움직이려 하십니까?” 하니, 제독이 말하기를, “내가 어제 많이 적을 죽였으니 불리한 일은 없습니다. 다만 이곳에 비가 와서 진창이 되어 군사를 주둔하기에 불편합니다. 그래서 동파로 돌아가서 군사들을 쉬어 가지고 다시 나아가려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유성룡 등이 일제히 한 목소리로 말하였지만, 제독이 이미 초안을 작성한 주본(奏本 황제에게 올리는 글)을 내어보였다. 그 중에는, “적이 도성에 있는 자 20여 만이니 중과부적입니다.” 한 것이 있고, 끝부분에 가서는 말하기를, “신이 병이 심하니 다른 사람으로 소임을 대신함을 청합니다.” 하였다. 유성룡이 깜짝 놀라 손으로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적병이 매우 적은데 어찌 20만이 될 수 있습니까?” 하니, 제독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알 수 있으리오. 그것은 당신네 나라 사람이 말한 것이오.” 하였는데, 이는 칭탁하여 말한 것이었다. 명 나라의 여러 장수 중에도 장세작(張世爵)과 이여백(李如栢)이 더욱 제독에게 퇴병하자고 권하였는데, 유성룡 등이 굳게 다투며 물러가지 않으니 매우 화를 내며 발로 이빈을 걷어차며 물러가라고 소리치는데, 언성과 기색이 매우 사나웠다.
    이때 큰 비가 연일 와서 도로가 통하지 못하고, 적은 또 길가의 여러 산을 불태워서 벌거숭이가 되어 쑥 한 포기가 없으며 게다가 마역(馬疫)이 겹쳐서 수일 사이에 거꾸러져 죽은 말이 만 필이나 되었다. 이날 세 진영의 장수가 임진강을 도로 건너 동파역(東坡驛) 앞에 진쳤다. 이날에는 동파에서 또 개성부로 돌아오려 하자, 유성룡이 또 힘써 다투며 말하기를, “대군이 한번 물러가면 적의 기세가 더욱 교만하고 원근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임진강 이북도 보전하지 못할 것이오니, 원컨대 좀 멈추어 기회를 보아 움직이소서.” 하니, 제독이 거짓으로 허락하였는데, 유성룡 등이 물러갔다. 그런데 제독이 그만 말을 달려 개성으로 돌아가고 여러 진영도 차례로 물러갔으며, 부총병사대수와 유격장군관승선(?承宣)만을 머물러 천여 명 군사를 거느리고 임진강을 지키게 하였다. 유성룡 등이 이후로 사람을 보내어 다시 진군하기를 청하니, 제독이 느슨하게 대답하기를, “하늘이 개고 길이 마르면 진군하여 정벌하여 초토하겠다.”고 하였는데, 사실은 그럴 생각은 없었다. 증명한 시가 있었다.

    벽제관에서의 한 번 실패에 / 一自碧蹄?
    웅장한 기개 속으로 사라졌네 / 壯志乃暗消
    도리어 기미 계책에 / 還將羈?計
    왜노의 세력만 교만해졌다네 / 徒使奴勢驕
    중국 10만 군사가 / 漢家十萬師
    말 잘하는 유세객만 못하다네 / 不如說舌饒
    머리를 돌이켜 신성한 도읍 바라보니 / 回首望神都
    살기가 하늘 높이 뻗쳤네 / 殺氣干雲?

    대군이 개성부에 이르러 매우 오래 있었는데 군량이 이미 다 되었다. 오직 수로를 따라 마른 풀을 강화도에서 가져오고, 또 배로 충청도와 전라도의 마초를 운반하여 조금씩 도착하였는데, 오는 대로 다 떨어지니 그 형세가 더욱 급하였다. 하루는 여러 장수들이 양식이 모자란다고 구실을 삼아 제독에게 회군을 청하니 제독이 매우 성내었다. 체찰사유성룡ㆍ호조 판서이성중(李誠中)ㆍ경기좌도 감사이정형(李廷馨) 등을 뜰 아래에 꿇리고 큰소리로 힐책하며 군법을 가하려 하였는데, 유성룡이 다만 사죄하기를 마지 않고 눈물을 흘릴 뿐이니, 제독이 민망히 여기며 명 나라의 여러 장수들에게로 화를 돌려 말하기를, “너희들이 예전 서하(西夏)에 종군하였을 때에는 군중에서 수일 동안 밥을 먹지 못하고도 감히 돌아가자고 말하지 못하였는데 끝내는 큰 공을 이루었다. 지금 조선에 와서 우연히 수일간 양식을 대지 못하였는데 어찌 감히 문득 돌아가자고 하느냐. 너희들은 가려면 가라. 나는 적을 멸하지 않고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요, 오직 말가죽으로 시체를 싸서 가지고 갈 뿐이다.” 하니, 여러 장수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였다. 유성룡 등이 사례하고 물러나와서 시기에 맞지 않게 양곡을 방출한 죄로 개성경력(經歷)심예겸(沈禮謙)을 곤장으로 때렸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전라도에서 바다로 수송해 오는 쌀과 콩 2만 2천여 석과 황해도에서 수송해 오는 마초 수만 석이 후서강(後西江)에 닿아서 겨우 무사하게 되었다. 이날 저녁에 제독이 총병장세작을 시켜 유성룡 등을 불러 위로하고 또 군사(軍事)를 의논하였다.
    이때 전하는 말이 청정(淸正)이 또 양덕(陽德)ㆍ맹산(孟山)으로 빙 둘러 와서 몰래 평양을 습격하려 한다고 하였다. 제독이 벌써부터 서쪽으로 돌아갈 마음이 있었는데, 이것을 가지고 큰 소리로, “평양은 근본이 되는데, 만일 여기를 지키지 못하면 대군이 돌아갈 길이 없으니 구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드디어 여러 군사들에게 일제히 물러갈 것을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평양으로 향하고 유격장군왕필적(王必迪)만을 머물러 개성부를 지키게 하며 이덕형에게 조선 군사가 세력이 외롭고 구원병이 없으니, 함께 강 북쪽으로 돌아가서 적에게 승세할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유성룡이 이때 동파에 있다가 종사관신경진(辛慶晋)을 보내어 달려가서 제독을 보고, 퇴군할 수 없다는 의사를 진술하여 말하기를, “선왕의 분묘가 모두 경기 지역에 있는데, 적의 수중에 떨어져 있어 신(神)과 사람의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니 차마 버리고 갈 수 없는 것이 하나요, 경기 이남의 남은 백성들이 날마다 왕사(王師)가 오기를 기다리는데, 문득 왕사가 물러갔다는 말을 들으면 다시 굳건한 뜻을 가지지 못하고 서로 무리를 거느리고 적에게로 돌아갈 것이 둘이요, 우리 나라 강토를 한 자ㆍ한 치도 용이하게 버리지 못할 것이 셋이요, 장사(將士)가 비록 힘은 약하지만 지금 바야흐로 천병(天兵)을 의지하여 함께 나가 취할 계획을 하는데, 한번 철군의 명령이 내렸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모두들 원망하고 분개하여 사방으로 흩어져갈 것이 넷이요, 한번 물러가면 적이 그뒤를 따라 갈 것이니 비록 임진강 이북이라도 온전할 수 없는 것이 다섯입니다.” 하였는데, 제독이 그 말을 듣고 아무 말 없이 떠나갔다. 조정에서 좌의정윤두수(尹斗壽)를 보내어 퇴병하지 말 것을 청하였는데 제독이 역시 듣지 않으니 윤두수가 간절하게 사연을 말하며 동쪽으로 나가기를 청하면서 눈물이 말할 때마다 떨어지니 제독이 민망히 여기는 안색을 지었으며, 그래서 우는 각로(閣老)라는 칭호가 생기게 되었다.
    진사태현(太玄)심조환(沈朝煥)이 이러한 동쪽에서의 사실을 듣고 두 수의 율시(律詩)를 지어 탄식하였다. 그 첫번째 시는 이러하다.

    들리는 말 요양 수자리에 / 聞說遼陽戍
    위태롭고 혈전도 많다네 / 羈危血戰多
    오랑캐 진영이 새날개처럼 벌리자 / 虜營分鳥陣
    중원의 군사들 큰 물결에 휘말렸다네 / 漢卒偃鯨波
    험한 곳에 들어가는 일 병법의 비밀인데 / 入阻?鈴?
    떠도는 글은 도로에 잘못 전해지네 / 飛書道路訛
    장군님 어려움도 많으니 / 將軍自辛苦
    유세하는 그 사람 끝내 어떨런지 / 說舌竟如何

    그 두번째 시는 이러하다.

    오랑캐 항복 받는 계획 아직 이루지 못했는데 / 伏羌圖未上
    비방하는 광주리의 글주D-036 의심할 일 많구나 / 謗?摠堪疑
    말을 잃은 것이주D-037 어찌 복은 되지 않으며 / 失馬寧非福
    제후 봉한 곳에 운수가 기구하지 않으리라 / 封侯數不奇
    나라의 많은 재물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데 / 國脂流海甸
    전쟁에 죽은 시체 강가에 처참하다네 / 戰骨慘江垂
    여러 경영하는 일들 / 多少經綸事
    빈말만으로 부질없이 끌어가려나 / 空談?欲持

  • 2월. 병부에서 제문(題文 명 나라에서 관원이 공사로 황제에게 아뢰던 글의 일종)을 올려 청하여 내고(內庫)의 은 3천 냥을 내어보내어 조선의 공로가 있거나 공사에 죽은 인원에게 주게 하였다. 조선에서 왜를 막아 공로가 있거나 공사에 죽은 관원들은 그 충성과 용맹을 칭찬할 만하니 상품을 고루 나누어주라는 성지(聖旨)를 받들어 거행하였다. 그리고 다시 국왕에게 전유하기를, “각도 장령을 엄하게 독려하여 힘써 회복을 도모해서 중국에서 구원하는 뜻을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또 흠차 순안요동 겸관해방군무 감찰어사(欽差巡按遼東兼管海防軍務監察御史)주유한(周維翰)과 흠견 분수요동영원 겸둔전산서 포정사우포정사(欽遣分守遼東寧遠兼屯田山西布政司右布政使)한취선(韓取善) 등을 보내어 군사를 감찰하고, 흠차 통령천귀 한토관병 참장(欽差統領川貴漢土官兵參將)유정(劉綎)과 원임(原任) 참장허국충(許國忠) 등으로 계속 구원하게 하였다.
    주유한은 호는 도우(?宇)인데 북직례(北直隷)하간부(河間府)부성현(阜城縣) 사람이며, 만력(萬曆) 경진년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평양으로 왔는데, 성품이 간결하고 정중하여 우리 나라 사람들과 서로 접촉하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명 나라 사람들도 꺼려하였다. 한취선은 호는 성암(惺菴)인데 산동제남부(濟南府)치천현(淄川縣) 사람이다. 만력 정축년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으며, 사람됨이 매우 정직하였다. 유정은 자는 자신(子紳)이요, 호는 성오(省吾)인데, 강서(江西)남창부(南昌府)홍도현(洪都縣) 사람이다. 사천(四川)ㆍ파촉(巴蜀) 지방 군사 5천 명을 거느렸는데 그 중에는 해귀(海鬼) 수십 명이 있으니 그 종족이 남번(南番)에서 생장하여 낯빛이 아주 새까매서 귀신같으며, 바다 밑으로 잠수하여 다녔다. 또 키가 큰 사람이 있으니 형체가 두 길은 되는데 말을 탈 수가 없어 수레를 타고 왔다. 또 미후(??)로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타고 앞에서 길을 인도하는데 적진중에 들어가서 말 굴레를 풀어놓기도 하였다. 허국충은 남방 군사 포수 1천 명을 거느렸는데, 머리에는 흰 사모두건을 쓰고 몸에는 소매가 짧은, 우리 나라 나장(羅將)의 옷같은 것을 입었는데 색깔은 적ㆍ백ㆍ청ㆍ황색을 사용하였으며, 불화살ㆍ대포ㆍ창ㆍ칼의 기술을 잘 사용하는데 모두 왜노보다 나았으며 잇따라 강을 건너서 왔다.
    이때, 대군이 이미 서쪽으로 물러갔기 때문에 왜노의 여러 추장들이 경성에서 그 세력을 합하여 형세가 더욱 성하였다. 전라도순찰사권율(權慄)이 수원독성(禿城)으로부터 휘하 정병 4천 명을 나누어서, 전라도절도사선거이(宣居怡)로 선봉장을 삼았는데, 자신은 조방장(助防將)조경(趙儆)의 군사 2천 3백 명을 거느리고 양천(陽川)을 경유하여 진군하여 고양(高陽)의 행주산성(幸州山城)에 진을 쳤으며, 선거이는 금천산(衿川山)에 영채를 설치하여 멀리서 도움을 주었다. 전라도소모사(召募使)변이중(邊以中)이 역시 정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양천산에 주둔해 있으면서 자신이 감독 제조한 화차(火車) 3백을 나누어서 권율의 진중으로 보내었다. 서울 안의 왜적이 권율의 군사가 적은 것을 탐지하고 마음에 두지도 않으며, 발끝으로 차서 거꾸러뜨릴 계획으로 군사들을 다 거느리고 나왔다.
  • 12일. 새벽에 정탐군이 보고하기를, “적이 좌우익(左右翼)으로 나뉘어서 홍색과 백색의 깃발을 가지고 본영을 향하여 온다.” 하였다. 권율이 군중에 명령하여 높은 곳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5리쯤 거리에 있는 들판 언덕 위에 적의 무리가 이미 가득 찼는데, 선봉 백여 명의 기병이 어느 사이에 점점 가까이 오더니 잠시 후에는 수만여 명의 군사가 들판을 덮어오는데 모두 홍기와 백기를 등에 지고 황금 일산을 펴들었으며 귀신의 얼굴, 짐승의 형상으로 심히 괴이하게 분장한 자가 본영을 둘러싸고, 맨 나중에는 많은 군사로 계속 나와서 두세 겹으로 둘러쌌다. 권율이 곧 군중에 전령하여 식사를 하게 하고 활 잘 쏘는 군사들을 뽑아 내려다보이는 곳에 배치하고 화살을 내려 쏘기를 비오듯 하였다. 또 용사들을 뽑아 돌을 던져 공격하며 계속하여 화차에서 석환(石丸)을 쏘고 또 각종 화기를 발사하니, 적이 진영을 세 곳으로 나누어 한편으로 군사들을 쉬게 하면서 번갈아 가며 나왔다. 권율이 검을 빼어들고 싸움을 독려하였는데 묘시에서 유시에 이르는 동안에 적이 아홉 번 진출하였다가 아홉 번 다 퇴각하였다. 그리고는 마초 묶음을 가지고 바람을 따라 불을 놓아 우리 성채를 불태우는 것을 성중에서 물을 부어 구원하였다. 처음 승군장(僧軍將)처영(處英)으로 승군 1천 명을 거느리고 서북쪽에서 있는 근처의 성을 지키게 하였는데, 이때 와서 승군이 좀 물러가니 적이 크게 외치며 밀고들어와 온 군사가 휩쓸렸다. 그런데 권율이 스스로 검을 휘두르며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니 모두들 칼날을 무릅쓰고 육박해 나가며 싸우자 적이 지탱하지 못하고 일시에 달아나 흩어졌다. 그리고 시체를 네 무더기로 모아놓고 마초를 모아 불태우니 냄새가 10리나 퍼졌다. 우리 군사들이 싸우면서 머리 벤 수가 1백 10급이요, 왼쪽 귀가 두 개이며, 빼앗은 활ㆍ살ㆍ투구ㆍ갑옷ㆍ칼ㆍ총 등 병장기가 모두 7백 27건인데, 살아남은 왜적은 통곡하면서 성으로 돌아갔다.
    총병사대수(査大受)가 이때 임진강에 있으면서 왕래하며 정찰 탐지하다가 권율이 크게 승첩한 소식을 듣고 와서 보았는데, 진영을 정돈하여 기다리니 깃발들이 선명하고 병장기가 정밀하고 예리하며, 호령이 엄숙하고 부서 대열이 어지럽지 않으니 사대수가 공경하여 대접하며 감탄하여 말하기를, “권씨 집안 군대는 다른 진영과 특별히 다르다. 외국에도 장수다운 장수가 있다.” 하였다. 경략송응창(宋應昌)은 자문을 본국에 보내고, 포상을 시행하게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왜노(倭奴)가 조선 왕국을 꺾어 함락함으로부터 삼도(三都 한양ㆍ개성ㆍ평양)와 여러 군현이 모두 소문만 듣고 달아나고 흩어지며 한 명의 영웅호걸도 의병을 일으켜 큰 국난을 배제하고 맡은 지역을 지켜 회복을 도모하는 자가 없으니, 나라에 사람이 없다고 할 만하였다. 유독 전라도관찰사권율이 외로운 성을 막아 지키면서 민중들을 불러모으고 자주 특이한 모계를 써서 때때로 큰 적에게 항거하였으며, 근일에는 다시 모래를 주머니에 모아 양식인 척 속여 왜를 유인하여 와서 모이게 하고 공격하여 섬멸하였으니 이는 바로 왕국이 위급할 때의 충신이요, 중흥의 명장이다. 지금 붉은 비단 네 필과 백금 50냥을 상으로 주어 충성과 용맹을 권장하게 한다.

송 경략은 또 우리 나라로 하여금 작위와 녹봉을 더하여 본국의 대신ㆍ관료들을 깨우치게 하였으며, 병부 상서석성(石星)은 글을 올려 이렇게 아뢰었다.

조선 여러 도(道) 중에서 홀로 전라도에서 정사를 펴고 명을 거행하는 배신(陪臣)권율이 외롭고 위태로운 곳을 지켜서 강경한 적을 항거하였으니 권장하고 상을 주는 전례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황제의 전지에, “조선은 강국이다. 지금 전라도에서 참획한 수가 많은 것을 보니, 그 나라 백성은 아직도 진작시킬 만하다. 짐이 매우 가상히 여기는 일이니 해부(該部)에서는 알라.” 하였다.
이리하여 병부에서 홍로시(鴻?寺) 관원을 보내어 선유하고 상여한 물건이 매우 많았다. 이 후로 명 나라 조정에서는 문무 대소 장수와 관원이 권율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반드시 말하기를, “이 사람이 전일 행주에서 승전보를 아뢴 이인가?” 하며, 반드시 문서를 보내어 은근한 뜻을 표시하였으며, 우리 나라에서도 자헌대부로 승진시켜서 상을 주었다. 그것을 증명하는 시가 있다.

순찰사 훌륭한 이름 바다 지역을 진동하여 / 巡察英名動海區
군사 이끌고 바로 올라와 왕도를 진압했네 / 提兵直上壓王都
창을 비껴 든 장한 기운은 적을 삼킬 수 있고 / 橫戈壯氣能呑敵
피를 마셔 맹세하는 영웅의 마음은 한 몸을 버리기로 하였다네 / ?血雄心在殞軀
황제의 글이 내려오니 삼군이 흥기하고 / 天書旣下三軍躍
옥으로 장식된 검을 반포하자 모든 장교들 나와 절하네 / 玉劍?頒列校趨
큰 공훈 깃발 날려 사직을 보존하니 / 勳合?常存社稷
능연각(공신의 화상을 모시는 곳)에 훗날 새 화상이 걸리겠네 / 凌煙異日掛新圖

이 제독이 행군하여 평산(平山)보산역(寶山驛)에 이르러, 행주에서 승첩한 소식을 듣고 군사를 후퇴한 것을 뉘우치면서 이여백(李如栢)을 책망하여 말하기를, “큰일을 지체하여 지금까지 성공하지 못한 것이 모두 너 때문이다.” 하니, 대개 이여백이 그 서울 진공을 중지하자고 하였던 것이다. 제독이 여기서 장세작(張世爵)으로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다시 개성부로 가서 양곡을 모아 저장하여 기다리게 하고 제독은 인하여 평양으로 돌아가서 성안에 머물러 주둔하였다.
권율은 여기서 군사를 이동하여 서쪽으로 올라와서 제도(諸道)도원수김명원(金命元) 및 부원수이빈(李?)과 더불어 파주산성을 근거하여 지키고, 방어사고언백(高彦伯)ㆍ이시언(李時言)과 조방장(助防將)정희현(鄭希賢) 등은 유격장이 되어 해유령(蟹踰嶺)을 차단하여 막으며, 의병장박유인(朴惟仁)ㆍ윤선정(尹先正)ㆍ이산휘(李山輝) 등은 오른쪽 길을 따라 경릉(敬陵)ㆍ창릉(昌陵) 사이에 복병하고 각기 그 군사로 출입하며 유격전을 벌이되 적이 많이 나오면 피하고 싸우지 않으며, 적게 나오면 그뒤를 따라 요격하였다. 창의사(倡義使)김천일(金千鎰)과 경기 수사이빈(李?), 충청 수사정걸(丁傑), 전 전라 병사최원(崔遠)은 강화도에서 배를 타고 용산(龍山)서강(西江)을 따라 혹은 물러가고 혹은 나오면서 적의 세력을 분산시켰다. 충청도순찰사허욱(許頊)은 이미 윤선각(尹先覺)을 대신하여, 권율과 더불어 서쪽으로 올라와서 양성(陽城)에 있었는데, 다시 본도로 돌아가서 수호하면서 적의 남쪽으로 공격해 올라오는 세력을 방비하게 하고, 양근 군수이여양(李汝讓)도 용진(龍津) 상류에 있으면서 적의 여기 저기로 날뛰는 것을 방어하니 우리 나라 병세가 매우 장엄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벤 적의 머리를 모두 개성 남문 밖에 매달아놓으니 명 나라의 참장여응종(呂應鍾)이 보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조선 사람들이 지금은 적의 머리 취하기를 공 놀리듯 한다.” 하였다. 하루는 적이 동대문으로 나와서 크게 산골짜기를 수색하였는데 양주(楊州)적성(積城)에서 대탄(大灘)에 이르는 동안에 아무런 전과가 없자 약탈을 마지 않았다. 총병(總兵)사대수(査大受)가 적이 습격하여 올까 두려워하여 유성룡 등을 멀리 피하게 하며 또 거느린 용사 수십 명을 나눠 보내어 와서 호위하게 하며 밤을 새워 경비하였다. 이때 적이 행주의 패전을 보복하려 하여 화군(火軍)을 거느리고 서로(西路)를 따라 나와서 광탄(廣灘)에 이르니 파주산성과는 수십 리 떨어졌다. 군사를 주둔하고 나오지 않으며 오시에서 미시에 이르기까지 공격하지 않고 도로 물러갔는데, 이렇게 하기를 세 번 정도 하고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 이때 적이 경성을 차지한 지 이미 2년이 지나 적병의 칼날이 미치는 곳에 천리 사이가 텅 비어 있고 백성들은 농사를 짓지 못하여 거의 다 굶어 죽었다. 서울 성안의 남은 백성들이 갖은 고생으로 붙들고 이끌며 메고 지고 와서 우리 군중으로 들어왔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사 총병이 말타고 가다가 노상에서 어린 아이가 죽은 어머니의 젖을 먹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기고 거두어 군중에서 기르며 우리 나라 사람을 보고 하는 말이, “왜적이 아직 물러가지 않았는데 백성들이 이렇게 되었으니 앞일을 어찌 할 것인가.” 하며, 또 탄식하여 말하기를, “하늘이 걱정하고 땅이 슬퍼할 일이다.” 하였다.
마침 남방의 양곡을 실은 배가 강언덕에 와서 정박하고 전라도 소모관(召募官)안민학(安敏學)도 겉곡식[皮?] 10만을 모집하여 배로 수운하니, 곧 전 군수남궁제(南宮悌)를 감진관(監賑官)으로 임명하여 솔잎으로 가루를 만들어서 솔잎가루 열 홉에 쌀가루 한 홉을 섞어 물에 타서 마시도록 하였지만 사람은 많고 곡식은 적어서 살아난 사람이 얼마 안 되었다.
중국 장수도 역시 불쌍히 여겨 군량 30석을 나누어 주었지만 백의 하나도 미치지 못하였다. 하루는 밤에 큰 비가 왔다. 굶주린 백성들이 좌우쪽에 있으면서 슬피 부르는 소리가 처량하여 차마 들을 수가 없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여기 저기에서 쓰러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경상우도 감사김성일(金誠一)이 역시 전 전적(典籍)이노(李魯)를 보내어 체찰사부(體察使府)에 급한 사정을 고하며 말하기를, “전라 좌도의 곡식을 가져다가 주린 백성들을 진휼하여 구제하고 또 봄갈이 씨앗으로 사용하려 하는데 전라 도사가 구제미로 꾸어주려 하지 않으니 나누어주게 하여 주십시오.” 하므로, 체찰사부에서는 공문을 체찰부사김찬(金瓚)에게로 보내었다. 김찬이 이때 호서(湖西)에 있었는데, 전라도로 급히 가서 직접 남원 등지의 창고를 열어 1만 석을 영남으로 옮겨 구제하게 하였다. 대저 경도(京都)에서 남변(南邊)까지는 적병이 가로질러 있고 인민들은 산위에 오르고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서 밭 갈고 심은 곳이 없으니, 적으로 하여금 다시 수개 월간만 물러가지 않게 하였더라도 백성이 다 없어졌을 것이다.
제독이 앞서 병을 칭탁하고 다른 사람으로 대신하게 하기를 청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서울의 적이 20여 만이다.’ 하고, 또 ‘관백(關白)이 배를 띄워 들어가 침범한다.’는 설이 있는 등 극히 장황하니 경략이 이를 듣고서 3월에 원임(原任)계진 동협부총병 후부서도독첨사(?鎭東?副摠兵後部署都督僉事)왕승은(王承恩)과 통령 유격장군 지휘동지(統領游擊將軍指揮同知)왕여징(王汝徵) ㆍ중군 기고(中軍旗鼓)장구경(張九經) 및 수영 참장(隨營參將)소국부(蘇國賦)ㆍ원임 통판심사현(沈思賢)ㆍ감생(監生)도량성(陶良性)ㆍ유격장군오종도(吳宗道) 등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 안주(安州)로 나와서 주둔하였다.
왕승은은 대녕(大寧)전위(前衛) 사람인데 얼마 안 되어 사사로이 관아에 소속된 말을 팔아먹은 사실로 경략의 규탄을 받아 파직되어 갔으며, 왕여징은 마ㆍ보병 2천 명을 거느렸는데 경략이 정주(定州)ㆍ영원(寧遠) 등지에 나누어 주둔하게 하였다. 장구경은 호를 봉죽(鳳竹)이라 하였는데, 하남(河南)수양부위(?陽府衛) 사람이요, 심사현은 자는 방달(邦達), 호는 사천(沙川)이라 하였는데 절강(浙江)소흥부(紹興府)여요(餘姚) 사람이다. 도양성은 호는 양오(養吾)인데 절강건주부(虔州府)진운현(縉雲縣) 사람이며, 오종도는 자는 여행(汝行), 호는 석루(石樓)인데 절강소흥부산양현(山陽縣) 사람으로 무진사(武進士) 출신이며 오래도록 우리 나라에 주둔하여 깊이 사정을 잘 알아 상사(上司)에 자세히 설명하였다. 경략이 급히 제독에게 격문을 보내어 기회를 타서 진병하게 하고 또 부총병동양정(?養正), 중군왕승은 등을 나누어 보내어 가서 철산(鐵山) 해안에 봉화대를 설치할 만한 곳을 살펴보게 하였다. 철산군 땅에 이르니 고을 사람이 화문석(花紋席)을 주었는데 동양정이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후에 일이 있어 파직되었다. 태현(太玄)심백함(沈伯含 조환〈朝煥〉의 자)이 〈의동정개가(擬東征凱歌)〉 여덟 수를 지어 경략에게 주었다.

큰 조개는 누르고 고래는 날으는 혈전의 전장에 / 蜃壓鯨飛血戰場
군사 백만이 요양을 지났네 / 干戈百萬度遼陽
쌍무지개 밤에 비치니 요사한 기운이 조용하여 / 雙虹夜照妖?靜
넓은 바다의 새로운 광명 붉은 해가 비치네 / 滄海新回赤日光

주나라 기자 봉했던 옛 제후 나라에 / 周箕封國古諸侯
강산을 회복하니 계책도 장하구나 / 恢復山河屬壯猷
대장은 아홉 관문 지나 용맹한 장병 몰고 가는데 / 大將九關?虎豹
중원의 1만 기병은 준마로 달리네 / 中原萬騎控혁?

적우전 날려 궁성에 승전 보고하는데 / 分飛赤羽報丹서
팔도의 금과 꼴로 천자의 군대에 공급한다네 / 八都金?供六師
행장 등 다투어 와서 씩씩한 위용을 엿보아 / 行長爭來窺虎步
오랑캐 임금이 직접 와서
용기주D-038에 절하리 / 夷王親自拜龍旗

말을 달려 티끌 일으키는 중원 장수 영웅인 것이 / ?馬吹塵漢將雄
관군들 일제히 모란봉에 오르네 / 官軍齊上牧丹峯
악당의 시체들 모아 큰 무덤을 만들고
동주주D-039로 표할 것이 / 封鯨作觀標銅柱
동해 넓은 물결에 큰 바람 보리 / 東海洋洋覽大風

압록강 물 깊은데 밤에 무기를 씻는 것이 / 鴨綠江深夜洗兵
중국의 조두소리
점성주D-040 곁에서 들리네 / 漢家?斗傍?城
오랑캐 물결 참담한데 교만한 기색 없으니 / 夷波慘?無驕色
천자의 분부가 옥경(신선이 거처한다는 곳)에 있다네 / 天子分付在玉京

붉은 색 큰 깃발에 해 떨어지자 자색 기운 어두워지는데 / 日落紅旗紫氣昏
금인과 옥대 진영의 문에 가득하네 / 腰金拖玉滿轅門
온 군사 번개치듯 변방에 바람이 이니 / 全軍電掃邊風逐
여러 격서 날으는 곳에 바다 위의 해라도 삼키네 / 列檄雄飛海日呑

오랑캐 척후 모두 가요 부르니 / 夷方斥?盡歌謠
말하는 선비 말이 없고 싸우는 군사 쓰러지네 / 說士無言戰士消
다시 동쪽 위세로 북벌을 엄히 하니 / 更遣東威嚴北伐
두 손으로 일월 받들어 남조를 향한다네 / 雙擎日月向南朝

작인주D-041 높이 달고 준여(군기의 일조)를 지나는데 / 鵲印高懸度??
위엄을 선양하니
위타서주D-042 보내지 않으리 / 宣威不遣尉?書
전라도경상도에 장책 행하니 / 全羅慶尙紆長策
만세토록
요황주D-043이 황제 계신 곳을 향하리 / 萬歲要荒拱帝居

경략이 또 군자금을 청하니 천자가 다시 형금(?金) 20만 냥을 내주어 군비에 보태게 하고, 흠차 사험군공 병부무선 청리사주사(欽差査驗軍功兵部武選淸吏司主事)가유약(賈維?)을 보내어 안주(安州)에서 공을 조사하고 군사를 위로하였다. 가유약은 자는 무경(無?)이요, 호는 지백당(知伯堂)인데 북직례(北直隷)순천부(順天府)준화현(遵化縣) 사람이다.
이때 평수가(平秀嘉)가 용산창(龍山倉)을 점거하였는데 쌓인 곡식이 수십만 석이요, 경성으로 그들의 소굴을 삼았다. 제독이 이에 이영(李寧)ㆍ조승훈(祖承訓) 등으로 1만 명 기병을 거느리고 개성에 주둔하게 하고, 양원(楊元)을 명하여 평양에 진을 치고 대동강을 점검하여 군량길을 잇게 하며, 이여백(李如栢)은 보산역(寶山驛) 등지에 주둔하여 도움을 주도록 하며 사대수(査大受)는 이전 그대로 임진강을 지키게 하고, 제독 자신은 몸소 동서로 살펴보면서 조절하였다. 또 비밀리 사대수를 시켜 결사대를 모아 샛길로 나가서 용산에 쌓인 곡식을 불태우게 하니 왜적이 식량이 결핍하여 동남쪽 여러 고을로 나가 노략질하여 마음대로 빼앗으니 땅굴 속에 감추었던 미곡까지 모두 파내어 가져가게 되었다. 또 가평(加平)ㆍ포천(抱川)으로 향하고 깊숙히 춘천까지 들어가서 불을 놓고 빼앗기를 거의 다하였다. 청정(淸正)은 또 졸병을 천여 명 혹은 수천 명씩 나누어 보내어 노략질하기를 마지 않으며 서울 주위 군읍에는 무덤까지도 파내니 보기에도 참담하고 가슴이 아파 통곡할 만한 일이었다. 증언하는 이런 시가 있다.

사람 사는 연기 천리간에 거칠고 쓸쓸해지니 / 人煙千里?蕭瑟
귀신이 울고 원망하는데 밤에는 도깨비 불만 푸르르구나 / 鬼哭神怨夜燐靑
긴 끈으로 오랑캐를 얽어맨다고 부질없이 말하지만 / 浪說長纓堪繫虜
깨끗이 맑게 하는 공 누가 다시 창명을 진정하나 / 廓淸誰復鎭滄溟

제독이 철병할 의사를 가지면서도 근심에 잠겨 결정을 못하였는데 군막 중의 선비 정문빈(鄭文彬)ㆍ조여매(趙如梅)가 역시 화친하기를 권하고 군사 파하는 것을 주장하였다. 병조 판서이항복이 처음 제독을 중강(中江)에서 맞이하고 돌아와 왕께 아뢰기를, “제독의 군사가 기율이 있으니 반드시 이 도적을 격파할 것입니다. 다만 막하에 정문빈과 조여매 두 사람이 일을 주장하니 방해가 있을까 염려됩니다.”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과연 그대로 되었다. 그런데 두 사람 역시 경략에게 규탄을 당하였다. 대개 평양을 극복할 때는 그 기세가 매우 성하고 다시 개성에서 싸워 형세가 대쪽을 가르는 것같았는데, 두 사람이 중간에 있으면서 그 마음을 동요시켰으며 벽제(碧蹄)에서 패전하게 되자 기운이 크게 꺾였다. 또 이 역에 와서 군사를 상실하고, 질병이 성행하니 여기서 두 사람의 모계를 받아들여 급히 휴식하여 판을 매듭지으려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왜적 역시 양식이 결핍되고 군사는 종기가 많이 생겼다. 또 명 나라 군사가 다시 호준포(虎?砲) 등의 대포 및 전차를 강위에 벌여놓고 전세가 날로 커지니, 적의 추장 행장(行長)이 평양에서의 패전을 경험 삼아 돌아갈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때마침 창의사김천일(金千鎰)의 군중에 이신충(李藎忠)이라는 자가 자청하여 서울에 들어가서 적정을 탐지하다가 두 왕자 및 장계군(長溪君)황정욱(黃廷彧) 등을 만나보고 돌아와서, 적이 화친할 의사가 있음을 말하면서 왕자의 글 및 황정욱 등의 장계를 내놓았다. 그 장계 등은 모두 두 본이 있는데 진본 장계에서는 적중의 사정을 자세히 쓰고 또 그 언문으로 자세히 적었으며, 위본 장계에는 적이 말하는 대로 썼는데 그 중에는 관백 전하라는 말도 있으며 또 신(臣) 자를 쓰지 않았으니, 그 계교가 대개 임시방편으로 적을 속이려는 의사에서 나온 것인데 스스로 주위 사람이 비밀리 엿보는 데 빠져들어가는 줄을 깨닫지 못한 것이었다.
창의사김천일이 이신충의 전하는 글을 얻고 또 용산에서 수군이 적의 추장과 통화(通和)하는 글을 얻었는데 모두 체찰사에게 보냈다. 체찰사는 다만 위본 장계 한 건을 등록하여 행재소에 계달하고 또 말하기를, “신하로서 차마 듣지 못하고, 말할 수 없는 말이 있습니다.” 하였다. 또 왜적의 글로 사대수(査大受)에게 보이니 사대수가 곧 가정(家丁)이경(李慶)을 시켜 평양에 달려 보고하였다. 조정에서는 황정욱 등이 적에게 절개를 잃고 또 의심할 만한 일이 있다고 여겨 침을 뱉으며 더럽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어 후일 국문하는 단서를 열어놓았다. 이것은 모두 일찍이 철원에서 격서(檄書)를 전할 때에 사성황신(黃愼)이 붓을 들고 지은 내용 중에, “묘당에서 힘써 금(金) 나라와의 화친을 주장하니
진회(秦檜)주D-044의 고기를 먹어야 하고, 간신이 제일 먼저 촉(蜀)으로 행행(行幸)할 것을 주장하였으니 국충(國忠)주D-045의 머리를 베어 매달아야 한다.” 하였는데, 그 뜻이 실은 누구를 가리킨 대상이 있었기 때문에 체부(體府)에서는 이 말을 듣고 원래 벌써부터 원한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에 와서 모함하는 흔적이 있는 것을 사람들이 바로잡지 못하였다. 그런데 당시의 일은 은미하고 굴곡된 실정을 자세히 알기 어려웠고 사람들의 말 역시 믿을 수 없었다. 이후로 전쟁과 화친 두 가지의 일로 서로 논란하고 변명이 있었으니 명 나라 조정에서도 잘 분간하지 못하였다.
만력(萬歷) 20년 임진 6월부터 21년 계사 3월까지 도합 2년간이다

 


청장관전서 제64권

청령국지주B-001 1 ??國志一

인물 人物

명 나라 신종황제(神宗皇帝)가 천하의 군사를 움직여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 등을 보내어 잇달아 쳐서 크게 부수고, 계사년(1593)에 황제가 심유경(沈惟敬) 등을 명호옥으로 보내서 화평을 의논하게 하였다

 

청장관전서 제57권

앙엽기 4 ?葉記四

명 나라 군대가 우리나라를 기롱한 일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 주D-001이 그의 저서인 《백사잡저(白沙雜著)》에서 논변하기를,

"임진왜란 때 명 나라 군대의 하급 병사(兵士)가 의주별관(義州別館)에,

망한 나라의 대부들은 아침을 다섯 번씩 먹는데/亡國大夫朝五食

동쪽으로 정벌나온 장사들은 날마다 점심을 굶네/東征將士日午飢

하고 써놓았으니, 대체로 우리나라를 기롱한 것이다.
그리고 경자년(선조 33, 1600) 1월에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비문(碑文)에 '임진년 12월 25일에
압록강을 건너왔는데 체찰사(體察使)인 조선 수신(朝鮮首臣) 유성룡(柳成龍)ㆍ윤두수(尹斗壽) 등은
와신상담(臥薪嘗膽) 주D-002에 유념하여 치욕을 씻고 흉적을 제거할 일에 마음을 두지 않고 사가(私家)에 편히 앉아 마음 내키는 대로 술마시며 스스로 즐겼다. 그리고 중국 조정을 업신여길 뿐 아니라, 또한 국왕(國王)을 기만하는 등 예의에 어긋나고 교양에 벗어나는 행동이 자못 심하였다.' 했다."

하였다. 우산(牛山)의 기록은 여기까지이다. 슬프다! 당시의 제공(諸公)들이 어찌하여 상국(上國)에게 이와 같은 소리를 듣게 되었는가? 아마도 무고(誣告)한 말일 것이다. 《명사(明史)》에 또,

"조선(朝鮮)은 원래 나약해서 은혜와 원수를 갚으려는 마음이 없다."

하였으니, 이것도 역시 무고에 가까운 말이다. 또 《명사(明史)》를 상고하건대, 만력(萬曆) 29년(선조 34, 1601)에 병부(兵部)에서 조선에 나와 있던 경략(經略)과 도독(都督)들이 올린 일곱 가지 일을 다시 중국 황제에게 아뢰었는데 그 대략에,

"고려 사람은 사납고 추위를 견디어내지만 장삼(長衫)에 소매가 큰 옷[大袖]을 입으며 군사 훈련에 방법이 없으니 마땅히 속오법(束伍法)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조선(朝鮮) 팔도(八道)에는 열에서 아홉 곳은 성(城)이 없으니 마땅이 수축(修築)하고 주둔군을 모아서 예상 밖의 환난(患難)에 대비해야 하며, 조선의 풍속은 세관(世官 대대로 벼슬한 집안)을 귀히 여기고 대대로 부역[世役]함을 천히 여기기 때문에 일체 금고(禁錮)당한 사람들은 이따금 오랑캐에게 도망갑니다. 이 때문에 본국(本國)의 근심거리가 되기도 하니, 마땅히 그러한 습속을 뿌리뽑아야 합니다."

하였으니, 이 몇 가지는 우리나라의 병통을 어김없이 지적했다 하겠다.

[주 D-001] 안방준(安邦俊) : 자(字)는 사언(士彦)이고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그는 성혼(成渾)에게 배웠고 박 광전(朴光前)과 함께 의병(義兵)을 모집(募集)하기도 하였다.
[주 D-002] 와신상담(臥薪嘗膽) : 원수를 갚기 위하여 마음을 다지고 어려움을 견디어냄을 말한다. 즉 섶에 앉고 쓸개를 맛본다는 뜻. 춘추시대에 오왕(吳王) 부차(夫差)는 월왕(越王) 구천(句踐)을 쳐 부왕의 원수를 갚으려고 늘 섶단을 깔고 앉아 신고(辛苦)를 견디었고, 월왕 구천은 오 나라를 쳐서 회계(會稽)에서 받은 욕을 씻으려고 늘 곰의 쓸개를 문에 달아놓고 출입할 때마다 쓸개를 핥으면서 복수를 잊지 않았다는 고사(故事)에서 온 말이다.

 

청장관전서 제9권

아정유고 1 雅亭遺稿一 - 시 1

벽제점(碧蹄店)에서


계사년 명 나라 군사가 왜적과 싸울 때/天兵癸巳齒倭鋒
철마는 진흙창에 지쳐서/鐵馬蹄勞?土濃
재빠른 호접진 미처 막지 못하여/未抵輕?蝴蝶陣
바람을 향하여 통곡하던 이여송주D-001
/臨風痛哭李如松
가끔가다 호미 끝에 총탄이 걸려나와/往往鋤頭觸鐵丸
마을 색시 꿰어차고 둥글둥글한 것 사랑하네/村娥綴佩愛團團
태평스레 자랐으니 어찌 알리/太平生長那由識
갑옷을 뚫고서 장사에게 상처준 줄/透甲曾成壯士瘢

[주 D-001] 계사년 명 나라 군사가 왜적과 싸울 때/天兵癸巳齒倭鋒 철마는 진흙창에 지쳐서/鐵馬蹄勞?土濃 재빠른 호접진 미처 막지 못하여/未抵輕?蝴蝶陣 바람을 향하여 통곡하던 이여송 : 호접진(蝴蝶陣)은 진법(陣法)의 하나로 왜적들이 즐겨 썼다. 임진왜란 중이던 계사년(1593)에 명 나라에서 구원병으로 나왔던 제독(提督) 이여송은 벽제(碧蹄)에서 왜적의 유인에 말려 그만 진흙 속에 빠져 탄 말이 나오지 못했다. 이여송은 몹시 위급하게 되었는데 지휘사(指揮使) 이유승(李有昇)의 구원으로 다행히 탈출하였으나 이유승은 끝내 왜적에게 잡히어 죽고 말았다. 이여송은 그의 사위 왕심(王審)을 불러 보고 크게 통곡하였다.
《再造藩邦志 卷二》

 

청장관전서 제24권

편서잡고 4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범례(凡例)

기유년(정조 13, 1789) 5월 공(公) 주D-001과 박제가(朴齊家)에게 함께 편찬하라고 명하였다. 자세한 것은 부진설(附進設) 가운데에 보인다.
한교(韓嶠) 주D-002의 《무예제보육기(武藝諸譜六技)》 1권에 전후하여 증보(增補)한 것을 합하면 총 24기(技)가 되는데 이것의 이름을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라고 내렸다. 이제 여러 기술(技術)을 수집하고 널리 많은 책들을 인용하여 문득 일통(一統)을 이루었으니, 그 명칭과 범례를 만약 개정(改正)하지 않으면 본말이 혼동되기 쉽고 주객을 분변하기 어렵게 된다. 그러므로 《대전통편(大典通編)》의 예(例)를 모방하여 그 옛것과 새것에 따라 '원(原)'과 '증(增)'으로 표를 하고, 목(目)은 작은 글자로 아래에 쓰고, 글은 큰 글자로 위에다 표시를 하였다.
그리고 이미 위에 표시한 것은 비록 문단을 바꾸더라도 거듭 표를 하지 않고 상문(上文)을 따른 뒤에야 '통지(通志)'라고 이름지은 뜻이 비로소 명석(明晳)해진다.
만약 변증(辨證)할 것이 있으면 작은 것은 글귀 사이에 '안운운(案云云)'이라 쌍서(雙書)하였고, 큰 것은 별항(別行)으로 한 자 낮추어 '안운운(案云云)'이라 썼다. 그리고 무릇 원(原)ㆍ증(增)ㆍ안(案) 자에는 다 광(匡 검은 네모 바탕을 말한다)에 흰 글자로 했으며, 굉강(宏綱)과 세목(細目)을 다 임금께 아뢰어 결재를 받았다.
널리 열성조(列聖朝)에서 군문을 세우고 편찬한 병서(兵書)와 《내원시열(內苑試閱)》을 상고하고, 《전사(前史)》 본기(本紀)가 연(年)을 경(經)으로 하고 월(月)을 위(緯)로 한 것을 모방하여 사건을 따라 차례를 배정하고 이름을 《병기총서(兵技總書)》라 하여 따로 수권(首卷)을 만들었다.
다만 옛날과 지금의 기록한 것이 상세하고 간략함이 동일하지 않다. 그러므로 연조가 없는 것은 '아무 조[某朝]'라고만 썼고, 달수가 없는 것은 우선 빼버렸다. 《내원시열》에 매해마다 한 것은 '해마다 준례로 했다[歲以爲常]'라고 했고, 어쩌다 한 번씩 보인 것은 '뒤에도 이와 같다[後亦如之]'라고 하였다. 그리고 어원(御苑)과 어당(御堂)에 있어서는 어떤 것은 기록하고 어떤 것은 기록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대강
《시예일기(試藝日記)》주D-003를 따른 것이다.
병기(兵技)는 찌르는 식[刺]ㆍ내리쳐 쪼개는 식[?]ㆍ돌격하는 식[擊]의 세 가지 방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 창(槍)ㆍ칼[刀]ㆍ주먹[拳]의 3기(技)로 첫머리를 삼고 각각 종류별로 따랐다. 그리고 교전(交戰)하는 방법은 왜검(倭劒)에서 나왔으므로 그대로 붙여 두고, 마재(馬才)는 격구(擊毬)하는 법과 가까우므로 그 아래에 두었으며, 기(騎)ㆍ보(步)ㆍ관(冠)ㆍ복(服)의 도설(圖說) 또한 그 다음에 두었다. 각 군영의 기예(技藝)는 전수(傳授)되는 것이 각각 다르므로 고이표(考異表)를 만들어 끝에 붙였다.
모든 병서를 참고로 열람하여 기계도식(器械圖式)에 만약 제도(製度)와 양식(樣式)이 금식(今式 현재 행하고 있는 방식)보다 좋을 듯한 것이 있으면 먼저 화식(華式 중국의 법식)을 그리고 다음에 금식을 그렸으며, 또 왜식(倭式 왜가 행하던 방식)이 있으면 금식의 다음에 두어 식(式)을 개조(改造)한 데 대한 참조로 대비하였다.
원서(原書)의 기계도해(器械圖解)는 다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주D-004를 따라 잘라내서 옆에다 그리고, 종횡(縱橫)으로 잔글씨로 쓴 것을 이 편집에서는 간혹 늘려서 큰 글씨로 썼다. 그러므로 줄이고 합치는 사이에 어떤 것은 한두 글자를 거꾸로 넣어서 고친 것이 있으니, 말은 간단하고 뜻은 완벽하게 하려 한 것이다.
척씨(戚氏)의 《기효신서(紀效新書)》와 모씨(茅氏)의
《무비지(武備志)》주D-005는 이 책을 편집하는 데 표준(表準)으로 삼아서 다른 책과는 비교할 수 없으므로 다른 책에서 인용(引用)한 것은 '아무 책[某書]에 말하기를……'이라 하였으나 척씨(戚氏)와 모씨(茅氏)의 책에 이르러서는 특별히 '척계광(戚繼光)이 말하기를……, 모원의(茅元儀)가 말하기를……'이라고 쓴 것은 낮춘 것이 아니고 관습(慣習)이 되어 숭상하는 뜻을 보인 것이다. 또 척씨와 모씨의 소전(小傳)을 찬집하여 권수(卷首)에 기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실을 알게 하였다.
한교(韓嶠)의 《사실훈국연기합성안설(事實訓局緣起合成案設)》 1편(篇)을 골라서 《기예질의(技藝質疑)》의 아래에 기재해두어 앞사람이 창작한 공로를 오래도록 빛나게 하였다.
이 책은 장령(將領)과 졸오(卒伍)로 하여금 누구나 환히 통달케 하려고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혹 벽자(僻字)나 오문(奧文)이 있으면 따로 음의(音義)를 주(註)내었고, 인물(人物)ㆍ여지(輿地)ㆍ기용(器用)ㆍ동식물(動植物)과 같은 유에 이르러서는 간략히 주해(註解)하였다. 그리고 보통 것으로 주석할 가치가 없는 것과 드물어 억지로 소(疏)낼 필요가 없는 것은 번잡한 것을 없애고 간략한 것을 취하기에 힘썼다.
창(槍)의 제도에는 마땅히 창자루의 재목을 살펴야 하며, 검(劒)의 제도로는 마땅히 쇠의 품질을 살펴야 한다. 그러므로 옛날과 지금의 각국에서 사용한 창자루의 재목과 연철(煉鐵)의 법을 아울러 창검의 아래에 두어서 선택하여 사용하는 데 자료삼게 하였다.
원서(原書)에는
등패(藤牌) 주D-006가 있는데 금제(今制)에는 표창(?槍)이 없으니, 대개 도표(刀?)와 방패가 서로 따른 뒤에야 공격할 수 있고 방어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제 도표를 등패의 아래에 붙였다.
비록 지금 사람들이 익히는 것이 아니더라도 용검하는 자세와 곤법(棍法)과 권법(拳法)이 치고 찌르는 데 자료가 될 만한 것은 널리 여러 가지 도보(圖譜)를 상고하여 각각 그 아래에 두었다.
구도(舊圖)에 혹 좌우의 자세를 상실하고 장단(長短)의 법식에 위배된 것이 있는 것은 이제 하나하나 살피고 연구해서, 인물(人物)은 그 의복의 무늬와 향배(向背)를 분별하고,
형명(形名) 주D-007은 그 원첨(圓尖)과 수칠(銹漆)로 분변하였다.
보군(步軍)의 관복(冠服)은 구도(舊圖)는 척도(戚圖 척계광의 도보)에 의존했는데 파수(?首 머리띠.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맨 것)와 복장에 대해 그 색깔과 모양을 이해할 수 없으므로 이제 다 개정하였다.
구서(舊書)에 그린 각기(各技)의 보군(步軍)은, 한 장(張) 한 면(面)에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나 네 사람을 그려서 사람의 수가 동일하지 않으므로 연구하고 살피는 데 혼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한장 양면[一張兩面]에 각각 상하로 두 칸을 만들어 위 칸에는 각 기예(技藝)의 자세를 쓰고 아래 칸에는 사람을 그리되 두 사람에 지나지 않게 하였고, 마상(馬上)의 모든 기예는 구서대로 한 면에 한 사람 만을 그렸다.
도(圖)는 아래에 있고, 보(譜)는 위에 있는데 보설(譜說)은 부득불 도식(圖式)을 따라서 나누고 합하였다. 보군은 비록 일면(一面)에 병립(?立)했더라도 따로 한 자세[一勢]를 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그 보에다 동그라미를 그려 그것으로 다음 사람을 분별하였는데, 왜검(倭劒)ㆍ천류류(千柳流)ㆍ유피류(柳彼流)ㆍ예도(銳刀)ㆍ거정(擧鼎)ㆍ점검(點劒)의 유가 그것이다.
그 첫째 줄에 있어서 상문(上文)과 서로 연결되지 않은 것은 동그라미를 그리지 않았다. 마군(馬軍)은 위 문장과 연결되어 끝맺는 말이 있으나, 문세가 이미 분속(分屬)되어 오로지 하단(下段)에 연속된 것과 같은 것이 있다. 월도(月刀)와 같이 좌측을 돌아보고 한번 휘두른 그 밑에 우측을 돌아보고 한번 후리는 것이 세 차례 있는 유가 그것인데, 이것은 또한 마땅히 위 문장에 연결하여 보아야 한다.
구보(舊譜)는 산도(散圖)만 있고 합도(合圖)는 없는데, 이제 《무비지(武備志)》의 제세총보(諸勢總譜)의 예(例)를 모방하여 보를 만들고 《무비지》에 동그라미 하고 자세 이름을 쓴 것은 다 그림으로 대신하였고 또한 《여지도(輿地圖)》의
백리척법(百里尺法) 주D-008에 의거하여 기반영격(棋盤影格) 주D-009으로 받아서 보법(步法)을 균일하게 하였다.
구서총보(舊書總譜)에는 물러나면 순하게 쓰고 나아가면 거꾸로 쓴 것이 자못 패엽(貝葉 범서(梵書))의 옆으로 간 글씨보다 심한 점이 있다. 이제는 다 그 자세의 이름을 동그라미하여 먹줄로 칸을 만들고, 그 지세(地勢)를 따라 시작과 끝나는 표시를 써서 종횡으로 돌리며 길을 따라 선을 찾으면 환히 알 수 있게 하였다.
원서에는 언해(諺解)를 도보 사이에 섞어 두어서 보기가 어려우므로 이제 언해를 떼어 내어 따로 한 책으로 편집하여, 책에 붙이면 보기에 편하고 떼어 놓더라도 단행본(單行本)이 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그 말투가 고금이 서로 다르고 도시와 시골이 서로 혼동되었으므로 하나하나 개정하고 기계의 제도와 신찬해설(新撰解說)은 우선 번역(?譯) 하지 않고 요약을 따랐다.
예도(銳刀)는 이미 모씨(茅氏)의 세법(勢法)으로 도보를 만들었는데 지금 연습하는 도보와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부득불 금보(今譜)로 따로 총보(總譜)를 만들고, 또 별도로 모설해(茅說解)를 만들어서 이미 익힌 자로 하여금 배운 것을 폐하지 않게 하고, 익히지 못한 사람에게는 근본한 것이 있음을 알게 하였다.
곤봉(棍棒)의 여러 가지 자세는 서로 같은 자세가 많으므로, 그 문장을 깎아내고 다만 '어느 자세에서 어느 자세까지는 위와 같다……' 하였고, 언해는 알기 쉽게 하고자 하였으므로 본문(本文) 대로 썼다.


[주 D-001] 공(公) : 이덕무(李德懋)를 가리킨다. 청장관(靑莊館)의 유고(遺稿) 정리를 그 아들인 이 광규(李光揆)가 하였으므로 저자(著者)를 공(公)이라 칭한 것이다.
[주 D-002] 한교(韓嶠) : 조선(朝鮮)의 학자. 자(字)는 자앙(子仰), 호(號)는 동담(東潭), 본관은 청주(淸州)인데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하였고 병학(兵學)에 통달하였다. 인조(仁祖) 26년(1648)에 특별히 훈련도감 낭청(訓鍊都監郞廳)이 되고 일찍이 명장(明將) 이여송(李如松)이 일본군을 격파할 수 있는 새로운 전략서라 일러 준 척계광(戚繼光)의《기효신서(紀效新書)》를 주해(註解)하였다. 저서(著書)로는《동담집(東潭集)》이 있다.
[주 D-003] 《시예일기(試藝日記)》 : 무예(武藝)를 시험한 사실을 기록한 책이다.
[주 D-004] 《기효신서(紀效新書)》 : 명(明) 나라 정원(定遠) 사람 척계광(戚繼光)이 저술한 병서(兵書).
[주 D-005] 《무비지(武備志)》 : 명(明) 나라 사람 모원의(茅元儀)가 지은 병지(兵志).
[주 D-006] 등패(藤牌) : 옛 무기의 하나. 등(藤)으로 둥근 방석처럼 엮어서 만든 방패이다.
[주 D-007] 형명(形名) : 기치(旗幟)와 북으로 군대의 여러 가지 행동을 호령하는 군대의 신호법(信號法)을 말한다.
[주 D-008] 백리척법(百里尺法) : 땅을 재는 데 사방(四方) 1백 리를 사방 1자로 축척(縮尺)하여 재어 가는 법.
[주 D-009] 기반영격(棋盤影格) : 바둑판같이 종횡(縱橫)의 선(線)을 그려 간격을 고르게 한 것.

 

청장관전서 제54권

앙엽기 1 ?葉記一

망건(網巾)

전에 들으니 중국의 배우들이 망건을 사용했기 때문에 어떤 때는 우리나라 사람에게 무역해 갔고, 안남(安南)ㆍ유구(琉球)에서도 망건을 착용했지만 보통 때에는 착용하지 않고 조공(朝貢)할 때에만 잠시 썼다고 한다. 일찍이 이여송(李如松)의 화상을 평양(平壤)에서 배알했는데 변자(邊子)가 매우 넓었다. 영종조(英宗朝)에 넓은 변자를 금지시키고 다만 주척(周尺) 반 치를 허락하였었는데 지금은 너무나 좁다.

또 남자가 머리를 기르고 관례를 행하지 않았을 때에는 먼저 변자를 사용했는데 앞에서부터 뒤에 이르기까지 죽 머리를 묶어 매는 것으로 이름을 '변자륵두(邊子勒頭)'라 하였다. 나도 아이 시절에 그것을 보았으나 후에는 없어졌다."

 

청장관전서 제67권

입연기 하 入燕記下

정조 2년 윤6월

1일(기미) 잠시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40리를 가 여양역(閭陽驛)에서 점심을 먹고, 40리를 가 신광녕(新廣寧)에서 유숙했다.

  • 광녕은 북으로는 의무려산(醫巫閭山)이 있고 남으로는 큰 바다여서 몽고(蒙古)ㆍ여진(女眞)ㆍ조선의 요충(要衝)이 되는 곳이므로 맹장(猛將)이 아니면 지킬 수 없다. 그러므로 명조(明朝) 때에 장군(將軍) 이성량(李成樑)이 이곳에 살면서 노아합적(努兒哈赤)의 아비와 할아비 2대(代)를 죽여 노아합적과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가 되었으니, 일곱 가지의 대한(大恨)으로 하늘에 고한 맹세가 실로 이에서 연유한 것이다.

  • 아침에 출발하여 포시(?時)에 압록강(鴨綠江)을 건너니 부윤(府尹)이 청마랑(淸馬廊) 가에 장막(帳幕)을 치고 삼사(三使)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동안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성에 들어갔다. 밤에 도강 장계(渡江狀啓)를 써서 배지(陪持) 편에 발송하였다. 오늘 구련산 고지(故址)를 지나면서 비로소 조선의 여러 산들을 바라보니 일대가 미망(微茫)하여 사람의 눈을 뜨게 한다.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군사를 이끌고 이곳에 이르러 조선의 운산(雲山)을 바라보며
    군사들에게 맹세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던 것을 생각하니, 그 말이 매우 강개하여 사람들의
    장렬한 기개를 더하게 한다

자료출처:성주이씨 쉼터 이상복 종친님 자료

문경공 형재(휘 직)--대표적인시 (가마귀 검다 하고)

                                                                                                        이상복 종친님의 자료

제   목

가마귀 검다하고           - 이 직 -

내   용

      가마귀 검다 하고 백로(白鷺)야 웃지 마라.

      것치 거믄들 속조차 거믈소냐

      아마도 것 희고 속 검을슨 너 뿐인가 하노라.
                                                      
      <청구영언>

[현대어 풀이]

까마귀가 빛깔이 검다고 백로야 비웃지 말아라.

겉이 검다고 한들 속가지 검겠느냐 ?

아마도 겉이 희면서 속(마음 속)이 검은 것은 너뿐인가 하노라.

[창작 배경]

고려가 망하자 고려 유신들은 절의를 지키며 초야에 묻혀 망국의 한과,
새 왕조에 가담한 자들에 대한 비난의 화살을 던졌다. 이에 새 왕조에
가담한 이들은 자기 합리화와 정당성을 작품으로 나타내었다.  
작자는 고려 유신의 한 사람으로 새 조선조의 개국 공신으로 벼슬을
하였다.
두 왕조를 섬긴 자신을 '가마귀'에 비유한 것은 "충신은 불사이군"이라는
정신에 입각하여 자신의 처신이 바른 것만은 아님을 밝히고자 했고,
속마저 검은 것은 아니라고 함으로써 자신의 양심은 부끄럽지 않음을
강조한 것이다.

[이해와 감상]

겉으로는 군자(君子)인 척하면서 실제 내면은 그렇지 못한
소인(小人)배 들을 풍자한 작품이다.
도량이 좁고 한때의 지조와 의리만을 밝히는 이들의 겉다르고 속다름을
훈계한 시조이다. '까마귀'와 '백로', '겉'과 '속', '희고'와 '검은'은
적절한 대조를 이루어 군자와 소인을 은유적으로 풍자하고 있는 시어
들이다. 고려와 조선 두 왕조를 섬기며 양심을 피력한 작품이다.

이 시조에서 '가마귀'는 '처신이 올바르지 않아 오해를 살 수도 있지만
양심은 올바른 존재'이고, '백로'는 처신은 올바른 척 하지만 양심은
바르지 못한 존재'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개관 정리]

□ 성격 : 평시조, 풍자시
    □ 표현 : 의인법
    □
주제 : 소인에 대한 훈계 및 스스로의 결백 주장

[감상을 위한
읽을거리]

: 퍼온 글

까마귀와 해오라기(白鷺)의 경우와 비교, 곧 우유매(寓喩賣)에
의해 겉과 속이 다른 소인배들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비록  까마귀는 겉은 검고 흉악한 모습일지라도 새끼가 다 자란 후에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보답할 정도로 효행(孝行)이 지극한 동물이라
하여 예로부터 흔히 반포조(反哺鳥)라 불리고 있다.
여기에 비해 해오라기는 겉은 청순하고 순결하며 아름다운 듯하지만
속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마치 우리 속담의 '빛좋은 개살구'
격이라고나 할까. 겉으론 군자인 체하면서도 실제는 그렇지  못한 인간들
겉으론 우국지사(憂 國志士)인 듯하면서도 속은 그렇지 못한 위선자들을
까마귀와 백로의  예를 들어 풍자하고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선조님이 남기신 글

아래 내용은 성주이씨 쉼터(이상복종친님) 의 자료(이지화 님의 올린글입니다)

開城 留守 樂山齋公 諱 億年 (농西郡公 2世)

靑山何處
十載紅塵夢外事
靑山何處獨掩扉

十年벼슬 길이 번거롭고 꿈같으니
어디메 靑山을 찾아 홀로 지낼까
(벼슬을 사양하시고 咸陽 馬川面으로 들어가시면서 作詩)

▣ 政堂文學 文烈公 梅雲堂 諱 兆年 (농西郡公 2世)

1. 梨花에 月白하고 (일명 : 多情歌)
梨花에 月白하고 銀漢이 三更인제
一枝 春心을 子規야 알랴마는
多情도 病인양하여 잠못들어 하노라
(忠僕心懷 之詩)


2. 白花軒
爲報裁花更莫加
數盈於百不須過
雪梅霜菊淸標外
浪紫浮紅也만多

주섬주섬 이 꽃 저 꽃 심을 것 없다.
百花軒 百까지 꽃차야 멋인가
매화꽃 국화꽃이 맑고 좋은데
울긋불긋 다른 꽃 부질없구나.


3. 遺筆
千里東歸客無心
思舊遊掛帆游白
水高枕到凉州
遺廟丹靑落空山
草木長猶聞辭後
主不復臥南陽
山月皎如燭霜風
時動竹夜半鳥驚
捿窓間人獨宿
山中春己晩處處
見花稀明日來應
盡林間宿不歸
江動月移石溪虛
雲傍花鳥捿知古
道帆過宿誰家
白日依山盡黃河
入海流欲窮千里
目更上一層樓

무심코 생각나는 지난날 遊歷이라
돛단배 白水에 떠 놀고
편안한 잠 凉州에 닿고였지
遺廟엔 단청이 떨어졌고 빈 산엔 草木만이
무성 코나 소문 같아서는 辭位한
後主는 復位치 못한 채 南陽에 누웠다네
山月은 밝아 촛불 같은데 서리 바람
때때로 대숲을 뒤흔드니 한밤에 새들도 놀라
지새우는 어수선한 틈바구니 나 홀로 잠이 드네
山中엔 봄도 이미 늦은지라 어디서나
꽃 보기 드물 도다 來日이 닥쳐 應訴가
끝이 나면 숲 속에 잠들어 돌아가지 못하리
江물 요동치니 죽을 일 나련마는 개울비어
구름만 속절없이 꽃을 이루네 새들도 제고향 길
아련마는 돛배 가벼렸으니 누구 집에 묵으리요
밝은 해 山에 의해 진다해도 黃河만은
바다로 흘러드니 못 견딜 손 천리 먼 내나라
보고 파 다시 오르노라 또 한 층의 누대를


▣ 門下侍中 文忠公 樵隱 諱 仁復 (농西郡公 4世)

1. 錄軍人語
深院春光暎
崇臺月影淸
何來歌舞地
戰鼓有新聲

軍 中에서
깊은 절에 봄볕이 따뜻한데
높은 데에는 달빛 더욱 맑다.
올해는 춤과 노래 어울리더니
싸움 알리는 북소리가 새롭도다.

2. 送薛符寶還大明
帝運初興漢
民心久戴商
羨君來對使
愧我末觀光
驛路山橫翠
船窓月送량
贈言吾不녕
努力更流芳

薛符寶를 보내면서
帝運은 漢나라가 설 때와 같이 융성하고
民心은 옛 商나라 때처럼 순수하구나
당신이 나오시어 사신을 맞으시니
나는 관광도 못하였음이 부끄럽도다
驛路는 山들이 둘러쳐 푸르고
船窓에 부딪는 달빛이 서늘하였다
나 같은 어리석은 자에게 이르기를
노력하여 다시 流芳케 하라셨다.

3. 寄元朝同年馬承旨傳學士
每向瓊林憶醉歸
賜花春○影遲遲
別來更覺交情厚
老去安知世事非
駑鈍尙慙懷棧豆
鵬飛誰復顧藩籬
請君莫笑東夷陋
海上三山聳翠微
※ ○ : 日변에 西밑에 大

元朝의 동갑 마승지에게
매양 瓊林을 찾아 취하여 돌아오고
꽃을 주던 마음 봄처럼 따뜻하였는데
작별한 뒤 정을 나눈 뜻을 생각하나
늙어 가면 세상일을 어찌 기약할지
駑鈍하나 사소한 일 얽매임을 부끄리고
붕새가 나니 어찌 새장에 다시 갇히기를 원하리
청컨대 東夷가 누추하다고 웃지 마오
海上三山이 우뚝 솟아 더욱 푸르다오

4. 次伽倻寺住老韻
林下閒開綠野堂
溪山勝景稻魚鄕
菊將松竹成三逕
琴興圖書共一牀
但願交遊繼支許
何須富貴羨金張
古人可笑歸來晩
환路風波浩莫量

伽倻寺 노승에게
수풀아래 한가롭게 綠野堂을 열었으니
산골짝 좋은 경치 稻魚鄕이 되었다
국화는 松竹과 함께 三逕을 이루고
거문고와 도서는 한 책상에 모였다
다못 사람도 어우려 교유하기 원하니
어찌 부귀와 돈 많음이 부러울소냐
옛 사람은 늦게 깨달음을 웃겠지만
벼슬길 풍파가 많아 측량하기 어렵다

5. 誠齋詩上柳侍中濯
誠者性之德
不妄故不息
所以大君子
於此必用極
我身係安危
我居宜勤飭
窓扉폐虛明
欄檻去雕飾
透이退自公
燕坐至移刻
新扁人具瞻
表正影斯直
望重專鈞衡
功崇在社稷
魁然旁杜間
萬古作永則

삼가 柳侍中 濯에게 誠齋詩를 올림
진실됨은 인간이 지닌 덕목이라
쉬지 않고 행하여도 그르침이 많구나
그런 까닭에 크시고 큰 군자는
우리의 본이 되어 길을 인도하신다
나의 몸이 安危에 얽매어 있어서도
나는 부지런히 마음을 갈고 닦았다
창과 사립문은 虛明을 막아 버리고
난간은 공교히 꾸미는 것을 삼갔다
비틀거리며 물러나서 스스로 공변되고
편히 앉은 사이에 세월만 흘렀다
새로 단 현판은 사람이 저마다 보니
表가 발라서 이 곧음이 번져가리라
명망은 國政을 온전하게 하고
공적이 드높아서 사직에 들었도다
헌걸차기는 막힘이 없는 분이어서
만고에 길이 길이 본받을 만 하도다.

6. 送柳思庵 淑
人間膏火自相煎
明哲如公史可傳
己向危時安社稷
更作平地作神仙
五湖夢斷烟波綠
三逕秋深野菊鮮
顧我未能投緩去
邇來雙빈雪飄然

柳思庵 淑을 보내고
인간사 괴로움은 서로 속태움에 비롯하나
공의 명철함은 역사에 전할 만 하도다
위급한 때 나아가서 사직을 편안케 하고
물러나 은거하니 곧 신선이로다
五湖의 꿈은 깨어지고 물결만 푸르른데
三逕에 가을이 깊어 들국화가 선연쿠나
내 그대 좇아 꾸준하지 못한 사이에
두 갈래 수염만 눈처럼 희었군 그래.

7. 送楊廣按廉使韓哲仲十六韻
經術儒爲貴
廉能世所賢
判花參國論
捧簡肅朝聯
敭歷名旣著
澄淸志益堅
先聲威鐵鉞
行色耀旌패
王事雖云急
民生亦可憐
繭絲方絡繹
烽火尙連延
海竭烟生조
山空枾滿川
流亡思樂土
鰥寡望豊年
己學無恒産
誰謂解倒懸
賑窮宜速發
聽訟豈容偏
野曠田疇활
春晴景物鮮
郡樓江繞練
官路柳飛綿
題영交珠玉
謳歌人管鉉
佇看風績立
應向月卿遷
顧我今衰矣
臨岐獨암然
願君須努力
吾道更扶顚

楊廣按廉使 韓哲仲을 전송하며
經術하는 선비는 귀중한
청렴과 재능은 세상에서 어질게 여기네.
判花를 찍어 國論에 참여하였고
白簡을 받들어 조정을 숙청하였네.
좋은 벼슬 지내어 이름 더욱 나타났고
천하를 맑힐 뜻이 더욱 굳어졌네.
先聲은 떨쳐서 위엄이 더하고
행차하는 깃발이 번쩍 빛나네.
王道를 펴는 일 급하다 하지만
백성의 생활 또한 가련하다오.
稅吏는 한창 연이어 있고
烽火가 아직도 이 산 저 산에
바다가 말라서 부엌에 연기 나듯
산이 텅 비어 개울에 가득한 감.
流民들은 낙토를 그리워 하고
홀아비 과부들은 풍년만 바라고 있네.
恒産이 없음을 깨달으니
거꾸로 매달린 듯, 급한 형편 뉘라서 풀어주리
구호미를 빨리 내 놓아야 하고
송사를 공정히 다뤄야 하리.
헌칠한 들판엔 논밭이 다스려졌고
봄날의 경치가 신선히 빛난다.
郡樓엔 흰 비단 강물이 둘러 있고
한길엔 솜 날리는 버들 강아지
둘러보면 珠玉같은 현판의 시들
아뢰는 管絃의 칭송하는 노래.
훌륭한 행정 실적 곧 올리고
응당 月鄕을 향하여 옮기리다.
이 몸이 지금 늙어버렸으매
그대 보내는 눈물 홀로 머금네.
원하건대 그대여 마땅히 힘써서
우리 다시 만나 붙들고 반겨 보세.

8. 題蘭坡李御史居仁壽父卷
의蘭生有香
故與君子配
操入宣父琴
納爲楚客佩
高風縱云遠
○馥今猶在
夫君亦有美
藝此勤灌漑
芳根幾許深
綠葉尤可愛
方期雨露濡
豈被蓬蒿碍
時於九원間
潔己正相對
榮華發容顔
和順積肝肺
所居必移氣
明德應無悔
君子勉旌哉
惟以佐時人
※ ○ : 謄에서 言대신 貝

蘭坡 李御史 居仁의 부친에게 상수한 권축에 題하여
난초는 갓 피면서 향기 있으니
옛날부터 군자와 더불어 짝이 되었다.
곡조는 宣父의 거문고에 들어오고
엮어서는 楚臣의 패물이 되었네.
높은 풍도는 비록 멀어졌으나
그윽한 향기는 지금도 남아 있도다.
우리 벗 또한 아름다운 자품이라
난초를 심어 부지런히 기른다.
꽃다운 뿌리는 얼마나 깊은 지
푸른 잎은 더욱 사랑스러워라.
바야흐로 雨露의 젖음을 바라는데
어찌 쑥대의 방해함을 입으랴.
그대 때로는 九원(동산)의 사이에서
몸을 깨끗이 하여 서로 대하니
영화로움은 얼굴에 나타나고
화한 기운은 肝과 肺에 쌓인다.
사는데 따라 기운이 바꿔지나니
맑은 덕은 어두워짐이 없으리라.
그대여, 부디 힘쓰고 힘쓰라.
그리하여 나라의 다스림을 도우게나.

9. 己酉五月十二日入試院作[用東坡韻]
高堂下瞰淵魚行
白袍滿前吟嘯聲
筆床碩枯日影橫
閉戶絶餉防漏透
恐渠苦心成丈瘦
大官無羊惟腐豆
御史監試來乘○
問誰冬烘一禿翁
得酒更慙雙頰紅
※ ○ : 馬변에 忽

己酉年 五月 十二日 試院에 들어가 東坡 韻을 써서
높은 당 위에서 굽어보니 연못의 고기처럼 줄지어 섰네
흰 도포를 입은 선비가 그득하여 읊는 소리 휘파람소리
붓 꽂이에 벼루는 마르고 해 그림자는 비껴 있다.
문 닫고 바깥 음식 막는 뜻은 누설을 막아서지만,
저들의 苦心 이러다간 너무 여윌까 걱정이 되네.
太宮(음식을 공급하는 관청)에 羊肉이 없고 오직 두부 반찬이다.
어사가 시험을 감독하러 말을 타고 와서는
흐리멍텅한 한 늙은 첨지에게 누구냐고 물으니
술을 얻어 마신 차에 더욱 부끄러워 두 볼을 붉히네

10. 鄭相國軍葡萄軒次韻
架上葡萄密
園中庶草稀
托根方張玉
引蔓故憑依
勢似龍蛇走
恩霑雨露肥
滿계初覆壓
繞屋欲旁圍
側展靑羅被
橫垂碧縷衣
嵐光浮院落
雲彩動창扉
嘉菓期秋熟
凄風恐葉飛
味珍殊可貴
酒力豈云微
試問爲州樂
何如一醉歸

鄭軍 相國댁의 葡萄軒에 次韻하여
시렁위에 포도 덩굴 가득찼으니
동산에 잡풀이 드물구나.
뿌리박아 바야흐로 무성하려니
덩굴 벋어 짐짓 서로 의지해 있네
龍蛇같이 내닫는 모양,
雨露의 은혜로 한껏 굵었네.
섬돌 위에 가득히 눌러 덮더니
집을 둘러 가 녘으로 퍼져 나가네.
옆으로 펼친 모양 靑 비단 이불
가로 늘어선 맵시 파랑 실끝.
푸른 아지랑이 後院에 뜨고
채색 구름 어른어른 창에 비치네.
고운 열매가 가을엔 익을 것이니
모진 바람에 잎이 날릴까 두렵네.
맛도 진기하지만
빚어 마시는 술 기운도 약하지 않네.
묻노니 고을 살이가 즐겁다지만
한번 취해 봄이 어떠 할는지.

門下侍中 廣平府院君 文肅公 勝巖 諱 仁任 (농西郡公 4世)

1. 孝思館 會盟文
云云本國無賴之徒扶瀋王之孫來
寓北鄙窺유王位凡我同盟戮
力固拒翊戴嗣王上報先王之德下保父母妻子有투
此盟非惟國家明正其罪天
地宗社山川之神必降陰誅

효사관에 모여 맹서한 글
보국의 무뢰한 자들이 瀋王의 손자를 두둔하여 북쪽 군벽한 곳에 있으면서
왕위를 엿보고 있으니 우리 동맹은 힘껏 막아내고 금왕을 받들고 도와서
위로는 선왕의 덕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부모와 처자를 보호할 것이니
이 맹서를 어긴 자는 국가에서 그 죄상을 밝혀 바로잡을 뿐 아니라
천지 종사와 산천의 신들이 반드시 내려 오셔서 벌을 줄 것이다.

2. 呈元中書省書 (遺筆)
云云本國自始祖皇帝龍興之時我忠敬王首先朝覲欽蒙
聖恩得此聖朝諸王駙馬世襲之例授以王爵釐降公主忠
烈王爲駙馬生忠宣王忠先王生忠肅王皆襲王位自英宗
皇帝時江陽君滋子完澤禿瀋王暠本國支派相別妄爭王
位蒙朝廷區別不能爭奪先王白顔帖木兒是忠肅王親子
襲位二十四年遺旨令親男元子禑襲位謹遺判密直金서
申達訃音前赴朝廷今來乃知完澤禿瀋王孫脫脫不花實
非釐降公主流派妄生異心欲要爭襲甚偉始祖皇帝定制
乞賜禁約

元나라 中書省에 올린 글
운운하되 본국에서는 시조 황제께서 창업을 이룩하실 때부터 충경왕이 다른 곳보다 먼저 조공을 바쳐 성은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후 여러 왕들이 대대로 부마가 되어 왕작을 얻는 것이 세습화 되어 의리로서 공주를 시집보내시니, 충령왕이 부마가 되어 충선왕을 낳고 충선왕이 충숙왕을 낳으니 다 왕의에 올랐습니다. 영종 황제때에 江陽君 滋의 아들 完澤禿 瀋왕 暠는 본국 지파로서 요망되게 왕위를 다투가가 조정의 현명하신 구별로 능히 쟁탈하지 못하였습니다. 先王 白顔帖木兒는 충숙왕의 친아들로 二十四年을 왕위에 있었고 유지로서 명하기를 친아들 禑를 왕위에 오르게 하였기에 삼가 制密直 金 를 보내 부음을 신달하였습니다. 앞서 조정에 부음을 전하고 지금 다시 온 것은 完澤禿·瀋王의 손자인 脫脫不花가 진실로 의리로써 출가 시킨 공주의 자손도 아니면서 요망하게 딴 마음을 품고 왕위를 다툼이 시조 황제께서 정하신 제도에 어긋난 것을 알고서입니다. 이를 금하는 약속을 바랍니다

3. 戒勿遷都啓
云云今逕賊在境첨我虛實(指瀋王脫脫不花)不可徙
深地示弱況又年飢倉늠경竭而使行者영粮居者失所其
可乎且乘輿所至供億甚繁遷都之擧徒取民怨非久安之
計也

遷都를 반대하는 啓
이제 강한 도적의 무리(瀋 王脫脫不花를 가리키는 말)가 변방에 있으면서 우리의 虛實을 엿보고 있으니 깊은 곳으로 옮겨 약함을 보이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물며 흉년이 들어 창고마다 비었으니 옮겨 갈 자는 먹을 것이 없고 남을 자는 할 바를 잃을 것이며 또한 수레를 타고 이르는 곳에 공급할 일이 매우 번잡할 것이니, 천도하고자 하는 일은 백성들의 원망을 취할 따름이지 오래 안전할 계책이 못되는가 합니다.


▣ 密直司事 進賢館 大提學公 慕隱 諱 仁立 (농西郡公 4世)

密直司事進賢館 大提學慕隱公前
李牧隱 贈詩
可歸不歸韓山翁
可留不留提學公
提學年强又無病
仲氏赫赫臨朝中
古來行道重乘勢
掛帆濟海須長風
公言我家京山府
宗族內外多英雄
瓜牙腹心烈將相
氣○홀翕摩倉穹
滿而不溢古所戒
乞身勇退如飄蓬
縉紳歎服手加額
知止知足誰能同
君不見君王彈雀
在東崗 文烈進諫 披心腸
落日孤烟迷岳陽
又不見樵隱先生臥病日
罕有中官來問疾
文黑功勞誰第一
先生高義動群臣
或去不去俱稱仁
韓山寂寞今無人
鎭江烟月波◎◎

牧隱의 전별시
밀직사사 진현관 대체학 모은공전에 삼가 이 시를 드립니다.
돌아갈 수 있건만 가지 않는 이 韓山翁이요
그냥 머무를 수 있건만 머물지 않는 이 提學公이네.
提學이 나이 젊고 또 無病하며,
仲氏마져 혁혁한 벼슬로 朝廷에 臨해있네.
옛부터 길을 떠남엔 時勢를 타는 것이 重要하거늘
돛을 거고 바다를 건너려고 長風을 기다리네
공의 말씀이 京山府 우리 집에는 宗族 안팎에 英雄이 많다고 하셨네.
사직을 지키는 臣下들이 將相을 차지하여
불꽃이 타올라 푸른 하늘을 누비네.
그릇이 가득 차도 넘치지 말라함이 옛부터의 경계라
自身의 勇退를 임금께 빌어 바람처럼 훌쩍 떠나가시네
조정 신하들이 탄복하며 이마에 손 얹고 절하니
그칠 줄 알고 自足할줄 아는 이 누가 공을 따르랴.
그대도 임금님이 東崗에서 새 잡기 놀이를 한 어리석음을 들어 알겠지
文烈公이 나아가 心腸을 헤쳐 諫하지 아니 하였던가.
지는해 외로운 연기 岳陽이 아득하구나.
그대는 또 樵隱선생이 병들어 누었을 때를 보지 아니하였던가.
朝廷의 中官이 와서 문병하는 것 참으로 드문 일 아니던가
文章, 名筆, 功勞에 있어 누가 제일인고,
선생의 높은 忠義 뭇 신하가 감동하니,
가건 아니 가건 모두 어질다 칭찬하네.
韓山이 적막하여 지금 사람이 없구나,
鎭江 연기 낀 달밤에 물결만 지네.

 

大提學 文忠公 陶隱 諱 崇仁 (농西郡公 5世)

1. 題 僧舍
山北山南細路分
松花含雨落빈紛
道人汲井歸茅舍
一帶靑煙染白雲

절 / 스님의 거처
南山과 北쪽 山은 오솔길로 갈라져 있고
松花가루는 비에 젖어 어지러이 떨어지네.
道人(중)이 물을 길어 띠 집으로 돌아가고
한줄기 푸른 연기는 흰 구름을 물들이네

2. 梅花 (五首選一)
漂泊曾遊海上村
婆婆千樹月黃昏
卽今京國仍爲客
一詠幽婆一斷魂

梅花 (5首 중에서 하나를 뽑음)
정처 없이 떠돌며 海上村에서 놀았는데
몸이 가냘퍼서 달빛 속에 잠기었다.
지금은 京國의 손이 되었으니
한번 춤추며 斷魂을 읊어 보구려.

3. 效孟參謀
松柏有雪骨
桃李有風姿
雪骨不伯寒
風姿多媚時
君子樂貧交
一諾無린緇
小人逐勢利
暫合還相규
長歎復長歎
吐此幸苦辭

孟參謀를 본받다.
松柏은 雪骨이 있고
桃梨는 風姿가 있도다.
雪骨은 차가움을 두려워 않고
風姿는 어여쁠 때가 많음이여
君子는 貧交를 좋아하며
한번 허락한 후면 변함이 없고
小人은 세력만 좇아서
화합한 듯 돌아서서 반목하네
길게 탄식하고 또 탄식하며
이 쓰라린 말을 뱉을 수밖에.

4. 五福最長生
五福最長生
君有延년術
何須問廣成

五福의 으뜸은 長壽하는 것이다
그대는 나이를 늘리는 呪術이 있는데
하필 廣成子(신선)에게 묻는가

5. 嗚呼島
嗚呼島在東溟中
滄波杳然一點碧
夫何使我雙涕零
祗爲哀此田광客
田광氣개橫素秋
義士歸心實五百
咸陽降準眞天人
手注天潢洗秦虐
광何爲哉不歸來
寃血自汚蓮花鍔
客雖聞之爭奈何
飛鳥依依無處托
寧從地下共追隨
軀命如絲安足惜
同將一刎寄孤嶼
山哀浦思日色薄
嗚呼千秋與万古
此心울結誰能知
不爲轟霆有所洩
定作長虹射天赤
君不見古今多少輕薄兒
朝爲同胞暮仇敵

오호도는 동쪽바다 가운데 있는데
물결이 아득하여 푸른 점이 되었네.
나로 하여금 눈물 흘리게 하는 것은
다만 슬피 이 전광을 위함이니.
전광의 기개는 가을을 가득 채웠고
의사의 마음 오백이 한데 모였다네.
함양의 높은 콧대는 진실로 하늘 사람의 일이었고
은하수 물을 끌어내 진나라의 가혹함을 씻었다.
광이시여 어찌 다시 오지 못하시오
원통한 피만 연화검에 응겨 남았네.
객이 그 말을 들었으나 이미 늦었고
나르는 새조차 의탁하여 갈 곳이 없네.
차라리 죽어가서 같이 따를까
실낱같은 목숨 무엇이 아까우리.
한번 칼을 물어 외로운 섬에 의탁하니
산천이 슬퍼하고 일색 또한 빛을 잃었네.
아아 천년이 지나고 만년이 지난들
이 마음 맺혔음 그 누가 알까.
천둥소리 없어도 비는 내리고
긴 무지개 되어 하늘 붉혔네.
당신은 고금의 많은 경박자를 보지 못하였는가
아침엔 동포 저녁에는 원수가 되네.

6. 七夕
銀河淸淺鵲橋橫
天上仙官此夕行
乞巧從來兒女事
令人笑殺柳先生
天孫歲歲有佳期
勝似人間遠別離
回首脩門路초遞
不堪秋色上江리

칠석
은하수 물 맑고 얕아 까막 까치 다리를 놓아
하늘나라 선관님 오늘밤에 건너 가시리
乞巧는 옛적부터 계집애들의 풍속
사람으로 하여 유선생을 크게 웃게 하리
견우님 해마다 만나는 기쁜 기약 있어
마치 인간세상 먼 이별보다 낫네
머리 돌려 문간쪽 바라보면 길은 멀고 멀어
가을빛 슬픔을 못잊어 江 에 오르노라

7. 안화사
嶺山巖 細泉榮
知自松根結處生
紗帽籠頭淸晝永
好從石 聽風聲

송악산 바위틈에 가늘게 흐르는 샘물
알겠구나. 소나무 뿌리 엉긴 곳에서 솟아남을
사모를 눌러 쓰고 앉은 한낮이 길 것 같으면
돌 솥의 솔바람 소리 즐겨 들어 보세나

8. 端午
五侯池館暑風微
요亂추韆彩索飛
紈扇羅衫也羞澁
綠陰深處故依依

단오
오후지관엔 더운 바람 고요히
나르는 그네사 채색줄이 나르네
비단 부채 비단 적삼 아가씨 부끄러워
녹음 깊은 곳에서만 일부러 서성이네

9. 白廉使 惠茶
先生分我火前春
色味和香一一新
篠盡天涯流落恨
須知佳茗似佳人
活火淸泉手自煎
香浮碧椀洗훈전
嶺崖百萬蒼生命
疑問蓬山刻位仙

백안렴사님이 차를 주셔서
선생이 나에게 주신 한식 전의 봄 차는
색과 맛 향 그런 향기 모두 새롭네
온 세상을 떠도는 한 깨끗이 씻어 없애니
좋은 차는 아름다운 사람 같음을 모름지기 알아야 하네
이는 불꽃에 맑은 물 손수 끓이니
청자다완에 향기 이르나 비린내나는 차자 씻어주네
가난하게 사는 백만 백성의 삶은
봉래산 여러 신선에 물어보고 싶네

10. 櫻桃
燦爛朱櫻熟
團圓湛露濡
摘來盤上看
箇箇是明珠

앵두
앵두 열매 아름답게 빨가니 익어
동글동글 이슬 먹음었네
따서 반 위에 놓고 보니
낱낱이 밝은 구슬일세

11. 題毗瑟山僧舍
俗客驅東道
高僧臥小亭
雲從朝暮白
山自古今靑
往事追松子
羈逝愧地靈
愍勒汲澗水
一국煮蔘령

비슬산 용천사 불전을 찬영하며
속객이 말을 몰아 동쪽 길로 가니
노승이 조그만 정자에 누워 있더라
구름은 해를 좇아 온종일 흰데
산은 옛과 다름없이 언제나 푸르구나
솔방울 벗삼은 지난 일 한적했고
말몰아 유람가니 地靈뵐낫 없어라
바램이 있다면 산골 물길어다가
한웅큼 잡은 山蔘과 茯笭藥을 달여나 볼까.

12. 陶隱先生 憶三峯詩
不見鄭生久
秋風又颯然
新篇最堪誦
狂態更誰憐
天地容吾輩
江湖臥數年
相思渺何恨
極目斷鴻邊

도은선생이 三峯(정도전)을 생각하는 글
그대를 못 본지도 오래 됐구려
바람도 쓸쓸한 가을이 왔네
새소식 모두 다 기억하건만
이 꼴을 뉘라서 가엽다하리
하늘은 우리를 굽어 살피사
강호에 누운 지 여러 해되오
서울과 시골이 얼마나 멀기에
기러기 날아가 뵈지도 않네

13. 過淮陰漂母墓
一飯王孫感慨多
不知저해意如何
孤墳千載精靈在
笑殺高皇壯士歌

淮陰漂母의 묘소를 지나가며
왕손의 한그릇 밥 감개도 많구나
간장을 모르는데 마침 어찌하였을까
청년의 외로운 무덤, 정령이 있다면
高皇의 장사를 빠른 노래를 웃었으리

14. 秋懷 (十首選一)
皇天啓我宋
帝運升文明
異人乃間出
塤호迭相鳴
濂溪發源深
河洛分派淸
卓哉紫陽翁
斯文獨主盟
上以繼往聖
下以開太平
九原如何作
執鞭終吾生

가을에 (十首 중 하나를 뽑음)
皇天이 우리 宋나라를 열어서
帝運은 文明에 오르게 되었도다
異人이 끊이지 않고 나타나서
나팔과 젓대소리 서로 울었도다
濂溪는 그 근원이 깊은 곳에 있고
河洛은 물줄기 갈라서 더욱 맑구나
높고 높으십니다. 紫陽翁이시어
그 文이 홀로 盟主가 되었도다
위로는 가신 성인들을 이어 받고
아래로는 태평세월을 열었도다
九原을 어찌하여야 할 수 있을까
馬夫가 되어 이 生을 마치고 싶네

15. 秋回
天末秋回尙未歸
孤城落照不勝悲
曾陪鴛鷺추文陛
今向江湖理釣絲
骨自罹讒成大瘦
詩因放意有新奇
明珠苡薏終須辨
只恐難調長者兒

가을에
하늘 끝까지 가을은 돌아왔건만 아직 돌아갈 길 없으니
외로운 성 저녁 노을에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네
일찍이 원앙처럼 모시고 글하신 뜰에 나아갔건만
이제 江湖로 물러나 낚시줄이나 다스리리라.
꼿꼿함이 참소를 당하니 더욱 파리하게 되었고
시는 거리낌이 없어서 신기함이 있다네
참 구슬인지 아닌지는 마침내 분별이 되겠지만
자못 고르기 어려워 어른 아이 될까 두렴다네

16. 元日奉天殿早朝
煌煌蠟炬照銅檣
宮樓聲催動曙光
彩仗分開庭上下
자袍高拱殿中央
梯航玉帛通蠻貊
禮樂衣冠○漢唐
朝罷更도霑賜宴
東風吹煖泛椒觴

설날 아침 奉天殿에서
황황한 설 횃불이 담장을 비추이고
물시계 소리는 새벽 빛을 재촉하네
병사들이 뜰 아래 나뉘어 단장하고
붉은 도포 입으신 분 팔짱끼고 높이 앉으셨네
산넘고 물건넌 王帛은 오랑캐를 통하였고
禮樂과 衣冠은 漢唐과 멀어졌네
조회가 파하고 잔치 베풀어 주시니
東風의 따뜻함이 술잔에 넘쳐 흐르네

17. 贈 兵部參政 朴敬義
麗山明水毓精靈
朴氏家中人出虎
쟁嶸義氣劫群臣
咆호英風振九宇
安民丕責小人懲
濟世洪猷君子主
平生所守一誠心
輔國深謀忠肺腑

高麗朝 병부참정 박경의에게 보내어진 글
산 곱고 물 맑아 빼어난 정기 타고
박씨 문중에 범 같은 사람 났도다
높고 높은 의기는 여러 산하를 압도하고
준엄한 영웅의 풍채는 나라에 진동하였네
安民 할 만한 큰 책임은 소인들을 징계하고
濟世 할 만한 넓은 도량은 군자의 주창이로다
평생에 먹은 마음 한결같이 지켜서
보국하는 깊은 지략 가슴속에 품었네

18. 題松月軒
獨向層峰裏
新開丈室淸
疎松留鶴老
好月近人明
河漢高秋影
風霜半夜聲
師心遣有相
燕坐樂無生

송월헌에서 씀
첩첩 산 속에 홀로 와서
깨끗한 작은 방 새로 지었네
학이 머무는 성긴 소나무는 늙어가고
사람 가까이 뜬 아리따운 달은 밝구나
한가을 은하수는 비추고
한밤중 바람 서리 소리나네
스님의 마음은 유상을 떨쳐 버리고
좌선하며 무생을 즐기네

19. 自壽
今朝吾以降
二十六靑春
父母樂武恙
弟兄心更親
願修天爵貴
不파世間貧
滿酌一盃酒
還將慶此身

생일을 축하하며
오늘 아침에 나 태어나
스물여섯살 청춘이 되었네
부모님 즐거워 건강하시며
형제는 우애가 깊어라
天爵 귀하길 원하며
세상의 가난은 두렵지 않네
잔 가득히 한잔 술 부어
들고 이 몸을 축복하리

20. 新雪
蒼茫歲暮天
新雪遍山川
鳥失山中木
僧尋石上泉
飢烏啼野外
凍柳臥溪邊
何處人家在
遠林生白煙

첫눈
아득한 세모 하늘에
첫눈이 산천에 깔렸네
새들은 산 속에 나무를 잃었고
스님은 돌 위에 샘을 찾네
주린 까마귀는 들 밖에서 울고
얼어붙은 버드나무는 시냇가에 누었네
어느 곳에 인가가 있는지
저 멀리 숲에서 흰 연기가 나네

21. 除夜用古人韻
除夜到山家
留僧剪燭花
煮茶병叫蚓
題句墨번鴉
更고三과盡
天文北斗斜
明朝歲華改
漂泊意無涯

섣달 그믐밤에 옛 사람의 운을 따서
제야 날 산중 집에 이르니
자지 않는 스님은 촛불을 자르네
차를 다리니 항아리엔 지렁이 우는소리
시귀를 적으니 먹은 가마귀가 뒤집는 듯
삼경 한 밤중 북소리 치고 나면
하늘에 북두칠성은 기울어라
내일 아침이면 한 해가 바뀌리니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몸 감회는 가이 없구나

22. 渡遼曲
遼陽城上春風吹
遼陽城下黃沙飛
征夫渡海事驃姚
幾年望鄕猶未歸
空閨思婦嚬雙蛾
挑燈○○鳴寒校
織成錦字憑誰寄
靑鳥不來知奈何

遼東을 지나면서
요동성 위에는 봄 바람이 불고
요동성 아래는 黃沙가 이는구나
남편은 전쟁터에 나가 바다를 건넜는데
몇해가 지나도록 돌아오지 못하고
아내는 공방을 지키며 눈썹 찌푸리니
등잔불아래 차가운 실북만 울리는구나
이 비단을 짠다 한들 뉘에게 줄고
靑鳥(좋은 소식) 오지 않으니 어이하면 좋을까

23. 輓樵隱先生
吾宗固積德公起獨離倫潤色謨猷煥用旋禮貌眞文章傳
正印社稷賴元臣今日聞哀輓途人亦愴神

樵隱先生 만장
우리 宗中에 굳게 덕을 쌓은 분중에 공이 홀로 윤기를 베푸셨습니다. 빛을 더하여 도모하신바가 훌륭하시고 주선하신 일이 예모가 바르고 참되셨습니다. 文章은 正印에 전하시니 사직은 元臣에 힘입으셨습니다. 오늘 슬픔을 듣고 애도하여 글을 짓는데 지나가는 사람들도 또한 슬픔을 참지 못하나이다.

24. 送 鄭達可 奉使 日本詩序
殿下之四年秋七月慶尙道師臣驛聞曰日本國覇家臺使者至矣其言曰遠人之來冀達朝廷臣司封  不敢不聞朝臣人告于內 殿下若曰覇家臺日本巨鎭也使者來夫豈徒然哉其令郡縣飭廚傳以送及至都禮賓引使者詣宮庭閤門進見殿下勞慰優渥使者獻歲幣訖進而告曰主將聞島夷竊發焚蕩人室盧孤寡人子婦至或憑陵近地且憤且치遂欲殄殲之遺賤介以報師期殿下聞其言益嘉之勅有司館穀使者加等留月余告歸則殿下召宰相曰報聘禮也○今通隣好息寇聘使宜愼簡哉於是遺成均館大司成鄭夢周 達可以行其交遊之舊咸訶詩贈焉而囑予序予惟日本氏有國最古自漢魏世通華夏衣冠制度燦然可觀今覇家臺主將英豪武毅爲一方藩翰思집暴亂以成兩國之好其用心可尙巳達可學博古今氣醇以方言溫而辨嘗遊吳楚歷齋魯之墟有司馬子長之風焉奉使專對乃其余事雖然今人有出戶限適隣里而有難色者矣達可自聞命之日躍躍然直以爲己任視其溟渤不翅擔塗然聘使可謂得人矣其通隣好息寇裁可旣足待也日太史氏特書于策曰日本奉使鄭夢周也豈不偉哉繼是而建大議行大政將大書屢書不一再而己也達可其識之.
※ ○ : 失옆에 引

鄭達可(鄭夢周)를 보내어 日本에 使臣가는 序
전하께서 즉위하신 四年(一三七八) 가을 七월에 경상도 절도사가 역인(驛人)을 통해서 보고하는 말에 일본국 폐가대란 곳에서 使者가 와서 말하기를 저희가 조희할 마음이 있어 왔으니 이 사실을 조정에 아뢰어 주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러하오니 신이 봉강을 맡았삽기로 감히 아뢰나이다 했다.
이에 조신들이 이 사실을 가지고 내정에 들어가 보고했다. 전하는 이 보고를 받고 이르기를 「패가대(覇家臺)란 일본국의 거진(巨鎭)이다. 그런데서 사자(使者)가 왔다고 하는데 이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느냐. 그러니 아무쪼록 군과 현에 말하여 식사와 숙소를 마련해 주게 하여 도성으로 올려 보내도록 하라」 했다.
이렇게 하여 일본 사자는 도성에 당도하게 되었다. 예빈시(禮賓侍)가 사자를 데리고 대궐 합문(閤門)에 와서 뵙게 했다.
이에 전하는 그 사자의 수고를 크게 위로해 주자 사자는 국서(國書)와 폐백을 바치고 나가서 아뢰기를 「저의 주장은 섬 도둑이 난동하여 백성들의 집을 불태우고, 남의 자녀들을 죽이며 그 위에 이따금 국경을 넘어서 남을 침략한다는 말을 듣고 이를 부끄럽게 여기고 분개하여 드디어 이것을 모두 없애고자 하여 사산을 보내어 군사 움직일 시기를 알려 드리는 것입니다」했다. 전하는 이 말을 듣자 더욱 가상히 여겨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사관과 식사를 주도록 한 다음 그 사자에게 벼슬 등급을 올려 주었다.
그 사자는 이리하여 한 달이 넘도록 머물러 있다가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청했다.
전하는 재상을 불러 말하기를 보빙(報聘)하는 것은 예법이다. 더구나 우리는 지금 이웃나라와 정을 서로 통하고 도둑들의 재앙을 없애는 처지에 있으니 보빙사는 마땅히 신중히 사람을 가려서 보내야 할 것이다」 하고 성군관 대사성 鄭達可를 보내서 사명을 맡아 행하게 했다.
이에 그를 따라 노는 친구들은 모두 시를 지어 노래하여 그에게 주고 날더러는 序를 쓰라고 청했다.
나는 생각하기에 일본이 나라를 가진 젓은 꽤 오래 되었다. 그동안 그들은 한위(漢魏) 시대부터 대대로 중국과 상통하여 衣冠과 제도가 찬란하니 매우 볼만한 일이다. 이제 폐가대 主將은 영특하고 호방하며 용감하고 씩씩하여 한 지방의 울타리가 되어 난폭한 자를 없애어 두 나라의 화친을 이루겠다 하니 그 마음씨가 가히 칭찬할만하다.
달가는 학식이 예와 지금을 통달하고 기운은 순후하고 바르며 말은 온화하고 분명하여 일찍이 오나라와 초나라에 놀았고 제나라와 노나라의 옛 도읍터를 두루 구경하여 실로 司馬子長의 기풍이 있다. 그러니 나라의 사명을 받들어 專對하는 것 같은 일은 그에게는 보통일이라 하겠다. 비록 그러하나 사람이 자기가 살던 집을 떠나서 이웃 마을에 가자고 생각해도 이것을 어렵게 생각하는 자가 있다. 그러나 達可는 명령을 들은 날로부터 혼연히 기뻐하여 이것을 바로 자기의 임무로 생각하고 큰 바다 건널 것을 마치 평탄한 길을 가는 것 같이 생각하니 聘使는 참으로 적임자를 얻었다 했다. 또 이와 동시에 이웃 나라와 정을 통하고 도둑들의 재앙을 없애는 일은 가의 발을 쳐들고 기다릴 일이라 했다. 다른 날에 사자가 책에 특별히 쓰기를 「日本奉使 鄭夢周라 할 것이니 어찌 장한 일이 아니랴 또 이 다음에 가서도 큰 주장을 세우고 큰 정치를 통해서 장차 큰 글도 많이 쓰는 일이 한두 번에 그치지 않을 것이니 達可는 이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25. 哀秋夕辭
忠君與愛國兮
志專專其靡他
何時俗之險희兮
學曲而心阿
彼讒諛之得志兮
自昔凶人國也
유萬死余無悔兮
恐此志不白也
竊不敢改余之初心兮
固長終乎窮 
前余生之千古兮
其在後者無窮
失余志之不廻兮
仰前修而飭躬
世貿貿莫我知兮
庶憑辭以自通

임금에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함이여
뜻은 오직 한 마음 딴마음 없도다
어쩌자고 세상은 험악해만 가고
학문은 비뚤어만 가고 마음은 아부만 하는가
너희 아첨하는 무리들이 뜻을 얻음이여
옛 부터 나라에 해를 끼쳤거니
비록 일만번 죽더라도 내 후회치 않으리니
이 마음 변할까 두려워하네
내 가만 생각해 봄에 처음 뜻 고치지 못함이여
참으로 궁색한 수렁에서 마치리
전생의 천고여
내 후생도 무궁하리
화살 같은 내 뜻을 쏘아 돌이키지 못함이여
옛 사람의 닦음을 우러러 이 몸을 닦으리
세상이 두려워 나를 몰라줌이여
노래나 읊어 스스로 위로하리

領議政 文景公 亨齋 諱 稷 (농西郡公 5世)

1. 까마귀 검다하고
까마귀 검다하고 白鷺야 웃지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 소냐
겉 희고 속 검은 이는 너뿐인가 하노라
(世歡心懷 之詩)

2. 孔俯漁舍時卷
柳陰密成幄
黃鳥送好音
幅巾步回渚
沙白水淸深
問君何爲者
不憂世紛侵
潔身富春志
濟世磻溪心
乾坤一竿竹
氣味古猶今

孔俯漁舍에게
버들은 그늘에서 장막 이루고
아름다운 꾀꼬리 노래부르네
폭건을 덮어쓰고 강가로 도니
물소리 깨끗하고 모래도 좋아
묻노니 그대는 누구이런가
어지러운 세상, 일보지 않으니
嚴子陵의 본을 받아 세상을 낚으오
하늘과 땅 사이 낚시대 하나
맑은 취미는 옛과 지금이 한가지로세.

3. 戒子孫詩
始祖농西公 恭儉由降衷 老罷在私第
衣冠坐不용 每聞喝道聲 俯伏待聲終
文烈氣英銳 건건忠匪躬 功名光竹帛
配享終비宮 敬元性眞淳 仁厚無與同
諸子皆要津 輝爀爲時雄 恐懼門閥盛
謙損若龍鍾 接人必盡禮 雖賤皆斂容
撥棄屋渠渠 送老草盧中 至今延鳳下
依然有遺舍 樵隱擅文章 聲名감華夏
辭命紛紛際 潤色無不可 主少前朝季
海傾波浪惡 廣平屹砥柱 安危身所托
勤謹和濟屯 中外俱悅服 引用或匪人
殘年混珉○ 權歸勢必然 昔人誰守約
先君在朝班 謙退愛閑寂 官顯卽牢辭
歸臥故山曲 幸余遭聖明 謬被恩波浴
衣食與추從 嘗自愧具足 上以奉宗祀
下以蓄家屬 崇班又非望 俯仰恒局縮
福過那免災 中年久沈溺 存吾惟順受
得失更何卜 明言孤兒孫 儉是傳家則
學問能變化 存心須正直 事君社盡忠
居官思盡織 莫羨金帛多 莫羨屋華飾
天生分定殊 窮達豈人力 酒色易昏心
心昏無所識 無識是狂妄 行世定강부
朋友古來難 要知邪正實 責己宜重周
責人休甚嫉 名途與生利 知止卽無辱
小貧非利己 小惡終成毒 愼爾言行間
念玆當汲汲 平時頓忘危 禍生悔何及
和爾兄弟保 爾家爲爾子 孫勤夕상匪
我言모多經歷
※ ○ : 王변에 業

자손에게 주는 詩
시조 농西公께서는
천성이 공손하시고 검소하셔서
벼슬 그만두고 사택에 계실 때에도
항상 의관을 정제하여 앉아 계셨고
매양 喝道聲(앞에 서서 길을 인도하며
행인을 통제하는 소리) 들릴 때마다
부복하여 소리 그치기를 기다리셨다.
文烈公은 영민하고 날카로운 기운으로
말씀은 오직 충성뿐 자신은 잊으셨다.
공명은 역사에 길이 빛나시고
종묘에 열성조와 함께 配享되셨도다.
敬元公은 성품이 진실 되고 순후하시어
인자스러우심은 따를 자가 없었다.
여러 아들들이 모두 높은 지위에 오르시니
당대의 빛나는 영웅들이시다,
문벌이 남다름을 송구하게 여기셔서
겸손하심이 굳굳하시었으며
사람 대하심에 예를 다 갖추시고
비록 천한 사람이라도 다 반겨하셨다.
집이 무너졌을 때도 껄껄 웃으시고
노년을 오두막에서 보내셨으니
지금도 延鳳山 아래에는
옛 그대로의 집이 의연하게 남았도다.
樵隱公은 문장을 드날리셔서
그 명성이 중국에까지 널리 퍼졌고
세상이 시끄러워 분분할 때에도
거침이 없이 더욱 빛나셨도다.
前朝의 마지막에 주장한 바 적었으나
바다가 기운 듯 파란이 많았도다.
廣平君은 이 난세에 절개를 지키시고
국가의 안위를 몸소 겪으시며
들어온 적이라도 힘써 화친하시니
나라 안팎이 즐거이 승복하였으며
혹 사람 같지 않은 자도 끌어 쓰셔서
노년엔 옥에 티끌을 남기셨다.
권세는 시세에 따라 움직이는 것
옛 사람중 그 누구 언약을 지켰는고
선친께서는 가까이 임금을 모시다가
겸손하게 물러나 한적함을 사랑하시고
벼슬도 곧 사퇴하셔서
고향으로 돌아와 깊숙이 지내셨다.
다행히 내가 밝으신 임금을 만나서
성은으로 목욕하는 은혜를 입고
먹고 나면 나아가 받들어 모셨으나
항상 부끄러움만 남을 뿐이었다.
위로는 종묘 사직을 받들고
아래로는 가속을 안전하게 돌볼 뿐
높은 벼슬하는 것이 소망은 아니어서
위로나 아래로나 항상 움츠려 행동했다.
복이 지나치면 어찌 재앙을 면할까.
중년에 오래도록 곤경에 빠져
내가 오직 순리대로 받아 들였으니
얻고 잃은 것은 어찌 다시 알 것인가.
자손들에게 밝혀 말하노니
검소함이 우리의 가훈이로다.
학문이란 것은 변화가 많은 것이니
오로지 마음만은 정직하게 할 것이며
임금을 섬길 때는 충성을 다하고
관직에 있으면 직무 다할 것만 생각하라.
금은 보화 많은 것은 부러워 말고
거처하는 집을 화려하게 꾸미지 말라.
하늘이 태어날 때 분수를 정하였으니
있고 없는 걸 어찌 人力으로 하리오
酒色은 모두 마음을 어둡게 하고
마음이 어두우면 아는 바 없어지니
무식하면 어지럽고 요망하기 쉬워
세상에 행하려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친구 사귐은 옛부터 어려운 일이니
邪와 正과 實을 알아야 한다.
내 몸을 책함은 마땅히 무겁게 하고
다른 사람을 탓하는 일은 하지 말라
명성을 얻는 길과 이익을 남기는 것은
멈출 줄 알면 욕됨이 없을 것이고
조그마한 탐욕이라도 利될 리 없고
작은 잘못이 끝내 해독이 된다.
너희들 말과 행동을 삼가는 사이에
이것을 생각함이 무엇보다 중하다.
잠시라도 우려함을 잊었다가
화를 당하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
형제간에 화목하는 것이 너의 집을
보전하는 길이니 너의 자손을 위하여
부지런히 노력하고 경계하라.
내말이 시시콜콜하나 경력이 많은 말이다.

4. 聞陶隱先生 復職知經筵奉寄 以賀
天門渺渺五雲橫
白日明明一氣淸
想得楚筵常置醴
幾多長策佐昇平

陶隱先生이 복직하여 經筵을 맡으셨다는 소식을 듣고
아득한 하늘에 오색 구름 찬연하고
밝은 해는 한가지로 맑은 기운 빛나네
생각컨데 높은 자리에 항상 술을 두고
수많은 長策이 나라를 태평케 하였도다

5. 昭格殿致齎次板上韻
靑靑松栢擁瓊宮
羽蓋霓旌駐此中
十遍說經邀道侶
四時行醮경宸衷
夜聞鳴鶴月華白
晨拜참鸞雲影紅
초창無因留玉境
茫然獨立仰玄穹

소견전에 치재하면서
푸르디 푸른 松栢이 瓊宮을 에워싸고
무지개처럼 펼친 깃발 이곳을 덮었네.
도사를 맞아 두루 經을 설하고
四時에 제를 올리니 향기가 가득하다.
달빛이 화려한데 학의 울음소리 들리고
새벽에 남이 타시던 마차와 깃발을 배알하니
까닭없는 서글픔에 玉境에 머물러서
망연히 홀로 서서 먼 하늘 우러르네.

6. 袞州路望闕里
闕里尋何處
山광袞府東
徘徊洙泗渚
창望杏壇風
夢尊千里後
洪釣一氣中
우嗟獲麟筆
萬古有奇切

袞州 길에서 闕里를 바라보며
궐리(공자 사당)를 어느 곳에서 찾을고
곤주의 동쪽에 산들이 펼쳐 있네
洙泗의 물가를 이리 저리 거닐며
쓸쓸히 杏壇(공자가 제자를 가르치던 자리)에
부는 바람을 바라보네
천리 바깥에서 높으신 어른을 꿈꿨는데
천지 만물은 한 氣運속 조화로구나
아아 史官의 붓으로 이름 전하니
만고에 기이한 공적을 남기셨도다.

7. 小雲庵
牢落古山寺
高僧昔道林
談經移日影
철茗淨塵衿
松茂雲常在
溪喧地更深
邇來兵不息
安得卜前岑

소운암
적적한 옛 山寺에 다시 들리니
고승은 옛날의 그 道林이더라
經을 이야기하는 사이에 날이 저물고
차를 마시며 속된 생각을 맑히네
소나무가 무성하여 구름이 항상 머물고
시냇물 소리에 자리가 더 깊어지도다.
병사들 쉬지 못한 지 오래건만
앞산은 쉽게 살 만한 곳을 얻었네

8. 奉使赴燕京賀洪熙皇帝登極 (赴中原凡四次)
洪武建文永樂間
屢承綸命覲天關
觀光誰似吾今遇
兩眼親瞻四聖顔

洪熙皇帝의 등극을 축하하여
洪武(明太祖의 연호) 建文(明惠帝의 연호)
永樂(明成祖의 연호) 사이에
네 번이나 왕명을 받들고 天關을 뵈었도다.
그 성스런 빛을 나같이 뵈온 이가 또 있을까
두 눈으로 친히 四聖의 容顔을 뵈었도다.

9. 登摩天嶺 (過此嶺凡四回以東西南北巡察使체察使
三四詣慶源遷德安兩陵移奉於咸州者一)
衰遲正合老토缺
何意乘초復此遊
七,八年間三過嶺
一千里外獨悲秋
霜凋赤葉山門麗
日上蒼波蜃氣收
奔走經營人莫怪
聖君간○爲民憂
※ ○ : 雨밑에 月

마천령에 올라
늘어서 새삼 이지러지니 쇠약하여 더디기만 한데
어이하여 수레를 타고 다시 이곳을 찾을 생각이었는지
七, 八年 사이에 세 번째 이 고개를 지나게 되니
一천리 바깥에서 홀로 가을을 슬퍼하는구나
서리를 맞아 떨어지는 붉은 잎사귀로 山門이 곱고
푸른 물결 위에 해가 떠오르며 蜃氣를 거두는구나
분주하게 경영함을 사람들이여 괴이하다고 말라
성군은 밤낮으로 백성을 위해 걱정하시도다.

10. 送舍弟如京 (時陪家君居星州)
送弟長安去
春郊細草微
窮途余己矣
親在爾何之
滾滾川東逝
行行안北飛
鄕村綵衣舞
獨立不勝悲
同氣亦云衆
孰爲能克家
淸貧嫌我拙
淳朴喜君多
塵起風常急
山重路更사
行行順避險
莫自取蹉蛇

아우를 보내며
아우를 長安에 보내니
봄이라 들에는 풀잎도 드문드문
궁색한 길에 내가 있으니
어버이 계신데 너가 어찌 가는고
치런치런 흐르는 내는 동으로 가고
기러기는 떼를 지어 북으로 가네
시골 마을엔 때때옷 입고 춤을 추니
홀로 서서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네
형제가 또한 많다고 하나
누가 능히 집을 이을 것인가
淸貧은 나를 어리석다고 싫어하고
순박한 자네들 많음이 즐겁도다
티끌이 일어나면 항상 바람이 급하고
산이 중첨하면 길이 다시 멀게 되니
나아감을 순수하게 험한 것은 피하고
스스로 실패함을 取한 것이라 하지 마라.


密直司事 興安府院君 景武公 諱 濟 (농西郡公 5世)

1. 贈 鄭隅谷 溫에게 드림 (出東詩叢話)
柒身遺意托盲광
取舍中間烈似霜
松葉豈能撓確節
令名千載日爭光

몸을 더럽혀 뜻을 버리고 거짓 맹인 되었으나
취하고 버림에 생사가 달린지라
솔잎이 어찌 굳은 절개를 꺾으랴만
명성은 천년을 두고 햇빛과 다투리라 !


典法摠郞公 諱 容 (농西郡公 5世)

欲作杜門鬼
反爲一逐臣
先天多炳李
不願漢陽春

두문동 귀신 될려고 했더니
도리어 한 쫓겨난 신하되었네
선천부터 병 많은 오야이라
한양의 봄은 바라지 않노라

 

▣ 贈吏曹判書 文靖公 孤隱 諱 智活 (농西郡公 6世)

1. 夜夜相思
夜夜相思到夜深
東來殘月兩鄕心
此時寃恨無人解
孤倚山亭淚不禁
(端宗忠臣 忠義 之詩)

밤마다 임금님을
밤마다 이슥토록 임금님을 생각하니
東쪽에서 떠 온 새벽달도 님과 나를 비추이네
이 억울한 원한을 풀어줄 사람 없어
외로이 山亭에 의지하여 눈물 흘리네

2. 遂祭朴儒山
娥林之東
有山표묘
故老傳說
主人高標
殷之西山
晉之紫桑
邈矣高風
留彼崇岡
丹崖靑壁
彷彿遺塵
噫微斯人
吾誰與隣
(단종 충신 고은 선생은 박유산에서 영월을 바라보며 이 詩를 남기셨다.)

아림(居昌)동쪽에 山이 있으니 크고도 아득해와
옛 노인 전설대로 주인공의 높은 품위
殷나라의 西山이요 晉나라의 紫桑인양
아득히 높은 풍모 저 산 위에 머무르고
붉은 언덕 푸른 벼랑 仙境(遺塵)이 방불하니
아-! 이 사람 아니었다면 내 뉘와 이웃하여 어울리리까!


▣ 吏曹參判 大隱 諱 智源 (농西郡公 6世)

彬水滔滔何處流
楚色凄凉使我愁
鵑血花枝沾不盡
孤臣難作戴天頭
(端宗忠臣 忠義 之詩)

태평세월 도도히 어디로 흘러
국운이 처량하니 근심 더하네
두견새 눈물도 적셔 다 못하고
신의 충정도 바로잡기 어렵네
▣ 吏曹判書 文敬公 一齋 諱 恒 (농西郡公 9世)

1. 泰山이 높다하되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2. 洛東江 上
洛東江上仙丹泛
十里笙歌洛晩風
遠客停참聞不樂
蒼梧山色暮雲中

낙동강 위에 신선의 배를 띄우고
십리에 걸친 노래 소리 저녁 바람에 부서지고
먼 손이 수레를 멈추고 슬픈 소식을 들으니
푸른 오동 산색조차 새 빛을 잃었도다.

3. 贈 湛齋 金麟厚詩
蓼寂山齋夜
有友遠方來
君若傳吾道
共훈我一盃

湛齋 金麟厚에게 드리는 詩
山齋에 밤이 깊어 고요한데
반가운 손이 먼곳에서 왔구려,
그대가 나의 도(道)를 이해한다면
내 그대 더불어 취토록 마시리,

4. 良田
湖上有良田
嘉穀自離離
白日走奔迅
恐未耘及時
勉哉勇無도
輪功日放放
不挾地力美
發憤勤鋤治
瞻彼頑瀨人
自棄良田基
優遊到秋獲
無實徒傷悲
所以善農者
耕種耘得宜
耕也뇌在中
貧賤焉能移
固窮勉在我
不計時盛衰
到得成熟日
凶年不能飢

좋은 밭
호수 위쪽에 좋은 밭이 있으니
아름다운 곡식이 스스로 열리네.
햇빛은 분주하고 빠르게 사라지니
때를 당하여 김매지 못할가 두렵고
힘써 일하면 실패할 일 없으니
추수를 하고 나면 나날이 고소하도다.
땅의 힘이 아름다움을 감추지 않고
호미 다스림을 부지런히 하는구나.
저 미련하고 게으른 사람을 보게
스스로 좋은 밭 터를 버려 두고는
놀기만 하다가 가을이라 거둬 들이니
열매가 없어 한갓 심심하고 슬퍼하네.
농사를 잘 짓는다고 하는 것은
갈고 심고 매고 마땅히 얻는 것이니
갈고 심는 것이 다 배고픔에 있고
천한 것 참하면 어찌 모를 낼 수 있는가.
윤택하고 궁색함이 힘쓰기에 달렸으니
때가 되면 반드시 성숙함을 얻어서
흉년이 와도 능히 굶주리지 않으리라.

5. 贈別盧子膺 (玉溪)
吾堂諸君子
邈在天一方
君今復遠別
自我潛悲傷
離亭日欲暮
回首長廻徨

노자응에게 드림
우리 여러 친구들이
멀리 하늘 한 쪽에 있는데
지금 그대마저 멀리 작별하고
슬픔에 겨워 어찌 할 바 모르네
정자를 떠남에 날이 저무려 하니
머리를 돌이켜 길게 두리번거리네.

6. 贈宋圭庵 (麟壽)
觀察湖南敎化淳
躬行道義效鄕人
庶民刮目瞻新政
克念存誠更返身

송규암 인수에게 드림
호남에 관찰사 되어 가르침이 순박하고
몸소 도의를 행하여 鄕人이 본받았네.
뭇 백성이 눈을 닦고 새 정사를 보고
극히 정성 둠을 생각하며 돌아 왔도다.

7. 挽金河西 (麟厚)
直入升堂士所稀
硏窮彈思盡精微
蓼蓼千載尋墜緖
雖是云망道自輝

김하서 인후의 만장
들어오시자 堂에 오름은 선비마다 드문 일이었고
연구를 하고 탄핵을 생각함이 정미하기 이를데 없고
쓸쓸한 세월에 떨어진 실마리를 찾으니
비록 이에 죽었다 하나 道는 스스로 빛나는구나.

8. 龍泉寺贈盧子膺
昔共山齋樂
今逢水石畏
潛龍臥幽窟
飛鶴上雲臺
泯迹工夫大
當官敎化恢
論心情不盡
臨別更徘徊

용천사에서 노자응에게 드림
예전에 山齋의 즐거움을 나누었는데
이제 만나니 물과 돌이 두렵도다.
잠룡은 깊은 굴에 누웠었고
나는 학은 구름 대에 오르도다.
다한 자취는 공부가 커짐이며
관직에 오르니 교화가 너르도다.
심정을 토로하여 끊임이 없으니
이별이 아쉬워 서성거리네.

9. 示諸生
作聖之功 朱子只言四書不言他書 願諸子勿觀雜書須精熟四書 融會透見 爲自家道德事業然後 可及六經 然則大而爲賢化而爲聖 不及亦不失令名 某於學者每以是告焉 而從事者鮮 諸子信乎否

여러 사람에게 보인다
주자께서 聖人을 지어낸 공을 말할 때 다만 四書만 말씀하시고 다른 글은 말씀하지 않으셨다. 원컨대 여러분도 잡서는 보지말고, 모름지기 四書를 완전히 익혀서 하나로 합하게 하고 꿰뚫어 보아서 자신의 집을 위하여 도덕 사업을 한 연후에 六經을 읽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커서 賢人이 되고 화해서 聖人이 되나니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빼어난 명성은 잃지 않을 것이다. 어떤 학자라도 매양 이것으로써 하소연하나 이에 따르는 자가 적으니 여러분들은 믿을 것인가 믿지 않을 것인가.

10. 答盧子膺書
衰旺之說君常患疾病請以疾告 周子曰無極之眞二五之精妙合而凝 盖無極之眞理也二五之精氣也 人之身衰旺有二焉 陰陽相和而合者人物之生也 陰陽相遇之散者人物之 死也 於二五之精妙合而凝處有數字乎其間有壽失疾病盛衰存亡不在於是乎 雖聖人固不得免焉 邵子得見此氣數有陰陽吉凶之說焉 此自然氣數之衰旺也 然衆人有欲故不待自然之數而促亡 此不能中節耳目之欲 故元氣不能調和順布而心陽不得下降賢陰不得上升 陰自陰陽自陽不得和而合焉 故或病或死耳 此不能調攝一身陰陽之衰旺也 大凡理精氣粗理則無窮氣則限窮 理之功深則氣數之工可不治而自明矣 故程子不滿邵子而平生不言數字者良以此也 願君更加誠敬以致博約禮之工則心通義理氣數衰旺之說更在其中矣

노자응에게 답하는 글
衰王에 관한 설은 그대가 항상 근심하여 알고자 청하였다. 周子(중국 북송의 유학자 조돈이를 말함)가 말하기를 『無極의 眞은 스물 다섯가지 精이 오묘하게 합하여 엉긴 것이다. 라고 하였으니, 대개 無極의 眞은 理요, 스물 다섯가지 精이라고 하는 것은 氣다. 사람의 몸이 쇠약하고 왕성한 것은 두가지가 있으니, 음양이 서로 화하여 합하면 사람이 생기가 나며, 음양이 서로 만나서 흩어지면 사람이 죽는 것이다, 스물 다섯가지의 精이 오묘하게 엉긴 곳에 여러 글자가 있으니, 그 가운데 壽와 失, 疾病, 盛衰, 存亡, 不在가 이것이다. 비록 성인이라 하더라도 면하기 어려운 것이나 邵子(중국 송대의 학자 소옹을 말함)가 이 氣數(길흉화복의 운수)를 보게 되어 음양 길흉의 설이 있었다. 이는 저절로 오고 가는 기수의 衰旺이다. 그런데 뭇 사람들은 욕심이 있어 자연스러운 운수를 기다리지 않고 죽기를 재촉한다. 이는 耳目의 욕망을 절제하지 못한 것으로, 그런 까닭에 원기가 조화를 이루어 순순히 퍼지지 못하고 心陽하여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고 賢陰하여 위로 올라가지 못한다. 음은 음대로 양은 양대로 화합하지 못하는 까닭에 흑 병이 들고 혹 죽는 것이니, 이는 한 몸이 가지고 있는 음양의 衰旺을 조섭하지 못한 것이다. 대개 理는 精하고 氣는 粗하니, 理는 무궁하며 氣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理에 힘씀이 깊으면, 운수의 공교로움은 다스릴 수 없을 것이나 스스로 밝아질 수 있다. 그런 까닭에 程子는 邵子의 說에 만족하지 않고 평생토록 운수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원컨대, 그대는 다시 정성을 들여서 공경하고 널리 글을 읽어 예법에 따라서 행실을 삼가고 몸을 올바르게 가지는데 힘쓰도록 하라. 그렇게 한즉 마음이 理에 통하여 氣數의 衰旺에 관한 說이 그 가운데 있음을 알 것이다.

 

▣ 司憲府 殿中監察御史 桐谷公 諱 晁 (농西郡公 9世)

庭桐
玉立庭前樹
亭亭獨保靑
看看枝葉密
斯可鳳樓停

오동나무
뜰 앞 오동나무 옥같이 서서
혼자 푸름을 지녀 정정하도다.
가지와 잎사귀가 자욱한 속에
봉황이 깃들어 머무는 것 같네.


▣ 提督 忠烈公 仰城 將軍 諱 如松 (농西郡公 9世) (壬辰倭亂 戰勝將軍)

1. 扇詩 (安東. 忠孝堂 保存) (國寶 第 414號)
提兵星夜渡江干
爲說三韓國未安
明主日懸旌節報
微臣夜釋酒杯歎
春來斗氣心逾壯
此去妖氣骨己寒
談笑敢言非勝算
夢中尙憶跨征鞍
(領議政 西崖 柳成龍에게 주고 가신 詩)

군사를 거느리고 별이 빛나는 밤에 강을 거느니,
조선나라 편치 않다는 말 확실하구나.
명나라 임금은 날마다 승첩보를 기다리고
이 사람은 밥마다 줄기는 술도 끊었노라.
봄이 오매 하늘 운기 보고 마음 더욱 씩씩해
내가 가는 이 걸음에 왜적들의 뼈가 서늘하리라.
웃으며 환담하고 장담 중에도 승산이 없을까 보냐
꿈에도 정마탄 것 잊지 않노라,

2. 贈義僧將 (李如松 장군이 周王山에서 四溟大師에게 내린 詩)
松雲大禪伯行拂下
無意圖功利
有心學爲仙
今聞王事急
想樓下山領
天朝將太子少傳
李如松 謹橋

功利에는 뜻이 없고
神仙될까 하였는데
王事가 急한 것을 이제야 들었으며
樓上을 생각하여 下山을 서두른다.

3. 仰城 如 題 臨津江 上 仰城 松은 임진강 위에서 쓰다.
營屯細柳大江憤 수양버들 늘어진 임진강변에
露下驅馳爲爾君 님을 위해 이른 아침 말을 달렸네.
草絶窮山飢萬馬 가뭄에 초목 말라 軍馬 굶주리고
絪寒旬日난三軍 식량이 부족하니 三軍이 허기지네,
刀頭飮血心偏壯 칼을 뽑아 피를 마셔 심장은 건장한데,
陳裏看圖勢不分 진중을 도모하니 형세 분간 어려우네,
須促行粮千里饋 군량미 재촉하여 천리 軍兵 배불려서
一時고勇滅妖氣 용맹을 북돋아 오랑캐를 멸하리라.

4. 書簡
余畿千里提戈遠征東
抵鴨綠會我姻家동總戎公
見有朝鮮韓郞中書知其高
才及抵朝鮮乃郞中又向我
蒸蒸大書余號병唐詩以呈
體法遵勁出顚入素用是聯
吟一律知所重云

나는 수천리 길에 군사를 이끌고 원정을 떠나 동쪽으로
압록강을 건너 이곳에 다달아서, 나와 인연이 있는 동총융공을 만난 자리에서
조선의 한석봉의 글씨를 보고 「그의 높은 재주를 알았노라.
조선의 한석봉(郞中)이 나를 향해
시원히 밝고 큰 글씨로 나의 호(仰城)와 아울러 당시(唐詩)를 써 주었는데
서체와 법이 굳건하고 근본에서 나와 본디로 들어가는
마치 풍류를 읊는 것 같아 소중한 작품으로 알겠노라」


▣ 大司成 蘿菴公 諱 文興 (농西郡公 10世)

誡九勿思訓
敎學勿思速
親戚勿思疎
言語勿思易
仕官勿思久
財貨勿思取
美人勿思戱
卑賤勿思壓
尊貴勿思阿
閑居勿思放

학문을 가르치는데 서둘지 말고,
친척간에 소홀하지 말 것이며,
말은 분별없이 쉽게 하지 말라,
벼슬을 얻거던 오래 할 생각 말고
부당한 재물을 취하지 말라,
미인을 대하여도 희롱하지 말고,
비천한 상대라도 위압하지 말 것이며,
존귀한 상대라도 아부하지 말고,
한가로이 살더라도 방종하지 말라,


▣ 承旨 默齋公 諱 文楗 (농西郡公 10世)

雨中詠齋號
觸機生禍語難諧 一겁無何事盡乖
物自橫時容便好 辱從來處忍還佳
眸昏不用姸치別 性瀨休論得喪懷
城底數椽安分臥 城中箇情味금如

右묵齋吟
迂소活計未曾謀 束手無爲到白頭
古趣欲從閑裏得 淸歡擬向靜中求
一身但逸三誰省 萬事都捐百不憂
拙수生涯斯亦足 聖恩寬處占長休
右休수吟
生素癡겁懦言怠事坐謫哀遲尤有所憚只思
休默以庇餘生吟成二律用示其志間求親友
之和擬作面目云 嘉靖甲寅季夏初星山後學
李文楗子發 識

默休唱酬中에서 雨中에 齋號를 읊음
기미를 거슬리면 화가 생기니 말이 어울리기 어렵고 한번 엎드려지면 아무일 없으니 어그러질 일도 없다. 온갖 일이 스스로 비껴 갈 때는 용납하는 것이 마음 편하며 욕이 좇아오는 곳에는 참는 것이 도리어 아름답다. 늙으면 곱고 추한 것을 구별할 필요도 없고 성품이 나태하여 얻고 잃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성아래 서까래 엮어 만족하고 누었으니 성안의 낱 인정과 맛이 齋와 같이 입 다물었네
이는 默齋를 읊음

성격이 성글어서 생계를 꾀한 일이 없었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이에 흰 머리만 되었다. 옛 뜻을 한적함을 좇아서 얻고자 하였고, 맑은 기쁨을 조용한 곳에서 구하고자 생각했다. 한몸이 편안하면 하루 세 번 반성할 일도 없고, 세상만사를 멀리하니 근심할 일이 없도다. 소졸한 늙은이의 생애가 이만하면 족하니, 성은이 넘치는 곳에서 길게 쉴까 하노라.
이는 休수를 읊음

태어나면서부터 어리석어서 말하기를 겁내고 일을 게으르게 하였더니 유배당한 몸으로 앉아서 쇠미하여 지니 더욱 두려워 하는 바가 있게 되었다.
이제 默과 休를 생각하면서 여생을 도모하고자 하여 默齋 休수 두 수의 시를 지어 읊으니 그 뜻을 보인 것이다. 그 사이 친우들의 화답하는 시를 구하여 모양을 갖추려고 한다.
명종 九년(一五五四, 嘉靖甲寅) 초여름
城山後學 李文楗 子發 씀


▣ 義兵將 梧月堂公 諱 惟함 (농西郡公 10世)
自笑衰용一病骸
不賢之曰國人皆
已將東瑟乖時好
肯向南風頹克諧
老去林泉無伴侶
押來鷗鷺是生涯
源頭更有淸流在
留得天雲許蕩懷

이 한 몸 병들어 쇠약해지니 세상이 싫고 그냥 서글퍼
낫지 않고 죽겠다니 다들 그렇게 여기는 가 봐
이미 나라는 슬픔을 당했는데 시세는 트러 지구나
기꺼이 바라니 성군이 나오셔 어려움을 풀어주소서
늙어가니 집에는 반려도 없어
찾아드는 백로와 더불어 지내노라
물 머리는 겹쳐서 맑게 흐르는데
하늘에 뜬 저 구름은 머물러서 회포를 씻게 하구나

 

歌手 白年雪의 노래

歌手 白年雪의 노래는 모두 몇 曲이나?

歌手 白年雪은 本名이 李甲龍(또는 李昌珉)이며 星州李氏 21世입니다.
1915年 慶尙北道 星州郡 星州邑 예산리에서 태어나 1938년 "流浪劇團"으로 歌謠界에 데뷔하여 1952년 '마음의 고향', '신라제 길손'을 마지막 노래로 15年이란 짧은 期間이지만 많은 曲을 불러 大衆들의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歌手였으며, 1960年 以後는 歌手協會 會長으로 있다가 1963年 市民會館(지금은 世宗文化會館)에서 隱退 公演을 하고 그後 美國으로 移民을 가서 살다가 1980年 LA에서 他界하였으며, 2002年 10月 19日 國立中央劇場 ‘문화의 날’ 記念式場에서 玉冠文化勳章을 受賞하였습니다.

2003年 5月 25日 「백년설 추모사업 추진위원회」主催로 성주읍 성밖 숲에 있는 백년설 추모 노래비 野外舞臺에서 "제1회 백년설 가요제"를 開催하였습니다.

歌手 白年雪의 노래 중 代表的인 曲은 "나그네 설음", "대지의 항구", "번지 없는 주막"으로 아직까지 우리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歌手 白年雪이 부른 노래는 모두 몇 曲이나 될까요?

歌手 白年雪이 불렀던 노래 중에서 제가 알고 있는 54曲의 노래 題目을 올려 봅니다.

결사대의 안해
경기 나그네
고향 길 부모 길
고향설(故鄕雪)
고향 소식
꿈꾸는 항구선
나그네 설움
남포불 역사
내 고향
누님의 사랑
눈물의 백년화(百年花)
눈물의 수박등(燈)
대지의 항구
더벅머리의 과거
두견화(杜絹花)
마도로스 박(외항선원)
마도로스 수기
마음의 고향
만포진 길손(추풍령 길손)
모자 상봉]
번지 없는 주막(番地없는 酒幕)
복지만리(福地萬里)
봉화대의 밤
부모 이별
북방 여로(행로)
비오는 해관
산 팔자 물 팔자
삼각산 손님
상사(想思)의 월야(月夜)
雙돛대 嘆息
석유등 길손
세월은 가오
신라제(新羅祭) 길손
아들의 혈서
아주까리 수첩
알성급제
어머님 사랑
유랑극단(流浪劇團)
이 몸이 죽고 죽어
인생 가두(人生街頭)
일자일루
정든 땅
제3 유랑극단
조선 해협
즐거운 상처(傷處)
지원병의 어머니
천리정처(千里定處)
청춘 썰매
청춘 해안(靑春海岸)
춘소화월(春宵花月)
한잔에 한잔 사랑
해인사 나그네
허허(虛虛) 바다
혈서 지원(血書志願)

그 외에도 歌手 白年雪이 불렀던 노래가 많이 있을 것입니다.

알고 계시는 분은 자료를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는 성주이씨 선조님 관련자료

▶충렬왕 32년(병오, 1306) 겨울 11월 갑오일

이 해에 왕유소, 송방영, 송립, 한신이 전왕을 왕에게 참소하였으며, 또 황후 및 좌승상
아홀테, 평장 팔도마신에게도 참소 하였는바 그들은 전왕의 머리를 깎아 중으로 만들려는 것과
서흥후 왕전에게 보탑실련 공주를 개가시키려는 음모였는데, 최유엄 등이 중서성으로 가서
왕유소가 흉악한 반역 음모를 하고 있는 사실을 논증하였으므로 중서성의 관원이 왕유소 등을

체포하여 가두었다. 그래서 고세, 김문연, 진량필이 왕에게 귀국하기를 권하니
왕이 그 제의를 거부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듣건데, 전왕이 사람을 보내어 귀국하는 길가
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나를 강물 속에 던져 넣으려고 한다. 내가 비록 늙기는 하였으나 내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랴.”고 하였다.그래서 고세 등이 중서성에 글을 보내어 왕유소의
죄상을 극론하고 왕을 모시고 귀국할 것을 요청하였더니,중서성의 관원들이 황제에게 이 일을
보고하고 왕이 빨리 귀국할 것을 독촉하였다. 왕은 구실을 붙일 계책이 없어서 일부러 약을
마시고 이질이 생기게 하였다. 그리고 여름부터 가을에 이르기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를 않았다
공주가 왕유소 등이 고소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아주 노하여 김문연을 불러다가 곤장을 쳤으며
또 사람을 시켜 문을 지키게 하고, 무릇 임명장을 가지고 왕의 서명을 받으러 오는 자는 왕의
처소에 출입하지 못하게 금지하였다. 이렇게 되자 왕을 따라갔던 신하들이 모두 흩어지고
다만
비서승(秘書丞) 이조년(李兆年)과 내수(內?) 최진(崔晋) 두 사람만이 왕의 곁에 남아서
시중하였다.


▶충숙왕 14년(정묘, 1327) 겨울 11월 무자일

왕이 교서를 내리기를 “내가 원나라 서울에 체류한지 5년간 간신들이 왕위를 다른 사람에게
옮기려고 음모할 때에 시종하던 신하들이 시종일관 절개를 지켜 나를 도왔으니 그 공로를 기록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첨의정승 ... 등을 1등공신으로, 찬성사 ..판 전교시사(判 典校寺事)
이조년(李兆年) 등은 각각 2등공신(二等功臣)으로 삼고 토지와 노비를 줄 것이며,

그 부모와 처지들에게도 차등 있게 작위를 줄 것이다.”라고 하였다.


▶충혜왕 원년 12월 기유일

한종유를 밀직부사로, 이조년(李兆年)을 장령(掌令)으로 각각 임명하였다.


▶충혜왕 후 원년(경진, 1340) 여름 4월 계사일

이조년(李兆年)을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임명하였다.


▶충혜왕 후 2년(신사, 1341) 12월 계축일

성산군(星山君) 이조년(李兆年)이 퇴직을 청원하였다.


▶충혜왕 후 4년(계미, 1343) 5월 기사일

성산군(星山君) 이조년(李兆年)이 졸(卒)하였다.


▶충목왕 원년(을유, 1345) 6월 을묘일

서연(書筵)을 설치하고 우정승 ... 장령(掌令) 이여경(李餘慶) ... 등을 시켜 날마다
교대하면서 왕의  글 공부를 시독(侍讀)하게 하였다.


▶충목왕 2년(병술, 1346) 겨울 10월 경신일

왕이 다음과 같은 내용의 교서를 발표하였다. “우리 태조가 개국한지 429년이 되었는데,
그동안 우리나라의 제도와 문물 그리고 아름다운 언행들을 모두 감추어 두고 공개하지 않는다면
그 무엇으로써 후세에 모범을 보여 줄 것인가? 그러기에

우리 충선왕이 민지를 시켜 편년강목(편년강목)을 편찬하였으나 오히려 누락된 사실들이 더많다
이제 이것을 보충 편찬하여 세상에 반포하고자 하노라.” 이에 부원군 이제현,
제학(提學) 이인복(李仁復) 등에게 편년강목을 수보 편찬하여 바칠 것을 명령하였으며,
또 충렬, 충선, 충숙의 3대 실록도 편찬하라고 명령하였다.


▶충목왕 3년(정해, 1347) 2월 신묘일

김민슬을 양광도에 이원구(李元具)와 김영리를 전라도에 ... 각각 파견하여
인민들의 토지를 측량하게 하는 동시에 안렴존무사(按廉存撫使)를 겸임하게 하였다.


▶충목왕 3년(정해, 1347) 겨울 10월 갑오일

원나라에서 기삼만을 죽인 사건과 관련하여 직성사인 승가노를 보내어 경치관 ... 등을
형장 쳤는데, 다만
... 대호군(大護軍) 이원구(李元具)는 병으로 인하여 면제되었다.


▶충정왕 2년(경인, 1350) 9월 초하루 계축일

이능간을 ... 이태보(李台寶)를 성산군(星山君)으로 ... 각각 봉하였다.


▶공민왕 3년(갑오, 1354) 봄 정월 계미일

채하중을 ... 이인복(李仁復)을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임명하였다.


▶공민왕 3년(갑오, 1354) 가을 7월 신사일

강윤충을 ... 이인복(李仁復)을 겸 감찰대부(兼 監察大夫)로 ... 임명하였다.


▶공민왕 4년(을미, 1355) 윤달 정미일

홍유구와 ... 이연경(李延慶)을 흥안군(興安君)으로 ... 임명하였다.


▶공민왕 5년(병신, 1356) 가을 7월 정해일

다시 관제를 개정하였다. 홍언박 ...
이인복(李仁復)을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 각각 임명하였다.


▶공민왕 5년(병신, 1356) 9월 계미일

평양도순문사(平壤都巡問使) 이여경(李餘慶)이 여진포로 남여 20여 명을 바쳤으므로

양광도 각지에 나누어 두었다.


▶공민왕 5년(병신, 1356) 겨울 10월 무오일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인복(李仁復)을 원나라에 파견하였다.


▶공민왕 5년(병신, 1356) 11월 기묘일

홍언박을 ... 이인복(李仁復)을 정당문학(政堂文學) 겸 어사대부(兼 御史大夫)로 ...
임명하였다.


▶공민왕 6년(정유, 1357) 윤달 을사일

이인복(李仁復)에게 고금록(古今錄)을 편찬케 하였다.


▶공민왕 7년(무술, 1358) 봄 2월 병신일

염제신을 ... 이여경(李餘慶)을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 임명하였다.


▶공민왕 8년(기해, 1359) 봄 정월 임술일

황석기를 파면하고
이승경(李承慶)을 문하시랑(門下侍郞) 동 중서문하평장사(中書門下平章事)로 임명하였다

▶공민왕 8년(기해, 1359) 8월 계해일

이인복(李仁復)을 수사공(首司空)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어사대부(御史大夫)로 ...
이여경(李餘慶)을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 임명하였다.


▶공민왕 8년(기해, 1359) 12월 경오일

수문하시중 ... 이인임(李仁任)을 서경존무사(西京存撫事)로 임명하였다.


▶공민왕 8년(기해, 1359) 12월 무자일

서북면 도원수(西北面 都元帥) 이암의 마음이 약하여 군사를 통솔할 수 없었으므로
평장사(平章事) 이승경(李承慶)을 파견하여 대체케 하고 ... 하였다.


▶공민왕 9년(경자, 1360) 2월 임오일

도원수(都元帥) 이승경(李承慶)이 병으로 인하여 돌아왔다.


▶공민왕 9년(경자, 1360) 3월 임자일

이승경(李承慶)에게 충근경절협모위원공신(忠勤勁節協謀威遠功臣)의 칭호를 ... 주었다.


▶공민왕 9년(경자, 1360) 윤 5월 계유일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이승경(李承慶)이 졸(卒)하였다.


▶공민왕 11년(임인, 1362) 봄 정월 갑자일

안우 ... 이여경(李餘慶) ... 등은 20만 병력을 거느리고 동교에 주둔하였고, 총병관 ...
을축일 새벽에 모든 장령들이 사면으로 진공하였다.


▶공민왕 11년(임인, 1362) 봄 정월 경오일

참정(參政) 이인복(李仁復)을 파견하여 국사의 비밀 문헌을 거두어들였다.


▶공민왕 11년(임인, 1362) 8월 갑오일

판 개성부사(判 開城府事) 이인임(李仁任)을 서북면 도지휘사(西北面 都指揮使)로
임명하고
, 또 요양성에 사자를 보내어 홍적의 정형을 탐지케 하였다.


▶공민왕 11년(임인, 1362) 8월 경술일

첨의평리(僉議評理) 이인복(李仁復)에게 명령하여 개태사의 태조 진전에 가서 서울을
강화로 옮길 데 대하여 점을 치게 하였는데, 불길한 괘를 얻었으므로 중지하였다.


▶공민왕 12년(계묘, 1363) 봄 정월 초하루 임인일

삼사우사(三司右事) 이인복(李仁復)을 태조 진전에 보내어 환도할 날짜를 점쳤다.


▶공민왕 12년(계묘, 1363) 봄 정월 초하루 갑신일

첨의평리(僉議評理) 이인임(李仁任)을 서북면 도순문사(西北面 都巡問使) 겸
평양윤(平壤尹)으로 임명하였다.


▶공민왕 12년(계묘, 1363) 윤달 초하루 신미일

밤 5경에 김용이 그 도당 50여 인을 비밀히 보내어 행궁을 침범하였다. ...
이인복(李仁復) ... 에게 명령하여 역적들을 순군에서 국문케 하였다.


▶공민왕 12년(계묘, 1363) 윤달 을유일

또 수복경성공(收復京城功)을 수록하면서 ...
첨의평리(僉議評理) 이인임(李仁任) ...을 1등공신(一等功臣)으로 하고, ...

1등은 벽위에 초상을 그리고, 부모 /처에게 3등을 뛰어 봉작하고, 그의 아들 한사람은
7품 벼슬을 주되 만약 아들이 없으면 조카나 생질이나 또는 사위 중에서 한사람을
8품 구사(驅史)로 임명하여 5명에게 파령(把領)의 실직을 주고, 7명에게 초입사(初入仕)를
허하며, 자손을 음관(蔭官)으로 채용하게 하였으며, 토지 1백결과 노비 10명을 주었다.


▶공민왕 12년(계묘, 1363) 5월 임진일

왕이 감히 어떻게 할 수 없어서 ...
이인임(李仁任)을 평양윤(平壤尹)으로 임명하여 군량을 조달하게 하고 ...


▶공민왕 12년(계묘, 1363) 8월 무신일

이인복(李仁復)을 서북면 도찰군용사(西北面 都察軍用事)로 임명하였다.


▶공민왕 12년(계묘, 1363) 겨울 11월 임신일

첨병제사공(簽兵濟師功)을 기록하면서 서북면 도순문사(西北面 都巡問使)
이인임(李仁任) ... 등을 2등공신(二等功臣)으로 하였다.
그들의 부모와 처에게 벼슬을
주고, 아들 1명에게 7품 벼슬을 주되 만약 아들이 없으면 조카나 생질 또는 사위 중에서

1명에게 8품 벼슬을 주며, 구사 3명과 진배 파령 5명을 주고 초입사를 허하며,
자손들을 음관으로 사용하고, 토지 50결과 노비 5명을 주었다.


▶공민왕 14년(을사, 1365) 3월 경진일

류탁을 ... 이인복(李仁復) ...를 찬성사(贊成事)로 ... 봉하였다.


▶공민왕 14년(을사, 1365) 5월 경오일

김보와 ... 이인복(李仁復)을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으로 ... 봉하였으며, ...


▶공민왕 14년(을사, 1365) 6월 경인일

이공수를 ...
이인복(李仁復)을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이인임(李仁任)을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 임명하였다.


▶공민왕 17년(무신, 1368) 12월 갑신일

이춘부를 도첨의 우시중으로, 이인임(李仁任)을 좌시중(左侍中)으로 임명하였다.


▶공민왕 18년(기유, 1369) 11월 경오일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이인임(李仁任)을 서북면 도통사(西北面 都統使)로 임명하고
대도(大燾)를 주어서 보내었다. 왕이 일찍이 서경에 갔을 때 대도를 만들고 관원을 배치하여
그것을 지키면서 일정한 날에 제사를 지내게 하더니 이 때에 인임(仁任)에게 주어서 나가
진수케 하였던 것이다.


▶공민왕 19년(경술, 1370) 3월 갑인일

명나라 황제가 상보사승 설사를 보내어 왕 책봉의 명령을 전하였다.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성밖에 나가서 고명을 맞이하였다.그 고명에 이르기를 ...그리고 태비에게 금단 ...주었으며
, 신돈과 시중 이춘부 및 이인임(李仁任)에게 색단과 선라 각 4필씩,사 각 4필씩을 주었다.


▶공민왕 20년(신해, 1371) 5월 계유일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이인복(李仁復)과 지춘추관사 이색에게 명령하여
본조금경록(本朝金鏡錄)을 증수(增修)케 하였다.


▶공민왕 21년(임자, 1372) 3월 경오일

왕이 손수 성산군(星山君) 이포(李褒)의 초상화를 그려서
그 아들 수시중(守侍中) 이인임(李仁任)에게 주었다.


▶공민왕 22년(계축, 1373) 여름 4월 정유일

검교시중(檢校侍中) 이포(李褒)가 졸(卒)하였다.


▶공민왕 23년(갑인, 1374) 3월 을해일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 이인복(李仁復)이 졸(卒)하였다.


▶공민왕 23년(갑인, 1374) 여름 4월 정유일

이인임(李仁任)을 파면하고, 염제신을 문하시중으로 임명하였다.


▶공민왕 23년(갑인, 1374) 5월 초하루 병인일

시중(侍中) 이인임(李仁任)을 동서강(東西江) 도통사(都統使)로 임명하고,
승천부에 나가서 주둔케 하였다.


▶공민왕 23년(갑인, 1374) 6월 계묘일

경복흥을 문하시중으로, 이인임(李仁任)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으로 임명하였다.


▶공민왕 23년(갑인, 1374)

왕이 근신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신돈의 집에 갔을 때에 그 집 여종과 내통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그 아이를 경동시키지 말고 잘 보호하라.”고 하였으며, 신돈을 죽인 후
왕은 모니노를 데려다가 명덕태후의 궁전에 두고 수시중(守侍中) 이인임(李仁任)에게
이르기를 “맏아들이 있으니 나는 근심 없다.”라고 하고, 계속해서 말하기를

“신돈의 집에 아름다운 여자가 있었는데, 자식을 낳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내가 가까이
하였더니 이 아이를 낳았다.”라고 하였다.


▶공민왕 23년(갑인, 1374) 9월 갑신일

최만생, 홍륜 등이 왕을 죽이니 태후는 우를 데리고 대궐에 들어갔으나 발상하지 않았다가
병술일에야 보방에 빈소한 다음 우가 재상들과 함께 왕의 죽은 것을 발표하고 거애하였다.
이튿날 태후와 경복흥은 종친들 중에서 골라서 왕을 세우려 하였고,이인임(李仁任)은 우를
왕으로 세우고자하여 의논이 결정되지 않았으며, 도당에서는 서로 얼굴을 바라보기만 하고 감히
발언을 못하고 있었는데, 판삼사사 이수산이 말하기를 “오늘의 계책은 응당 종실에서 결정
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때에 영녕군 유와 밀직 왕안덕이 이인임(李仁任)
의사에 아첨하여 큰 소리로 말하기를 “선왕께서 대군으로 뒤를 이으게 하셨으니 이분을
버리고 누구를 구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인임(李仁任)이 백관을 인솔하고 드디어
우를 왕위에 올려 세웠는데, 그 때 우의 나이가 10세였다.


▶우왕 2년(병진, 1376) 3월

반야가 밤에 태후궁에 남몰래 들어와서 울면서 말하기를 “왕을 낳은 사람은 나인데 어째서
한씨를 어머니로 삼았는가?”하였다. 이 때 태후가 반야를 내쫒자 이인임(李仁任)은 그를
가두고 대간과 순위부가 연합하여 그를 치죄하는데, 반야는 신축한 중문을 가리키면서
부르짖기를 “하늘이 만약 나의 원통한 것을 안다면 이 중문이 반드시 허물어 질 것이다.”

라고 하였다.


▶우왕 3년(정사, 1377) 6월 을묘일

밀직부사(密直副使) 이인립(李仁立)을 서경부원수(西京副元帥)로 임명하고,
판밀직 한방언을 안주원수로 임명하였다.

▶우왕 6년(경신, 1380) 5월

신우가 석전을 보고자하므로 지신사(知申事) 이존성(李存性)이 “이것은 임금의 구경할 것이
아니다.”라고 간언하였다. 신우가 불쾌히 여기고 소수를 시켜 구타하므로 이존성(李存性)
피하여 달아나니 신우가 탄환을 가져다 그를 쏘았다.


▶우왕 6년(경신, 1380) 7월 갑인일

우가 소수들을 시켜서 후원에다가 함정을 파 놓았는데, 지신사(知申事) 이존성(李存性)
처음으로 빠졌다. 신우는 날마다 이런 장난들을 하면서 즐겼다. 우가 사냥을 나가려 하므로
이인임(李仁任)과 최영 등이 제지를 하므로 우가 말하기를 “나는 본시 사냥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여러 재상들이 사실 그렇게 인도해 준 것이다. 또 경 등은 사냥을 좋아하는데,

날아다니고 농작물을 밟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우왕 6년(경신, 1380) 8월

우기 또 목촌들로 가려하니 이인임(李仁任)이 간하여 말하기를 “만약 목촌으로 간다면
반드시 헌릉을 지나가는데 제물을 올리지 않겠습니까? 올리는 제물을 어떻게 갑자기 장만
할 수 있습니까? 또 제물을 올린다 하더라도 베복을 입어야 할 것이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우가 최영에게 문의하니 최영의 대답도 역시 그러하므로 사냥을 그만두었다.


▶우왕 6년(경신, 1380) 9월

우가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후원에서 말달리기를 하며 새끼를 던져 말을 붙드는 등 못할
장난이 없었다. 또 우가 궁전 지붕으로 올라가서 기왓장 부스러기를 던져 사람을 맞췄다.
또 후원으로 가서 상호군 문달한과 우왕 지신사(知申事) 이존성(李存性)으로 더불어
활쏘기를 연습하였는데, 이존성(李存性)의 갓을 벗겨서 과녁으로 썼었다.


▶우왕 7년(신유, 1381) 2월

이인임을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임명하고, 최영을 수시중으로 임명하였다.


▶우왕 8년(임술, 1382) 2월

판서운관사 장보지 등이 글을 올려 “변괴가 자주 나타나니 서울을 옮기어 재앙을 피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였으므로 우가 그 글을 도당으로 보내었으나 이인임(李仁任)이 불가
하다고 고집하였으므로 그 문제가 중지되었다.


▶우왕 8년(임술, 1382) 6월

전법판서 조준을 경상도 체복사로 임명하고, 이인임(李仁任)을 영문하부사(領門下府事)로
임명하고
, 최영을 영삼사사로 임명하고, 홍영통을 문하시중으로 임명하고,
이자송을 수문하시중으로 임명하였다.


▶우왕 8년(임술, 1382) 11월

우가 응양군 상호군(鷹揚軍上護軍) 이존성(李存性)의 집으로 가서 말하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말달리기를 좋아하였는데, 지금도 그만두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이존성(李存性)이 말하기를 “땅이 바야흐로 어는 때이므로 말이 실수할 우려가 있으니

나라를 위하여 자중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니 우가 즐거워하지 않았다.


▶우왕 9년(계해, 1383) 3월 기유일

조민수를 문하시중으로 임견미를 수문하시중으로 임명하였으며, 임견미, 도길부, 우현보,
이존성(李存性) 등으로 정방(政房)을 제조(提調)케 하였다.

<성주이씨 쉼터 이국성님글 재편집>

 

일제 이항 선조님을 배향한 남고서원(정읍시청 출처)    

지정번호 :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76호

지정년월일 : 1984-04-01

소재지 : 정읍시 북면 보림리 537

소유자 : 성주이씨종중

시대 : 조선 선조 10년(1577년) 창건, 광무 3년(1899년) 재건

수량 : 일원

관련단체 : 성주이씨종중

이 서원(書院)은 1577년인 선조(宣祖) 10년(丁丑))에 창건(創建)하여 호남(湖南)의 대성리학자(大性理學者) 일제(一齊) 선생과 그의 제자(弟子)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였던 건제 김천일(建齊 金千鎰) 선생을 배향(配享)하였다.

효종(孝宗)때부터 사액(賜額: 임금이 書院의 이름을 지어 주며 懸板을 내려 주는 것)하여 주기를 상소(上訴)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685년인 숙종(肅宗) 11년(乙丑) 4월에야 남고서원(南皐書院)이라 사액(賜額)되었으며, 그 해 예조좌랑(禮曹佐郞) 한성우(韓聖佑)를 보내어 치제(致祭)했다.

이 서원은 이 지방 선비들의 학문(學文)의 도장(道場)으로 일제 이항(一齊 李恒) 선생의 문집(文集)과 그 목판(木板)을 소장(所藏)하고 있다.

1871년인 고종(高宗) 8년(辛未)에 조령(朝令)으로 철폐(撤廢)되어 단(壇)을 만들어 제사(祭祀) 지내다가 1908년 유림(儒林)들의 발의(發議)로 강수재(講修齋)를 세우고 1927(丁卯)년에 서원(書院)을 중건(重建)하여 매당 김 점(梅堂 金 ), 율정 김복억(栗亭 金福億), 용 암 김승적(龍巖 金承績), 매헌 소산복(梅軒 蘇山福)을 추배(追配)하고 있다.

1970년(庚戌)에 국가보조(國家補助)를 받아 서원을 고쳤고, 1975년(乙卯)에 문화공보부(文化公報部)로부터 문화재(文化財) 제 76호로 승인되어 1977년(丁巳)에 또 국가보조를 받아 단청(丹靑)을 했다.

지금은 2월과 8월 중정(中丁)에 각각 제사(祭祀)를 드린다.

현재 건물로는 사우(祠宇)를 비롯하여 내삼문(內三門), 강당(講堂), 외삼문(外三門)등이 있다.

사우(祠宇)는 정면 3칸, 옆면 2칸의 건물로 지붕은 맛배지붕이며 처마는 겹처마이다. 건물은 잡석의 축대(築臺)위에 세워졌으며, 기둥의 앞면은 두리기둥을 사용하였으나 건물자체는 모두 네모난기둥(方柱)을 사용하였다.

전면 가운데는 사분합(四分合)의 교살문의 있으며, 좌우 양측에는 같은 형식의 외여닫이를 달아 드나든다.

역시 잡석의 축대 위에 세워진 전면 4칸, 옆면 3칸의 강당(講堂)은 가운데의 2칸은 대청(大廳)이며, 좌우에는 방(房)을 두었다. 이 건물의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기둥은 사우(祠宇)에서처럼 퇴 전면에는 두리기둥을 세웠으나 건물 자체의 기둥은 모두 방주(方柱)를 사용하였다. 대청과 퇴 사이에는 사분합(四分合) 띄살문을 달았다. 두리기 둥아래에 놓은 주초(柱礎)는 자연석 그대로를 이용하였으므로 크기는 일정하지 않으나 그만큼 소박하고 옛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서원(書院)의 유래는 국조보감(國朝寶鑑)에 의하면 조선 중종(中宗) 36년(辛丑)인 1541년 에 경상도 풍기군(豊基郡)에 그 때 군수로 있던 주세붕(周世鵬)이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 우리나라 서원사(書院史)의 시초(始初)이다.

그는 안유(安裕)의 사당(祠堂)을 짓고 그 左右에 유생(儒生)들이 공부할 집을 지어 주자 (朱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이름을 따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 한데서 연유하였다.

서원(書院)은 선현선사(先賢先師)를 모시는 사당(祠堂)인 동시에 사설 교육기관(私設 敎育機關)으로 근세조선의 최초의 기관이였다.

그 때가 기묘사화(己卯士禍) 바로 뒤여서 많은 사류(士類)들이 정치와 손을 끊고 향촌에 들어와 오직 학문을 일삼고 후진(後進) 양성에 힘을 쓰게 되어 선비들이 서원에 모이게 되었다.

그 뒤 명종(明宗) 5년인 1550년에 풍기(豊基) 군수로 있던 이 황(李 滉)이 경상도 감사(監司)에게 글을 보내 임금께 송(宋)나라 백록동서원의 고사(古事)를 본받아 편액(扁額과 賜額)과 전토(田土)와 노예(奴隸, 學奴)를 내려줄 것을 부탁하였다.

당시 경상도 감사는 그대로 임금께 아뢰어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賜額)과 오경(五經)과 성리대전(性理大典) 등을 하사(下司)받아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된 것이다.

그 뒤 소수서원을 계기로 각지에 많은 사액서원이 서게 되였다.

⊙ 제사 받는 사람(享祀人物)

이 항(李 恒)

성주인(星州人)이다. 자(字)는 항지(伉之)이고, 호(號)는 일제(一齊)이며, 시호(諡號)는 문경(文敬)이다.

일제(一齊)는 1499년인 연산 5년(己未)에 서울 신혼동(新婚洞)에서 출생하였으며, 문열공 (文烈公) 조년(兆年)이 후손이다.

어려서 용력(勇力)이 아주 좋아서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했고, 장차 무관(武官)으로 출세하려고 했으나, 30여세(餘歲)때 큰아버지 판서공(判書公)의 훈계(訓戒)를 듣고 송당(松堂) 박영(朴英)의 문하(門下)에서 대학(大學)등 사서(四書) 공부하고 주자십훈(朱子十訓)과 백록동규(白鹿洞規)를 벽에 써 붙이고 무섭게 정진하였다.

그 뒤 41세에 어머니와 남하(南下)하여, 태인(泰仁) 분동(粉洞)으로 와서 보림사(寶林寺) 아래에 정사(精舍)를 짓고 일제(一齊)라 이름하고 학문(學問)을 연구(硏究)하면서 많은 제자(弟子)를 길러냈다.

김린후(金隣厚), 기대승(奇大丞), 허 엽(許 曄), 노수신(盧守愼)과 도의(道義)로 사귀며, 관찰사(觀察使) 송린수(宋隣壽), 현감 신잠(縣監 申潛)이 찾아와 문학론치(問學論治) 하였다.

이 항(李 恒)은 성리학(性理學)의 대가(大家)로 1566년인 명종(明宗) 21년에 학행(學行)으로 천거(薦擧)되어 의영고령(義盈庫令)이 되고, 임천군수(林川郡守)로 임명되었으나, 오래 머물지 않았다.

선조(宣祖) 초에 의빈경력 선공감부정(義賓經歷 膳工監副正) 등을 역임하고 장령(掌令)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올랐으나 병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의 학문은 넓어서(浩闊) 모든 경서(經書)를 관통하였다. 또한 이기(理氣)의 철학에도 독보적인 체계를 이루어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주장하였다.

1865년인 고종(高宗) 2년(乙丑)에는 문경(文敬)의 시호(諡號)가 내렸다.

1499년에 낳아서 1576년에 이 생을 마쳤다

김천일(金千鎰)

언양(彦陽) 김씨이며, 선조(宣祖)때 의병장(義兵將)이다.

字는 사중(士重)이며, 호(號)는 건재(健齋)이다.

1537년인 중종(中宗) 32년 2월에 나주(羅州)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외조모 밑에서 자랐다.

이 항(李 恒) 문하(門下)에서 공부하여 학문이나 덕행으로 김하서(金河西), 유미암(柳眉巖), 김린후(金隣厚), 유희춘(柳希春)등 선배를 찾아 종유(從遊)하기도 하였다.

선조(宣祖) 6년인 1573년(癸酉)에 그 학문과 덕행으로 거일(擧逸: 科擧를 치루지 않고 발탁되는 것)로 천거(薦擧)되어 군기사(軍器寺) 주부(主簿), 용안현감(龍安縣監)에 제수(除授)되었고, 임실현감(任實縣監)으로 있을 때 동면(東面. 지금의 城壽面) 유포리(柳浦里)에 가정재(可貞齋)와 구고면(九皐面) 선학동(仙鶴洞)에 용암서당(龍菴書堂)을 세워 후진양성에 온 힘을 다했다.

1578년인 선조(宣祖) 11년에 사헌부 지평 수원부사를 지내고, 잠시 벼슬을 사퇴하고 향리로 돌아왔다.

1592년인 선조 25년(壬辰)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나주(羅州)에 있다가 고경명(高敬命), 박광옥(朴光玉), 최경회(崔慶會)등과 창의(倡義)하여 조정으로부터 판결사(判決使)의 벼슬과, 창의사(倡義使)의 명을 받고, 왜적(倭敵)이 점령하고 있는 서울을 결사대를 잠입시켜 백성들로부터 많은 군자금(軍資金)을 얻었다.

왜적이 퇴각하자 적을 추격하라는 명을 받고 진주성(晉州城)에 주둔하여 절도사(節度使) 최경회(崔慶會), 황 진(黃 進), 고종후(高從厚), 장 윤(張 潤) 등과 사수(死守)를 다짐했었다.

그후 적병이 성벽을 넘어 백병전(白兵戰)이 벌어지자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성(城)이 함락하여 아들 상건(象乾)을 안고 촉석루(矗石樓) 아래 남강(南江)에 투신하여 순절(殉節)하였다. 그 때가 1593년계사(癸巳)이다.

선조(宣祖)때 좌찬성(左贊成)에 증직(贈職)되고, 그 뒤에 충장(忠壯)이라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나주(羅州) 정열사(旌烈祠), 진주(晉州) 충열사(忠烈祠), 순창(淳昌) 화산서원(花山書院), 임실(任實) 학정서원(鶴亭書院) 등에 제사(祭祀) 지내고 있다.

김 점

부안김씨(扶安金氏)이다. 조선(朝鮮) 전기(前期)의 유학자(儒學者)이다.

자(字)는 경숙(敬叔)이고, 호(號)는 매당(梅堂)이다.

석옥(錫玉)의 아들로 부안(扶安) 옹정(瓮井)에서 태어났다.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이 항(李 恒) 문하에서 손꼽히는 인재(人才)이다.

명종(明宗)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후에 천거(薦擧)되어 연은전(延恩殿) 참봉(參奉)이 되었다가 사화(士禍)로 세상이 어지러워 지자 그만두고 고부(古阜) 우일(雨日)에서도 살았고, 망제산(望帝山)아래 오공동(五公洞: 지금 井邑市 農所洞 望帝 부락) 골짜기 석벽 (石壁)아래에 척심정(滌心亭)을 짓고, 기대승(奇大升), 김린후(金麟厚) 등과 도의(道義)로 사귀면서 후진양성에 진력 하였으며, 그 곳에서 소요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지금도 척심정 유허비(滌心亭 遺墟碑)가 서 있다.

8대손(八代孫) 영수(永洙)가 쓴 가상(家狀)이나, 세자(世子),세마(洗馬) 이도중(李度中)이 쓴 행상(行狀)과 묘갈명(墓碣銘)을 보아도 낳고 간 연대(連帶)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김복억(金福億)

도강김씨(道康金氏)이다. 조선(朝鮮) 선조(宣祖)때 문신(文臣)이며 의병(義兵)이다.

자(字)가 백선(伯善)이며, 호(號)는 율정(栗亭)이다.

1524년인 중종(中宗) 19년(甲申) 고현내(古縣內: 지금의 七寶面)에서 출생하였으며, 성재 (誠齋) 김약묵(金若默)의 아들로 이 항(李 恒) 문인(門人)이며 기대승(奇大升), 정 철(鄭 澈), 이준민(李俊民)과 서로 사귀었다.

선조(宣祖) 2년(乙巳)인 1569년에 효행(孝行)으로 천거(薦擧)되어 목청전(穆淸殿) 참봉 (參奉)에 제수(除授)되고, 얼마후 경기전(慶基殿) 참봉(參奉)으로 옮겨졌다.

선조(宣祖) 6년(癸酉)인 1573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회덕현감(懷德縣監), 사옹원(司饔院) 판관(判官), 창평현령(昌平縣令)을 지내고, 김제군수(金堤郡守)에 이르렀다. 그 뒤 벼슬을 버리고 집에 있다가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재종제(再從弟) 군자직장(軍資直長) 김후진(金後進: 遠慕堂), 계제(季弟) 주부(主簿) 김경억(金慶億), 재종질(再從姪) 별제(別提) 월봉(月峯) 김대립(金大立), 김여백(金如白: 遠慕堂의 큰아들), 이수일(李守一: 李一齊 의 큰아들), 안의(安義), 손홍록(孫弘祿) 등과 같이 의병(義兵)과 의곡(義穀)을 모집하여 진중(陣中)에 보냈다.

선조(宣祖) 26년(癸巳)인 1593년에 홍주목사(洪州牧使)가 되고, 뒤에 이천부사(利川府使)에 除授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자기 스스로 지은 호(號)를 사우당(四憂堂) 이라 하였으니, 네가지 근심은 신우(身憂), 도우(道憂), 군우(君憂), 민우(民憂)를 말한 것이다.

선조(宣祖) 33년(庚子)인 1600년 11월 27일에 세상을 떠나니 그의 나이 일흔일곱살(77歲 이었다.

김승적(金承績)

언양김씨(彦陽金氏)이며, 字는 누립(累立)이며, 號는 용암(鎔巖)이다. 1549년인 명종(明宗) 4년(己酉)에 금구(金溝) 거야(巨野)에서 태어났다.

학문이 높으며 부모에게 효도(孝道)하고, 형제간에 우애(友愛)하여 사림(士林)들로 부터 추앙(推仰)을 받았던 사람이다.

일제(一齊) 이 항(李 恒)의 문하(門下)에서 수학(修學)하였으며, 1588년인 선조(宣祖) 21년에 나이 40세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合格)했으나, 과거(科擧)에는 뜻을 두지 않고 학문(學問)과 양친(養親)에만 뜻을 두고 힘쓰니, 그 지극한 효성(孝誠)이 하늘을 감동시켰음인지 이적(異蹟)이 많았다고 전하여 내려 온다.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두 아우와 같이 시묘(侍墓)생활을 하고, 만년(晩年)에는 조폭동(造瀑洞) 용추(龍湫) 위에 두어칸(間)) 집을 짓고, 편액(扁額)을 용암(龍巖)이라 했다.

1588년에 생을 떠났다.

소산복(蘇山福)

진주인(晉州人)이다. 자(字)는 경응(慶鷹), 호(號)는 매헌(梅軒)이며, 국필(國弼)의 아들 이다.

남원(南原) 적과방(迪果坊) 만적동(晩迪洞)에서(지금 남원시 덕과면 만동) 1556년인 명종 (明宗) 11년(丙辰)에 태어나, 어려서 이성춘(李成春)에게 글을 배웠고, 뒤에 형 해복(海福) 과 같이 이 항(李 恒)의 문하(門下)에서 공부하였다.

머리가 명석하며, 사서오경(四書五經), 제자백가(諸子百家)를 통달함은 물론 특히 천문 (天文)과 산학(算學)에 조예(造詣)가 깊었다.

1591년인 선조(宣祖) 24년(辛卯)에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다.

이듬 해 임진란(壬辰亂)이 일어나자 김천일(金千鎰)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동했으며,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를 왕래하기도 했다.

직산(稷山) 싸움에 나갔으나 병으로 돌아왔고, 뒤에 부모 상(喪)을 당하여 시묘(侍墓)를 하며 종군(從軍)하지 못하고, 김천일(金千鎰)이 진주(晉州)에서 순절(殉節)하니 함께 죽지 못했음을 탄식하며 세상과 인연을 끊고, 향리에 수칸(數間) 집을 지어 평액(扁額)을 문류정 (門柳亭 또는 梅軒)이라 하고, 민여주(閔汝住), 오정길(吳廷吉), 김 선(金 宣), 이 점(李 漸), 안창국(安昌國), 최 행(崔 荇), 양명원(梁明遠), 안극충(安克忠) 등 여러 명사(名士) 들과 종유(從遊)하며 만년(晩年)을 보냈다.

1620년인 광해(光海) 12년(庚申) 11월 19일 세상을 마쳤다.

⊙ 남고서원 묘정비문(南皐書院 廟庭碑文)

우리나라 문명(文明)은 실로 고려말에 시작되고, 유현(儒賢)들이 왕성하게 활동할 때에는 조선조의 명종(明宗) 선조(宣祖)조에 이르러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그 가운데 능히 기질(氣質)을 변화하여 의(義)는 정(精)을 해치고, 인(仁)은 더웁게 하여 호남(湖南) 사림(士林)을 창도(唱導)하게 되어 엄숙하게 영원토록 사표(師表)가 된 것은 우리 일제(一齊) 문경공(文敬公) 이(李) 선생보다 위로 나은 사람은 없다.

퇴계(退溪) 선생은 일찍이 호남(湖南) 이학(理學)의 창도자(唱導者)가 되었다고 일컫고, 송강 정문청공(宋江 鄭文淸公)은 또한 말하기를 『호남에 일제(一齊)가 없었다면 좌임(左 : 未開한 상태)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하니, 그가 한 때에 존중(尊重)되고, 그 공(功)이 후세에 까지 있으니.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마땅히 사람들은 영원토록 제사 지낼 것을 잊지 않아야 하리라.

선생은 휘(諱)가 항(恒)이요. 성은 이(李)씨이니 관향은 성주(星州)이며, 고려조의 명현인 매운당(梅雲堂)선생 문열공(文烈公) 조년(兆年)의 후손이다.

젊어서는 용력(勇力)이 혼자서 몇 사람을 당해낼만 하였고, 30세가 되는 동안을 말을 달리며 사냥을 하였다.

이미 경계가 되는 말씀을 듣고, 지금까지의 생각을 바꾸어 글을 읽으니, 얼마 되지 아니하여 큰 유학자(儒學者)가 되어 조정에서는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수선(首選) 되었으며, 문도(門徒)들이 몇 도(道)에 두루 있어 모두 선생의 말로써 시귀(蓍龜: 吉凶을 점침. 점치 는데 쓰이는 점대와 귀갑)를 삼고, 선생의 행지(行止. 행하는 일과 끝이는 일))는 척도(尺度)로 삼았다.

있는 비는 풍화(風化. 풍습이 고쳐짐)됨이 울연(蔚然. 흥성한 모양)화여 오래되도록 마지 아니하였다.

이로써 누차 문묘에 배향할 것을 상소하였다. 청원이 비록 윤허를 받지 못하였으나, 그 당시 세상 사람들의 높이 우러른바 됨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선생의 문하 출신으로 당세의 영걸(英傑)이 많았는데 거기에서 더욱 저명한 분인 즉 건재 김문열공 천일(健齋 金文烈公 千鎰)이 수제자로 학통(學統)을 이었고, 임진왜란에 순절한 매당 김공 점(梅堂 金公 )이 어짐(仁)을 지켜 도회(韜晦: 학문을 감추고 드러내지 않음) 하며, 율정 김공 복억(栗亭 金公 福億)의 학행(學行)을 돈독히 하고 군량을 수송함과 용암 김공 승적(龍巖金公承績)의 도움으로 보답함이 자공(子貢)에 비김과 매헌 소공 삼복(梅軒 蘇公 山福)의 독실하게 학문하고 충성을 다함은 이것이다.

호남의 태인(泰仁)은 선생이 일생을 마친 곳이 되었다. 선조조(宣祖朝) 정축(丁丑. 단기 3910년)년에 사림(士林)들이 서원(書院)을 창립하고 선생을 향사(享祀)하니, 이미 건재 문열공은 배향(配享)되고 숙종조(肅宗朝) 을축(乙丑: 단기 4018년) 4월에 사액(賜額)하고, 그 후 증직(贈職)이 내려 졌다.

고종조(高宗朝) 무진(戊辰. 단기 4201)년의 서원 훼철(毁撤)때 이 서원도 또한 그를 면치 못하였다.

이에 학자들은 선생을 생각하고 61년을 넘겨 그대로 두지 못하고, 드디어 다시 발의하여 중건하고, 매당(梅堂)과 율정(栗亭)과 용암(龍巖)의 3공(公)을 아룰러 배향하고, 그 후 46년 된 계축(癸丑. 단기 4306)년에 또 매헌(梅軒)을 추배하고, 지금까지 궐향(闕享: 祭祀를 지 내지 못함)하였던 제전(祭典)을 다시 이어 하니, 여러 사람이 사모하였던 정이 비로소 흡족하게 되었다.

임자(壬子: 단기 4305)년에 내가 일을 맡을만한 사람이 못 됨에도 외람히 재정(齋長)을 맡음으로써 재중(齋衆)의 장보(章甫)인 송흥섭(宋興燮)과 소재명(蘇在明)과 이임석(李任錫)의 제우(諸友)가 청하여 말하기를『이 서원을 세운지 역사가 사백년이 되었는데 그간의 흥폐(興廢)의 연혁(沿革)과 더불어 모든 선생의 사적(事蹟)을 적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기에 묘정(廟廷)에 비를 세우고자 하니 그대가 비문을 지어 주기 바라네』라고 하였다.

나는 견문이 좁음을 덮고, 감히 받들지 못함에도 높이 우러른 마음 절실하여 이름이 기록되는 영광을 위하여 또한 감히 종내 사양치 못하였다.

오직 이 서원에 들어가는 것을 다만 향사(享祀)로서 능사로 삼는 것은 아니니, 다시 선생의 학문을 배움으로써 언행을 신칙(申飭: 단단히 일러서 경계함)하고 덕업(德業)을 숭상(崇尙)함으로써 이 서원을 광명성대(光明盛大)케 하여 선생의 도(道)로 하여금 이로 말미암아 회복을 기하여 세상을 밝게 함이며 이는 받들어 힘씀을 위함이다.

때는 계축(단기 4306)년 3월 하순

화산(花山) 권 순 명(權 純 命) 근 찬.

여산(礪山) 송 성 용(宋 成 鏞) 근 서.

⊙ 남고서원 중수비문(南皐書院 重修碑文)

문경공(文敬公) 일재(一齋) 이(李) 선생이 별세한 이듬해 선조(宣祖) 정축(丁丑: 단기 3910))년에 문인 건재(健齋) 김문열공(金文烈公)이 유림들을 창도(唱導)하여 태산(泰山. 泰仁고을의 古號)의 보림산(寶林山) 아래에 사우(祠宇)를 짓고, 신령을 편안케 한 것은 실로 거기가 선생이 강학(講學)하던 곳이였기 때문이다.

그 후에 문열공(文烈公. 金千鎰)을 배향하고, 숙종 을축(乙丑. 단기 4018)년에 사액(賜額) 함으로써 이를 남고서원(南皐書院)이라 하였다.

선생은 호걸의 자질로서 의리지학(義理之學. 經書의 해석에 구애되지 않고 오로지 성인의 도리를 연구하는 학문(성리학)을 한, 실로 백세(百世: 영원한)의 스승이다.

젊어서도 굳세고 용감하여 남에게 구속을 받지 아니 하였는데 도리어 도를 닦고 순수함에 이르렀다.

아! 선생은 조예(造詣: 학문이나 기예가 깊은 경지에까지 나아감)가 정순(精純)하고, 밝아 행하였던 실력을 나 같은 말학(末學: 미숙한 학문, 학자의 謙稱)으로서는 이왕의 문헌으로써 하면 과실이 적을 것이다.

조정에서 존숭(尊崇)하여 권하는 일 같은 것은 명종(明宗) 선조(宣祖) 때에 임금의 후한 대우로써 역마(驛馬)를 보내어 불러도 헛되이 기다리기를 다섯 차례이고, 의원은 보내 문병하기를 네 차례며, 선정신(先正臣)이 일컫기를 퇴계는 『호남의 理學의 宗師이다.』라고 하고 율곡은『실천함이 독실하다』라 하고 우암은 『도(道)는 이루어지고 덕은 섰다』라고 하였다.

사림(士林)들인즉, 누차 상소하여 문묘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였다. 이를 보면 선생을 어떻게 여긴가를 가히 알 수 있다.

나라를 점칠 때 공은 성학(聖學, 유학)에 있음이라. 만약 문열공(文烈公)이 선생의 수제자로써 임진왜란에 용기를 내었으니, 정학(正學: 올바른 학교, 여기서는 儒學)과 정충(貞忠: 절개가 곧고 충성함)은 마땅히 영원토록 제사지내야 한다.

이 서원은 실로 소자(邵子. 소옹-雍-)의 낙사(洛社)와 회옹(晦翁: 주희-朱熹-, 주자)의 녹동(鹿洞)이 있는 것처럼 강상(綱常)을 붙들어 세우고 많은 선비들이 여기에 의지하여 도타움에 돌아가니, 일국의 대원(大院이. 큰 서월)이 되어 있으나, 불행히도 고종(高宗) 신미 (辛未. 단기 4204)년에 싸잡혀 훼철되니, 학자들이 이를 한스럽게 여겨 그 후 정묘(丁卯. 단기 4260)년에 사우(祠宇)를 중건하고 복설(復設)하여 매당(梅堂) 김공(김 점. 金 ), 율정(栗亭) 김공(김승적. 金承績), 용암(龍巖) 김공(김복억. 金福億), 매헌(梅軒) 소공(蘇山福)이 모두 문하의 뛰어난 분으로 공(功)이 당세에 있었던 학자들이다.

서원이 세워진지 오래되어 풍우로 닳고 헐러 그 면모를 보전키 어렵게 되니, 후손 근석 (根錫)과 원임(院任: 서원의 임원)들과 더불어 주선과 협력으로 도모한 바 도(道) 및 군비 (郡費) 2천여만원을 판득(辦得)하여 정묘(丁卯. 단기 4320)년 여름에 사우(祠宇) 건립에 착 공하며, 안팎 삼문도 비가 새여 썩으므로 다시 수축하고, 토대와 담장들을 넉달을 걸려 완 공을 고하니, 서원 모양이 유신되어 영령들도 기뼈하고 즐거워 할것이며 사기도 더욱 높아졌다.

이로 인하여 선새의 도(道)는 하는 가운데의 해와 달이니, 어찌 그날이 없었을 것으로 알았으리요.

진실로 홍지사(知事)와 김군수(郡守)의 선현(先賢)을 사모함이 성실하고 돈독함에 선생의 덕이 사람에게 들어감이 깊다는 것을 가이 실없는 말이 아님을 알겠다.

역사(役事)가 이미 끝나서 서원의 뜰에 비를 세워 그 사적을 표하는데 집강(執綱: 서원의 임직의 하나)인 김환국(金煥國)이 잘못해아려 나에게 비문을 부탁하였으니, 분수에 넘쳐 감당치 못하겠으나, 이름을 참열(參烈)케 하는 영예가 되므로 사양치 않고, 높이 우러러 사숙하는 마음 지극함으로써 그 시말을 간략히 서술한다.

또 비를 세우는 역사에 대하여서는 본손인 평촌리(平村里)에 거주하는 희정(喜正)이 전담하니 그 정성이 가상하다.

단군 기원 4320년 정묘 음 7월 상순

후 학 거 창 신 사 범(愼 思 範) 근 찬.

후 학 장 흥 고 광 준(高 光 俊) 근 서.

⊙ 서원 중건기념 비문(書院 重建記念 碑文)

원사(院祠: 聖賢이나 忠臣등을 모시는 서원이나 사묘)에 은덕을 갑는 것은 일러서 덕행이요. 일러서 정충(貞忠: 절개가 굳고 충성스러움)이요. 일러서 학행이요. 일러서 연원(淵源: 근원 즉 학문을 전수한 근원)이니, 이에 그친 자는 고제(古制: 옛적의 제도)요, 괴걸(걸출 함)한 바로써나 세력있고 부유한 바로써나, 권장한 바와 기회를 얻은바로써 추천된 자는 정규로 된 것이 아니다.

공이 있어 사묘에 제사 지냄은 권세로써 수행됨이요. 고을의 스승을 서원에 향사(享祀)함은 우러러 사모함을 붙임이라.

칠보산 아래에 보림의 유지는 산자수명하고 땔나무와 식량생산이 풍부하니, 세속로도 마땅하고 학술을 강술하고 연마하는 데도 마땅하다.

골이 깊고 시내가 길어 물소리는 잘잘하고 산사(山寺)의 저믄 연기에 종소리는 은은히 들려온다.

시냇가의 수양버들에는 꾀꼬리가 가지 사이로 날아 베짜는데 북이 왔다갔다 하는듯 하고, 산 보통이 늙은 느티나무에는 자고 새가 살고 있다.

오래된 절 가는 갈림길에 지팡이 집고 걸어가는 소리 들린 듯하고, 선황당과 관왕묘에도 적토마(赤兎馬: 관운장이 탔던 말 이름)의 방울소리가 들린 듯 하니, 참으로 여기는 신선이 사는 집이요. 무능도원(武陵挑源: 별유천지, 별 세계)인가 의심날 정도다.

우리 문경공(文敬公) 일재(一齋) 선생은 늦게 학문을 좋아하여 부끄러움을 물리치고 시골로 내려와 이 터를 가려 몇 칸의 집을 짓고, 성인(聖人)의 이치를 궁구하여 밝히는데 해가 지는 줄을 몰랐다 하니, 경향(京鄕)의 유학생들이 책을 짊어지고 와 문전성시(門前成市)하였다.

날로 강술하고 달로 연마 함므로 학문이 증진하여 강학과 예의를 익힘으로 영재가 배출하니, 충의와 도학의로 온 세상에 명성을 드날렸으며 읍양순속(揖讓純俗: 예를 다하여 사양하고 풍습을 인정이 도탑게 함)하여 유풍(儒風: 유자의 풍습)이 크게 떨쳤다.

퇴계와 율곡 송강 우암도 그의 경륜을 극찬하니 호남에서의 명성은 온 나라 조야에 모두 일컫게 되었다.

천년된 늙은 소나무는 만고풍상의 괴로움을 겪고도 항상 푸르고 일생의 높은 절개는 백번 꺾으려 해도 오직 빛났다. 선생이 서거하니, 동량(棟梁)이 꺾인 것으로 홍유(弘儒: 학문과 덕이 높은 이름난 선비)의 자리가 비였다.

문헌이 오히려 새로우니,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가 묘갈명을 짓고, 현석(玄石, 박세 채-朴世菜-)이 유고의 서문을 적었으며, 경산(經山, 정원용-鄭元容-))이 시호(諡號) 내리기 를 청하였고 삼연(三淵, 김창흠-金昌翕-)이 사액(賜額)을 청하니, 두 번 상소하고 세 번상 소로 숙종께서 윤재(允栽)하니, 남고서원에 사액됨은 을축(乙丑, 단기 4042)년 4월이라.

국왕께서 예관(禮官)을 파견하고, 미수(眉 , 허 목-許 穆-)가 제문을 지어 처음으로 제사를 지내게 되고, 건재(健齋, 김천일-金千鎰-)를 배향하다.

그 후 추배(追配)에 어진 제자 매당(梅堂) 김공(김 점-金 -), 용암(龍巖) 김공(김복억- 金福億-), 율정(栗亭) 김공(김승적-金承績), 매헌(梅軒) 소공(소산복-蘇山福-)의 6위을 병 배(幷配)하니, 유림들과 본손(本孫)들이 극히 치성을 드리다.

행운이 숭환하고 여러 대가 바뀌면서 묘우(廟宇)가 퇴락함에 여러차례를 보수하였으나, 경오(庚午. 단기 4323)년 여름 장마에 사당집이 무너져 6현의 위패를 강당으로 이안(移安)하고, 이 일을 당하여 고유하지 어언 해를 넘긴지라. 계책을 도모하였으나 재원이 군색하여 속수무책(束手無策)이더니, 유림들이 상의한 바 본도(本道)에 원조를 청하였더니, 본원정이며 도지사인 최용복씨의 특별 배려로 국고에서 3천만원을 지급받아 신축하니, 서원의 모습이 일신되어 그 골안에 광채를 발하여 근원에서 모두 칭송하니, 사기가 갑절이나 떨치게 되었다.

작년부터 고사(庫舍)가 또 퇴락한 바 전 군수 허동일(許棟一)씨가 지원 재가 하였으나 준공하지 못하고, 지금의 군수 김성연(金成淵)씨 재직중에 준공하니, 신축공사비가 2천 5백만 원이며, 주방도구는 이씨 문중에서 자담하니 이러한 거사에 관한 일을 기록해 새기지 않고서는 먼저의 일을 본받고 뒤를 비추어 줌을 어찌 밝게 할수 있겠는가.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 중에 일재 문임(一齋 門任. 일재선생의 후손인 임원)인 이준상(李準相)이 보는 서원에 대한 일의 협조에 적극 참여하며, 주선으로 본손인 이수남(李秀男)이 흔연히 비건립의 역사를 전담하고, 각 문중의 헌성도 적지 않았으며, 유상 이근석(李根錫)은 불고 가사하고 종시 한결같은 마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일을 감독하니, 경박한 세상이며 말세의 타락한 풍속에도 이같이 너그러이 용납함인지 돌은 스스로 서지않고 글을 스스로 쓰이지 않을 것이 세속의 상례이다.

 

유본장보(儒本章甫)가 나에게 글을 위촉하니, 소위 재임(齋任, 제에 있는 儒生 중 임무를 맡은 사람)으로서 굳이 사양할 수 없어 붓을 잡았으나 칠십을 바라보는 환국(煥國)은 본시 거칠고 옹졸하여 어찌 감당 하리오만은 선생의 경력은 문헌을 고증할 수 있으니 어찌 감히 군말을 할것인가.

후일의 군자여 수즙하고 보강하여 선은(先恩)을 갚고 성원(聲援)에 보답하여 어찌 아름답지 않겠으며 어찌 부러워하지 않겠는가.

외람히 이를 담당하게 되어 위와 같이 간략히 서술한다.

단국 기원 4325년 임 신 청명절.

후학 도강 金 煥 國 근기

후학 장흥 高 光 準 근서

문정공 15대손(광주) 李 秀 男 근수

 

문열공 고려사열전

李兆年字元老京山府人. 父長庚本府吏恭儉有威鄕人嚴憚之. 老而家居府官出入聞喝道聲必下床伏地

俟其聲不聞然後復坐. 兆年少懷志節有器局力學能文. 年未冠神彩秀發草溪鄭允宜使其府一見知爲

異人以其子妻之. 忠烈二十年以鄕貢進士登第調安南書記累轉爲禮賓內給事出知陜州入爲秘書郞.

三十二年從王朝元王惟紹宋邦英離*閒王父子諸從臣皆懷疑縮縮走匿曹 最先去. 惟兆年恃無他進退

惟謹. 例遠竄歸而居鄕者十三年未嘗一出言訟其非罪. 忠肅見留于元五年瀋王暠內懷  左右多反覆.

兆年發憤獨如元獻書中書省訟王之直. 朝廷美之. 忠肅還國授監察掌令轉典理摠郞存撫關東.

召拜判典校事加軍簿判書.

 

忠惠王以世子入朝丞相燕帖木兒見之大悅視猶子. 因忠肅辭位奏帝錫王命. 時太保伯顔惡燕帖木兒專

權待忠惠不禮. 忠肅復位忠惠宿衛于元時燕帖木兒已死伯顔待忠惠益薄. 忠惠與燕帖木兒子弟及回骨

少年輩飮酒爲謔因愛一回骨女或不上宿衛. 伯顔益惡之目曰撥皮. 俗謂豪俠者爲撥皮從臣皆 望不敢言

. 兆年進戒曰: "殿下事天子宜日愼一日. 何乃 禮縱情以速累乎. 然此非殿下之過. 殿下長於阿保之

家所共遊者多無賴子其後朴仲仁李仁吉實左右之. 殿下孰從而聞正言見正事乎? 儒者雖朴拙皆能習經

史識廉恥. 殿下目之爲沙箇里此何等語耶? 殿下能遠 倖親儒雅改行自飭則可不然天威咫尺其嚴乎?"

王不能堪其言踰墉而走. 曹 之亂忠惠被徵至燕兆年從之. 伯顔蓄宿憾使王與 黨辨. 兆年慷慨發憤

謂李齊賢曰: "吾欲面訴丞相前. 其意可回. 列戟守門莫叫其 . 幸其出田城南吾當上書道左碎首馬蹄

下死明吾君. 吾子其把筆書吾書." 夜起沐浴鷄鳴將行伯顔適以是日敗書不果上. 然聞者莫不悚然曰:

"膽大於身李公是." 已忠惠襲位還國錄功當得樞密. 王曰: "兆年老矣其志可嘉." 乃授政堂文學

藝文大提學封星山君.

 

王嘗步自北宮彈雀于松岡. 兆年徑進 曰: "殿下寧忘明夷之時乎? 今惡少假威略婦女攘財貨民不樂

其生. 臣恐禍在朝夕. 此而不恤顧玩細娛乎? 殿下聽老臣言去便 用賢良 精圖治不復慢遊則老臣雖

死瞑目於地下矣." 初商人林信女丹陽大君之婢也賣沙器爲業. 王見而幸之有寵授信大護軍. 一日信 

奇輪王右信親往毁輪家. 至是幷諫之. 且曰: "臣過蒙國恩位至政堂於臣足矣惟上所裁." 王盛怒不納

旣而溫言謝遣之兆年旣歸第. 嘆曰: "王年方强而肆欲吾旣老矣又無助. 不去必及於禍. 且數諫而不納

責有所歸. 今兆年旣不能順其美適足以增其惡. 非臣所以愛主也不如去." 明日匹馬還鄕不交人*閒事.

後兆年弟延慶見王王曰: "爾兄辱我." 延慶以 狂對. 王喜賜米豆五十石布五百匹. 三年策侍從功爲

一等賜誠勤翊贊勁節功臣號圖形壁上. 爵其父母妻子賜田及臧獲. 明年卒年七十五. 謚文烈. 爲人短

小精悍志堅確敢言以嚴見憚. 每入見王聞履聲曰: "兆年來矣." 屛左右整容以俟. 所歷多有聲績.

恭愍朝議功贈星山侯配享忠惠王廟庭. 子褒官至檢校侍中. 性淳厚循循蹈禮. 褒子仁復仁任仁美仁

立仁達仁敏. 仁復仁任自有傳. 仁美判書仁立同知密直司事仁達注*薄{簿}仁敏門下評理. 兆年姪承慶.

承慶蒙古名帖木不花. 入仕元朝歷御史廉訪諸路以能斷決聞. 累遷遼陽省 政. 恭愍六年奔母喪東還.

明年元遣遼陽省事塔海帖木兒召之承慶不赴. 王拜爲門下侍郞平章事. 八年紅賊陷邊都元帥李懦不能

軍遣承慶代之督諸軍. 九年承慶在生陽驛以諸將不盡力擊賊憤 不食. 遂得疾還家不視事. 王對諸

宰相稱賞承慶忠義不置賜忠勤勁節 謀威遠功臣號. 尋卒.

 

(국역) 이조년의 자는 원로(元老)이니 경산부 사람이다. 아버지 이장경은 경산부 관속이었는데

겸손하고 검박하여 위엄이 있었으므로 그 지방 사람들이 존경하고 두려워하였다. 그는 늙어서

집에 있을 때에 부관(府官)들이 나들면서 행인을 금하는 벽제 소리를 들으면 반드시 평상

아래에 엎디었다가 그 소리가 멎은 후에야 일어났었다.

이조년은 소시부터 지절을 지키고 있었으며 기국이 크고 학문에 힘써 문장을 잘 하였다.

20세전에 용모가 뛰어나게 아름답고 생기 발랄하였으므로 초계사람 정윤의가 그 고을 부사로

와서 한번보고 특이한 사람으로 여기어 자기의 사위로 삼았다.

충렬왕 20년에 향공진사(鄕貢進士)로서 과거에 급제하여 안남서기(安南書記)로 임명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로 되었다가 외직으로 나가 합주지사(陜州知事)를 지내고

내직으로 들어가 비서랑(秘書郞)이 되었다.

충렬왕 32년에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을 때 왕유소와 송방영이 왕의 부자간을 이간시켜 따라간

신하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뿔뿔이 피신하였는데 조적이 맨 먼저 달아났다. 그러나 이조년은

왕을 믿고 처음 마음 그대로 있으면서 진퇴를 삼가 하였다. 그리하여 예로 귀양 갔다가 돌아와서

고향에서 13년 간 있었지마는 한번도 자기에게 죄가 없었다는 발명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충숙왕이 원나라에 가서 5년 동안 억류되어 있었을 때 심왕고가 왕위를 빼앗을 야망을 품게

되었으므로 신하들 중에서 변절하는 자가 많았다. 그러나 이조년은 분격하여 단신으로 원나라에

가서 중서성에 글을 보내어 왕의 잘못이 없다는 것을 논쟁하였다. 그리하여 원나라 조정에서는

그의 행동을 높이 평가하였다.

충숙왕이 귀국한 후 감찰장령(監察掌令)이 되고 전리총랑(典理摠郞)으로 전직하였다가

관동존무사(關東存撫使)로 나갔다가 소환되어 판전교사(判典校事)가 되어 군부판서(軍簿判書)를

겸임하였다.

충혜왕이 세자로서 원나라에 갔을 때 승상 연첩목아가 이조년을 보고 기뻐하여 자기의 아들과

같이 여겼다. 충숙왕이 물러서면서 원나라 임금에게 말하여 충혜왕을 왕위에 앉히게 하였다.

이때 태보 백안이 연첩목아가 정권을 독차지 한 것을 미워하는 나머지 충혜왕에게도 무례하게

대하였다. 충숙왕이 복위하고 충혜왕이 원나라에서 숙위를 하게 되자 연첩목아는 이미 죽고

충혜왕에 대한 백안의 태도가 더욱 각박하였다. 충혜왕이 연첩목아의 자제들과 회골 소년들과

함께 음주 방탕하면서 회골의 한 여성을 사랑하였으며 간혹 숙위를 결근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백안이 더욱 미워하여 그를 가리켜 발피라 하였는바 발피란 속된말로 호협한 자라는 뜻이다.

따라간 신하들이 모두 실망하였으나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이조년이 충혜왕에게 경계하는

말을 올리기를 「전하가 천자를 대함에 있어서 응당 하루같이 조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체면을 버리고 함부로 행동하여 화를 재촉합니까? 그러나 이것은 전하의 허물이

아닙니다. 전하는 아보(보모)의 집에서 자랐으며 같이 노는 자들도 대부분 무뢰한들일 뿐

아니라 또 그들은 실제 박중인, 이인길 따위에게 좌우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누구에게

바른 말을 들으며 어디에서 바른 일을 보았겠습니까? 선비는 비록 소박하고 옹졸하게 보여도

능히 경사에 통달하고 염치를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전하는 그들을 가리켜 사개리라

하니 이 무슨 말입니까? 전하가 능히 곁에서 알랑거리는 자를 멀리하고 단정한 선비를 친근히

하여 행실을 고치고 스스로 삼가면 좋으려니와 그렇지 않는다면 천자를 지척에 두고 닥쳐오는

엄중한 후과를 어찌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에 견디다 못하여 담을 넘어 달아났다

조적의 반란과 관련하여 충혜왕이 원나라에 불리 워 갔을 때 이조년이 왕을 따라 갔다. 백안이

이전 일의 감정을 가지고 왕과 조적의 도당들로 하여금 대질하라 하였다. 이조년이 분격하여

이제현에게 말하기를 「나는 승상을 만나 직접 그 면전에서 신소하고 싶다. 그러면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승상의 집 문의 수위가 엄중하여 그 문안으로 들어가서 이 분한

일을 호소할 수가 없다. 그런데 다행히 그가 남쪽 성밖으로 사냥을 간다하니 내가 길가에서

편지를 들여대고 머리를 말발굽 밑에 부딪쳐 죽음으로서 우리 임금의 무죄를 해명하겠다.

그대는 붓을 들어 내 편지를 쓰라.」하였다. 그는 밤중에 일어나 목욕하고 닭이 울자 떠나려

하였는데 백안이 바로 이날에 실각하였으므로 편지를 올리지 못하였다. 이말을 들은 자는

누구나 다 모골이 송연함을 느꼈으며 「담이 몸집보다 더 크다는 말은 이공(이조년)을 두고

하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충혜왕이 왕위를 계승하고 본국으로 돌아와서 공로를 평정할 때 이조년의 공로는 추밀(樞密)을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이조년이 비록 늙었으나 그의 뜻은 가상하다.」라고

하고 정당문학(政堂文學) 예문대제학(藝文大提學)의 벼슬을 주고 성산군(星山君)을 봉하였다.

왕이 일찍이 북궁으로부터 걸어와서 송강에서 탄자로 새 사냥을 하고 있었다.

이조년이 지름길로 가서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벌써 참소를 받고 불우하던 때의 일을

잊었습니까? 지금 불량 소년들이 임금의 위세를 등대고 부녀자를 겁탈하고 재물을 강탈하므로

백성들이 살 수 없습니다. 저는 화가 어느 때 닥쳐올지 몰라 근심이 됩니다. 이것을 근심하지

않고 어찌 잡된 유희를 일 삼습니까? 전하가 이 늙은 신하의 말을 듣고 간사한 자를 물리치며

어질고 착한 사람을 등용하여 극력 나라 일을 보살피고 다시는 부질없는 유희를 그만 둔다면

이 늙은 신하는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전에 상인 임신의 딸은 단양대군의 종인데 사기 장사를 하고 있었다. 왕이 그를 통하고

총애하였으며 임신을 대호군으로 삼았다. 어느 날 임신이 기윤을 구타한 일로 인하여 왕이

임신의 편을 들어 직접거사 기윤의 집을 파괴한 일이 있었다. 이조년은 이제 그 사실까지 덧

부쳐 간하였다. 이어 또 말하기를 「제가 지나치게 나라 은혜를 입어 벼슬이 정당(政堂)에

이르렀으니 저에게 만족한 일이니 이제는 다만 전하의 처분을 기다릴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크게 노하여 그 말을 접수하지 않았으나 이윽고 부드러운 말로써 이조년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보내었다.

이조년이 집에 돌아가서 탄식하기를 「왕은 나이 한창이어서 행동에 거리낌이 없는데 나는

이미 늙어서 방조를 드리지 못한다. 물러가지 않으면 반드시 화가 미칠 것이다. 여러차례 권해

보기도 하였으나 듣지 않으니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겠는가? 이제 나의 노력이 왕의 좋은 점을

조장시키지 못할 바에는 도리어 그 나쁜 행실을 조장하는 것밖에 못되는 것이다. 신하로서

임금을 사랑하는 본의가 아니니 돌아가는 것 만 같지 못하다.」라고 하고 다음날 초초한

행장으로 고향에 돌아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지내었다.

후에 이조년의 아우 이연경이 왕을 뵈었는데 왕이 말하기를 「네 형이 나에게 욕을 하였다.」

라고 하므로 이연경이 대답하기를 「형이 노망해서 그랬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쌀과 콩 50석과 포 5백필을 주었다.

3년에 시종공신을 정할 때에 그를 1등으로 정하고 성근익찬경절공신(誠勤翊贊勁節功臣)의

칭호를 주었으며 초상을 벽상에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부모에게는 벼슬을 처자에게는

토지와 노비를 주었다. 이듬해 그가 죽으니 나이 75세였다. 시호를 문열(文烈)이라 하였다.

이조년은 사람됨이 키가 작고 성질이 치밀 용감하고 의지가 굳세었으며 말을 대담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엄격한 성격은 왕의 꺼리는 바 되었고 그가 궁중에 들어 가 왕을 만날 때 마다

왕이 그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면 「아 이조년이 온다.」하였다. 그리고 좌우를 물리치고 몸을

단정히 한 후에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벼슬을 지낸 곳마다 공적과 명성이 있었다.

공민왕대에 이조년의 공로를 평정하여 성산후(星山候)를 추증하고 충혜왕 묘정에 배향(配享)

하였다.

 

그의 아들 이포는 벼슬이 검교시중(檢校侍中)에 이르렀다. 그는 성질이 순후하여 언제나

질서있게 행동하였다. 이포의 아들은 이인복, 이인임, 이인미, 이인립, 이인달, 이인민이다.

이인복과 이인임은 따로 자기의 전기가 있다. 그리고 이인미는 판서(判書)를, 이인립은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이인달은 주부(注簿)를, 이인민은 문하평리(門下評理)를

각각 지내었다.

이조년의 조카는 이승경이다. 이승경은 몽고 이름으로 첩목불화라 하였다. 원나라에서 벼슬하여

어사(御史) 및 제로렴방사(諸路廉訪使)를 지냈는데 우수한 판단력으로 송사 처결 잘 하기로

유명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요양성참정(療陽省參政)이 되었다.

공민왕 6년에 어머니 상사로 인하여 본국으로 달려 왔었는데 이듬해에 원나라에서 요양성사

탐해첩목아를 보내어 소환하였으나 가지 않았다. 왕은 그에게 벼슬을 주어 문하시랑평장사

(門下侍郞平章事)로 임명하였다.

8년에 홍두적이 변방 국경을 침략하였을 때 도원수 이암이 나약하여 능히 그를 방어하지

못하므로 이승경을 대신 보내어 모든 군사를 통제하게 하였다. 9년에 이승경이 생양역에

있었는데 모든 장수들이 적을 공격하는데 진력하지 않는 것을 보고 분을 이기지 못하여 음식을

먹지 못하였다. 드디어 병을 얻어 집으로 돌아와 일을 보지 못하였다. 왕이 여러 재상들에

대하여 이승경의 충의심을 칭찬하여 마지않았으며 그에게 충근경절협모위원공신

(忠勤勁節協謨威遠功臣) 칭호를 주었다. 그 후 그는 얼마 안 가서

죽었다.

▶고려사절요 제23권 충렬왕5

<병오 32년(1306), 원 대덕 10년>

·과거에 왕이 전왕의 저택에 있으니, 좌우들이 왕이 전왕과 함께 우리나라로 돌아가고자

한다고 말을 하였다. 왕유소ㆍ송방영ㆍ한신ㆍ송인 등이 그의 도당 송균(宋均)과 김충의

(金忠義)를 시켜 왕에게 아뢰기를, "전왕은 아직 마음을 풀지 않고 전하를 원망한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비록 자애롭게 대한다 하더라도 다만 원망을 사기에 알맞을 뿐입니다.

또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홀로 정유년의 일을 생각지 않으십니까." 하였다. 그때 하루는 왕이

변소에 가다가 우연히 땅에 넘어져 이를 부러뜨려 수일 동안 음식을 먹지 못하였는데,

왕유소등이 또 이 틈을 타서 왕에게 거처를 옮길 것을 권하였다. 그때 보탑공주(寶塔公主)가

전왕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고 지후사(祗候司)에 옮겨 거처하고 있었는데, 왕도 여기로 옮겼다.

유소 등은 자기들의 계책이 잘 돌아간다 생각하고 유모(乳母)와 환자(宦者) 이복수(李福壽)를

통하여 황후에게 전왕을 참소하고, 또 좌승상 아홀태(阿忽台)와 평장 팔도마신(八都馬辛)에게

참소하기를, "전왕은 평소에 아들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고

공주와도 화합하지 못하므로 우리 왕이 미워하여 독로화 서흥후(禿魯花瑞興侯) 전(琠)을

후계로 삼으려 한 지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전왕의 도리는 진심으로 허물를 뉘우치고 스스로

마음을 새롭게 하여 아들 된 직분을 다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전번에 우리 왕이 그의

저택에 거처하였을 때, 조심스럽게 시봉(侍奉)하지 아니하여 땅에 엎어져 이를 부러뜨리게

되었으니, 우리 왕이 비록 성내지 않으려고 한들 될 수 있겠습니까.

전에 전왕이 스스로 중이 되기를 원하였으나 성관(省官)이 들어주지 않았는데, 만약

이제부터라도 중이 되게 하고 전(琠)을 공주와 결혼시킨다면, 우리 왕의 뜻에 맞을 것입니다."

하여, 아홀태와 팔도마신이 모두 허락하였다. 전은 얼굴이 아름다웠는데 왕이 그에게 좋은 옷을

입고 자주 왕래시켜 공주가 보게 하였다. 공주는 본래 행실이 근신하지 못해서 매양 내료의

여러 사람과 난행을 하니, 전왕이 더욱 좋지 않게 여겼으므로 공주가 드디어 전(琠)에게 뜻을

두게 되었다. 최유엄(崔有?)이 왕에게 아뢰기를, "전하께서 본국에 계실 때 일찍이 경령전

(景靈殿)에 참배하지 않았습니까. 성조(聖祖)와 친묘(親廟)의 신주가 그 영정과 함께 모두

남아 있습니다.

만약 서흥후(瑞興侯)를 왕으로 세운다면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인 서원후(西原侯)와 시양후

(始陽侯)를 왕으로 추존하여 종묘에 부사(?祀)하게 될 것이니, 전하의 친묘의 신주는 옮기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전하가

돌아가신 뒤에 어찌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고종(高宗)과 원종(元宗)은

모두 신이 섬기면서 이제 늙었는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두 왕이 제사를 받지 못하게 되는 일을

차마 할 수 없습니다. 신이 만약 간하지 않는다면 지하에서 선왕을 뵐 수 없습니다." 하니,

왕은 오랫동안 슬픈 얼굴빛이었다. 하루는 왕유소 등이 우승상 탑라한(塔剌罕)을 보고 왕의

말이라고 하여 전왕을 참소하니, 탑라한이 말하기를, "익지례보화왕(益知禮普化王)은

세조(世祖)의 생질이고 보탑공주(寶塔公主)도 종실의 딸인데, 계가하고 폐적하는 것이 도리에

온당한가." 하였다. 유소가 다시 아홀태(阿忽台)에게 말하던 것과 같은 참소를 하니, 탑라한이

말하기를, "서흥후(瑞興侯)도 왕의 아들인가." 하였다. "아닙니다." 하니, "그러면 누구의

아들인가." 하였다. 왕유소가 대답하지 못하고 물러 나와 최유엄에게 물으니, 유엄이 말하기를,

"자네도 임금의 친족인 것을 의당 스스로 알 것이다." 하였다. 유소 등의 음모가 새어나가니,

홍자번 등 5명이 중서성에 나아가 말하기를, "왕유소 등이 왕의 부자 사이를 이간하고, 이치를

거스르며 윤상을 문란하게 하였으니, 이보다 더 큰 죄가 없습니다." 하였다. 성관(省官)이 왕의

부자를 같이 성(省)에 오게 하여 물어본 뒤에 왕유소 등 4명을 잡아 가두었다. 얼마 안되어

고세(高世)ㆍ김문연(金文衍)ㆍ진양필(秦良弼)이 왕에게 아뢰기를, "신등이 왕을 따라와 여기에서

섬긴 지 이미 오래 되었으나 아무 보람도 없었으니, 이제는 다만 전하를 모시고 동쪽 제화문

(齊化門)을 나가기를 원할 뿐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내가 듣건대, 전왕이 사람을

물가의 역으로 보내어 내가 하수 건너는 것을 기다렸다가 강에 빠뜨리려 한다 하니, 내가 비록

늙었으나 난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겠느냐." 하였다. 고세 등이 호종한 신하 70명과 함께

중서성에 글을 올려 왕유소 등의 죄상을 극론(極論)하고 또 왕을 모시고 돌아갈 것을 청하니,

성관이 황제에게 아뢰었다. 이에 연회를 베풀어 왕을 전별하고, 또 여러 번 역마를 드리며

가기를 제촉하니,

왕이 어찌할 계책이 없어서 드디어 약을 마시고 이질에 걸려 여름에서 가을까지 일어나지 아니

하면서, 몰래 사람을 행재로 보내어 공주에게 함께 돌아가기를 청하였다. 아홀태(阿忽台)가

아뢰니, 황후가 이르기를,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같이 가는 것이 옳은가. 부득이 꼭 가야 한다면 내가 장차 수도(首都)로

돌아가서 수레와 장막을 준비하여 보내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공주가 왕유소 등이

피소된 것을 듣고 몹시 성내어 김문연(金文衍)을 불러서 곤장을 치고, 또 사람을 시켜서 문을

지키게 하여 왕유소 등을 고소한 소장에 서명한 모든 사람들이 왕의 처소에 출입하는 것을

금하였다. 이미 호종한 여러 신하들이 흩어졌는데 조적(曺?)이 가장 먼저 돌아갔고,

오직 비서승 이조년(李兆年)과 환관 최진(崔晉)이 모시고 있을 뿐이었다.

 

▶고려사절요 제24권 충숙왕

<정묘 14년, 원 태정 4년>

·그때 왕이 간신 때문에 일이 잘못되어 좌부대언(左副代言) 한종유(韓宗愈)에게 이르기를,

"나는 원 나라에 표문(表文)를 올려 심왕에게 왕위를 선위하고자 한다." 하고, 표문을 비밀리에

한종유에게 주어서 동의하는 인(印)을 찍으라고 명령하였다. 한종유가 아뢰기를, "나라가 조종

(祖宗)부터 전하여 왔는데, 어찌 적계(嫡系)를 버리고 방계(傍系)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 하고

굳이 간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나와서는 말에서 떨어졌다고 핑계대고 조정에 출근하지

않으면서 이조년(李兆年)과 더불어 대신에게 의논하여 간신을 잡아 물리치니, 심왕에게 왕위를

전하는 일이 끝내 실행되지 않았다.

 

<기묘 8년(1339), 원 지원 5년>

·역어낭장(譯語郞將) 전윤장(全允藏)이 원 나라에서 돌아왔다. 일찍이 전왕이 세자로 조회하러

들어갔을 적에 연첩목아(燕帖木兒)가 보고 크게 기뻐하여 자기 친자식처럼 돌보았는데, 대행왕이

왕위를 사퇴하자 황제에게 아뢰어 전왕에게 왕위를 내려주도록 하였다. 이때 태보(太保) 백안

(伯顔)이 연첩목아가 정권을 제 마음대로 하는 것을 미워하여, 전왕에 대한 대우를 아무렇게나

하였다. 대행왕이 복위하고 전왕이 숙위(宿衛)에 있을 때에는 연첩목아는 이미 죽고 백안은

전왕을 더욱 각박하게 대하였다. 전왕은 연첩목아의 자제와 회골(回骨)의 소년배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우스갯소리를 하고 다녔으며, 이어서 한 회골 여자를 사랑하여 어떤 때는 숙위에

들어오지 않기도 하니, 백안이 더욱 전왕을 미워하여,「발피(撥皮)」라 지목하였으니, 발피는

건달이라는 뜻이다. 종신들이 모두 불만스러워 하면서도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는데,

전 군부판서(軍簿判書) 이조년(李兆年)이 경계하는 말을 아뢰기를, "전하께서 천자(天子)를

섬기는 데 마땅히 하루하루 더욱 근신하여야 할 것이거늘, 어찌하여 예절을 버리며 마음대로

행동하셔서 누(累)를 자청하십니까. 그러나 이는 전하의 잘못은 아닙니다. 전하는 궁녀와 환관의

집에서 자라시어 함께 노는 자 중에 무뢰배가 많았으니, 전하께서는 누구에게서 옳은 말을

들으시고 옳은 일을 보셨겠습니까. 대개 유자는 비록 소박하고 옹졸하지마는, 모두 능히 경전과

역사공부를 하였고 염치를 아는 사람인데, 전하께서는 이들을 지목하여 사개리(沙箇里)라 하시니

, 이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께서는 아첨하는 무리를 멀리하시고 학자를 가까이 하시어,

행실을 고치고 스스로 조심하시면 좋으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천위(天威)가 지척에 있으니

엄중할 것입니다." 하였다. 전왕이 그 말을 듣다가 견디지 못하여 담을 뛰어넘어 달아났다.

백안이 황제에게 아뢰기를, "왕정(王禎)은 본시 행실이 나빠서 숙위에 누를 끼칠까 염려되오니

마땅히 그 아버지 있는 곳으로 보내어 바르게 지도하게 하옵소서." 하니, 황제가 이를 허락

하였다. 대행왕이 늘 '발피'라고 부르면서 그를 대하는 데 은정(恩情)이 적었으나,

유명(遺命)으로 왕위를 계승하라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행성(行省)의 좌우사(左右司)가 이것을

중서성(中書省)에 전달하였고, 전왕도 전 첨의평리(僉議評理) 이규(李揆) 등을 보내어 왕위의

계승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백안이 태사(太師)가 되어 이를 보류하고 아뢰지 않았으며,

또한 말하기를, "왕도(王燾)는 본래 좋은 인간이 아니며, 또한 병이 있으니 곧 죽을 것이고,

발피는 비록 적출의 장자라 할지라도 복위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고(暠)만이 왕이 될 만

합니다." 하니, 규(揆) 등이 온갖 계책으로 이를 청하였으나, 되지 아니하여 이규가

윤장(允藏)을 보내서 전왕에게 고한 것이다.

·을사일에 전왕이 방을 붙여 유시하기를, "적(?) 등이 조정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기를 가지고

사람들을 위협하여 모아서 반역을 도모하려 하니, 그 죄가 막대하다. 여러 관원들 가운데 정도

(正道)로 돌아오는 자는 용서할 것이다." 하고, 곧 전 판서 이조년(李兆年)으로 하여금

성관(省官)과 여러 재상(宰相)을 불러서 이르기를, "조적이 오랫동안 심왕의 신복(臣僕)으로

있으면서 몰래 다른 뜻을 길러왔는데, 제군들은 어찌하여 그를 돕느냐." 하였다. 적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내가 정승이 되어 황음무도한 행동을 보고도 만일 이것을 조정에 보고하지

않으면, 그 죄가 내 몸에 있다. 왕이 비록 나를 죽이고자 하나,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고,

드디어 민후(閔珝)를 시켜 궁문 밖에 수레를 연이어 묶어 놓고 대비하게 하였다. 경술일밤에

홍빈(洪彬)ㆍ신백(申伯)ㆍ황겸(黃謙)ㆍ백문거(白文擧)ㆍ왕백(王伯)ㆍ홍성(洪晟)ㆍ조염(趙廉)ㆍ

전사의(全思義)ㆍ주주(朱柱) 등이 정동성관(征東省官)과 함께 조염휘(趙炎輝)ㆍ이휴(李休)ㆍ

이영부(李英富)ㆍ이안(李安)ㆍ한승(韓昇)ㆍ장거재(張巨才)ㆍ배성경(裵成景)ㆍ민후(閔珝)ㆍ

오운(吳雲) 등에게 시켜서 천여 명의 군사를 점검하고, 붉은 천을 잘라서 옷에 붙여 표지를

삼고, 모두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아가 전왕의 궁을 습격하였다. 전왕이 행신(幸臣)들을 데리고

말을 타고 나와서 활을 쏘니, 적의 군사가 패하여 달아났다. 추격하여 순군소(巡軍所)의 남쪽

다리에 이르렀는데, 이안(李安)이 활을 쏘아 왕의 팔을 맞히고, 적이 사람들을 시켜 이어 놓은

수레 위에다 포장을 치고 날아오는 화살을 막게 하였는데, 왕의 선봉군이 이어 놓은 수레를

쳐부수고 들어오니, 적은 세가 궁하여 영안궁으로 달아났다. 친구가 그에게 나아가 망명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적이 듣지 않고 공주전(公主殿)으로 들어간 것을 왕의 군사가 쫓아 들어가 쏘아

죽이고, 그 시체를 순군소(巡軍所)의 남쪽 다리 아래에 옮겨 놓았다. 공주를 만호(萬戶) 임숙

(林淑)의 집으로 옮겨 놓고, 겸(謙)ㆍ주(柱)ㆍ승(昇)ㆍ안(安)ㆍ문거(文擧)ㆍ염휘(炎輝)ㆍ거재

(巨才) 등을 잡아 순군소에 구속하며, 다만 빈(彬)과 성관(省官)들은 용서하였다. 이때 김륜

(金倫)ㆍ한종유(韓宗愈) 등이 그 사건을 처리하는데, 부(府) 전체가 그들이 역모에 가담한 것을

미워하여 모두 모진 고문을 실시하려 하였으나, 김륜이 홀로 말하기를, "이들은 적(?)의 지시와

사주를 받아서 잘못한 것이니, 어찌 그토록 책할 것이 있느냐. 만일 그들의 피부에 상처를 내고

근골(筋骨)을 상하게 한다면, 반드시 내가 법을 악용하여 강제 자백을 받아서 조정을 속였다고

할 것이다." 하고, 곧 그들의 형벌을 가볍게 하니, 죄수들이 모두 감격하고 기뻐하여 사실을

숨김 없이 자백하였다.

▶고려사절요 제25권 충혜왕

<경진 후(後) 원년(1340), 원 지원 6년>

·3월에 채하중(蔡河中)이 원 나라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탈탈대부(脫脫大夫)가 황제에게

아뢰어 전왕을 석방하고, 왕위에 복위하게 하여 주었다." 하였다. 이때에 백안(伯顔)이 전부터

감정을 품고 왕으로 하여금 적(?)의 무리와 사실을 따지게 하였는데, 이조년(李兆年)은 격분

하여 이제현(李齊賢)에게 말하기를, "내가 승상의 앞에 나아가서 직접 하소연하면 그 뜻을

가히 돌이킬 수 있을 것이며, 문지기가 무기를 들고 막고 있기 때문에 들어가서 호소할 수가

없으나, 다행히 그가 성남(城南)으로 사냥을 나가게 되면, 내가 길 옆에서 글월을 올리고

그 말발굽 아래에서 머리를 깨뜨려 죽음으로써 우리 임금의 억울함을 발명할 터이니, 그대는

붓을 잡아 나의 글을 써 주시오." 하고, 밤에 일어나 목욕하고, 닭이 우니 떠나려고 하였다.

백안이 마침 이날 실각하여 글은 마침내 올리지 못하였으나, 듣는 사람이 모두들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담이 몸보다 크다." 하였다. 이조년을 정당문학으로 삼았다.

 

<신사 2년(1341), 원 지정(至正) 원년>

·12월에 성산군(星山君) 이조년(李兆年)이 은퇴하기를 청하였다. 당시에 왕이 북궁(北宮)에서

걸어서 송강(松岡)까지 와서 새 사냥을 하는데, 조년이 지름길을 통해 나아가 무릎을 꿇고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 고생하시던 때를 잊으십니까.

이제 불량배들이 왕의 위엄을 빌어서 부녀자를 약탈하고 재화를 빼앗아, 백성들은 그 생활에

즐거움을 갖지 못하고 있사오니, 신이 생각하기에 화(禍)가 조석에 다가올 듯합니다. 이런 것은

걱정하지 않고, 도리어 잡스런 오락을 즐기십니까. 전하께서 노신의 말을 들으시어 아첨하는

것들을 물리치시고, 어진 사람을 통하여 힘쓰고 정성을 다하여 정치를 도모하시며, 다시는

부질없이 노닐지 않으신다면, 노신은 비록 죽을지라도 땅 속에서 눈을 감겠습니다." 하였다.

당초에 장사꾼 임신(林信)의 딸은 단양대군(丹陽大君)의 계집종으로, 사기(砂器)를 팔아서

생활하였는데, 왕이 보고 가까이하여 총애를 받게되자, 임신을 대호군(大護軍)으로 삼았다.

하루는 신이 기륜(奇輪)을 구타하였는데, 왕이 임신을 두둔하고 친히 기륜의 집에 가서

그 집을 헐어 버렸다. 이때에 조년이 그것까지 아울러 간하였다. 또 아뢰기를, "신이 국은을

지나치게 받자와 벼슬이 정당(政堂)까지 이르렀으니, 신은 이로써 만족합니다. 오직 전하께옵서

재량껏 하시옵소서." 하였다. 왕이 몹시 노하여 받아 주지 않더니, 얼마 있다가 좋은 말로

사과하고 보냈다. 조년이 집에 돌아온 뒤에 탄식하기를, "왕은 지금 나이가 한창 젊어서 욕심을

마구 부리는데, 나는 이미 늙어서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다. 물러가지 않으면 반드시 화가

미칠 것이다. 또한 자주 간하였는데도 받아들이지 아니하니 책임은 돌아갈 데가 있으려니와,

이미 그 좋은 점을 살리지 못하였으니 다만 그의 나쁜 점을 증가시키게 될 것이기에, 신하가

임금을 사랑하는 도리가 아니니 물러가는 것만 못하다." 하고, 고향에 돌아가 죽을 때까지

나오지 아니하였다. 뒤에 조년의 아우 연경(延慶)이 왕을 뵈었더니, 왕이 이르기를, "너의 형이

나를 욕하였다." 하였다. 연경은 그가 노망하여 그렇다고 대답하니, 왕이 기뻐하여 쌀과 콩

50석(石)과 베[布] 5백 필(匹)을 주었다.

<임오 3년(1342), 원 지정 2년>

·6월에 교서를 내리기를, "적신(賊臣) 조적(曺?)이 난을 꾸민 후 과인이 원 나라의 명을 받고

원 나라의 서울에 갔을 때에, 간신의 잔당들이 근거 없는 말을 꾸며내어 국가의 변란을 음모

하였으나, 시종 하였던 신하들은 종시 한결같은 충절로 과인의 몸을 보좌하여 그 공이 막대

하였으니, 영원히 그 공은 잊을 수 없다.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석(尹碩), 정승 채하중

(蔡河中), 화평부원군(化平府院君) 김석견(金石堅), 정승 이능간(李凌幹), 이문(理問) 홍빈

(洪彬),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영돈(金永暾)ㆍ서하군(西河君) 임자송(任子松), 찬성사

(贊成事) 김인연(金仁沇), 언양군(彦陽君) 김륜(金倫), 김해군(金海君) 이제현(李齊賢),

성산군(星山君) 이조년(李兆年), 첨의평리(僉議評理) 한종유(韓宗愈), 삼사우사(三司右使)

김영후(金永煦), 좌사(左使) 이몽가(李蒙哥), 판밀직사(判密直事) 이운(李雲), 개성윤(開城尹)

윤신계(尹莘係),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이엄(李儼), 동지밀직(同知密直) 윤환(尹桓)ㆍ

박청(朴靑), 밀직부사(密直副使) 강윤충(康允忠)ㆍ안천길(安千吉)ㆍ노영서(盧英瑞) 등을

1등 공신으로 삼고, 영창군(永昌君) 김승택(金承澤) 등 18명을 2등 공신으로 삼고,

각각 차등에 따라 공신의 부모와 아내와 그 아들에게 작위를 주고 전답과 노비를 주라." 하였다.

<계미 4년(1343), 원 지정 3년>

·성산군(星山君) 이조년이 졸 하였다. 조년은 성품이 강직하여 그 근엄한 성품 때문에 외면을

받았다. 조년이 입궐할 때마다 왕은 그 신발 소리를 듣고 이르기를, "조년이 왔다." 하고,

좌우를 물리치고 외모를 단정히 하고 기다렸다. 향리에 물러가 있으면서 세상일에 상관하지

않았다. 생김새가 키가 작고 날카롭게 보이며, 뜻이 확고하고 할 말은 과감하게 하였다.

역임한 관직에서 많은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시호를 문열(文烈)이라 하였다.

·12월에 한양군(漢陽君) 한종유(韓宗愈), 판밀직사 손수경(孫守卿)을 원 나라에 보내어

토산물을 올리게 하였다. 이때 왕의 충신은 한종유(韓宗愈)와 이조년(李兆年)뿐이었는데

이조년이 이미 죽었으니, 황제가 종유를 부른 것은 그에게 원자(元子)를 부탁하려는 것이었다

 

<갑신 5년(1344), 원 지정 4년>

·왕이 역의 수레로 달리니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 계양현까지 이르지 못하고,

병자일에 악양현(岳陽縣)에서 훙(薨)하였다. 독살 당하였다고도 하고, 귤을 먹고 운명

하였다고도 한다. 나라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소민들은

기뻐 날뛰면서, "이제는 다시 살 수 있는 날을 보겠다." 고까지 하였다. 백성들에게 덕택이

미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처음에 궁중과 길거리에 노래가 유행하기를,

"아야마고지나(阿也麻古之那)가 이제 가면 언제 오리." 라 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사람들이

해석하기를, "악양(岳陽)에서 죽는[亡故] 어려움[難]이여, 오늘 가면 어느 때에 돌아올 것인가."

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충혜왕은 영특하고 슬기로운 재능을 좋지 못한 데에 사용하였고,

나쁜 불량배들을 가까이하면서 음란하고 방종한 행동을 멋대로 자행해서, 안으로는 부왕에게

꾸지람을 받고, 위로는 천자에게 죄를 얻어, 죄수의 몸이 되어 길에서 죽었으니, 마땅하도다.

비록 늙은 신하 이조년(李兆年)의 간절한 간언이 있었으나 말을 듣지 않았으니,

어찌 하겠는가." 하였다.

 

2009 낙동·백두를 가다] (50) 성주 또한 영남의 인재향
퇴계·남명학파 교유한 곳…'조선학문'의 으뜸고을

 

 

 
 
 
성주는 도은 이숭인, 동강 김우옹, 한강 정구, 응와 이원조, 심산 김창숙 등 고려 말 충의를 지킨 선비와 조선 성리학의 대유들을 배출해 ‘영남 고을의 인재향’이라는 이름을 떨쳤다. 성주 수륜 수성리의 ‘갓말’은 한강 선생 후손들의 세거지로 고고한 소나무와 마을 전경이 인재향 성주를 대변하고 하다.
 
청천서당은 심산 김창숙 생가 인근에 있다. 심산은 청천서당에 성명학교를 세워 성주 땅에 독립의 혼을 심었다.
 
회연서원은 한강 선생이 회연초당을 세워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다. 회연서원은 성주를 대표하는 수많은 선비들을 배출했다.

1년 가까이 경북 낙동강 중·상류지방을 다니면서 ‘영남 고을의 인재 반은 ○○’라는 수식어를 자주 접했다.

안동과 예천, 상주, 선산이 그러하다. 이 반열에 성주도 당당히 그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들 고을의 공통점은 모두 낙동강을 끼고 있다. 낙동강은 마을이라는 터전을 줬고, 마을은 명망높은 인물을 배출하는 허파와 같은 존재로 자리잡았다. 조선 500년에서 안동과 예천, 상주, 선산, 성주 고을은 조선의 인재 보고(寶庫)였던 것이다.

인물은 명망높은 가문과 고을에서 비롯된다. 성씨를 보면 알 수 있다. 행정구역 상 지금의 성주 땅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모두 28성관(姓貫)이다. 한 지역을 본관으로 하는 성관이 이렇게 많은 경우는 드물다. 그 만큼 본관을 중심으로 성주 땅에 크고 작은 마을이 생겼고, 인물이 났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성주는 지금 임진왜란 때 소실된 성주사고(史庫)를 복원 중이다. 학술조사 보고서를 중심으로 학문의 상징적 존재인 사고를 옛 모습 그대로 되돌리고 있는 것이다. 조선 초기에는 전국에 4대 사고가 있었다. 한양의 춘추관과 충주사고, 전주사고, 성주사고 등이다. 성주에 조선 초기 4대 사고가 있었다는 것은 그 만큼 성주가 조선 학문의 으뜸 고을이라는 뜻이다.

그러했다. 성주는 고려 말 충의와 절개의 고장이었고, 조선으로 넘어와선 조선의 통치이념이자 대표 학문인 성리학의 주요 근거지로 으뜸 학자들을 배출했다.

가야산 자락의 아늑한 마을인 구륜면 신파리에 청휘당이 있다. 고려 말 고려 왕조에 절의를 지킨 도은 이숭인이 기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한 곳이다.

도은 이숭인은 성주가 고향이다. 성주에 충의와 절개를 심은 대선비이자 당대를 대표하는 문장가이자 시인, 학자였다. 어찌보면 성주 학문의 큰 스승이다.

고려 말 ‘삼은’(三隱)은 교과서에 나오는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를 칭한다. 한편으론 학계에선 도은을 삼은에 포함해야 한다는 의견까지 나온 적이 있다. 이는 도은의 명망과 절의, 깊은 학문의 세계를 두고 말하는 찬사가 아니겠는가.

목은의 제자인 도은은 어려서부터 학문이 뛰어나 16세에 등과(조선의 과거급제에 해당)했다. 포은과 함께 실록을 편찬했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는 중국의 사대부들이 도은의 저술을 보고 탄복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특히 도은은 시에 뛰어나 남긴 500여 수의 시는 당대 '동방 제일'이라는 명망까지 낳았다.

하지만 도은은 포은과 연루됐다는 이유로 유배를 당했고, 지금의 나주 땅에서 정도전의 심복에 의해 생을 마쳤다. 그 때 나이 46세. 고려 왕조에 대한 충의를 다하고 순절한 것이다. 훗날 조선 3대 임금이 된 태종 이방원은 스승인 도은의 죽음을 전해듣고 “도은의 문장과 덕망은 내가 사모해왔다”고 애통해했다고 한다.

비록 정치적 이념이 달랐고, 도은이 죽은 후였지만 태종 이방원의 스승에 대한 예의는 임금이 된 후에도 극진했다. 후일 태종은 도은에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권근·변계량 등 학자들에게 도은의 유집을 발간토록 했다.

조선으로 와서 성주는 영남의 인재향(人材鄕)으로 그 이름을 더욱 떨쳤다.

훗날 택리지의 저자인 이중환은 인물이 많은 성주를 이렇게 묘사했다. “세 고을(성주)의 논은 영남에서 가장 기름져 씨를 조금만 뿌려도 수확이 많다. 그런 까닭에 고향에 뿌리박고 사는 사람들은 모두 넉넉하게 살며 떠돌아다니는 자가 없다. 성주는 산천이 밝고 수려하여 고려 때부터 문명이 뛰어난 사람들과 이름 높은 선비가 많았다, 조선에 와서도 동강 김우옹과 한강 정구가 이 고을 사람이다.”

동강과 한강은 성주의 ‘이강’(二岡)이다. 그 학문이 뛰어나 성주(星州)가 조선 학문의 으뜸 고장으로 불리게 한 별(星)이다.

일행이 이들 두 선비에게서 주목하는 것은 조선 영남학파의 양대산맥인 이황의 퇴계학파와 조식의 남명학파가 성주 땅에서 교우했다는 점이다. 동강은 남명의 제자이면서도 퇴계의 영향을 받았고, 한강 역시 남명의 제자이자 퇴계의 문인이었기 때문이다. 성주는 퇴계와 조식의 학문이 모두 꽃핀 고을인 것이다.

동강은 과거 급제 후 병을 이유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을 수양하다 급제 후 5년 뒤에 첫 벼슬길에 올랐다. 대사성, 이조참판, 예조참판 등을 역임하면서 율곡 이이와 교우하고, 동향인인 한강과도 학문을 논했다. 말년에 인천과 청주에 기거했을 때는 동강은 좇는 선비들이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한다.

한강은 21세때 퇴계의 문하에 들어갔고, 24세가 되어선 남명의 제자가 됐다. 출세의 지름길인 과거보다는 오로지 학문 수양에 정진한 한강은 벼슬이 없는 선비, 포의(布衣)였다. 37세가 되어서야 첫 벼슬길에 나아가 창녕현감을 지냈고, 임진왜란 때는 강원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구국의 길을 걸었다. 전란 후인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한 뒤 대사헌이 되었으나 이후 고향에 돌아가 후학 양성에 몰두했다.

한강의 조부인 정응상은 대학자인 한훤당 김굉필의 제자이자 사위였다. 한강이 대학자의 운명을 타고 났다는 이야기다. 퇴계는 한강의 인품과 학문의 깊이에 매료됐고, 한강은 서애 유성룡, 학봉 김성일과 함께 '퇴계문하 삼걸'이라는 칭호도 얻었다. 한강은 낙동강 북부의 퇴계학을 낙동강 중류에 퍼뜨렸고, 동시에 경남 합천의 스승 조식으로부터 배운 남명학을 성주 땅에 심었다.

한강은 퇴계와 남명 두 스승의 장점을 잘 조화시켜 후에는 자신만의 독특한 학문 세계를 열었다. 그는 우주공간의 모든 것을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경세, 병학, 의학, 역사, 천문, 풍수지리 등에 통달했는데, 특히 예학에 밝았다.

그는 예는 가깝고 먼 것을 정하고, 믿고 또 못 믿음을 결정하고, 같고 다름을 구별하고, 옳고 그름을 밝히는 기준이라 했다. 한강은 한국철학사에서 예학을 연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한강은 성주 땅에 풍류도 낳았다. 가천면에서 수륜면 소재지로 가는 33번 국도 변에 대가천이 흐르고, 대가천 변에는 규모면에서 퇴계의 도산서원에 버금가는 회연서원이 있다. 한강이 후학을 가르쳤던 곳이다. 서원의 절벽인 봉비암은 무흘구곡이 시작되는 곳이다. 무흘구곡은 대구 사람치고 모르는 이가 드물다. 대구 사람들로부터 여름 피서지로 각광받는 계곡이기 때문이다.

서원의 전신인 회연초당에서 후학을 가르치던 한강은 중국 송나라 주자의 '무이구곡'을 떠올리며 봉비암에서 용추폭포까지의 아홉 절경을 '무흘구곡'이라 정하고, 1곡인 봉비암을 시작으로 시를 읊었다.

도은에서 시작돼 이강으로 대표되는 성주 학문은 조선 후기 최고의 선비였던 응와 이원조로 이어진다.

한개마을에서 태어난 응와는 입재 정종로의 제자다. 입재는 퇴계 학맥을 이은 대산 이상정의 문인이면서 우복 정경세의 6대손이다. 이황-류성룡-정경세로 이어지는 학문과 김성일-이현일-이상정으로 이어지는 학맥을 연결시킨 인물이 곧 입재였다. 입재의 학문을 계승한 응와는 '응와문집' 등 13종의 저서를 남겼다.

또한 응와는 공조판서, 대사간, 판금부의사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응와가 정계에 진출한 시기는 세도정치기. 영남 남인이 괄시받던 당시 응와는 뛰어난 학문을 소유한 영남 남인의 대표 관료로 정계에 당당히 나아간 것이다. 스스로 “성품이 산수를 좋아한다”고 밝힌 응와는 말년에 고향의 포천계곡에 만귀정을 짓고 마지막 학문적 열정을 불태웠다. 응와는 무이구곡에 견주어 포천계곡의 구곡의 시도 남겼다.

성주의 인물을 논할 때 심산 김창숙을 빼놓을 순 없다. 대가면 칠봉리의 심산 생가는 지금 며느리 손응교 여사가 홀로 집을 지키고 있다.

선비란 어떤 존재인가? 오로지 학문에만 매진한다고서 선비이겠는가. 의를 배우고, 이를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 임진왜란 때 선비들은 구국을 위해 분연히 일어났고, 구한말에도 항일독립운동으로 선비의 의를 실천했다.

유학자인 심산은 조선 말기의 마지막 영남 선비 중 한 분이었다. 심산은 동강 김우옹의 후손이다. 20대의 젊은 유학자 심산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서울로 올라가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을 성토하는 상소를 올려 옥고를 치렀다. 1909년 고향에서 성명학교를 세운 뒤 인재를 키우는데 매진했다. 성명학교는 지금 심산 생가 인근에 위치한 청천서당 자리다. 3·1운동 후 중국으로 건너간 심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되었고, 이듬해 귀국해 제 1차 유림단사건으로 일컬어지는 ‘파리장서사건' (우리의 독립 의지를 세계 만방에 알린 사건)에 연루돼 체포됐다. 심산은 출옥 후 다시 중국으로 가서 서로군정서 군사선전위원장,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 등을 맡으며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본국으로 압송돼 다시 투옥됐다. 광복 후 심산은 유도회를 조직하고 성균관대학교 초대 총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성주 학문은 일제 강점시 심산을 비롯 성주 유림들에게 항일운동이라는 선비 정신을 낳게 한 것이다.

초전면 고산리에는 백세각이 있다. 심산, 면우 곽종석, 공산 송준필 등 성주 유림들이 파리장서사건을 논의했던 바로 그 자리다. 파리장서에 서명한 유림 137명 가운데 13명이 성주 유림이었다. 조선 후기 대유학자인 한주 이진상의 맏아들인 대계 이승희 역시 서상돈과 함께 국채보상운동을 벌였고, 고종 양위사건이 일어나자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해 이상설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도은선생 문집 (陶隱先生文集) 寶物제1465號)

陶隱集(보물 제1465호)

  陶隱할아버님의 文集  國家寶物 제1465호로 지정 (2006.5.1)

(다음 글은 漢文學硏究 國語國文學編에서 따온 것입니다)  

陶隱集

  고려 말기 이숭인(李崇仁)의 시문집. 5권(시 3권, 문 2권) 목판본.

간행 년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저자 생전일 것이라고 추측된다.

  이는 생전에 벌서 두 편의 序文과 세편의 跋文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일먼저 쓴 발문은 이숭인이 31세 되던 1377년(우왕3) 11월 2일에 이색(李穡)이 지었다.    

  그러나 “정사년(丁巳年) 11월 그믐날 3일전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빗은 뒤에 향을 피우고 단정히 앉아 도은의 시 두어 편을 읽었다”라고 시작되는 이 발문으로는 당시에 시고(詩稿)를 간행한 것인지 명확히 알 도리가 없다.

《고려사》에서도 “《도은집》이 있어 세상에 전한다.” 라고 하였지만 그 간행 년대는 명확하지 않다.

  더욱이 저자 생전에 간행되었다 하드라도 그 판본이나 책의 권수는 알 수가 없다. 다음에 붙은 발문은 명나라 장보(張溥)가 지은 것으로 이숭인이 39세 되는 1385년(우왕11) 10월에 지었고, 마지막 발문은 명나라 고손지(高?志)의 것으로 이숭인이 43세 되던 공양왕 1년에 지었다.

  또 서문 가운데 제일 먼저 지은 것으로는 이숭인이 39세 때 명나라의 주탁(周倬)이 지었고, 그 다음으로는 42세 되던 1388년 정도전(鄭道傳)이 지은 것이다. 그 뒤 그의 사후 14년인 1406년(태종 6)에 태종이 陽村 권근(權近)에게 명하여《도은집》을 편찬, 간행하게 하여 2책으로 간행하게 되었다.

  후에 최립(崔?)이 《도은시집》을 활자본으로 간행하였는데 〈신인도은시집발 新印陶隱詩集跋〉이 《간이집》에 실려있다.

  다시 1959년 근각(近刻)의 도은집이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여계명현집 麗系名賢集》으로, 1973년에는 《高麗名賢集 고려명현집》으로 하여 詩 3권 文 2권 등 목판본 5권을 영인 하였다.

  역주 序로는 1975년 대양서적(大洋書籍)에서 《한국명저대전집》중에 《도은집》이 번역되었는데, 이는 그의 후손인 이동석(李東錫)이 소장한 목판 2책을 대본으로 한 것인데, 이 책 외에도 속집 2권이 있으며, 부록으로 그 에게 보낸 다른 사람들의 시문이나 여러 문헌에 적힌 그의 기록이 실려 있기도 하다.

  《고려명현집》의 영인본 내용을 보면, 권 1에는 사(辭) 1권과 오언?칠언 고시 30제(題)로 모두 31제가 있고, 권 2에는 오언? 칠언? 율시로 154제, 권 3에는 절구 152제로 詩만 모두 336제이고 辭가 한편이다. 그리고 권 4?5의 文은 모두 51편이다.

  시(詩) 중에는 “辛丑년(1361) 동짓달에 임금의 행차가 남쪽으로 순수하다(辛丑仲冬大駕南狩)”와 같은 저자 15세 때의 시도 있다.

  또한 〈처용가 處容歌〉?〈정과정곡 鄭瓜亭曲〉 및 단오(端午)? 팔관회(八關會)등을 소재로 한, 민족적인 경향의 시가 상당히 보이며, 詩 중에서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제승사 題僧舍〉?〈오호도 嗚呼島〉를 들 수 있다.

  “산 남쪽 산 북쪽 좁은 길이 갈렸는데 / 송화가 비에 젖어 이리저리  떨어지네 /도인이 물을 길어 모옥으로 돌아가니 / 한줄기 푸른 연기 흰 구름을 물 드리네 (山北山南細路分 松花含雨落績粉 道人汲井歸茅舍 一帶靑煙染白雲)”로 되어 있는 〈제승사〉를 《지봉유설 芝峰類說》에 의하면 이색이 “당나라 시에 가깝다.” 고 평가하자 이숭인의 명성이 더욱 빛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중원잡제 中原雜題》?《영안남 ?安南》?《영유구 ?硫球》등의 시를 남겨 당시 중국을 비롯한 안남, ?유구등의 풍속과 문화교류를 엿 보게 한다.

  文으로는 기(記) 7편, 지(誌) 1편, 서(序) 12편, 전(傳) 2편, 제후(題後) 3편,  설의(議) 1편, 행장(行狀) 1편, 찬(讚) 1편, 설?전(箋) 각 1편, 표(表) 17편, 전(?) 4편이 있다. 그리고 원나라와의 빈번한 외교문서 교환이 있을 때 이숭인이 문서 작성을 도맡았기 때문에 그의 文 가운데에서 表가 가장 많음을 알 수 있다.

  그 중 〈초옥자전 草屋子傳〉은 당시 정계에서 상당한 활약을 한 김진양(金震陽)을 다루었는데 김진양의 내면세계에 대하여 깊이 공감한 바를 나타내었다.   記에는 당시 불교와 관계가 있는 글이 많으며, 특히 〈여흥군 신륵사대장각기 驪興郡神勒寺大藏閣記〉는 이색의 대장경 인성(印成)과 장경(藏經)까지의 경위를 서술한 명문으로, 이숭인과 불교와의 관계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문장 솜씨 또한 뛰어난 글이다.

  序文 가운데에는 시와 관계되는 序가 5편으로 그의 문학관을 알 수 있다.

고려는 과거제 실시 이후 제술과가 중시되면서 사장(詞章)과 문예 중심으로 문풍(文風)이 기울어졌으나, 주자학이 수입된 뒤로는 안향(安珦)? 백이정(白?正)? 이재현(李齋賢)? 이곡(李穀)을 거쳐, 삼은(三隱)으로 이어지면서 문학의 흐름도 도학적인 경향으로 나타났다.

  이숭인은 이 시기에 태어나 문학과 도학을 겸하여 국내외에 명성을 떨친 문인으로서, 《도은집》은 이러한 그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문학을 담은 귀중한 자료로 전해지고 있다

추  서

  대구 계명대학에서 소장하고 있는 도은집은 국가 보물 지정을 신청하여 2006년 5월 1일자로 보물 제146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도은 선생의 문집 중에는 癸未字로 출간한 문집이 서울 모처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아직 그 眞本을 찾지 못함은 아쉬운 일로서 그時價가 억대를 넘는 것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현재 계명대학에 소장하고 있는 도은집은 계미자로 인쇄 된 것이 아니고, 5권 1책이며 활자본으로 1406년에 발행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대구 이용환 종친 제공

 

●이직(李稷:1362~1431)-동활자를 만든 조선최초 이조판서

 -직위를 걸고 충녕대군(세종)의 세자책봉을 반대한 대신

이직은 성주이씨로 고려때 성산부원군으로 이름난 이장경(李長庚)의 후손인데,

그들의 시조 이순유(李純由)는 신라가 망하자 나라에 대한 절개를 지켜 이름마져

 극신(克臣)으로 고쳐 성주에 은거해 버렸던 인물이었다.

시조 이순유의 12세손 이장경은 이백년(李百年)·천년(千年)·만년(萬年)·억년(億年)·조년(兆年)으로

이름지은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문과를 거쳐 나라에 공이 많았기에, 조정에서는 이장경을

‘삼중대광좌시중도첨의정승지전리사사상호군’이라는 높은 관직에 추증하고 성산부원군에 추봉하니

성주이씨 가문에서는 그를 중흥시조로 삼았으며, 이직은 바로 이장경의 현손이었다.

이장경은 매사에 매우 공손하였고, 항상 몸을 낯추어 자신을 스스로 교양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니

마침내 하늘이 복을 내려 자식들이 모두 현달하였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맏아들 이백년은 밀직사사, 둘째 이천년은 참지정사, 셋째 이만년은 시중, 4남 이억년은 개성유수,

막내 이조년은 정당문학을 지내는 등 이장경 5부자는 당대에 유례가 없을 만큼 번성하였다.

특히 이조년은 시문에 뛰어나 『이화에 월백하고…』하는 시조를 남겼는데

불후의 명작으로 전해온다.

이직은 바로 이조년의 증손으로 고려 공민왕11년 문하평리 대제학 이인민(李仁敏)의 다섯 아들 중

맏이로 태어났으며, 이직의 할아버지 이포(李褒) 또한 문하시중까지 올랐던 인물이었으니

이직의 가문은 그야말로 일세를 풍미한 명문이었다.

이직의 자는 우정(虞庭), 호는 형재(亨齋), 1377년 우왕13년 16세 약관에 문과에 올라

당대의 천재로 벌써 이름이 들어났다.

여러 초임 벼슬을 거쳐 공양왕때 예문관대제학에 올랐는데, 말기증세가 뚜렷한 고려의 혼조에서

이성계의 개혁정책을 눈여겨 보아 마침내 새 나라 개창에 참여, 조선이 개국되자

개국공신3등에 책록되고 관직은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받으니

형옥을 다스리는 고위 관직이었다.

이직은 특히 정안대군 이방원과 교분이 두터워 이방원이 태종으로 등극하는데 공을 세운 이후,

태종의 휘하에서 명나라 사신으로 두 번이나 다녀와 명나라와의 외교관계를 긴밀하게 이끈

국가의 동량이었으며 태종3년에는 동활자인 계미자(癸未字)를 만들어 문헌보급에 큰 공을 남겼다.

이어 대사헌을 거친 이직은 관제가 6조로 개편되자 조선조 최초의 이조판서가 되어

조정의 인사체계를 바로 세웠다.

1412년 이직은 성산부원군에 봉해지고 1412년 우의정에 올라 이른바 정승반열에 들어서서

곧 좌의정이 되었는데, 1418년 태종이 세자 양녕을 폐하고 뒤에 세종에 오른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으려 할 때

이직은 그때의 이조판서 황희(黃喜)와 함께 “세자를 쉽게 움직이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오!”

하고 직위를 걸고 불칼같은 태종의 성격을 알면서도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결국 이직은 태종의 노여움을 산 끝에 고향인 성주로 유배당해 위리안치되는 처벌을 받고 말았다.

1422년 세종4년, 어질기 그지없던 세종은 이직의 인물됨을 익히 아는지라 이직을 불러 올려

좌의정에 복직시켰다가 1425년 9월 영의정으로 승진시켜 이직의 소신있는 충성심을 높이 기렸다.

자신의 세자책봉을 자리를 걸고 반대한 인물이었지만 그 일이 사사로운 마음에서가 이님을

누구보다 잘 아는 세종은 이직의 기개를 높이 사 성군답게 이직을 챙겨 살펴 등용했던 것이다.

이직은 6년간 영의정자리를 지키며 자기를 알아주던 세종을 도와 고락을 같이하며

국정을 보살피다가

1431년 8월 눈을 감으니 향년 70세였다. 이직이 세상을 등졌다는 전갈에 자상한

세종은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모든 사무를 전폐하고 사흘동안 조회를 금하게 한 뒤 이직의 빈소를 찾아 조문길에 나섰다.

이직의 빈소에서 세종은 손수 분향하며 조의를 표하는 글을 올렸다.

『조선국왕 도(?)는 성산부원군 이직의 영전에 삼가 조문의 뜻을 표하노라.

경은 일찍이 나라의 종묘사직을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이후 수십년, 밤에는 띠를 풀지 않은 채

충성을 다하여 왔도다. 때문에 과인은 선대 제왕이 하신바와같이 경에 의지하여 항상 마음놓고

정사를 다스려왔고, 안심하고 용상을 어거하였거늘, 이제 경이 하루아침에 과인을 버리고

유명을 달리하여 홀연히 떠나니 하늘은 빛을 잃어 암암하고, 산천하해도 생기를 잃은 듯

온 누리가 경의 별세를 슬퍼하도다…!』실로 어진 임금의 진솔한 마음이 담긴 조의였다.

이직에게는 문경공(文景公)으로 시호가 내려졌고, 여주 북성산에 장사지냈었는데,

오늘날의 경기도 고양시 선유동으로 옮겨 정경부인 양천허씨와 합폄으로 묘지가 마련되어 있다.

최근 1975년 묘역아래 신도비를 세웠는데, 비문은 오래전인 1688년 후손인 대사헌 이응협(李應協)이

지었던 것을 비를 세울 때 이진락이 썼다.

이직은 세 아들을 두어 맏이 이사순(李師純)은 공조참판, 둘째 이사원(李師元)은 황해도와 강원도관찰사,

3남 이사후(李師厚)는 한성판윤을 지냈다. 딸이 있어 일찍 출가를 했다가 남편을 잃었는데,

33세 되던 해 세종때의 태상왕이던 조선조 둘째왕 정종에게 개가하여 후궁이 되었다.

이후 성주이씨 가문에서 이직만한 인물은 드물었으나 후손들은 매우 번창하였다.

[출처]조선의 영의정들<역사인물탐방 8>- 이직|작성자하동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