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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의 [성씨의 고향]--성주이씨(星州李氏)

숨겨진 한국사 족보서 찾다

뿌리를 찾아 떠나는 테마여행 - 성주이씨편

간산 대가면 성주이씨 재실 밎 묘

요녕성 철령시 철령현 최진보진 소둔촌 성주이씨마을

노년시대 신문 내용중에서

星州李氏 家門의 초상화 연구
중시조(휘 장경)의 품계 상호장(上戶長)에 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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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의 고향

星州 李氏  氏族의 연원

성주이씨(星州李氏) 시조(始祖)는 신라(新羅) 문성왕조(文聖王朝, 839 -857)에서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낸
신라명신(新羅名臣) 이순유(李純由)로 경주이씨(慶州李氏) 시조(始祖) 이알평(李謁平)의 32대손(代孫)이다.
일설(一說)에 따르면 공께서는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이 고려(高麗)에 항복함에 망국의 한을 남기게 되자 고려조(高麗朝)에 나아가 벼슬하지 않고, 이름마저 극신(克臣)이라 고치고 지금의 성주읍(星州邑) 경산리(京山里)에 옮겨 숨어살았으나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인물됨을 아깝게 여겨 "나의 신하는 아니나 나의 백성임에는 틀림없다" 하며 호장(戶長)을 삼으니 후손(後孫)들이 대대로 호족을 이루고 살았다.
호장(戶長)이란 향직(鄕職)의 우두머리로 지방의 성주(城主)나 호족(豪族)을 포섭하기 위해 설치한,말하자면 지방통치의 수장(首長)이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그곳에서 대대로 호족(豪族)을 이루며 고려조에 호장(戶長)을 맡아왔다.
고종 때의 인물 이장경(李長庚)이 성주이씨(星州李氏)의 중시조가 될 만큼 뛰어난 분이었다.
아버지 이득희(李得禧)가 태몽에 문창성(文昌星)이 경산(京山)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이름을 장경(長庚)이라 지었다. 호장(戶長)으로도 덕망이 높았다고 한다.
그의 아들 5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 명성을 떨치자 국왕은 그에게 특별히 삼중대광 좌시중 흥안부원군 도첨의 정승 지전리사사 상호군 경산부원군(三重大匡 左侍中 興安府院君 都僉議 政丞 知典理司事 上護軍 京山府院君)에 봉하였다.
특히 손자 이승경(李承慶)이 원(元)나라에 들어가 벼슬을 하면서 공적을 세웠으므로 원(元)의 황제(皇帝)가 선칙(宣勅)으로 그의 조부를 농서군공(?西郡公)으로 추봉하였다.
이장경(李長庚)을 중시조로 삼게 된 연유는 이러했다.
따라서 중흥시조 이장경(中興始祖 李長庚)이 농서군공(?西郡公)이 되었기에 혹은 농서이씨(?西李氏)라고도 하였는데 그 뒤 가세(家勢)가 크게 일어나 관향의 지명을 따라 성주 이씨(星州 李氏)라고 하게 되었다.

 

본관지 연혁

성주(星州)는 본래 신라의 본피현(本彼縣)인데, 경덕왕이 신안(新安)으로 고쳐 성주군(星州郡)에 붙였고 고려 태조가 경산부(京山府)로 고쳤으며 경종 때는 강등되어 광평군(廣平郡)으로 되었다.
충렬왕 때 흥안도호부(興安都護府)로 승격시켰다가 뒤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목(牧)을 만들었고 충선왕 때 강등시켜 경산부(京山府)라 하였는데 조선에서도 인습하였다.
태종 때 목(牧)으로 고쳤고, 이후 여러 번 변천을 거듭하다가 1895년 군(郡)으로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
주요 성씨로는 이(李) · 김(金) · 도(都) · 여(呂) · 배(裵) · 시(施) · 초(楚) · 현(玄) · 석(石)씨 등이 있었다.

 

파명록

5대종파(宗派)

밀직공파(密直公派)·참지공파(參知公派)·시중공파(侍中公派)·유수공파(留守公派)·문렬공파(文烈公派)
지파(支派) : 초은공파(樵隱公派)·광평군파(廣平君派)·판서공파(判書公派)·도은공파(陶隱公派)·경무공파(景武公派)·평간공파(平簡公派)·문경공파(文景公派)·총제공파(摠制公派)·판윤공파(判尹公派)·동지공파(同知公派) ·참판공파(參判公派)·간성공파(杆城公派)·고은공파(孤隱公派)·장절공파(章節公派)·도정공파(都正公派)·문과공파(文科公派)·봉례공파(奉禮公派)·첨추공파(僉樞公派)

 

주요 세거지

2세손 이백년(李百年)의 자손들인 밀직공파(密直公派)는 대체로 관향(貫鄕)인 성주(星州) 일원에 살다가 9세손 이세영(李世榮)의 후계가 전남 곡성(谷城)의 옥과(玉果)로 옮겨갔던 것 같고, 역시 9세손 이석견(李碩堅)의 후계가 성주(星州)에서 경북 영천(永川)의 와촌(瓦村)으로 이거했던 것을 비롯하여 고령 · 금릉 · 칠곡(高靈 · 金陵 · 漆谷) 등지에 흩어져 살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참지공파(參知公派)는 6세손 이종실(李從實)이 정평부사(定平府使)로 좌천되었던 사실과 8세손 이기(李琦)가 정평(定平)으로 유배되었던 사실이 ‘을묘보(乙卯譜)’에 보이고 이 무렵부터 정평 · 함흥(定平 · 咸興) 등지가 세천지(世阡地)로 지켜졌던 점으로 미루어 이곳에 세거하였다고 믿어진다.
그리고 10세손 이천충(李天忠)은 경남 거제(巨濟)로 들어가 아주(鵝洲)에 살게 됨으로써 그 후계(後系)가 이 지역에 정착했던 것 같다.
한편 시중공파(侍中公派)는 5세손 이사분(李思芬) 이래로 충주 · 중원(忠州 · 中原) 등 충북 일원에 자리잡은 것으로 보이며, 6세손 이지활(李智活)이 단종 3년에 벼슬을 버리고 경남 거창(居昌)에 퇴거하여, 자손들이 거창 · 함양(居昌 · 咸陽) 등지에 나뉘어 거주하게 된 것으로 믿어진다.
또한 문렬공 이조년(文烈公 李兆年)의 후계(後系)에서 5세손 이용(李容)이 태조조에 정도전(鄭道傳)의 미움을 사 평북 영변(寧邊)의 오리(梧里)로 유배되었던 것 같고 아들인 이익번(李益蕃)의 대부터 이곳에 정착하여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6세손 이사형(李師衡)의 자손들이 강원도 고성(高城)에 속해 있는 간성(杆城)에 자리잡았던 것 같고, 7세손의 대에 와서 이순년(李舜年)의 자손들이 밀양(密陽)에, 이맹창(李孟昌)의 자손들이 평남 성천군(成川郡)에 각각 정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7세손 이숙순(李叔淳), 8세손 이흥로(李興老) 이래로 그 후손들이 경남 산청 · 남해(山淸 · 南海)와 충북 옥천(沃川)에서 세거해온 것 같다. 이들 지역에 여러 대에 걸쳐 성주이씨(星州李氏)의 묘롱(墓壟)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30년에 이르러, 자손이 번창하여 세거의 범위도 전국 각지로 확대되었으며, 특히 충북 옥천군 동이면(沃川郡 東二面),
전북 정읍군(井邑郡) 일원,
전남 곡성군 목사동면(谷城郡 木寺洞面) ·보성군(寶城郡) 일원,
경북 성주군(星州郡) 일원,
칠곡군 · 금릉군 · 상주군(漆谷郡 · 金陵郡 · 尙州郡) 일원,
경남 산청군 · 남해군(山淸郡 · 南海郡) 일원,
함양군 병곡면(咸陽郡 甁谷面),
평남 성천군(成川郡) 일원,
함남 정평군 정평면(定平郡 定平面) 등지에 많은 자손들이 모여 살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1970년대에는 경북 성주,금릉,고령,달성(星州.金陵,高靈,達城) 등지,
경남 거창,합천,거제,함양(居昌,陜川,巨濟,咸陽) 등지,
전북 전주 · 익산 · 옥구(全州 · 益山 · 沃溝) 등지,
충남 부여 · 논산 · 당진 · 보녕(扶餘 · 論山 · 唐津 · 保寧) 등지,
경기도 안성 · 광주 · 용인(安城 · 廣州 · 龍仁) 등지,
강원도 명주 · 강릉 · 홍천(溟州 · 江陵 · 洪川) 등지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씨족史

을묘보(乙卯譜)’ 서문에는 “성주 이씨(星州 李氏)가 삼한(三韓)의 큰 성씨로 우리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겨 왔다.”는 등의 종세(宗勢)를 자랑하는 귀절이 눈에 띈다.
이를테면 문형(文衡)이 8명, 봉작(封爵)을 받은 이가 11명,상신(相臣)이 15명,또 식읍(食邑)을 받은 분은 5명,부마(駙馬)는 2명, 8세 안에 문과급제자는 75명, 생원과 진사, 그리고 음보(蔭補)로 출사(出仕)한 분은 손으로 꼽을 수 없다는 점 등을 들 수가 있다.
뿐만아니라 원사(院祠)만 하더라도 24우(宇)나 된다고 하면서 성산군지(星山郡誌)에는 “성주(星州)에 다섯 이씨(五李氏)가 있는데 성주이씨(星州李氏)가 가장 현창(顯昌)하다고 했다.”는 내용도 소개하였다.
성주이씨세진록(星州李氏世眞錄)에는 또 이런 말도 있다. “우리 성주 이씨(星州 李氏)는 멀리 신라말의 명신(名臣)인 시조공으로부터 1천여년에 걸쳐 훌륭하고 빛나는 조상들의 공덕으로 면면히 이어왔고 오늘의 번성(繁盛)을 가져 왔다.”
으례 종문(宗門)을 이야기할 때면, 자손의 처지에서 조금은 과장스럽게 표현한다. 어쩌면 그렇게 하는 것이 선대에 대한 후손된 당연한 예의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과거 성주이씨(星州李氏)의 관환(官宦)이나 열력(閱歷), 또 오늘의 씨족세를 감안할 때 오히려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이제 그 관력(官歷)부터 살펴 보자 .

→중시조로 추앙받는 이장경(李長庚)은 이득희(李得禧)의 아들이다.
고려 고종 때 태어나 학문에 정통하였고, 다섯 아들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명성이 자자했다.
특히 손자 이승경(李承慶)이 元나라에 들어가 벼슬이 높았고 큰 공을 세워 농서군공(?西郡公)이라 선칙(宣勅)되었다.


→이백년(李百年)은 호를 묵옹(묵翁)이라 했는데, 이장경(李長庚)의 큰 아들이다.
충렬왕 11년 문과에 올라, 밀직사사(密直司事)를 지냈으며 안유(安裕) 등과 더불어 유교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다고 한다. 정절(貞節)이라 시호(諡號)되었다.


→이천년(李千年)은 요재(樂齋)라 호하였다. 농서군공(?西郡公)의 둘째 아들로 충렬왕 11년 형과 함께 문과에 급제, 봉선대부 전객부령(奉善大夫 典客副令)이 되었을 때 둘째 아들 이승경(李承慶)이 元신분이 되었기에 선칙(宣勅)으로 영북등처행중서성참지정사 농서군공(嶺北等處行中書省參知政事 ?西郡公)에 봉해졌다.
고려 조정에서는 정승(政丞)에 추봉하고 원효(元孝)라 시호(諡號)하였다.
유명한 이여송(李如松) 장군은 그의 7세손이다.

→이만년(李萬年)은 호가 창고(蒼皐)이며 농서군공(?西郡公)의 세째 아들이다.
충렬왕 11년 문과에 올라 견룡(牽龍)이라는 무관직(武官職)을 지낸 뒤 낭장(郞將) 겸 중군지후(中軍祗候)를 역임하면서 큰 도량이 인정되어 시중(侍中)에 추증되었다. 시호(諡號)는 숙헌(肅憲)이다.

이억년(李億年)은 요산재(樂山齋)라 호하였다. 농서군공(?西郡公)의 네째 아들로, 회헌 안유(晦軒 安裕)의 문인(門人)으로 문과에 급제, 개성류수(開城留守)를 지냈다.

→이조년(李兆年)은 농서군공(?西郡公)의 다섯째 아들로, 호는 매운당(梅雲堂)이다.
회헌 안유(晦軒 安裕)의 제자로 17살의 나이로 형들과 함께 문과에 올라, 안남서기(安南書記), 진주목(晋州牧), 사록사(司錄事), 통문서전첨(通文署典籤), 강릉부사(江陵府使), 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 합천치(陜川治) 등을 역임한 뒤 37세 때 비서승(秘書丞)이 되었다.
충숙왕의 복위(復位)에 공을 세워 정당문학(政堂文學), 예문관 대제학(藝文館 大提學)이 되었다.
성근익찬경절(誠勤翊贊勁節)공신이 되어 벽상(壁上)에 도형(圖形)되고 문렬(文烈)이라 시호(諡號)되었고 공민왕 때 성산후(星山侯)로 추증과 함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이승경(李承慶)은 이천년(李千年)의 아들이다.
元나라에서 문과에 합격, 태자첨사(太子詹事가 되었고 어사(御史)를 지낸 뒤 요양성참지정사(遼陽省參知政事)로 올라 많은 공적을 쌓았다.
그리하여 元의 조정으로부터 아버지 이천년(李千年)과 조부 이장경(李長庚)에게 농서군공(?西郡公)이추봉되었다.귀국한 뒤 공민왕조에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고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홍건적을 물리쳤으며 충근경절협모위원공신(忠勤勁節協謀威遠功臣)이 되었으나, 신돈(辛旽)의 간계로 죽음을 당했다.

→이포(李褒)는 이조년(李兆年)의 아들로 벼슬이 벽상 삼중대광 검교문하대중 겸 판선부사(壁上 三重大匡 檢校門下待中 겸 判選部事)가 되고 광정대부(匡正大夫)로서 도첨의평리(都僉議評理)를 지냈다.

→또 이원구(李元具)는 이린기(李麟起)의 아들로 우탁(禹倬)과 더불어 역이학(易理學)을 공부했고, 문과에 올라 대호장군(大護將軍)에 이르고 강릉찰방(江陵察訪) 등을 지낸 뒤 추성좌명공신(推誠佐命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고려조에서 뚜렷한 인물이 된 이인복(李仁復)은 이포(李褒)의 아들이다.
초은(樵隱)이 그의 호다. 19세의 나이로 문과에 올라 예문수찬(藝文修撰) 등을 지낸 뒤 언지제교(言知製敎)가되고 元나라에 들어가 제과(制科)에 합격, 귀국하여 기거주(起居注)가 되었다.
공민왕 8년 상서좌복사 어사대부(尙書左僕射 御史大夫),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첨의평이 삼사우사(僉議評理 三司右使)를 역임했고, ‘금용(金鏞)의 난’ 뒤에 도첨의찬성 겸 우문관대제학(都僉議贊成 겸 右文館大提學)이 되고 공신이 되었다. 흥안군(興安君)에 봉해졌고 문충(文忠)이라 시호(諡號)되었다.

☞.이인임(李仁任)은 그의 아우인데 호는 승엄(勝嚴)이다. 충숙왕 1년 전객사승(典客寺丞)을 거쳐 강릉존무사(江陵存撫使)가 되어 쌍성(雙城)을 정벌 항복받았다. 홍건적을 정토하여 2등공신이 되었고, 재차의 홍건적 침입 때는 왕을 배종(陪從)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어 벽상(壁上)에 도형(圖形)되었다.
공민왕 17년 좌시중(左侍中)을 거쳐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과 서북면도통사(西北面都統使)를 겸하여 동녕부(東寧府)를 토벌, 광평부원군(廣平府院君)에 봉해졌고 우왕책봉(冊封)에 앞장섰으며 친원정책(親元政策)을 지켰다. 임견미(林堅味) 등의 옥사에 연루되었으나, 뒤에 신원(伸寃)되어 문숙(文肅)이라 시호(諡號)되었다.

.이인립(李仁立)도 그의 아우다. 공민왕 3년 문과에 올라 밀직사사.진현관대제학.서경부원수(密直司事.進賢館大提學 · 西京副元帥)가 되었고 고려 국운이 다하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고 말았다.

이포(李褒)의 여섯째 아들은
☞.이인민(李仁敏)으로, 공민왕 9년 문과에 올라 문하평리 겸 대제학 밀직사사, 판개성부사(門下評理 兼 大提學 密直司事, 判開城府事)에 이르렀다. 공양왕 2년 윤이(尹?) 등의 무고사건에 관련되어 이색(李穡) 등과 청주옥(淸州獄)에 갇히기도 했으나 풀려나 조선개국에 공을 세워 추충익대보조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령의정 겸 경연 판리조사감 춘추관사 성산부원군(推忠翊戴補祚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겸 經筵 判吏曹事監 春秋館事 星山府院君)에 추증되었다.

☞.대제학 문충공 이숭인(大提學 文忠公 李崇仁)은 성산군 이원구(星山君 李元具)의 큰 아들로 호는 도은(陶隱)이다.
목은(牧隱: 이 색), 포은(圃隱: 정몽주)과 더불어 고려말 삼은(三隱)으로 일컬어졌다.
일찍이 정도전(鄭道傳)과 함께 목은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던 도은 (陶隱) 숭인(崇仁)은 공민왕(恭愍王) 11년 문과에 급제하여 숙옹부승(肅雍府丞)과 태학교수(太學敎授)로 있으면서 주자학(朱子學)의 소개에 앞장섰다.주요관직을 역임한 후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올라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실록(實錄)을 편수하고, 우왕 때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를 거쳐 서연관 (書筵官)이 되었으나,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으로 경산(京山)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와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에 올랐다.
1392년(태조 1)정몽주가 살해되자 그 일당으로 몰려 유배되었다가 정도전이 보낸 그의 심복 황거정(黃居正)에 의해 배소에서 살해당했다. 도은(陶隱)과 정도전은 목은의 동문으로 다정했던 사이었으나 고려의 국운이 기울고 조선(朝鮮)이 개국됨으로써 도은은 절개를 지켰고 정도전은 새 왕조에 귀부한 변질된 자가 되어 세상에 더없는 앙숙으로 변하였다. 도은이 정몽주의 일당이라 하여 경산(京山)에 귀양갔었는데,
정도전이 그의 심복인 황거정(黃居正)을 도은이 귀양간 고을의 수령으로 보내어 매일같이 잡아다가 매질하게
하였다. 하루에도 곤장 수백대를 때리고는 묶어서 말 위에 얹어 달리게 하여 드디어 인적이 없는 먼곳에서 상처가 짓물러 죽게 하였다.
태종(太宗) 때 황거정(黃居正)이 공훈에 책정되어 직위가 재상의 서열에 올랐었는데, 도은을 죽였다는 말이 임금 귀에 들어가자 태종은 크게 노하여 "이숭인의 문장과 덕망은 내가 사모해온 터이라, 그가 일찍 죽은 것을
한탄하였더니 과연 이놈의 소행이구나"하고는 훈작(勳爵)을 삭제, 서인(庶人)으로 삼고 자손(子孫)은 금고(禁錮)시켰다.태종 1년 복직되고 뒤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 문충(文忠)이라 시호(諡號)되었다.

☞.문경공 이직(文景公 李稷)은 이인민(李仁敏)의 큰 아들로 호는 형재(亨齋)이다.
우왕 12년 16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 밀직사우부언 · 예문제학(密直司右副言 · 藝文提學)을 지냈다.
조선개국에 공헌, 지신사(知申事)가 되고 개국공신 2등이 되어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으며 도승지 · 중추원학토(都承旨 · 中樞院學土)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정종 1년 서북면도순문찰이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로 왜구의 침입을 막았고,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에 올랐다.
2차 王子의 난 때는 태종을 도와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고 병조판서(兵曹判書)로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다녀오기도 했다.
태종 10년 천릉도감제조(遷陵都監提調)로 활약했고 뒤에 성산부원군, 우의정(星山府院君, 右議政)이 되었고 세종의 세자책봉을 반대하다가 星州에 귀양가기도 했다. 세종 4년 영의정(領議政)이 되어 등극사(登極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문경(文景)이라 시호(諡號)되었다.

☞.안성공 이견기(安城公 李堅基)는 이수(李穗)의 아들이다.
세종조에 문과에 급제, 우정언, 지평(右正言, 持平) 등을 거쳐 우승지· 호조참판·충청도관찰사·예문관제학 ·판한성부사(右承旨 · 戶曹參判 · 忠淸道觀察使 · 藝文館提學 · 判漢城府事)를 역임했고,호조판서 · 이조판서(戶曹判書 · 吏曹判書)를 거쳐 우참찬(右參贊)이 되었다가 단종손위(遜位)에 따라벼슬을 버렸고 세조의 여러 차례에 걸친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다. 안성(安城)이라 시호(諡號)된 분이다.

☞.이제(李濟)는 이인립(李仁立)의 큰아들이다. 이성계(李成桂)의 셋째딸과 결혼, 조선 건국에 앞장서 순충좌명개국공신(純忠佐命開國功臣)이 되어 흥안군(興安君)에 봉해졌다. 의흥친군위절도사지겸 서경연사(義興親軍衛節度使知兼 書經筵事)를 거쳐 우군절제사(右軍節制使)에 올랐다.
제 l 차 王子의 난 때 목숨을 잃었는데 세종 3년에 신원(伸寃)되어 경무(景武)라 시호(諡號)되었고 부조묘(不?廟)를 세웠다.

☞.이발(李潑)은 이인립(李仁立)의 둘째 아들로 태종조에 문과, 세종1년 경상감사(慶尙監司)가 되었다.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냈으며 평간(平簡)이라 시호(諡號)되었다.

☞.이지활(李智活)은 이만년(李萬年)의 현손(玄孫),이조 판서 비(비)의 아들 단종(端宗) 때 운봉 현감(雲峯縣監)을 지내다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를 찬탈하자 관직을 버리고 거창(居昌)의 박유산(朴儒山)에 들어가 망월정(望月亭)을 짓고 매일밤 북녘을 바라보며 단종을 사모하는 시(詩)를 짓고 통곡하였다.
-밤마다 이슥토록 임금님을 생각하니(夜夜相思到夜深)
-기우는 달만 님과 나를 비추이네(東來殘月兩鄕心)
-이 원한을 풀어 줄 사람 없어(此時寃恨無人解)
-외로이 산정에 기대어 눈물 흘리네(孤倚山亭淚不禁)
그 후 단종이 영월(寧越)에서 승하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매일 박유산 꼭대기에 올라가 통곡을 하다가 마침내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이사후(李師厚)는 이직(李稷)의 첫째 아들로 한성부윤에 올랐으며,

☞.이사형(李師衡)은 이직(李稷)의 넷째 아들로 호를 감당(監塘)이라 했다.
성품이 온화하고 겸손, 효도와 덕기(德器)가 컸다고 한다. 단종 손위(遜位)를 당해 벼슬을 버리고 화진포(花津浦)로 퇴거하였다. 벼슬은 숭록대부 이조판서 홍문관 대제학(崇祿大夫 吏曹判書 弘文館 大提學)에 이르렀고, 간성군(杆城君)에 봉해졌으며 충열(忠烈)이라 시호(諡號)되었다.

☞.안성공 이견기(安城公 李堅基)는 이수(李穗)의 아들이다.
세종조에 문과에 급제, 우정언, 지평(右正言, 持平) 등을 거쳐 우승지 · 호조참판 · 충청도관찰사 · 예문관제학 ·판한성부사(右承旨 · 戶曹參判 · 忠淸道觀察使 · 藝文館提學 · 判漢城府事)를 역임했고, 호조판서 · 이조판서(戶曹判書 · 吏曹判書)를 거쳐 우참찬(右參贊)이 되었다가 단종손위(遜位)에 따라 벼슬을 버렸고 세조의 여러 차례에 걸친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다. 안성(安城)이라 시호(諡號)된 분이다.

☞.이정녕(李正寧)은 이사후(李師厚)의 둘째 아들로서 세종 7년에 태종의 딸 숙혜옹주(淑惠翁主)와 결혼, 부마(駙馬)가 되어 성원위 자헌대부(星原尉 資憲大夫)에 제수되었다.

☞.이집(李집)은 장절공 이정녕(章節公 李正寧)의 큰아들이다.
성종조에 돈녕부정, 봉상정, 황해도관찰사, 사간원 대사간, 이조참의(敦寧府正, 奉常正, 黃海道觀察使, 司諫院 大司諫, 吏曹參議)에 이르렀다. 연산조에 대사헌 이조참판, 경기도관찰사, 호·공양조판서(大司憲 吏曹參判, 京畿道觀察使, 戶·工兩曹判書)가 되어 춘추관사 세자좌빈객(春秋館事 世子左賓客)을 겸했다.연산조에 삭직(削職)되기도 했으나, 중종반정으로 재기용,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렀다.
뒤에 공숙(恭肅)이라 시호(諡號)되었다.

☞.그 밖의 인물로 연산군(燕山君)이 그의 가기(歌妓: 노래 잘하는 기생)를 위해 가시(歌詩)를 지어 바치라고 했을 때 최초로 거절하고 성덕(聖德)을 우려한다는 상소를 올렸던 자건(自建)은 이것이 탈이 되어 곤장을 맞고 선산(善山)으로 유배당했다.
그 죄상으로 보아 복직이 가망없다고 생각한 선산의 수령은 군졸을 데리고 가서 자건의 우소(寓所)를 포위하고는 그를 묶어서 꿇어 앉히곤 직접 매질까지 하였다.
그 후 자건이 황해감사(黃海監司)가 되었을 때 이 선산의 수령은 안악군수(安岳郡守)로 있다가 그 저보(邸報)를 보고 수령직을 사임하려 하자 자건은 안악으로 찾아가 잘 달래어 머물러 있게 했고, 치산(治山)에 소홀하여 무척 가난하게 살면서 녹미(祿米)를 아껴 조금씩 술을 빚어먹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고 한다.


☞.이성량(李成樑)은 이경(李涇)의 아들이다. 요동철령위학생원(遼東鐵嶺衛學生員)을 거쳐 지휘첨사(指揮僉事)가 되었고 태보 겸 태자태보(太保 겸 太子太保)를 지낸 뒤 봉천익위 선력무신녕원백(奉天翊衛 宣力武臣寧遠伯)에 봉해졌다.

☞.충렬공 이여송(忠烈公 李如松)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드물 것이다.
그런데 그 분이 성주이씨(星州李氏)의 후손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 역시 드물 것이다.
그는 요양성 참지정사 이승경(遼陽省 參知政事 李承慶)의 후손으로 이성량(李成樑)의 아들이다.
진사(進士)를 거쳐 상주국 광록대부(上柱國 光祿大夫)에 오르고 제독진수 요계보정 산동등처방모어왜군무총병 태자태보 중군도독 부좌도독 소보녕원백(提督鎭守 遼?保定 山東等處防侮禦倭軍務摠兵 太子太保 中軍都督 府左都督 少保寧遠伯)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제독(提督)으로 출전, 큰 공을 세웠다.

☞.이여매(李如梅)는 그의 넷째 아우로 황명진수요동 총병관 도독 첨사(皇明鎭守遼東 摠兵官 都督 僉事)를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는 부총병(副摠兵)으로 맏형 제독공, 중형중협대장공 이여백(提督公, 仲兄中協大將公 李如栢)과 더불어 큰 공을 세웠다.

☞.문경공 이항(文敬公 李恒)은 호가 일재(一齋)이다.
이자영(李自英)의 아들로 명종조에 경명행수(經明行修)의 선비를 뽑을 때 수석으로 합격, 사정전(思政殿)에 들어가 왕에게 진학(進學)과 정치를 논했다.
선조조에 의빈경력 · 선공부정 · 사옹정(儀賓經歷 · 繕工副正 · 司饔正)을 거쳐 장령(掌令)이 된 뒤 다시 장악정(掌樂正)에 임명되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순조 때 문경(文敬)이라 시호(諡號)되었다.

☞.이충건(李忠健)은 세종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이직(李稷)의 현손(玄孫)이며 정자공 윤탁(正字公 允濯)의 아들이다.
일찍이 조광조(趙光祖)의 문하(門下)에 들어가 학문(學問)을 닦아 중종 10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 수찬(修撰)과 교리(校理)를 역임한 뒤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냈다.
이 때 남곤 심정(南袞 沈貞) 등의 미움을 사 배척을 당하였으나 뒤에 호당(湖堂)에 뽑혀 문명(文名)을 남겼다.그의 아우 이문건(李文楗)도 중형(仲兄)인 충건(忠楗)과 함께 조광조(趙光祖) 문하에서 수학(修學)하였고 중종 14년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스승인 조광조(趙光祖)가 죽게 되었을 때 형인 충건(忠楗)과 함께 조문(弔問)하고 통곡(痛哭)하였으며 중종 23 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정원 좌승지겸 경연참찬관 사간원정언 병조좌랑(承政院 左承旨겸 經筵參贊官 司諫院正言 兵曹佐郞) 등을 지냈으며 을사사화(乙巳士禍) 때는 대윤(大尹)으로 몰려 성주(星州)에 유배(流配)되었다. 그는 성품이 순후하고 청백(淸白)하기로 유명했으며 글씨에 뛰어났고 당대의 석학 이황, 조식, 이이(碩學 李滉, 曺植, 李珥) 등과 주고받은 내용을 엮은 ‘묵휴창수(默休唱酬)’가 전해온다.

☞.이조판서 이욱(吏曹判書 李稶)은 이의로(李義老)의 아들이다. 선조조에 문과에 올라 훈련도감사(訓練都監師)가 되고 뒤에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 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예조좌랑 승정원부승지(禮曹佐郞 承政院副承旨)에 이어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과 춘추관 수찬관(春秋館 修撰官)이 되었고, 광해군 9년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있을 때 관(官)에서 별세했다.
성주이씨족보(星州李氏族譜)를 간행하기도 했다.

☞.이준구(李俊구)는 이언직(李彦直)의 아들로 인조 15년 문과에 올라 정언 · 지평(正言 · 持平)을 거치고 효종 때는 인조실록(仁祖實錄)편찬에 참여했다.
이른바 제1차 예송(禮訟)사건 때는 송시렬(宋時烈)과 함께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했고, 예조참판 동지춘추(禮曹參判 同知春秋)로 있을 때인 현종 15년 제2차 예송(禮訟)사건 때는 예관(禮官)으로 대공설(大功說)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파직(罷職)되었다. 이름난 청백리(淸白吏)였다고 한다.

☞.공조판서 정헌공 이광적(工曹判書 靖憲公 李光迪)은 이세미(李世美)의 아들이다. 효종 7년 문과에 올라, 승정원 주서(承政院 注書)와 전적(典籍), 예병조좌랑(禮兵曹佐郞)을 거쳤다.
현종 5년 호조정랑(戶曹正郞)이 되었다가 뒤에 병조정랑 · 사헌부 지평(兵曹正郞 · 司憲府 持平)을 지냈다.
숙종 1년 영월군수(寧越郡守)로 장릉(莊陵)을 정성들여 모시다 파직되기도 했다.
다시 복귀해서 공조참의(工曹參議)와 형조참의 · 승정원승지(刑曹參議 · 承政院承旨)를 거쳐 안변부사(安邊府使)로 나갔다. 숙종 33년 지중추(知中樞)로 기사(耆社)에 들어갔고 뒤에 공조판서(工曹判書)가 되었다.
정헌(靖憲)이라 시호(諡號)되었다.

☞.성주이씨(星州李氏)의 인물 중에 효자로 알려져 정려(旌閭)된 분이 이몽뢰(李夢賚)이다 .
철종 2년 유생(儒生) 74명의 발의로 상순상서(上巡相書)를 올려 효자정각(孝子旌閣)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대사헌 학암공 이응협(大司憲 鶴庵公 李應協)은 영조조에 문과에 올라 승정원 주서 · 사헌부교수(承政院 注書 · 司憲府敎授)와 지평(持平)을 역임했다. 그 뒤 홍문관교리 경연관춘추관 겸 홍문관 응교(弘文館校理 經筵館春秋館 겸 弘文館 應敎)를 거쳐 도승지(都承旨)와 오조윤(五曹尹)을 여러 차례 역임한 뒤 사헌부 대사헌(司憲府 大司憲)이 되었다. 특히 그는 성주이씨세보(星州李氏世譜) 7권을 편찬하였다.

☞.성주이씨(星州李氏)의 역대인물 중 학문으로 이름을 높인 이는 후산공 이도복(厚山公 李道復)이다.
최익현(崔益鉉)문하에서 공부했고, '존화록(尊華錄)' 등 여러 권의 책을 짓기도 했다.
특히 '부수오적문(復?五賊文)'은 유명하고 융희황제의 승하를 슬퍼하여 지은 '자규사(子規辭)'는 널리 알려진 명문(名文)이라 한다.

성주이씨(星州李氏)의 인물은 근세에 와서도 그치지 않았다.

☞.옥파 이종일(沃坡 李鍾一)은 경성신문(京城新聞)의 논설(論說)로, 황성신문(皇城新聞) 등의 논객으로 활약했고, 천도교의 지하신문(地下新聞)인 조선 독립신문(朝鮮 獨立新聞)을 창간했다.
유명한 3 . 1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도 그가 경영하는 인쇄소에서 찍은 것이다.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복장(建國功勞勳章 複章)이 추서되고, 국가유공자로 추서 받았다

☞.황산 이종린(凰山 李鍾麟)은 문필가로도 유명했지만, 항일민족언론투쟁(抗日民族言論鬪爭)에 선도적 역할을 했는데 조선독립신문(朝鮮獨立新聞)의 간행으로 3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67년 국민훈장 무궁화장(國民勳章 無窮花章)을 추서 받고, 국가유공자로 추서받았다.

☞.경암 이관(敬菴 李瓘)은 천도교령 손병희(天道敎領 孫秉熙)의 명을 받아 이종일(李鍾一) 등과 3 · 1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기초한 분이며 1990년 8월 15일 건국공로훈장 애족장(建國功勞勳章 愛族章)을 추서 받았으며, 국가유공자로 추서 받았다.

그 밖의
☞.죽헌 이교재(竹軒 李敎載)는 경남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금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제공하고, 국내비밀결사를 통해 애국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해방 후 1963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단장(建國功勞勳章 單章)을 수여받고,국가유공자로 추서 받았다.

☞.호암 이준용(湖庵 李俊容)은 강원도 춘천(春川) 일대에서 3 . 1 독립만세 운동의 선봉에 서고, 사재를 털어 독립운동 자금으로 제공하는등 공로로 1992년 3월 1일 건국훈장 애족장(建國功勞勳章 愛族章)을 추서 받고, 1993년 6월 1일 국가유공자로 추서받았다.

☞.연소 이지한(蓮昭 李芝漢)은 경북 예천(醴泉)일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일제에 항거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한 공으로 1993년 8 월 15 일 건국공로훈장 애족장(建國功勞勳章 愛族章)을 수여 받고 국가유공자로 추서 받았다.

 

항렬표(行列表)

세(世) 20 21 22 23 24 25 26 27
백파(伯派) ○秀 ○煥 圭○ ○鉉 ○永 木部○ ○火 土○
중계파
(仲季派)
容○ 敎○ 鍾○ ○淳 相○ ○熙 ○在 ○鉉
火○ ○土 ○金 ○洙 秉○ ○燮 圭○ ○錫

 
세(世) 28 29 30 31 32 33 34 35
백파(伯派) ○金 水○ ○木 火○ 土○ 金○ ○水 木○
중계파
(仲季派)
澤○ ○植 炳○ ○基 鈺○ ○洪 柄○ ○炯
永○ ○根 炫○ ○培 鎔○ ○洛 桂○ ○烈

 

역대 주요 인물

[등과(登科).음사인명(蔭仕人名)]

▲고려조

문과(文科)
백년(百年)(충렬왕 11년)(忠烈王 11년)(밀직사서 시 정절)(密直司事 諡 貞節))
천년(千年)(충렬왕 11년)(忠烈王 11년)(참지정사 시 원효 농서군공추봉(參知政事 諡 元孝 ?西郡公追封)
만년(萬年)(충렬왕 11년)(忠烈王 11년))(문하시중 시 숙헌(門下侍中 諡 肅憲)
억년(億年)충렬왕 11년)(忠烈王 11년)(개성유수 호 요산재(開城留守 號 樂山齋)
조년(兆年)(충렬왕 11년)(忠烈王 11년)(정당문학 시 문열)(政堂文學 諡 文烈)
인기(麟起)(충렬왕 23년)(忠烈王 23년)(평양윤 성산군봉작(平壤尹 星山君封爵)
승경(承慶)(원나라 을과)(元나라 乙科)(평장사요양성참정 농서군공추봉(平章事遼陽省參政 ?西郡公追封)
원구(元具)(문과급제)(대호군 성신군추봉 호 가정(大護軍 星山君追封 號 稼亭)
인복(仁復)(충숙왕 13년)(忠肅王 13년)(문하시중 시 문충)(門下侍中 諡 文忠)
인미(仁美)(문과급제)(예의판사(禮儀判事)
인립(仁立)(공민왕 3년)(恭愍王 3년)(대제학 서경부원수 성산군(大提學 西京副元帥 星山君)
인민(仁敏)(공민왕 9년)(恭愍王 9년)(대제학 성산부원군 증영의정)(大提學 星山府院君 贈領議政)
숭인(崇仁)(공민왕 11년)(恭愍王 11년)(대제학 호 도은 시 문충)(大提學 號 陶隱 諡 文忠)
직(稷)(우왕 12년)(禑王 12년)(영의정 시 문경)(領議政 諡 文景)

▲조선조

문과(文科)
이 비(李 ?)(판서(判書))
이견기(李堅基)(대제학(大提學))
이함녕(李咸寧)(교리(校理))
이경현(李敬賢)(소윤(少尹))
이경화(李敬和)(헌납(獻納))
이윤손(李尹孫)(목사(牧使))
이계창(李繼昌)(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이계공(李季恭)(학유(學諭))
이문흥(李文興)(대사성(大司成))
이집(李집)(찬성(贊成))
이자건(李自健)(형조참판(刑曹參判))
이자견(李自堅)(호조판서(戶曹判書))
이자화(李自華)(예조참의(禮曹參議))
이운비(李云비)평사(評事))
이윤탁(李允濯)(승정(承正))
이윤식(李允湜)(부사(府使))
이공색(李公穡)(사복사정(司僕寺正))
이충건(李忠楗)(이랑(吏郞))
이구(李構)(목사(牧使))
이문건(李文楗)(승지(承旨))
이계정(李繼禎)(전적(典籍))
이휘(李煇)(수찬(修撰))
이섬(李火閏)(이조정랑(吏曹正郞))
이덕응(李德應)(한림학사(翰林學士))
이언충(李彦忠)(대사헌(大司憲))
이창(李昌)(판사(判事))
이현배(李玄培)(부윤(府尹))
이함(李誠)(집의(執義))
이조(李晁)(공조좌랑(工曹佐랑))
이사겸(李思謙)(승지(承旨))
이응호(李應虎)(감정(監正))
이렴(李濂)(성권(成權))
이유함(李惟?)(도수(都守))
이형원(李馨遠)(사간(司諫))
이상길(李常吉)(공판(工判))
이욱(李욱)(이조판서(吏曹判書))
이일장(李日章)(현감(縣監))
이정현(李廷賢)(정자(正字))
이담(李譚)(가예(可藝))
이계선(李繼先)(형조참의(刑曹參議))
이직(李稙)(승지(承旨))
이경(李坰)(대기지사(大耆知事))
이장(李樟)(성균박사(成均博士))
이휴(李休)(전적(典籍))
이준구(李俊구)(예조참의(禮曹參議))
이창일(李昌一)(성박(成博))
이형천(李亨千))(병좌부사(兵佐府使))
이광적(李光적)(공조판서(工曹判書))
이태서(李台瑞)(문과(文科))
이만영(李萬榮)(찰방(察訪))
이광정(李光廷)(승권(承權))
이태기(李泰祺)(현감(縣監))
이세근(李世瑾)(대헌감사(大憲監司))
이우춘(李遇春)(현감(縣監))
이정화(李正華)(문과(文科))
이희춘(李喜春)(예조정랑(禮曹正郞))
이저(李蓍)(사간(司諫))
이세진(李世璡)(양사승지(兩司承旨)
이규휘(李奎徽)(장령(掌令))
이인호(李仁好)(장령(掌令))
이형거(李衡擧)(첨정(僉正))
이응협(李應協)(대사헌(大司憲))
이춘복(李春馥)(주부(主簿))
이가우(李嘉遇)(승지(承旨))
이규덕(李奎德)(별검(別檢))
이갑룡(李甲龍)장통(掌通))
이태우(李泰宇)(문과(文科))
이사겸(李思謙)문과(文科))
이지용(李志容)(문과(文科))
이병렬(李秉烈)(문과(文科))
이장후(李章?)문과(文科))
이홍원(李弘源)(문과(文科))
이상원(李相遠)(문과(文科))
이약렬(李若烈)(문과(文科))
이기준(李騏俊)(문과(文科))
이현묵(李賢묵)(문과(文科))
이현(李?)(문과(文科))
이명순(命純)(문과(文科))
이득열(李得烈)(문과(文科))
이우백(李佑伯)(문과(文科))
이화(李화)(문과(文科))
이병영(李秉瑩)(문과(文科))
이병흠(李秉欽)(문과(文科))
이희준(李羲俊)(문과(文科))
이광수(李光洙)(문과(文科))
이교인(李교寅)(참판(參判))
이응모(李膺模)(문과(文科))
이승덕(李承德)(문과(文科))
이정조(李鼎祚)(문과(文科))
이종률(李鍾律)(승지(承旨))
이기선(李箕善)(문과(文科))
이우(李)(문과(文科))
이댁신(李宅臣)(장령(掌令))
이동기(李東基)(문과(文科))
이택환(李宅煥)(사간원좌정언(司諫院左正言))


[관직.음사인명(官職.蔭仕人名)]

이순유(李純由)(신라상신(新羅相臣))
이충경(李沖京)(참봉(參奉))
이효참(李孝參)(호장(戶長))
이돈문(李敦文)(호장(戶長))
이득희(李得禧)(호장(戶長))
이장경(李長庚)(경산부원군 농서군공(京山府院君 ?西郡公))
이백년(李百年)(밀직 시 정절 (密直 諡 貞節)
이천년(李千年)(참지 시 원효(參知 諡 元孝))
이만년(李萬年)(시중 시 숙헌(侍中 諡 肅憲))
이억년(李億年)(유수 호 요산재(留守 號 樂山齋))
이조년(李兆年)(성산후 호 매운당 시 문열(星山侯 號 梅雲堂 .諡 文烈))
이인기(李麟起)(평양윤(平壤尹))
이여경(李餘慶)(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이승경(李承慶)(평장사중국요양성참정(平章事中國遼陽省參政))
이태보(李台寶)(삼중대광도좌사사(三重大匡都佐司事))
이태성(李台成)(밀직사사(密直司事))
이포(李褒)(시중 .시 경원(侍中 .諡 敬元))
이원구(李元具)(대호군 성산군(大護軍 星山君))
이인복(李仁復)(문하시중 시 문충)(門下侍中 諡 文忠))
이인임(李仁任)(문하시중 광평부원군 시 문숙(門下侍中 廣平府院君 諡 文肅))
이인미(李仁美)(예의판사(禮儀判事))
이인립(李仁立)(밀직사사진현관대제학(密直司事進賢館大提學))
이인민(李仁敏)(성산부원군 대제학(星山府院君 大提學))
이 영(李 英)(지휘첨사(指揮僉事))
이득방(李得芳)(판서(判書))
이숭인(李崇仁)(대제학 호 도은 시 문충(大提學 號 陶隱 諡 文忠))
이숭문(李崇文)(판서(判書))
이사분(李思芬)(좌군도총제(佐軍都摠制))
이 비(李 ?)(이조판서(吏曹判書))
이 환(李 ?)(대호군(大護軍))
이 제(李 濟)(우군절제사 시 경무(右軍節制使 諡 景武))
이 발(李 潑)(병조판서 시 평간(兵曹判書 諡 平簡))
이 직(李 稷)(영의정 시 문경공(領議政 諡 文景))
이 수(李 穗)(동지총제(同知摠制))
이차약(李次若)(군수(郡守))
이지활(李智活)(증 이조판서(贈 吏曹判書))
이 윤(李 潤)(현감(縣監))
이 유( 李 洧)(이참(吏參))
이사후(李師厚)(한성판윤(漢城判尹))
이사원(李師元)(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副使))
이사순(李師純)(공조참판(工曹參判))
이사형(李師衡)(이조판서(吏曹判書))
이견기(李堅基)(이조판서 시 안성(吏曹判書 諡 安城))
이처화(李處和)(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이정녕(李正寧)(성원위 시 장절(星原尉 諡 章節))
이계분(李繼芬)(군수(郡守))
이맹창(李孟昌)(도원수(都元帥))
이영분(李永?)(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이성량(李成樑)태부(太傅))
이지번(李之蕃)(군수(郡守))
이신행(李愼行)(전라도사(全羅都事))
이자견(李自堅)(호조판서(戶曹判書))
이자건(李自健)(대사헌(大司憲))
이자화(李自華)(예조참판(禮曹參判))
이자상(李自商)(병조판서(兵曹判書))
이집(李집)(이조판서 .시 공숙(吏曹判書 諡 恭肅))
이 의(李 誼)(대사헌 시 순정(大司憲 諡 純貞))
이 전(李 詮)(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
이윤손(李尹孫)(목사(牧使))
이여송(李如松)(제독 시 충렬(提督 諡 忠烈))
이여매(李如梅)(도독첨사(都督僉事))
이계량(李繼良)(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이 주(李 湊)(참찬(參贊))
이 창(李 昌)(자감정(軍資監正))
이 담(李 曇)( 만호(萬戶))
이 조(李 晁)(전중어사(殿中御史))
이 항(李 恒)(사옹정 시 문경(司饔正 諡 文敬))
이운거(李云?)(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
이운기(李云기)(증이조참의(贈吏曹參議))
이윤탁(李允濯)(부정자(副正字))
이산우(李山佑)(사복(司僕))
이희안(李希顔)(부사직(副司直))
이문흥(李文興)(대사성(大司成))
이충건(李忠楗)(교리(校理))
이문건(李文楗)(승지(承旨))
이 유(李 維)(학자(學者))
이 격(李 格)(첨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이숙주(李淑疇)(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官))
이대성(李大成)(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이광후(李光後)(효자(孝子))
이창후(李昌後)(효자(孝子))
이덕응(李德應)(한림주서(翰林注書))
이옥립(李玉立)(형조좌랑(刑曹佐郞))
이언충(李彦忠)(대사헌(大司憲))
이 휘(李 輝)(경연부수찬(經筵副修撰))
이 춘(李 春)((榮中) 용양위부사과(龍양衛副司果))
이 욱(李 稶)(이조판서(吏曹判書))
이 담(李 譚)(세자사부(世子師傅))
이 구(李 構)(검열(檢閱))
이일장(李日章)(현감((縣監))
이 성(李 珹)(절신(節臣))
이현배(李玄培)(도승지(都承旨))
이원배(李元培)(사재감첨정(司宰監僉正))
이중형(李重亨)(호 이요당(號 二樂堂))
이극개(李克愷)(상호군(上護軍))
이 축(李 軸)(훈련원정(訓鍊院正))
이윤현(李胤玄)(효자(孝子))
이윤걸(李胤杰)(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
이준구(李俊耉)(예조참판(禮曹參判))
이 필(李 弼)(수문장(守門將))
이 단(李 端)(직장(直長))
이언의(李彦儀)(의사(義士))
이광석(李光錫)(직랑 학자(直郞 學者))
이지용(李志容)(정언 문신(正言 文臣))
이광적(李光迪)(공조판서 시 정헌(工曹判書 諡 靖憲))
이득운(李得雲)(의사(義士))
이지선(李祗先)(刑曹參議))
이 숙(李 肅)(의사(義士))
이봉령(李鳳齡)(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이갑룡(李甲龍)(장령(掌令))
이몽뢰(李夢賚)(효자(孝子))
이만령(李萬齡)(진사찰방(進士察訪))
이응협(李應協)(대사헌(大司憲))
이기서(李麒瑞)(효자(孝子))
이가우(李嘉遇)(호조참의(戶曹參議))
이우빈(李佑贇)( 진사 학자(進士 學者))
이 관(李 瓘)(학자 독립운동가(學者 獨立運動家))
이도복(李道復)(학자(學者))
이한진(李漢鎭)(감역 서예가(監役 書藝家))
이동규(李東奎)(효자(孝子))
이기섭(李箕燮)(효자(孝子))
이민복(李敏馥)(효자(孝子))
이택징(李澤徵)(공조참의(工曹參議))
이교재(李敎載)(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이면화(李冕和)(통정대부(通政大夫))
이종일(李鍾一)(국문학자 독립유공자(國文學者 獨立有功者))
이종린(李鍾麟)(독립운동가 건국유공자(獨立運動家 建國有功者))
이준용(李俊容)(독립유공자(獨立有功者))
이지한(李芝漢)(독립유공자 獨立有功者))
이택환(李宅煥)(사간원좌정언(司諫院左正言)


[조선조 급제자 정록]

견기(堅基)(世宗1년.式年試.進士)
함녕(咸寧)(世宗17년.式年試.乙科)
경현(敬賢)(世宗17년.式年試.丙科)
경화(敬和)(世宗17년.式年試.進士)
윤손(尹孫)(端宗2년.增廣試.丙科)
계창(繼昌)(端宗2년.增廣試.丙科)
계공(季恭)(世祖11년.式年試.丁科)
문흥(文興)(睿宗1년.秋場試.丙科)
집(成宗10년.別試.乙科)
자건(自健)(成宗14년.式年試.乙科)
자견(自堅)(成宗17년.式年試.乙科)
자화(自華)(燕山2년.式年試.丙科)
운비(云비)(燕山2년.式年試.丙科)
윤탁(允濯)(燕山7년.式年試.丙科)
윤식(允湜)(燕山12년.別試.丙科)
공장(公檣)(中宗10년.別試.丙科)
충건(忠楗)(中宗10년.別試.丙科)
구(構)(中宗14년.式年試.丙科)
문건(文楗)(中宗23년.別試.丙科)
계정(繼禎)(中宗23년.別試.丙科))
삼준(三俊)(中宗23년.式年試.丙科-간성이씨로성주에입적)
휘(煇)(中宗38년.式年試.丙科)
덕응(德應)(中宗39년.別試.丙科)
섬(中宗39년.別試.丙科)
언충(彦忠)(明宗1년.增廣試.丙科)
창(昌)(明宗4년.式年試.甲科)
현배(玄培)(明宗17년.別試.丙科)
함(?)(宣祖?位.式年試.丙科)
조(晁)(宣祖?位.式年試.丙科)
사겸(思謙)(宣祖7년.別試.丙科)
응호(應虎)(宣祖9년.別試.丙科)
염(濂)(宜祖23년.增廣試.丙科)
유함(惟?)(宜祖24년·別試.甲科)
형원(馨遠)(宣祖32년.庭試.乙科)
상길(尙吉)(宣祖18년.式年試.甲科)
욱(稶)(宣祖32년.別試.丙科)
일장(日章)(光海1년.增廣試.乙科)
정현(廷賢)(光海6년.別試.丙科)
담(譚)(光海6년.全州別試.丙科)
계선(繼先)(光海7년.式年試.乙科)
직(稙)(光海10년.庭試.甲科)
경(坰)(光海21년.改試.丙科)
장(樟)(仁祖5년.式年試.乙科)
경승(慶承)(仁祖5년.式年試.丙科-간성이씨로성주에입적)
휴(休)(仁組12년.別試.丙科)
태서(台瑞)(仁祖23년.別試.丙科)
준구(俊구)(仁祖15년.庭試.乙科)
창일(昌一)(仁祖27년.別試.乙科)
형천(亨千)(孝宗5년.式年試.丙科)
광적(光迪)(孝宗7년.別試.丙科)
연(演)(孝宗7년.別試.丙科)
승수(承須)(中宗11년.式年試.丙科)
만영(萬榮)(顯宗1년.增廣試.丙科)
광정(光廷)(顯宗1년.增廣試.丙科)
태기(泰祺)(顯宗4년.式年試.丙科)
세근(世瑾)(肅宗22년.庭試.乙科)
우춘(遇春)(肅宗28년.式年試.丙科)
정화(正華)(肅宗34년.式年試.丙科)
희춘(喜春)(肅宗39년.增廣試.丙科)
저(箸)(肅宗45년.別試.丙科)
규휘(奎徽)(景宗3년.式年試.丙科)
세진(世璡)(英祖1년庭試乙科)
인호(仁好)(英祖9년.式年試.丙科)
형거(衡擧)(英祖11년.式年試.丙科)
응협(應協)(英祖12년.庭試.丙科)
택징(澤徵)(英祖14년.式年試)
춘복(春馥)(英祖29년.式年試.丙科)
가우(嘉遇)(英祖32년.庭試.甲科)
규덕(奎德)(英祖35년.式年試.丙科)
갑룡(甲龍)(英祖38년.式年試.丙科)
태우(泰宇)(英祖38년.式年試.丙科)
홍원(弘源)(正祖2년.式年試.丙科)
경신(敬臣)(正祖6년.咸鏡道別試.丙科-간성이씨로성주에입적)
지용(志容)(正祖13년.式年試.丙科)
병렬(秉烈)(正祖16년.式年試.乙科)
장후(章?)(正祖19년.慶庭試.丙科)
상원(相遠)(純祖3년.增廣試.丙科)
약렬(若烈)(純祖4년.式年試.甲科)
기준(騏俊)(純祖5년.別試.丙科)
현묵(賢묵)(純祖7년.式年試.丙科)
현(?)(純祖7년.別試.丙科)
명순(命純)(純祖10년.式年試.丙科)
득열(得烈)(純祖10년.式年試.乙科)
우백(佑伯)(純祖22년.式年試.丙科)
화(純祖22년.式年試.丙科)
희준(羲俊)(憲宗2년.庭試.丙科)
광수(光洙)(憲宗9년.式年試.丙科)
교인(교寅)(憲宗11년.庭試.丙科)
응모(膺模)(哲宗3년.式年試.丙科)
승덕(承德)(哲宗6년.式年試.丙科)
정조(鼎祚)(哲宗6년.庭試.乙科)
종률(鍾律)(哲宗6년.庭試.丙科)
기선(箕善)(哲宗13년.庭試.丙科)
우(哲宗13년.庭試.丙科)
택신(宅臣)(高宗13년.式年試.丙科)
동기(東基)(高宗16년.庭試.丙科)
택환(宅煥)(高宗19년.增廣試.丙科)


[벌열(閥閱)]

●상신(相臣)
-이직(李稷)(태종조.영의정(領議政))
●공신(功臣)
-이제(李濟)(태조조.개국1등공신(開國1等功臣))
-이직(李稷)(태조조.개국3등공신(開國3等功臣).태종조2차왕자난4등공신(王子亂4等功臣))
-이식(李軾)(중종조.중종반정3등공신(中宗反正3等功臣))
●호당(湖堂)
-이충건(李忠楗)(중종조)
●청백리(淸白吏)
-이준구(李俊구)(仁祖朝 禮參)
●절의(節義)
-이문건(李文楗)(명종조.을사사화(乙巳士禍)),
-이씨(李氏)(군자감판관 금선경(軍資監判官 金善慶)의 처, 임진왜란 순의제인(壬辰倭亂 殉義諸人)).
●문집(文集)
-초은집(樵隱集-이인복(李仁復)
-도은선생시집(陶穩先生詩集-이숭인(李崇仁)
-형재시집(亨齋詩集)(이직(李稷))
-일재집(一齋集)(이항(李恒))
-소송집(小松集)(이지용(李志容))
-월포집4권(月浦集4권)(이우빈(李佑贇)).

[커버 · 족보의 재발견]

숨겨진 한국사 족보서 찾다
이여송은 한국계… 유학사 연구에도 단서 제공
씨족의 병력도 드러나 유전병 예방에 도움도


 
 

 
 

 
 

 
 

 

조선조 1850년 무렵부터 1900년까지 전국적으로 사망 인구가 급증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 기간에 전염병이 극심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전염병의 이동 경로를 보자. 외국인 선교사, 상인 등의 이동에 따라 외래병이 서울에서 창궐한 경우 위로는 황해도, 아래로는 충남까지 확산되는데 충북 대다수 지역은 빠져 있다. 그 후 전염병은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다 호남으로 내려간 다음 북상해 평안도로 옮아가고 다시 내려와 경상도에 퍼진다. 이후 강원도로 북상한 전염병은 평안북도까지 올라갔다가 강원도로 내려와 머물다 북상하지만 함경북도 일부에서 멈춘다.

현대 의학이 등장하기 전인 조선 시대에 전염병의 발생과 이동 경로는 역학구조를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지만 좀처럼 기록을 찾기 어렵다. 그런데 한국만의 독창적인 족보(族譜)가 그러한 자료를 풍부하게 전해준다. 씨족의 족보에서 특정 기간에 부자, 부부 등 여러 사람이 동시에 사망하는 경우가 지역과 시기에 차이를 두고 나타났던 것이다.

족보 전문출판사 ‘가승미디어’의 이병창(53) 사장은“족보를 오랜 기간 다루다보니까 몇몇 씨족의 족보에서 갑자기 여러 사람이 동시에 사망하는 기간을 발견할 수 있는데 특히 1850년 무렵에서 1900년까지의 경우 평균 나이가 마흔 살을 넘기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조선왕조실록에는 그 기간에 전염병이 극심했다는 기록이 있다. 과거 본관이 거주지와 겹친다는 점을 감안하면 전염병의 분포와 확산 경로를 족보 연구를 통해 알아낼 수 있다는 게 이 사장의 주장이다.

족보 전문출판사 ‘엔코리안(www.n-korean.com)’가 올해 초 전자족보 형태로 제작한 신안 주씨(新安 朱氏) 대동보(大同譜: 가장 넓은 범위의 족보로 같은 시조 아래 각각 다른 계파와 본관을 갖고 있는 씨족을 함께 수록)에 따르면 수록 인원 23만313명 중 남자는 15만6,646명(68%)으로 여자 7만3,667명(32%)보다 월등히 많다.

문중 구성원의 출생률은 1~3월에 가장 높게 나타났으며(평균 9.35%), 4~5월이 가장 낮았다(평균 7.66%). 사망률은 1~3월이 가장 높았고(평균 9.25%), 6월이 6.78%로 가장 낮았다.

나주 임씨(羅州 林氏), 선산 김씨(善山 金氏), 삼척 심씨(三陟 沈氏), 이천 서씨 공도공파(利川 徐氏 恭度公波) 문중의 경우도 출생률과 사망률이 모두 1~3월이 가장 높게 나타났다.

반면 장흥 임씨(長興 任氏) 문중은 출생률은 1월, 사망률은 10월이 각각 가장 높게 나타났으며 조양 임씨(兆陽林氏)는 출생률이 1월에, 사망률은 5월이 가장 높았다.

엔코리안 최용석(38) 대표는 “족보에는 문중에 따라 출생과 사망이 특정 기간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임신 시기에 따라 아들과 딸의 출생률에도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것이 통계학적 의미를 가질 경우 의학적으로 접근하면 문중마다의 특이 질병력(歷)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유전적인 성격을 띠는 질병을 예방하거나 사고를 줄일 수 있고, 나아가 임신 시기를 조절하면 아들ㆍ딸의 출산 확률도 달라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또 족보를 살펴보면 청주 한씨(淸州 韓氏)는 평균적으로 키가 크고 전주 이씨(全州 李氏)는 머리와 목소리가 크며 문중에 따라 눈동자의 색깔이 각각 다르고 치아의 테두리도 차이가 있다는 게 족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병창 사장은“족보에는 사람의 DNA를 암시하는 정보도 담겨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면서 “앞으로 족보를 통해 연구하고 활용할 분야가 무궁무진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족보는 씨족의 특성을 가늠케 하는 요소도 있는데, 청주 한씨나 신천 강씨(信川 康氏)가 그러한 예를 보여준다.

청주 한씨는 역사의 격변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가 청주 한씨이며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비(妃) 신의왕후 역시 청주 한씨다. 왕건 어머니의 친척인 시랑(侍郞) 한헌옹(韓憲邕)은 신라왕 김부(金傅ㆍ경순왕)의 시랑인 김봉휴를 만나 고려의 통일에 공을 세웠고 조선의 한 시대를 풍미한 덕종 비(소혜황후) 인수대비, 세조의 계유정난을 도운 한명회 등도 청주 한씨 사람이다.

신천 강씨는 족보상 유대민족과 같은 ‘오뚝이 문중’에 비유된다. 역사상 수많은 씨족이 멸문의 화를 당하면 아예 사라지거나 왜소해지는 경우가 많은데 신천 강씨는 그럴 때마다 다시 일어서는 강인함을 보여주었다.

가장 큰 핍박은 태종 이방원이 일으킨 ‘왕자의 난’때 태조의 후비인 신덕황후 강씨의 두 왕자를 비롯한 일가의 몰락이다. 이후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강순(康純)이 영의정까지 올랐지만 유자광의 모함으로 남이 장군과 함께 처형됐으며 연산군 때는 무오사화의 변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신천 강씨는 깨지지 않고 문중을 부흥시켰다. 우리 시대엔 강금실 전 법무장관이 신천 강씨다.

족보는 씨족의 역사책일 뿐만 아니라 정사(正史)의 잘못된 기록을 바로잡고 미처 발견하지 못하거나 지나쳐버린 역사의 틈을 잇는 사료로서의 기능을 한다. 그래서 족보를 ‘이면(裏面)의 역사서’라고도 부른다.

앞서 태조 왕건의 어머니가 청주 한씨라는 사실과 한헌옹의 역할은 정사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족보를 통해 밝혀진 사실들이다.

임진왜란 때 원군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조선인의 후손으로 알려져 왔는데 이를 사실로 밝혀낸 것도 족보다. 이여송의 아버지는 이성량(李成梁, 1526~1615)으로 14세기 말 중국으로 건너간 이영(李英)의 후손이다. 이영의 아버지는 이승경(李承慶)으로 성주 이씨 중시조인 이장경(李長庚)의 손자다.

성주 이씨 대동보는 이여송의 7대조인 이승경의 아버지를 참지공파 이천년(李千年)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중국 청나라 ‘사고전서(四庫全書) 238장 명사(明史)에는 승경이 이조년의 아들로 나와 있다(李承慶兆年之子). 이조년은 이천년의 동생이다.

그럼에도 족보상 이여송이 성주 이씨 후손이란 사실에는 차이가 없다. 이 때문에 중국 내에 살고 있는 이여송의 후손들은 성주이씨 종친회와 교류를 지속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여송의 13대손인 리쩌멘(李澤綿ㆍ46)이 5월 12일 경북 안동에서 열리는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ㆍ1542~1607) 선생 400주기 추모제 행사에 참가하는 것은 족보가 전 세계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동포는 물론, 씨족적 연대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네트워킹 및 교류의 매개체 역할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셈이다.

족보가 역사의 사료 차원을 넘어 기존 사학계의 통설에 정면 도전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성리학이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본격 수용되는 고려 말 조선 초기의 과정을 족보를 통해 보면 과거를 주관하는 지공거(知貢擧ㆍ시험관)ㆍ동지공거(同知貢擧ㆍ부시험관)와 과거 급제자의 ‘좌주(座主)-문생(文生)’관계와 혈연적 연결이 성리학 토착화나 사회 변화에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권단(權妊, 1228-131

권단(權妊, 1228-1311)은 선구자적 인물로 그가 지공거일 때 권한공, 김원상, 최성지, 채홍철, 백이정 등 엘리트들을 뽑아 좌주-문생 관계를 형성했다. 그러나 심양왕 복위 사건으로 와해되면서 이후 이암(297~364)이 지공거가 돼 문생을 선발하고 그의 제자인 한방신은 동지공거로 포은 정몽주 등을 선발하면서 좌주-문생 관계는 계속 이어진다. 이암의 주체적 성리학이 정몽주에게 이어진 것은 그러한 특수관계 때문이다.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은 중국 성리학에 충실하였는데 스승인 권보의 사위가 돼 권력의 중심에 있으면서 오랫동안 지공거로 수많은 과거 급제자와 좌주-문생 관계를 형성하면서 한국 유학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한국 사학계 1세대 대표 학자인 고 이기백 교수(2004년 작고)는 생전에 신라 말기의 사병 문제를 연구하면서 흥양 이씨(興陽 李氏) 족보를 역사적 자료로 활용했고 진주 소씨(晋州 蘇氏) 족보를 통해 신라 시대 최고관직인 상대등(上大等)이던 알천(閼川)을 새롭게 인식했다며 족보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었다.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35년 넘게 한국학을 개척ㆍ발전시킨 에드워드 와그너 박사(2001년 작고)가 평생 한국학을 연구하면서 가장 주목한 것은 한국의 족보였다. 그는 족보에 나타난 문과 급제자를 통해 우수 혈통에 관한 연구도 하였는데 족보에서 한국의 가능성을 확인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옛 정보의 보고(寶庫)인 족보에서 보물을 찾아 다듬는 일은 이제 우리 시대의 몫이다.

박종진 차장 jjpark@hk.co.kr

자료출처: 주간한국             

 

뿌리를 찾아 떠나는 테마여행 - 성주이씨편

“도덕과 학문으로 명망을 떨친 성주이씨”

2007-03-23 17:14:54

오현재와 유품전시관→안산서원→봉산재→가야산→포천계곡

경북 성주군의 3월은 비닐하우스의 물결로 가득하다. 가야산과 낙동강 주변의 토지에서 친환경농법으로 생산돼 맛과 향이 일품인 성주참외가 4월과 5월 본격적인 출하를 앞두고 영글어 가고 있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만은 / 다정도 병인냥 하여 잠못들어 하노라
고려 충혜왕 때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문인 이조년(성주이씨 13세손)이 지은 시로 봄밤의 서정을 노래하는 주옥같은 작품이다. 조상의 뿌리를 찾아 떠나는 테마여행으로 성주이씨의 종손 이시영 씨, 성주화수회 회장 이시웅 씨, 사무국장 이대현 씨를 만나 일찍이 영남 내륙에 터를 잡고 도덕과 학문으로 명망을 떨쳤던 성주이씨에 대해 알아본다.  

성주이씨(星州李氏) 본관의 유래
문헌에 의하면 성주이씨의 기세조(起世祖)인 이순유는 신라 재상으로 있을 때 나라가 망하자 그의 아우 돈유와 함께 신라의 마지막을 지켰다.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고 손위(遜位)하자 당시의 경산부, 지금의 성주읍 경산리에 옮겨 살았다. 고려 태조 왕건은 이순유의 재주와 기량을 흠모하여 벼슬할 것을 권유했으나 이순유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며 거절했고, 그 절의에 감복하여 왕건은 “나의 신하는 아니지만 나의 백성임에 틀림없다”하며 향직의 우두머리인 호장으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그로부터 후손들은 성주에 살며 대대로 호족을 이루었고, 조선조에 와서 향리의 지명을 따라 성주이씨(星州李氏)로 관향(貫鄕)을 정하게 된 것이다. 시조인 이순유의 묘는 실전하여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 능골 오현재에 시조제단비를 건립하여 시조묘를 대신하고 있다.

성주이씨의 중시조는 이장경이다. 고려 고종 때 시조의 12세손인 이장경에게는 백년, 천년, 만년, 억년, 조년의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관직에 나아가 많은 활동을 하게 된다. 특히 이천년의 둘째 아들인 이승경은 원나라 관직에 나아가 많은 공적을 쌓았다. 이에 원의 황제는 칙령을 내려 이승경의 부친 이천년, 조부인 이장경을 농서군공으로 추봉하였으며, 성주이씨의 중시조가 된다. 이장경의 위패는 흥양 성산사, 단성 안곡사, 울곡 보본사, 정평 보덕사 및 김천 상친사, 옥천 평산사에 모시고 제사지내고 있다. 중시조인 이장경의 묘는 오현재 옆 산자락에 있다.

이조년 등 많은 고관대작 배출
성주이씨는 고려 말 고관대작을 많이 배출하며 명문거족으로 자리를 잡았다. 중시조인 이장경을 비롯해 매운당 이조년, 경원공 이포, 도은공 이숭인 등이 그들이다. 이조년은 1285년 진사로 문과에 급제하여 지합주사·비서랑 등을 지낸 뛰어난 문신이다. 이천년의 아들인 이승경은 공민왕 때 문하시랑 평장사가 되었고 1359년 홍건적이 침입하자 도원수가 되어 적을 물리치고 서경을 회복하기도 했다. 이인임은 이조년의 손자로 1359년 홍건적의 침입 때 공을 세워 2등 공신이 되었으며, 홍건적의 2차 침입 때에 개경을 수복하여 1등 공신에 오른 고려말의 권신이다. 고려말 삼은의 한사람이며 성리학의 거두로 명망이 높은 도은 이숭인도 문중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고려에 비해 조선시대에는 인물이 비교적 적은 편이다. 명문거족으로 조선의 개국에 강력히 저항한데다 당쟁에서 남인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벼슬길이 좁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부친이 이조년의 손자 이인임으로 되어 있다가 기록을 고쳐줄 것을 요구했으나 200여 년 후인 선조 때 고쳐진 사건인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여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선조에도 개국공신 2명, 문과 급제자 107명과 당상관 53명 등 많은 인재들을 배출했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개국에 공헌, 지신사에 올라 개국공신 3등이 되고 성산군에 봉해진 이직이나, 이직의 손자로 태종의 딸인 숙혜옹주와 결혼하여 성원위에 봉해졌으며 1433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한 이정녕 등은 벼슬길에 올라 가문을 빛내기도 했다. 성주이씨에서 특이한 인물은 명나라 장수로 임진왜란 당시 원군 4만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와 평양성 전투를 치르기도 한 이여송이 있다. 그는 이천년의 8세손이다. 지금도 중국에 살고 있는 후손들은 농서이씨로 불리며 성주이씨 종친회와 교류가 있다고 한다.
구한말에는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제국신문사 사장을 지낸 이종일 등 독립운동가들도 다수 있다. 현대에 와서는 정계에는 국회사무처장을 지낸 이종률 의원, 대구시장을 역임한 이해봉 의원, 5공 때 민정수석을 지낸 이학봉 전 의원, 자민련 원내부총무인 이재선 의원 등이 있다. 관계에는 최근 노동부 장관으로 입각한 이상용 전 강원지사 등이 성주이씨다. 재계에는 대종회장을 맡고 있는 이석룡 대한손해보험협회회장, 이의순 세방그룹회장, 이종상 대유개발회장 등이 활약하고 있다.

오현재와 유품전시관
성주이씨 문중에는 삼현소라고 중시조인 농서군공 이장경의 묘소가 있는 ‘오현재’와 선현 22위를 모시고 제향하는 ‘안산서원’그리고 농서군공의 유허지인 ‘봉산재’가 있다.
성주이씨 중시조인 농서군공 이장경의 묘소가 있는 곳인 오현재는 성주이씨의 구심점이 되는 곳이다. 공(公)의 묘소는 처음에는 지금의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선석사 옆 비호석봉에 모시어져 있었으나 훗날 세종의 적서(嫡庶) 18王子의 태(胎)를 봉안한다는 구실로 1443년(세종25년) 왕명을 내려 이장하게 하니 지금의 이곳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 오현에 이장하게 되었다. 지난 1985년 11월 12일 대종회 총회에서 오현재를 건립키로 뜻을 모아 9년여에 걸쳐 50여 평의 재실을 비롯하여 내외 삼문 등 부속 건물 등을 준공했다. 음력 10월1일에는 전국의 수많은 후손이 모여 시제를 올리고 있다.  

유품전시관은 1998년 3월 24일 대종회 총회의 결의에 따라 작업을 시작하여 같은 해 11월 19일에 개관하였다. 30여 평의 유품전시관에는 경상북도 지방문화재 제245호로 지정된 13폭의 영정사진 사본, 전국에 산재한 원사(院祠)의 사진 48점, 문열공 이조년의 친필 병풍 사본, 1613년(광해 5년)에 간행된 계축보와 성주이씨 역대의 족보 15종과 문집 50여권을 비롯해 조선조 명종 때 대사헌을 지낸 이언충의 묘소(서울 노원구 중계동)에서 지난 2000년 4월 22일 발굴된 원형 시신의 사진과 부장품인 의류 24점 중 모조한 4점 등 각종 유물 및 유품을 전시하며 숭조사상(崇祖思想)을 일깨우고 선조의 유덕을 익힐 수 있는 배움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종택과 오현재를 오가며 기거하고 있는 종손 이시영씨는 종손이면서 이곳 유품전시관의 관장을 맡고 있다. 유품전시관을 둘러보며 자랑스러운 선조의 업적들을 줄줄 읊지만 “농촌의 젊은이들은 죄다 도시로 나가 종사를 돌볼 사람이 없다”며 아쉬움도 말한다.

현조 22위 모신 안산서원
성주군 벽진면 자산리 안산촌에 역대 성주이씨 중에서 도덕, 경술, 문장, 관직이 뛰어나 국가에 공헌도가 높은 현조 22위를 모시고 제향하는 서원이 있다.
이 고장 토성인 성주이씨는 고려 말에 현창한 분이 많아서 중시조 농서군공 이장경, 매운당 이조년, 경원공 이포, 초은공 이인복, 도은공 이숭인, 형재공 이직 등 여섯 영정을 국가의 숭봉으로 지금의 성주군 월항면 인촌에 위치한 이장경의 묘소 옆 선석사에 사당을 세우게 하고 배향하게 하였다. 그러나 조선조 세종25년(1443년) 적서 18王子의 태실을 만들게 됨으로써 산소는 오현으로 이장하고 사당은 이곳 안산사로 옮겼으나 그 연대는 미상이다.
서원 앞에는 철종 6년(1855) 각지의 자손들이 뜻을 모우고 후손 종영이 주관하여 세운 농서군공 이장경의 신도비가 있다. 영정 10현조 13폭은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245호로, 영당은 경상북도 지방 문화재자료 제217호로 지정되었다.

중시조의 유허지 봉산재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봉두산 아래 위치한 봉산재는 성주이씨의 여러 인물들의 유허지다. 중시조인 농서군공으로부터 현손 문충공 이숭인의 대에 이르기까지 이곳에서 산 기록들이 경산지에 수록되어 있다. 재실에는 농서군공의 영정을 모시고 있으며 매년 단오절에 전국 후손들이 모여 제향한다. 현재 사당 외에도 본헌, 동재, 서재 등을 증축할 계획이다.

교육프로그램 운영 현황
성주이씨 대종회(www.sungjulee.co.kr)는 종약 제23조에 육영사업에 관한 규정을 두고, 대종회의 각종재산의 일부 및 독지종친의 특별헌금 등을 사업기금으로 하여 농서장학회(이사장 이용택)를 설립 운영하고 있다. 1993년 9월에 설립되어 이 장학회는 현재 예치된 원금 28억 원의 이자로 운영되고 있다. 매년 하계방학 때는 오현재에서 장학금 수여와 조상의 전통에 대한 교육 등이 1박2일의 일정으로 이뤄진다.

성주군 관광명소
성주군에는 조선8경으로 알려진 가야산이 있다. 가야산은 1972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주봉인 칠불봉 (1433m)과 우두봉, 남산, 단지봉, 남산제1봉, 매화산 등 1000m 내외의 연봉과 능선이 둘러 있다. 수륜면에서 가야산으로 이어지는 순환도로를 따라가면 검붉은 기암절벽이 하늘을 찌르는 장쾌한 광경이 펼쳐진다. 계곡과 폭포를 끼고 이어지는 용기골과 심원골의 이색적인 등산로 코스가 있다. 특히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기암괴석과 어우러진 가을 단풍은 자연의 신비로움을 느끼게 하고, 눈 덮인 가야산 설경은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듯하다.
포천계곡은 가야산의 여러 계곡 중 대표적인 명소로서 물이 맑고 풍부할 뿐만 아니라, 웅장하고 힘찬 가야산 전경과 어우러져 옛 성주 선비들이 심신과 학문을 도야하는 장으로 삼았던 곳이다. 조선 후기 문신이자 당대 최고의 선비였던 응와 이원조 선생이 만년을 보낸 만귀정(晩歸亭)이 상류에 있다. 약 7km에 이어지는 계곡은 우거진 숲과 어울려 여름철 피서지로 유명하다.

27부터 29까지 3일간 성주에서는 세계적 명물인 성주참외의 우수성을 알리는 ‘성주참외축제’가 개최된다. 한마음걷기대회, 태실 출정식 및 봉안 의식 등 16종의 행사와 참외따기, 문화답사 등 10종의 체험, 야생화, 생활도자기 전시 등 4종의 전시회가 열린다.
성주의 특산물로는 대가면 칠봉리 유촌마을의 이필순 할머니가 들국화, 누룩, 찹쌀, 솔잎을 주재료로 만드는 ‘송국주(松菊酒)’, 가야산에서 흘러내리는 맑고 깨끗한 자연수 중 100m 이상의 암반수와 참숯을 투입하여 생산되는 무농약·무공해의 ‘가야산참숯미나리’, 당귀, 계피, 감초, 생강, 마늘, 인삼 등 한방영양제를 사용해 과육이 단단하고 당도가 높은 ‘가야산한방능금’ 등이 있다.

찾아가는 길
서울방면에서는 서울남부터미널에서 1일 5회로 운행하는 고속버스가 있다. 기차를 이용할 경우에는 김천에서 내려 김천시외버스터미널에서 성주행 버스를 타면 된다. 성주행 버스는 왜관이 더 많이 있으므로 왜관역에서 내리는 것이 좋다. 왜관역에서 내려 왜관 남부 또는 북부 정류장에서 성주행 버스를 타면 된다.
승용차로 올 경우는 고속도로를 이용해 김천나들목에서 내려 4번 국도를 따라 왜관방면으로 오다 김천 남면의 부상에서 905번 지방도를 따라 성주로 오면 된다.
부산쪽에서 올 경우는 기차를 타면 왜관역에서 내려 왜관 남부 또는 북부 정류장에서 성주행 버스를 타면 된다. 자가용으로 올 경우는 고속도로를 이용해 왜관나들목으로 나와 33번 국도를 따라 성주방면으로 20㎞ 정도 오면 된다.
전라북도에서 오려면 30번 국도를 따라 무주를 경유해서 김천시 대덕면과 증산면을 통해서 성주로 오면 된다.

박동진 기자 (pdj@newsone.co.kr)

간산 대가면성주이씨 재실 밎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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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산소를 세종대왕 자태실로 인해 대가면으로 옮긴곳도 명당인데요.

 


 

출처 :운봉 명리 풍수지리 학 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 운봉 거사

요녕성 철령시 철령현 최진보진 소둔촌 성주이씨마을


"
성주가 본관인 이여송 장군이 우리 조상"


중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민족은 보통 조 족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들은 중국의 호구(주민등록)에 '조선족'이라는 민족분류가 돼 있다. 문화적으로 가장 앞선 소수민족으로 대접받고 있는 지금의 조선족이 중국에 뿌리내린 시기는 대개 18세기 중엽 이후. 만주지역이 과거 우리민족의 주요 활동무대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우리민족의 핏줄이 그곳에서도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겠지만 대부분 그 뿌리를 잃어버려 이렇게 일천한 역사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지만 간혹 이같은 통상적인 상식을 뛰어넘어 말과 문화는 잃어버렸더라도 뿌리는 기억하고 있는 우리민족의 후손들이 대륙 곳곳에서 발견돼 뉴스가 되기도 한다.

심양시에서 동북쪽으로 1시간30분 이상을 가야 만나는 도시, 철령을 찾은 이유는 경상도에 연고가 있으면서 이주시기가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한 집안의 집성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진작에 한족으로 동화된 그들을 찾는 일이 '중국속의 경상도를 찾아서'라는 이번 취재의 주제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들이 바로 경상도에 뿌리를 둔 '성주이씨'의 한 갈래이고 보면 그냥 스쳐 지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요녕조선문보 기자출신인 김철용씨와 조선족 작가 김예호 선생의 안내로 철령현 정치협상위원인 이택면(李澤綿)씨(43·성주이씨 철령종친회 부회장)의 집을 찾아 나섰다. 이씨는 자기 집안의 역사를 십수년째 연구하고 있는 역사학자. 철령현 외곽의 농촌지역에 있는 그의 자그마한 집에 들어서자 겉모습과는 달리 놀랄정도로 깔끔하게 청소된 실내가 인상적이다. 이씨는 "공식적인 민족분류와는 관계없이 스스로 조선족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족에 부끄럽지 않게 청결한 생활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라고 했다.

이처럼 뿌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이씨는 스스로 본관이 성주이며, 한국인들이 익히 아는 이여송 장군이 자신의 13대 조상이라고 밝힌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원군을 이끌고 조선으로 출병한 그 이여송 장군이 우리핏줄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본관까지 구체적으로 전해 듣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씨는 성주이씨 문중회보와 벽진이씨 문중회보를 동시에 보여준다. 재미있는 것은 한국의 양 성씨가 동시에 철령의 이씨를 자기 집안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 그러나 십수년째 집안의 뿌리를 연구하고 있다는 이씨는 '연구 결과 우리들의 뿌리는 성주이씨가 틀림없다'고 장담한다. 기자의 고향이 성주라고 밝히자 그는 새삼 다시 악수를 청한다. 조상의 고향에서 온 사람이니 더욱 반갑다면서.

14세기 말 조선에서 귀화-죄를 짓고 도망했다는 설도 있다-한 성주이씨 참지공파 9세손이던 이영(이여송의 5대조)이 철령에 자리를 잡으면서 중국에서의 성주이씨 역사가 시작됐다고 이씨는 주장한다.

철령이씨는 이후 중국 역사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한 인물을 배출하면서 요동 제일의 명문가로 부상한다. 이여송의 부친 이성량(李成梁·1526~1615)이 바로 그 인물이다. 40대에 요동총병에 오른 이후 그 자신은 물론 아들인 이여송의 대에 이르기까지 요동지방은 실제로 그의 집안에 의해 다스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 집안의 위세는 대단했다. 당시 명황실은 이민족의 발호가 끊이지 않았던 요동지방의 수비를 전적으로 이성량에게 의지할 정도였다. 이성량의 가신으로 출발해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도 이들 부자가 살아 있을 때는 철령을 넘어서지못했다고 이택면씨는 자랑했다. 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중국동북지방의 역사에서 이성량이 차지하는 비중은 최근 중국정부가 철령현 반룡산 기슭에 이성량기념관을 지어 개관한 데서도 엿볼 수 있다. 기념관에는 금주성(지금의 철령)에 주둔하고 있던 이성량이 늘 꽃을 감상하던 누각 간화루의 주춧돌 등을 그대로 옮겨 놓았으며, 건물 두동에 당시의 생활상과 역사를 엿볼 수 있는 각종 자료사진과 그림 등을 전시해 놓았다.

이씨의 집에서 그의 일가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사는 소둔촌까지는 또 다시 자동차로 20~30분을 가야하는 거리. 야트막한 야산과 백양나무 가로수, 그리고 도로변의 작은 개천…. 특징없는 중국 농촌풍경을 잠시 눈여겨보고 있는데 이씨가 외진 곳에서 차를 세운다. 제법 푸른 수목이 무성한 규모가 큰 언덕의 옆이다. 이씨는 그 언덕을 가리키며 집안의 묘지라고 설명한다.

밭과 구릉의 경계를 이루는 길을 따라 잠시 걸어들어가자 이내 무신상과 문인상, 십이지신상 등의 석물이 가지런히 줄지어 서서 그 옛날 이 집안의 영화가 어떠했는지를 설명해준다. 그리고 연이어 커다란 비석과 수십기의 무덤이 나타난다. 고원조이성량지묘, 고원조이여송지묘라고 새긴 두개의 묘비석이 유난히 우뚝하다. 한자를 크게 새기고, 그 옆에 작은 한글로 음을 달아놓았다. 철령의 이씨들이 우리말과 글을 알 리가 없는 터에 묘비에 한글을 새겨놓다니 여간 신통하지가 않다. 알고보니 묘비의 한글은 1994년 묘비를 세울 돈을 희사한 재일교포 한중민씨가 묘비에 반드시 한글을 새겨넣을 것을 요구한 결과였다. 묘비석 뒤의 이성량과 이여송의 묘소봉분은 시멘트로 포장돼 있다. 한국의 성주이씨라면 어림도 없을 일이지만 수백년의 세월은 풍습을 크게 바꿔 놓았다. 한족화한 것이다.

현재 이곳 성주이씨들의 선산에 있는 각종 비석과 석상들은 시급 유물로 보호를 받고 있지만 문화대혁명 시절 소실될 뻔한 위기도 있었다. 당시 후손들은 이 유물들을 땅속에 묻어둬 화를 피했다. 이 곳 묘지의 면적은 무려 800무(1무는 300평). 이처럼 널찍한 묘지를 확보해둔 조상덕에 이 집안 사람들은 중국법률로 매장을 금지하고 있는 요즘도 여기에 묘를 쓴다고 했다. 굳이 이곳에 묘를 쓰는 것은 묘지의 형태가 용의 모양을 닮은 명당이라고 이들은 믿기 때문이다.

묘지에서 지척인 곳에 두개의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두마을이 합쳐 소둔촌을 이루고, 주민의 70~80%이상이 성주이씨이니 가히 집성촌이라 할 만하다.

마을로 다가가자 지금까지 거쳐온 조선족마을과는 외형이 유사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높지않은 산을 등지고 자리잡은 마을의 터며, 주변의 넓은 들, 붉은 기와를 얹은 집들의 외양은 조선족 마을과 흡사하다. 그러나 논농사를 짓는 조선족 마을은 어디를 가나 집집마다 담벼락에 커다란 볏짚가리가 쌓여 있지만 이 마을에서는 그 대신 옥수숫대가 쌓여있다. 어쩌다 눈에 띄는 볏짚가리는 불쏘시개 더미마냥 자그마하다. 논농사는 거의 짓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마을앞 도로변에는 조선족 마을의 소 대신 당나귀가 게으름을 부리고 있다. 이제 곧 농사일이 시작되면 저 당나귀도 바빠질 것이다. 한족들은 소를 부릴 줄 모르는 대신에 말과 당나귀를 부리는데는 능숙하다.

마을 중앙에 자리잡은 가게에 들어서자 여인네들이 둘러앉아 한창 마작을 놀고 있다. "이제 한창 일할 시기가 왔는데 이렇게 놀고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말을 건네자 여인들은 "아직은 바쁘지않다"는 대답을 하고는 낯선 이들의 행색을 살핀다.

가게 바로 옆골목을 통해 마을 안으로 들어가본다. 곧게 뻗은 골목은 이 마을의 입향조 이영의 산소가 있다는 마을 뒷산으로 이어지는 듯하다. 700호에 2천200여명이 산다는 큰 마을답게 골목의 길이는 길다. 간혹 보이는 텃밭은 나지막한 돌담으로 막아놓았다. 한 집의 마당에는 소가 여섯마리나 누워 있다. 그 소 중에는 전신에 잡털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흰소도 있어 한참을 쳐다보게 만든다.

마을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익숙지 않은 냄새가 역겹게 풍겨온다. 산으로 이어질 듯하던 길이 끊긴다. 산과 마을사이에는 제법 큰 하천이 가로막고 있다. 수량이 많지는 않지만 이들이 논농사를 지을 줄만 안다면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수원은 될 성싶다.

차를 세워둔 마을중앙으로 돌아오자 어느새 마을노인들이 모여 있다. 조선족에 비해 훨씬 초라한 옷차림을 한 노인들은 한국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자신들의 조상이 조선사람이라는 등의 집안 이야기를 한마디씩 한다. 족보도 있다고 했다. 이 마을의 주변에는 고구려성도 있다며 한국과의 인연을 강조하기도 한다.

한국의 친척들에게 전할 말을 해달라고 청하자 이사용씨(李士勇·65)가 누런 이를 드러내면서 "우리는 여기서 잘 지내고 있으니까 한국의 친척들도 건강하게 잘 지내기를 바란다"는 인사를 한다.

철령시로 돌아오는 길에서 이택면씨는 자신들의 희망은 조선족으로 민족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밝힌다. 먼저 언어회복을 하고, 그 다음에는 민족회복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이같은 그의 생각에는 철령의 집안들도 지지한다고 했다. 그래서 이씨는 마을에 조선족학교를 꾸리는 방안과 아니면 한족학교에 조선족반이라도 만드는 방안을 강구해봤지만 비용문제 때문에 철령시 등의 지지를 얻어내지못했다며 안타까워했다. 이들이 한국의 성주이씨 종친회와 교류를 하고 싶어하는 가장 큰 이유도 이같은 경제적인 문제에 있을 것이다.

헤어질 시간. 자신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국에 전해줄 것을 부탁하는 이택면씨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다. 수백년간 단절된 핏줄과의 인연을 다시 잇고, 민족을 회복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지를 그는 표정으로 말하고 있다.

2004-12-27 09:39:32 입력

/글=정근재기자
kayjay@yeongnam.com /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노년시대 신문 내용중에서

노년시대신문은 숭조(崇祖), 경로효친의 아름다운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명문가 종친회를 찾아가다'는 제하의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명문거족의 본향은 고유의 전통과 가풍을 이어가며 충효예를 계승하고 있습니다. 

본관 시조와 유래를 현대적으로 재 해석하고, 그 성립과 발전, 인물배출 등에 대해 살펴보는 본 기획을 활용해 독자 여러분의 성과 본, 대종회 및

종친회 등을 새롭게 알아보는 계기를 마련하시기 바랍니다.
(연재는 성씨·본관 대종회의 요청 순서에 따라 게재됩니다.

이번 호에는 첫 번째로 성주이씨 편을 특집으로 꾸몄습니다. 다음호는 성주 도씨 편입니다.) 

 

고려말 ‘벽상도형’ 명문세도 5파 자손번창


고서에 따르면 신라 건국 이전 진한(辰韓)시대. 지금의 경주 부근에 6촌이 있었다.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취산진지촌(于珍村),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 명활산고야촌(明活山高耶村) 등이다.

   오현재.
성주이씨 중시조(이장경)의 묘소가 있는 곳으로 성주이씨의 구심점이 되고 있다.
1443년(세종 25년) 왕명에 따라 태실 자리로 양보하고, 지금의 오현으로 이장했다.

 

신라 건국 설화에 의하면 박혁거세가 알 속에서 태어나 이들 6촌 사람들에 의해 양육되고, 양산촌 촌장인 알평의 도움으로 신라를 개국하게 된다. 석탈해와 김알지의 탄생과 왕위등극도 대략 비슷하다.


신라 3대 유리왕에 의해 이들 6촌은 6부로 격상되고 각각 성(姓)을 하사받는다.
즉 양부 이(李), 사량부 최(崔), 본피부 정(鄭), 점량부 손(孫), 한기부 배(裵), 습비부 (薛) 등 성(姓)씨가 그래서 생겨났다.
이씨의 시조는 혁거세를 신라 개국 시조로 옹립한 양부 양산촌장 알평이다.


그러나 현대 성씨연구자들은 각종 금석문 등을 근거로 7세기 이전(676년에 삼국통일이 됐다)에는 성씨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성씨는 신라 후기에 수입된 중국의 문화였으며 왕으로부터 귀족, 양민의 순으로 전파됐다는 것.

 

그리고 성씨와 본관 개념이 일반화 된 것은 고려태조가 통치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 시행한 ‘토성분정’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지방의 호족들이 발호하지 못하도록 인질을 중앙에 진출하게 하여 관향을 삼도록 한 것이다.
그런 이유로 유서 깊은 명문 성씨들의 시조가 신라 말이나 고려 초기의 인물로 집중되고 있다.


성주이씨의 시조는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927~935)조에서 이부상서를 지낸 재상공 이순유(李純由)다.
신라 말 경순왕이 고려태조에 항복한 뒤 신라 구국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읍 경산리로 들어가 은둔했다.


  안산서원.
성주군 벽진면 자산리 안산촌에 역대 성주이씨 현조(顯祖) 22위를 모시고 제향하는 서원이다.
영정 10현조 13폭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45호로 지정돼 있고, 영당은 경상북도 지방 문화재자료 제217호로 지정됐다.

 

그 뒤 고려 원종(1260~1274)조에 이르러 시조 이순유의 11대손 이장경(李長庚)의 다섯 아들들이 크게 출사하게 된다.
장자인 밀직사사(密直司事) 백년(百年),
이남 참지정사(參知政事) 천년(千年),
삼남 문하시중(門下侍中) 만년(萬年),
사남 개성유수(開城留守) 억년(億年),
오남 정당문학 문열공(政堂文學 文烈公) 조년(兆年) 등이 그들이다.


아들 5명이 모두 나라에 크게 공헌하여 아버지 이장경은 특별히 삼중대광 좌시중 흥안부원군 도첨의 정승 지전리사사 상호군 경산부원군(三重大匡 左侍中 興安府院君 都僉議 政承 知典理司事 上護軍 京山府院君)에 봉하여졌다.

 

특히 손자(천년의 아들) 승경(李承慶)이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여 요양성(遼陽省) 참지정사까지 오르게 되어 그 조부인 이장경이 원나라 황제로부터 농서군공으로 추봉되기도 했다.


이장경으로부터 후손들이 명문세도 가문으로 거듭나므로 성주이씨는 그를 중시조로 모시고있다
후대 8世 이내에 문형(文衡)이 18명, 봉작을 받은 이가 11명, 상신이 15명, 또 식읍을 받은 이가 5명, 부마가 2명, 문과 급제자가 75명에 달할 정도로 후손들이 크게 일어난다.

성주이씨는 고려말에서 조선시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유서 깊은 가문답게 그중 현조(顯祖) 22위를 성주군 벽진면에 있는 안산서원에 모시고 지금까지도 배향하고 있다. 배향하는 인물은 중시조 이장경으로부터 조선 숙종 때 공조판서를 지낸 은암 이광적(1628~1717)까지 모두 22위.

 

여기 모신 10위의 영정 13폭은 사적 유물로서의 가치가 높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45호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 또 영당(影堂)은 경상북도 지방문화재자료(文化財資料)

제217호로 지정되어 성주이씨가 1100여년이 넘는 유구한 가문이라는 것을 여실히 증거하고 있다.


관직에 나간 성주이씨 후손들 중에 전국 각지의 임지에서 정착하는 경우도 많아 성주 외에도 경기, 충청, 강원, 호남권까지 전국적으로 성주이씨 집성촌이 퍼져나갔다.

 

하지만 아무래도 임지에서 본관지로 돌아온 후손들이 상당수여서 중시조 이래 지금까지 명문가 본관지로서의 전통과 족보·서원·사당·묘소 등 사적들이 성주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전국 종친 800여명이 지난해 음력 10월 1일 오현제 시조공 제단비 앞에서 열린 시향제에서 참례하고 있다.


그런데 성주이씨 중에 뛰어난 인물이 많고 자손이 번성하여 본관지 성주에서 분파해 다르게 칭관하는 경우도 있다. 농서이씨가 그들이다.

 

그리고 또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성주이씨 인물검색을 해보면 본관이 성주인 이씨 인물들 사이에 본관을 벽진(성주군 벽진면)이라고 쓰는 인물들이 간혹 있다.


그런가 하면 중국에도 성주이씨의 후손이 살고 있다. 원나라에서 벼슬을 한 이승경의 증손자인 이영(李英)을 시조로 받들고 있는데 그 5대 후손이 이여송이다.
성주이씨 대종회에서 중국 라오닝성(遼寧省) 철령(鐵嶺)에 비를 세우기도 했으며 그들은 현재 철령이씨라 한다.

 

 

낱장 서문만 남은 국내 최초의 족보

권씨 성화보와 유씨 가정보에 이은 세번째 족보 1968년 종친회 창립, 1질 9권 을묘대동보 발간

성주이씨의 족보는 1464년(세조 10년)에 최초로 간행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로 꼽히는 안동권씨 성화보보다 12년이나 앞서 발간됐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윤손(李尹孫)의 농서이씨보에 서문만 전하고 있다.


그뒤 1613년(광해 5년)에 계축보(癸丑譜)를 간행했다. 단권 목각본이었으며, 안동권씨 성화보와 문화유씨 가정보(1562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족보다. 그리고 인쇄술이 발달함에 따라 금속활자본을 속속 간행했다.

 

1751년(영조27년) 7권 6책의 활자본 신미보(辛未譜)을 비롯하여 1830년(순조 30년) 21권의 활자본 경인보(庚寅譜), 일제시대인 1924년의 활자본 27권 갑자보(甲子譜)까지 족보를 간행하여 성주이씨의 역사를 기록했다.

 

현대에 와서는 1968년 성주이씨 전국종친회(대종회 전신)가 창립되면서 1질 9권의 현대활자 인쇄본 을묘대동보(乙卯 大同譜)를 발간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밀직공파 등 수많은 중간 지파종회별 족보는 생략)

성주이씨 인구분포

이씨 중 세번째 규모, 18만 6188명


영남 47.3%, 충청과 호남 14% 차지


국내 성주이씨의 분포도를 보면(2000년 인구주택 총조사 성씨·본관별 인구통계) 전체 인구 18만 6188 중에서 영남권이 8만 8145명으로 47.3%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지역적 연고가 별로 없을 것 같은 충청과 호남권에도 성주이씨가 2만 6075명(14%)으로 구석구석 고루 분포하고 있다.

 

서울과 수도권, 강원도 제주도에도 고루 분포하고 있는데, 서울과 경기도의 인구는 이농현상 후에 전국의 성주이씨들이 모인 결과여서 인구분포 통계로서 큰 의미가 없다.

 

 

 

 

 

 

 

 

 

 

 

 

 

 

 

 

 

 

 

 

 

 

 

 

 

 




 

역사속의 성주이씨 인물

조선중기 문과 급제자 20명 이상 배출 李兆年·李崇仁·李 稷·李如松 등 다수

성주이씨 시조 이순유(李純由)는 신라 말 재상으로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한 뒤 마의태자와 함께 구국을 위해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지금의

성주읍 경산리로 숨어들었다.

 

이후 고려 초기까지 숨어 지내다가 중후기에 출사하면서 고려시대를 풍미하는 권문세족으로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고려 말 조정에 출사한 친원(親元) 그룹에 속해 친명세력인 조선의 개국과 함께 실각하여 성주로 대부분 안치되고 일부는 유배되었다.

조선 개국 공신도 있으나 조정 출사는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다 조선 중기에 다시 크게 일어나고 말기에 이르면서 그 기세가 완만한 하향곡선을 그리게 된다. 조선중기(15세기부터 17세기)에 문과 급제자 20명 이상을 배출한 영남권의 30여 성·본의 하나로 꼽힐만큼 명문이다.


주요인물로는 ‘이화조’를 지은 이조년, 고려의 삼은으로 꼽히는 도은 이숭인, 영의정을 지낸 이직, 중국의 장군 이여송 등 다수가 있다.

 

성주이씨의 인물에 대한 세세한 사항은 세진록을 참고하면 알수 있다.
여기서는 이름만 소개한다.

이백년, 이천년, 이만년, 이억년, 이조년, 이인기, 이여경, 이승경, 이태보, 이태성, 이포,
이원구, 이영, 이득방, 이인복, 이인임, 이인미, 이인립, 이인민, 이비, 이환, 이존성,
이숭인, 이제, 이발, 이직, 이수, 이사후, 이견기, 이사형, 이숭문, 이지원, 이영분, 이혼,
이문흥, 이정녕, 이지활, 이집, 이의, 이전, 이문재, 이자상, 이자견, 이자건, 이운거,
이지번, 이윤탁, 이자화, 이충건, 이성량, 이창, 이성, 이문건, 이항, 이언충, 이조, 이담,
이산우, 이여송, 이원배, 이일장, 이현배, 이구, 이덕응, 이휘, 이현배, 이준구, 이광적,
이지선, 이응협, 이택징, 이종일.


현대의 성주이씨 인물

국회의원·장차관·판검사·박사 등 많아
독립운동가·학자 등 비관직에서도 인물

조선후기부터 조정에 출사하는 인물이 감소하여 의사(義士), 독립운동가, 학자 등 비 관직에서 인물이 나온다. 그러다 현대에 이르러 정계, 군, 판검사, 학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인물이 배출된다.


성주이씨의 현대인물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사람은 전두환대통령 영부인 이순자 여사.
그 외에 국회의원 장차관, 군장성, 판검사, 기업가, 학자 등 다양한 인물이 배출된다.


<성씨총감>에 수록된 박사 수는 헬 수 없이 많다.
경제계에서는 신영그룹 이운일,
세방그룹 이의순등 준재벌급 인사도 포진하고 있고, 한국잡지협회장을 역임하고 한국주택신문과 현대주택 발행인 이심회장을 비롯한 언론·출판계 인사도 다수 있다.


-이순자 전두환대통령 영부인
-이병희 국회의원(15대까지 7선),무임소 장관
-이용택 국회의원(11,12대)
-이학봉 국회의원(13대)
-이종률 국회의원(10,12대)
-이대순 국회의원(11,12대),체신부장관
-이상용(강원도지사, 노동부장관)
-이동근 국회의원(13,14대)
-이해봉 대구종친회장 국회의원(15,16,17대)
-이재선 국회의원(15,16대)
-이문석 육군대장, 총무처장관
-이기주 경남 도지사
-이규동 육군준장(작고)
-이희근 공군대장
-이소동 육군대장
-이태섭 육군소장
-이종학 육군준장
-이규광 육군소장
-이상태 육군중장
-이해순 핀란드대사(작고)
-이산석 전주교육대학장
-이정한 경상대학교총장
-이상만 서울대학교수
-이명섭 변호사, 농서장학회이사장
-이중근 서울지검검사장, 청와대법무비서관
-이재훈 성남지법원장, 변호사
-이광열 청주지원장, 서부지원장
-이만희 서울고검부장판사
-이창민 국민가수(예명 백년설)
-이석용 대한손해보험협회장.

■ 인터뷰 / 성주이씨 대종회 이시욱 회장

鳳山齋(봉산재) 성역화 삼현소 중건 마무리 온 힘

화합행사 ‘선현들의 발자취’ 일깨워
검·판사 50여명 예비 재벌급 인물 많아

이시욱 대종회장은 1934년생으로 경북 성주군 벽진면 자산리에서 출생했다.
성주이씨 맏집인 백파(밀직공파)이며, 철강회사를 창립하여 경영하다가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나 대종회장과 국제라이온스클럽 등 봉사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신촌의 성주이씨 대종회 사옥에서 이시욱 회장을 만나 성주이씨 대종회에 대해 들어보았다.
성주이씨 대종회사무실은 사회에서 인정받는 걸출한 분들이 사랑방처럼 이용하고 있어
이날도 대종회 고문인 육군 대장으로 예편한 이소동장군이 인터뷰에 합석했다.


성주이씨 지파종회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한다면 

▶중시조인 농서군공 할아버지께 백년, 천년,
만년, 억년, 조년 등 다섯 분 자제가 있는데
모두 크게 출사하신 분들이다.

 

-밀직공파
-참지공파
-시중공파
-유수공파
-문열공파 등 5파로 나뉜다.
성주이씨 종친회는 이 5파별로 운영되고
대종회가 이 5파를 통합 관리한다.

 

또 16개 광역시도별로 성주이씨 종친회도
대종회가 관리한다.

대종회가 수행하는 사업은 
▶성주이씨의 구심점이 되는 이 삼현소를 유지 관리한다. 제례나 시향 행사를 관장하고유물 유적을 보수하거나 새로 짓는 사업도 대종회가 맡고 있다.

특히 중시조 묘소가 있는 오현재와 안산서원에서는 해마다 정기총회, 한식재, 시향 등 대단위 종사를 거행한다.
사람도 많이 모인다. 큰 시향 같은 경우에는 오현재 주차장이 버스로 꽉 찬다.
1000~2000명 정도가 모인다. 대종회 전국 대의원 수는 400여 명에 이른다.

그래도 말이 많고 분란이 잦은 것이 종친회인데 

▶그런 면이 있다. 우리도 내 전임 때 1년 이상 대종회가 마비되다시피 한 적이 있다.
단합이 깨지고 지파종회에서 불만들이 표출됐다. 다행히 내가 대종회장을 맡으면서 지금과 같이 단합하는 전통을 복원했다.

대종회장님이 리더십이 있는 것 같다.

▶글쎄…. 원래 남을 위해 배려하고 봉사하는 데 나름대로 노하우가 있다. 그런 게 바탕이 돼 한국라이온스클럽은 물론 국제라이온스클럽 아시아지역 TOP에 오르기도 했다.
그것이 리더십이라면 리더십일 것이다.
어쨌든 대종회 임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리더십이라기 보다 대종회 임원들이 단합할 필요성을 더 많이 느끼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성주이씨 대종회를 운영하는 철학이 있다면 

▶종친회 성원은 전부 혈족이다. 그러다 보니 생산적인 일을 하기가 쉽지 않다.
연로한 분들이 이끌어가지만 현대적인 흐름에 맞게 발상의 전환을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문중 행사할 때 재미있게, 예를 들어 야유회를 하듯이 가족소풍을 하듯이 참여할 수
있게 이벤트도 마련하고 선물도 들려주며 선현들의 자취를 알게 하는 기회를 주고 있다.
대종회 홈페이지(http://www.sungjulee.co.kr/)를 꾸민 것도 그 일환이다.

역사인물도 많고 현대에는 4성 장군도 많고, 집안으로 보면 대통령 사위도 보았는데…

▶격동기에는 많은 일이 있다. 누구든 공과가 있게 마련이다. 이순자 여사와 5공화국의 일에
대해서는 솔직히 과가 있었다고는 하나 국가 중흥기에 큰 업적을 남기신 것으로 우리 문중에서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순자 여사는 성주이씨 5파 중 맏집인 밀직공파의 후손이지만 어려서부터 고향을 떠나 살았다
물론 그 부모대 삼형제(이규광, 이규동, 이규성)가 모두 군에서 높이 올랐다.

 대종회 사무실에서 종친회원들과 함께 담소를 나누는 모습.
왼쪽부터 이문순 사무처장, 이원섭 서울종친회장, 이시욱 대종회장, 이소동 고문,이도필 대종보편집위원장.

 

성주이씨가 특히 두각을 나타내는 분야가 있는가 
▶고르게 분포한다. 4성장군이 5명이나 되고, 고급관료와 정치인도 있지만 검판사가 50여명에 이르고 경제계에도 예비재벌급 인물들이 많이 있다. 모두 애종심이 강해서 명망과 지위에 구애됨이 없이 종사에 열심히 참석하고 있다. 대종회와 지파종회, 지역종친회 임원들도 모두 훌륭한 분들이다.

앞으로 성주이씨 종사에 특별한 계획이 있다면

▶곧 이사회가 있다. 성주이씨 20년 현안사업인 봉산재를 성역화하는 사업을 확정지을 것이다.
이것을 하면 비로소 삼현소가 모두 중건된다. 금년에 착공을 해 놓으면 내년에 내 임기가 끝난 뒤에도 후임이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다.

 

 
기획특집팀

박병로 편집국장
최종동 편집위원

 

星州李氏 家門의 초상화 연구

                                                          _윤진영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藏書閣 제22집(2009.10) 139∼179쪽
星州李氏 家門의 초상화 연구 139
星州李氏 家門의 초상화 연구
윤 진 영*
Ⅰ. 머리말
Ⅱ. 성주이씨 초상화의 현황과 전승 내력
1. 현황
2. 전승 내력
Ⅲ. 성주이씨 초상화의 특징
1. 고려시대 인물의 이모본
2. 조선초기 인물의 이모본
Ⅳ. 성주이씨 초상화의 양식
1. 화가에 대한 검토
2. 화법과 도상의 특징
3. 이모본에 나타난 재현과 변용
Ⅴ. 맺음말
국문요약
본고는 성주이씨 門中에 전하는 麗末鮮初의 인물 11人의 초상화를 소개하고, 경북 성주
의 安山影堂에 奉安되어온 전승내력과 移模本 초상의 양식을 고찰한 것이다. 성주이씨 초
상화에는 고려말 성주지역에서 派祖를 이룬 李長庚(1214~?)을 비롯하여 여말선초에 功臣과
官僚로 진출한 직계 후손들이 그려졌다. 모두 생존시에 그린 原本을 토대로 18-19세기에
걸쳐 여러 차례 이모본이 제작되었다. 본고에서는 안산영당에 전해져온 1714년 이모본과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학자료조사실 연구원
140 藏書閣 22집
이를 이모한 1746년 본, 그리고 1825년과 1865년의 19세기 이모본을 연구 대상으로 하였
다.
성주이씨 초상화에는 이모한 연도를 화면에 기록해 두어 제작시기가 분명하며, 母本이
된 그림도 여러 점 전하고 있어 이모본 초상화 양식의 변화를 자세히 살필 수 있다. 또한
지방에서 제작된 양식이라는 점과 畵僧에 의한 불교적인 색채가 반영된 점은 이 자료가
지닌 독자적인 특징이며, 화승의 이모본에 투영된 여말선초 초상화의 새로운 면모와 양식
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조선초기 인물의 경우는 士大夫像의 특징을 보이고 있어, 화승이
아닌 일반 화가가 최초의 도상을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화승에 의해 그려진 고려시대 양식의 초상화는 조선시대 儒學者들의 시각에 好佛 취향이
라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초상화를 보는 시각의 차이가 그
림의 양식보다 이념적인 성향에 근거한 것임을 말해주는 특징이다. 또한 성주이씨 초상화
에는 모본의 형태를 정확히 옮겨야 하는 移模의 원칙이 엄격하게 적용되지 않았다. 이는
도상의 불합리한 점이나 불편한 점들을 바꾸어 그리고, 보완해 나가는 의식적인 노력의 결
과라는 점에 주목하였다.
화법에 있어 18세기의 이모본에는 이전 시기의 古式的인 요소와 당시에 유행한 明暗法
등이 함께 나타나 있고, 19세기 본에는 畵僧의 양식이라 할 강한 채색이 사용되었다. 그러
면서도 이모본에 충실하고자한 표현상의 특색들을 다양하게 확인할 수 있다.
본 논문은 성주이씨 초상화를 통해 자료의 공백으로 남아있던 여말선초 초상화 연구의
새로운 기초를 마련하고, 이 시기 초상화의 실상을 조금 더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이모본
초상화의 특징을 논증하여 제시하고자 하였다.
??주제어 : 肖像畵, 星州李氏, 安山影堂, 移摹本, 畵僧
星州李氏 家門의 초상화 연구 141
Ⅰ. 머리말
성주이씨 문중에는 家門 내 선조들의 초상화가 여러 점 전하고 있다. 경북 星州의 安山影
堂에 대대로 봉안되어 온 이들 초상화에는 고려말 성주이씨의 派祖를 이룬 李長庚(1214~?)
을 비롯한 직계 후손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들은 중앙의 관료로 진출하거나 鄕里에
머물며 가문의 기반을 다지고 분화를 이룬 인물들이다. 이들의 초상화는 현존하는 遺作만
하더라도 유례가 없을 만큼 많고, 여말선초 초상화의 古形式과 移摹本의 다양한 특성을 알
려주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1)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초상화는 후손들이 조상의 모습을 瞻望하며 遺訓을 되새기고 공경
과 추모의 정을 새롭게 하는 기능을 한다. 따라서 예로부터 초상화를 鑑戒畵로 분류하여
여타의 인물화와 구분하기도 했다. 특히 한 가문에 있어서 큰 족적을 남긴 선조의 초상화는
그 자체로 존숭과 祭享의 대상이 되어 문중 후손들의 결속과 家門意識을 강화하는데 큰
파급 효과를 가져다 주었다. 성주이씨 초상화가 약 600년의 전통을 지켜왔고, 또 300년
이상 畵本이 전해진 데에는 선조의 초상화에 대한 敬慕 정신과 이를 전승하고자 한 후손들
의 각별한 의지와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성주이씨 초상화가 우리나라 초상화 연구사에서 특별히 주목되어야 할 이유로는 다음의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현존하는 성주이씨 초상화는 모두가 移摹本이라는 점이다. 원
본의 초상화가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훼손되었을 때, 이를 베껴 그리는 이모는 원본의
형상을 후세에 전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성주이씨 초상화에는 최초의 원본이 전하지 않지만,
이모를 반복한 사례들이 함께 전하고 있어 이모본의 다양한 변화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둘째, 성주이씨 초상화는 여말선초 이후 17~19세기를 지나며 모두 네 차례의 이모를 거
듭하였다. 그때마다 이모의 시기를 빠짐없이 화면에 기록해 두었다. 이는 전승된 모든 그림
의 이모 횟수와 제작시기를 파악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따라서 성주이씨 초상화는
모두가 기년작으로서 초상화 양식의 비교 기준을 설정하고, 이를 비교하여 살피는 것이 가
능하게 된다. 현전하는 그림의 점수가 많다는 점 또한 기년작 이모본의 다양한 특색을 살피
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셋째, 중앙이 아닌 지방에서 제작된 초상화라는 점이다. 이 초상화의 봉안처가 경북 星州에
1) 성주이씨 문중에서는 소장하던 초상화 전체를 2009년 9월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탁하였다.
142 藏書閣 22집
있고, 이 지역에서 그려진 지방색을 띤다는 점 또한 이 자료가 갖는 주요 특색이다. 따라서
중앙 양식과의 비교와 지방양식으로서의 특징을 다양한 사례별로 살펴볼 수 있다. 아울러
그림을 그린 화가 또한 지방 화사일 가능성이 높다. 성주이씨 초상화의 화가에 대한 정보는
거의 전하지 않는데, 본고에서는 양식상의 특색을 통해 畵家群의 범주를 좁혀보고자 한다.
화가의 문제는 초상화의 양식과도 관련된 것으로서 구체적으로 조명되어야할 부분이다.
성주이씨 초상화에 대해서는 趙善美 교수가 전라남도 高興郡에 있는 星山祠 소장본을 대상
으로 다룬 바 있다.2) 이장경을 비롯한 5명의 이모본 초상화에 나타난 주요 상용형식과 초상
양식을 자세히 분석함으로써 고려시대 초상화 연구의 방법과 기반을 마련하였다. 또한 조선
시대 초상화 모사본 제작의 한 사례로 안산영당의 초상화의 기초조사가 진행되기도 했다.3)
본고에서는 안산영당 소장의 이모본 가운데 가장 시기가 빠른 1714년 본과 이를 다시
이모한 성산사의 1746년 본, 그리고 19세기에 이모한 1825년 본과 1865년 본을 연구 대상
으로 하였다. 즉, 1714년 이후 네 차례에 걸쳐 베껴 그려진 이모본들을 모두 포함하여 다루
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문헌기록을 참고하여 성주이씨 초상화의 전체 현황과 지금까지
의 전승 내력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초상 인물을 고려말기와 조선초기로 나누어 각 인물
별 초상의 특징을 간략히 정리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초상화의 양식적인 측면을 화법과 도
상, 그리고 도상의 변용이라는 측면에서 검토할 것이다. 특히 이모본에서 발견되는 도상과
양식의 변모 과정을 각 시기별 이모본과 비교하여 알아보는 데 중점을 둘 것이다. 이러한
접근이 여말선초 초상화 연구의 새로운 기초를 마련하고, 이 시기 초상화의 실상을 조금
더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Ⅱ. 성주이씨 초상화의 현황과 전승 내력
1. 현황
현재 성주이씨 가문의 초상화를 봉안하고 있는 곳은 경북 성주의 安山影堂과 전남 高興
2) 趙善美, ??韓國肖像畵 硏究??, 悅話堂, 1994(3刷), 101~106쪽.
3) 김희경, ?조선시대 영정의 모사본 제작에 관한 연구?, 용인대대학원 문화재보존학과 석사학위논문,
2006.
星州李氏 家門의 초상화 연구 143
의 星山祠 이다. 모두 33점이 전하는데, 안산영당 본이 28점이고, 성산사에 5점이 봉안되어
있다.4) 본 논문에서는 안산영당본과 성산사본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5)
안산영당본 초상화 28점은 다섯 차례에 걸쳐 이모된 것으로 여말선초에 활동한 인물이
11명이다.6) 이 초상화의 가장 큰 특징은 그림의 오른 쪽 상단에 해당 인물의 관직과 이름,
그리고 이모한 시기를 모두 기록해 둔 점이다. 따라서 초상화의 주인공이 누구이고, 몇 번
째 이모본이며, 또한 최종 이모본이 제작된 시기에 대한 기초 정보를 제공해준다. 이모본이
지만 모두 제작시기가 파악되는 기년작인 셈이다. 이 기록에 근거하여 현존하는 초상화 이
모본의 현황을 정리하면 아래의 표 1과 같다.
?표 1? 성주이씨 초상화의 이모본 현황(安山影堂과 星山祠 소장본)
인명 (생몰년) 1405년
(태종 5)
1544년
(중종 39)
1655년
(효종 6)
乙未
1714년
(숙종 40)
甲午
1746년
(영조 22)
丙寅
1825년
(순조 25)
乙酉
1865년
(고종 2)
乙丑
1900년대
이장경 (1214-?) 改摹改裝重摹*重摹<重摹> 重摹*重摹/
1866년*重摹
이조년 (1269-1343) 改摹*重摹<重摹> *重摹-
이 포 (1287-1873) 改摹*重摹<重摹> *重摹-
이승경 (1290-1360) 改摹*重摹重摹*重摹
이원구 (1293-?) 改摹*重摹重摹*重摹-
이인민 (1340-1393) 改摹重摹<重摹> *重摹-
이숭인 (1347-1392) 改摹重摹<重摹> 重摹*重摹*1990년
이 직 (1362-1431) 改摹*重摹重摹*重摹-
李 濟 (1365-1398)
重摹
(1707년)
丁亥
*重摹
(1735년)
乙卯
*重摹
(1798년)
戊午
*重摹-
이사후 (1388-1435) 改摹*重摹*重摹*重摹-
이 욱 (1562-1617) 改摹*重摹重摹*重摹
李光迪 (1628-1717) *重摹
李萬年 *1986년
李仁任 *1986년
‘*’ 표시는 현 安山影堂 소장본 / ‘< >’표시는 현 星山祠 소장본 / 부호 표시가 없는 것은 전하지 않는 작품이다.
4) 17세기 중엽 성주이씨 후손인 李光植이 전라도 興陽縣監과 향교에 성주이씨 선조를 배향할 文賢書院을
창건하고자 여러 번 청원하여 1764년(영조 40)에 허락을 받았다. 그 뒤 전라도 豊陽의 良里에 강당을
세우고, 후손 李廷允과 李相榮이 성주까지 가서 안산서원에 봉안했던 李長庚·李兆年·李褒·李仁
敏·李崇仁·李稷·李師厚 등 7인의 영정을 옮겨와 봉안했다고 한다(星州李氏淸明會 刊, ??世眞錄??,
1976, 256쪽). 지금은 이직과 이사후 초상이 빠진 5인의 초상화만이 남아 있다.
5) 필자는 성주이씨 초상화 중 安山影堂本은 직접 조사하였으나 星山祠本은 실견하지 못하였다. 성산사
소장본은 趙善美, ??韓國肖像畵 硏究??(悅話堂, 1994)의 앞부분에 수록된 원색 화보(도 32·도 33~도
36)를 참고하였음을 밝혀둔다.
6) 1865년 이모본인 <李光迪 상>과 1986년에 제작된 <李萬年 상>과 <李仁任 상>은 초상화의 전체 현황에
는 포함하였으나 본고에서 다루지는 않았다. 이는 추후 별도의 지면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144 藏書閣 22집
<이장경 상>은 1405년(태종 5)에 처음으로 改摹하였고, 이를 제외한 나머지는 1655년(효
종 6) 이후 19세기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이모가 진행되었다. 1714년(숙종 40)의 이모본은
모두 10점인데, 현재 7점이 전한다. 당시에 이모되었지만 전하지 않는 예도 있다. 그런데
1714년은 1655년에 이모한 이후 약 60년이 지난 시점이다. 60년이면 새로 이모를 하기에
비교적 짧은 기간이다. 당시에 이모본을 제작한 이유를 추론해 보면 재난으로 인한 그림의
망실에 대비하여 복본을 그려둔 경우와 앞 시기 이모본의 畵格에 만족하지 못해 기량이
뛰어난 화가에게 다시 그리게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746년(영조 22)의 이모본은 모두 9점이 그려졌다. 그 뒤 1764년(영조 40)경에 지은 고흥
의 星山祠에 배향하고자 이 9점 가운데 7점을 옮겨 갔다.7) 이때 봉안된 초상화는 李長庚·
李兆年·李褒·李仁敏·李崇仁·李稷·李師厚 등 7인 인데, 이 가운데 이직과 이사후의 초
상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19세기의 이모본은 1825년과 1865년(고종 2)에 제작한 것으로
모두 11명의 이모본이 현재 남아 있다. 이장경의 초상은 매번 이모가 있을 때 마다 그려졌
고, 1865년 본과 그 다음해에 그린 1866년 본 한 점 더 전한다. 1825년에 그려진 <이조년
상>, <이포 상>, <이원구 상>, <이인민 상> 등은 1865년에 改裝만 했고, <이숭인 상>, <이
사후 상>, <이욱 상> 등은 매번 이모를 거듭하였다.
초상화를 옮겨 그린 것을 일반적으로 ‘移摹’ 혹은 ‘模寫’라 한다. 그런데 성주이씨 초상화
의 상단에 쓴 墨書에는 원본을 베낀 최초의 이모를 ‘改摹’라 했고,8) 이 改摹本을 다시 이모
한 것을 ‘重摹’라는 용어로 사용했다. 이 용어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원본과 이모본을 옮겨
그린 그림에 차이를 두었음을 알 수 있다. 본고에서는 ‘改摹’와 ‘重摹’를 ‘移摹’라는 하나의
명사로 사용하고자 하며, 특별히 구분해야 할 경우는 해당 용어를 쓰기로 하겠다.
2. 전승 내력
이 절에서는 조선초기부터 안산영당을 통해 전해져 온 성주이씨 초상화의 전승 내력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특히 초상화를 봉안한 공간의 성격과 16세기의 李文楗(1494-1567)이
추진했던 성주이씨 先賢의 書院配享 계획, 그리고 안산영당의 중수와 중건에 대한 사실을
7) 星州李氏淸明會 刊, ??世眞錄??, 1976, 256쪽 ; 趙景鎭, ?星山影堂記?.
8) 16세기 안동 지역의 사대부상인 <李賢輔 상>과 <申從渭 상>의 이모본을 19세기에 제작하면서 그 과정
을 기록한 일기를 남겼다. 일기의 제목을 각각 “影幀改摹時日記”와 “勿村先生影幀改摹時日記”’로 표
기하였는데, 여기에서도 최초의 원본에 대한 이모를 ‘改摹’라는 용어로 사용하였다.
星州李氏 家門의 초상화 연구 145
중심으로 전승내력을 알아볼 것이다.
1) 여말선초 초상화의 봉안 공간과 안봉사 영당
고려시대에는 일반 관료와 문인들의 초상화가 상당수 제작되었다. ??東文選??과 개인문집
의 畵像讚, 그리고 祠堂記와 墓碑銘 등에서 다수의 초상화 제작사례가 확인된다. 초상화를
그린 목적은 儀禮的인 기념용이나 享祀를 위한 것이었다. 또한 서민계층에서도 부모의 형
상을 그려놓고 제사를 했다는 기록이 고려초에 보이고 있어,9) 향사를 위해 초상화를 봉안
한 전통은 고려시대부터 활발히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여말선초의 초상화는 봉안 장소인 祠廟와 家廟, 그리고 影堂의 조성과 함께 발전해 왔다.
이들 봉안 장소가 갖는 공통점은 모두 초상화를 걸어두고, 정기적으로 祭享하며 조상을 추
모하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제향 공간을 조성한 배경에는 조상에 대한 崇拜와 報本
意識이 크게 자리 잡고 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10) 지금 전하는 성주이씨의 초상화
는 모두 영당에 걸렸던 것으로, 제향 공간과 함께 전승되어 왔다. 이처럼 ‘가문 초상화’라
할 수 있는 예가 여러 점 하나의 영당에 봉안된 경우는 유례를 찾기 어렵다.
사당 형태의 사묘가 운영된 사례는 고려시대의 여러 기록에 보인다. 이는 고려 忠烈王(재
위 1274-1308)을 전후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데, 여기에서 주목되는 사실은 이 시기
의 사당은 대부분 寺刹 안에 있었고, 초상화를 봉안했다는 점이다.11) 사묘에 이어 주자성리
학이 전래된 고려말기 이후부터는 가묘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가묘는 충과 효를 지배 이데
올로기로 삼은 권력층에서도 한층 권장한 사항이었다. 그런데 가묘에는 초상화 외에 神主
를 봉안하여 받들기도 했다. 신주가 초상화를 대체한 관행은 고려말 “朱子家禮”가 수용되
고 이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점차로 정착되어 갔다.
초상화를 봉안하는 풍습은 影堂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영당은 말 그대로 초상화
를 봉안하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특히 왕의 초상도 각 사찰을 願刹로 삼아 봉안하였고,
충신들의 功臣堂 역시 사찰 내에 세워졌다. 여말선초의 사찰에 있었던 영당은 대부분 가문
의 원찰로서 기능을 하였다. 본고에서 살펴볼 성주이씨 문중의 초상화가 禪石寺에서 안봉
사의 영당으로 옮겨져 오래도록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이다.
9) 趙善美, 앞의 책, 79쪽.
10) 趙善美, 앞의 책, 132~133쪽.
11) 趙善美, 앞의 책, 134쪽.
146 藏書閣 22집
성주이씨 초상화는 애초에 성주 선석사의 사당에 배향되었다.12) 지금의 성주군 월항면
인촌에 위치한 李長庚의 묘소 인근이다. 이후 1443년(세종 25) 嫡庶 18王子의 태실을 선석
산에 만들게 됨으로서 이장경의 묘소는 梧峴으로 移葬하였고, 사당은 이곳 安峯寺로 옮겼
다고 한다.13) 15세기 이래 지방의 사찰은 대부분 재지세력의 願堂이나 齋舍, 精舍, 그리고
書堂, 書院 등 유학교육시설로 활용되는 등 향촌세력의 屬寺로 존재하였으며,14) 안봉사 또
한 이러한 원찰의 성격을 지닌 사찰에 속한다.
禪石寺에서 安峯寺로 초상화를 옮긴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8왕자의 胎室을 조성
하기 시작한 것은 1443년(세조 25) 무렵이 분명하다. 그런데 1443년에 초상화를 이봉하기
이전, 선석사의 사당에 몇 본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는지 궁금하지만, 기록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1443년이면 이장경으로부터 그의 5세손인 이사후(1388-1435)의 초상화까지
그려진 시기였다.
그런데, 16세기 중엽 경 안봉사에 봉안된 초상화의 현황은 뒤에서 다시 언급할 후손 이문
건(1494-1567)의 ???齋日記??에 나와 있다. 이문건은 1546년(명종 1) 乙巳士禍와 연루되어
성주로 유배되었는데, 이곳에 머물며 안봉사의 영당을 자주 찾는 등 선조들의 초상화에 많
은 관심을 가졌다. ??묵재일기??에 의하면 1546년(명종 1) 1월 13일 이문건이 방문한 안봉사
의 영당에는 12인의 초상화와 2인의 啣簇이 걸려 있었음을 알려준다. 여기에서 啣簇이란
족자에 해당 인물의 품계와 관직 등을 기록한 것으로 초상화를 대신하여 걸어둔 것으로
추측된다. 이문건은 영당의 초상화를 둘러본 다음날 선조 12인의 초상화와 2인의 함족이
걸린 순서를 다시 배열하였고, 이를 기록하여 일기에 남겼다.15) 그렇다면, 여기에 걸렸던
12) 禪石寺는 直指寺의 末寺로서 692년(효소왕 1)에 義湘대사가 華嚴十刹 중 하나로 창건하였으며, 처음
에는 神光寺라 이름하였다. 창건 시에는 현재 위치의 서쪽에 있었는데 고려시대에 와서 懶翁 대사가
신광사의 주지로 있던 1361년(공민왕 10)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權相老 編, ??韓國寺刹全書??, 東國
大學校出版部, 1979)
13) ??新增東國輿地勝覽??(제28권, 慶尙道, 星州牧)
14) 이수건, ?書院의 歷史와 그 所藏資料?,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46~52쪽 ; 김소은,
앞의 논문, 170쪽 재인용.
15) ???齋日記?? 1546년 1월 13日(辛未). “晴風. 堂中 西公影西壁之南, 李百年啣簇其次, 文烈公其次, 李仲
善眞其次, 侍中敬元公眞其次, 此壁之西李麟起啣簇, 其次大提學仁敏眞, 其次仁任眞, 其次李元具眞, 其
次李崇仁眞, 其次東壁之北李濟眞, 其次文景公眞, 其次漢城府尹眞, 其次李升商眞凡十四位也” 이 문건
은 다음 날인 1월 14일에도 영당을 찾아 승려들을 시켜 초상화의 位次를 다시 배열하였다. 고쳐 걸은
배치는 ??묵재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晴風. 午後率僧輩改掛影幀, 中位不動, 以北壁之西爲上,
首掛百年銜簇, 次掛文烈公幀, 次掛麟起銜簇, 次掛敬元公幀, 次掛元具幀, 東壁之北, 掛大提學仁敏眞,
次掛陶隱眞, 次掛文景公眞, 次掛漢城尹師厚眞, 西壁之北, 掛李仲善眞, 次掛仁任眞, 次掛興安君濟眞,
星州李氏 家門의 초상화 연구 147
12인의 초상인물에는 현존하는 초상화의 주인공들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일까? 매우 궁금한
대목인데, 물음의 답은 바로 확인된다. 지금 이모본이 전하는 11인의 인물 가운데 당시에
태어나지 않은 李稶을 제외한 10인의 초상화가 여기에 걸려 있었다. 현존하는 이모본의
원본에 해당하는 초상화인 셈인데, 모두 1546년의 안봉사 영당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당시
에 함께 걸린 李仁任과 李升商의 초상은 최초의 이모본을 그린 1655년 이전에 망실되었음
을 알 수 있다. 그리고 2점의 함족은 李百年과 李麟起의 것인데, 이 두 사람의 초상화는
이미 1546년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문건의 ??묵재일기??를 통해 약 460여년 전 안봉사
영당의 현황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아울러 14점의 초상화와 함족이 걸릴 정도였으면 당시의
안봉사 영당은 상당히 큰 규모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2) 16세기 영봉서원과 충현사, 그리고 안산영당
안봉사 내의 영당에 초상화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풍조는 16세기에 접어들면서 변화를
겪게 된다. 오랜 세월동안 관행으로 지켜져 온 사찰 의례에서 벗어나 이를 유교적인 의례로
전환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유학자로서의 소양을 갖추고 중앙 관료를 지낸 후손에 의해
제기되었는데, 그가 바로 ?齋 李文楗(1494-1567)이다. 이문건은 문열공 이조년의 후손으로
일찍이 趙光祖(1482-1519)의 문하에서 학업을 도야하였고, 1513년(중종 8) 사마시에 입격하
여 관료로 진출했지만, 1546년 乙巳士禍에 연루되어 성주로 유배된 이후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
⑪李承慶⑦李仁敏⑫李仁任⑥李元具⑧李崇仁⑬李 濟
⑤李 褒

북쪽
⑨李 稷
④李麟起⑩李師厚
③李兆年⑭李升商
②李百年
①李長庚
②李百年③李兆年④李麟起①李長庚⑤李 褒⑥李元具
⑪李承慶

북쪽
⑦李仁敏
⑫李仁任⑧李崇仁
⑬李 濟⑨李 稷
⑭李升商⑩李師厚
⑮李承慶

次掛判書李升商眞, 次傳書李仲善贊, 字毁不可知處數字也, 乃退”(??묵재일기?? 1546년 1월 14曰(壬申))
여기에 대해서는 김현영, ?16세기 한 양반의 일상과 재지사족-??묵재일기??를 중심으로?, ??朝鮮時代史
學報?? 18, 77~78쪽에서 다룬 바 있어 이를 참고하였다. 다만 ??묵재일기??의 원문과 대조하여 일부를
수정하였음을 밝혀둔다. 원래의 순서는 서쪽 아래에서 북쪽으로, 북쪽 좌측에서 우측으로, 그리고
동쪽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식이었다. 바꾼 순서는 北壁의 중앙에 <이장경 상>을 놓고, 이를 중심
으로 북벽의 좌에서 우로, 그리고 동쪽의 위에서 아래로, 다시 서쪽의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순이었
다. 즉, 북벽과 동벽, 서벽의 순서로 배치한 것인데, 이러한 배열 방식은 조선시대 관료사회에 통용된
座次의 기준과 같다. 반면 이문건이 배열을 바꾸기 전의 상태는 아마도 사찰 祖師堂에 봉안된 祖師像
의 위차를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당시 이문건이 조정한 초상화 배열의 위차를 도해하
면 다음과 같다.
<원래 초상화 배열 위차> <이문건이 바꾼 초상화 배열 위차>
148 藏書閣 22집
이문건은 가문의 부흥을 위해 여러 방면에 걸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기존의 불교
사찰을 문중의 영당으로 사용하는 단계로부터 유교적 교육기관인 書院을 건립하여 선조를
享祀하는 새로운 단계로의 추진을 도모하였다.16) 그 일환으로 이문건은 서원을 짓고서 성
주이씨의 선조인 문열공 李兆年, 문충공 李仁復 등을 鄕賢으로 배향하여 향사의 대상으로
삼고자 했다.
1555년 성주목사로 부임한 盧慶麟(1516-1568)은 이문건의 이러한 계획에 힘을 실어주었
다. 노경린은 당시 젊은 儒生들을 교육시켜 많은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영주 白雲洞書院의
예를 성공사례로 보고서 성주에도 이를 실현해 보고자 희망하였다. 즉 성주지역에 서원을
건립하여 儒生들의 講學所를 마련하는 것이 시급한 일이었고, 향촌의 先賢을 제향하여 후
세의 귀감으로 삼는 것도 서원을 통해 구현하고자 하였다. 서원에 제향하고자 한 인물은
성주이씨의 李兆年과 李仁復, 그리고 金宏弼 등 3인이었다. 노경린은 이러한 계획을 安東의
退溪 李滉(1501-1570)에게 알리고 의견을 구하였다. 이에 이황은 道學의 근본은 忠節이라
하여 이조년의 충절을 높이 평가했고, 이들의 제향은 사림의 긍식으로 삼을 만 하다고 하며
?迎鳳書院記?를 지어주었다.17) 그리하여 1558년(명종 13)에 짓기 시작한 서원은 다음 해에
완공되었고, 그 이름을 迎鳳書院이라 했다.
그런데 이조년과 이인복의 배향을 앞둔 시점에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독서를
위해 성주에 머물던 중 안봉사의 영당을 둘러본 노경린의 사위인 율곡 李珥(1536-1584) 등
新進儒學者들은 성주이씨 선현들의 서원 배향에 이론을 제기하였다. 다름 아닌 이조년의
영정에 念珠가 그려져 있음을 지적하며, 好佛한 인물을 후학들의 모범으로 삼을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18) 초상화에 그려진 조그마한 염주 하나가 문제의 발단이 된 것이다. 사실
도학자의 풍모를 생각하던 유생들에게 중절모를 쓰고, 염주를 쥔 원나라식 복장을 한 초상
화의 모습은 거부감을 갖게 했을 수 있다. 아마도 염주는 이러한 거부감을 단적으로 드러내
는 빌미가 되었을 것이다. 성주이씨의 선현을 서원에 배향함에 있어 염주와 호불로 상징되
는 부적절성에 대한 논의는 사림들 사이에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노경린과 성주이씨들이 계획한 李兆年, 李仁復, 金宏弼 등 3인의 서원 배향은 끝내 사림
들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 이러한 정황을 지켜보던 李滉도 이전의 입장을 수정하였다. 서원
16) 김소은, ?16세기 星州지역 士族의 交遊와 書院 건립계획-???齋日記??를 중심으로-?, ??정신문화연구??
통권 91호, 2003, 184쪽.
17) 李滉, ??退溪全書?? 卷42, ?迎鳳書院記?.
18) ???齋日記?? 1559년 2월 10일.
星州李氏 家門의 초상화 연구 149
이 오로지 사림의 도학을 위한 장소이기 때문에 서원에 배향되는 인물은 도학자 위주가
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최종적으로 표명했다.19) 이러한 논의는 결국 1560년(명종 15) 黃俊
良(1517-1563)이 성주목사로 부임하여, 文敬公 김굉필을 영봉서원에 獨享한 뒤에 程子와
朱子를 추가 배향하고 서원의 이름도 川谷書院으로 개칭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20)
이후 천곡서원 옆에 祠宇를 세우고 이조년과 이원복의 位版을 마련하여 이씨 자손이 춘
추제를 지내도록 하는 절충안이 마련되었다. 이문건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서원건립과 鄕
賢의 배향에 대한 계획은 결국 이렇게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이조년, 이인복은 李崇仁과
함께 서원 옆의 忠賢祠에 배향되었다.21) 고려시대의 鄕賢으로서 존경을 한 몸에 받았고,
또 후손들에게 큰 자부심을 안겨준 선현들의 초상화는 조선시대 儒生들의 道學的인 잣대
앞에서 예기치 못한 수난과 곡절을 거치게 된 것이다.
3) 안산영당의 중수와 중건
1581년(선조 14)에는 후손 李玄培가 星州牧使로 부임하여 영당을 重修하였다. 영봉서원
의 배향 계획이 무산된 이후 영당의 새로운 중수는 시급한 사안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성주이씨 초상화는 임진왜란으로 역사상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된다. 왜적이 이곳에 이
르러 영정 일부를 훼손하였고, 안봉사와 안산영당은 화재로 허물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이
때 僧 敬宗의 활약으로 초상화는 안전하게 수습될 수 있었다.22) 초상화를 땅 속에 묻어
위기를 모면한 것으로 전한다.
1606년(선조 39)에는 외손 李德溫이 성주목사로 부임하여 사림들과 더불어 허물어진 영
당을 중수하였다.23) 그리고 1615년에는 李稶이 調度使로서 순행하던 중에 안산영당에 들
러 초상화를 瞻拜한 기록이 있다.
그뒤 1655년(효종 6)에는 성주이씨 초상화 전체를 대상으로 첫 번째 이모본을 그리게
된다. 이때 이모된 초상 인물들은 14세기와 15세기 전반기에 걸쳐 활동한 이들인데, 원본이
19) 李滉, ??退溪全書?? 卷12, ?答盧仁甫書?. “文烈畵像手執數珠 此乃一時習尙爲然 雖賢者 未能免俗之故
然今置之學傍 實非所以示後學矜式之道也”
20) 鄭萬祚, ?朝鮮 書院의 成立過程?, ??韓國史論?? 8, 國史編纂委員會, 1980, 51~52쪽.
21) ??練藜室記述?? 別集 卷4, ?祀典典故?, 書院. 忠賢祠는 만력 임인년(1602년)에 세웠다. 李兆年은 대제
학을 지냈으며, 시호는 文烈公이다. 李仁復은 고려조에서 대제학을 지냈고, 興安府院君에 봉해졌으
며, 호는 樵隱, 시호는 文忠公이다. 李崇仁은 호가 陶隱, 고려조에서 대제학을 지냈다.
22) 李鳳興, ?安山影堂昇院記?, ??星州李氏文烈公派世譜-世德編??, 星州李氏文烈公派宗會, 1995, 817쪽.
23) 李光迪, ?安山影堂重建記?(1689), ??星州李氏文烈公派世譜-世德編??, 星州李氏文烈公派宗會, 1995, 814쪽.
150 藏書閣 22집
그려진 뒤 약 250년 내지 300년 만에 이모본으로 그려지게 된 셈이다. 그렇다면, 최초로
그려진 뒤 250년 이상 된 초상화는 당시 어떤 상태로 전해지고 있었을까? 이를 확인한 사람
은 이장경의 11세손 李稶이었다. 1655년의 이모본이 그려지기 40년 전인 1615년(광해군
7)에 안산영당을 방문한 李稶은 당시 자신의 눈으로 관찰한 초상화의 현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遺像을 우러러 바라보니 먼지에 그을리고 좀이 먹어 적색과 백색이 흐릿하여 분별되지
않고, 혹은 떨어져 나가고, 혹은 찢어지고, 혹은 퇴색되고, 혹은 오염되어 은은하기가
가히 식별하지 못할 곳이 열 가운데 六 내지 七이나 되었다.24)
이때 이욱이 본 초상화 가운데 <이장경 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처음 그려진 원본이었다.
좀이 쓸고 탈색되거나 박락이 일어나 식별하기 어려운 부분이 2/3 이상이었다고 하니, 보존
상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상태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때 현장을 목도한 이욱의 노력으
로 초상화의 修補에 대한 후손들의 관심이 일기 시작했지만, 정작 이모본을 그리기까지는
4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리하여 1655년에 첫 이모가 이루어졌으니, 그 이전까지 얼마나
열악한 상태로 세월의 풍상을 견디어 왔는지 잘 알려준다.
그런데 전하는 기록을 보면, 성주이씨 후손들은 影堂에 대한 보수나 중수에는 적극적인
관심을 가졌지만, 초상화의 이모에는 소극적이고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초상화는 수량이
많은 관계로 이모를 할 경우 무엇보다 재정 마련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당시의
숙원사업이었을 선현 초상의 이모는 1655년에야 전체 본을 대상으로 실행되었고, 이를 통
해 17세기 중엽의 성주이씨 초상화는 새롭게 거듭나게 된 것이다. 앞서 이욱이 기록한 1615
년의 보존 상태를 상기한다면, 거의 망실 직전에 이모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한 이욱은 영당에 비바람이 새는 등 허술한 실태를 파악하고서 여러 친족들의 협조를
구하여 중수를 추진하였고, 1617년(광해 9) 겨울에 役事를 마쳤다.25) 1684년(숙종 10)에는
후손 李光道가 자손들의 뜻을 모으고 성주목사에게 요청하여 영당을 重建하였다. 새로 터
를 잡아 영당을 다시 지은 것이다. 이때 중건한 위치는 “절간으로부터 동으로 뻗어난 곳”이
24) 李稶, ?安山影堂板上記?, ??星州李氏文烈公派世譜-世德編??, 812쪽. “瞻望遺像 則塵昏?食 赤白漫?
或殘或缺或褪或汚 隱隱不可識 十居六七”
25) 李稶李, ?安山影堂板上記?; 李鳳興, ?安山影堂昇院記?, ??星州李氏文烈公派世譜-世德編??, 817쪽. 이때
影幀?本을 改摹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초상화의 화면에 적힌 이모기록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星州李氏 家門의 초상화 연구 151
라 하였는데,26) 지금의 안산서원 동편의 영당이 위치한 터를 말한다. 또한 1689년 봄에는
경향 자손들의 도움으로 神廚(6間)와 齋舍(4間)를 지었다고 한다.27)
그 뒤 1763년(영조 39)과 1779년(정조 3)에 각각 重修와 改修가 있었다.28) 1796년에는
안산영당이 安山書院으로 승격되었으나,29) 채 백년이 되기도 전인 1871년(고종 8)의 書院
철폐령에 따라 다시 ‘安山影堂’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여기까지가 19세기까지 이루어
진 성주이씨 초상화의 주요 전승내력이라 할 수 있다. 이후 20세기에도 몇 점의 이모본이
제작되었지만 큰 변화는 없었다. 다만, 1714년 본 영정 10종 13점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45호로, 영당은 경상북도 지방문화재 제217호로 각각 지정 되어 오늘에 이른다.30)
Ⅲ. 성주이씨 초상화의 특징
이 장에서 살펴볼 성주이씨 초상화의 주인공은 모두 11명이다. 이를 고려말기와 조선초기
로 나눈 다음, 각 인물별로 초상양식의 특징을 살펴볼 것이다. 다만 조선후기의 인물인 <李光
迪 상>, 그리고 1980년대에 그린 <李萬年 상>, <李仁任 상>은 추후에 별도로 다루기로 한다.
1. 고려시대 인물의 이모본
<이장경 상>을 비롯한 고려시대 인물 7인의 초상화는 1655년(효종 6) 이후 19세기까지
모두 4차례 이상의 이모를 거쳤다. 1405년(태종 5)에 이모된 <이장경 상>을 제외한 나머지
6점은 모두 1655년(효종 6)에 처음으로 이모되었다. 이때 그린 이모본의 母本이 된 것은
모두가 각 인물의 생존시의 모습을 圖寫한 原本이었고, 이후 다시 그려진 이모본에도 앞
26) 후손 李光迪(1628~1717)이 쓴 ?安山影堂重建記?에는 당시의 重建에 대해 대들보와 서까래가 무너지
고 단청이 퇴색되었으며, 절간과 가깝다는 이유를 들고 있다.
27) 李光迪, ?安山影堂重建記?.
28) 李鳳興, ?安山書院重修記?.
29) 李顯穆, ?安山影堂重修記?.
30)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45호로 지정된 13점은 1714년에 모사한 <李長庚 像>·<李兆年 像>·<李褒
像>·<李承慶 像>·<李元具 像>·<李稷 像>·<李濟 像>·<李師厚 像> 등 8점, 1746년에 모사한
<李承慶 像>·<李稶 像>, 1788년 모사본인 <李濟 像>, 1825년 모사본 <李師厚 像>, 1925년 모사본
<李崇仁 像> 이다. 모사 시기가 다른 초상화들이 선별적으로 지정되었다.
152 藏書閣 22집
?도 2? <吉再 像>
1858년 刊(遺像本 木版畵)
?도 1? <李長庚 像> 32.6×21.0㎝, ??冶隱集?? 所收
1714년, 絹本彩色
85.0×151.0㎝, 安山影堂
시기 이모본의 기본 형상은 크게 왜곡되지 않고 보존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각
인물별로 초상화의 특징을 간략히 정리해 본다31).
1) 이장경(李長庚) 초상
이장경은 성주이씨의 중시조로 고려때 鄕吏의 최고위직인 戶長을 지냈다. 아들 5형제가
모두 文科에 급제하여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다. 그의 손자 李承慶이 원나라의 遼陽省 參知
政事에 오르자, 원나라 황제가 이를 칭송하여 그의 조부인 이장경을 ?西郡公에 追封하였
다. 그림 왼편 상단에 “以孫遼陽省永慶貴 宣授?西郡公”라고 쓴 것이 그 내용이다. 1714년
본의 오른쪽 상단에 이장경(1214-?)의 追贈 관직과 君號, 諱 등이 “追贈三重大 匡都僉議政
丞判典理司事上護軍 星山府院君 李公諱長庚眞”이라 적혀 있다.
성주이씨 초상화 가운데 가장 많이 이모된 것이 <이 장경 상>이다. 원본은 13세기 중후반경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며, 1405년(태종 5)에 첫 번째 이모를 한 이후 1655년 본, 1714년 본,
1746년 본, 1825년 본, 1865년 본, 1866년 본 등 모두 7점의 이모본이 그려졌다.32) 초상화 속의
모습은 平頂巾에 團領을 입고서 平床 위에 반우향한 자세로 꿇어앉은 형상이다(도 1). 이와
같이 평상 위에 ?坐를 한 모습은 여말선초의 인물인 吉再(1353-1419)의 목판본 遺像本에서도
확인된다.33) (도 2) 고려시
대 문인들의 독특한 坐法의
한 형식으로 추측된다.
1714년 본 <이장경 상>
에는 옷 주름에 명암이 깊
이 들어가 있다. 후대에 加
彩한 것이 분명한데, 명암
의 단계 차이를 많이 주어
강조하였다. 단령의 띠와
안쪽에 받쳐 입은 直領의
31) 초상화 속 인물의 생애에 대한 기술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참고하였고, 여기에 대한 각주는
생략하였다.
32) <이장경 상>은 일곱 차례 이모를 거듭하였는데, 이 가운데 1714년 본, 1746년 본, 1865년 본, 1866년
본 등 4점만이 현재 남아 있다.
33) 吉再의 목판 초상은 ??冶隱集??, ?冶隱先生言行拾遺 卷上?에 실려 있다.
星州李氏 家門의 초상화 연구 153
소매, 그리고 깃 부분도 붉은 색을 원본의 畵絹 위에 채색하였다. 그런데 1746년 본은 1714
년 본과 달리 상체가 길어지고, 단령 윤곽의 선묘도 각진 형태로 이모되었다. 1825년에도
한 점을 이모하였으나 전하지 않는다. 1865년과 1866년에 그린 이모본 2점이 현재 남아
있는데 1746년 본의 형태를 충실히 따른 도상이다.
2) 이조년(李兆年) 초상
이조년(1269~1343)은 고려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元老, 호는 梅雲堂·百花軒이며, 京山府
吏屬인 長庚의 아들이다. 1294년(충렬왕 20)에 25세로 鄕貢進士로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
고, 충렬왕·충숙왕·충혜왕 등을 충심으로 보필하였다. 1342년(충혜왕 복위 3)에는 誠勤
翊贊勁節功臣에 녹훈되었다. 시문에 뛰어났고, 공민왕 때 星山侯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文烈이다.
1714년의 이모본은 중절모에 直領을 입고 교의자에 앉은 모습이다. 화면의 오른쪽 상단
에 “誠勤翊贊勁節功臣重大匡星山君 贈諡文烈公李公諱兆年眞”이라 적혀 있다. 이장경은 74
세(1342년)의 나이에 “誠勤翊贊勁節功臣”으로 책봉되어 공신화상이 그려진 바 있다. 그러
나 여기에서 다룰 <이장경 상>을 당시의 공신화상으로 볼 수 있는 근거는 찾을 수 없다.
1655년에 첫 번째 이모를 했고, 1714년 본은 두 번째 이모본이다. 얼굴의 크기가 작고,
모자의 두께가 얕으며, 양 팔의 비례가 부적절하다. 또한 의자 손잡이가 좌우 수평을 이루
지 못해 어색해 보인다. 이는 이모의 과정에 나타난 화가의 미숙한 표현에 기인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714년 본의 미흡한 점들은 1746년 이모본에서 크게 보완되었다. 얼굴
과 신체의 비례가 적절하게 바뀌었고, 표정에서도 당당한 풍모가 전해진다. 가장 마지막에
이모된 1825년 본도 1746년 본의 형태를 변형 없이 옮겨 그렸다.
3) 이포(李褒) 초상
이포(1287∼1373)는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예문관대제학 李兆年의 아들이다. 관직은 檢
校侍中에 이르렀고, 星山君에 봉해졌다.
1714년의 <이포 상>에는 이모시기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墨書한 비단 면이 떨
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1746년 본의 화면 오른쪽 상단에는 “壁上三重大匡檢校門下侍中 贈
諡敬元公李公諱褒眞”이라 쓰여져 있다. 현재 1714년 본과 세 번째 이모본인 1746년 본,
그리고 네 번째 이모본인 1825년 본이 남아 있다.
154 藏書閣 22집
<이포 상>은 화면의 상단부가 박락되었지만, 얼굴 부분과 단령의 색상은 큰 손상 없이
매끈하게 채색된 상태이다. 다만 얼굴 부분에는 약간의 가필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포 상>은 중절모에 녹색 직령을 입고 교의자에 앉은 모습이다. 양 손에는 긴 염주를
쥐었으나 이를 먹으로 지운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얼굴은 약간 왼편으로 돌렸으나 신체
는 정면을 향하였다. 의자에는 호피를 깔았고, 바닥에는 채색 문양을 그려 넣었다.
그런데 1746년 본에는 염주가 지워진 채 흑색 단령에 품대를 착용한 모습이며, 1825년
본은 왼손이 품대를 쥔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바꾸어 그렸다. 염주 표현에 있어 변화가 크게
나타나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고려사??에는 庚午日에 왕이 손수 星山君 李褒의 초상화를 그려서 그 아들 守侍中 李仁
任에게 주었다34)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 기록 속의 초상화는 1714년 본과는 별개의 것
으로 보아야 한다. 1714년 본은 당시에 함께 그려진 <이장경 상>, <이조년 상>처럼 다른
이모본의 인물상과 화법상의 공통점이 많기 때문이다.
4) 이승경(李承慶) 초상
이승경(1290∼1360)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政堂文學을 지낸 이조년의 조카이고, 李千
年의 아들이다. 元나라의 문과에 합격하여 御史를 비롯한 여러 관직을 지낸 뒤, 遼陽省參知
政事에 올랐다. 크고 작은 공적으로 인해 元의 조정으로부터 아버지 李千年과 조부 李長庚
에게 ?西郡公의 작호가 추봉되었다. 귀국한 뒤 공민왕조에서 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고,
都元帥가 되어 홍건적을 물리쳤으며 忠勤勁節協謀威遠功臣의 칭호를 받았다.
<이승경 상>은 원유관에 조복을 입고서 홀을 든 모습이다. 성주이씨 가문의 世傳 초상화
가운데 이와 같은 모습은 <이승경 상>이 유일하다. 1714년 본은 홀을 들고서 약간 왼편으
로 몸을 돌린 모습이다. 녹색의 조복은 소매가 아래로 늘어져 몸과 옷자락이 원통형처럼
퉁퉁하게 표현되었다. 그러나 1746년 본은 홀을 든 팔과 옷자락의 형태에 많은 변화를 주었
다. 옷 주름도 짙은 먹선으로 훨씬 활달하게 처리하였고, 주름 사이에도 명암을 주어 입체
감을 강조하였다.
1865년 본은 服色이 짙게 채색되었으며, 신체의 길이가 훨씬 커졌고 얼굴의 표정도 근엄
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1746년 본보다 오히려 1714년 본을 母本으로 하여 그린 듯하다.
1746년 본은 대부분 전남 고흥의 성산사에 移安되었는데 <이승경 상>은 당시 이안본에 포
34) ??高麗史?? 第43卷, ?世家? 第43. “庚午 王手寫星山君李褒眞賜其子守侍中仁任”
星州李氏 家門의 초상화 연구 155
함되지 않아 안산영당에 남았다.
5) 이원구(李元具) 초상
이원구(1293~?)는 고려 후기의 武臣으로 호는 稼亭이다. 平壤府尹公 李麟起의 아들이자
李崇仁의 아버지이다. 易東 禹倬(1263~1342)과 교유하였고, 중앙관료와 지방관을 역임하면
서 세운 공로로 인해 推誠佐命功臣의 호를 받았다.
1714년 본 <이원구 상>은 두 번째 이모본이다. 중절모를 쓰고, 반우향의 방향으로 교의
에 앉은 모습이다. 상체에 비해 하반신이 작게 표현되었다. 단령의 왼편 옆트임은 의자 바
닥으로 들어갔다가 아래로 늘어뜨려진 사실적 관계가 적절히 묘사되었다. 의습선은 변화가
없는 鐵線描를 사용하였고, 주름이 많은 곳과 성근 곳의 변화를 조절하였다. 이마 위로 모
자를 쓴 부분은 비례가 짧고 어색하게 묘사되었다. 얼굴 부분에 박락이 심한데, 특히 수염
에 덧칠이 많이 된 상태이다.
1746년의 이모본은 전하지 않고, 1825년 본만이 남아 있다. 이 이모본에는 단령이 청색
으로 바뀌었고, 염주가 그려져 있지 않다. 얼굴 묘사에는 명암이 들어가 있으나 복식의 색
상과 달리 토황색 계통의 차분하게 가라앉은 색조로 채색되었다.
6) 이인민(李仁敏) 초상
이인민(1340-1393)은 고려후기의 문신으로 호는 慕隱이며, 敬元公 李褒의 6째 아들이다.
1360년(공민왕 9)에 문과에 급제한 이후 관직은 判開城府事에 이르렀다.
<이인민 상>은 1714년 본이 남아 있지 않고, 1746년 성산사본과 1825년의 이모본 2점이
전한다. 평량자 모양의 笠을 쓰고 團領에 拱手 자세로 교의자에 앉은 모습이며, 신체는 약
간 반우향한 자세이다. 다른 상에 비해 얼굴색이 강하고, 음영법이 적용되었다. 또한 단령
의 윤곽과 주름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처리하였다. 그러나 선묘의 사이에 짙은 색조를 채색
하여 입체감을 강조한 부분에는 경직된 느낌이 강하다.
1825년 본은 1746년 본과 도상에는 차이가 없으나, 채색이 짙고 색감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그런데 <이인민 상>의 취세는 앞 시기 인물의 초상화와 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손을 노출시키지 않고 공수자세를 취한 것은 고려말기에서 조선초기로 넘어가는 사대부
초상의 과도기적인 변화상을 시사한다.
156 藏書閣 22집
?도 4? <李崇仁 像>
1910년대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도 3? <李崇仁 像>
1746년, 絹本彩色
140.0×80.0㎝, 星山祠
7) 이숭인(李崇仁) 초상
이숭인(1347∼1392)은 고려말기의 학자이며 자는 子安, 호는 陶隱이다. 星山君 李元具의
장남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肅雍府丞에 올랐고, 그 뒤 長興庫使兼進德博士가 되
었다. 문장에 특히 뛰어났으
며, 저서로 ??陶隱詩集?? 5권
이 있다.
현존하는 <이숭인 상>은
1746년 성산사 본과 1865년
본이 전한다. 화면 우측에
“奉翊大夫簽書密直司事兼都
評議使司使兼判典校寺事右
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李公
諱崇仁眞”이라는 긴 품계와
관직, 그리고 이름을 기록했
다. 화면의 왼편 상단에는 자
찬문이 적혀 있다. 이 자찬문은 ??東文選?? 권51에 ?鄕僧止庵寫余陋眞因作贊?이라는 제목으
로도 실려 있다.
단령 부분은 석채를 사용한 탓인지 대부분이 떨어져 나간 상태이다.(도 3) 1910년대에
촬영한 국사편찬위원회 소장의 유리원판 사진을 통해 1746년 본 <이숭인 상>의 훼손전 상
태를 볼 수 있다.(도 4) 아마도 이 사진을 촬영한 뒤에 박락 현상이 급속도로 진행된 듯하
다.
그림의 상단에는 이숭인의 自讚이 적혀 있는데, 이를 번역하여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얼굴이 납짝하고 부드러운 것은 부인의 유형(類形)이요. 글귀를 수식하는 것은 아이들
의 공부다. 만일 달가(達可)의 탁월함과 자허(子虛)의 치밀함과 천민(天民)의 정민(精敏)
함과 중림(仲臨)의 우수함과 가원(可遠)의 온자함과 종지(宗之)의 해박함에 비한다면,
이야말로 부석돌과 옥의 차이다. 비록 그러나 우리 나라에 태어나서 중국에 대하여 말
하기를 좋아하며, 혹은 먼 해변으로 쫓김을 당하여도 더 섭섭히 여기지 아니하며 혹
중앙정부에 벼슬한다하여 더 기뻐하지 않았다. 다만 조심하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수양
하면 행여나 나의 마음을 속이지는 않을 것이로다.35)
星州李氏 家門의 초상화 연구 157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주이씨 초상화 가운데 고려시대의 인물은 생시에 그려진
것으로 모자와 복식 등 당시의 시대상을 충실히 나타내고 있다. 모두 안산영당에 봉안하기
위해 그린 것으로 高僧眞影과 같은 佛畵的인 요소가 강한데, 가장 처음 그려진 원본은 畵僧
이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2. 조선초기 인물의 이모본
성주이씨 초상화 가운데 조선초기를 살았던 인물은 李稷, 李濟, 李師厚, 李稶 등이다. 이
들의 초상화는 형식면에서 고려시대의 인물과 뚜렷한 차이를 나타내며, 조선초기 초상화로
서의 공통된 특징을 보인다. 각 인물별로 어떤 현상을 보이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1) 이직(李稷) 초상과 이사후(李師厚) 초상
李稷(1362∼1431)과 李師厚(1388-1435)는 父子 관계이며, 초상화도 비슷한 형식을 취하
고 있어 여기에서 함께 다룬다. 이직은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虞庭, 호는 亨齋이다.
門下評理를 지낸 李仁敏의 아들로서 開國功臣과 佐命功臣이 되어 星山府院君에 追封되었
다. <이직 상>의 오른편 상단에 “…佐命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使領經筵藝文春秋
館書雲觀事世子師星山府院君 贈諡文景公李公諱稷眞”이라 적혀 있어 그의 관력을 알려준
다. 이사후는 이직의 장남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淸要職을 두루 거쳤으며, 관직은 漢城府判
尹에 이르렀다.
<이직 상>은 얼굴을 왼편으로 半右向하였고, 공수자세를 하고 交椅에 앉은 모습이다.
오사모에 홍색 團領을 입었는데, 눈썹과 눈을 비롯한 얼굴의 좌우 균형이 조금 어긋나 있
다. 같은 교의자상에 공수자세를 한 <이사후 상>도 <이직 상>과 기본 형식이 유사하다.
교의의 모양과 脚踏의 형태, 두 발을 올린 방향도 거의 같다. 또한 허벅지 부분의 비례가
짧게 단축되어 있으나, 단령의 우측 트임이 의자 밑으로 접혔다가 펴지는 형태여서 사실적
인 요소를 반영했다.
이직은 1401년(태종 1)에 좌명공신으로 책봉되었다. 뒤에서 다시 살펴보겠지만, 이 초상
35) ??陶隱集?? 卷5, ?鄕僧止菴寫余陋眞 因作讚?. “狀貌卑柔 婦人之? 章句雕刻 童子之學 若擬諸達可之卓
越 子虛之縝密 天民之精敏 仲臨之俊逸 可遠之溫雅 宗之之諧博 所謂??之與美玉也 雖然 托迹於東國
喜談於中原 或??海之濱 而無所加感 或游岩廊之上 而無所加欣 惟其?然而自修 庶幾不欺於心君乎”
번역은 한국고전번역원의 번역본을 따랐다(
http://www.minchu.or.kr).
158 藏書閣 22집
화는 이직이 40세에 받은 공신화상을 모본으로 하여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교의좌상의
기본 형식이 공신상과 비슷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좌명공신으로 책봉된 공신
가운데 화상이 남아 있는 <이천우 상>과의 비교를 통해 그 상관관계를 엿볼 수 있다.36)
교의자에 공수자세를 한 모습은 앞서 살펴본 고려시대의 인물상과 시대상의 차이를 설명해
준다.
2) 이제(李濟) 초상
李濟(1365∼1398)는 여말선초의 문신으로 李兆年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李仁立이다. 자
는 子安이며, 蔭補로 벼슬에 올라 1352년(공민왕 1) 左代言이 되었고, 조선의 開國을 도와
純忠佐命開國功臣 1등에 훈녹되었다. 이어 興安君에 봉해졌으며, 李成桂의 셋째 딸인 慶順
公主와 혼인하였으나 왕자의 난 때 죽임을 당했다.37)
이제의 초상화는 현재 3본이 남아 있는데, 다른 본들과 이모본의 제작 시기에 차이가
있다. 1798년 본의 화면 상단에는 1707년(숙종 33)과 1735년(영조 11)에 각각 重摹된 것으
로 적혀 있다. 최초의 원본을 이모한 개모본은 언제 그렸는지 알 수 없다. 어떤 연유에서인
지 18세기에 세 차례 이모가 이루어진 셈이다. 우선 1735년 본은 공수자세에 반우향하여
交椅가 아닌 繩床에38) 앉은 모습이다. 얼굴 부위는 비단이 절반 이상 떨어져 나간 상태이
다. 왼쪽 눈과 귀만 남기고 배접지가 드러나 있는데, 그 위에 눈과 코, 그리고 입술 등을
간략하게 그려 넣었다. 오른쪽 눈썹 위쪽과 사모부분도 마찬가지로 임의대로 그린 것이다.
그런데 1798년(정조 22) 본에는 얼굴의 박락된 부분을 상당히 보완하였다. 상상에 의한 요
소가 다소 반영되었다.
1798년 본에는 원본의 상태가 얼마나 잘 보존되었는지는 확증하기 어렵다. 1865년의 이
모본에는 단령의 색상이 바뀌었으며, 표정 또한 1798년의 이모본과 차이가 있다.
3) 이욱(李稶) 초상
李稶(1562∼1617)은 자가 仲棠, 호는 芝江 또는 醉翁이다. 1585년(선조 18) 진사시에 합
격하고, 1599년(선조 32) 별시문과에 丙科로 급제하였다. 17세기 초반기까지 활동한 인물
36) 趙善美, 앞의 책, 192~194쪽.
37) ??태조실록?? 권14, 7년(1398) 8월 26일조.
38) 繩床은 새끼나 끈을 꿰어 앉을 수 있도록 만든 접이식 구조의 의자를 말한다.
星州李氏 家門의 초상화 연구 159
로 19세기까지 이모된 성주이씨 인물 가운데 가장 마지막 시기에 놓인다.
<이욱 상>은 烏紗帽에 홍색 團領을 착용하고 의자에 앉았다. 1714년에 처음 개모되었으
나 현재 남아 있지 않고 1746년 본과 1865년 본만이 전한다. 1746년 본의 표장상태는 무릎
아래의 발과 바닥 부분이 잘려져 있다. 사모는 帽頂이 낮고 角이 직각을 이루며 둥글어
당시의 양식을 반영하였다. 홍색단령 부분의 목 부분이 둥글게 돌아간 것은 17세기 전반기
복식의 특징이다. 다만 단령의 윤곽과 선묘에 각이 져 있고, 주름 사이의 명암도 강하게
들어가 있어 경직된 느낌을 벗어나지 못했다.
1865년 본은 1746년 본의 형태를 충실히 재현하였다. 다만 1746년 본에서 잘려진 무릎과
발, 踏臺 등을 새로 그려넣었으나 비례가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 결과 나지막한 의자에 앉
은 듯 하체가 지나치게 짧게 묘사되었다. 얼굴은 단령의 짙은 색조에 비해 차분한 토황색으
로 채색하였다.
위의 조선초기 인물 4인의 초상은 단령과 사모를 착용한 복식이 고려시대와 달라 조선초
기의 도상임을 말해주고 있다. 손을 드러내지 않고 공수자세를 취한 점은 최초의 圖寫가
화승이 아닌 일반 화가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추측하게 한다. 다음 단계에서 화승이 이를
이모하였다 하더라도 원래의 기본 형태와 주요 취세는 그대로 보존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조선초기의 인물인 <이사후 상>과 <이제 상>은 본인들의 功臣畵像을 모본으로 하였
다고 추정되는데, 이는 공신화상의 이모본으로 전하는 <이천우 상>, <마천목 상>과의 비교
를 통해 도상의 공통점을 확인 할 수 있다.
Ⅳ. 성주이씨 초상화의 양식
1. 화가에 대한 검토
성주이씨 초상화에서 반드시 확인해야 할 내용은 畵家의 문제이다. 초상화의 봉
안처가 경북 성주이므로 인근 지역에서 활동한 화가가 그렸을 가능성이 크며, 지방 화가와
지역 화풍의 특색에 대해 짚어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주이씨 초상화를 그린
화가에 대한 정보는 전하지 않는다. 따라서 기록은 없지만, 이모본에 나타난 화법에 근거하
여 화가와 관련된 단서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를 통해 성주이씨 초상화를 그린 畵家群의
160 藏書閣 22집
?도 5? <鄭夢周 像>
1629년 이모본, 絹本彩色
169.5× 98.0㎝, 임고서원
성격과 畵法에 대한 이해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화가와 관련된 고찰의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고려시대의 인물
인 경우 최초의 원본은 대개 畵僧이 그렸을 가능성이 크고, 조선시
대 인물은 그 원본을 화승이 아닌 일반화가가 그린 것으로 추측된
다. 화승은 사찰에서 불교관련 그림를 맡아서 그린 승려화가이고,
일반화가란 圖畵署에 소속되거나 직업화가로 활동한 이를 말한다.
성주이씨 초상화를 봉안한 安山影堂이 安峯寺 안에 있었고, 사
찰에서 이를 관리한 점은 화승이 초상화를 그렸을 가능성을 높여
준다. 더 구체적으로 초상화에 손을 드러내거나 비교적 자유로운
포즈를 취한 점, 염주가 그려진 점 등은 이 그림을 화승이 그린
것으로 추측하게 하는 일차적인 단서이다.39)
성주이씨 초상화 가운데 화가가 화승으로 밝혀진 예는 <이숭인
상>이다. 1746년 본 <이숭인 상>에 기록된 自讚은 ??東文選?? 권51에 ?鄕僧止庵寫余陋眞因
作贊?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는데, 이 찬문의 제목을 통해 이숭인의 초상 원본은 鄕僧인 止庵
이 그렸음을 알 수 있다.40) 특히 이숭인 스스로 ‘鄕僧’이라 한 점은 지암이 성주지역에서
활동하던 화승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어 분명 주목되는 점이다. 또한 <이숭인 상>에서 왼손
을 들어 손가락을 모은 모양은 염주를 쥐었을 단서로 생각되는데, 이런 부분은 화승 그림과
의 친연성을 한 단계 더 설명해주고 있다.(도 3)
염주를 쥔 또 다른 초상인 <이조년 상>과 <이포 상>, 그리고 <이원구 상>의 원본을 그렸
을 화가도 화승으로 추정된다. 이 초상화의 원본을 화승이 아닌 고려시대의 일반 화가가
그렸다면, 아마도 <鄭夢周(1337~1392) 상>(도 5)처럼 拱手 자세를 취한 모습이었을 가능성
이 크다. 이들 이모본 초상화에 그려진 염주만 제외한다면, 交椅의 모양이나 踏臺에 발을
올린 부분도 <정몽주 상>과 유사하다. 이러한 특징은 화승의 그림이 일반적인 초상화와
같은 점이 무엇이고, 또 어떻게 다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요소이다.
화승이 일반 사대부상을 그리게 될 때 일반적으로 자신에게 익숙한 佛畵風의 화법을 사
39) 화승이 그린 일반사대부상에서 이러한 특징을 엿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안동출신의 <李賢輔 상>
이다. <이현보 상>의 원본과 이모본은 ??肖像, 형상과 정신을 그리다??, 한국국학진흥원·한국유교문
화박물관, 2009, 98~111쪽 참조.
40) 1714년 본 <이숭인 상>의 왼편 상단에 기록된 自讚은 ??東文選?? 권51에 ?鄕僧止庵寫余陋眞因作贊?이
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星州李氏 家門의 초상화 연구 161
?도 6? <李承慶 像>
1746년, 絹本彩色
136.0×80.0㎝, 安山影堂
?도 7? <地藏十王圖> 중 無毒鬼王像
조선전기, 絹本彩色, 205.8×
162.0㎝, 일본 西方寺
용하여 그리게 된다.41) 이를 구체
적으로 예시하는 또 한 예가 <이
승경 상>이다. 염주 이외에도 불
화 속의 인물상과 유사한 도상을
보이고 있어, 앞서 살핀 바와 같
이 화승의 그림임을 시사하는 데
무게를 실어준다.
<이승경 상>은 遠遊冠에 홀을
든 관복본 초상으로 그려졌다. 이
는 이승경이 원나라의 조정에서
고위 관직에 올랐으므로 官歷을
상징하는 형상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최초의 도상은 이승경의 실제 모습에 기초하였지만,
1746년 본에는 그 형상을 홀을 든 문관의 모습으로 설정하였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이
과정에서 조선초기의 불화 속에 등장하는 도상이 차용된 것으로 추측된다는 점이다. 우선
<이승경 상>(도 6)과 地藏十王圖에 등장하는 無毒鬼王像과의 비교를 통해 접근해 보았다.
무독귀왕은 대개 遠遊冠을 쓰고 홀 또는 經櫃를 들고 있거나 合掌한 모습으로 표현된다.42)
예컨대 일본 西方寺 소장의 조선전기 <지장시왕도>의 무독귀왕과 비교해 보면(도 7), 왼편
으로 반우향한 자세에 홀을 든 모습이 1746년의 <이승경 상>과 매우 흡사하다. 특히 팔을
들어 올림으로써 아래로 늘어뜨려진 옷자락의 좌우 윤곽과 형태에 있어 공통점이 뚜렷하
다. 이는 불화 속의 인물 모티프를 차용하여 그렸을 가능성이 높고 그것을 그린 화가가
화승임을 추측하게 한다.
그러나 성주이씨 초상화에 나타난 조선초기의 인물은 고려시대와 다른 경향을 보여준다.
특히 조선초기의 인물인 李稷·李濟·李師厚 등 3인의 초상화는 고려시대의 取勢와 달라
조선초기에 그려진 양식임을 방증해준다. 이들의 초상화 원본은 일반 화가가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화승 그림의 특징으로 간주되는 손을 드러내거나, 염주를 그리지 않았고, 관복에
41) 시대가 내려가는 경우이지만, 16세기의 화승이 그린 사대부상인 <李賢輔 상>이나 <申從渭 상> 등은
화승 양식의 연장선에서 비교해 볼 수 있는 도상이다.(??肖像, 형상과 정신을 그리다??, 2009)
42) 무독귀왕은 道明尊者와 함께 지장보살의 가장 대표적인 挾侍로서 귀왕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문관
또는 왕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김정희, ??조선시대 지장시왕도 연구??, 一志社, 1996,
177쪽.
162 藏書閣 22집
공수자세를 한 모습은 그러한 일단을 짐작하게 한다. 특히 <이직 상>과 <이제 상>은 공신
화상으로 판단되는데.43) 이는 각 인물에 해당하는 최초의 원본 초상을 화승이 일괄하여
그린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즉, 공신화상과 같이 여러 계기를 통해 순차적으로 제작된 그
림들이 안산영당에 걸렸고, 이것을 후대에 이모한 그림들이 전승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특히 눈여겨 볼 초상화는 <이인민 상>이다. <이인민 상>부터는 원나라식 중절
모가 사라지고, 평량자형 모자와 사모, 그리고 단령에 각대를 착용한 모습이 등장한다. 앞
서본 초상화와 달리 공수자세를 취한 점이 특히 이채롭다. 이는 <이인민 상>의 원본을 그린
화가가 화승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되며, 애초에 일반화가가 그린 것을 이모하여 안
산영당에 봉안한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성주이씨 초상화의 최초 원본은 고려시대의 성
주지역에서 활동한 화승과 조선시대의 일반 화가에 의해 그려졌고, 이것을 후대에 화승들
이 맡아서 이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모본을 그린 화가가 화승이든 일반 화사이든 최초
그려진 원본의 도상은 큰 변형 없이 그대로 지속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요소는 다음
절의 화법과 도상의 특징을 다루면서 부분적으로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2. 화법과 도상의 특징
성주이씨 초상화 가운데 최초의 圖寫本은 모두 초상 인물이 생존해 있을 때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이장경의 초상이 13세기 중후반 경에 가장 먼저 제작되었고, 나머지는 14세기와
15세기에 걸쳐 그려졌다. 성주이씨 초상화에 기록된 이모의 시기는 최초의 도사본으로부터
시작하여 移摹를 거듭해 왔음을 알려준다. 이 절에서는 초상화의 양식도 이모의 시기에 따
라 달라진다는 점에 주목하여 도상과 주요 화법의 특징을 각 이모의 시기별로 살펴보기로
한다.
1) 1714년 이모본의 특징
1714년(숙종 40)의 이모본은 고려시대의 인물 초상 5점과 조선초기의 초상 3점이 전한
다. 첫 번째로 살펴 볼 점은 얼굴의 표현에 나타난 특징이다. 1714년의 이모본은 얼굴의
이목구비를 규정한 선이 가늘고 옅다. 거리를 두고서 보면, 이목구비가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을 정도이다. 이러한 특징이 1714년의 이모본에 전반적으로 나타난다. 안면의 묘사는 渲
43) 李稷은 佐命功臣 4등, 李濟는 開國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星州李氏 家門의 초상화 연구 163
染法에 의해 전체를 고르게 채색하는 방식을 적용했다. 그런데 상당수의 화본에 변색이 진
행되었다. 특히 얼굴빛이 잿빛으로 변색된 예가 <이직 상>과 <이사후 상>, <이원구 상>
등에서 뚜렷하게 관찰된다. 원래의 색상은 <이승경 상>과 같았을 것이나, 초상이 완성된
이후 안료에 포함된 鉛白 성분이 변색을 일으킨 듯하다.44) 앞서 본 <이조년 상>과 <이장경
상>의 얼굴도 이와 같은 현상을 보이는데, 다만 정도가 경미할 뿐이다.
원래의 색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는 <이승경 상>이다. <이포 상>은 얼굴에 약간의 加
筆을 통해 陰影이 들어간 상태이다. 반면 <이승경 상>은 적황색 계통의 살색을 선염법으로
채색하였는데, 명암이나 굴곡의 변화는 거의 주지 않았다. 18세기 초반기의 일반 초상화에
는 입체감 있는 명암법이 서서히 적용되는 시기이지만, 1714년 본에는 이러한 요소가 나타
나지 않는다. 즉, 얼굴의 세부 묘사에 치중하지 않은 조선중기 초상화의 古式的인 요소가
남아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장경 상>, <이포 상>, <이승경 상> 등에는 수염과 눈썹에 연녹색의 바탕을 칠한 다음
에 선묘로 하나하나 그려 빗질해 놓은 듯 단정하게 묘사하였다. 이는 수염을 빽빽하게 묘사
하는 하나의 방법일 텐데, 이러한 묘사법은 1714년 본에 공통적으로 보이지만, 일반 초상화
에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1714년 본의 얼굴 묘사에 나타난 선묘와 색감, 의습을 표현한 부분, 그리고 세부 묘사
등으로 미루어 볼 때, 한 사람의 화가가 맡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모본이 지닌 17세
기 중엽의 고식적인 요소도 엿볼 수 있다. 18세기 전반기 초상화의 특징인 명암법이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원본에 충실해야할 이모본의 특성을 고려하여 이모 당시의 화법
을 적극 적용하지 않은 결과로 이해된다.
두 번째는 團領의 표현이다. 단령의 옷주름 처리에는 매우 가는 먹선을 사용했다. 선의
강약이나 태세, 완급, 농담 등의 변화가 없는 철선묘이다. 비단에 그린 점을 보면 이모의
과정에 초본인 밑그림을 두고서 형태를 옮겨 그렸겠지만, 신체의 균형과 동세를 고려한 점
없이 윤곽만 긋는 식으로 구사하였다. 이러한 측면은 능숙한 기량을 지닌 화가의 솜씨로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세 번째는 조선초기의 초상 인물 가운데 功臣畵像을 이모한 것으로 추측되는 이모본을
볼 수 있다. 성주이씨 가운데 조선초기의 李濟와 李稷은 공신에 책봉된 인물이다. 따라서
44) 鉛白은 백색 안료로서 발색을 매끄럽게하는 효과를 나타내어 초상화의 얼굴이나 복식 부분의 채색에
함께 사용되었다. 그림물감과 혼색하면, 황화현상을 일으켜 검게 변하는 것이 결점이다.
164 藏書閣 22집
?도 8? <李濟 像>
1714년, 絹本彩色
144.5×86.0㎝, 安山影堂
?도 9? <馬天牧 像>
絹本設彩, 157.0×95.0㎝
全南 谷城郡 馬天牧祠宇
?도 10? <李稷 像>
1714년, 絹本彩色
153.5×89.5㎝, 安山影堂
?도 11? <李天祐 像>
絹本彩色, 159.0×
104.0㎝, 全南 靈光郡
影堂
두 상은 공신상을 모본으로 하여 이
모한 것으로 추측된다.
李濟는 純忠佐命開國功臣 1등에
녹훈된 공신이다. 따라서 <이제 상>
(도 8)은 좌명공신(1401년)에 녹훈된
<馬天牧 상>과의 비교를 필요로 한
다.45)(도 9) <마천목 상>에서 공수
자세를 취한 점, 의자가 繩床인 점,
그리고 단령의 옆트임 등이 <이제
상>과 매우 흡사하다. 交椅가 아닌
繩床에 앉은 것이 주목된다.46) 따라
서 <이제 상>의 원본은 <마천목 상>과 유사한 형식을 띠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이제 상>은
그 開國功臣畵像을 모본으로 이모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佐命功臣에 책봉된 <이직 상>(도 10)과 비교해 볼 수 있는 것은 佐命功臣인 <李天祐
(?-1417) 상>(도 11)이다. 1774년(영조 50)
에 이모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천우 상>은
가채의 흔적이 역력하지만, 도상 자체는 조
선초기의 형식을 지닌 적절한 비교 자료이
다.47) <이천우 상>을 <이직 상>과 비교해
보면, 신체의 방향, 교의자의 모양 등에서
대체로 동일한 시대양식을 띠고 있다. 다만
<이천우 상>에는 拱手한 팔을 약간 들어 올
려 그 아래로 品帶가 보이도록 했는데, 이
점은 오히려 <이사후 상>과 유사하다. <이
직 상>은 팔을 품대 아래로 내린 상태이다.
45) 趙善美, 앞의 책, 191~192쪽. ??朝鮮史料集眞??에 흑백 사진으로 실린 <마천목 상>은 일제강점기 이후
단령에 채색을 입혀 문양을 그리고 흉배를 그려 넣어 이모본의 특징을 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46) 繩床에 앉은 초상화는 1580년작 <申從渭 상>에서도 볼 수 있다. ??肖像, 형상과 정신을 그리다??,
122~129쪽.
47) 趙善美, 앞의 책, 192~194쪽.
星州李氏 家門의 초상화 연구 165
<이천우 상>을 좌명공신상의 전형 형식으로 본다면, 오히려 <이사후 상>이 여기에 부합된
다.48) 그러나 이는 일부분에 해당하는 특징이므로 이러한 현상을 약간의 차이점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1714년에 이모된 <이직 상>의 최초 원본은 일반 초상화가가 그린 사대부상이나 공신화
상을 이모한 것으로 추정된다. 공수자세와 交椅의 형태 등 엄격한 전형을 준수한 점이 이를
짐작하게 한다. 1714년 본은 전반적으로 필선과 선묘, 형태의 재현 등에서 소략한 면이 현
저하다. 그러나 17세기의 모본을 옮겨 그리는 과정에서 대체로 형태의 왜곡 없이 이모한
것으로 파악되며, 古式的인 화법을 띠고 있는 것도 이모본에 충실하고자 한 점으로 인정된다.
2) 1746년 이모본의 특징
1746년(영조 22) 본은 전남 고흥의 星山祠本 5점과 안산영당 본 3점이 남아 있다.
첫 번째로 살펴볼 특색은 1746년의 이모본이 전반적으로 1714년 본보다 달라진 형태와
탄탄한 묘사력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특히 안면 묘사에 渲染을 바탕으로 하고, 그 위에 선
묘로 윤곽을 정하는 방식은 이모시의 시대양식인 영조시대의 초상화법을 따른 것이다.49)
1746년 본에는 부분적으로 이모 당시의 화풍을 반영하면서도 고식적인 요소를 띤 부분들
이 발견된다. 특히 <이승경 상>과 <이욱 상>에서 엿볼 수 있는 특징이다. <이욱 상>에는
부분적으로 이마와 눈 주위, 턱 아래의 주름 등에 명암법을 도입했다. 하지만 기본적인 형
태는 측면의 코, 정면의 눈과 입술 등 17세기의 형식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이승경 상>은
얼굴에 일체의 명암을 넣지 않았는데, 이는 모본에 충실하고자 한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아주 부분적으로 눈동자의 동공 묘사에 18세기 초상화에 보이는 미세한 음영이 들어간 것
을 보면, 18세기 화법의 특징이 부분적으로 반영되었음이 확인된다.
한편 1798년의 이모본인 <이제 상>에는 얼굴 전체에 복숭아 빛의 밝은 살색으로 채색하
였고, 좌우 볼에 홍조를 살짝 올린 상태이다. 이 도상은 1735년 본의 <이제 상>에서 절반
이상 박락된 얼굴을 모본으로 하여 그린 것인데, 전반적으로 추측하여 그린 追寫的인 성격
이 강하다.
두 번째는 후대에 가채한 부분과 선묘의 구사이다. 1746년 본에도 가채를 한 부분이 상
48)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필자는 현재의 <李稷 상>과 <李師厚 상>이 바뀐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더구나 이 두 상은 안산영당에 봉안되어 있을 당시, 오랫동안 함께 나란히 걸려 있었다.
49) 趙善美, 앞의 책, 102쪽.
166 藏書閣 22집
당수 발견된다. 원래의 먹선 위에 두툼한 암홍색 선으로 덮은 예도 있다. 채색도 두텁게
더하여 색감의 채도가 상당히 강하게 드러난다. 복식의 선묘도 이전보다 상당히 세련되었
다. 특히 <이조년 상>에서는 활달한 태세와 긴장감 있는 선조를 느낄 수 있다. 이러한 특징
은 <이인민 상>과 <이승경 상>에서 肥瘦의 변화는 없지만, 中峯의 필세를 갖춘 선묘에서도
확인된다.
세 번째는 18세기적 요소가 반영된 특징이다. 1746년의 <이조년 상>의 의자에는 표범
가죽을 걸쳤는데, 표범 가죽의 머리가 踏臺의 중앙에 놓인 것은 18세기 사대부상에서 볼
수 있는 한 특징이다. 이는 이모본을 그리면서 그 모본에 없던, 이모 당시에 유행한 장식물
의 배열 형식을 적용한 일면이다. <이승경 상>에서 눈동자를 입체감 있게 묘사한 점도 여기
에 해당한다. 18세기 중엽은 조선시대의 초상화가 가장 높은 수준에 올랐던 시기임을 고려
한다면, 1746년 본에 보이는 18세기적 요소는 중앙에서 이루어진 초상화 양식이 지방의
화가들에게 까지 영향이 미쳤음을 알려주고 있다.
네 번째는 초상화의 바닥에 깔린 돗자리의 표현이다. 1746년의 이모본이 1714년 본과
다른 점 가운데 하나는 바닥에 돗자리가 모두 깔렸다는 점이다. 초상화의 바닥에 돗자리를
묘사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조선말기의 高僧眞影에 화문석이 깔리는 것과 같은 원칙을
적용한 듯하다. 1746년 본에 나타난 돗자리의 묘사는 19세기의 고승진영에서 보이던 바닥
처리의 선행 형식으로 추정된다. 일반 사대부상에서는 18세기 중엽 경부터 초상화의 바닥
에 돗자리가 묘사되기 시작한다. 그런데 1746년 본은 같은 시기의 사대부상에 묘사된 것과
는 다른 형태로서 결이 촘촘하고 타원형의 문양이 많이 들어간 것이 특징이다. 이는 조선말
기의 고승진영에서 볼 수 있는 바닥면의 돗자리와 매우 유사한 특징을 띠는 것으로, 고승진
영식 돗자리 문양의 18세기 중엽 양식임을 알려준다.
1746년 본은 1714년 본에 비해 얼굴과 신체의 비례를 적절하게 바꾸거나 불합리한 요소
들을 개선하여 그리고 있음을 볼 수 있고, 18세기 중엽의 초상 양식이 부분적으로 반영된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3) 19세기 이모본의 특징
19세기의 이모본은 1825년(순조 25)과 1865년(고종 2)의 두 차례에 걸쳐 제작되었다. 이
처럼 40년의 시차를 두고 나누어 그린 것은 전체를 한꺼번에 이모할 경우의 경비 부담을
덜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전체 11명의 인물 가운데 6명을 1825년에 먼저 이모하였고,
星州李氏 家門의 초상화 연구 167
?도 12? <李兆年 像>
1825년, 絹本彩色
154.0×102.0㎝, 安山影堂
?도 13? <李褒 像>
1825년, 絹本彩色
154.0×102.0㎝, 安山影堂
나머지 5명은 1865년에 옮겨 그렸다. 이 가운데 <이사후 상>은 두 차례 모두 이모본이 그려
졌다.
구체적으로 살펴볼 첫 번째는 이모본의 母本에 대한 것이다. 19세기 이모본 가운데 <이
조년 상>, <이포 상>, <이인민 상>의 경우 이모시에 모본이 된 초상화는 두 종이 될 수
있다. 즉 성주의 안산영당에 있던 1714년 이모본과 고흥의 성산사 본이 그것이다. 이 가운
데 1825년과 1865년의 이모본을 제작할 때, 모본으로 삼은 것은 어느 본일까? 성산사본을
모본으로 택했다. 바로 인근에 있는 안산영당 본이 아니라 먼거리에 있는 성산사 본을 택한
것은 바로 앞 시기에 그린 것을 모본으로 삼은 원칙을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
이 과정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1764년 성산사에 봉안하기 위해 고행을 감내하며
고흥에서 성주로 와서 가져간 초상화가 지금의 성산사 본이다. 그런데 1825년에는 이모를
위해 성주에서 고흥의 성산사로 가서 이모본을 그려오게 되었다. 그 과정은 기록으로 남기
지 않았지만 1825년 본에 나타난 초상화의 양식이 이를 대변해준다. 이는 1714년 본과
1746년 본, 그리고 1825년 본이 함께 남아 있는 <이조년 상>과 <이포 상>의 비교를 통해
자세한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 예컨대 1825년의 <이조년 상>의 경우 의자의 팔걸이 높이
에 차이가 난다.(도 12) 특히 왼쪽 팔걸이의 묘사는 1714년 본보다 1746년 본과 구조가
더욱 유사하다. 또한 1825년 본 <이포 상>은 관대를 맨 1746년 본과 더욱 친연성이 있어
보인다.(도 13) 이러한 점은 1865년 본이 1746년 본을 모본으로 하여 그렸음을 분명히 해준
다.
두 번째로 주목할 특징은 표현 양식에 대한 것이다. 19세기의 이모본은 얼굴의 묘사에서
차분한 색감을 사용한 것과 채도가 높은
색감을 채색한 두 가지 경향을 보여준다.
먼저 살펴볼 <이조년 상>, <이포 상>,
<이원구 상>, <이인민 상>, <이직 상>,
<이욱 상> 등의 1825년 본은 탄탄하고 밀
도 있는 채색법으로 19세기 전반기 양식
의 특색을 충실히 담아내었다. 즉, 선묘를
한 다음에 명암을 넣는 식으로 선과 명암
에 의한 입체감의 표현이 강조되었다. 예
컨대 <이포 상>의 경우 색감의 단계를 조
168 藏書閣 22집
?도 14? <李長庚 像>
1714년, 絹本彩色
151.0×85.0㎝, 安山影堂
?도 15? <李長庚 像>
1746년, 絹本彩色
143.0×84.0㎝, 星山祠
절한 채색 등 세련된 음영과 얼굴의 굴곡 등 미세한 특징까지 정확히 묘사하였다. 그런데
<이포 상>을 제외한 나머지는 얼굴 묘사에 담채의 톤으로 채색을 한 뒤, 색을 쓰지 않고
먹으로 음영을 준 점이 눈길을 끈다. 따라서 생경스럽지 않고 자연스러운 피부의 색감과
질감을 유지하고자 한 노력을 읽을 수 있다. 또한 1825년 본 <이사후 상>은 얼굴 부위에
변색이 진행되었지만, 갈색 선묘로 윤곽을 정했고, 음영의 차이가 없는 고른 토황색 살색으
로 채색하였다. 1865년본에 비하면 상당히 고식적이고 보수적인 묘사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19세기의 이모본에는 團領과 의습이 원색조의 두터운 채색과 여과되지 않은 탁한 색감으
로 채워진 느낌이 강하다. 그리고 선은 대부분 채색에 묻힌 상태인데, 선보다는 명암이나
음영적인 요소가 강하게 두드러진다. 이는 19세기 전반기의 일반 초상화의 양식이라기 보
다 불화 계통의 그림에서 보이는 채색법에 가깝다. 이러한 점은 이 그림의 화가 역시 화승
으로 볼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며, 또한 지방에서 제작된 지방적 요소, 그리고 불화적인
요소 및 화승의 개성적인 면이 반영된 것으로 이해된다.
3. 이모본에 나타난 재현과 변용
초상화의 移模는 그림 속의 주인공을 똑같이 옮겨 그리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에 그려
진 대부분의 이모본은 모본의 재현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성주이씨 초상화에는 이러한
이모의 원칙에서 벗어난 요소들이 현저하게 나타난다. 이는 다른 이모본 초상화에서 잘 발
견할 수 없는 특징이다. 이처럼 이모본이 모본의 도상과 화법으로부터 離隔되고 있는 현상
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화사의 기량 부
족으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보완을 목
적으로 한 의도적인 변용으로 이해해야
할지 여기에 대한 검토를 필요로 한다.
1714년 본과 1746년의 이모본을 보
면, 1746년 본에는 형태상의 불합리한
부분들을 조금씩 보완하여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1714년의 <이장경 상>
(도 14)의 약간 위축되어 보이는 모습은
1746년 본에서 허리를 세웠고, 상반신
星州李氏 家門의 초상화 연구 169
?도 16? <李褒 像>
1746년, 絹本彩色
142.0×80.0㎝, 星山祠
이 더 길어졌으며, 고개를 든 당당한 모습으로 그려졌다.(도 15) 또한 손을 더 자세히 묘사
하였고, 없던 관대를 그려 넣은 부분도 그러하다. 또한 1714년 본 <이조년 상>에서 이마와
머리의 어색한 관계와 모자의 모양 등을 수정하였고, 전체 모습이 안정감 있고 비례에 맞게
보완되었다. 1746년 본의 <이승경 상>도 얼굴이 커지고 균형 잡힌 자연스러운 포즈로 바뀌
었다.
1746년 본의 <이포 상>(도 16)에는 염주가 보이지 않는다.
자연스러운 손 모양으로 묘사된 점, 초상화의 바닥면이 채색 문
양에서 돗자리에서 바뀐 점, <이제 상>에서 박락된 얼굴부분을
보완하여 그린 점 등은 불합리한 요소와 미비한 부분들을 고쳐
그리고자 한 노력으로 이해된다.
이외에도 단령의 색과 모양을 바꾼 부분이나, 복제에 맞지
않는 각대를 맨 점, 踏臺와 신발의 색상이 바뀐 점 등도 변용의
과정을 거친 것임을 보여준다. 또한 이모의 과정에서 얼굴의 모
양과 표정이 약간씩 바뀌고 있는 것은 화가와 후손들의 의견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즉, 어떤 의도를 갖고 고쳐 그리고자 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시대성을 상징하는 사모와 笠이라든
가 교의자의 구조 등을 바꾸지 않았음은 분명 주목되는 점이다.
이는 변용의 한계를 암시해주는 특징이라 생각된다. 즉, 변화를 준 요소가 많더라도 인물의
기본 모습과 형식은 대체로 유지되고 있어 이모본이라는 기본 성격을 벗어나지 않았다고
하겠다.
다음으로는 변용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인 ‘염주를 묘사한 부분’이다. 성주이씨 초상화에
서 염주를 쥐고 있는 모습은 매우 중요한 특징이다. 일단 고려시대 초상화로서 시대의 상징
을 말해주는 부분이며, 화승이 그린 것으로 볼 수 있는 단서이다. 그런데 염주를 쥔 모습은
사찰에 봉안된 고려시대의 초상화로는 자연스러운 모습일 수 있지만, 조선시대 儒生들의
시각에는 매우 이질적인 요소로 비쳐졌다.
이러한 불편한 점 때문에 현존하는 <이조년 상>에는 애초에 그려져 있던 염주를 그리지
않았다. 그러나 최초의 원본에는 왼손에 염주가 쥐여져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는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안산영당에서 유생들에게 好佛의 단서로 지적된 이후 1655년 본이나 1714년
본의 이모 시에 이를 그리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포 상>에는 염주를 그린 뒤에 먹으로
170 藏書閣 22집
?도 17? <李元具 像>
1714년, 絹本彩色
142.0×80.0㎝, 安山影堂
?도 18? <李元具 像>
1825년, 絹本彩色
155.0×102.0㎝, 安山影堂
?도 19? <李兆年 像>
1714년, 絹本彩色
151.0×88.0㎝, 安山影堂
지운 흔적을 남겼다. 같은 해에 이모하면서 <이포 상>에는 왜 염주를 남긴 것일까? <이조년
상>은 이미 迎鳳書院에 배향하고자 한 과정에서 好佛的인 인물로 간주되는 곤욕을 치른
뒤였기에, 우선적으로 염주를 그리지 말자는 중론이 모아졌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판단과 결정을 내린 이는 화가가 아니라 이를 監董한 문중의 후손이었을 것이다.
1746년의 성산사본에는 <이포 상>에 염주가 그려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은 염주를 그린 다음에 이것을 지운 것으로 판단된다. 염주를 그린 자리에 짙은 먹으로
지운 흔적이 있고, 단령마저도 검은색으로 덧칠함으로써 지운 흔적마저 없앤 것이다. 염주
를 지운 흔적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두고 많은 고민이 있었던 듯하다. 또한 이전의
이모본에는 없던 品帶를 그려 넣어 어색함을 무마하고자 했다. 한편, 1714년과 1825년 두
본의 <이원구 상>을 비교해 보면, 1714년 본(도 17)의 오른손에 쥐고 있던 염주가 1825년
본에는 그려지지 않았다.(도 18) 이처럼 고려시대 초상화에 그려진 염주는 조선시대에 들어
와 ‘불편한 진실’을 지닌 요소로 다루어졌고, 이를 고쳐 그리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변용을 보이는 것으로 주목되는 두 번째 요소는 초상화의 바닥 표현이다. 초상
화 속의 바닥은 인물을 구체적인 현실 공간 속에 있도록 설정하는 기능을 한다. 1714년의
<이조년 상>과 <이포 상>의 바닥에 그려진 문양이 특히 주목된다. 이 문양이 만약 17세기
의 공신화상 등에 나타난 彩氈을 모방한 것이라면 點描로 양탄자의 질감을 묘사해야 하는
데, 이와는 다른 방식이다. <이조년 상>의 바닥 표현은(도 19) 윗부분을 채색문양으로 채웠
星州李氏 家門의 초상화 연구 171
고, 아래는 돗자리 문양으로 처리하였다. 채색 문양은 17세기 공신화상의 형식을 따르지
않고, 丹靑 문양과 유사한 형식으로 그렸다. 아마도 화사가 채전을 단청문양으로 이해하고
서 변용하여 그린 듯하다. <이조년 상>의 아래 쪽 돗자리 문양은 18세기 초상화에 보이는
화문석 바닥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즉, 17세기의 채전과 18세기 초반의 화문석 돗자리의
특징을 절충하여 묘사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성주이씨 초상화에서 이모의 개념은 원본을 옮겨 그리는 이상으로
폭넓게 해석해야 할 특성을 지닌다. 이모본 마다 당시의 시점에서 해석하여 바꾸어 그린
부분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는 모본의 불합리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 도상을 변용한 것으
로 모본을 똑같이 완벽할 정도로 그려낸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실제로 移模라기보다
改模式 移模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Ⅴ. 맺음말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현존하는 성주이씨 초상화는 여말선초 인물의 圖寫本 초상을 대
상으로 한 17세기 이후의 이모본들이다. 모두 제작시기가 분명한 이모본이며, 모본이 된
그림도 여러 점 전하고 있어, 여말선초 초상화 연구의 범위를 한층 확충해주는 자료이다.
또한 지방에서 제작된 양식이라는 점과 화승에 의한 불화적인 색채가 반영된 점은 오히려
이 자료가 지닌 독자적인 특징이며, 화승의 이모본에 투영된 여말선초 초상화의 다양한 면
모를 알려주고 있다.
성주이씨 초상화는 안산영당을 통해 600년 이상 전승되어 왔다. 도중에 중건과 중수가
있었지만, 안산영당은 이들 초상화의 전래에 있어 매우 안정적인 환경을 제공해주었다. 또
한 정기적인 제례가 행해졌으므로 후손들의 관심권을 벗어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화승에 의해 그려진 고려시대 양식의 초상화가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의 시선에 好佛
취향이라는 비판의 대상이 된 점이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초상화를 보는 시각의 차이
가 그림의 양식보다 불교와 성리학이라는 이념적인 성향에 의해 좌우되는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성주이씨 초상화 가운데 조선초기 인물의 초상화는 好佛的인 단서보다 士大夫像으로서
의 특징을 보이고 있어, 畵僧이 아닌 일반 화가가 최초의 도상을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172 藏書閣 22집
투고일자 2009년 9월 1일?심사일자 2009년 9월 15일?게재확정일자 2009년 9월 30일
성주이씨 초상화는 여말선초에 각기 圖寫된 이후 250년 내지 300년이 지난 1655년에 첫
번째 이모본이 그려졌다. 최초의 도사본에는 고려시대의 화승과 조선초기 일반 화가들의
화법이 간취되고 있음도 주목할 만한 특징이다.
1655년부터 시작된 이모본의 제작은 18, 19세기로 이어졌다. 각 시기별 이모본은 양식상
의 변모 과정을 살필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1714년 본은 이전시기의 고식적인 요소가
적용되었고, 묘사의 정도는 소략하지만 이모에 충실하고자 한 단서들이 보인다. 1746년 본
은 18세기의 초상양식이 부분적으로 반영되면서도 어색한 형태를 합리적으로 바꾸어 그린
부분이 나타나 있고, 형식화된 경향도 보인다. 보수적이고 고식적인 요소가 강한 것은 모본
에 충실해야 하는 이모본으로서의 특성 때문이라 생각된다. 즉 그 시대의 양식이 반영되는
경향과 이에 맞서 이모의 원칙을 준수하고자 하는 경향이 18세기의 이모본에 절충적으로
나타나 있다. 또한 19세기의 이모본은 18세기 이후의 일반 초상화에 나타난 명암법 등의
요소가 적용되었으나, 의습부분에는 두텁고 탁한 색감이 두드러져 있다. 즉, 당시의 화법과
화승의 양식이라 할 만한 채색법을 통해 표현된 측면을 볼 수 있다.
성주이씨 초상화에 나타난 또 하나의 주요 특징은 모본의 형태를 정확히 옮겨야 하는
이모의 원칙이 엄격하게 적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화가의 역량이 부족한 면도 있으
나, 전반적으로 도상의 불합리한 점이나 불편한 점들을 바꾸어 그리고, 보완해 나가는 의식
적인 노력의 결과로 읽혀진다.
초상화의 시대상을 반영한 이모본인 성주이씨 초상화는 현재 전하는 자료가 부족한 여말
선초의 초상화 연구에 활발한 논의의 단서를 제시하고, 당시 초상화의 실상과 함께 이모본
의 추이를 설명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전해주고 있다. 본고에서 지면관계로 충분히 다루
지 못한 부분과 성주이씨 초상화를 18세기 이후의 일반 초상화와 비교하여 검토할 부분은
후속 과제로 남겨둔다.
星州李氏 家門의 초상화 연구 173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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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王朝實錄??
??東文選??
??練藜室記述??
??新增東國輿地勝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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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滉, ??退溪全書??
李文楗, ???齋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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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星州李氏文烈公派世譜-世德編??, 星州李氏文烈公派宗會, 1995.
??朝鮮史料集眞??
權相老 編, ??韓國寺刹全書??, 東國大學校 出版部,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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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ㆍ한국유교문화박물관의 전시도록인 ??肖像, 형상과 정신을 그리다??, 2009.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
http://www.history.go.kr/)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74 藏書閣 22집
1714년 (숙종 40) 1746년 (영조 22) 1825년 (순조 25) 1865년 (고종 2)
李長庚
(1214-?)
李兆年
(1269-1343)
李 褒
(1287-1373)
李承慶
(1290-1360)
<부록 1> 성주이씨 초상화 일람표
星州李氏 家門의 초상화 연구 175
1714년 (숙종 40) 1746년 (영조 22) 1825년 (순조 25) 1865년 (고종 2)
李元具
(1293-?)
李仁敏
(1340-1393)
李崇仁
(1347-1392)
李 稷
(1362-1431)
* **
176 藏書閣 22집
1714년 (숙종 40) 1746년 (영조 22) 1825년 (순조 25) 1865년 (고종 2)
李 濟
(1365-1398)
李師厚
(1388-1435)
李 稶
(1562-1617)
李萬年李仁任李光迪
* 1735년 重摹本
** 1798년 重摹本
※ 1866년 이모본 <이장경상>과 1990년 이모본 <이숭인상>은 수록하지 않았음.
星州李氏 家門의 초상화 연구 177
<부록 2> 성주이씨 초상화의 改裝 및 移模 기록
인물명 개장 및 이모 기록 서기(왕력) 현존 여부
李長庚
(1214~?)
永樂三年四月 日改摹1405년(태종 5)
嘉靖二十三年八月 日改裝1544년(중종 39)
崇禎二十八年乙未九月 日重摹1655년(효종 6)
崇禎八十七年甲午二月 日重摹1714년(숙종 40) 안산영당
崇禎一百十九年丙寅三月 日重摹1746년(영조 22) 성산사
崇禎一百九十八年乙酉二月 日重摹1825년(순조 25)
夏曆乙丑十一月 日重摹1865년(고종 2) 안산영당
崇禎二百九十九年丙寅正月 日重摹1866년(고종 3) 안산영당
李兆年
(1269~1343)
崇禎二十八年乙未九月 日改摹 1655년(효종 6)
崇禎八十七年甲午二月 日重摹1714년(숙종 40) 안산영당
崇禎一百十九年丙寅三月 日重摹1746년(영조 22) 성산사
崇禎一百九十八年乙酉二月 日重摹1825년(순조 25) 안산영당
夏曆乙丑十一月 日改裝1865년(고종 2)
李 褒
(1287~1873)
崇禎二十八年乙未九月 日改摹 1655년(효종 6)
崇禎八十七年甲午二月 日重摹1714년(숙종 40) 안산영당
崇禎一百十九年丙寅三月 日重摹1746년(영조 22) 성산사
崇禎一百九十八年乙酉二月 日重摹1825년(순조 25) 안산영당
夏曆乙丑十一月 日改裝1865년(고종 2)
李承慶
(1290~1360)
崇禎二十八年乙未九月 日改摹 1655년(효종 6)
崇禎八十七年甲午二月 日重摹1714년(숙종 40) 안산영당
崇禎一百十九年丙寅三月 日重摹1746년(영조 22) 안산영당
夏曆乙丑十一月 日重摹1865년(고종 2) 안산영당
李元具
(1293~?)
崇禎二十八年乙未九月 日改摹1655년(효종 6)
崇禎八十七甲午二月日重摹1714년(숙종 40) 안산영당
崇禎一百十九年丙寅三月 日重摹1746년(영조 22)
崇禎一百九十八年乙酉二月 日重摹1825년(순조 25) 안산영당
夏曆乙丑十一月 日改裝1865년(고종 2)
李仁敏
(1340~1393)
崇禎二十八年乙未九月 日改摹1655년(효종 6)
崇禎八十七甲午二月日重摹1714년(숙종 40)
崇禎一百十九年丙寅三月 日重摹1746년(영조 22) 성산사
崇禎一百九十八年乙酉二月 日重摹1825년(순조 25) 안산영당
夏曆乙丑十一月 日改裝1865년(고종 2)
李崇仁
(1347~1392)
崇禎二十八年乙未九月 日改摹1655년(효종 6)
崇禎八十七年甲午二月 日重摹1714년(숙종 40)
崇禎一百十九年丙寅三月 日重摹1746년(영조 22) 성산사
崇禎一百九十八年乙酉二月 日重摹1825년(순조 25)
夏曆乙丑十一月 日重摹1865년(고종 2) 안산영당
檀紀四三二三年庚午三月 日重摹1990년 안산영당
李 稷
(1362~1431)
崇禎二十八年乙未九月 日改摹1655년(효종 6)
崇禎八十七年甲午二月 日重摹1714년(숙종 40) 안산영당
崇禎一百十九年丙寅三月 日重摹1746년(영조 22)
夏曆乙丑十一月 日重摹1865년(고종 2) 안산영당
李 濟
(1365~1398)
崇禎紀元七十年丁亥三月 日重摹1707년(숙종 33)
崇禎紀元九十八年乙卯十一月 日重摹1735년(영조 11) 안산영당
崇禎紀元一百六十一年戊午四月 日重摹1798년(정조 22) 안산영당
夏曆乙丑十一月 日重摹1865년(고종 2) 안산영당
李師厚
(1388~1435)
崇禎二十八年乙未九月 日改摹1655년(효종 6)
崇禎八十七年甲午二月 日重摹1714년(숙종 40) 안산영당
崇禎一百十九年丙寅三月 日重摹1746년(영조 22)
崇禎一百九十八年乙酉二月 日重摹1825년(순조 25) 안산영당
夏曆乙丑十一月 日重摹1865년(고종 2) 안산영당
李 稶
(1562~1617)
崇禎八十七年甲午二月 日改摹1714년(숙종 40)
崇禎一百十九年丙寅三月 日重摹1746년(영조 22) 안산영당
崇禎一百九十八年乙酉二月 日重摹1825년(순조 25)
夏曆乙丑十一月 日重摹1865년(고종 2) 안산영당
* 1865년 본 移模本의 화면에 기록된 改裝 및 이모 시기에 근거하였음.
178 藏書閣 22집
Abstract
A Study on Portrait Paintings of the Lees of Seongju(星州李氏)
Yun, Jin-young
This study introduced 11 figures' portraits of the late Goryeo and early Joseon which
were to transmit to the Lees of Seongju(星州李氏), and intensively looked into
transmission history of portraits enshrined in Ansanyoungdang(安山影堂) in Seongju,
Gyeonbuk and patterns in Imobon portraits(copy-portraits 移模本). Portraits of the Lees
of Seongju included Lee jang-kyeong(李長庚 1214~?) who created the branch ancestor
in the late Goryeo, and descendants who became retainers and officials in the late
Goryeo and early Joseon. Imobon was made many times throughout the 18th and 19th
centuries based on the original portraits drawn in the time of their birth. The study
targeted Imobon conveyed in Ansanyoungdang in 1714, its Imobon in 1746, and Imobon
in 1825 and 1865 as the subjects of study. Imobon in the 18th century showed the
temporizing factor of the period before 18th century and painting techniques such as
shading which was popular at that time while Imobon of 19th century applied strong
colors, monk painters' pattern and expressed various expressive characteristics faithful
to Imobon.
Portraits of the Lees of Seongju recorded the period of Imobon on the canvas to show
the production period, and transmitted many paintings as the model to make it possible
to look into diachronic changes. In addition, the locally made patterns and Buddhist
colors by Monk painters are unique properties of the portraits, and inform of new
aspects and patterns in the portraits of the late Goryeo and early Joseon reflected in
monk painters' Imobon. Also, as figures’ portraits of in the early Joseon Dynasty show
星州李氏 家門의 초상화 연구 179
scholar-officials' characteristics, it is expected that the first figure was drawn by a normal
painter, not by a monk painter.
Portraits with patterns of the Goryeo period, which were drawn by monk painters,
were criticized by the Confucianists’ perspectives in Joseon Dynasty for its preference
in Buddhism. It showed that different perspective of viewing the portraits in the Goryeo
and Joseon Dynasty was based on the ideological propensity instead of paintings’ forms.
In addition, portraits of the Lees of Seongju didn't strictly apply Imobon's principals that
had to be precisely copied, which focused on the result of conscious efforts by overall
changing the irrational or inconvenient matters of the figure and supplementing them.
Through the portraits of the Lees of Seongju, this study prepared a new foundation
for the study on portraits of the late Goryeo and early Joseon that remained vacant,
and focused on demonstrating and presenting Imobon's patterns and characteristics to
show the actual portraits more clear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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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 word : Portrait Painting, Ansanyoungdang(安山影堂), copy-portrait(移模), Monk painter

원문보기:http://www.aks.ac.kr/book/pdf/윤진영.pdf

상기 자료는 성주이씨 쉼터 카페 이상덕 종친님 자료입니다.

 

[[연구논문]] 중시조(휘 장경)의 품계 상호장(上戶長)에 대한 연구

                                                                       박경자 교수

성주이씨 첫 족보인 갑신보(구보서)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휘는 장경이니 이미 성장해서는 강직하여 굽히지 아니하고 결단력이 있어 고을에서 천거하여 상호장(上戶長)이 되시더니...”

즉 중시조님의 직급에 관한 첫 단서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현재까지 상호장을 정의한 옛 문헌은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만약 상호장에 대한 자세한 설명만 있었더라면 당시 우리 선인들의 위상을 조명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던 차였는데, 박경자 교수께서 2001년 발간하신 <고려시대향리연구>라는 책을 우연하게 접하고 반가운 마음에 읽었습니다.

  이 책을 토대로 중시조 할아버님이 역임하셨던 상호장이란 품계를 살펴보면...

  상호장은

1. 고려 성종(960년~997년)이후에 성립된 직책으로 호족을 달래고 그 권한을 약화하기 위한 것이 목적입니다.

2. 승급 경로는 부호장->섭호장->상호장으로, 지역에 막대한 권력을 행사합니다.

3. 선출직이 아닌 세습직입니다.

4. 중앙 정계에 진출하거나 지방 세력으로 머물거나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권한(?)이 있습니다.

5. 군왕을 대면할 기회가 많습니다.

  이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중시조님 선대로는 성주의 호족으로 대대로 군림하다가, 아들님들이 중앙 정계로 진출하고, 손자인 휘 승경 할아버님이 1300년 초반인 충혜왕때 원나라 제과에서 을과(4~10위)로 급제해 요양성참정이 되신뒤 집안이 크게 융성함을 짐작케합니다.

 따라서 만약에 성주를 관향을 삼은 다른 이씨의 선조들과 그 품계를 비교해 보면 당시 우리 선인들의 위상을 보다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현존하는 우리와 후대의 몫일 듯합니다.

  -------------갑신보(구보서) 내용---------

우리 동방의 개국이 당요무진(唐堯戊辰)(단기一년)에 비롯 하였으니 그 유래가 일찍었다.그러나 삼한이전(三韓以前<마한,진한,변한>)에는 처음 창건한 것은 습관대로 기재가 상세치않아 그 크고 작은 종족들의 족보가 후세에 전해지는 것이없다. 그러므로 농서군공(?西郡公)의 선대(先代)는 그 세대와 이름이 막연하여 가히 상고할 수가 없으나 우선 대강을 들어 말한다면 ....<중략>...

  공의 휘는 장경(長庚)이니 이미 성장 해서는 강직하여 굽히지 아니하고 결단력이 있어 고을에서 천거하여 상호장(上戶長)이 되시더니 정사(政事)가 번거롭거나 까다롭지 아니하여 고을 사람들이그를 아끼고(愛)명망이 자자했다.나중에 늙으시어 시골에 살면서도 매양 봉명사(使客)의 길을 통제하는 소리가 들리면 비록 밤 중 이라도 반듯이 의관을 정돈하고 문밖으로 나가서 고개 숙여 업드리고 그가 지나간 연후에 이에 그만 그쳤다.대개 그 천성이 이와 같아서 억지로 힘써서 그렇게 함이 아니었다.

---------------이하 책 발췌----------------

 박경자

 전남 광주 출생. 중앙여자고등학교와 숙명여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다. 동 대학원 사학과 석사·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숙명여대, 단국대 강사와 일본 관서외국어대학교 초빙교수를 지냈다. 현재 대진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주요 논문으로 「고려향리제도의 성립」 「청주호족의 이족화」 「고려향리의 경제적 기반」 「향리출신급제자의 성장과정」 「고려시대 연천천도설에 대하여」 「조선중기 포천사족의 존재양상」 「중인연구」 외 다수가 있다.

- 서론 -

  근래에 들어 고려시대를 해명하기 위한 시도가 여러 측면으로부터 행하여지고 있고, 그 중에서도 특히 당시의 신분제도에 있어서의 연구업적은 괄목할 만하다. 그러나 아직도 해결되어야 할 문제는 많이 남아 있다. 고려초 이래로 고려사회를 주도해 온 지방세력에 대한 연구 또한 그 하나라고 생각된다.

  고려왕조 성립기에 광범하게 등장한 지방세력은 신라의 골품체제를 붕괴시키면서 새로운 사회의 주역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고려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이루지 못하고 호족세력과 더불어 혹은 갈등하고 혹은 타협하면서 새로운 사회현실에 대응해 나가야만 했다. 따라서 고려시대 연구에 있어서 이들 지방세력의 向背는 고려사회의 성격을 이해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국왕을 정점으로 한 중앙귀족에 대하여 지방세력의 힘은 만만치 않았고, 심지어 중앙귀족들조차 그 뿌리를 지방사회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양자의 관계는 실로 복잡 미묘하였다. 이 책에서 다루려고 하는 향리계층은 바로 이러한 지방세력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사료의 빈약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향리연구는 대체로 중앙의 지배층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지방의 호족층이 고려의 중앙집권화 과정에서 어떻게 향리로 편제되었으며, 또 그들의 존재양상은 어떠했는가를 해명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왔던 것이다. 이러한 연구는 자연 '지방호족이 향리화하였다' 라는 측면이 지나치게 강조됨으로써 그들의 사회적 신분이 실제 이하로 강등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말하자면 중앙에서 '지방호족세력을 억압하고,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세력이 약화되었다'는 것만을 강조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는 것이다. 고려의 향리가 이와 같이 중앙의 입장에서만 다루어질 때 고려향리가 지닌 역사적 의미는 축소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책에서는 고려왕조 성립 이후 줄곧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지방세력을 부각시키는 데 주목하고 그들의 존재양상과 역사적 추이를 밝혀보고자 한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이 모두 5장으로 구성된다.

  제1장에서는 나말여초에 있어서 지방세력의 지배구조가 실제로 어떠했는가를 살펴보려 한다. 이는 성종 2년(983)에 실시된 지방제도의 개편과 향리제의 성립을 이해하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하여 먼저 후삼국시대 지방세력의 동향을 살피고, 이어서 관부의 명칭이 비교적 뚜렷이 나타나는 몇몇 지방을 통하여 그 관부의 구조와 지배계층을 살펴보려 한다. 이때 존재한 관부는 실제로 지방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을 것이며, 따라서 이를 통하여 이 시기에 다양하게 존재했던 지방의 통치체제와 이들이 지방사회에 미친 영향력을 밝혀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2장에서는 고려 건국기에 지방세력이 어떻게 작용하였으며, 또 중앙의 관심은 무엇에 있었는가를 살펴보려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고려통일 후 호족세력의 향방과 이에 대처한 고려초기 대 호족정책을 살피고, 이를 통하여 고려 초기 사회의 실태와 성격을 이해하고자 한다. 이는 또한 호족세력이 어떻게 권력구조에 참여하게 되는가를 살펴보는 방법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광종대 이후의 대 호족정책을 살펴봄으로써 지배세력 형성과정에 있어서 지방세력의 역할이 어떠했는가에 접근하려한다. 이것은 건국후부터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던 지방세력의 실상을 이해하는 기초작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제3장에서는 향리집단 성립의 배경으로서의 호족과, 향리제도가 성립되는 과정을 살펴보고 나아가 향리의 신분과 직임 등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여기서는 그들이 중앙의 끊임없는 통제를 받으면서도 끝까지 지배층으로서의 신분 배경을 유지할 수 있었던 원인을 찾는데 주목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호족적 기반일 것이다. 또한 향리직이 성립된 현실적 토대를 알아보기 위하여 지방제도의 정비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려 한다. 그것은 향리제도와 관련하여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지방제도의 개편이라는 대역사를 수반하여 일어난 성종 2년, 현종 9년의 향리직 개편을 살펴보고, 고려의 문물제도가 완성되었다고 하는 문종대 이후의 향리직에 대한 변화도 살펴보려 한다. 뿐만 아니라 지방에 있어서의 이들의 사회경제적 위치를 밝힘으로써 고려초 이래로 이들이 가졌던 호족적 속성의 변질 양상에 대해서도 검토해 보려 한다.

  제4장에서는 향리신분의 변화에 대하여 언급하려 한다. 이는 고려시대를 통해 향리의 신분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살피는데 목적이 있다. 무신집권기, 元의 간섭기, 그리고 공민왕대를 통하여 그들이 정치ㆍ경제적으로 이해를 같이 하는 공동체적 집단으로서의 정치적 관료군을 형성하는 과정은 자못 흥미로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이 시기에 형성된 향리출신 신진세력이 조선왕조를 건국한 주도세력과 연결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향리신분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고려시대 호족세력 및 지방제도와 관련하여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는 견훤과 궁예에 관련된 논문을 부론으로 싣는다. 「견훤의 세력과 대왕건정책」 및 「고려후기 연천천도설에 대하여」 두 편이다. 이들은 신라말 호족세력쟁패기에 각축하였던 세 사람에 관한 것이어서 이 책의 중심에서는 거리가 있지만 그대로 실어두기로 한다.

  아울러 그 동안 축적된 고려향리에 대한 연구성과를 정리함으로써 향리연구에 대한 이해는 물론 그 동안의 연구성과를 반영하고자 한다.

  고려는 다소간의 성격변화는 있었다 할지라도 지방세력에 의해 시종 주도되고 발전되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향리는 고려 초기 향리제도의 성립과 함께 지방 말단 '행정리'로 격하되었다는 기존의 통설과는 달리, 향리의 전신은 호족이었고 또 그들은 끊임없이 중앙의 통제를 받으면서도 자신들의 지배적 속성을 여전히 유지시켜 왔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논지를 전개해 보려 한다. 그러나 史料가 한정되어 있어 논리에 비약이 따르지 않을까 저으기 조심스럽다.

  이 책은 10여년 전에 필자가 학위논문으로 제출하였던 『고려시대 향리연구』를 약간의 손질을 거쳐 묶은 것이다. 스스로 불만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출간을 결정하게 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이 책의 출간을 통하여 필자의 연구결과를 객관적으로 검증받고 이를 통해 더욱 연구에 정진하겠다는 다짐의 뜻이며, 다른 하나는 이 책의 출간을 계기로 이 방면에 대한 관심과 성과가 더해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기대가 작용한 때문이다. 손질하는 과정에서 내용상 중복되는 부분이 있기도 하였지만 상호 보완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체제와 내용을 보충하거나 주를 첨가하는 선에서 다듬어 내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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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향리제도의 성립

고려초기에 있어서의 향호의 신분을 설명하기 위하여 우선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그들 대부분이 신라말ㆍ고려초기의 귀순호족으로서 당시의 지배층에 속하던 인물이었다는 점이다.有井智德, 「高麗の鄕吏について」, 『東洋史學論集』 3, 1955 및 김종국, 앞의 글 등 다수의 연구에 의해 지적된 바 있다.

  그러나 일단 제도적인 성립을 본 향리의 신분은 강등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향리는 그 직을 세습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보면

  태조가 백제를 정벌하는데 숭선에 이르러 종군할 자를 모집하였다. 선궁이 吏로서 응모하니 태조가 기뻐하며 내린 御弓으로 인하여 이름을 받았다. 후에 공로가 있어 대광문하시중이 되었다. ……(中略)…… 長子 文奉은 三司右尹으로서 고향으로 돌아와 吏가 되고 次子 奉術은 아버지를 이어 시중이 되었다. 府의 사족과 이족이 모두 선궁의 후손이다.(『新增東國輿地勝覽』 권29 선산도호부 인물조)

  라 하여 善山府吏인 선궁의 자손이 부의 士族과 吏族의 길을 두루 걸었다는 것을 밝혀 놓고 있다. 이를 통하여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신라말ㆍ고려초기의 지방세력자 가운데에는 중앙의 사족과 지방의 이족 중 어느 것이든 임의로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에 중앙과 지방 사이에 신분상의 특별한 차이가 없었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한다. 말하자면 당시의 사족과 이족은 본래 동일한 조상에서 분화되었으므로 신분상의 제약을 받지 않았던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뜻이다. 만약 당시에 사족과 이족, 다시 말하면 중앙귀족과 지방세력자 사이에 신분상의 어떠한 차별이 가해졌다고 한다면 선궁의 두 아들은 모두 신분이 높은 어는 한 쪽에 머무르려 했을 것임은 지극히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선궁이 태조의 극진한 대우를 받는 이유는 그가 嵩善(지금의 선산)지방의 대실권자였기 때문이라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선궁의 장자인 문봉이 환향하여 이족으로서의 부업을 계승하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것은 아마도 이 시기에는 지방세력자로서의 신분이 우선적으로 세습되고 있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그의 자손이 대대로 숭선지방의 이족을 세습하여 벌족을 이루었다는 사실은 이에 대한 명백한 증거라 생각된다. 이제 이와 같이 향리가 세습되고 있는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그 이해를 돕고자 한다.

  金南秀 안동인이다. 태사 선평의 후손으로 대를 이어 호장이 되었다(『

曹龜鑑』 권2, 관감록).

  영가향리의 권ㆍ김 양성은 태사의 후예이다. 태사의 후손으로 호장이 된 이는 셀 수 없이 많았다(『안동향손사적통록서』).

  李長庚 성주 호장이다. 신라조에 충신 호장 극신의 후손이다. 조부는 敦文이고 부는 得嬉로 모두 호장이었다(『

曹龜鑑』 권2, 관감록).『朝鮮金石總覽』 상, 633쪽의 이조년 묘지에는 '公姓李氏 諱兆年 字元老 京山府龍山里人也 曾祖諱敦文 祖諱得禧 考諱長庚'이라하여 이들이 대대로 경산부(지금의 성주)의 향리를 세습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鄭宗殷 신라 사람이다. 阿達王 때 일 때문에 仁同 若木縣으로 폄하되었다가 후에 監汀 호장이 되었다. 감정은 영일의 옛이름이다. 후손 玄卿이 호장이 되었다(『

曹龜鑑』 권2, 관감록).

  李永 자는 大年으로 安城 호장이다. 처음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부업을 잇기 위하여 吏가 되었다.

  李自成 井邑 監務이다. 증조부는 允卿이고 조부는 孝進으로 모두 韓山 호장이었다. 아버지 昌世도 역시 호장이었다.

  安永和 興州 호장이다. 문하시중이 그의 계부이다. 아들 得財 손자 希

는 대대로 호장이 되었다. 증손은 급제하였으나 은둔하고 벼슬하지 않았다(同上, 관감록).『朝鮮金石總覽』 상, 647쪽의 안축묘지에는 安軸 字當之 福州興寧縣人 曾祖得財 祖希

俱爲本郡戶長 考碩及第 遂隱不仕 軸生而潁悟 力學工文中第 ……(中略)…… 忠肅被留于元 軸謂同志曰 主憂臣辱 主辱臣死 乃上書訟王無他 王嘉之 ……(中略)…… 出牧尙州時 母在興寧 軸往來以盡孝 處心公正 持家勤儉 嘗曰 吾平生 無可稱 四爲士師 凡民之屈抑爲奴者 必理而良之(『高麗史』 권109, 安軸傳) 라고 하였는데 복주와 흥녕은 각각 지금의 안동과 순흥으로서 순흥안씨의 출신지였다.

서위에서 인용한 사료에 의하여 우리는 향리가 세습되고 있는 일면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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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향리의 직임

이제 향리의 직임이 무엇이었던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각기 거주하는 장소에 따라서 주리ㆍ부리ㆍ읍리ㆍ군리ㆍ역리ㆍ부곡리 등으로 표기 하고 있다. 예컨대

崔沖의 字는 浩然으로 海州인이며 아버지 溫은 본주의 吏였다(『曹龜鑑』 권2, 관감록)

李兆年의 字는 元老이니 경산부 사람으로 아버지 李長庚은 본래 경산부 관리였다(『高麗史』 권109, 열전22 및 『朝鮮金石總覽』 상, 633쪽, 李兆年墓誌).

李穀의 字는 中父이며 처음 이름은 藝白이니 한산군 관리인 自成의 아들이다(『高麗史』 권109, 열전22).

 鄭芝衍은 하동현리 國龍의 아들이다. 비로소 起家하여 첨의찬성이 되었고, 五世孫은 麟趾이다(『

曹龜鑑』 권2 관감록).

  柳淸臣의 첫 이름은 庇이며 장흥부 고이부곡 사람이고 그의 선대도 모두 部曲吏였다(『高麗史』 권125, 열전38).

  가 그것이다. 이를 통하여 보면 향리는 주ㆍ부ㆍ군ㆍ현은 물론 향ㆍ부곡 등의 특수 행정단위에 거주하면서 각기 거주하는 구역의 신분명칭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모든 행정구역에 걸쳐 존재한 향리는 대체로 어떠한 직임을 맡고 있었을까?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다시 앞에 인용한 성종2년의 이직개정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즉 병부를 사병으로, 창부를 사창으로, 당대등을 호장으로, 대등을 부호장 등으로 개정한 것이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는 마치 중앙의 6부를 압축해 놓은 것 같은 司戶金種國, 「高麗時代の鄕吏について」, 『朝鮮學報』 25, 1962에서 司戶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어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 『新增東國輿地勝覽』권21 경주부 名宦 權

항에 '權

爲留守 舊有一庫 賊民綾羅貯之 名甲坊 充貢獻

餘甚多 皆爲留守所私

撤甲坊 以一年所收支三年貢 司戶有盜民租者 碎其腦干庭 觀者股

'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사호라는 용어가 『高麗史』에는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존재했을 가능성은 크다고 하겠다. 이기백 교수에 의해 도해된 다음 표는 참고된다.

  (「新羅私兵考」, 『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 266쪽).

  司兵 司倉의 3사와 실무를 분장하여 그 기능의 원활을 꾀하는 호장 이하 창정이 존재하고 있음을 살필 수 있었다. 이것들을 중앙의 6부와 연결시켜 본다면 사호는 그 표시하는 바 명칭에서처럼 吏部의 역할을 사병은 병부의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쉽게 연상할 수 있다. 그리고 사창은 아마도 징수된 조세를 보관하는 구실을 했을 것이므로 사창은 창부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할 만하다. 그리고 향리의 직임으로서 구체적인 것은 향리의 수장인 호장을 통하여 밝혀질 수 있으리라 믿는다. 호장은 주ㆍ부ㆍ군ㆍ현ㆍ리의 장으로서 향리사회의 상층부를 구성하는 우두머리였다.호장의 종류에 따라서는 一般戶長ㆍ戶長正朝ㆍ安逸戶長ㆍ攝戶長ㆍ上戶長ㆍ權知戶長 등이 있어 그 명칭에 따라 권한과 지위가 달리 나타나고 있는바 일반적인 승급경로는 부호장→섭호장(권지호장)→상호장의 순이다.

  호장의 직임과 관련하여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매년 정월 초하루를 기해 각 읍의 우두머리 호장이 그 주현을 대표해서 예궐숙배하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매년 새해 아침에 각 관의 守令은 호장을 보내어 문안인사를 하는데 이는 聖節使ㆍ冬至使와 같다(『

曹龜鑑』 권1 戶長疏).

  든지 또는

  지방의 관리들이 매해 정월 초하룻날 물건을 올리는 것은 바로 온 나라가 설날을 축하하는 의식인 것입니다(『太宗實錄』 권32, 16년).

  라고 하였다. 여기서 예궐숙배가 뜻하는 바는 마치 제후가 천자에게 聖節使 혹은 冬至使를 파견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위와 같은 기록은 아마도 지방관 파견 이후의 것으로서 호장이 각읍 수령을 대신해서 파견되고 있는 것에 관한 기록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방관이 파견되기 이전에는 호장이 주체적 입장에서 예궐숙배하는 절차가 있었을 것이다. 다음 기록은 이를 뒷받침한다고 생각된다.

매년 정월 초하루가 되면 諸邑의 首吏가 ……(中略)…… 궐문 밖에 와서 肅拜한다(『經國大典』 禮典 朝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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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해 정월 초하루면 모든 고을의 首吏가 경사가 있을 때면 임금의 집안과 관련을 가지는 모든 고을(御鄕)임금의 본으로 되어 있는 고을, 임금의 외가나 외외가의 본으로 된 고을이나 또는 조모ㆍ증조모ㆍ고조모의 본으로 된 고을, 왕비의 본집 및 외가의 본으로 된 고을을 말한다.

들의 수리가 각각 한 사람씩 대궐문 바깥에 와서 절하는 의식을 진행한다.(『經國大典』 禮典 朝儀)

여기에서 말하는 여러 읍의 수리는 물론 주읍을 비롯한 속현들을 망라한 지역의 호장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니까 고려시대 이래로 계속되어 온 호장의 예궐숙배의 풍습은 시대를 따라 약간의 변화는 있었을 것이나 대체로 고려를 지나 조선조까지도 계속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다음 기록을 통해 호장의 詣闕肅拜 때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영조25년의 다음 기록은 참고되리라 믿는다.(正月朔質明 自邸留具章服 往闕門外 列邑戶長齊會 有頃 承旨司閼

出 使

者洞開門 遂四拜 司閼傳旨曰 皆無事上來耶 因曰 有欲言邑

者言之 皆府首對曰無有 司閼遂趨入 已而 又出曰 某某邑戶長 入侍事 傳旨 臣慶番邑亦厠此中 遂與諸戶長 隨司閼閱重門到階下 ……(中略)…… 命自外宣

有官奉命

出諸戶長亦問對有差 因命退 臣與諸戶長 行曲拜之禮 趨出至門 司閼設席具酒盤 招尙州戶長 以御命賜之(『

曹龜鑑』 권1 感恩詩倂序) 왕이 이처럼 각읍 호장의 하례를 직접 받고 또 그들의 노고를 위로하였다는 것은 물론 정치적 의도를 다분히 지니고 있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지방에 있어서의 호장의 존재를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위의 인용사료는 영조25년 때의 것으로 고려와는 시간적으로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지만 고려시대까지 소급해도 무리가 없다고 본다

향리의 신분이 많은 변질을 가져 왔다고 하는 조선시대에도 이러한 호장의 예궐숙배가 있었다면 이를 고려시대까지 소급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이다.이수건, 「조선조 향리의 일연구-호장에 대하여-」(『영남대 문리대학보』 2-2, 1974), 73쪽 참조

그것은 고려 호장의 전신이 대호족이었고 또 그대로 재지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로 해서 고려시대의 호장은 국왕과 면대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았을 것이라 짐작되기 때문이다

상기 자료는 성주이씨 쉼터 카페 이상덕 종친님 자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