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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년(李百年)1252~
자는 신여, 호는 묵웅, 시호는 정절, 1285년 문과에 급제, 봉익대부로 밀직사사를 역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이천년(李千年) 1256~
자는 중여,
호는 樂齊(제), 시호는 원효, 1285년 문과에 급제, 봉선대부·전객부령을 지냈으며, 둘째아들 승경이 원나라에 가서 벼슬하여 공을 세우고 귀한신분이 되었으므로 원제가 그에게도 영북등처행·중서참지정사·농서군공에 추봉하였고 고려조에서도 정승에 주증되었다.


이만년(李萬年) 1263∼?
자는 여진, 호는 창고, 시호는 숙헌. 1285년 문과에 급제, 견룡을 거쳐 낭장 겸 중군지후를 역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어 많은 치적을 남겨 시중에 추증되었다.


이억년(李億年) 1266∼?
자는 인여,호는
樂山齋(산재) ·은당·회헌. 안유의 문인. 1285년 문과에 급재 개성유슈를 지내면서 많은 치적을 남겼으며 당시 원나라의 간섭으로 국정이 어지럽게 되자 벼슬을 사양하고 경남 함양군 마천면으로 내려가서 도정정사를 짓고 후세교육에 여생을 바쳤다.


이조년(李兆年) 1269∼?
자는 원로, 호는 매운당·백화헌,시호는 문열 1285년 지사로 문과에 급제, 예빈내급사를 거쳐 지협주(합천군수)
사헌장령/ 벽산에 도형을 지냈으며, 고향에 은거중 심양왕고가 원나라에서 왕위의 찬탈을 음모하자 원나라에 가서 중시성에 그 부당함을 상소했다. 충숙왕이 귀국하자 감찰·장령으로 발탁되고 전리총랑으로 관동지방에 가서 백성을 안무 하고 많은 치적을 샇았다. 이어 군부판서에 승진, 그후 여러차례 추혜왕을 따라 원나라에 내왕했었고 1340년 충혜왕이 복위하자 정당문학을 거쳐 예문관 대제학이 되어 성산군에 봉해졌다.
1341년 왕의 환음을 간하다자 받아들여지지 않으므로 사직, 위에성근익찬경절공신이 되어 벼강에 원형이 되었다


이인기(李麟起) 1272∼?

호는 태재, 1297년 문과에 급제, 평양부윤에 이르는 동안 치적이 많았고 향리에 돌아와 안유의 주자학 정신을 받들어 불교를 배척, 유교발전에 힘썼다.


이여경(李餘慶)
고려때 동지중추원사에 올랐다.


이승경 1290∼1360
자는 중선, 원나라에 들어와 올과에 급제하여 태자첨사가 되었고, 요양성 참지성사로 승진, 많은 공적을 쌓았으므로 원나라 조정서 및 그의 부 천년과 조부 장경에게 농서군공에 추봉하였다.
공민왕 때, 문하시량평장사가 되었고, 1359년 홍건적이 침입하자 도원수가 되어 적을 물리치고, 서경을 회복했다. 그 공으로 충근경절협모위원공신이 되었다.


이태보(李台寶)
자는 덕수. 1354년 문과에 급제.
삼중대광도좌사사를 지냈으며 성산군에 봉해졌다.

이태성(李台成)
고려 때 밀직사사를 지냈다.


이포(李褒) 1287~1373
자는 상가, 시호는 경원, 1323년 문과에 급제, 벽상삼중대광·검교문하시중 겸 판선부사가 되고, 광정대부로서 도첨의평리를 지냈다.
1372년 왕이 친히 그의 진을 그려 둘째아들 수시중 이인임에게 내리면서 오래 소장하도록 당부 했다.


이원구(李元具) 1293∼?

호는 가정. 문과에 급제 대호군·강릉찰방·판태복시사 등을 역임하였고, 재임중 세운 공으로 공민왕때 추성좌명공신이 되고 뒤에 성산군에 봉해졌다.


이영(李英)

황명천호를 지내고 고려말에 명나라에 들어가 군공을 세워 세철령지휘첨사를 지냈다.


이득방(李得芳)
1394년 문과에 급제, 태종 때 좌명공신으로 대광보국·예조판서·예문관 직제학·상호군 등을 지냈다.


이인복(李仁復) 1308∼1374
고려의 문신. 자는 극례, 호는 초은, 시호는 문충, 성산궁 조년의 손자, 검교시중 포의 아들, 백이정에게 수학 주자학에 밝았다.
1326년 19세로 문과에 급재, 복주 사록·예문수찬을 지내고 지제교으로 1342년 원나라에 가서 제과에 급제, 대령로 금주판관의 벼슬을 받고 돌아와 기거주가 되시었다.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하자 우대언을 거쳐 밀직제학이 되어 서연에서 진강, 이어 삼사좌사에 올라 원나라 정동해성도사가 되었다. 1352년 조일신의 난을 토평하는데 공을세웠고, 1354년 정당문학 겸 감찰대부가 되었고, 성산군에 봉해졌으며, 1356년 사은사로 원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고금록]을 편수했다.
1359년 수사공·상서 좌복야·어사대부에 올랐으며, 참지중서정사, 판개성부사·첨의평리, 삼사우사를 역임했다.
1364년 찬성사에 올라 단성좌리공신이 되고, 이 해 원나라에 사신으로 사서 공민왕이 복위된 것을 사례하고 돌아와 왕에게 신돈을 멀리 하도록 간했다가 한때 과직 당했다.
후에 흥안부원군에 진봉, 이어 판삼사사를 거쳐 1371년 감춘추관사로 이색과 함께 [금경록]을 중수하고. 1373년 검교시중에 이르렀다.
우왕때 충정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이인임(李仁任) ?∼1388
고려의 권신. 시호는 황무. 성산군 조년의 손자, 포의 아들. 음보로 전객시승이 되고 뒤에 전법총랑을 거쳐 공민왕 초 좌부승선이 되고, 1359년 홍건적의 친입때 성경존무사로서 공을 세워2등공신이 되었으며, 홍건적의 2차 침입 때에 개경을 수복하여 1등공신에 올랐다.
1362년 판개성부사에서 서북면 도지휘사가 되고. 이어 첨의평리가 되었다.
1364년 최유등이 덕흥군을 받들고 고려에 쳐들어 오자 서북면 순문사 겸 평양윤으로 이를 퇴격했다.
이듬해 삼사우사·도첨의 찬성사를 지내고 순성동덕보리공신의 호를 받았다.
1368년 좌시중을 거쳐 이듬해 수문하시중이 되고, 이 해에 서북면 도통사가 되어 원나라의 동녕부를 토벌,광평부원군에 봉해졌다.
1374년 공민왕이 살해되어 후사 문제가 일어나자 태후 경복흥등의 주장을 꺽고 우왕을 추대 했으며, 그후 왕의 신임으로 정권을 잡고 친원정책을 견지하였다.


이인미(李仁美)
고려시대에 예의판서에 올랐다.


이인립(李仁立)

자는 횡성, 1354년 문과에 급제, 밀직사사·진현관 대제학·서경 부원수를 역임하다가 국정이 어지러워지자 고향으로 돌아와 국운의 종말을 슬퍼하며 음영으로 유유자적 하였다.


이인민 (李仁敏)1360~?
고려의 문신. 성산군 조년의 손자, 검교시중 포의 아들. 1383년 정당문학으로 동지공거가 되어 과시를 관장, 뒤에 문하평리에 이르렀다.
1390년 이초의 옥에 연루, 이색·권근·이숭인등과 청주옥에 갇혔다가 이듬해 국대비 왕씨의 생일날에 특사되었다.


이비 (李?)
초명은 규, 자는 해진. 1411년 문과에 급제, 여러 괸직을 거쳐 예문관 제학으로 지낸 후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이환(李?)
자는 공서,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호군에 오랐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불복하고 두문동으로 들어 갔다.


이존성(李存性) ?∼1388
고려의 문신. 인임의 종손. 서경 부윤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그후 지신사·응양군 상호군·제조정방·삼사우사를 역임, 이인임이 제거될 때 주살 되었다.


이숭인(李崇仁)1349∼1392
고려·조선의 문신·학자. 삼은의 한 사람, 자는 자안, 호는 도은, 성산군 원구의 아들, 공민왕때 문광 급제, 숙옹부승이 되고, 이어 장흥고사로 지덕박사를 겸하였고 명나라 과거에 응시할 고려의 문사를 뽑을 때 수석으로 뽑혔으나 나이가 25세에 미치지 못했으므로 나가지 못했다.
에의 산랑·예문응교·문하사인을 역임, 공민왕이 성균관을 개창한 뒤 정몽주·김구용·박의중 등과 함께학관을 겸했다.
우왕때 전리 총랑이 되어 김구용·정도전 등과 함께 복원의 사신을 돌려보낼 것을 청하다가 한때 유배, 그후 성균 사성으로 거쳐 밀직제학으로 정당문학 정몽주와 함께 실록을 편수하고, 1386년 문하평리 김주와 함께 저조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간신 이인임의 인족이라 하여 통주에 유배되었다가 풀려서 첨서밀직사사가 되었다.
1389년 이색·김 과 재차명나라에 정조사로 다녀와 예문관 제학에 오르고, 박천상·하윤 등과 함께 영흥군 환의 진위를 가리다가 무고로 극형을 받게 되었으나, 시중 이성계·이임 등에 의해 풀려났다.
이어 서연관이 되었으나, 수차 사헌부의 탄핵으로 경산부에 유배되었다. 1390년 이초의 옥사에 연루되어 이색·권근과 함께 청주의 옥에 갇혔다가 풀려나오고, 지밀직사사·동지춘추관사가 되었다.
1392년 정몽주가 살해되자그의 일당으로 몰려 유배, 조선이 개국되자 정도전이 보낸 그의 심복 황거정에게 배소에서 살해되었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특히 시문에 이름이 높았다. 원나라와 명나라와의 복잡한 국제관계의 외교문서를 맏아 썼으며, 그의 문장은 명나라 태조를 탄복시켰다.

이사분(李思芬)1353~1441
시중공 만년의 증손 이조판서 덕융의 아드님으로 출생, 다섯 번의 고을수령과 개성유수 및 좌군도총제 역임하였다.


이수(李穗)
호는 정재. 조선때 동지총제를 지냈다.


이제(李濟)1365∼1398

자는 자안, 시호는 경무, 이성계의 삼녀 경순공주와 결혼하였으며, 1392년 조선건국때 이성계를 도와 공을세워 순충좌명개국공신 1등으로 홍안군에 봉해지고 의홍친군위절도사 겸 지서경연사가 되었으며 1402년 우군절제사에 오랐다.


이발(李潑)1379∼1450
자는 거원, 시호는 평간. 태종때 문과에 그베, 여러관직을 거쳐 1419년 경상감사를 지냈으며, 후에 이조 판서·병조판서를 역임했다.


이사후(李師厚) 1382∼1388(우왕14년)
영의정 직의 맏아들, 시호는 문경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판윤에 올랐다.

이사원(李思元)
문경공 직의 둘째 아드님으로 출생, 세종20년에 사헌부 장령으로 시작 동지중추원부사를 역임하였다.

 

이사순(李思純) ? ~1455
문경공 직의 셋째 아드님으로 출생, 세종10년 사헌부 지평으로 출발 예조참판.공조참판을 역임. 풍수지리에 능통하였다.


이직(李稷) 1362∼1431
고려·조선의 문신. 자는 우정, 호는 현재. 시호는 문경, 평리 인민의 아들. 1377년 16세로 문과에 급제, 경순부 주부에 보직되고. 1386년 밀직사 우부대언을 거쳐 공양왕때에 예문재학을 지냈다.
1392년 이성계를 도와 조선객국에 공헌, 지신사에 올라 개국공신 3등이 되고 성산군에 봉해졌다.
이듬해 도승지·중추원 학사로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7년 대사헌을 지내고, 1399년 중추원사로 서북면도순문찰리사를 겸임하여 왜구의 침입을 막았으며, 이듬해 참찬문하부사에 올랐고 이어서 삼사좌사·지의정부사를 역임했다. 이해 제2차 왕자의 난에 방원을 도와 1401년 좌명공신이 되고,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대제학을 거쳐1430년 판사부평부사로서 왕명으로 주자소를 설치, 동활자인 계미자를 만들었으며, 1405년 6조의 편제가 정해지자 처음으로 이조판서가 되었다.
1407년 동북면 도순문찰리사·영흥부윤이 되었다가 이어 찬성사로서 대사헌을 겸임, 이듬해 가시 이조판서로 판의용순금사사를 겸임, 1410년 천릉도감 제조로서 덕릉·안릉 등의 함흥에 옮겼다.
1411년 성산부원군으로 지봉되고, 1414년 우의정에 승진, 진하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황희와 함께 충녕대군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다가 성주에 안치되었다.
1422년 풀려나와 1424년 영의정에 오르고, 이해, 등극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1426년 좌의정에 전직, 이듬해에 사직했다.
성주의 안봉서원에 제향되었다.


이견기(李堅基) 1384∼1455
조선의 문신. 자는 필휴, 호는 남정, 시호는 안성, 총제수의 아들. 1419년 중광문과에 급제, 우정언·지평·지의·우승지·호조참판·충청도 관찰사·예문과제학·판한성부사 등을 지내고, 1446년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후 호조와 이조의 판서를 거쳐 우참찬이 되어 1455년 치사 했다가 다시 중추원사가 되었다.


이사형(李師 ) 1393∼?
자는 무백, 호는 감당, 시호는 충렬.
문경공 직의 넷째 아드님으로 출생,문과에 급제하여 숭록대부·이조판서를 거쳐 홍문관 대제학에 이르렀고 나라에 공을 세워 간성군에 봉해졌다.


이숭문(李崇文)
조선때 이조판서를 지냈다.


이지원(李智源)
자는 병기, 호는 대은. 단종때 이조 참판을 지냈으며, 단종이 폐위되자 연봉산에 들어가은거 했다.


이영분(李永賁)
자는 자례. 1488년 창원대도호 겸 경상수군·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이혼(李 )
자는 홍일. 조선때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역임했다.


이문흥(李文興) 1415∼1495
자는 질보, 호는 나암. 1462년 사미시에 합격, 1469년 문과에 급제, 여러청용직을 거쳐 대사성에 오르기까지 학직만 맡아 많은인재를 길러내어 선비사회의 존경을 받았다.


이정녕(李正寧)1411∼1455  
조선의 문신. 자는 단보, 시호는 장절. 좌의정 직의 손자. 태종의 딸 숙혜옹주와 결혼하여 성원군에 봉해졌으며, 1433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에 돌아왔다.
1443년 풍수학 제조·성균관직강으로 있을 때 성주에 원손의 태실을 두기 위하여 장경묘를 딴곳으로 이장해야한다는 조정의 결정을 무시한 죄로 이듬해 삭직 당했다.
1477년 의금부 제조·충청도관찰사를 지냈고 1449년 숭덕대부에 오랐다.


이지활(李智活) 1434∼?
조서의 충신. 자는 망기, 호는 고은, 시호는 문정, 이조판서 비의 아들. 사미시에 합격한후 우봉현감이 되었으나1455년 단종이 왕위를 뺏기자 관직을 버리고 거창의 박유산중에 은둔, 단종을 그리는 애절한 시를 읊으며 지내다가 단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산정이 올라가 술을 마시고 통곡하다 세상을 달리하셨다.
1800년 유생들이 상소로 정문이 세워졌다.


이집(李?) 1438∼1509
조선의 문신, 자는 화숙, 시호는 공숙, 성원위 전녕의 아들, 태종의 외손자. 1479년 내섬시 부정으로 별시문과에 을과에 급제, 집의·
충청도 및 경상도관찰사,전라도 관찰사·이조참의·부제학·대사간·이조 판서를 역임하고 1504 갑자사화에 파직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우찬성에 이르렀다.


이의(李誼) 1439∼1498
자는 인로, 호는 추강, 시호는 순정. 1469년 사마시에 합격, 1474년 지평·장령·집예를 거쳐 동부승지·부제학에 올랐다. 그후 황해 감사·경상 감사를 역임 하였으며 대사헌 겸 세자사부를 지냈다.


이전(李詮) 1450
합천 군수를 지내고 1460년 사헌부 지평을 거쳐, 1481년 남양부사를 지냈으며 후에 통정재대부돈령부도정을 역임 하였다.


이문재(李文載)
자는 은백. 조선때 병조 판서를 지냈다.


이자상(李自商)
조선시대에 세자사부를 지냈다.


이자견(李自堅) 1454∼1529
자는 자고. 1486년 식년문과에 급제, 정언·지평·형조좌랑·강원감사·대사간 등을 거쳐 경기감사로 있을 때 모친상을 당하여 여막에서 3년 시묘응 하다가 병을 얻어 위독하니 왕이 약을 특사 하였다. 그의 나이 70에 사임을 청했으나 왕이 불허하고 자헌대부·호조판서를 임명하였다.


이자건(李自建) 1455∼1518
자는 건지, 시호는 공간, 1483년 시년문광 을과로 급제, 선전과과 승문원의 벼슬을 겸직하였으며, 그후정언·지평·예조정랑을 거쳐 1504년 대사헌·황해도 관찰사·한성부 관윤 등을 역임하고 좌참찬에 이르렀다.


이운거(李云 ) 1455∼1525
조선의 문신 자는 술조, 우찬성 집의 아들. 사마시에 합격, 1488년 왕이 선농단에 제사를 지낼 때 제헌관의 찬자가 되었다.
1506년 제주목사를 거쳐 중종때 수원·남원·남양·연안·안동 등의 부사, 광주·진주의 목사등을 역임하는 동안 모두 치적을 올린 뒤 동지돈령부사가 되었다.


이지번(李之蕃) 1469∼1522
자는 성중, 호는 송계, 현감 문현의 아들.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 당대의 명사인 표연말·유호인·최한후 등의 학작들과 교유했다.
1492년 유일로 천거되어 무장 현감에 부임, 선정을 베풀어 수안군수에 승진했으나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벼슬을 단념, 고향에 돌아가 학문에 전심했다.


이윤탁(李允濯)
자는 탁지, 150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를 지냈다. 뒤에 통훈대부·홍문관 직제학 ·지제교 겸 경연시강관·춘추관 편수관에 추증되었다.


이자화(李自華) ?∼1520
조선의 문신, 자는 실이 , 주의 아들. 1496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 해 거열로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추승을 반대하여 금산에 유배되었다.
뒤에 풀려나와 1500년 박사에 기용되고 수찬을 거쳐,1504년 갑자사화 때 교리로서 폐비윤씨에 대한 시호 및 능호의 추상에 반대하여 아산에 부처되었다.
이해 다시 앞서 윤씨의 추숭을 반대한 일로 국문을 받고 장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전한·부재학을 거쳐 예조한서에 이르렀다.


이충건(李忠建) 1491∼1521
조선의 문신. 자는 자안. 로는 눌재·목수, 영의정 직의 현손, 정자 윤탁의 아들. 조광조의 문인. 1510년 진사가되고, 1515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1519년 이조정랑을서 기묘사화로 파직되고, 1521년 안처겸의 옥사에 연루, 장살되었다.


이성량(李成樑)  1526∼1615
자는 여기, 호는 은성. 1567년 부총병협수요양에 오르고, 1571년 도독첨사를 거쳐태자태보가 되고 봉천익위선력무신령원백에 봉해졌다.


이창(李昌) 1519~1592
자는 창지, 호는 추강. 1549년 문과에 급제,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합천군수등을 거쳐1562년 대구 부사, 1582년 제용감 첨정·예빈시부정·봉상시 첨정·군자감정등을 역임했다.


이성(李珹)
자는 백영. 1562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전생서 봉사가 되었다. 현종때 가선대부·이조참판뎜 도지의금부사·오위도총관에 추증되었다.


이문건 1494∼1567
조선의 문신. 자는 자발, 호는 묵재·휴암 또는 휴슈, 정자 윤탁의 악들. 조광조의 문인. 1513년 사마시에 합격, 1528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정원 주서로 보직되고, 장령·우통례·승무원 판교 등을 거쳐 승지에 이르렀다.
1545년 을시사화 때 대윤일파로 지목되어 성주에 유배, 23년 동안 배소에 있다가 죽었다.
글씨에 뛰어나 특히 초서와 해서에 일가를 이루었다.
괴산의 화암서원에 제향하였다.


이항 (李恒)1499∼1576
조선의 학자. 자는 항지, 호는 일재, 시호는 문경. 일찍부터 무예를 익히다가 30세에 이르러 학문을 시작, 바여의 문하에서 수학, 후에 어머니와 함께 태인에 이사하여 농업에 종사하며 성리학에 전심, 이기일원론을 발전시킴으로서 조선 중기의 대학자가 되었다.
1566년 조정에서 학행이 띄어난 선비를 뽑을 때 수석으로 천거되어 의영고령이 되고, 이어 임천군수에 임명되었으나 잘못 다스린다는 비방을 듣고 사직했다.
선조 초 의빈부 경력·선공감 부정을 잠시 지냈으며, 1574년 장령이 되고, 그후 장악원정에 올라서 병으로 사직했다.
이조 판서에 추증, 태인의 남고서원에 제향되었다.


이언충(李彦忠) 1523∼1282
자는 사경. 1546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함경도 어살 나아가 모든 일을 민첩하고 명백하게 처리하여 도민이 송덕비를 세웠다. 1608년 자헌대부 이조판서·홍문·예문대제학·오위도총관·세자좌빈객에 추증되었다.


이염(李 )
자는 경희. 1544년 문과에 급제, 제제교·춘추관 기주관을 지냈으며, 영조 때 가선대부로 이조판서·동지의금부·춘추관사·오위도총부 총관에 추종 되었다.


이조(李晁) 1530∼1580
자는 경승, 호는 동곡. 1568년 문과에 급제, 1573년 학정으로서 동래 호송관으로 나갔으며, 1574년 전적을 거쳐 전중감찰어사가 되어 어떤 자리고 잘못이 있을때는 직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규탄하니 궐내의 질서가 정연해지고 엄숙해졌다. 그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공조 정항·해미현감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성리학강론에 힘썼다.


이담(李曇)
자는 담지, 호는 만오, 조선 때 만호를 지냈다.


이산우(李山佑)
자는 인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이끌고 왜적과 사워 전공을 세워 사복이 되고, 공신록에 오랐다.


이여송(李如松) 1549∼1598
자는 자무, 호는 앙성, 참지정사 천년의 8세손, 여원백 성량의 아들. 명나라에서 출생하여 진사에 오르고 제독을 지냈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명황의 명을 받아 원군 4만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와 평양성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여 전세를 역전시키는제 큰공을 세웠다.


이원배(李元培)
자는 무질. 문과에 급제, 보직랑·사재가첨정을 지냈다.


이일장(李日章)

자는 해숙, 호는 해자. 1591년 성균관진사에 합격하였으며 경상도 도사·전중어사를 거쳐 통훈대부·고성 현감을 역임하였다.


이현배(李玄培)
자는 선길. 1562년 별시문과에 급제, 성주목사·경주부윤·홍문관교리·통훈대부·승정원 도승지를 역임하였다.


이구(李構) 1484~1536
조선의 학자. 자는 성지, 호는 연경당, 세준의 아들. 용궁출신. 1510년 진사가 되고, 151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이 되었으나 이해 기묘사화로 투옥, 하루 만에 석방되었다. 향약을 실시함녀 도둑이 없어진다고 건의 이를 실시케 했는데 도둑이 여전이 횡행하고 있다하여 1521년 파지되어 낙향했다.
직제학에 추증. 용궁의 기천서원에 제향되었다.


이덕응(李德膺) ?∼1545
조선의 문신. 자는 계윤, 공접의 아들. 1544년 진사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기사관·주서를 역임했다. 대윤 윤임의 사위로서 이듬해 을사사화 때, 소윤의 꾐으로 윤임이 봉성군을 추대하려 한다고 고변하여 사화가 확대되었으나 결국 자신도 사형되었다.


이휘(李煇) ?∼1545
조선의 문신. 자는 명맹, 정량 홍건의 아들. 1543년 진사로써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자가 되고, 1545년 경연 검토관을 거쳐 부수찬이 되었다.
이해 명종이 즉위한 후 윤형원·이기·정순붕·임백령 등 소윤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안세우 등의 무고로 군기시 앞에서 처형, 수효당했다.
1565년 신원되고 복관되었다.