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서군공 선조님의 묘소 이전과 단종의 태실에 관한자료(조선왕조실록의내용)

형제의 우애(友愛)와 투금강(投金江)의 이야기

성주이씨 열녀 효부

이억년과 백년마을의 이야기

경순공주의 출가와 함흥차사 

정도전에게 살해당한 배열부전의 작자 이숭인(李崇仁)

효성 지극한 선비 이 광범(李光範)

이세간(李世幹)과 의호(義虎)

을사사화(乙巳士禍)와 화를 당하신 성주이씨 선조님

숙혜옹주[淑惠翁主] [?~1464] - 조선 제 3 대 태종대왕의 서 6 녀

비슬산 용천사(琵瑟山 湧泉寺)와 도은 이숭인

경순공주의 출가

고려시대의 의술이 성주이씨로 연계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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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서군공 선조님의 묘소 이전과 단종의 태실에 관한자료(조선왕조실록의내용)

伽泉面 法田里 端宗大王의 胎封

성주군지에 의하면 법림사에 대한 기록에 태봉에 대한 언급이 약간 있을 뿐 자세하고 확고한 내용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태봉이 있다고 구전으로 전하여 오고 있으며 흔적이 남아있다.

서기 1443년(세종25) 12월11일의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처음에 원손의 태를 경상도 성주에 안치하였는데 그 도국 안에 이장경의 묘가 있었으니....."라는 기록으로 보아 단종대왕의 태를 처음에는 여러 대군들과 함께 선석산에 안치하였다. 단종대왕의 태실은 대군들의 태실 옆에 기울어져 있고 또한 보토(補土) 한 곳이었다. 1450년 9월 8일(문종 원년)에 풍수학에서 동궁즉 단종의 태실 자리를 경기도와 하삼도에 다른 길지를 택하여 이전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에 문종 임금은 단종의 태를 가야산으로 옮기고 그 사방의 경계를 정하였다. 동쪽과 남쪽을 각 9600보(1728m), 서쪽은 9590보(1726.2m), 북쪽은 470보(846m)로 하여 표를 세우고, 품관 (品官) 이효진(李孝眞) 등 여덟 사람과, 백성 김도자(金道者) 등 여섯 사람을 정하여 태봉을 지키게 하였다. 그 후 단종대왕이 왕위에서 물러나 노산군으로 강등되자, 1458년(세조4) 7월8일 예조에서 선석산에 있는 금성대군의 태실과 법림산에 있는 단종대왕의 태봉을 철거하기에 이른다. 선석산의 단종대왕의 태실은 1441년(세종23) 단종대왕 탄생년 윤11월에 축조하였다가 범림산으로 옮겨갈 때 이미 땅속에 매몰하였기 때문에 세조대왕 당시 파손되거나 아예 없애버린 비극적인 운명을 피할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1443년(세종25) 12월 11일(신묘)

'처음에 원손(元孫: 단종)의 태(胎)를 경상도 성주(星州)에 안치하였는데 그 도국(圖局) 안에 이장경(李長庚)의 묘가 있었으니 바로 성원군 이정녕(星原君 李正寧)의 시조(始祖)이었다. 이때에 이정녕(李正寧)이 풍수학(風水學) 제조(提調)가 되고, 성균직강(成均直講) 윤통(尹統)과 사정(司正) 정앙(鄭秧)이 훈도(訓導)가 되어 장차 태실(胎室)의 돌난간〔石欄干〕을 만드는데 풍수학관(風水學官)을 으레 보내어 그 역사를 감독하게 되었으므로 예조에서 윤통(尹統)을 보내려 하매, 윤통(尹統)이 난간 만드는 규칙을 정앙(鄭秧)에게 물으니

정앙(鄭秧)이 말하기를

"난간은 전 규칙이 있다. 그러나 이장경(李長庚)의 묘가 태실(胎室) 원국(圓局) 안에 있다하니 대단히 불리하다. 아는 사람이 보면 반드시 그 묘를 옮길 것이다."하였다.

윤통(尹統)이 대답하기를,

아무리 제조(提調)의 조상의 묘라도 만일 태실에 불리하다면 어찌 아뢰지 않을 수 있는가 ?"하였다.

이때에 정앙(鄭秧)의 어머니가 경상도에 있었는데 정앙(鄭秧)이 일 때문에 돌아가 근친(覲親)하고자 하여 윤통(尹統)의 말을 이정녕(李正寧)에게 누설하여 이간하였다. 이정녕(李正寧)은 윤통(尹統)이 풍수학을 알지 못한다고 저지시키고 정앙(鄭秧)을 천거하여 보냈다. 이렇게 되자 윤통(尹統)이 예조정랑 정광원(鄭廣元)에게 말하기를,

"제조가(李正寧) 정앙(鄭秧)을 보내려고 한 것은 반드시 내가 자기 조상의 묘를 옮길 것이라는 말을 허물 한 것이다."하니

정광원(鄭廣元)이 말하기를,

"이런 큰 일을 어찌 계달(啓達) 않았는가 ?"하였다.

윤통(尹統)이 말하기를,

"정앙(鄭秧)도 결국은 반드시 아뢸 것이다."하였다.

정앙(鄭秧)이 이미 돌아오매 이정녕(李正寧)을 고맙게 여겨 말하기를,

"이장경(李長庚)의 묘는 태실과 멀리 떨어져서 해로울 것이 없다."하고 마침내 아뢰지 않았다. 뒤에 윤통(尹統)이 대호군(大護軍) 조유례(趙由禮)에게 말하였기 때문에 일이 發覺되니 이에 정앙(鄭秧)을 의금부에 내려 국문 하게 하였다.

1443年(世宗25) 12月 29日(己酉)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정앙(鄭秧)이 공초(供招)를 바치기를, "내가 일찍이 정인지(鄭麟址)에게 이르기를 「이장경(李長庚)의 묘가 태실에 가까우니 마땅히 옮겨 장사하여야 한다.」하였더니, 정인지(鄭麟址)가 대답하기를, 「태실에서 멀리 떨어졌으면 무슨 害가 있는가.」하였다."하였습니다."하니

임금이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촤중겸(崔仲謙)에게 命하여 가서 정인지(鄭麟址)에게 안문(按問)하고, 인하여 정인지(鄭麟址)에게 이르기를,

"인협하지 말고 행공(行公) 하라."하매 뒤에 정앙(鄭秧)이 무고한 것을 승복하였다.

1444年(世宗26) 1月 3日 (癸丑)

임금이 신개(申?) 등에게 이르기를,

"정앙(鄭秧)이 공초(供招)하기를, "내가 정인지(鄭麟址)와 더불어 이장경(李長庚)를 이장할 것인가 아닌가를 의논하니 정인지(鄭麟址)의 말이 「거리가 대단히 머니 해될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하기에, 또 최중겸(崔仲謙)을 홍주(洪州:충남홍성군)에 보내서 정인지(鄭麟址) 물었으나, 정인지(鄭麟址)가 승복하지 않으니 두 사람의 공술(供述)이 같지 않다. 그런데 정인지(鄭麟址)는 도리를 아는 영오(領?)한 사람이니 비록 정앙(鄭秧)과 대질 시킨들 어찌 그 죄를 자복 하겠는가. 하물며, 정인지(鄭麟址)는 위임대신(委任大臣)이니 옥에 가두고 대질시키는 것은 내가 반드시 하지 않을 것이고, 이정녕(李正寧)은 지친(至親)인데 이제 조그만 잘못을 가지고 고략(拷掠)을 감행(敢行)하면, 비록 그 죄를 자복 하더라도 이 또한 마음에 유쾌하지 못할 것이니, 마땅히 이전 국안(鞫案)대로 죄를 결단하고 그 나머지는 차례대로 의논하여 판결하는 것이 어떻겠는가."하니,

모두 말하기를,

"가령 갑(甲)이 도둑질한 것을 을(乙)이 고발하였는데, 갑에게 추문(推問)해서 갑이 불복하면, 마침내 갑의 말한 것을 사실이라 하여 갑이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정앙(鄭秧)의 말이 이같이 명백 하온데, 어찌 정인지(鄭麟址)의 죄을 면하려고 하는 말을 사실이라 하여 놓아두고 묻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일이 죽을죄에 관계되는 것을 정인지(鄭麟址)가 반드시 모두 헤아렸을 것이오니 고문하지 않고서 어찌 실정을 얻을 것입니까. 또 이정녕(李正寧)의 죄는 모든 증거가 명백 하온데, 큰일을 어찌 한 마디의 말로써 결정할 수 있습니까. 여러 번 고문하여 압슬(壓膝)까지 한 후에 실정을 얻게 되는 것이 자뭇 많사오니, 이정녕(李正寧)이 비록 지친(至親)이라 하더라도 일에 경하고 중함이 있사오매, 이것으로 〈죄를〉갚을 수는 없습니다. 왕손(王孫)은 나라의 근본임에도 이정녕(李正寧)의 일이 이와 같사오니, 고문하여 실정을 얻어냄이 의당 하옵고, 정인지(鄭麟址)도 역시 잡아와서 정앙(鄭秧)과 대질 심문하여 과죄(科罪)함이 마땅합니다."고 하였으며,

좌참찬(左參贊) 권제(權?)는 또 말하기를,

"이장경(李長庚)의 무덤이 조그만 큼이라도 태실에 불리함이 있다면, 비록 하루라도 옮기지 않을 수 없사오니, 그 자손으로 옮기게 함이 편할까합니다."하였다.(4집 534면)

1444年(世宗26) 1月 5日(乙卯)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민의생(閔義生)과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이진(李?)을 불러 이르기를

"성주(星州) 태실(胎室)이 이장경(李長庚)의 무덤과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하니

이진(李?)이 아뢰기를,

"그 사이의 거리가 겨우 1리(里)로서, 만일 초목이 무성하지 아니하오면 통하여 바라볼 수 있는 지점이옵니다."하므로,임금이 말하기를,

"태실 도국(胎室圖局) 안에 고총(古?)이 있으면 길흉(吉凶)이 어떠한고."하니,

민의생(閔義生)이 아뢰기를,

"《안태서(安胎書》에 이르되,??태실은 마땅히 높고 정결한 곳이라야 한다."하였은즉, 이장경(李長庚)의 묘는 속히 철거함이 마땅하옵니다."하였다.

임금이 망하기를,

"지난번에 순흥 금산(順興金山)에 안태(安胎)할 때에 간혹 미비 된 일이 있었는데, 그때에 의논하는 자들이 말하기를,"태실은 한 몸만을 위하는 것이므로 비록 미비 된 일이 있을지라도 또한 가하다."고 하였으니, 이제 성주(星州) 태실 도국 안에 고총(古?)과 사사(社寺)를 철거하여 옮긴다면 순흥 금산(順興金山) 태실 안의 미비 되었던 일도 역시 고쳐 정리할 것인가."하니,

민의생(閔義生)은 아뢰기를,

"순흥 금산 태실에 미비 된 일도 고쳐 정리함이 당연합니다."하고,

이진(李?)은 아뢰기를,

"태실에 미비 된 일은 예전대로 두는 것이 편할까 합니다."하니,

임금이 즉시 命하여 이장경(李長庚)의 墓를 옮기라 하였다.

1444년(세종26) 1월 7일(정사)

예조에서 아뢰기를,

"경상도 순흥(順興)'성주(星州)'곤양(昆陽)'기천(基川) 등의 고을은 태실 도국(胎室圖局) 안의 고총(古?)과 사사(寺社)를 모두 撤去하고, 괴상하게 생긴 나무나 돌과 철거해야 할 것은 그 곳 각 관으로 하여금 도면을 세밀하게 작성하여 올려보내게 하고, 다시 大臣을 보내서 살펴보아 철거하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제4집 535면)

1444年(世宗26) 2月 27日(丁未)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이정녕(李正寧)이 상언(上言)하기를,"제조(提調)와 승지(承旨)들이 임금님의 뜻을 두려워하여 신의 소원(訴?)을 믿지 않고 자세하게 그 뜻을 계달 하지 않았습니다."하고, 또 이르기를,"임금께서 만일 그 정유(情由)를 갖추어 보신다면 반드시 너그럽게 용서하여 주실 것입니다."고 하여 인신(人臣)으로서 지존(至尊)의 뜻을 역탐(逆探)하였사오니, 청하옵건대,

사위제서율(詐僞制書律)에 준하면 죄가 참형(斬刑)에 해당하옵고,

윤통(尹統)은 직책이 풍수학(風水學)을 맡았으므로 이장경(李長庚)의 묘가 태실의 근처에 있는 것이 불가한 줄을 알면서도 아뢰지 않았으니,

"재상(災祥) 같은 것이 있음에도 흠천감(欽天監)이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았다."는 율에 의하면 곤장 80대와 도형 2년에 해당되오며,

정광원(鄭廣元)은 윤통(尹統)에게서 이장경(李長庚)의 묘가 태실 근처에 있음이 마땅하지 않다는 말을 듣고도 즉시 계달(啓達)하지 않았으므로, 역시 곤장 80대와 도형 2년에 해당되옵고,

정앙(鄭秧)은 일찍이 말하기를,

"이장경(李長庚)의 무덤은 태실 도국(胎室圖局) 안에 있으므로 심히 이롭지 않다."고 하였다가, 뒤에 친히 가보고 이정녕(李正寧)의 뜻에 아부하여 생략하고 계달 하지 않았사오니,《육전(六典)》의 사람이 난언(亂言)하여, 정리가 심히 해하려고 한 것에 의하면 죄가 참형(斬刑)에 해당되오며,

또 윤통(尹統)은 일찍이 정앙(鄭秧)에게 이르기를,

"아무리 제조(提調)의 시조(始祖)의 묘(墓)라 할 지라도 마땅히 계달 하여야 한다."하니

이정녕(李正寧)이 그 말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 윤통(尹統)을 싫어하였는데, 행대호군(行大護軍) 유순도(庾順道)는 이정녕(李正寧)이 윤통(尹統)을 미워한다는 말로 윤통(尹統)에게 전하였으니, 죄가 불응위(不應爲) 곤장 80대에 해당되옵니다."하니,

임금이 명하여 이정녕(李正寧)은 고신(告身)만 빼앗게 하고, 정앙(鄭秧)은 장(杖) 60대에 도(徒) 1年을 속(贖)바치게 하며, 정광원(鄭廣元)은 3등을 감하고, 유순도(庾順道)와 윤통(尹統)은 모두 용서하여 죄주지 않게 하였다.(제4집 545면)

1448년(세종30) 4월 9일(갑자)

부지돈녕부사(副知敦寧府使) 권총(權聰)이 글을 올린 내용 중에 당시의 성주목사(星州牧使) 유지례(柳之禮)가 태산(胎山)의 나무를 함부로 베었다고 율에 의하여 치죄 하기를 청함.(5집 59면)1450년(문종원년) 9월 8일(기유) 풍수학(風水學)에서 아뢰기를,

"......지금 왕세자(王世子)의 태실(胎室)이 성주(星州)의 여러 대군(大君)들의 태실(胎室) 옆에 기울어져서 우묵한 땅을 흙으로 채운 곳(補土)에 있으니 진실로 옳지 못합니다. 태경(胎經)의 땅을 가리는 법에 의하여 길지를 경기와 하삼도(下三道)에 널리 구하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제6집 280면)

1451년(문종1) 1월 22일(임술)

"......허후(許?)가 안태사(安胎使)로서 경상도 성주(星州)에 가 있었다. 임금이 허후(許?)에게 유시(諭示)하기를, "태봉(胎峯) 근방의 인가(人家)와 토전(土田)의 수와 태봉(胎峯)과 인가(人家)와의 거리의 보(步) 수와 인민(人民)이 옮겨 거주하는 것과 전토(田土)를 개간하는 것이 편하고 편하지 않은 것을 조사하여 오라."

(제6집 349면)1451년(문종1) 2월 18일(정해)

중추원부사(中樞院府使) 박연(朴堧)이 상언(上言) 하기를,

"풍수학설(風水學說)에,"산근(山根)에 너무 가깝지 아니하고 인가에서 멀리 떨어지면 철거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이제 성주(星州) 태봉(胎峯)은 봉하(峯下) 좌액(左腋)에 법림사(法林寺)가 가장 산근(山根) 가까이 있고, 민가(民家)는 한 곳에 모여 살며, 법림사 밑에 있어서 서로 거리가 떨어졌으니, 가축이 밟을 까닭이 없고, 만약 민가에 불이 나는 일이 있을지라도 법림사 뒷봉〔後峯〕을 지난 뒤에야 태봉(胎峯)에 이를 것입니다. 이는 신이 혼자 본 것이며 다른 사람은 본 이가 없습니다. 백성을 해롭게 함은 중한 일인데 성상의 마음을 수고롭게 할까 두려워하여 그대로 있지 못하고 다시 천총(天聰)을 어지럽게 하니, 실로 소신(小臣)의 명예를 요구하는 계책이 아니고 진실로 성상의 덕이 곤궁한 백성에게 미쳐 한 사람이라도 살 곳을 얻지 못하는 자가 없게 하고자 함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마음을 살펴 의심 없이 시행하소서. "하였다. (제6집 360면)

1451년(문종1) 3월 6일(을사)안태사(安胎使) 예조판서(禮曹判書) 허후(許?)가 돌아와서 아뢰기를, "이제 동궁(東宮:단종)의 태실(胎室)을 성주 가야산(星州 伽倻山)에 옮겨 모시고 그 사역(四域:사방 경계)를 정하였는데, 동쪽과 남쪽을 각 9천6백보, 서쪽을 9천5백9십보, 북쪽을 4백70보로 하여 표(標)를 세우고, 또 품관(品官) 이효진(李孝眞) 등 여덟 사람과 백성(百姓) 김도자(金道者) 등 여섯 사람을 정하여 수호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제6집 364면)

1458년(세조4) 7월 8일(계사)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성주(星州) 선석산(禪石山)에 주상(主上)의 태실(胎室)을 봉안(奉安)하였으나, 그러나 여러 대군(大君)과 여러 군(君)과 난신(亂臣) 이유(李瑜: 금성대군)의 태실(胎室)이 그 사이에 섞여서 자리하였고, 또 법림산(法林山)에 노산군(魯山君:단종)의 태실(胎室)이 있으니, 청컨대 여러 대군(大君)과 여러 군(君)의 태실(胎室)을 옮기고, 이유(李瑜)와 노산군(魯山君)의 태실(胎室)은 철거하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제 7집 284면)

1462년(세조8) 8월 17일(기묘) "......예조판서(禮曹判書) 홍윤성(洪允成)이 안태사(安胎使)로 경상도 성주(星州)?곤양(昆陽)을 향해 떠나려고 하였는데...."( 제7집 547면)

1462년(세조8) 8월 22일(갑신)

예조(禮曹)에 전지(傳旨)하기를,

"금후로는 어태(御胎) 및 왕세자(王世子)?원손(元孫)의 태실(胎室)은 모두 석난간(石欄干)을 설치하지 말게 하라."하였다.(제7집 547면)

1462년(세조8) 9월 14일 (을사)

이 먼저 예조에서 아뢰기를,

"어태실(御胎室)이 성주(星州)의 여러 대군(大君)과 여러 군(君)의 태실(胎室) 곁에 있으며, 또한 의물(儀物)도 없으니, 청컨대 장소를 가려서 이안(移安)하고 선왕(先王)의 구례(舊禮)에 의하여 의물을 설치하게 하소서."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고 다만 명하여 표석(標石)을 없애고 비(碑)를 세워 구별하도록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비를 세웠다. 그 글은 이러하였다.

恭惟我 世宗莊憲大王卽位二十一年 命有司卜地藏諸大君之胎于

공유아 세종 장헌 대왕 즉위 이십 일년 명유사 복지 장제 대 군지 태우

星州治北二十里 禪石山之岡各立石標之 主上聖胎亦列其行表曰

성주치 북 이십리 선석산 지 강각 립석 표지 주상 성태 역열기 행표왈

首陽大君諱之室厥今膺景命御瑤圖 已踰八祀禮官?請依 祖宗故

수 양 대군휘지 실궐 금 응경 명어 요도 이유 팔사 예관 극청의 조종고

事別爲相攸移安 御胎不允曰兄弟同胎何必改爲請設 儀物亦 不允

사 별위 상유 이안 어태 불윤왈 형제 동태 하필 개위청설 의물역 불윤

乃命只去標石樹碑之務令省事於?我主上承天體道烈文英武殿下

내명 지거표 석수 비지 무영성 사 어호 아주상 승천 체도 열문영 무전하

聰明叡智謙遜儉約之德莫? 名言然猶卽此一事亦可知其孰謙崇儉

총명예지 겸 손검약 지 덕막 경 명 언연 유즉차 일사 역가 지기 숙겸 숭검

處愈尊德光之至也 而朝鮮億萬年無彊之基益以永孚休者亦於是乎

처 유존 덕광 지지 야 이 조선 억만년 무강 지기 익이 영부 휴자 역어 시호

可占矣銘曰 於赫仙李本支萬葉?華 交暎獨秀曄曄龍飛御天海字

가 점 의명왈 어혁 선이 본지 만엽 체화 교영 독수 엽엽 용비어 천해 자

淸寧巍乎神功制度明顧惟聖胎仍舊不移禮官上請願遵往規謙光不

청 령외 호신 공제도 명고유 성태 잉구 불이예관 상 청원 준왕 규겸광 불

允險德彌昭龜趺卓立億載之標禪山峨峨秘厥英粹天長地久克昌以

윤험 덕미소 구부 탁 립억재지 표 선산 아아비궐 영수천 장지 구극 창이

熾.

공손히 생각하건대, 우리 세종 장헌 대왕(世宗莊憲大王)께서 즉위(卽位)한 21년(1439년)에 유사(有司)에 명하여 땅을 점(占)치게 하고 대군(大君)과 여러 군(君)의 태(胎)를 성주(星州) 북쪽 20리 선석산(禪石山)의 산등성이에 갈무리하게 하고 각각 돌을 세워 이를 표(標)하였는데, 주상(主上:세조)의 성태(聖胎)도 또한 그 가운데 들어 있어 표하여 이르기를,"수양대군(首陽大君)【諱: 柔】의 실(室)"이라 하였다. 지금은 하늘의 명을 받들어 왕위에 오른 지 이미 8년이 지났으므로 예관(禮官)이 급히 조종(祖宗)의 고사(故事)에 의하여 따로 자리를 보아 어태(御胎)를 이안 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고 이르기를,"형제가 태(胎)를 같이 하였는데 어찌 고칠 필요가 있겠는가?"하시고 의물(儀物)을 설치하기를 청하여도 역시 윤허하지 아니하시며 다만 표석을 없애고 비(碑)를 세워 기록할 것을 명하여 힘써 일을 덜게 하셨다. 아 아! 우리 주상께서는 하늘을 받들고 도(道)를 몸 받아서 문(文)에 빛나시고 무(武)에 뛰어나시고, 전하의 총명(聰明) 예지(叡智)하시고 겸손(謙遜) 검약(儉約)한 덕(德)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나, 이 한가지 일을 가지고도 그 겸손(謙遜)하고 검소(儉素)함을 숭상(崇尙)하여 지위가 더욱 높을수록 덕이 빛나는 지극함을 알 수 있으니, 조선 억 만년의 무강(無彊)한 기초가 더욱 길이 아름다울 것을 또한 여기에서도 점칠 수 있을 것이다. 명(銘)에 이르기를,"아 아!빛 나는 오얏나무〔李氏〕, 천 가지 만 잎사귀라. 산매자꽃(?華: 兄弟를 가리키는 말임) 함께 비치는데 홀로 빼어나 밝게 빛난다. 용이 날아 하늘에 오르니 세상이 맑고 편하며, 우뚝한 신공(神功)은 제도를 갖추고 밝게 하였다. 돌아보건대, 성태(聖胎)를 예전대로 두고 옮기지 아니하여 예관(禮官)이 상청(上請)하여 옛 법을 따르기를 원하였으나 겸손하여 윤허하지 않으시니 검소한 덕이 더욱 빛난다. 귀부(龜趺)가 높이 섰으니 억만 년의 표석이라. 선산(禪山)이 높고 높아 그 맑고 아름다움을 간직하였으니, 천지(天地)와 같이 길고 오래도록 창성하고 빛나리라.(제7집 549면)

 

                            형제의 우애(友愛)와 투금강(投金江)의 이야기


[자료참고--위대한조상(성주이씨의 뿌리)농서장학회 1998년발행]
농서군공 자제분 5형재는 남달리 우애가 깊었다.

넸째 자제 개성유수공(휘 억년)께서 벼슬을 버리고 경상남도 위성(함양)으로
들어 가시게 되자 문열공(휘 조년)께서는 한강 나루 건너까지 배웅차 두 분이길을
떠나셨다.그리하여 도중에서 금 두뭉치가 땅에 떨어져 있어 이를 주워서
두 형제분이 한 뭉치씩 나누어 거졌다. 그리고 당시 양천(김포군내)강 나룻터 양화도(현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 구암공원안에 당시 나룻터 현장이 있음)에서 배를
타고 건너게 되었다. 배가 중간에 이르렀을때 아우인 문열공께서 주운 금 뭉치를
강물에 던져 버리는 것이었다.형인 유수공께서 그 연유를 물으니 아우님이 대답
하기를 "저는 평소에 형님을 공경 하는 마음이 깊었는데 황금 뭉치를 주어서 둘이
나누어 가진 순간부터 홀연히 시기 하는 싹이 틈(즉 형이 아니면 내가 모두 가질수 있을 것이라는 욕심)을 느끼게 되었습니다.이는 황금이란 즉 착하지 못한 물건이기
때문으로 생각되어 강물에 던져 버렸습니다."라고 대답 하는 것이 었다.
형님인 유수공께서도 "너의 말은 참이로구나,
나 또한 같은 감정을 느꼈도다."하시며 그 또한 가졌던 황금 뭉치를 강물에 던져

버렸다. 배 안에는 여러 사람이 있었지만 무지한 사람들 뿐이라 누구도 그 연유나

이름을 물어 보는 사람도 없었다 한다.
이 사실은 [고려사 절요],[고려사 열전],[양천읍지],[동국여지승람]등에 실려
전해 지고 있는데 그 연대는 대략 고려 충렬왕 20년(1294년)경으로 유수공의
나이 28세때로서 공이 읊으신 벼슬길 십년 세월이 꿈만 같다는 시의 내용과도
대체적으로 부합된다. 그 이후 이 나루터 강을 투금강(투금강)또는
투금탄(탄,여울)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미담으로 유수공께서는 표창을 받으시게 된것이다.
현재 서울 강서구 가양동 구암공원내에 당시의 나룻터를 나타내는 표지와 함께
공원 안내문 가운데 고려 중말기의 명사인 이조년,이억년 형제간의 고사라고 밝힌 투금탄의 전설과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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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파일 내용 설명--

성주이씨 대종회 보사 연구위원이신 산청의 이인규족장님께서

형제애와투금감이란 자룔르 발췌하여 성주이씨종보에 올려 주신 내용입니다.

 

성주이씨 열녀문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자감판관(군량미를 취급하던 기관의 관리)으로있던 김선경의 처 성주이씨는 수찬(홍문관 관리로 서적등 편찬을 담당) 이휘의 딸로 왜적들 을 피하여 딸을 데리고 피난을 가던 중 불행하게도 관마을을 지나다가 왜적과 마주 치게 되 었다. 이씨는 딸을 앞에껴앉고 짐승과 같이 덤벼드는 왜적과 고함을 지르며 반항 하였지만 여자로 힘이 모자라 적들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왜적들은 이씨를 끌어 안으며 온통 손목을 잡고 젖을 만지는 등 희롱을 하는 것이었다.
이씨는 딸을 위하여 필사적으로 반항하고 있을 때 뜻밖에 젊은 장사가 나타나서 왜적들을 두드려 부시어 이씨는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위기 를 면하게 되었다.
이 젊은이는 당시 주부(종 6품)벼슬을 지니던 하건민 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씨는 백배사례하고 나서 딸을 떼어 맡기고 자기는 왜놈들이 만지었던 젖과 손목을 칼로 잘라 버리고 자결하였다 한다. 왕이 이런 사실을 들으시고 곧 그이 정절을 기르기 위 하여 정려를 내리니 이것이 지금의 정려문이다.
영조 18년(1742)에 정려되었다. 이 정문은 맛배지붕목조기와집이다.

<懸板>
절부 증가선대부호참판겸 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관행봉직랑군자가판과 김선경처증정대인 성주이씨지문 성상즉위 삼년 을축 사월 십이일이건후 사십팔년 임오 오월 오일 중수우오십사년 후을사사 월이십구일 이건 우차평리 통산전 구기 절부 증가선대부호참판겸 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관행봉직랑군자가판과 김선경처증정대인성 주이씨지문 성상즉위 삼년 을축 사월 십이일이건후 사십팔년 임오 오월 오일 중수우오십사년 후을사사 월이십구일 이건 우차평리 통산전 구기

 

김선경의 처 성주 이씨
임진왜란때에 군자감 판관으로 있던 김선경의 처 성주이씨는 딸을 데리고 피난을 하는 도중에 지금 생극면 차평리 앞 섬마을을 지나다가 때아닌 불행으로 왜적을 만나게 되었다.
이씨는 딸을 앞에 안고 어쩔줄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으려니까 왜적은 피에 굶주리고 음욕에 굶주린 듯이리떼처럼 덤벼들어서 이씨를 강제로 끌어안고 젖을 만지고 손목을 잡아 당기며 희롱을 하려하고 있었다. 이씨는 ‘나는 당하더라도 어쩔수 없지만 딸에게 까지 손이 미치면 큰 일’이라고 생각되어 딸을 위하여 죽기를 각오하고 항거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우리 력사 한 분이 나타나 단숨에 왜적을 쳐부수니 왜적은 모두 달아나고 말았다. 이리하여 위급ㅎ산 지경을 면하여 한숨을 돌리게 되었는데 그 용사는 당시의 주부벼슬을 하고 있던 하진민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구사일생으로 위급을 모면한 이씨는 “아니 세상에 당신같은 은인이 어디 있단 말씀이오. 나는 열번 죽어도 아깝지 않거니와 내딸은 주인을 마나 잘 살아야 될 터이니 여보시오, 서방님 제발 내딸을 아내삼아 잘 살아주십시오.”하면서 딸을 떼어 맡기었다. 그리고 자기는 주위 사람이 말릴 틈도 없이 왜놈이 만지게 되었던 젖과 손목을 칼로 잘라 버리고 자살하여 버렸다. 그래서 하주부는 그 처녀를 아내로 맞이하고 이후 아들 딸 잘 낳고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다 한다.

효성 지극한 선비 이 광범(李光範)

선생의 자는 덕인(德仁)이요 호는 원사재(源沙齎)로서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1836년(헌종 2년) 마령면 평지리에서 이 우춘과 여산 송씨 사이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했고 일찌기 실학사상에 눈 떠 후진교육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선생은 어려서 타고난 성품이 소박하고 정직하며 온순하고 관대하여 부모님의 사랑은 물론 동네 어른 들의 귀여움을 독차지 하였다. 부모님을 공경함에 있어서 부모님의 뜻을 받들어 좋아하시는 것을 같이 좋아하고싫어하시는 일은 역시 싫어하고 멀리 하였다.

산에 가서 나물을 뜯어다 드리고 추운 겨울에는 물고기를 잡아 봉양하고,기후가 차면 방과 의복을 따뜻 하게 하는데 모든 정성을 다 바쳤다.부친이 병환이 나니 밤잠을 자지않고 밤새것 간호하는 거싱 하루를 거르지 않았다.그러나 마침내 위독해지자 의원을 모셔왔다." 아버님의 똥맛을 보면 병의 중하고 경함을 알게 되리라"
의원의 말을 듣고 똥맛을 보니 증세가 심히 위급함을 알고 "하느님이시여, 제몸으로 아버님의 명을 대신하게해 주십시오!"간절히 빌었다.그러나 차도가 없자 손가락을 짤라서 흐르는 피를 부친입에 흘러 내리니 수일간 연명을 하는 기적을 이루기도 하였다.결국 부친이 세상을 뜨자, 묘소옆에 움막을 짓고 3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시묘를 하면서 정신을 잃은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모친이 세상 을 뜨자 역시 마찬가지로 정성을 다하여 시묘하였다. 집안 살림이 가난하여 남보다 부지런히 일하며 집안 살림을 이룰 수 있었다.
항상 사람을 대할때는 경(敬)으로 대하였고 집안간의 화목을 유지하는데 정성을 다하였다.
친척중에 가정이 곤란하여 늦게까지 결혼을 못한 사람이 있으면 결혼비용을 대주어 혼사를 치루게 하였다.
나물이나 풀뿌리로 연명하는 이웃들에게는 양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한집같이 살았다.

앞을 내다보는 교육의 필요성을 깨닫고 동네 사람들과 독서당을 지어 원사재라 이름을 짓고 재주는 있으나가난하여 공부를 할 수 없는 사람이 있으면 옷을 주고, 밥을 주고, 학자금을 주어 공부하도록 하였다.
나중에 원사재는 마령국교가 개교할때 학당으로 쓰이게 하였다.

선생의 이러한 행적은 구한말 전라도 각 고을 유림들의 추천을 받아 호남 삼강록(湖南 三綱錄)과
진안 군지에 기록되었으며 1902년 작고한 후 마령 영곡사에 배향되었다.
※ 자료참고 :진안군청 문화관광과 문화예술담당 Tel) 063-430-2321

효부 성주이씨 비각

 달성군 다사읍 매곡리에 소재,
효성이 지극한 성주 이씨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1958년 지방유지들이 뜻을 모아 건립한 비각이다.
효부 성주이씨는 평소 남편인 김영근에게 이르기를
"자식으로 부모를 공양할 책임이 장남, 차남 구별이 있겠습니까?
부모를 모시고 와서 당신은 물고기를 잡고 나무를 하고
저는 베를 짜고 방아 품드는 것을 직분으로 삼으면
부모를 봉양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며
반신불구의 시어머니를 45년간이나 성의를 다하여 섬겼다.
이후 이씨의 효행은 향토인들의 귀감이 되어 전해지고 있

자료출처:이상복 종친님의 성주이씨 쉼터

 

  이억년과 백년마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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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억년(李億年)을 아시나요?

   

 고려 시대에 이억년(李億年), 이조년(李兆年) 두 형제가 길을 가다가 금덩이 두개를 줍게 되고 하나씩 사이좋게 나눠가졌더랍니다. 그런데 배 위에서 동생이 갑자기 자기 몫 금덩이를 강에 던졌고, 그 까닭을 묻자 “금덩이 때문에 그렇게 좋던 형이 미워지게 되어서 그랬다.”고 하였답니다. 형 역시 “네가 없었더라면 두 개의 금덩이가 다 내 것이 되었을 텐데 하는 마음이 나도 생기더구나.” 라고 하면서 이억년도 강물에 자기 몫 금덩이를 던져 버렸답니다.

[고려사] 등에 실려 전해지는 이 얘기는 고려 충렬왕 20년(1294년)경에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이조년의 그 유명한 시조도 기억하시죠?      

          이하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데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양 하여 잠못들어 하노라

 

 성주 이씨인 이 집안의 다섯 형제 이름을 보면, 맏이부터 이백년(李百年), 이천년(李千年), 이만년(李萬年), 이억년(李億年), 이조년(李兆年)으로 숫자가 높아갑니다.  

이 다섯 형제 중 개성 유수 이억년이 벼슬을 버리고 경상남도 함양으로 들어가게 되자, 그의 동생 이조년이 한강 나루 건너까지 배웅 차 두 사람이 길을 떠나다가 위의 일화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백년(첫째), 이억년(넷째) 형제가 함양군 휴천면 문정에 와서 살았고, 지금 함양군 휴천면에는 이백년의 이름에서 유래한 "백연마을", 그가 도정정사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였다는 "도정마을"(문정리)이 있으며, 이억년 묘소가 문정마을 바로 옆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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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 문하마을 옆산에 자리잡은 이억년 부부묘(2006년 보수)

 

문정리 왼편 산비탈에는 소나무에 에워싸인  이억년 선생(호는 요산재 樂山齋)의 묘소에는 2006년에 묘역을 손질하고 묘비를 다시 세웠고, 한글반 한자반의 송덕문을 비석에 새겼는데 그 문장은 1925년에 세웠던 한문 송덕비를 옮긴 것입니다.  

 

혹시 새로 쓰인 비문을 읽고 싶다면:

  

  DSC05829.JPG 樂山齋公은 나라가 어지럽고 사회기 혼란할 때 탁류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고고한 선비정신으로 樂山幽谷에 은거하였는데 공의 성은 李氏요.관향은 星州이며 諱는 億年이요. 자는 仁汝로서 호는 樂山齋라 하였다.공의 시조는 신라에서 宰相에 올랐던 諱 純由로 망국의 절개를 지켜 星州에 은둔하여 살았으며 중흥시조는 諱 純由의 十二世孫인 諱 長庚으로 戶長을 지내면서 덕망이 높았으므로 京山府院君에 追封되었다.京山府院君은 百年 千年 萬年 億年 兆年 五兄弟를 슬하에 두었는데 五兄弟 모두가 晦軒 安谷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충열왕 十一년에 文科及第하여 높은 벼슬길에 이름 날렸고 형제간에 우애가 두터워 億年과 兆年 兄弟가 길에서 주운 금덩이를 漢江에 던진 投金灘 전설이 高麗史 양천읍지에 전한다. 이 道學行義는 儒林鄕約本所와 전국 팔도유사가 흥분감탄한 나머지

이억년의 묘비 高麗處士星州李公之墓                 公의 碑文에 새겨 영원히 보존토록 도모하고자 褒彰完議文을 千九百十九年 회람한 바 있고 현 국정교과서에 등재되어 국민 도의교육에 크게 기여 하고 있으며 公은 兄弟중 넷째로 開城留守를 지내면서 많은 治績을 쌓아오다가 외세의 침입과 간섭이 심해지고 國政이 문란해지자 「十載紅塵夢外事 靑山何處獨掩扉 즉 “十年 벼슬길이 번거롭고 꿈같으니 어디메 靑山을 찾아 홀로 지낼까”라는 時 한수를 남기고 맏형 百年公과 더불어 이곳 엄천계곡으로 들어와 道正精舍를 짓고 孔孟之道를 강론하였으니 비록 風塵世俗을 벗어나 심산유곡에 들어왔지만 碧溪水처럼 맑고 우뚝 선 삶은 이것이 바로 선비의 생활이 아니겠는가 세월이 지나면서 맏형 百年公이 살던 곳을 백년동이라 하고 億年公이 살던 억년터, 거닐던 곳을 億年臺,道正精舍를 지어 강론하던 곳을 도정동이라 이름하였다,淑夫人은 경주이씨로 龍幹의 딸이며 雙墳으로 이곳에 모셨다. 슬하에 아들 台成公은 밀직사사를 지냈고 台文公은 郎中을 지냈으며 사위는 廣平君 李能이다 七百餘年이 지난 오늘 墳墓가 허물어지고 墓碑가 風化되어 대종회에서 뜻을 모아 墓域을 정화하고 이 비를 세운다

=   성염교수의 홈페지에서 퍼온글 =

출처 함양 농업대학

 

경순공주의 출가와 함흥차사 

 고려왕조가 34왕, 475년간(서기 918~1392년)으로 끝나고, 태조 이성계가 이씨왕조를 건설하여 즉위한 지 7년 만에 무인(戊寅, 서기 1392년) 8월에 제1차 왕자의 난(王予亂)이 일어났다.
제 1차 왕자의 난이란 즉 이태조는 제 1왕후인 신의왕후(神驚王后) 한써(韓氏)의 소생으로 방우(芳雨)·방과(芳果 :定宗) ? 방의(芳毅)·방간(芳幹)·방원(芳遠 : 太宗) ? 방연(芳衍)등 6형제가 있었고, 제 2왕후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소생으로 방번(芳番)과 방석(芳碩)의 형제와 딸 경순공주(慶順公主)가 있었다. 태조가 즉위하자 바로 세자 책립의 문제가 일어났다.
이때 배극렴(輩克廉)등은 「평시라면 적자(嫡子)를 세울 것이나, 비상시이므로 개국에 공이 있는 제 5남 방원을 세움이 옳다.」
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에 왕비 한씨는 이미 별세하여 없고. 태조는 계비(繼媤) 강씨의 의향을 중히 여겨 제 7남인 방번을 세우려 하니, 배극렴 등은 그 사람됨이 적당하지 않음을 지적하여 「반드시 강비 소생을 세울 것이라면 제 8남인 방석이 좋다.」
고 하여 이를 세자로 삼게 되었다.
이 처사는 마침내 한씨 소생 왕자들의 불평을 사게 되었고, 특히 제 5남인 방원은 부왕의 창업을 도와서 공로가 클 뿐만 아니라, 야심 또한 큰지라 심중에 불평이 대단하였다.
이러는 중 태조 7년(무인) 8월에 방원은 세자 방석과(제 8낭) 그와 같은 어머니 소생인 방번(제 7남)을 죽이니 그 소생에 오직 살아남은 사람은 딸로 태어난 경순공주 뿐이었다.
공주는 이보다 앞서 흥안군 이제(李濟)와 결혼하여 겨우 목숨을 보전하여 살아남기는 하였으나, 험난한 세파에 몸 둘 곳을 몰라 부왕의 분부를 학수고대(鶴首苦待)하고 있었다.
한편 태조 이성계도 방원(태종)에 대한 증원(增怨)의 감을 누르지 못하고 상심(傷心)을 달랠 길 없어 서울을 떠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제 2왕후 강씨 소생으로 오직 살아남은 일점혈육(-點血肉)인 경순공주를 불러 직접 눈물을 흘리면서 공주의 머리를 깎아 스님이 되게 하고 동대문 밖 청룡사에 가서 있기를 명하였다.
경순공주는 부왕의 명령대로 동대문 밖 청룡사를 찾았다.
이때 청룡사에는 고려 말기 임금인 공민왕의 왕비 혜비(惠妃)가 나라가 망하게 되자 이곳에 와서 스님이 되어 정진하고 있었다.
공주는 청룡사를 당도하여 자신의 전후사정을 자세히 전하니, 혜비는 공주를 반갑게 맞으며 하는 말이 「비구니나 나나 같은 처지구려 ! 왕씨의 나라를 너무도 참혹하게 없애더니, 이제는 또 이렇게 형제끼러 싸우는구려! 나무아미타불.」
하고 측은해 하였다.
공주는 이 말을 듣고 답하여 말하기를, 「혜비마마 ! 부왕의 잘못하신 과보가 이 몸에 왔나 보오이다. 부왕의 업륜(業輸)으로 고통을 당한다면 달게 받겠나이다.」
하고 일어나 합장하였다.
그 말을 듣고 혜비의 대답이 「고마운 말씀이오. 나는 아버지의 지나친 고집으로 궁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오. 이제 누구를 원망하고 무엇을 한탄하겠소. 모두가 우리 스스로의 전생에 지은 업원이오. 이제부터는 서로 도와주고 서로 힘이 되어 살아갑시다.」
하고 공주를 위로하였다.
이렇게 서로의 과보를 뒤돌아보며 지난날을 생각하며 반성하고 참회하는 대화로 시작하여 한평생을 일념으로 수도하는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한편 태조는 제 1차 왕자의 난으로 극심한 상심 끝에 서울을 떠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랑하는 딸마저 속세와 인연을 끊게 하였으니 그 가슴 아픈 일이란 말할 수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종(定宗) 2년(서기 1400년) 1월에 제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또 한번 형제가 서로 싸우고 살육을 거듭하니 즉, 제 4남 방간(芳幹)과 제 5남 방원(芳遠 :太宗)의 싸움으로 마침내 방간이 사로잡혀 귀양갔다가 죽었으니, 태조는 이 동복형제(同腹兄弟)간의 싸움에 더욱 통분을 느끼고, 태종 원년 3월 서울인 개경을 떠나(제 1차 왕자의 난으로 서울을 한양에서 다시 개경으로 옮겼음)한양을 들러 청룡사로 공주를 만나보고 그 길로 금강산을 거쳐 동북방면으로 향하여 안변에서 머무르다가, 다시 양주 소요산(逍遙山)에 별전(別殿)을 두고 소요하다가 마침내 함흥으로 가서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다.
이로부터 저 유명한「함흥차사(咸興差使)」의 비참한 전설을 남게 하고 공주와의 상면도 멀어져 갔다.

 

정도전에게 살해당한 배열부전의 작자 이숭인(李崇仁)

경북 인물열전 (38) 정도전에게 살해당한 배.hwp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8. 慶尙道 星州牧 人物 條]

                                                                                        이  웅  재


 이숭인(李崇仁:1349~1392)은 자를 자안(子安), 호를 도은(陶隱)이라 하고,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흔히 여말(麗末) 3은(三隱)이라고 할 때,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그리고 야은(冶隱) 길재(吉再)를 말하는데, 길재 대신 도은 이숭인을 넣기도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고려 말기의 대학자일 뿐만 아니라, 세세토록 빛나는 충신이기도 한 때문이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숙옹부승(肅雍府丞)을 제수받은 후, 여러 번 옮겨져서 장흥부사(長興府使) 겸 진덕박사(進德博士)가 되었다.

 공민왕이 성균관을 개창(改創)한 뒤 정몽주 등과 함께 학관(學館)을 겸했다. 고려 문사(文士)를 뽑아 명나라에 보낼 때 1등으로 뽑혔으나 나이가 어려 가지 못했다. 나이 25세가 되기 전에 벌써 예의산랑(禮儀散郞), 예문응교(藝文應敎), 문하사인(門下舍人) 등을 역임했다.

 신우(辛禑) 때에 정도전 등과 함께 원나라의 사신을 돌려보낼 것을 청하다가 귀양을 가고 삭직(削職)당했다가 얼마 안 되어 용서받고 다시 성균사성(成均司成)에 기용되어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로 옮겨졌다. 이때 동료들과 함께, “임금은 마땅히 신하가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고, 부지런히 공부하여 성인의 도를 행해야 한다.”고 상소하기도 했다.

 얼마 후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어 정당문학(政堂文學) 정몽주와 함께 실록을 편찬했다. 다시 동지사사(同知司事)가 되었는데, 이인임(李仁任)과 인척이 된다고 해서 통주(通州: 通川)로 귀양을 갔다가 풀려 나와서 이색, 김사안(金士安)과 함께 하정사(賀正使)로 중국엘 다녀와서 예문관 제학(提學)이 되었다. 이때 하륜(河崙) 등과 같이 영흥군(永興君) 환(環)을 변명하다가 무고에 연좌되어 헌사(憲司)에서 극형으로 다스리고자 함에 도망을 쳤는데, 그 아들 차약(次若)을 잡아다가 등에서 피가 흐르도록 매질을 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를 본 이성계(李成桂)가 애써 구원하여 다시 경연(經筵)에 나가게 되었다. 이에 다시 남재(南在), 심인봉(沈仁鳳) 등이 이숭인을 탄핵하였으나, 이번에는 권근(權近)이 구원하는 상소를 올렸다.

 “요새 대성(臺省: 요즘의 감찰기관 즉 검찰이나 감사원)에서 숭인의 죄상을 말했사오나 전하께서는 이를 용서해 주시고 그 벼슬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하온데 의론하는 자들은 더욱 고집하여, ‘숭인이 불충?불효하니 전하께서는 이를 내쫓아 공변된(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공평한) 처사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대체로 숭인이 불효하다고 하는 것은, 그의 어미가 죽은 지 3년 안에 시원(試員)이 되었다고 해서입니다. 하오나 당시에 그의 아비 원구(元具)는 늙고 병들어 목숨이 조석에 달려 있어, 급급히 그 아들이 장시(掌試: 시험을 관장함)하는 영화를 살아서 보고 싶어했고, 또 국가에서는 숭인의 재주를 소중히 여기고 원구의 뜻을 민망하게 여겨서 데려다가 감시(監試)를 맡게 했던 것입니다.…

 또 숭인을 가리켜 불충하다 하는 것은, 그가 영흥군의 진위(眞僞)를 변론하다가 이미 전하의 명을 받았으면 마땅히 스스로 나가 뵈었어야 할 것인데,… 해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 국가가 명나라를 섬겨온 이래로 표전사명(表箋詞命)이 모두 숭인의 손에서 나왔사오며, 공민왕이 상왕의 시호(諡號)를 얻고 습작(襲爵: 작위를 물려받음)을 받은 것도 숭인의 문장의 힘이오며, 세공(歲貢: 해마다 지방에서 나라에 바치던 공물, 여기서는 중국으로 바치던 공물을 가리킴)을 면할 수 있었던 것도 역시 숭인의 힘이었습니다. 또 중국 황제가 그 문장의 아름다움을 칭찬하여 우리나라에 인물이 있다고 한 것도 역시 숭인의 공이었습니다. 숭인은 문장이 간결하고 고고(高古: 세속을 초월하여 고상하고 예스럽다.)해서 가령 중국에 태어났더라도 국가의 사명(詞命: 사신이 외교 무대에서 응대하는 말)은 불가불 이 사람을 시켜 맡게 했을 것입니다. 하온데 이런 것은 살피지 않으시고, 도리어 소인들의 헐뜯는 말을 믿으셔서 감히 대악(大惡)의 죄를 뒤집어 씌우니,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

 이러한 변호가 있었으나 그는 결국 사헌부의 탄핵으로 경산부(京山府)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이초(彛初: 尹彛, 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이색, 권근과 함께 청주(淸州) 옥에 갇혔다가 풀려나와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가 되었으나, 정몽주가 살해되자 같은 무리로 몰려 남평(南平;羅州市)으로 유배되었다. 조선이 개국되자 정도전은 자신의 정치노선을 따르지 않았다 하여 심복 황거정(黃居正)을 시켜 유배지에서 그를 살해하였다.

 저서로는『도은집(陶隱集)』, 작품으로는『동문선(東文選)』제101권에 전하는 사전(史傳) 형식의「배열부전(裴烈婦傳)」이 있다. 그 경개(梗槪: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열부의 성은 배씨요, 이름은 아무[某]인데 15세가 지나서 사족인 이동교(李東郊)에게 출가하여 잘 지내고 있었는데, 경신년 가을 7월에, 경산에 왜적이 쳐들어왔다. 이때에 동교는 합포(合浦)에 있는 원수(元帥)의 막하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고, 적은 열부가 사는 마을로 왔다. 열부가 젖먹이 아들을 안고 달아나니 적은 그를 쫓아 강에 이르렀다. 강물이 한창 불어오르는 판이었으나, 열부는 화를 면하지 못할 줄을 짐작하고 젖먹이 아이를 강둑에 놓아두고 강으로 뛰어 들어 빠져 죽었다. 적이 물러간 뒤에 집안사람들이 그의 시체를 찾아서 장사를 치렀다.’

죽음으로써 정절(貞節)을 지킨 행적(行績)을 기록한 전기라 하겠는데, 그는 끝문장을 다음과 같이 마감하였다.

 “아, 장렬하여라.”

 

출처 http://blog.daum.net/leewj1004/13415674?srchid=BR1htt

 

효성 지극한 선비 이 광범(李光範)

선생의 자는 덕인(德仁)이요 호는 원사재(源沙齎)로서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1836년(헌종 2년) 마령면 평지리에서 이 우춘과 여산 송씨 사이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했고
일찌기 실학사상에 눈 떠 후진교육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선생은 어려서 타고난 성품이 소박하고 정직하며 온순하고 관대하여 부모님의 사랑은 물론 동네 어른 들의
귀여움을 독차지 하였다. 부모님을 공경함에 있어서 부모님의 뜻을 받들어 좋아하시는 것을 같이 좋아하고
싫어하시는 일은 역시 싫어하고 멀리 하였다.

산에 가서 나물을 뜯어다 드리고 추운 겨울에는 물고기를 잡아 봉양하고,기후가 차면 방과 의복을 따뜻 하게
하는데 모든 정성을 다 바쳤다.부친이 병환이 나니 밤잠을 자지않고 밤새것 간호하는 거싱 하루를 거르지
않았다.그러나 마침내 위독해지자 의원을 모셔왔다." 아버님의 똥맛을 보면 병의 중하고 경함을 알게 되리라"
의원의 말을 듣고 똥맛을 보니 증세가 심히 위급함을 알고 "하느님이시여, 제몸으로 아버님의 명을 대신하게
해 주십시오!"간절히 빌었다.그러나 차도가 없자 손가락을 짤라서 흐르는 피를 부친입에 흘러 내리니 수일간
연명을 하는 기적을 이루기도 하였다.결국 부친이 세상을 뜨자, 묘소옆에 움막을 짓고 3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시묘를 하면서 정신을 잃은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모친이 세상 을 뜨자 역시 마찬가지로 정성을
다하여 시묘하였다. 집안 살림이 가난하여 남보다 부지런히 일하며 집안 살림을 이룰 수 있었다.
항상 사람을 대할때는 경(敬)으로 대하였고 집안간의 화목을 유지하는데 정성을 다하였다.
친척중에 가정이 곤란하여 늦게까지 결혼을 못한 사람이 있으면 결혼비용을 대주어 혼사를 치루게 하였다.
나물이나 풀뿌리로 연명하는 이웃들에게는 양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한집같이 살았다.

앞을 내다보는 교육의 필요성을 깨닫고 동네 사람들과 독서당을 지어 원사재라 이름을 짓고 재주는 있으나
가난하여 공부를 할 수 없는 사람이 있으면 옷을 주고, 밥을 주고, 학자금을 주어 공부하도록 하였다.
나중에 원사재는 마령국교가 개교할때 학당으로 쓰이게 하였다.

선생의 이러한 행적은 구한말 전라도 각 고을 유림들의 추천을 받아 호남 삼강록(湖南 三綱錄)과
진안 군지에 기록되었으며 1902년 작고한 후 마령 영곡사에 배향되었다.
※ 자료참고 :진안군청 문화관광과 문화예술담당 Tel) 063-430-2321

  

출처 :성주이씨의 쉼터 원문보기   글쓴이 : 이상복

 

이세간(李世幹)과 의호(義虎)

신곡 3리 백화동에 사는 성주인 이세간은 효자인데 부친 묘에 시묘 중 호랑이가 그를 감싸안아
엄동설한에 동사를 면한 뒤 함께 집에서 살았다. 하루는 호랑이가 없어져 성주땅에서 덫에 걸려
사람들이 잡으려는 것을 구해서 돌아왔다. 이세간이 죽자 호랑이는 먹지 않고 울면서 굶어 죽어
주인 뒤를 따랐다.
뒤에 효자를 모시는
상친사(尙親詞)를 짓고 대문채 벽에 호랑이 화상을 그리고 집 뒤에
의호비(義虎碑)를 세웠다.

☞유천(乳泉)

신곡 3리 상친사(尙親詞) 아래에 있는 샘이다. 효자 이주룡(李周龍)이 네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동생을 길렀는데 배가 고파 몇날을 울고 보채는 동생을 업고 뜰에 나가 통곡했다.
그러자 지진이 일듯 땅이 흔들리며 뜰 아래에 샘물이 솟아나 동생에게 먹였더니 울음을 그치는지라
그 뒤로 울면 그 물을 계속 먹여 동생을 키웠다. 그때부터 이 샘물을 유천이라 불렀다.

☞백화동(百花洞)

신곡 3리 백화동은 아홉집이 사는 작은 마을인데,
효자 이세간과 그의 손자 이주룡이 또한 효자여서 효자동으로 불려지다가
상친사(尙親詞)를 짓고 백가지 화초를 심어 아름답게 가꿔지자 백화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상친사에  이세간(李世幹),이주룡(李周龍)두분을
후손들이 모시고 있으며 그외 성주이씨 시중공파의 여러 선조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을사사화(乙巳士禍)와 화를 당하신 성주이씨 선조님

1545년(명종 원년) 윤원형(尹元衡) 일파 소윤(小尹)이 윤임(尹任) 일파 대윤(大尹)을 몰아내어 사림이 크게 화를 입은 사건이다.

  김안로(金安老)에 의해 정계에서 쫓겨난 문정왕후(文定王后) 측의 세력인 윤원로(尹元老) · 윤원형 형제는 김안로가 실각한 뒤 다시 등용되어 점차 정권을 장악하게 됨으로써 정국은 윤여필(尹汝弼)의 딸인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와 윤지임(尹之任)의 딸인 제2계비 문정왕후의 외척간의 권력투쟁으로 양상이 바뀌었다.

  장경왕후에게 원자(元子) 호(岵)가, 문정왕후에게는 경원대군(慶源大君) 환이 각각 탄생하자 김안로의 실각 이후 정계에 복귀하여 득세한 윤원로 · 윤원형 형제(小尹)는 경원대군으로 왕위를 계승하고자 하여 세자의 외척인 윤임 일파(大尹)와의 사이에 대립과 알력을 빚게 되었다.

  인종 즉위 뒤 정계는 대윤이 득세하였으나 소윤측은 대윤 측에 의해 큰 정치적 박해는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인종의 즉위와 함께 유관(柳灌) · 이언적(李彦迪)등 사림의 명사들이 인종의 신임을 받아 중용되었고, 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에 의해 그 파의 사류(士類)가 많이 등용되어기묘사화 이후 은퇴한 사림들이 다시 정권에 참여하였다.

  또한 정권에 참여하지 못한 일부 사림들은 소윤인 윤원형 일파에 가담함으로써 사림들도 대윤·소윤의 양 세력으로 갈라졌다.

  이 동안 소윤의 공조참판 윤원형이 대윤의 대사헌 송인수(宋麟壽) 등으로부터 탄핵을 받아 계자(階資)를 박탈당하고 윤원로 역시 파직된 사건이 생겨 문정대비 · 소윤 측의 대윤 측에 대한 불만과 함께 문정대비의 인종에 대한 불만으로 발전되었다.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죽고 뒤를 이어 이복동생인 어린 경원대군이 명종이 되자 문정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이에 정국의 형세는 역전되어 조정의 실권은 대윤으로부터 명종의 외척인 소윤으로 넘어갔다.

  명종 즉위 직후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으로 재 등용된 윤원로는 윤임 일파의 세력을 숙청하기 위해 그들이 경원대군을 해치려 하였다고 무고하였으나 영의정 윤인경(尹仁鏡)과 좌의정 유관이 망언을 하고 천친(天親)을 이간한다고 탄핵함으로써 오히려 파직, 해남(海南)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문정대비의 세력을 배경으로 한 소윤 측의 뒤이은 음모는 끈질기게 진행되었다.

  즉 예조참의로 재 등용된 윤원형은 형인 윤원로의 책동이 실패하자 이들 대윤 일파와 개인적인 감정이 있던 중추부지사 정순붕(鄭順朋), 병조판서 이기(李), 호조판서 임백령(林百齡), 공조판서 허자(許磁) 등을 심복으로 하여 윤임이 그의 조카인 봉성군(鳳城君: 중종의 8남)에게 왕위를 옮기도록 획책하고 있다고 무고하였다.

  한편 궁궐 밖으로는 인종이 승하할 당시 윤임이 경원대군의 추대를 원치 않아서 계림군(桂林君: 瑠, 성종의 3남)을 옹립하려 하였는데, 유관 · 유인숙 등이 이에 동조하였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로써 윤임 · 유관 · 유인숙 등은 반역음모죄로 유배되었다가 사사(死賜)되고, 계림군도 음모에 관련되었다는 경기감사 김명윤(金明胤)의 밀고로 주살되었다.

  그 외 윤임의 사위인 이덕응(李德應)의 무고로 이휘(李煇) · 나숙(羅淑) · 나식(羅湜) · 정희등(鄭希登) · 박광우(朴光佑) · 곽순(郭珣) · 이중열(李中悅) · 이문건(李文健) 등 10여 명이 화를 입어 사형 또는 유배되었으며, 무고한 이덕응도 사형되었다.

  을사사화가 끝난 뒤에도 여파는 한동안 계속되어 1547년 9월 문정대비의 수렴청정과 이기 등의 농권을 비방하는 뜻의 벽서가 발견되어 봉성군 · 송인수 등이 사형, 이언적 등 20여 명이 유배당하는 정미사화와, 이듬해 홍문관박사 안명세(安明世)가 을사사화 전후의 시정기(時政記)에 윤임을 찬양하였다 하여 사형되는 등, 을사사화 이래 수년간 윤원형 일파의 음모로 화를 입은 반대파 명사들은 100여 명에 달하였다.    1498년(연산군 4) 이후 약 50년간 관료 간의 대립이 표면화되어 나타난 대옥사(大獄事)는 을사사화로서 마지막이 되었으나, 중앙정계에 대거 진출한 사림세력에 의해 붕당(朋黨)이 형성되었다.

? 을사명현(乙巳明賢) 중 성주이씨 선조님

이문건(李文楗): 1494(성종 25) 11. 28∼1567(명종 22), 자는 자발(子發), 호는 묵재(默齋)·휴수(休?). 조선 중기의 문신. 증조부는 계녕(繼寧), 조부는 숙생(叔生). 승문원 정자(正字) 윤탁(允濯)의 아들이다. 형은 총건(忠楗)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을사사화(乙巳士禍)의 피화인. 일찍이 중형 충건(忠楗)과 더불어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고, 1513년(中宗 8) 중형과 함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스승인 조광조 일파가 화를 입자 옛 친구들과 그 문하생들이 화를 염려하여 감히 조상하는 자가 없었으나, 그의 형제는 조문하고 상례를 다하였다. 이에 남곤(南袞) · 심정(沈貞)의 미움을 받아 1521년 안처겸(安處謙)의 옥사에 연루되어 충건(忠楗)은 청파역(靑坡驛)에 정배되었다가 사사되고, 그는 낙안(樂安)에 유배되었다. 이 일로 인하여 9년 동안이나 과거를 못 보다가 1527년(중종 22) 사면되어 이듬해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에 발탁되었고, 이어서 승문원박사를 거쳐 정언(正言) · 이조좌랑에 이르렀는데, 이때에 전날의 혐의로 대간으로부터 서경(署經)이 거부되었으나, 이후 김안로(金安老)의 협조로 관직생활은 순탄하였다. 1539년 장령(掌令)을 역임하며 관기확립에 힘썼고, 그 뒤 통례원우통례(通禮院右通禮)를 거쳐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 등을 지냈다. 인종이 동궁으로 있을 때 지극히 대우하여 서찰 · 갓끈 · 선화전(宣和殿)의 초자(草字) 등을 내렸다. 그 후 편수관)編修官으로《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편수에 참여, 완성된 후 승지(承旨)에 올랐다. 중종의 국상을 맞아 빈전도감(殯殿都監) 낭관으로서 대사를 무난히 처리하였다. 1545년 인종이 죽었을 때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와 빈전도감집례관(殯殿都監執禮官)으로 명정(銘旌) · 시책(諡冊) · 신주(神主) 등을 썼다. 명종이 즉위한 후 추성보익공신(推誠保翼功臣)에 오르고, 이해 윤원형(尹元衡) 등에 의하여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자 대윤(大尹) 일파로 지목되어 훈적이 삭제되었으며, 조카 이휘(李輝)가 “어진 임금을 선택하여 세워야 한다.”고 한 말로 문초를 받자 이에 연루되어 23년 동안 성주에 유배되었다가 배소(配所)에서 일생을 마쳤다. 청백(淸白)하기로 유명했고, 성품이 근후 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오로지 경사(經史)에 탐닉하고 시문에 힘쓰니, 글씨에 뛰어나 특히 초서(草書)와 해서(楷書)에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특히 주역(周易)을 좋아하였다. 그의 시문은 당대의 사림인 성수침(成守琛) · 이황(李滉) · 조식(曺植) · 이이(李珥) 등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황(李滉) · 조식(曺植) · 이이(李珥) 등 여러 학자들과 응답한 시를 엮은 ≪묵휴창수(默休唱酬)≫가 전해 온다. 부모의 묘소에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직접 써서 세운 ‘한글비’는 유명하고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535∼1567년 사이에 쓴 생활 일기 '묵재일기(默齊日記)'의 낱장 속면마다 ≪설공찬전(薛公瓚傳)≫이 기록돼 있었으며 '설공찬'이란 제목의 필사 상태로 총 l3쪽 4천여자 분량이다.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송시열(宋時烈)이 행장을 썼다.

이염(李焰): 1518(戊寅) ∼ ? 자는 경회(景晦). 숙생(叔生)의 증손, 윤탁(允濯)의 손, 충건(忠楗)의 자. 이휘(李煇)는 종형제, 현배(玄培)의 부. 1544년(甲辰, 중종 39) 별시 문과 병과3. 이조정랑(吏曹正郞), 한림(翰林), 지제교(知製敎) ·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지냈으며,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에 피화(被禍)되어 경흥(慶興)에 귀양 갔으나 영조 때 신원(伸寃)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이조판서(吏曹判書) ·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 춘추관사(春秋館事) · 오위도총부총관(五衛都摠府摠管)에 추증(追贈)되었다.

이휘(李煇): ?∼1545(명종 즉위년).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맹명(孟明). 정랑 홍건(弘健)의 아들이다. 진사시를 거쳐 1543년(중종 38)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가 되었다. 1545년(인종 1)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 · 수찬을 거쳐 정언이 되었다. 이해 명종이 즉위한 뒤 윤원형(尹元衡) · 정순붕(鄭順朋) · 이기(李?) · 임백령(林百齡) 등의 소윤이 을사사화를 일으켰을 때 안세우(安世愚) 등의 무고를 받은 전 주서 이덕응(李德應)이 이휘 · 나숙(羅淑) · 정희등(鄭希登) · 박광우(朴光佑) 등을 끌어들임으로써 이덕응 및 사촌동생 염(?)과 더불어 효수되었다. 1565년(명종 20) 신원(伸寃)되고 복관이 이루어졌다.

이덕응(李德膺): ?∼1545(인종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계윤(季潤). 태종 때의 영의정 직(稷)의 5대손이며, 공즙(公楫)의 아들로 정(挺)에게 입양되었고, 윤임(尹任)의 사위이다.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하고, 1544년(중종 3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주서가 되었다. 이어서 인종이 즉위하자 총애를 받아 측근에서 기사관(記事官)으로 활약하다가 인종이 급사할 때 임종을 지켰다. 명종이 즉위하자 소윤의 윤원형(尹元衡) · 임백령(林百齡) 등이 정세의 전환을 모색하던 중 문정왕후를 움직여 대윤의 윤임(尹任) · 유관(柳灌) · 유인숙(柳仁淑) 등을 처형하고, 이어서 안세우(安世遇)의 밀고로 투옥되었는데, 그는 임백령 등의 위협으로 많은 사람들이 중종의 후궁 소생인 봉성군(鳳城君)을 추대하여 역모를 꾸몄다고 무복(誣服)하여 이휘(李輝) · 나숙(羅淑) 등 10여명이 처형되도록 하였고 자신도 효수되었다.

출처 성주이씨 도은공문중 쉼터 글쓴이 이국성

 

숙혜옹주[淑惠翁主] [?~1464] - 조선 제 3 대 태종대왕의 서 6 녀

 

 

 

●비슬산 용천사(琵瑟山 湧泉寺)와 도은 이숭인

비슬산(해발1083.6m)은 팔공산과 더불어 대구를 대표하는 명산. 산꼭대기에 신선이 거문고를 연주하는 모습의 바위가 있다해서 붙여진 이름만큼 아래서와는 완연히 다른 산정의 모습을 보여주는 특이한 산이기도 하다.

비슬산을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포산(苞山)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고 『달성군지』에서는 비슬이란 말은 범어의 발음을 그대로 음으로 표기한 것이고 비슬의 한자의 뜻이 포(苞)라고 해서 일명 포산(苞山)이라고도 하는데 포산이란 수목에 덮여 있는 산이란 뜻을 가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달성군에서 편찬한 『내고장 전통 가꾸기』(1981년 간행)에 보면 비슬산은 소슬산(所瑟山)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인도의 범어로 부를 때 일컫는 말이며 중국말로는 포산(苞山)이란 뜻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신라시대에 인도의 스님이 우리나라에 놀러 왔다가 이 산을 구경하던 중 비슬(琵瑟)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그네들의 인도식 발음을 그대로 적었기 때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비슬산은 천지가 개벽할 때에 세상이 온통 물바다가 되었는데 비슬산은 높아서 천지가 물이 다 차고도 남은 곳이 있었는데 그 때 남은 바위에 배를 매었다는 배바위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그리고 그 바위의 형상이 마치 비둘기처럼 생겨서 『비들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가 여기에서 비슬산(琵瑟山)이란 명칭이 생겨났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

또『유가사청설내력(瑜伽寺청설내력)이란 책에서는 신라 흥덕왕 원년인 병오년 5월 상한에 도성국사(道成國師)의 문인(門人)인 도의(道義)가 쓴 『유가사사적(瑜伽寺寺蹟)』이란 책에서 산의 모습이 거문고와 같아서 비슬산(悲瑟山)이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일설에 비슬산은 산꼭대기에 있는 바위의 모습이 마치 신선이 거문고를 타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비슬산이라 했다고도 한다.

제곤슬산승사(題昆瑟山僧舍)-이숭인(李崇仁)

비슬산 절에 제하다

俗客驅長道 高僧臥小亭

속객구장도 고승와소정

雲從朝暮白 山自古今靑

운종조모백 산자고금청

往事追松子 羈遊愧地靈

왕사추송자 기유괴지령

殷勤汲澗水 一?煮蔘?  

은근급간수 일국자삼령  

세상 나그네 먼 길 달려 왔는데

노승은 작은 정자에 누워있구나.

구름은 해를 좇아 온종일 흰데

산은 옛과 다름없이 언제나 푸르구나.

솔방울 벗 삼은 지난 일 한적했고

말 몰아 유람가니 지령(地靈)뵐 낫 없어라

은근한 마음으로 골짜기 물 길러다가

한 줌 인감과 복령을 달여나 볼까.

비슬산(琵瑟山)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용천사(湧泉寺)는 의상스님께서 670년(신라 문무왕 10년)에 창건하여 절의 이름을 처음에는 옥천사라 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화엄종 10대 사찰의 하나로 해동 화엄종의 종풍(宗風)을 떨치던 대가람으로 상주하던 스님만 천여명이었으며 큰절에 딸린 부속암자만도 백련암, 청련암, 일련암, 남암, 서암, 내원암, 부도암 외에도 47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전한다. 1267년(고려 원종 8년)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스님이 중창하여 불일사라 하였고 다시 (고려 원종 10년) 경주로 행차한 임금이 일연스님께 기우제를 청하고 친히 용천사란 현판을 내렸는데 이로부터 용천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출처 소중한 공간이 되었........

 

●경순 공주의 출가

 

  조선 태조(1392--1398재위)에게는 8남 1녀가 있었다. 위로 내리 8남을 두었고 막내가 공주로서 온갖 사랑을 독차지했다. 태조는 두 사람의 부인을 두었다. 제1부인은 신의 왕후 한씨였고 제 2부인은 신덕 왕후 강씨였다. 신의 왕후 한씨에게서 이방우, 방과, 방의, 방간, 방원, 방연 등 6형제가 태어났고 신덕 왕후 강씨에게서는 방번, 방석, 경순 공주가 태어났다. 그 가운데 방과가 정종(I398--1400재위)이었고 방원은 태종(1400--1418재위)이 되었다. 그러니까 경순 공주는 태조 이성계의 외동딸이며 제1차 왕자의 난 때 피해를 당하여 몰래 피신, 동대문 밖 창신동에 위치한 청룡사로 출가를 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경순 공주가 단지 난을 피하기 위해 출가했을 뿐 불심이 없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녀는 아버지인 태조의 불심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우바이였다.

 

  태조는 조선의 건국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무학왕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고승들의 도움을 받았고, 또 많은 교류를 하기도 했다. 오대산 상원사에서는 문수동자를 친견하여 그 친견한 모습대로 조성한 것이 문수동자상이라고도 한다. 태조가 즉위하자 곧바로 대두된 것이 태자 책립의 문제였다. 대체로 태자는 맏아들, 즉 적자가 되는 것이 평소 있어 온 전례였으나 태조에게 있어서는 그게 그렇지 않았다. 특히, 배극렴은 개국공신인 다섯째 아들 방원을 태자로 봉하는 것이 옳다고 적극적으로 나섰다. 방원이 없었더라면 태조의 쿠데타는 성공할 수 없었고, 또 이성계 자신도 태조의 자리에 나아갈 수 없었음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태조의 생각은 달랐다. 개국의 공이 방원에게 있었음은 인정을 하면서도 그는 계비인 신덕 왕후 강씨의 소생인 방 번을 태자로 세우고 싶었다. 여기에는 강씨의 입김이 작용하기도 했다.

  한씨는 태조가 즉위할 때 이미 세상을 떠났고 태조가 정을 붙일 곳은 강씨뿐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있어서 자신의 소생을 태자로 옹립해 달라는 말은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방번은 지나치게 똑똑하였으므로 배극렴을 비롯한 신하들은 그가 태자로 옹립되는 데 대해 일말의 불안을 안고 있었다. 신하들은 가급적이면 그네들의 뜻을 순순히 따르는 조금은 멍청한 사람을 내세울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배극렴은 말했다. "전하, 방석이 방번보다는 더 나을 줄 아뢰옵니다. 어차피 강씨의 소생을 태자로 책립하시려 한다면 방번보다는 여러 모로 뛰어난 방석을 택하소서." 이 태조는 배극렴 등의 의견을 따라 방석을 태자로 책립했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한씨 소생의 여섯 왕자들은 내심 칼을 갈고 있었다. 특히 방원은 가끔씩 입에 거품을 물면서까지 태조의 처사에 대한 심한 불만을 토로하곤 했다. 그렇다고 태조의 즉위 초부터 쿠데타를 일으킬 수는 없었다. 방원은 7년간이나 때를 기다리며 준비를 했다. 태조 7년(1398) 8월 마침내 방원은 거사를 일으켜 태조를 몰아내고 왕의 자리에 오르려 했다. 그러나 측근에서 과도기적 시기에는 다른 사람을 앉히는 것이 좋다고 극구 반대하는 바람에 허수아비로 그의 형인 방과를 추대하였다. 그가 곧 정종이다. 이 왕자의 난에서 방원은 강씨의 소생인 방번과 방석을 무참히 도륙했다. 본디 정치란 것이 피도 눈물도 없는 아주 냉정한 것이라지만 방원은 아버지를 몰아내고 형을 허수아비로 앉혔으며 게다가 이복 동생 둘을 죽인 것이다.

 

  그때 왕자의 난을 피하여 청룡사로 출가한 이가 바로 경순 공주였다. 그녀는 일찍이 홍원군 이제와 결흔하여 신혼의 단꿈을 꾸고 있었다. 이때 태조 이성계는 계비의 소생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외동딸 경순 공주를 불러 말했다.

 

  "경순 공주야, 아무래도 세태가 심상치 않구나. 어찌하면 좋 겠느냐? 아무래도 화를 당하기 전에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할 것 같은데 ..."

  아버지의 말을 듣고 있던 경순 공주도 착잡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렇다고 뽀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끼는 공주를 향해 태조는 입을 열었다.

  "어떠냐? 너 출가해 보지 않겠느냐? 애비가 되어 딸에게 출가를 권한다는 게 마음 내키는 일은 아니다만 어찌하겠느냐. 공주, 말을 해보려무나."

  공주가 말했다. "아바마마, 절이란 소녀가 알고 있기로는 불도를 닦아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도량이지 세인의 도피처는 아니라고 봅니다. 저는 도피하는 생각으로는 절대로 출가하지 않겠습니다. 말미를 주십시오."

  "그렇게 하려무나. 한 번 잘 생각해 보고 결정해도 좋을 것이다."

  공주는 자기의 처소로 돌아왔다. 세상이 온통 회색빛인 듯 싶었다. 들녘에서는 오곡이 무르익어 가고 있었지만 그것들이 전혀 홍미롭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녀는 (법화경)을 꺼내 읽었다. 삼계가 화택이라는 비유에 특히 눈길이 갔다. 한참을 뚫어져라 경전을 들여다보던 경순 공주는 드디어 결심을 했다.

 

  (그렇다. 이 세상은 불타는 집과 같다. 나는 이 불타는 집을 빠져 나가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이 불타는 집으로부터 나가도록 해야 한다. 나 경순 공주는 출가하리라. 출가란 불 타는 집을 벗어남이다. 어디로 갈 것인가? 아니 그것은 부왕께 상의하면 된다.)

 

  경순 공주는 부왕 이성계를 찾았다. "아바마마, 소녀는 출가를 결심했습니다. 이 세상은 불타는 집과 같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읽고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아바마마의 뜻으로서가 아니라 소녀 스스로의 뜻으로 출가를 하겠습니다. 세간으로부터 도피하고자 출가함이 아니라 진정으로 불도를 닦아 깨달음을 얻고자 출가하고자 함입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잘 생각했다. 장하구나, 공주야."

  태조는 공주를 데리고 동대문 밖 청룡사를 찾았다. 청룡사에서는 태조와 경순 공주가 온다는 전갈을 받고 그들 부녀를 맞을 준비를 하느라 부산했다. 청룡사에는 고려 말 공민왕의 왕비였던 혜비가 나라가 망하자 이곳에 와서 삭발을 하고 비구니의 길을 걷고 있었다. 혜비는 공주를 맞아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반가움의 눈물이기에 앞서 인간으로서 이 고통스런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의 눈물이기도 했다.

  "공주나 나나 똑같은 처지가 되었구려. 칼로써 잡은 자 칼로 써 망한다더니, 고려를 무참히 도륙한 공주의 형제들이 이젠 부왕을 몰아내고 형제를 죽여 자리를 탐내다니, 이것이 불타는 집이 아니겠소. 하여간 잘 왔구려. 부처님 시봉 잘하고 열심히 정진하오."

  공주는 비구니스님인 혜비의 말을 듣고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렇다고 대답할 특별한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부왕과 형제들이 지은 업이 있다면 그 과보는 제가 받겠습니다. 저는 각오를 단단히 했습니다. 큰스님, 부디 어리석은 저를 이끌어 주십시오. 그리고 앞으로는 스님께서도 혜비라는 이름을 쓰고 있지 않듯 제게서도 공주라는 이름을 거두어 주십시오"

  두 비구니스님은 그로부터 어려운 일이나 쉬운 일이나 슬픈 일이나 기쁜 일이나 늘 함께 하고 함께 풀어가는 좋은 도반이 되었다. 이에 앞서 공주는 태조와 작별할 때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아바마마, 소녀는 이제 출가의 길을 갑니다. 아바마마와 오라버니들이 지은 업보가 행여 있으시다면 제 몸이 다하는 날까지 참회하며 대신 받겠습니다. 아바마마께서도 뜻하지 않게 지어온 업연들을 참회하시면서 사십시오."

  공주의 눈물과 간청을 듣는 태조도 눈물을 삼켰다.

  정종 2년(1400) 1월 제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이는 한씨 소생끼리의 싸움이었다. 제 4남인 방간과 제 5남인 방원과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었는데 결국은 방간이 사로잡혀 귀양을 가고 그곳에서 모진 고문 끝에 죽음을 맞게 되었다.

  태조는 동복 형제간의 싸움에 통분을 느껴 한양의 청공사에 머물고 있는 경순 공주를 만나 보고 함흥으로 가서 두문불출하였다. 여기서 나온 말이 이른바 '함흥차사'였다. 물론 공주가 태조를 만나뵈온 것도 태조가 태종 원년 3월 함흥으로 가기 전 들러서 만났던 것이 마지막이었다

 ●고려시대의 의술이 성주이씨로 연계된 역사....  

고려를 대표하는 최고의 명의(名醫)는 충렬왕 때의 설경성(薛景成)으로 설총(薛聰)의 후손이다. 설경성이 처음에는 의약을 다루는 상약의좌(尙藥醫佐)로 관리의 길에 들어섰으며 충렬왕이 병에 걸릴 때마다 설경성에게서 치료를 받고 효험을 보면서 이름을 날리게 됐다. 당시 원나라 황제 세조는 충렬왕의 장인이기도 했기 때문에 고질병 치료를 위해 고려에서도 명의를 보낼 것을 명했다. 이때 뽑혀간 인물이 설경성이다.

  1294년 31년간 황제의 자리에 있던 세조가 죽고 성종이 그 뒤를 이었다. 성종이 병들자 원나라에서는 또 설경성을 불렀고 이때부터 그는 고려국왕의 어의(御醫)라기보다 원나라 황제의 어의였던 셈이다. 그러면서 고려에서의 관직과 품계도 특진에 특진을 거듭해 찬성사(정2품)에까지 올랐다가 77세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로서는 장수(長壽)였다.

  그의 아들 설문우(薛文遇)는 과거에 급제해 성균관 대사성에 오르며, 설문우는 아들보다는 딸들을 통해 역사적으로 큰 인물들을 길러내게 된다. 그의 딸 하나는 고려말 명신(名臣) 이조년(李兆年·1269~1343년)의 아들 이 포(李 褒)와 결혼해 고려 후반 최고의 권세를 누리게 되는 이인복 이인임 이인미 이인립 이인달 이인민 6형제를 낳았다. 고려 말 정치지형도 설명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인물들이다.

 특히 이인복과 이인임은 대조적이다. 이인복(李仁復·1308~1374년)은 공민왕으로부터 "절로 존경하는 마음이 난다"는 탄복을 들을 만큼 중후한 처신으로 재상의 지위에까지 올랐고 '고려사'에서도 명신(名臣)편에 분류돼 있다. 반면 이인임(李仁任· ?~1388년)은 일반적으로 우왕 때 최고의 권력을 누린 권간(權奸)으로 비판받으며 '고려사'에서도 간신(姦臣)편에 분류돼 있다. 능력 여하를 떠나 이성계 진영에 정면으로 맞선 댓가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인미(李仁美)는 예의판사, 이인립(李仁立)은 밀직사 동지사 진현관 대제학, 이인달(李仁達)은 주부(注簿), 이인민(李仁敏)은 문하평리를 각각 지냈다. 이인달 외에는 5형제 모두 고위직에 올랐던 막강한 집안이었다. 성주이씨가..... 

 조선 세종 때 영의정에 오르게 되는 이 직(李 稷)이 이인민의 아들이다.

 

출처 마나의 왕국을 찿아주세요 글쓴이 미나의 왕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